성장하는 교회는 새신자,혹은 초신자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으로는 믿음이 연약한 신자를 중심한 교회이다. 그러나 반대로 오래된 신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잘못하면 굳어진 교회가 되기가 쉽다. 다시 말하면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는 잘못하면 오랜 교제를 가진 신자들끼리만 뭉쳐지기 쉬워서 자기들만의 공동체가 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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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얽히고 설키어 서로 사업관계 사돈관계로까지 맺어진 교회가 됨으로 신앙 공동체를 넘어서서 생활 공동체가 된 교회로 굳어지므로 새로운 신자 전혀 설 여지가 없는 교회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들 스스로의 생각에는 자기 교회야말로 사랑으로 뭉쳐진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기 쉬우나 그 교회를 처음 출석하는 새신자들이나 처음 방문하는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곁을 허용하지 않는, 사랑이 메마른 교회로 비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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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교회는 새로운 가지가 움트지 않는 고목(枯木)과 같은 교회인 것이다. 모든 열매는 새 순,새 가지에서 맺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그런 교회는 열매 없는 가지와 같은 교회로서 잘못하면 주님에게서 버림받을지 모르는 것이다. 요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새신자들이 와서 깃들므로 양육을 받아 마침내 그들이 많은 열매를 맺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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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위렌 (Rick Warren) 목사가 쓴 「새들백 교회」라는 저서에는 이런 글이 담기어 있다. <나는 교인들이 서로가 사랑하며 훌륭한 교제를 나누고 있지만 그래도 죽어 가고 있는 교회를 많이 알고 있다. 모든 사랑이 내부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끼어들 공간이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다. 그들이 불신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불신자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교인은 자신의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교회가 사랑하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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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농촌 교회에서, 지금 시무하는 교회로 청빙을 받고 부임한 때는 1975년 말,35세 때로 매사에 혈기를 앞세우기 일쑤였던 때였다. 부임하고 보니 교회가 너무나 한심한 상태였다. 30평의 낡은 교회당에 장년 집회수는 50여명인 교회로 노인 목사께서 목회하신 탓인지 전혀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기도회나 구역예배도 없는 언제나 문을 잠그고 있는 교회였다. 교회가 전혀 성장되지 못한 채 7년 동안 언제나 그 숫자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런 관계인지 그 50여명의 교인들끼리는 형제 이상의 깊은 정으로 뭉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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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계(契)를 한다고 중국 음식점에서 열심히 모이고, 서로 간의 경조사에는 거리에 관계없이 거의 다 모일 정도로 인정으로 뭉쳐 있었다. 바로 그러한 점이 교회 성장의 큰 저해 요소였다. 필자는 부임하자마자, 정상적인 교회, 그리고 성장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전력하기 시작했다.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언제라도 기도할 수 있도록 교회당의 문을 열어 놓았으며, 구역예배와 금요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소수의 청년들이지만 모아 놓고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젊은 목회자가 열심을 내니 등록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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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하게도 주일 집회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기존 교인들의 굳어진 마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일날에도 어느 방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신세타령하고 웃고 떠드는 모습이 전부일 뿐, 새신자가 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새신자들이 빙빙 돌다가 정착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기존 교인들의 저 낡은 틀을 부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일날 설교를 통해 기존 교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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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7년 동안 굳어진 틀이 쉽게 부서지겠는가? 오히려 설교 때마다 필자가 던진 설교의 공이 다시 내게로 튀어오고 있다는 냉담한 느낌이 들면서 점점 지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게 되었다. 필자는 심한 허탈감에 싸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닫기를 ‘예수님도 굳어진 바리새인들을 고치지 못하셨는데 나 같은 무능한 것이 어찌 고치랴?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 부터는 기존 교인들을 고치려고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 새신자나 청년들을 중심해서 설교하리라.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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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기존 교인들의 귀에 충족할 정도의 설교를 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들 중에는 길선주나 김익두 목사, 혹은 이성봉이나 한경직 목사 등, 유명한 분들의 설교를 많이 들였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명설교로 길들여진 귀를 미숙하기 짝이 없는 필자가 무슨 수로 즐겁게 할 수 있으랴는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그 때부터 새신자를 중심해서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기 시작했다. 설교도 새신자들이 한 마디라도 듣게 하기 위해 예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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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놀랍게도 새신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4년 안에 장년 집회수가 300명이 넘어서기 시작하고 그 새신자들의 뜨거운 열심에 의해서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 들고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었다. 그랬더니 굳어졌다고 생각했던 기존 교인들도 변화되기 시작함으로 교회 부흥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했던 것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새신자들의 열심히 오래 묵은 교인들의 굳어짐을 삼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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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예수님과 바울의 목회도 새신자를 중심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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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목회 방법도 새신자나 초신자, 혹은 고난에 처해 있는 자들을 중심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첫 설교를 하시면서 그분의 사역의 내용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선포하시기 위해서 이사야서를 펴서 읽으셨다. 눅4:18-19 “주의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하심으로 그 분의 목회 대상자들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임을 분명히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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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미에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자들 중에는 진리를 찾고자 왔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안위(安慰)를 찾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것이 문둥병이든, 눈 먼 자이든, 굽어진 등이든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 그들의 진실한 필요가 채워진 다음에야 그들의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이다.
이는 한 마디로 새신자들,초신자들을 중심으로 목회하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틈틈이 열심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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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목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언제나 새신자나 믿음이 약한 신자들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가 가장 많이 쓰던 말 중에 하나가 ‘교회의 덕’이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가 간음 문제, 소송 문제, 우상제물 문제, 은사 문제, 특히 방언의 문제로 복잡해졌을 때 교회의 제반 문제가 덕과 믿음이 약한 선자들과 불신자들의 전도에 있어서 장애 요소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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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제물은 각자 믿음의 양심에 따라 먹든지,먹지 않든지 할 수 있으나 만약에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 앞에서 우상제물을 먹음으로 어린 신자들이 실족함에 대해서 경고하기를,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하면서 고전 8:13에서 자기의 입장을 단호히 밝히기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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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공식 예배석상에서 방언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라 했다. 바울은 불신자나 어린 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가 성장하려면 새신자나 초신자를 중심으로 목회해야 한다. 적어도 주일날 아침 설교만은 새신자나 초신자들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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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오래 묵은 신자들의 귀에만 만족을 주어 ‘우리목사님의 설교는 참으로 깊이가 있다’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만 집중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새신자들이 오지 않을 것이요, 교회의 외적(外的)인 성장은 멈출 것이 뻔하다. 설교 30분으로 오래된 신자들이나 처음 나온 신자들 전부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다. 총 한 자루로 두 개의 과녁을 겨냥하는 것은 좌절만 가져다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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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을 목회하면서 신앙잡지 「풀핏(Pulpit)」까지 발행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는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 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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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늘 공간의 문제가 있다. 죽어 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 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 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 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하다. 죽어 가는 교회는 탐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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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 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 위에 운행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 가는 교회는 편안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활발히 전도하고, 죽어가는 점점 굳어가 석회화된다.> 그렇다면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가? 아니면, 죽어가는 교회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살아 있는 것도 같고 죽어 있는 것도 같은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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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는 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신자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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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의 많은 곳에서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을 잘 보살피라고 권고했다. 흔히 성장하지 않는 교회를 보면 오래된 신자들이 기득권(旣得權)을 차지하고 좀처럼 내어 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어느 권사는 목회자가 그렇게 강조하는데도 자기의 좌석이라고 하면서 장의자의 입구 부분에 앉아서 좀처럼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있어서 드나드는 분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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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의 중직들이 모든 요직(要職)을 차지하고 자기주장만 하는 교회는 결코 새 인재도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성장도 하지 못 한다. 심지어 그 교회의 목회자조차 심신이 지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을 중심한 교회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돌보는 데 열심인 교회로 전환될 때 그 교회의 성장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믿음이 약한 새신자들을 어떻게 보살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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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믿음이 연약한 신자도 하나님께서 받으신 줄 믿어야 한다.
롬 14 장에서 보면 바울이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1절)"고 하면서 그 이유를 3절에서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했다. 목회자나 교회 제직들은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양이요, 지체인 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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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할 때는 세상 냄새가 많이 나거나, 혹은 세상적인 거칠음이 강하게 나타나서 교회에 많은 문제를 나타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신 자인 줄 믿고 보살펴서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만약에 어느 가정에 장애자인 아기가 태어났다고 하자.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키울 자신이 없다고 해서 내다 버리겠는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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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아무리 우리 생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라도 하나님이 보내 주신 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마, 이런 글을 쓰면서 바울은 자기가 처음으로 교회라는 공동체에 들어올 당시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과거 이름은 사울로, 아주 지독한 율법주의자요, 예수를 믿는 교회를 이단으로 생각하던 자였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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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한 몫할 정도로 악명 높던 자였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종교 깡패로, 자기들의 원수 같은 자였다. 그들이 그처럼 사랑하던 스데반 집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면서 당장에 복수해주고 싶은 자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기도하기를 ‘사울을 당장에 회개시켜주시든지, 아니면 당장에 제거해 주옵소서’라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이 당장에 벼락이라도 쳐 주기를 바랬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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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벼락을 맞아서 눈이 실명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속으로 고소했겠는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하나님이 진노의 벼락을 친 것이 아니고 저를 회개시키기 위한 부름의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저를 부르신 후에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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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완전히 무기력해진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은 폈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존재로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아무도 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강권적으로 명하사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게 하심으로 눈이 회복되고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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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이 강하다는 사도들로부터 모든 교인들까지 사울에게 곁을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바울은 상처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를 끝까지 보살펴 주므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게 한 바나바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보내 주셨지만 교회가 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아주 잘못되었던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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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롬 14장이 강조하는 것의 하나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왜 넘어지느냐?’ 혹은 ‘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느냐?’고 결코 비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아직도 미숙하기 때문에 넘어지기를 잘 하는 것이요, 대소변을 가리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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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어떤 부모가 아기의 태를 벗지 못한 때에 ‘왜 오줌똥을 가리지 못하느냐?’ 혹은 ‘왜 빨리 걷지 못하느냐?’ ‘왜 말을 못 하느냐?’고 하면서 야단을 치거나 실수할 때에 때린다면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은 부모’라고 책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윽박지를수록 아이는 점점 주눅이 들어서 무능한 아이가 되기가 쉽다. 정상적인 부모들은 조금 더 자라기를 사랑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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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까지 아이를 오히려 ‘아이구, 잘 걷네.’ ‘아이구, 말을 잘 하네.’ ‘오늘은 오줌을 가리네.’라면서 조그마한 일에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에 열심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날부터 걷기를 잘 할 것이요, 똥오줌을 가리는 날이 오는 줄 믿는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하나님의 가정 안에도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이 많다. 교회를 처음 출석하는 분들을 보면 마치 초등학교 처음 입학하는 아이처럼 모든 행동이 어설프다. 찬송가도 모르고, 성경도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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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나 기도는 전혀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세상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입이 거칠어서 세상적인 욕이 저절로 나온다. 때로는 미신에 젖어 있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아직도 술 담배를 끊지 못하고 어느 신자는 음란에 빠져 있는 느낌을 던져 주기도 한다. 또 어느 신자는 세례를 받았지만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비성경적인 면이 많이 나타나 보인다. 어느 분은 조그마한 시험풍파에 쉽게 넘어져서 ‘하나님이계시니, 안 계시니’라기도 하고, 어느 분은 ‘이제는 교회에 다시는 안 나온다’며 흥분된 말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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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 그들의 믿음의 적음과 잘못된 신앙태도나 세상적인 태도들을 사정없이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실족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 비판한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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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때는 격려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잘못한 것을 잘했다고 격려하라는 것이 아니고 모처럼 잘한 것을 칭찬해 주라는 것이다. ‘열심히 교회 출석하시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나온 지 얼마 안 된 분이 십일조를 하는 모습이 너무 귀해 보입니다. 오늘 구역예배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많이 자란 것 같아 너무나 기뻤어요.’라고 해 보라. 아마, 점점 더 잘하려고 힘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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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의 약점을 대신 져야 한다
롬 15:1 “우리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고, 갈 6:1-2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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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보면 어른이 아이들의 약점을 담당한다. 대소변을 대신 치워 주고 걷지 못할 때는 업어 주거나 대신 짐을 져주는 것이다. 때로 실수하여 남의 집의 유리창을 깨거나 장독대를 깨뜨리면 대신 손해를 배상하여 주고, 학교에서 문제아가 될 때에 대신 찾아가서 선생님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그럴 때 그 가정이나 자녀가 온전하여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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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가정에서 부모가 자기는 어른이라고 하면서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온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가정은 죄인들의 집합소인 탓인지 허물을 가진 자, 연약한 자가 많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인 병원과 같다. 놀라운 것은 허물투성이인 죄인들이 들어와서 날로 변화해 가는 데 목회의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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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 믿음이 강한 중직이나 제직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약함, 그들의 허물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런 교회가 성장하고, 그런 교회에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실수, 특히 성급한 베드로가 실수할 때마다 야단만 하셨다면 베드로라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는 생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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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베드로가 실수하더라도 다시 감싸주시고 덮어 주셨고, 때로 그 허물의 발을 씻겨 주셨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목회하다 보면 때로 어느 실수한 교인을 당장에 책벌하자고 주장하는 분을 만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질서를 잃고 사회에서 비난받고 있는 것은 권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백번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잘못할 때마다 책벌하자고 한다면 한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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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게 주장하는 분도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물투성이다. 목회자는 그 때에 몹시 난처하다. 바로 그때 ‘우리도 다 허물투성이지요. 좀 더 기도하면서 두고 봅시다.’라든지, ‘제가한 번 단단히 타일러 보겠습니다.’라고 말씀하는 분이 나타나면 너무나 고맙다. 바로 그러한 십자가의 사랑, 남의 허물을 대신 지려는 큰 가슴을 가진 당회원이나 지도자, 교사가 많은 교회는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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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하여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그 때에 신부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아이의 뺨을 때리면서 ‘어떻게 거룩한 포도주를 이렇게 부주의하여 엎지를 수가 있는가? 너는 다시는 제단에 나오지 말라.’고 대단히 야단을 쳤다 .그 소년이 자라서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천주교를 반대하는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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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어느 큰 도시의 천주교회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실수하여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그 때에 집례 하던 신부는 조용히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면서 ‘얘야, 너는 앞으로 훌륭한 신부가 되겠다.’고 격려해 주었는데 그 소년이 자라서 유명한 대주교 홀튼 쉰이 되었던 것이다. 제직 여러분이여,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함과 허물을 십자가로 대신 지고 섬기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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