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칼빈의 종말론 연구

수호천사1 2015. 12. 26. 06:33

 

칼빈의 종말론 연구

 

 

 

 

 

 

 

 

 

 

 

 

 

 

 

 

 

 

 

Ⅰ. 서론

Ⅱ. 종교개혁 시대의 종말론

Ⅲ. 종말과 부활

A. 죽음과 부활

B. 부활의 소망과 대상

C. 영혼 불멸과 육체 부활

D.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살아남은 자의 부활

E. 불신자의 부활

Ⅳ. 중간상태와 연옥설

Ⅴ.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

A.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

B. 최후 심판

Ⅵ. 결론

 

 

 

 

 

 

 

 

 

 

 

 

 

 

 

 

 

 

 

 

 

 

 

 

 

 

 

 

 

 

 

 

 

 

 

 

 

 

 

 

 

 

 

 

Ⅰ. 서론

 

 

 

데오도를 베자(Theodore Beza)에 의하면, 칼빈은 그의 건강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여 과로를 했으며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2주일에 1주일은 매일 설교를 했다. 그는 1주일에 세 번씩 신학강의를 했으며 훈련과 관련이 있는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서 장로법원이 개정될 때마다 거기에 배석했다. 그는 매주 금요일에는 성경 말씀을 토의하기 위해서 모은 모임인 '회중(Congregation)'에서 성경 공부를 주관했다. 그는 매일 매일의 사역에서 해결해야 할 무수한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심방 할 때처럼 환자를 심방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55세가 되기 한달 반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위대한 당신의 사역자를 좀더 오래 살도록 돕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데오도르 베자는 칼빈의 죽음에 대해 다르게 생각했다. “칼빈은 사역 초기에 지식을 추구하는데 헌신하느라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하시려고 한 이 도구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의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칼빈은 성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으며, 가르친 대로 살기를 힘쓴 것 같다. 그러한 삶은 개인적 죽음과 이 땅의 종말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앞두고 온 세상은 어떠했는가? 한국에서(다미 선교회)는 1992년 주님이 재림할 거라고 예언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세계는 어떠했는가? 프랑스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종말이 올거라는 예언으로 온통 시끄러웠었다. 하지만 오늘은 2003년 2월이지 않은가!

이처럼 잘못된 종말론은 모두를 어지럽게 만들뿐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준 것으로 만족하기보다는 헛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모두들 혈안이다. 이번 연구는 16세기 칼빈의 종말론을 살펴보는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종말론의 주요 이슈는 무엇이었는지, 개인적 종말인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부활에 관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로마 교회의 중간기 상태에 대한 오류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개혁주의 비판내용은 무엇인지, 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종교개혁 시대의 종말론

 

 

 

종교개혁 시대의 종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시대의 종말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살펴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일에 수고를 덜기 위해 루이스 벌콮(Louis Berkhof)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벌콮은 교회사 속에서의 종말론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사도 시대로부터 5세기 초엽까지, 둘째는 5세기 초엽에서부터 종교 개혁 때까지, 셋째는 종교 개혁에서부터 현재까지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살펴봐야 할 부분은 앞의 두 부분이다.

처음 사도 시대로 5세기 초엽까지는 기독교적 소망의 개별 요소들(예를들면 육체의 죽음이 영원한 죽음은 아직 아니라는 것,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 남는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복된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후에는 대심판이 있어서 악인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고, 경건한 사람은 하늘의 영원한 영광으로 상 받게 되리라는 것 등)을 매우 잘 의식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교리적으로 짜임새를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천년 왕국설이 다소 우세하였다는 것을 특징으로 지적했다.

5세기 초엽에서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종말론의 특징으로는 천년 왕국설이 점차 잊혀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관심이 장래에서부터 현재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왕국 사상은 영생과 장래의 구원이라는 사상에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관심의 중심부에 놓이게 되었고, 계급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게 되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상과, 교회가 장래를 위한 합당한 교육 훈련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상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지대한 관심이 중간기 상태, 특히 연옥설에 모아졌다. 이와 맞물려서 교회의 중보가 전면에 부각되고, 미상에 관한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한 교리, 면죄부에 관한 교리 등이 생겨났다. 이러한 교회 지상주의에 대항하여 다시금 천년왕국설이 몇 가지 갈래로 나타났다고 한다.

 

 

 

 

 

 

 

 

 

 

 

 

 

 

 

 

 

 

 

 

 

Ⅲ. 종말과 부활

 

 

 

A. 죽음과 부활

 

 

칼빈은 ‘죽음이 뭔가’라는 질문에 대해, 죽음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의 대가로 온 것이라고 했다. 아담의 죄로 그 자신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함께 죽게 하였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은 아담에게 있으며, 또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그의 직무인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또한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기초와 보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담이 죽음의 원조가 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기원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죽음이라는 말만 듣고도 당황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거기서 움츠려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요, 완전히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신앙은 이 공포를 극복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떠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그리스도의 선수들에게 수고의 끝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목표점이라고 했다.

칼빈은 그의 딤후 4:8 해석에서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신앙이 열렬할 경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잠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며, 최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품도록 일깨워준다. 그의 의미는 이 세상과 덧없는 목숨에 너무 집착된 나머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대한 아무런 사모함도 없는 자들은 모두 스스로에게서 불멸의 영광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온 주의력을 집중해야 하는데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가 우매하다면 이것이야말로 화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벌벌 떠는 자들을 신자의 숫자에서 제외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유쾌하고 즐거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마땅히 죽음을 과도히 두려워할 것이 아니며, 최후 부활을 소망해야 할 것이다.

 

 

 

B. 부활의 소망과 대상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외적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을 유효케하시는 자도 성부요(롬 4:17) 성자이며(요 5:22) 성령이심을(롬 8:11)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부활을 소망하는 것과 부활의 대상자(여기서 언급하는 부활의 대상자란 생명에로의 부활의 대상자이다)에 대해 칼빈의 견해를 살피고자 한다.

 

 

칼빈은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부활의 소망은 종교개혁을 위해 힘쓰는 자신과 동료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고 했다. 그럴 때 땅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마음이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의 핍박이 심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 나그네와 같이 생활했던 개혁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은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자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라고 말한 바를 의지하는 것이다. 성도는 부활의 대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칼빈의 견해, 아니 성경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더 큰 위로를 받게 된다.

 

 

부활의 대상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1). 동일한 내용을 마가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13:27). 이러한 말씀을 토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택하신 자들을 부활(생명에 이르는 부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의심할 것 없이 보편적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즉 성도들의 부활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 모든 인간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부활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신자들에게는 ‘생명과 행복의 부활’인 반면 유기자에게는 ‘죽음과 심판의 부활’인 것이다.(단 12:1; 요 5:28-29)

칼빈은 마 24:31과 막13:27을 가르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권위의 일례로서 자신의 선택자들을 이 땅의 이 끝과 저 끝에서 모으기 위한 천사들의 파송 사건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택자들만을 생명의 부활의 대상으로 삼으심은 이미 칼빈이 그의 영원한 선택 교리와 잘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고 앞서 기독교 강요 3권 21장에서 언급하였다. 생명에로의 부활의 대상은 예정의 대상과 잘 일치함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칼빈의 요한일서 2:2에 대한 해석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을 확신하는 모든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 복음을 받아드리게 된다고 그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니 곧 모든 세상의 죄가 다 용서함을 방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든 유기자들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구원 가능성을 확대하는 이유로 삼는 환상적인 무리들의 허황한 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런 무도한 자들의 망발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이런 불합리성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한 충분한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 해석은 … 이 구절에 적합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한의 목적은 이 축복을 전 교회에 공통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라는 단어를 사도 요한이 사용하였다 해서 곧 거것 자체가 유기자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모든 믿는 사람들과 지구 위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번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것이 온 세상의 구원자들에게만 선포될 때 비로소 참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예정의 대상이 ‘선택받은 사람’과 ‘구원자’에게 제한된 것처럼, 생명에로의 부활의 대상이 ‘선택받은 사람’에게 제한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교리적으로 혼돈스러웠던 시대 가운데 더욱 빛을 발했다.

 

 

 

 

 

 

C. 영혼 불멸과 육체 부활

 

 

칼빈은 부활에 관해서 언급함에 있어서 당시 잘못된 이해들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영혼 불멸을 무시하는 자들의 잘못(즉, 전인이 죽은 것 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생각)이었고, 둘째는 영혼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는 잘못(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생각)이었다.

 

 

칼빈은 영혼 불멸을 무시하는 자들의 잘못에 관해 저들은 ‘동물적 오류’를 범한다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아, 그 결과 몸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이 제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저들의 주장과 달라서 영혼 불멸을 지지한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을 “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벧후 1:14). 그러나 바울은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니니”라고 말하고(고후 5: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한다(고후 5: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는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히 12:33) 모든 의심을 일축한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몸을 벗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눅 23: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눅 23: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벧전 2: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두 번째, 칼빈은 영혼 불멸은 인정하나 새로운 몸의 부활을 주장하는 이들의 잘못을 논박하였다. 당시의 마니교도들이 이러한 주장을 펼쳤는데, 저들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했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라고 했다.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한다. 칼빈은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실 거라는 것이다(단 12:2).

 

 

칼빈은 몸의 부활에 대한 근거로써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몸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얻게 된다. 칼빈은 언급하기를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셔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고전 15;16)라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엡 1:20),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빌 3:20-2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요 11:25).

성경은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였다. 칼빈은 부활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통해서, 무덤을 지킨 병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천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일을 잘 증명한다고 했다. 그리고도 남아있을지 모를 의심을 다음과 같이 제거해 주셨다(눅 24:38)고 한다. 제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만나주셨고, 그 손과 발을 만져보게도 하셨다(눅 24:40; 요 20:27).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행 1:3), 드디어 그들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9). 이 광경은 열한 제자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졌다(고전 15:6).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살아나신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주되심을 확실히 증명하셨다. 그리고 바울을 노상에 엎드러지게 만든 것은 죽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으며, 바울은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분이 최고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느꼈다(행 9:4).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유로 스데반에게 나타나셔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셨다(행 7:55)

또 다른 몸의 부활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칼빈은 신구약의 말씀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근거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아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권능에 그 마땅한 영광을 돌리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19). 다윗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시 68:20)라고 한다. 욥은 사람이라기 보다 시체같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날이 오면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5-27). 에스겔서에서는,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들 앞에 길이 열리리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것과 같다고 할 때, 에스겔은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중에 들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그 뼈에 힘줄과 살이 붙으리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한다(겔 37:1-10). 예언자는 이 비유로 백성이 돌아갈 소망을 가지게 하였지만,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제시하고 있다. 요 5:28-29; 딤후 1:12; 딤후 4:8; 빌 3:21; 고전 15:36.

우리는 다만 본질상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다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지만 성질상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다음과 같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마지막 날에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죽지 않고 변화될 것이로되(살전 4:17; 고전 15:51-52), 죽은 자들은 모두 전과 같은 몸으로 부활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부활한 몸은 질적인 면에서 전과 같지가 않으며 그 몸은 그 영혼과 영원토록 결합될 것이다(욥 19:26-27; 고전 15:42-44)”.

 

 

 

 

 

 

 

 

 

 

 

 

D.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살아남은 자의 부활

 

 

부활에 관한 어려운 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자들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어거스틴 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전 15:36(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에서 죽지 않으면 자랄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통상적으로 말할 때 죽음이란 영혼과 신체의 분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에 따라서 이 썩어질 특성을 순식간에 파괴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거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으로 바울이 일어나고야 말 것을 말하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다”(고후 5:4)라는 사실을 성취되게 한다고 본다. 어거스틴은 우리 신앙 고백에서 말하는 내용, 곧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관’이 되실 것이라는 점을 글자 그대로 사실로 인정한다. 다만 그가 주저하는 점이 있다면 죽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도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이 육신이 파괴될 때 일어나는 것과 같은 죽음이며, 그 차이가 있다면 잠들어 있는 자들은 어는 정도 시간을 두고 신체의 본질을 벗지만 갑자기 새롭게 될 자들은 이 특성만을 벗어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E. 불신자의 부활

 

 

성도들에게 부활과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큰 차이가 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 행복이 얼마나 탁월하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하리라는 말을 들으며, 그런 말을 하는 동안은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고전 13:12)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라고 요한은 말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반면, 불신자의 부활 즉, 버림받은 자들은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같다.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같혀져 있을 것이다(유 6절).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이다. 칼빈의 견해이자 개혁주의 견해는 엄밀한 성격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는 분명 택자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유기자)의 부활은 곧 “심판의 부활”(요 5:29)인 것이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중간상태로써 연옥설을 고집하는 것이다.

 

 

 

 

 

 

 

 

 

 

 

 

Ⅳ. 중간기 상태와 연옥설

 

 

 

칼빈에 의하면 죽음 이후 택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영혼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믿는 영혼들은 육체를 떠나 이 세상이 아닌 어떤 곳에서 기쁘고 복된 생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버림을 당한 영혼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천국의 무한한 영광을 다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두려운 고통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이 죽음 이후 이중적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죄악을 기억해야 하는 고통과 신앙을 지킨 자들의 복과 자신들의 불행 및 상실된 신분을 비교하면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교황주의자들은 눅 16:27을 근거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위해서 염려한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

중간기 상태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다음과 같다. 저주받은 자들의 영혼들은 직접 지옥으로 가고 거기에서 그들은 정결하지 않은 영들과 더불어 영원히 그리고 소멸할 수 없는 불 가운데 고통을 받게 된다. 세례를 받은 후 더 이상 죄로 오염되지 않거나 이런 부패로부터 여기에서 정화된 자들의 영혼들은 하늘로 영접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를 통하여 이전에 죽었던 성도들의 영혼들이 조상림보(The Limbus Patrum)에서 하늘로 옮겨간다. 교부들이 그 운명에 대해서 온화하게 판단하였던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아이들은 그 진노들이 전혀 동등하지 않은 지옥에서 기절해 있고, 대부분 일반적인 표상에 따르면,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저주받으나, 형벌의 느낌으로 고통하지 않는 유아림보(The Limbus Infantum)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연옥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을 파괴한다고 하였다. 이런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허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속죄를 구할 때나 보속을 다른 데로 돌릴 때는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처럼 로마 교회의 영혼의 중간 상태기에 대한 이해의 잘못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면죄부를 만들어 성전 건축비를 마련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도록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개혁교회의 일반적인 주장은 신자들의 영혼은 죽음 직후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몸의 부활이 그대에게 어떤 위로를 주느뇨?”라고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금생 이후 즉각적으로 나의 영혼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취하여 올려질 뿐 아니라 나의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키신 바 되어 나의 영혼과 다시 연합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이와 동일한 정신으로, 죽을 때 “거룩함으로 완전해진 의인의 영혼은 가장 높은 하늘로 받아들여져 거기서 빛과 영광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 육신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다. 제2스위스 신앙 고백서도 이와 비슷한 선언을 한다. “우리는 신실한 자가 육신의 죽음 이후 곧바로 그리스도께로 간다고 믿는다”.

칼빈은 로마 교회에서 연옥설에 관한 근거로 제시하는 마카비후서(12:43) 자체를 무시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경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주의자들이 연옥설을 주장하는 고전 3:12-15절 또한 전혀 근거가 없음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우리는 여기서, 연옥설을 내세우는 논증으로 펴고 있는 카톨릭 교도들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도록 결론을 내려야겠다.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이 불 속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리기 위하여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 그런 쓸데없는 사소한 일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들의 모순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을 응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은 연옥설에 대한 잘못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 말씀 안에서만 이해할 것을 요구했다. 벧후 1:14, 고후 5:1, 고후 5:6, 8, 히 12:23, 눅 23:43, 46, 벧전 2:25, 행 7:59.

그리고 칼빈은 우리의 영혼이 중간기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고 했으며,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으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라고 했다.

 

 

 

 

 

 

 

 

 

 

 

 

 

 

 

 

 

 

 

 

 

 

 

 

 

 

 

 

 

 

 

 

 

 

 

 

 

 

 

 

 

 

Ⅴ.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

 

 

 

A.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

 

 

개혁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하여 세 가지 학설들이 알려져 있는데, 무천년설 후천년설 전천년설이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개혁주의나 루터주의에서 천년주의를 이단으로 비판하여 왔는데, 그 천년주의는 후천년설과 전천년설의 구별을 하지 않는 이 땅에 어떤 기간 천년 왕국이 있다는 개념에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세 가지 학설 가운데 무천년 설을 지지하는데,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죽은 자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동시적으로 보며, 심판 전 천년의 시기를 부정한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에서 오늘날 무천년을 주장함은 칼빈의 가르침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칼빈이 무천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에서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적인 가르침을 찾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전천년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이후 심판 전에 천년시대를 두며, 천년을 인정하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천년이 있다고 본다. 이런 전천년주의자들 중에는 세대주의자들도 포함한다. 그리고 후천년설이란 천년의 도래를 지금 교회시대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되, 교회시대가 이미 의와 평화의 시대로 보면서 교회의 황금의 시대인 천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 세상에서 모든 국가들의 대다수의 궁극적 회심을 기대하기 때문에 세속주의나 적그리스도로 대표되는 교황주의와의 큰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후천년설의 경우도 그리스도의 재림 뒤에 죽은 자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따른다는 점에서 무천년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천년설의 경우, 비록 그리스도의 왕국이 유대주의처럼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세상 끝이 오기 전에 세계가 기독교화될 것으로 믿고 있다. 반면 무천년설이나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세계의 회심에 대한 기대가 없다.

칼빈이 전천년설 입장인지, 혹은 후천년설 입장인지를 추적해 가는데 있어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칼빈은 주기도문 해석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겠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육신을 그 분의 멍에 아래 굴종시키고 자신들의 욕심을 제쳐놓아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통째로 묶어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스리신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 상태 하에서는 우리의 열정은 모두 사탄의 군졸이 되어 하나님의 의를 반대해서 싸우고 그분의 통치를 훼방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이 모든 방해를 제거하고, 모든 인간들을 그분 자신의 지휘하에 두어, 이들로 하여금 하늘의 생활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의 반대는 완전한 아타락시아(무질서)와 혼란이요 하나님께서 그 생각과 감정을 자신의 손길로 정리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정돈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은 우리로 새 생활을 시작케 하도록 하는 의미에서 옛 사람의 종말이요, 자아의 부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하나님 나라의 첫 결과는 우리 육신의 욕심의 길들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이 세상 종말을 향해 증대 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날마다 이 나라의 등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불의가 이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의는 하나님의 나라 뒤에 오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에 있어서 그 어디서도, 앞서 소개한 후천년주의자들처럼 이해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세계가 기독교화 될 것을 기대한 흔적 말이다. 또한 다음 데살로니가전서 4: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면 칼빈이 전천년주의자도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단 연합해 있는 자들에게 그는 그분과의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 이 말은 오린겐과 천년왕국설 신봉자들의 오류를 충분히 반박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자들이 일단 나라에 집결되면 그들의 생명에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1천년을 할당함으로써 그 후로는 더 이상 통치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말이다. 어쨌든 신자들의 생명을 1천년 기간으로 한정하는 자들 역시 터무니없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한 계속 그와 함께 살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있으리라”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영생이 우리에게 할당되어 있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소망할 때만이 영생의 소망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칼빈이 천년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후천년주의도 아니며 전천년주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살전 4: 15-17의 해석에서 칼빈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두 번 재림이나 두 가지 부활 등은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 이상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칼빈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전천년주의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무천년주의 입장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천이라는 수에 관한 정의이다. “천이라는 수는(계 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한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마 25:41, 46)”

 

 

 

B. 최후 심판

 

 

부활이 삼위일체 사역이듯, 모든 외적인 사역으로서 심판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며, 심판은 크게 역사적 심판과 최후(마지막) 심판으로 구분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다.

칼빈은 최후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를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은 즉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어리석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극심한 잔인성을 돌린다는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벌이 죄의 정도를 넘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언사는 하나님의 위엄을 공경할 줄 모르는 형태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모든 유기자들과 사탄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구원 가능성을 확대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최후 심판의 대상은 천사들이든 인간들이든 합리적 피조물이 그 대상이다(유 6; 벧후 2:4). 성과 신분에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도 상관없이 산 자와 죽은 모든 자들이 그 대상이다(고후 5:10; 계 20:12). 그런 인격체들이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사실들에 대한 것도 그 대상인데, 행위 뿐만 아니라(마 25장; 전 12:16), 말들(마 12:36), 뜻과 생각들(롬 2:15; 고전 4:5)이 그 심판의 대상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심판에 이르지 않고(요 5:24) 믿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받았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요 3:18, 36). 이와 같은 내용은 성경의 바탕을 둔 것으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소지가 없을 것이다. 칼빈의 글 어디에 언급되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칼빈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 고후 5: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의 해석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구원에 있어서 행위 혹은 인간의 공로가 전혀 배제되었던 것과 같이 심판에 있어서도 인간의 공로와 행위는 자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상과 관련되는 만큼 우리는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처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행동 역시 보상을 받지만, 거기에는 각각 다른 이유가 있다는 점을 간략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악한 행동에는 거기에 마땅한 처벌이 따르지만 선한 행위를 보상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의 가치나 공로를 참작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의 인준을 받을 정도로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전체 율법을 다 만족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인데, 그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비책은 하나님께서 그의 무상의 친절에 따라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그의 호의로 받아들인 다음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행위를 은혜롭게 받아주시며 보상이 따르는 것도 바로 이 분에 넘치는 용납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행위를 보상하신다는 말속에 우리가 값없는 은혜로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 것으로만 본다면 여기에는 전혀 모순된 점이 없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는 선한 행위를 참작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후에는 선한 행위를 보상한다고 했다. 그 의미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할 때 모순처럼 보이는 표현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최후 심판에 있어서 ‘심판의 표준’은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칼빈 역시 복음에 심판의 권세를 부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찬사로 복음의 권위를 칭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최후 심판은 복음의 가르침을 단순히 시인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중세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이 모든 것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저들의 가르침이 교회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세상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게도 죽음 이후의 세상도 그들의 권한으로 지배하길 원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앞둔 시대의 종말론이다. 따라서 칼빈은 이러한 저들의 과오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본인의 종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도의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보았으며, 성도들이 달려가야 할 목표로 여겼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택자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부활의 소망 때문이다.

영혼은 죽음과 함께 죽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육체는 부활할 때 전혀 새로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육체의 부활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이를 가능케 할 것이다. 하지만 불신자의 부활은 그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일 뿐이며, 어거스틴의 말처럼 저들의 부활은 ‘죽음 안에 있는 상태’일 뿐이다.

칼빈은 중간기 상태에 대한 로마 교회의 연옥설에 대해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사상은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다. 특별히 우리 나라는 사후에 대한 불교적, 유교적 사고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 21세기는 과학이 인류에게 커다란 혁신을 더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복제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심지어 클로네이드사의 인간 복제에 대해 다수의 과학자들이 ‘사기’라고 규정함으로 과학도 더 이상 인간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답할 수 없다는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다. 과학에 대한 기대감이 상실 될수록 더욱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과 같은 성경의 교리를 왜곡하는 무리들이 많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다. 칼빈은 그의 임종을 앞두고 계속되는 통증에 시달렸지만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시간을 긴 기도를 하는데 활용했으며, 자주 시편 39편 9절(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을 외우거나, 때로는 사 38장 14절(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을 외웠다고 한다. 

 

신원균 목사/분당한마음교회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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