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이것이 교회다

수호천사1 2015. 11. 17. 23:58

 이것이 교회다






/찰스 콜슨, 엘렌 산틸리

역 : 김애진 외

  

 저자 :

찰스 콜슨(Charles W. Colson)

  

재소자, 전과자, 범죄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돕는 교도소선교회 설립자이며,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문필가, 연설가, 칼럼리스트,

  

1931년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출생. 브라운 대학교를 나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9년부터 4년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참모로 일했으며, 닉슨의 재선 뒤 백악관을 나왔다. 1973년 8월 친구의 소개로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74년 7월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고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1월 출감하여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를 출간했다. 1976년 교도소선교회를 설립하여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교도소에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했다(1993년).

  

현재 미국 교도소선교회 사역을 계속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며 부딪히는 갖가지 문제를 기독교 관점으로 짚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 <브레이크 포인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러빙 갓」 「백악관에서 감옥까지」 「교회 다니는 십대, 이것이 궁금하다」(이상 홍성사) 등이 있다.

  

엘렌 산틸리 본(Ellen Sanrilli Vaughn)

  

위성턴에서 태어났으며, 교도소선교회 전도 집행부에 있다. 리치몬드 대학교를 나와 조지타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80년부터 콜슨과 함께 일해 오고 있다.

  

「러빙 갓」(Loving God)

  

극적으로 회심한 어느 지성인이 파고든 화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도서선교회 창설자이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탬플턴상 수상자인 찰스 콜슨이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

“생동적인 강렬한! 감동적인! 내용이 풍부한 책!”-애드번트 크리스천 위트니스

“신학적으로 건전하여 교리 위에 기초를 둔 칭찬할 만한 책!”-킬 헨리

  

「백악관에서 감옥까지」(Born Again)

  

"대통령의 참모에서 하나님의 참모가 된 사람"

찰스 콜슨 회심기

거듭난 지성 찰스 콜슨, 대통령의 참모로 백악관에서 살다시피 한 그가, 지금은 왜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는가? 야망과 권력의 자리가 아닌, 치욕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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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희망이 되는 교회를 찾아서 -

이것이 교회다 (The Body)

  

  

한국의 독자들에게

  

저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이 책이 세상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느 곳보다 한국교회에서 더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열심과 헌신적인 기도, 그리고 한국 교회의 특징인 열정적인 예배에 깊은 감동과 강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독특하면서도 전략적인 역할을 맡기시려고 한국 교회를 성장시키셨다고 믿습니다. 그 역할은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태평양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시아 선교를 감당해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중요한 선교 기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워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을 기뻐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공에는 유혹이 따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영역과 특권과 교인들을 더 염려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주의와 교단중심주의와 분열은, 중대하고 강력한 부흥을 망치기 위해 사탄이 반복해서 사용해 온 수단입니다.

우리는 교파간의 사소한 다툼과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형제자매들 사이의 불화 때문에 교회의 영향력이 훼손되는 것을 미국에서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치야말로 복음전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믿는 바대로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해 아시아로 나아가도록 선택받았다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영역 싸움을 조심하십시오. 처음에는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고 도움이 필요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을 망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둠이 엄습하고 복음을 위협하는 대적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의 표준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위태로워지지 않게 합시다.

우리는 교회를 향한 깊은 열정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읽다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교회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온전해질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바라보는 거룩하고도 수준 높은 관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 다가올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압니다. 그 기쁨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리에 충성하고 다가올 나라를 증거해야 할 무거운 책임이 수반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해 여러분을 무장시키는 일에 이 책을 사용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993년 6월 찰스 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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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제1부 교회란 무엇인가?

  

1. 리버튼 교회 이야기

2. 정체성의 위기

3. 나에게 편안한 종교를!

4. 티미쇼아라 교회 이야기

5. 이 반석 위에

6. 내 교회를 세우리라

7. 억측의 죄

8. 분열된 증인

9.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10. 타오르는 말씀

11. 코뮤니오 상토룸

  

제2부 교회 대 세상

  

12. 무엇이 진리인가?

13. 내가 곧 진리다

14. 우주에서 길을 잃다

15. 진리의 기둥

16. 두 개의 십자가 사이에서

17. 세상에 사로잡힌 교회

18. 거룩에 대한 교훈

19. 해방된 정의 : 세상의 변혁

20. 그리스도의 몸

  

제3부 세상 속의 교회

  

21. 성도의 무장

2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23. 너는 누구냐?

24. 예수의 증인이 되라

25. 빛이 되라

26. 소금이 되라

27.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시작이다

29. 코람 데오

  

에필로그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감사의 글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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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을 뜻합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으sk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글들」은 평생, 혹은 가장 귀한 순간에

진리를 위하여 주걱나 죽기를 결단하는

참 믿는 이들의, 참 믿는 이들을 위한, 참 믿음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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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교회란 무엇인가?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다.

오해는 말도록, 내가 말하는 교회는 우리의 보는 바

영원에 뿌리를 바고 모든 시공간에 걸쳐

뻗어나가는 교회, 기치를 높이 놀린 군대처럼

두려운 그런 교회는 아니니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광경은 우리의 가장 대담한 유혹자들까지도

동요하게 만들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간들은

그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다.

  









/C.S.루이스(「스크루에이프의 편지」 중에서)







2. 정체성의 위기

  

내가 곧 내 교회이다.

-교회에 대한 캘럽 여론 조사에 응한 어느 응답자의 말

  

  

리버튼 커뮤니티 교회의 이야기는 불행히도 이름, 장소 등 몇가지 사항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것은 1989년 리버튼과 비슷한 여건의 한 작은 도시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분명 이 같은 예들은 섣불리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미국과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참된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있는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여전히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곳곳에 내포되어 있다.

리버튼 커뮤니티 교회에 출석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교회란 직장이나 가정생활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 리듬에서 필수적인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갖기 전에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멋진 주말의 필수 요소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중에도 교회 행사에 적극적이어서 친교를 위한 만찬이나 산속의 수양관에서 열리는 연례 부분 수련회에도 참석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회 각 부처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선교회에도 참여하여 봉사했다.

교회는 심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변 세계가 급변하는 외중에도 리버튼 커뮤니티 교회는 안정된 제도로 남아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존경받는 위치에서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옛 가치관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환경에서도 여전히 의지할 수 있다는 디딤돌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러한 연속성의 혜택을 입기는 도시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그 웅장한 건물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교회는 견고히 서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버튼 커뮤니티의 교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질서뿐 아니라 교회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운 것이다. 교회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자신들의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리버튼 교회만이 특수하게 이런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곧 건물이라는 의식이 우리 문화에 이미 확고하게 뿌리내려 있으며 교인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예배드리는 장소를 교회(the church)라고 부르고 있다. “교회를 세운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도록 양육한다는 말이 아니라 건물을 짓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수많은 일상의 표현에서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장소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 뜻없이 쓰는 일상 용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자 그 관점을 결정하는 말로서, 교회의 중요도나 성공 여부가 건물 자체의 크기나 웅장함에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 혹자는 이것을 ‘이상적인 건물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를 건물로 인식하는 이런 개념은 이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 곧 교회 정체성의 위기라는 심각한 현상의 한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교회를 단지 벽돌과 회반죽의 합성물로 보는 잘못을 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격과 그 성경적 목적 및 사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교회의 정의를 내리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는 집회인가, 교파인가? 교회는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인가, 등록교인들에게 국한되는가? 텔레비전으로 예배를 보는 사람들과 유아세례만 받은 사람들, 혹은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또한 교회 사명은 무엇인가? 예배? 복음 전도?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정치가를 선출하고, 퇴폐와 비윤리에 저항하는 것? 이런 질문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아무나 붙잡고 교회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 보면 긍정, 부정, 무관심 등 다양한 견해를 접하게 된다.

불신자들이 교회의 정체성이나 사명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이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이 같은 혼돈 상태에서는 교회의 권위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리버튼 커뮤니티 교회처럼 하나의 건물, 곧 결혼식과 장례식을 올리는 장소나 기분이 내킬 때 들리는 곳으로 인식되는 것을 생각할 때, 미국인의 81퍼센트가 신자들의 공동체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종교관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같은 권위의 상실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조지 갤럽 조사에서는 미국 국민의 약 절반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만 그 중에서 “영적으로 아주 헌신된 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6-1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갤럽은 비슷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상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간의 행동도 비교해 보았다.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결근하는 사람들, 이력서의 내용을 과장하는 사람들, 세금 포탈을 하는 사람들 등을 조사해 보았을 때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사이에 윤리적 견해나 행동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자선하는 습성에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 간에 차이가 거의 없었다. 개신교도 중에서 십일조를 바치고 있는 사람은 25퍼센트에 불과했다. 응답자 중 40퍼센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반면, 5천 달러에서 7만 5천 달러 사이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신자와 불신자 차이 없이 수입의 1.5퍼센트만을 자선기관에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 그룹의 사람들은 수입의 12퍼센트를 여가생활에 쓰고 있었다.

교회는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을 헌신과 희생의 삶으로 이끄는 데 실패하고 있다.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믿음의 역동성을 제도화된 종교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건물이다. 교회의 사역은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며, 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고, 교회의 일꾼들은 우리를 돌보게 하려고 고용한 전문 교역자들인 것이다. 교회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숙보다는 장소, 마케팅, 건축, 프로그램, 교인 수를 가리키는 것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볼 때 현대 교회는 세상 문화와 가장 잘 타협하고 있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가장 무능하고, 신앙적으로는 가장 절망적이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혼란에 빠졌으며, 우리의 사명은 모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실존은 위험에 처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지도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아예 해결할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문을 드나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주의가 미국 문화의 가장 지배적인 세계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재발견하고 회복시키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결정적인 과업은 없다. 이 작업이 야심에 찬 당돌한 시도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는 겸손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통해 시작하려 한다.

  

이 작업을 시도하도록 자극을 준 사건이 여러 해 전에 일어났다.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날로 성장하지만 도덕은 날로 퇴보하고 있다”는 갤럽 조사의 결과가 보여주는 역설에 오랫동안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종교인들의 개인적인 훈련 부족과 거룩 추구에 대한 이해 부족이 빚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3년에 출간된 <러빙갓>(Loving God, 홍성사 역간)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다.

그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백악관에서 감옥까지>(Born Again, 홍성사 역간)를 비롯해 내가 이전에 저술한 어떤 책보다도 더 갈급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제자로 훈련받을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자기정체성을 확립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는 더 높은 관점을 갖지 못한다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전혀 구별된 삶을 살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로버트 벨라가 “급진적 개인주의”(radical individualism)라고 이름붙인 현대 미국의 가장 유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오직 ‘예수와 나’의 관계만 중요시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순종에 열중한 나머지, 핵심을 모조리 놓쳐 버렸다. 기독교는 혼자서 믿는 신앙체계가 아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진정한 기독교의 부활은 믿음의 정수, 곧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이자 새로운 사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어떻게 각성시키고 새롭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기독교는 결코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현대의 정신과 영혼을 차지하기 위한 우주적인 대투쟁 과정에서 뒷전에 물러나 있어도 좋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영적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선택하신 도구이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 전투에 소집된 것이다. 곤궁한 이 땅에 참된 소망과 진리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교회가 진정 교회다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나는 1988년 가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장로교와 카톨릭의 고전들뿐만 아니라. 프란시스 쉐퍼, 크리스토퍼 도슨, 칼 헨리, 리처드 뉴하우스, 헬무트 틸리케 등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을 연구하고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엘렌 본은 이 작업의 처음 과정부터 나와 함께했는데 그녀는 1980년 이래 나와 함께 다섯 권의 책 및 기타 저작들을 발간한 동료이다. 우리 두 사람은 신학자, 교계 지도자, 목회자, 그리고 모든 교파의 평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책의 집필 작업에 우리가 몰두해 있는 동안 세계는 예상치 못한 대변혁을 경험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은 자유를 되찾았다. 70년 동안의 공산 압제가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와중에 변혁을 일으키는 데 교회가 감당한 역할에 대한 놀랄만한 보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1990년 가을, 엘렌은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를 방문하여 그곳의 교계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을 인터뷰했다. 또한 그들의 가정에 머물면서 함께 예배드렸고 혁명을 기념하는 장소들도 직접 방문했다. 같은 해, 나는 소련과 체코와 헝가리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였고,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 가장 비범한 사람들도 만나 보았다.

미국에서는 가장 성장속도가 빠른 초대형 교회에서부터 사형수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교회를 방문했다. 우리는 이상의 연구 결과와 우리 나름대로의 성경 연구 결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 된 교회에서 행하고 계시며, 행하기 원하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이 책에 기록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교회 안팎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교회의 성경적 정의와 성격, 보편적인 교회와 지역 교회의 차이를 다룰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자주 반포르노 운동이나 낙태 반대 운동에 달려들고, 법과 사회의 부조리 퇴치운동, 도시 빈민가 쇄신 운동, 종교 자유 수호 운동 등을 벌인다. 물론 이런 것들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붙잡지 못하는 가치를 남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교회를 이루라”는 지고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몸이 갖는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오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란 정확히 어떤 존재인가? 제1부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몇몇 교회들의 예를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제2부에서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심각한 긴장을 다룰 것이다. 진리 수호를 위한 전투에서 교회가 세상 문화에 대해 독립적으로 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리의 파수꾼이 될 수 있으며, 성경의 수호자가 될 수 있겠는가? 제3부에서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다룰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어떻게 무장할 수 있는가?

  

먼저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이 유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첫째, 이 책은 각각의 교회들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본질적 교회(the church)를 다룬다.

일부 독자들은 왜 대형교회들(가령 자신이 다니는 교회)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지 궁금히 여길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전도 활동 개선책이나. 기도 모임의 부흥 방법 등을 기대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는 독자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러한 방법론에 관한 훌륭한 책들이 이미 많이 출판되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교회에 관한 위대한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고, 교회가 지닌 숭고한 비전을 고취시키며, 교회라는 한 단계 더 높은 관점에 주의를 돌리려는 것이다.

로버트 패터슨 목사는 복음주의 진영에 이런 내용을 다룬 신학 연구서나 일반 기독교 서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개탄한다. 그는 복음주의신학협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의 34년에 걸친 출판역사상 교회와 관련된 교리 문제를 다룬 경우는 단 한 번뿐이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인기 있는 기독교 서적들은 교회 성장, 전도, 목회 지도력 개발과 관련된 것들이다.

패터슨 목사는 이것은 교회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이해가 얼마나 천박한지 입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세례문제, 목회 구조, 교회의 책임 등을 무시한 채 주로 그리스도와 각 개인의 인격적 관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부분적으로는 범교회 운동의 기업성과 많은 복음주의적 교회들의 지나친 지교회적 성격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책의 집필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현상을 야기하게 된 원인 중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와 관련된 교리 문제를 다루려면 교리와 교단이라는 지뢰밭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일부 지뢰는 터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두들 교회 교리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려 든다.

  

이 문제는 두 번째 유의할 점과 관련된다. 교회는 모든 인종과 국가, 그리고 다양한 신앙고백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다고 진정 믿고 있기에,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포괄적인 관점에서 교회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두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가 이 책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인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철저한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침레교도이고, 엘렌은 장로교도이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 대해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독자들은 이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통 신앙인들과 신앙고백이 오랫동안 공통적인 입장으로 지켜온 문제들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기술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같은 포괄성을 용납하기 힘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 번째 유의점이다. 이들은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확신시켜 주는 엣 편견들을 버리지 못한다. 또 어떤 독자들은 교회 내부의 근본적인 차이는 도저히 하나로 융화될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같은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하나가 되라고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사제적 교회(sacerdotal church)와 비사제적 교회 간에, 알미니안 파와 칼뱅파간에, 전천년왕국론자와 후천년왕국론자 간에 교리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20세기의 일부 교회일치론자들이 했던 것같이 교리 차이를 가볍게 얼버무려서도 안 될 것이다. 교리 차이는 중요한 문제이며 교리 논쟁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이런 차이 중 일부는 오히려 건전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서 공유해 왔던 위대한 진리를 중심으로 함께 모일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 속에서 교회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위험한 길을 반드시 걸어가야만 한다.

  

네 번째 유의점으로서 우리는 신앙고백의 차이 이외에도 일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집필 과정에서 현대 복음전도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도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가령 눈앞의 효과만 노리는 치고 달리기(hit-and-run)식의 전도 방법, 전도가 교회의 제일가는 소명이라는 생각,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탈 기독교 문화(post-Christian culture)에서는 이미 진부하게 들리는 일단 믿고 보라는(tried-and-true) 식의 전도 방법, 공식처럼 특정한 고백이나 특정한 내용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고방식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억측의 죄라고 부른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오류 속에 그대로 안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최고의 신학자들에게 가치 있는 도움과 자문을 받았으며 이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상세히 언급하겠다. 만약 이 책이 논쟁을 야기시킨다면 이 논쟁은 교회의 분열을 심화하기보다는 교회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이 책은 결코 완결된 책이 아니며 완결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다룰 주제들이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교회에 대한 광대한 비전을 다시 일깨우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교도소와 동유럽권의 억압받는 교회들의 예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두 사람은 교도소 안의 교회와 교도소선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교도소가 자주 인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유럽 교회가 자주 인용된 것은 동유럽의 핍박받는 성도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건인 공산주의의 몰락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킨 믿음의 형제자매들은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서구 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여러분 중에는 찰스 콜슨이 교회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찰스 콜슨이 교회에 관한 글을 쓸 자격이 잇는가? 무엇보다 그는 신학교를 한 번도 다녀 보지 못한 평신도이며(나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서는 무척 유감으로 생각한다), 목회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목회를 하기에는 내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하겠다)

이러한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름대로의 입장을 변호하자면, 우선 나는 19년 이상을 보편적이라고 고백하는 교회에 속해 있었으며, 17년 동안 교도소선교회의 지도자로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정열적인 목회자 및 평신도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에게 통찰력을 얻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또한 내가 목회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스 기니스의 말 그대로이다.

“물을 알고 싶거든 물고기에게 묻지 마라.”

  

코람 데오(Coram Deo)는 종교개혁자들의 표어였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목전에서’라는 의미이다. R.C. 스프라울이 썼듯이 인간들을 부르셨던 거룩하고 장엄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 이것 외에 종교개혁을 표현할 말은 없는 것 같다. 그 경외심은 종교개혁자들을 두려움과 존경심으로 무릎 꿇게 만들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경외심이었다. 성경에 “온 교회와…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언급된 대로 초대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이 같은 경외심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바로 다음 순간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매 분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 바로 이런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코람 데오, 거룩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초대 교회는 세상을 바꾸었고, 종교 개혁자들은 당시의 교회와 문화를 변화시켰다. 동유럽과 옛 소련에서 박해받던 교회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세계를 변화시켰다.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거룩한 두려움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문화와 사회를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려는 열정,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글을 쓴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의 교회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더 철저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동양을 여행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 점을 분명히 보기 시작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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