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해석학 ~ 문자적 해석
이 글은 성경 해석에 있어 ‘문자 해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해 준다.
성경 해석학에 있어 ‘문자적 해석’이란 글 그 자체에 얽매인 해석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이란, 문법적, 문헌학적 해석을 말한다. 문자적 해석은 통상적 의미의 구조 아래에서의 해석을 말한다. 관습적, 사화학적 통용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고지식한 축자주의가 아니다. 축자주의 영감설이란, 해석학은 하등 상관 없는 해석의 범위를 말할 뿐이다.
문자적 해석은 알레고리 해석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문자적 해석 없이, 알레고리적 신비적 해석으로 바로 넘어가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단, 교권주의 등이 여기에서 발현한다.
문자적
우리는 이 “문자적”이라는 단어를 그 사전적 의미로 사용한다. “...글이나 표현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구성과 의미, 단어의 일상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따르는 알레고리나 신비적이지 않은”(웹스터 성경사전). 우리는 또한 이 단어를 그 역사적 의미로 사용한다. 특별히, 중세 시대에 발전되었고 역사적으로 어거스틴의 3중 이론에서부터 나온 로마 가톨릭 학자들의 4중적 이론(역사적 의미, 도덕적 의미, 알레고리적 의미, 종말론적 의미)에 반대하여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문자적, 문법적, 문헌학적 성경 주해의 우선권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특별히 종교 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구약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과 로마 가톨릭이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그들의 교리를 강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문자적”이라는 말은 “알레고리”적 이라는 말과 직접적으로 배치된다. 이는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의 지상 명제였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의 신학적 조류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문자주의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데, 우리가 “문자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이런 맥락이 아님을 밝혀둔다. 이 말은 사실 다소 모호하다. 어떤 학자들에게는 “문자적”이라는 말이 “축자주의”를 의미하는데, 근본주의자들을 문자주의자들이라고 말할 때에는 바로 이런 개념이 사용된다. 또 다른 이들은 신학에 있어서 정통주의가 하나의 문자주의라고 말해왔는데, 이는 정통주의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에 거의 마술적이고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한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빈도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곰”이라고 하면 문자적 의미 그대로 짐승인 곰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미련한 사람을 곰이라고 은유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모두 짐승인 곰을 곰이라고 부르는 것의 세 배만큼이나 자주 미련한 사람을 곰이라고 부르게 되면, 이 단어의 평상저인 문자적 의미는 “미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단어를 명사나 동사, 또는 형용사 등과 관련시키는 것을 지시라고 부른다. 모든 언어는 특정한 지시의 체계를 갖고 있다. 언어는 또 여러 지시 단계들을 반영한다. 일상적 대화는 통속적이고 평상적이며 상식에 속한 지시를 반영하는 반면, 예컨대 물리학에 대한 강의는 전문적 지식을 반영한다. 해석학 이론에서 “문자적”이라는 말은 이 지정의 과정의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관습적이고 통상적인 사회화된 지시를 가장 기본적 범위로 삼는다. 그러므로 한 단어의 문자적 의미란 그 언어에 축자되어 온 그 단어의 지시를 가리킨다.
조금 오래된 해석학 책들은 유수스 로쿠엔디(usus loquendi;대화체에서의 사용, 통상적 사용)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해석학 이론의 발전을 고려할 때, 지시라는 단어가 유수스 로쿠엔디보다 현대적인 구문론적 용어이다.
단어 또는 문장의 문자적 의미가 기본적, 관습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시된 의미라고 할 때, 우리는 언어의 복합성을 간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질학에서 충상(衝上), 단층 그리고 반충(反衝)에 해당하는 구조들이 언어의 구조 속에서도 관찰된다. 언어는 수세기에 걸친 오랜 사용을 통해 침식과 생성을 거치면서 층이 형성된다. 따라서 언어의 문자적 의미를 우선적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 때, 이는 언어의 복잡성을 염두해 두면서 하는 말이어야 한다.
언어의 영적이고 신비적이며 알레고리적, 혹은 은유적 사용은 그 언어ㅢ 문자적 의미 위에 쌓여진 의미를 층들을 반영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고지식한 문자주의”나 말 그대로 “축자주의”를 따르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문자적 해석은, 한 문서를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문서의 통상적이고 일반적, 관습적 그리고 전통적 지시의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혼(Horne)의 문자적 해석이라 할 때, 이 문자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아주 탁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더 나아가, 사려 깊고 주의 깊은 사람에게는, 그가 쓰는 글이나 하는 말이 하나 이상의 다양한 의미를 갖도록 일부러 의도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다. 따라서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이나 말을 듣는 청중 모두는 그 참되고 명백한 의미 외에 다른 것을 붙이지 않는다......문자적 의미란 성경의 어느 곳에서든 그 단어들의 나타내는 혹은 요구하는 의미, 즉, 그 어떤 문체(수사적 표현)나 은유 그리고 신비적 의미로부터 끌어낸 유추가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적절한 의미를 가리킨다.
크레이븐의 탁월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확한 개념을 보다 잘 드러내는 단어로서...‘정상적’이라는 말이 문자적이라는 말대신 사용되어야 한다. 사실, 예언서 해석에 있어서 서로 크게 다른 두 학파를 지칭할 때 문자적 그리고 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더할 수 없이 부적절한 표현이다. 이 용어들은 서로 상반된 개념일 뿐 아니라, 그 용어가 표방하는 각 해석 체계의 특징들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혼돈을 유발하기 십상이다. 문자적이라는 용어는 영적이라는 용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이라는 용어와 대조된다. 영적이라는 용어는 한편으로는 물질적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 의미로서의 육적이라는 말과 대조된다. 하지만 문자주의자는 ... 비유 언어, 즉 예언에 사용되는 상징들을 부인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 안에 깊은 영적 진리들이 담겨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의 입장은 단지 예언들이 정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즉 다른 모든 경우들처럼 언어의 법칙을 따라 자연스럽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문자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또 비유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영적 해석주의자들의 입장은 ... 사실 이 말에 의해 제대로 표현되고 있지 못하다. 그는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는 신비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예컨데, 메시아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묘사된 부분은 정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을 때는 영적 혹은 신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두 학파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해 주는 용어는 정상적 그리고 신비적이다.
위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강조점이 “자연스러운” “절적한” “명백한” “정상적인” 등의 표현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은 유수스 로쿠엔디나 언어의 의미론적 지시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이다. 이것은 단어의 독특한 암시나 단어의 유희나, 감추어진 은유들, 수사적 표현 그리고 한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층을 이해하지 못하는 축자주의가 아니다. 또한 이것은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자들, 혹은 보수적 해석학의 특징이라고 함부로 남용되는 소위 “고지식한 문자주의”도 아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우리의 해석학은 종교 개혁가들의 해석학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종교개혁자들이 노예적 문자주의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칼빈 자신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글자에 매인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 대단한 박사님들은 문자적으로 나타내어진 바에 단 한치도 벗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만일 이런 식의 해석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면, 신앙의 모든 빛은 이 조야한 야만성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기독교 강요 4, 1, 23).
성경해석의 문자적 기초를 변호하는 뜻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 접근은 다른 모든 문학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통상적 관행이다. 책이나 논설 혹은 시를 읽을 때, 그 글의 문학적 장르가 우리를 해석의 다른 차원으로 이끌기 전에는 우선적으로 그 문자적 의미를 찾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온갖 형태의 문학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문자적 의미가 아닌 다른 차원의 의미들은 언제나 이 문자적 의미가 가장 우선되는 의미층을 형성하며, 모든 문학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이 된다. 만일 어떤 동양의 신비 문학서를 읽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이런 문자적 해석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정당치 않은 방법이라고 판명되면 신비적, 알레고리적, 또는 은유적 해석 방식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질적 성격을 이런 저런 식으로 속단함이 없이(거기에 보다 깊은 의미가 모형론적으로, 알레고리적으로, 신비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표현되어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우리는 우선 문자적 혹은 문헌학적 해석의 견지에서 접근해야 한다.
2. 모든 부차적 의미들은 언어의 문자적 의미층에 의존한다. 비유, 모형, 알레고리, 상징, 수사학적 표현, 신화 그리고 우화 등은 이들을 형성하는 의미층이 있기 전에 어떤 문자적 의미층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문자적으로 “농사 짓는 일”에 관련된 용어들을 다룰 때에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또 사자가 상징하는 바는 문자적으로 사자에 관해 말해지는 바에 근거한다. 기도의 상징으로서의 향은 일상 생활 속에서 향을 사용하는 예들을 통해 이해되며, 또 일상적 대화 속에서 말해지는 향의 의미를 따라 표현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이나 사라 그리고 하갈에 대해 말한 그 모형론적 혹은 알레고리적 해석은, 이 인물들에 관해 언어의 문자적 의미층을 반영하는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진술들에 근거한다. 따라서 모든 비문자적 진술들이 보다 원래적인, 보다 원초적인 문자적 의미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문자적 주해는 성경이든 성경 이외의 문서들이든 간에, 모든 해석의 출발점이다.
3. 문자적 해석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을 때에만, 성경의 주해적 남용 또는 오용을 막을 수 있다. “성경의 주석적 남용 또는 오용”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교회사와 또 이교사에서 일종의 알레고리 방식(성경의 이중적, 삼중적 혹은 사중적 의미를 찾는 식의 모든 해석들)으로 성경에 없거나 비성경적 생각들을 성경 속에 집어넣어 해석해 온 관행들을 가리킨다.
성경의 알레고리 해석의 역사를 보면, 성경에 문자적, 역사적 혹은 문법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으나 무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문자적 해석은 “육적” 또는 “피상적” 성경 이해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을 행함에 있어서 알레고리주의자들은 그들이 알레고리 해석을 하기 위해 사실상 얼마만큼의 문자적 해석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더 나아가, 다른 많은 종류의 영적 또는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들이 있어 왔다. 교회 교부들은 구약에서 교회의 교리들을 찾아내기 위해 알레고리를 무절제하게 사용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구약으로부터 그들의 성례전이나 계급적 교회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몇 가지 형태의 알레고리 해석들을 사용했다. 비록 어떤 이교들은 이상야릇한 알레고리들을 개발했다. 수세기에 걸쳐 복음서의 비유들은 적절히 이해되지 못했는데, 이는 문자적이 아니라 늘 알레고리로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그 많은 알레고리 해석들 가운데 어떤 것을 정당한 해석으로 고를 것인가? 사실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즉,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최우선적 권한을 부여하고 이 문자적 의미로 하여금 제시된 다른 알레고리들이나 신비적 해석들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든 그의 신학을 성경의 부차적 의미층에 기초시키는 사람은 사실 상상에 의한 해석을 끌어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상상력을 통해 들어오는 해석들은 불행하게도 비성경적 생각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성경의 의미를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해석의 닻을 문자적 주해에 드리우는 길뿐이다. 문자적 해석은 축자주의의 소용돌이와 알레고리의 괴물이라는 진퇴양난의 풍랑 속에서 헤어나는 유일한 대책이다. 문자적 해석은 성경의 바른 해석을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이고, 의미 있으며, 또 필수 불가결한 제어 장치이다. 사실 이보다 더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즉, 문자적 해석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성경을 지켜 내야 하는 것은 신학자나 해석자의 “의무”이다.
문자적 해석의 우선권이라는 지침이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세 가지 방식들이 있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수사학적 표현이나 상징들, 모형들, 혹은 알레고리를 간과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은 흔히 비난받듯이 눈먼 축자주의나 고지식한 문자주의가 아니다.
2. 해석학에 있어서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는 것이 곧바로 축자주의나 고지식한 문자주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런 비난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런 일이 신학 논쟁 가운데 자주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믿는다는 것이, 해석자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축자 영감설이란 성경의 기원에 관한 이론으로, 그 자체로서는 해석학의 이론에 관해 아무것도 결정해주는 바가 없다.
하지만, 축자 영감설과 문자적 해석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일단의 아주 정통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자적 해석”이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 방식 이외의 다른 모든 해석 방식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는” 해위로 간주한다. 그들의 의도는 참된 것이나 성경이 어떤 식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하는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순진한 동시에 잘못된 것이다.
3. 성경에 관한 것이든 다른 문서들에 관한 것이든 해석학에 대한 모든 논의들 배후에는 매우 고도화된 언어 이론들이 있다. 근대철학분야에 있어서 언어데 대한 이론은 주요 주제로 등장했다. 이미 이런 언어 이론에 접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문자적 해석에 대한 우리의 변화가 언어의 문자적 차원에 대한 단순한 확정 정도로 보일 것이다. 우르반이나 카시러처럼 이 분야에서 앞서 가는 선구자들은 은유 혹은 “죽어버린 은유”가 과연 어느 정도만큼 언어의 문자적 차원을 침투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언어에 따른 이러한 추가적인 복잡한 요소나 비엔나 학파에서 연구되고 있는 언어의 보다 새로운 개념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실용적 목적을 고려해 볼 때 불필요한 것이다.
<성경 해석학>, 버나드 램, pp.167·-176,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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