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부유하게 살아도 되는지요?
신자가 부유하게 살아도 되는지요?
[질문]
어제 교회 부흥회에서 부흥강사님이 성경은 우리에게 육적으로 가난하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심령의 가난은 몰라도), 하나님을 잘 믿은 신앙 위인 중에는 육적으로 가난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유사한 내용을 본 사이트의 “#52 신자가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면 안 되나요?”에서 이미 한 번 다뤘습니다. 이 주제에 관한 성경적 원리는 그 글을 일차 참조하시면 되기에 질의하신 내용과 직접 연관되는 답변만 간단한 보완 설명과 함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이 육적으로 가난하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적이 없기에 육적으로 부요하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면 논리적으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습니다. 예컨대 마약하지 말라, 포르노 보지 말라, 인간복제 하지 말라는 등의 말도 없으니 그 반대가 옳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또 그런 논리라면 육적으로 부요하게 살아도 된다는 말도 없으니 그 반대로 육적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억지를 내세운 것은 성경에 육적으로 부요하게 살라는 말씀이 없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런 말씀이 있었다면 그에 근거해 부자가 되라고 하면 되지 구태여 반대어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 위인 중에 가난했던 사람이 왜 없습니까? 우선 구약에선 대표적으로 모세를 들 수 있지 않습니까? 초반 40년은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로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중반 40년은 양치기로, 후반 40년은 백성들과 함께 광야를 방황하며 부요와는 거리가 멀었지 않습니까? 나머지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심지어 순교를 당했지 않습니까?
신약시대에도 바울은 회심한 후 평생을 순회전도자로만 섬기며 가난했지 않습니까? 부요할 때도 간혹 있었지만 순전히 자족함에서 오는 부요였지 고급 저택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인생 말년에는 로마 지하 감옥의 사형수로 지냈지 않습니까? 예수님만 해도 현실적 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지 않습니까?
물론 구약 성경에는,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신명기 28장 같이, 신자의 현실적 형통을 보장하는 말씀이 제법 나옵니다. 그러나 항상 “여호와께 순종하면 그분이 복을 주신다.”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신자가 설령 주를 따른다 해도 미리부터 복 받으려고 작정해서 기도해선 안된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신명기 28장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신구약 성경을 합쳐서 서로 대조 보완하며 읽어야 합니다. 나아가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난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만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마스터키로만 모든 신앙 과제를 풀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러지 않고 구약 성경이 명시적으로 “들어가도 복 주고 나가도 복 준다.”고 말하니까 하나님도 신자의 현실적 형통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면 이 또한 궤변이 됩니다. 왜냐 하면 구약성경에 노예제도, 축첩제도, 계대결혼(형이 죽으면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하는 제도) 등을 명시적으로 허용했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신앙상의 모든 과제에 대해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사역과 십자가 복음만이 최종적 해석 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이란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해석은 틀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 서기관이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만 가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도 당연히 겪어야 할 현실적 상황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한마디로 참 신자라면 세상에선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요16:33)
영생의 도를 구하러 온 부자청년에겐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고 답했습니다. 이제는 갖고 있는 재물마저 팔아서 나눠주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에 재물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쫓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다 마련해 주실 뿐 아니라, 돈이 더 생기게 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청년더러 재물과 영생 중에 확실하게 하나만 온전히 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신 뜻 그대로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돈의 효용성을 완전히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돈이 필요해서 가룟 유다를 돈 궤를 맡은 회계로 삼았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에도 일용할 양식은 구하라고 했습니다.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전혀 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합니다. 돈을 성실하게 벌되 하나님보다 우선순위에 절대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일 뿐입니다. 성경은 육적으로 풍부해지라고도, 가난해지라고도 단정 짖지 않습니다. 오로지 신자의 인생의 목적과 삶의 가치관에 하나님만 그 중심에 두라고 권할 뿐입니다.
신자가 취할 재물관은 바울의 이 한 마디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1-14)
무조건 재물을 돌같이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단순히 감사하며 자족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불신자들 중에 의로운 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신자의 풍부든 궁핍이든 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현재 처한 여건에 관해 그분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궁핍을 인내해 내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잘 믿으면 하나님이 다시 풍부하게 바꿔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본문을 내가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시작했고, 끝에는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했으니 잘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아주 어려운 형편 즉, 로마 감옥 안에서 이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외적 형편은 하나님이 주시고 그 가운데 그분만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계획은 그런 외적 형편과 아무 상관없이 반드시,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형편 때문에 더 잘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에게 허락된 여건이 풍부든 궁핍이든 하나님 그분이 자족하고 계시기에 신자는 그분의 자족에 참예 하는 셈입니다.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더러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신 근거로 당신께서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핍박하고, 심지어 당신을 죽음으로 내몰아도 당신의 구속 사역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바로 그 죽음 때문에 당신의 계획이 완벽하게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전도 사역은 외적 형편과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졌습니다. 심지어 로마에서 억울하게 자택에 유배되었거나, 지하 감옥에서 사형만 기다리고 있든 간에 하나님 나라는 당신의 계획과 방법대로 당신께서 이루시고 확장시켜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외적 형편에 따라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고서 자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합력하여 한 치의 차질 없이 선을 이루어 나가는 은혜와 권능을 직접 체험하니까 자족하게 된 것입니다. 또 그런 자족이 먼저 있고 나니까 자신의 외적 형편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보물을 하늘에 쌓아나가니까 이 땅의 보물은 그냥 배설물로밖에 여겨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자도 바로 이런 바울의 물질관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먼저 풍부하든 궁핍하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진심으로 그분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앗아가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재물을 쌓아봐야 좀과 동록과 도둑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따름입니다.
재물을 얻을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재물을 갖게 되던 신자는 그분을 대신해서 잠시 맡은 청지기일 따름입니다. 재물을 주신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신자를 통해 이루실 당신의 계획을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또 그 계획은 재물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서 반드시 그분께서 수행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현재 처한 여건에서 성실히 일하며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단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벌되 쓰이는 곳도 하나님의 뜻에만 따라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신자가 매번 가난하여서 힘들게 사는 것을 기뻐하실 리는 없습니다. 안타까이 여기십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선한 의도에 편승하여 믿음 자체를 현실의 복을 구하는 것으로 전락시켜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신자를 향한 궁극적 목적이 신자의 주위를 형통케 바꿔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부터 거룩한 당신의 자녀로 바꾸고 성장시켜서 그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키려는 것입니다. 그 뜻에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만큼 신자에게 재물을 주실 뿐입니다. 하나님도 신자에게 복주시기 원하시므로 부자가 되라고 가르친 적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녀들에게도 이런 청지기적인 물질관을 실제 삶에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궁핍하든 풍부하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실히 일하여 번 돈을 그분의 일에 정당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자녀가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고, 무엇을 먹든 마시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돈에 구애되지 않으며 선을 실천하는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지 자녀들더러도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또 어려서부터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8/31/2010 박 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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