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가?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4:6)
이 구절의 문제는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된다면 결국 죽음 후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을 뿐이다(히 9:27). 따라서 이 구절은 죽음 후에 구원의 기회나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확실하고 예외적인 구절은 분명하고 일반적인 구절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마지막이며 그 후에는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 있을 뿐이다. 사후에는 누구도 그 처소를 결코 바꿀 수는 없다(벧전 3:19). 따라서 이런 예외적이고 불확실한 구절은 교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이 구절의 참 뜻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죽은 자는 살았을 때 결코 복음을 들은 일이 없거나 복음을 배척했던 모든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밝혀 주고 있듯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고 갈 수가 없다(눅 16:26; 히 9:27). 또 성경 어디에도 구원이 사후에 죄인에게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둘째로, 죽은 자는 구약 시대 신자들로 신약 시대에는 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제 죽은 자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성경은 구약 신자들의 영은 천국에 있음을 가리킨다(히 11:5, 16, 40; 12:23).
셋째로, 주후 200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이 본문이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이 해석은 초대 교회의 어거스틴과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따랐다. 그런데 이 해석이 옳다면 베드로는 죽음이란 말을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썼어야 한다(육신적이며 영적인 상태). 그러나 5절과 6절에서 베드로는 그 의미를 바꾸려고 했다는 조짐이 없다. 더구나 전파한다는 단어는 과거이지 현재가 아니다. 따라서 전파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해석은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많은 주석가들의 해석이 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생전에 복음을 듣고 믿은 크리스천들인데 후에 죽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새국제역(NIV)이 지지하는 것으로 거기서는 이제(now)라는 말을 덧붙여 이제 죽은 자들로 번역하였다. 이 해석의 문제점은 베드로가 자는 자들(살전 4:14)과 같은 뜻의 말을 썼으리라는 데서 생길 수 있으나 저자는 그 자신의 단어 선택에서 자유가 있다.1) 따라서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해석을 선호한다(Kistemaker, kelly, Bennett, Reicke). 필자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후반절이 전반절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호기심이나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어긋나게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복음을 들고 믿어야 구원 받을수 있지만 그 기회는 생전에 한하며 죽음 후에는 구원의 기회란 없다는 성경 전체의 교훈에서 보고 해석해야 한다.
주
1. Simon J. Kistemaker, Peter and Jude, pp.163-164
서춘웅
'설교. 신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재철 목사-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0) | 2016.02.10 |
---|---|
[스크랩] 설교 잘하는 10가지 기술 (0) | 2016.02.10 |
[스크랩]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이렇게 하라 (0) | 2016.01.06 |
[스크랩] 용이 땅으로 내쫓기다(김홍기 목사) (0) | 2016.01.02 |
[스크랩] 폴 워셔-복움울 전하라 (0) | 2015.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