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
피터 와그너가 주장하는 제 3의 물결의 예언사상이 그릇된 이론임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의 성격이다. 초대교회 당시 예언했던 아볼로, 빌립 집사의 딸들 ... 등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사 말하는 예언자들의 예언의 은사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제 3의 물결과 함께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직통의 예언이 부활되었다는 피터 와그너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할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예언자들의 예언을 이해하기 위해 대부분의 권위있는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내용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관점이다. 첫째, 초대교회 당시의 선지자들의 예언도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예언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그릇된 견해이다. 이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이 받아서 전하였고, 이미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거의 동일한 예언이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을 통해 임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는 신약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속에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계시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예언했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동일하게 권위있는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내용이 성경에 포함되었느냐? 포함되지 못했느냐? 의 문제일 뿐이라고 한다. 아볼로와 같은 신약의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못했던 시대였다. 성경의 사본도 충분하게 교회들에게 전파되지 못했다. 신약성경의 목록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직통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성령으로 감동하여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도,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의 그러한 계시활동도 영구적이는 않았다고 한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고, 성경의 내용과 원리를 따라서 교회를 인도하는 장로와 집사가 선출되어 사역하게 되면서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직통의 예언을 받아 전했던 선지자들은 사라졌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의 사역과 직분은 성경과 교회가 지상에 완성되기 전까지 활동했던 '임시직'이었다고 한다. 즉, 아볼로 등의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의 예언의 권위와 내용을 신구약 성경과 비등하다고 보는 학자들 대부분도 성경완성 이후 신약의 예언의 은사가 영구적으로 지속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 것이다. 둘째, 신약의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성경을 만들어 내던 방식, 즉 '하나님의 감동'(God-Breathed, 딤후 3:16)이나 '성령의 감동'(inspired by Holy Spirit, 벧후 1:21))하심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진 정확무오하고 절대적인 계시의 말씀이 아니었다는 관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하나님의 감동', 또는 '성령의 감동'이란 성경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가 이사야, 예례미야, 바울, 베드로 등의 성경 기록자들에게 그대로 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기록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대로만 성경의 내용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이 말씀이다. 정확무오한 말씀이라 함은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었으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내용을 전혀 틀리지 않게 기록하였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인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시니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성경기록자들에 의해 기록된 모든 내용에도 거짓이나 사기가 없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직접 주어진 절대적 계시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n)하심으로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나왔다고 본다. '성령의 조명'이란 하나님이 신구약의 절대적 계시의 말씀을 주실 때 성경기록자들을 사용하셨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성령의 조명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절대적 계시인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적용하게 하도록 도우심이었다. 그리하여 수천년 전에 주신 말씀이지만,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후의 모든 시대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언제나 살아있고 유효한 참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러한 직통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과 메시지를 받는 거짓된 계시현상이다. 결코 그 분에게 성령의 조명하심이 임했다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조명은 2,000년 전에 완성된 신.구약 성경의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의 신자들과 교회들의 상황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적용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면 성령의 조명을 따라 초대교회의 임시직분이어던 예언자들이 예언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당시로서는 신생종교였던 기독교를 이해시키고 가르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주어진 구약 성경과 새로이 주어지는 신약 성경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 성경이 모든 교회들에게 충분하게 공급되지도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볼로, 유다, 실라, 또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을 초대교회의 선지자(예언자)로 세우셨고, 그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종합하여 이해하고, 교회들에게 잘 가르치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공급하셨던 것이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그들은 기회가 닿는대로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풍성하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예언사역'을 진행하였다. 그들의 예언으로 인해 신자들을 힘과 위로를 얻었다. 물론 그들이 전한 예언들 중에 성경에 기록된 지극히 일부의 내용에 한해서는 그것이 특별계시였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고르치고 깨우치는 말씀의 사역이었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선지자들의 예언의 주된 내용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 아직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한 기독교 신앙의 이치와 원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지도하는 말씀이었다. 성경과 성도의 삶을 연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시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하고, 책망하고, 위로하는 말을 전하였던 것이다. 결코 신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예언은 이이 주어닌 구약 성경과 당시 바울과 베드로 등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신약 성경의 내용을 성령의 조명으로 먼저 더 잘 이해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설명하면서 교회를 섬겼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구조, 원리, 이치를 빨리 깨달아 알아 신자들이 더욱 든든하게 말씀 위에 서도록 섬기는 말씀사역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예언 속에는 새로운 계시가 없었으므로 그들의 예언이 성경에 기록되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성령의 조명에 관한 대표적인 개혁신학자 서철원 교수의 말을 읽어보자! “칼빈의 가르침대로 고린도 전서 12:28-29의 선지자는 미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다루고 성경을 해석할 뿐 아니라 지혜롭게 그 시대의 요구에 맞도록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성경의 탁월한 해석자들이요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탁월한 지혜와 소질을 가지고서 교회의 요구에 응하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교회의 현재 요구에 바로 적용시키는 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덕을 세우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완결 이후의 선지자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교회와 시대의 요구에 적용시키며 교회를 바로 세우는 역사를 하는 사람과 그런 말씀이다. 이 때는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적용된다.”(서철원) 초대교회의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 말씀하는 다음의 구절은 신약의 선지자의 예언이 직통계시가 아니라 이미 주어닌 신구약의 계시에 기초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더 정확한 신앙이해를 가지도록 돕는 는 말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행 15:32). 초대교회의 선지자였던 유다와 실라가 다른 성도들을 권면하여 믿음을 굳세게 하는 말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사도 바울이 전하였던 예언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전했다면 권면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계시와 예언은 절대적인 권위로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이고,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권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앞 뒤 정황을 보면 그 당시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된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 이방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자들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율법과 관습을 다지켜야 한다고 겁박하였고, 이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혼란과 낙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 유다와 실라를 이방인들에게 파송하였다(행 15:27). 유다와 실라를 파송한 주된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은혜에 이르는 신앙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기독교의 원리를 설명함으로 이방인들의 신앙이 건강해지도록 돕고자 함이었다. 구약성경과 당시 사도들이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여 이방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이해시키는 것이 이 두 선지자들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직통의 계시로서의 예언이 아니라 주어진 계시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성령의 조명을 입어 신앙의 이치와 원리를 가르침으로 성도의 신앙을 튼튼하게 세우는 말씀의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각 종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믿음의 분수대로’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성경이 ‘믿음의 정도’, ‘믿음의 분량’ ‘믿음의 균형’이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당시의 예언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성숙도에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예언의 은사로 말미암은 예언이 하나님이 직접주시는 메시지였다면, 예언의 은사자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예언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믿음의 분량과 상관되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예언의 은사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 그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근거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미 주어진 절대적인 말씀인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성령의 조명'을 따라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어지도록 가르치고, 설명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고, 위로하는 말이 예언의 은사였다. 하나님이 감동하여 주시는 말을 직통으로 쏟아내는 것이 초대교회의 예언이었다면, 바울은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3). 고린도전서도 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에 대해 같은 내용을 가르친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선지자의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안위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혜를 더 깊이 알고 깨달아 복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다양한 형편 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기독교의 이치와 가르침과 원리를 이해시킴으로서 가능하다. 교사, 공무원, 군인, 상인 ... 당시 성도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은 이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서도록 가르치고, 위로하고, 권하는 말씀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그 근거는 구약 성경과 당시 나타나고 있던 사도들의 가르침이었다. 결코 하나님의 감동으로 새로운 계시를 직통으로 전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주어진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사도들의 계시가 성도들과 교회에 바르게 적용되게 했던 것이다. 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를 가졌던 사람들, 즉 예언자(선지자)들의 예언의 성격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도들과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계시를 이해하고, 기독교 신앙의 이치와 원리를 먼저 파악하고서 아직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을 가르치고 돕는 말씀이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심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선지자의 사역이었고, 그 당시의 예언의 특성이었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예언사역은 성경이 완성되고, 성경을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을 목양하는 장로와 집사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디모데전서3장 1-13절과 디도서 1장 5-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어떠한 성경적인 원리에 근거하여 목회자 지도자인 장로와 평신도 지도자인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를 목양하게 하였는지 나타나 있다. 만일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의 가르치고 위로하는 말씀 사역이 계속 이어진다면, 사도 바울이 선출하라고 한 장로와 집사의 기능과 정면으로 상충되어 버린다. 이는 교회를 분란에 빠지게 하고 혼란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게 한 내용에서 사도나 선지자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었고, 이후 사도와 선지자들이 조용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면 예언의 은사를 가졌던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은 이후 계속 나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약 교회의 과도기에 일했던 임시적인 직분이었던 것이다. 교회가 태어나고 자리를 잡기까지 하나님이 쓰신 일종의 영적인 산파들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선지자들과 예언의 은사가 제 3의 물결과 함께 부활하였다고 주장하는 피터 와그너의 이론은 완전히 그릇되었다. 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예언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론은 전혀 성경적이지 못하다.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격은 성도들에게 신앙의 이치와 원리를 가르침으로 더욱 믿음을 든든하게 세웠던 말이었다. 직통으로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시는 계시나 개인의 비밀을 알아맞히는 점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형의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신령한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다. 귀신과 교제하는 일이므로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 내용이 맞는 말이건, 틀린 말이건 그러한 시도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그릇된 일이다. 귀신이 하는 일이므로 성도는 절대로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렵고 괴로운 일이 벌어지면 더욱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면서 힘써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성경의 가르침의 범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과 확신을 꼭 주신다. 기도에 게으르고, 자신만의 믿음의 확신이 없으므로 사이비드의 예언이라는 것에 기대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귀신으로부터 나온 그럴싸한 말에 솔깃하여 흥분하고, 시간을 내어 다시 그것이 준 말을 생각하고, 궁리하고, 묵상하면 반드시 손해를 본다. 크게 낭패를 당하는 일이 많다. 목회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예언에 관한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서 연약한 성도들을 가르쳐야 한다. 거짓된 예언자들로부터 양들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오는 일들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그러한 일들의 결과는 항상 우리의 신앙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배가 닺을 던져 바다에 고정시키고 안전한 항구에 정박하여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성경에 매이고 교회의 품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고리타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행복의 길이다. 영혼의 어머니인 교회의 가르침과 영혼의 닻인 성경을 넘어서서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예언과 음성을 받는 행위는 결국 우리의 행복을 파괴한다. 성경을 무시하게 되고, 교회의 가르침과 믿음의 울타리를 떠나 들판에서 유리하는 길 잃은 양이 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다 사탄에게 먹힌 영혼이 한 둘이 아니다. 직통 계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러한 재앙을 만나게 된다. 직통계시 운동에 빠진다고 하여 그 즉시 영혼과 신앙이 파선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누적되어 가면서 그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즉시 영혼이 파멸하면 누가 조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즉시 불행이 시작되고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마귀가 더욱 신령한 엘리트 신자가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직통으로 예언과 음성을 받는 운동에 빠진 사람들은 반드시 불행한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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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67년생)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앤아버 반석장로교회를 섬기고 있다. 정이철 목사는 세계 교회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과 건강한 신학을 떠났고, 통째로 이단화되는 마지막 시대의 배교 증상을 심각하게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힘을 다하는 목사이다. 정이철 목사는 참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목회자들과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바른믿음 세미나’를 여러 도시에서 개최하고 있으며, 참된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훼방하는 사탄이 만들어 내는 "견고한 진"(고후10:4)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인터넷 신학신문 <바른믿음>을 창간(2014년 9월)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사도 운동 문제를 심원하게 파헤친「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와 신사도 운동의 근원과 핵심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설명하는「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를 출간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사도 운동 문제를 심원하게 파헤친「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2), 신사도 운동의 근원과 핵심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설명하는「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전 세계 교회에 만연한 거짓된 성령세례 문제를 다루는「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를 출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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