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0:4-6절 해석>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
이제 후반부인 계시록 20:4-6절까지 해석할 차례이다. 전반부에서 말한 것처럼 양자는 서로 다른 배경이다. 전반부는 이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천상(하늘나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전반부는 과거에 있었던 환상이라면 후반부는 천상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환상이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순교한 영혼들의 활동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본 절에 배경은 천상이다. 그래서 1-3절과 4-6절은 완전히 서로 다른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문장만 이해할 수 있는 지능만 있어도 알 수 있다. 설사 지능이 약간 떨어진다 할지라도 설명 한 번만 들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된다.
전천년설의 천년 왕국의 실체는 바로 계시록 20:4-6절을 근거로 하고 있다. 본 절이 과연 역사적인 천년 왕국을 말하고 있을까? 사도 요한이 보았던 천상의 모습이 앞으로 지상에서 펼쳐질 일일까? 그리고 여기 천년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도 되는가?
본 절에서도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다음 여 덜(8)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보좌(들)’이다. (2)‘심판하는 권세’이다. (3)‘순교자들’이다. (4)‘살아서(생명)’라는 의미이다. (5)‘천년동안 통치기간’이다. (6)‘첫째 부활’이다. (7)‘복과 저주’의 의미이다. (8)‘둘째 사망’이다.
후반부는 전반부와 달리 중요한 요소들이 더 많다. 이러한 요소들이 진실하게 해석되어 지지 않는다면 천년 왕국의 실체는 오리무중에 빠질 것이며, 진실하게 해석되어진다면 천년 왕국의 실체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만이 천년왕국의 진실성을 말해줄 것이다.
4절에서 우리는 첫 번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1번 해석). 사도 요한이 본 보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도 요한이 본 보좌는 이 땅에 있는 보좌가 아니라 천상에 있는 보좌이다. 결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20:1절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이지만. 20:4절은 ‘내가 보좌들을 보니’ 하늘을 쳐다보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천년설에 따르면 여기 보좌는 땅에 있는 보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 세상에 도래할 천년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이 본 보좌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이다.
원래 보좌는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곳을 가리킨다(시9:4; 사6:1). 하나님의 보좌는 예언적, 묵시적 영원성,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사6:1; 겔1:4-28; 단7:9-10; 계4장). 그리고 보좌의 장소적 의미는 하늘이다(시11:4; 사66:1; 마5:34). 결코 땅이 될 수 없다. 물론 때때로 예루살렘(렘 3:17), 성전(겔43:7) 등이 하나님의 보좌(위)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권력, 왕권, 통치를 통칭하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권위를 나타낸다(시9:4; 97:2). 그래서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보좌하고는 염연히 다르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지금 하늘에 있는 보좌이다. 결코 땅에 있는 보좌가 아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세상에 실현될 천년왕국 시대에 하나님의 보좌는 더더욱 아니다. 하늘의 보좌는 반드시 성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도 이 보좌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는 장면이나(요17장), 하늘의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모습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마22:44, 26:64; 롬8:34; 골3:1; 히1:3).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완성시키기까지는 아들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백보좌 심판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실 심판을 예수님에게 위임하신 것이기(요5:22) 때문에 재림을 통해 구원을 완성하기 까지는 우편에 계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좌’는 성부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고유적 장소로서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천년 왕국이 역사적으로 도래한다 해도 예수님의 백보좌(심판)이지 하나님의 보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전천년설에 목숨을 걸고 있다.
요한의 증언을 다시 한 번 보자. 본문을 생각 없이 보면 잘 안보일 수 있겠지만 자세히 보면 사도 요한이 본 보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보좌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보좌라고 하지 않고 ‘보좌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 단락에서 보좌에 대해 말하면서 보좌는 성부 하나님의 고유적인 왕권(통치권)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한이 환상으로 본 것은 고유적인 보좌가아니라 여러 개로 볼 수 있는 보좌들이다. 요한이 보았던 보좌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의 보좌들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던 예수는 갑자기 보좌로 옮겨 갔을까?
여기 보좌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좌가 아니다. 사도 요한이 본 보좌들은 놀랍게도 예수를 증거 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은 영혼들 그리고 여러 가지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킨 자들의 영혼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본 하늘의 보좌들은 복음 때문에 순교한 영혼들을 가리키고 있다.
하늘로 승천한 예수님도 보좌와 거리가 있다고 했다. 아무리 순교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어떻게 보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들에게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이다(2번 해석). 다시 말해서 순교하는 영혼들이 심판의 권세를 부여 받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좌들’이라는 복수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여기 보좌들은 분명 순교자들의 영혼을 가리키고 있지만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현이다. 순교한 영혼들이 실제적으로 보좌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보좌로 표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사도 요한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고 있을까?
이것은 전반부 해석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전반부는 사단의 결박이 핵심이다. 사단을 결박한 목적은 사역자들에게 사단의 결박을 알리면서 땅 끝까지 복음 전파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후반부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 위로와 격려해 주기 위해서 환상을 보여준 것이다.
사도 요한이 생존시에 교회가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 환상은 중요성을 지닌다. 후에 계속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요한의 계시록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나라에서 다스리고 있는 영혼(믿음의 선배)들은 보고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감히 보좌들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 20:4절 내용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보여 준 환상은 천년 왕국이 역사적으로 도래할 것을 먼저 보여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1) 사도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는 이 세상에 있는 보좌(혹은 성질상 실현될 수 없는 일까지 포함)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의 현장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환상은 앞으로 역사적으로 실현될 천년 왕국의 모델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복음 전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고난 받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먼저 순교한 영혼들의 활동 사항을 보여줌으로서 위로와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은 ‘살아서’라는 말이다(4번 해석). 여기 ‘살아서’라는 말은 ‘생명’ 혹은 ‘생명의 활동’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하나는 영혼은 몸처럼 죽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성경 말씀의 진실성이다(창3:19; 전3:19-21; 보충설명).
여기 ‘살아서’라는 말은 육체적 부활, 즉 죽은 자 가운데 몸이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부활은 5절에 있기 때문이다. 4절은 요한이 현재 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혼들을 보며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4절의 상태는 육과 영혼이 연합된 부활의 상태가 아닌 몸은 여전히 흙속에 있으며, 영혼은 천국에 있는 상태, 즉 영혼과 몸이 아직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전천년설 주장처럼, 4절을 역사적 천년 왕국의 실현으로 본다면, 이들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부활된 몸으로 보좌에 있는 상태어야 한다. 왜냐하면 4절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육체와 영혼이 연합하는 부활은 비로소 5절에 있게 되므로 4절은 결코 부활의 몸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전천년설에 따르면 4절은 이미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자들은 서슴없이 혹은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전천년설은 신학 사상의 한 기류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살아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 물의 해답은 앞에서 말한 보좌들에게 있다. 요한이 ‘살아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앞에서 말한 ‘보좌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 보좌들은 부활된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재림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 ‘살아서’라는 말은 보좌에 있는 순교한 영혼들이 명백하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요한이 육체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금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들의 생명, 천국에서의 활동을 말한다.
영혼들의 활동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운동 경기로 비유하고 있다. 하늘에 영혼들이 세상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1). |
여기 ‘허다한 증인들’은 관중들이 경기장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을 구경하는 것처럼 지금 세상에서 믿음의 경주의 증인들, 즉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복음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는 증인들은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믿음의 선조들이다. 히브리서 12:1절은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이 접속사는 바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을 가리키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증인들과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순교한 영혼들 간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①똑같이 하늘나라(천상)에 있는 영혼들이다. ②살아 (생명)있다는 것이다. ③양자 모두 증인의 역할이다. ④ 양자는 증언하는 때(기간이)가 있다. 2) 서로 다른 점이다. ①전자는 증언자에 대해 운동 경기를 관람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과 후자는 왕의 통치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②전자는 증언하는 기간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천년이라는 기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부분은 양자가 증언하고 있는 기간이다. 다른 것들은 쉽게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증언하는 때(기간)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기간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믿음의 조상들이 싫증난다고 중간에 포기할 일이 아니다. 이들 중에는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도 있다. 지켜보는 것은 순교보다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다음은 사도 요한이 본 왕의 통치자로서 증언하는 순교한 영혼들이다. 이들은 언제까지 증언하는가? 천년 동안이다. 이 부분은 전반부 해석과 연결되어 있어 있기 때문에 전반부에 다루었던 것을 다시 인용하겠다.
사도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무저갱(열쇠)’이라는 단어는 사단의 행동이 제압당하는 방법에 대한 상징적으로 볼 수 있다. 사단이 제압(결박)당하는 기간을 사도 요한은 천년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기간은 예수의 초림에서부터 예수의 재림 때까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왜 사단이 결박당하는 기간을 ‘천년’이라는 숫자로 표기했을까? 실상은 이 물음이 해결된다면 ‘천년’이라는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이 부분은 4-6절 해석에서 다시 다루게 된다. |
전반부 천년은 사단을 결박한 기간이며, 본 절은 순교한 영혼들이 살아서(생명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하는 기간을 말한다. 사도 요한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본 것이다. “사단이 제압(결박)당하는 기간이 천년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기간은 예수의 초림에서부터 예수의 재림 때까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끝이 나기 때문이다.
순교한 영혼들이 통치하는 기간을 사도 요한이 천년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통치 기간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이다. 왜냐하면 5절의 부활은 예수의 재림의 때를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반부처럼 중요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왜 사단이 순교한 영혼들이 통치하는 기간을 ‘천년’이라는 숫자로 표기하고 있을까? 실상은 이 물음이 해결된다면 ‘천년’이라는 비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 왕국은 21장 새 하늘과 새 땅처럼 실제적으로 임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성도들의 영혼의 현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시록 20:4-6절은 역사적이며 실제적으로 임재 하는 상황이 아니다. 여전히 천상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도 요한의 기록에 의해서 ‘천년’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인 것임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사도 요한의 이어지는 계시록 20:7-15절의 내용은 사단의 잠시 동안 번창한 활동, 최후의 전투, 마지막 대 심판 등이 서술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천년 왕국의 실제적인 도래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1장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원히 들어갈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실제적으로 도래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20장과 21절 사이를 천년이라는 간격을 환상으로 본 것이 아니며, 또한 천년의 간격을 의식하며 기록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에 천년은 역사적으로 도래할 왕국이 아닌 상징적으로 교훈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사도 요한의 의도인 것이다.
전천년설에 의하면 서술상 계시록 20장과 21장 종말부분은 재림-부활-천년왕국-심판-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순이다. 그렇다면 래서 21장의 도래는 두 가지 중에 하나로 보아야 한다.
첫째는 천년 왕국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도래는 한 번 밖에 없기 때문이며(21장), 그리고 영원한 나라보다 천년 왕국의 도래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장 도래를 천년 왕국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전천년설 사상은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의 도래에 대한 시기도 설명할 수 없다.
둘째는 21장을 영원한 나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의 서술한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년 왕국은 역사적으로 도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천년 왕국은 역사적으로 도래할 수도 없는 나라이다.
그래서 여기 천년 기간을 문자적 혹은 역사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 기간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천년 기간은 4-6절에서 중요한 요소로 나오기 때문에 4-6절 해석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사도 요한은 사단이 결박되어 천년 동안 제압당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순교한 영혼들이 지금 하늘나라(천상)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으로서 통치하는 모습도 환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의 재림의 때이다. 사도 요한은 두 환상을 분명하게 보았고, 사단이 제압당하는 기간이나 순교한 영혼들이 통치하는 기간을 예수의 재림 때까지 알게 되었지만 예수가 언제 재림할지는 요한은 모른다. 다시 말해서 재림의 때는 환상을 본 요한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재림의 때는 알 수 없다. 반면에 재림의 때, 시기(일자)는 예수님마저도 요한에게 보여주며 알려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환상 중에 비밀은 여전히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숫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헬라어의 특성을 살려서 ‘천(년)’으로 말한 것이다. 여기 ‘천(1,000)’은 가장 완전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불확실한 기간을 나타낼 때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수이기도 하다. 전반부에서 언급했듯이 1,000은 완전수인 10을 다른 완전수인 3(삼)으로 3(세)번 곱한 수치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기간은 ‘완전한 기간, 혹은 불확실한 긴 시간’인 것이다.
숫자상 완전수는 여러 개가 있다. 3(하늘의 완전수), 4(땅의 완전수), 7(하늘과 땅을 합한 완전수), 10(가장 충만한 완전수) 등을 완전수라고 말한다. 많은 완전수 중에 사도 요한이 10을 3번 제곱한 1,000을 사용하게 된 것은 다름대로 의미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천년’은 역사적일 수 없으며, 또한 역사적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 재림 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천년설주의에서는 목숨을 걸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천(년)’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이것을 누가 문자적으로 보겠는가? 심지어는 여기 ‘천년’은 전천년설주의에서 까지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진실로 진실로 문자적인 것을 의식을 하면서 ‘천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사도가 문자적으로 의식을 하며 기록을 했다면, 10(년)이나 100(년)을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000년보다는 100년이나 10년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비교하는데 1,000년은 너무 멀다. 아니 상상할 수도 없는 너무 먼 시간(기간)이다. 반면에 1,000년은 실제적인 것보다 상상할 수 있는 숫자이다. 베드로 역시 요한과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1,000은 가장 완전한 수이면서 반면에 불확실한 어떤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때 적합하게 쓸 수 있는 수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한 사실은 사도 베드로가 ‘천년’을 말하고 있는 배경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다(벧후3:1-13). 그렇다면 베드로가 1,000(천년)을 사용하게 된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베드로가 1,000(천년)을 사용한 것은 완전수보다는 불확실한 어떤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베드로 역시 예수의 재림 때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종말, 특히 재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숫자로 표기한 것은 대부분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그 이유는 두 눈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명확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예수의 재림을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상징적인 용법(숫자)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경을 기록하는 사도들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 종말의 때, 새 예루살렘 도래는 정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나 사도 베드로도 예수의 재림의 때를 ‘천년’이라는 숫자를 이용하여 상징적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허다한 증인들의 활동 기간을 예수의 재림의 때로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면 천상에서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천년 기간은 문자적으로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무천년설에서는 이 천년 기간을 예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4절 역시 역사적 천년 왕국의 실현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부활된 몸이 아니며, 5절에 비로소 부활의 현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5절을 보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5절에 특징 중에 하나는 괄호가 들어있다. 이 괄호는 어떤 사본은 없는 내용이고 어떤 사본은 있는 내용이어서 참고 하라는 뜻이다.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이 원본에 없는 것이라면 5절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이는 첫째 부활이라”
전천년설에서는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을 아주 중요시 한다. 어떻게 보면 전천년설주의자 중에는 여기에 생명을 걸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두 부활론 혹은 다회적 부활론을 주장할 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전천년설들도 두 부활론은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부활을 단회적으로 말하고 있지 두 번 혹은 다회적인 부활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모순된 사상인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전천년설주의들도 이러한 모순에 당착(撞着)에 있는 것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5절에 핵심은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6번 해석). 여기 5절은 공중으로 휴거보다는 육체는 이미 죽어 무덤 속에 있지만 지금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통치하고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활의 순서는 사도 바울이 말한 부활의 순서와 일치한다(살전4:16, 17). 그리고 4절에서 말한 것처럼 ‘살아서’와 5절의 영혼들의 부활과 바로 연결된다.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4절은 육체적 부활의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환상이라고 해도 역사적 천년 왕국의 실현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첫 번째 부활에는 생존자의 휴거도 포함된 부활을 말한다. 다만 사도 요한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금 요한이 보고 있는 환상은 천상에 있는 영혼들이지 이 세상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생존자들의 휴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부활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부활의 몸, 영적 상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부활의 현상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 부활이라는 개념 속에는 무덤으로 부활(죽은자)과 공중으로 휴거(생존자) 모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양자는 시간적 차이는 있겠지만 동시 부활을 말한다(고전15:23, 24; 살전4:16, 17).
그런데 전천년설에서는 4절은 예수의 재림 때의 부활을 말하며, 5절은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에 있을 또 다른 부활이다. 원장은 이것을 일명 ‘전천년설의 두 번(2회) 부활론’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전천년설주의자들은 부활은 말하고 있으면서도 두 번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두 번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을 한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두 번의 부활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한 번은 예수님의 재림 때이며, 한 번은 천년 왕국이 종료되는 때이다. 두 번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전천년설의 교리는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전천년설 비평에서 ‘천년 왕국 시대의 부활의 시기, 장소, 회수’ 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전천년설은 의문의 의문을 낳고 있는 사상이다’라고 한 것도 이제는 이해할 것이다. 성경은 부활을 복수로 말한 적이 없다. 항상 일회적인 의미로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무천년설에서는 부활은 예수님 재림 때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으로 말한다.
성경의 부활은 두 번 이상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고로 천년 왕국은 역사적으로 실현될 왕국이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상징하는 왕국인 것이다.
두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두 부활은 존재하고 있다. 두 부활은 성경적인 부활이 아니라 전천년설이라는 신학 사상이 만들어 버린 부활론이다. 그리고 신학의 이름으로 활개치고 있으며, 박사 논문을 통과되어 박사까지 만들고 있다. 그리고 박사의 신분으로 강의를 하고 있으니 많은 설득력으로 사람들을 매료(魅了)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6절을 보자. 이제 요한은 ‘첫 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말한다(7번 해석). 복된 이유는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는 것이다(8번 해석). 여기 둘째 사망은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말한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은 둘째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이 최종적으로 받을 어떤 형벌의 방법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부활한 성도들은 사단의 어떠한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이 받을 복이며 거룩한 모습이다.
사단의 권세로부터 다스림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이다. 이런 일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는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 부활에 참여하는 만이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참으로 복되고 거룩한 모습인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 여기 제사장은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좌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완전하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화목을 의미하는 제사장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받을 두 번째 복이며 거룩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사단으로부터 자유함이나 제사장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받는 복이다.
그리고 여기 천년의 기간은 4절과 '완전한 기간‘으로서는 동일하지만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20:4절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간이므로 ‘제한성이 있는 기간’이지만, 그러나 20:6절은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첫 번째 부활, 악인의 심판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제한성이 없는 ‘영원한 기간’을 말한다.
여기까지가 무천년설에 계시록 20:1-6까지 해석의 핵심이다.
이것은 주제에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무천년설은 계시록 20장 해석에 있어서 성경 해석의 원리”를 따르고 있는 해석 방법이다.
전천년설의 비평에서 전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계시록 20장 해석이라고 하면서 “무천년설 해석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무천년설 해석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고 했다. 그 문항에 대한 답을 이것으로 대처한다(본 자료, p. 8).
그리고 무천년설의 핵심 3번(무천년설은 천년 왕국을 역사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으로 본다. 그래서 도표에 천년 왕국이 없다.)에 답은 여기에 함께 들어 있다(본 자료, p. 20).
B. 계시록 20:1-6절에 나타난 상징적인 요소들
이 주제는 계시록 20장 해석에서 이미 다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천년 왕국’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 다시 한 번 요약정리를 한 것이다.
1) 무저갱(열쇠). 사단을 가두는 장소가 아니다. 사단을 가두는 장소는 ‘불못’이다(계20:10, 14, 15). 특히 열쇠의 기능으로 사단을 제압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참고, 마16:19).
2) 보좌(들). 보좌는 하나님만이 좌정하는 곳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도 보좌하고는 거리가 있다(마22:44; 26:44; 롬8:34; 히1:3). 그리고 보좌는 하나님의 왕권, 권위, 통치권을 의미한다. 그런데 계시록 20장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사용되어 구원 받은 성도들의 영혼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핍박받고 있는 지상의 전도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3) 권세 받은 자. 여기 권세는 심판하는 권세로서 순교한 성도들이 받은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받은 권세가 아니다. 그러나 심판의 권세는 오직 예수에게만 부여하셨다(요5:22). 그러므로 여기 권세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 권세도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4) 이마와 손에 찍은 표. 여기 상황은 예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특히 종말에 있어서 적그리스도에게 받을 ‘표’를 말한다. 일명 ‘666’ 표와 같은 것이다(계13:18).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666표’라고 했던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상품에 표기된 바코드(bar code, 제품의 정보가 암호화 되어 있음)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진짜 ‘666표’라고 하면서 아예 물건사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 표는 사단의 속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표 자체가 상징이라는 말이 아니다. 표 받은 형태가 상징인 것이다.
5) 천년. 계시록 20:3절에 나온 ‘천년’은 사단이 이 세상에서 제압당한 기간을 말한다. 결코 천년 왕국 시대가 아니며, 사단이 실제적으로 1000년 동안만 제압당하는 기간은 더더욱 아니다. 불확실한 기간을 뜻하는 상징적인 숫자다. 그러나 20:4, 6절에 나온 ‘천년’은 순교한 영혼들이 천상에서 증인으로서 통치하는 기간으로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할지 모른다. 물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숫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헬라어 숫자의 특성 때문에 ‘천년’이라는 숫자로 예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표기한 것이다.
6) 왕의 통치. 여기 왕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다. 순교한 성도들의 영혼이 마치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의 영혼이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영혼이 통치하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적인 요소는 20장 이외에도 많은 부분이 있다. 이것을 간과에서는 안 된다. 특별히 계시록에 나온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C. 계시록 20:1-6절의 해석의 결론
본 단락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무천년설은 계시록 20:1-6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 해석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전천년설 비평에서 ‘전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계시록 20장 해석의 문제’라고 제시를 했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실감은 했으리라고 또한 생각되어 진다.
계시록 20장은 종말 중에 종말의 현상을 다루고 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무서운 핍박의 시대였다.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를 당했든지 아니면 다른 일로 인해 사역을 마친 상태였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으로 유배된 상태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 명제(命题)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밧모섬에서 조용히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요한에게 계시를 특히, 우리가 다루고 있는 20장의 환상을 어떤 의도로 보여 주었을까?” |
천년 왕국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결코 아니다. 당시 초대교회 시대에는 복음은 한 마디로 고난의 밭이었다. 이 사실을 요한보다 예수님은 더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요한은 마지막 사도인 것이다. 요한마저도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이제 90이 넘는 노인이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밧모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환경에 있는 마지막 사도, 최후까지 남아 있는 사도에게 해 줄 것은 계시뿐이었을 것이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받고 고난 속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예수님은 계시해 줄 필요를 느껴 밧모섬에서 유배하고 있는 요한에게 계시, 특별히 20장의 환상을 보여 준 것이다.
전반부 핵심인 사단의 결박과 후반부 핵심인 순교자들의 영혼의 통치는 너무나 일치되는 대조이다. 이것은 한 편의 동양화 그림 같고, 100여 명이 동시에 연주하는 교향곡과 같다. |
계시록 20장은 천년 왕국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계시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성경을 빌려오지 않아도 계시록 20장 자체에서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은 당시 고통 받고 있는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20장에서 역사적으로 실현될 천년 왕국은 찾아볼 수가 없다.
2. 무천년설은 종말에 순서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대심판, 영원한 나라의 도래로 본다.
이 부분은 계시록 20장 해석에서 다루어졌다. 핵심을 다시 말한다면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를 20장 이후에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시록 20-21장은 종말 중에 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있을 종말의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대 배교하는 사건이 있게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면 성도들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첫째 부활(휴거 포함).
3) 악인들의 심판이 있게 된다.
4)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종말에 있을 마지막 현상(과장)에 관한 기록이다. 사도 요한은 이 외에 어떤 것도 끼워 넣지 않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천년 왕국을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역사적으로 실현될 천년 왕국을 이 틈에 끼워 넣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와 천년 왕국의 성질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요한으로서는 자기 임의대로 삽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요한이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 특히 천년 왕국의 성질에 알고 있었다면, 20장을 연장해서라도 천년 왕국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남겨야 했다. 그러나 요한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상징적인 종말의 현상을 역사 속에 끼워 넣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년 왕국의 성질을 몰라서가 아니라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라야 한다. 사도 요한도 끼워 넣지 않은 역사적인 천년 왕국을 그 누구도 끼워 넣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도 신학자들은 신학의 이름으로, 목회자들은 성경 해석의 명분으로 끼워 넣으려고 안간 힘을 다해 왔다. 그 결과가 바로 역사적 전천년설이라는 사상이 나온 것이다. 한 때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판을 칠 때도 있었다.
3.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의 문제점들을 거의 해결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본론에서 충분하게 설명이 되었다. 그래서 전천년설의 문제점을 상기하면서 직접 답(설명)하겠다.
전천년설은 의문의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는 것을 강의를 통해 실감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때 부활은 어떤 사상이라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천년 왕국 시대는 의문의 의문을 낳게 된다.
천년 왕국은 어디에 만들어 지는가? 지상인가? 공중인가? 지상이라면 그 장소는 어디인가? 에덴 동산이 있는 곳으로 추동되고 있는 중동지역인가? 유럽인가 미국인가 아니면 아시아인가?
부활체와 육신체 곧 부활하지 못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과 조화의 관계는 가능할까? 부활체는 시공간을 초월하는데 육신체는 여전히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다닐 수 있는데 1년 10년 100년도 아닌 1000동안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1000년 동안 부활체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훤히 보고 있는 지상의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하며 살아갈까? 여전히 그대로의 모습일까? 거룩한 체하면서 살아갈까?
진실한 종들은 다 휴거했는데, 교회는 남은 삯군 목사들이 비로소 회개하고 교회를 인도하고 복음 전파를 계속할 것인가? 주님이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천년 왕국을 실현시키시고, 직접통치하고 있으며, 성도의 부활체가 공중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데, 성경과 복음 그리고 교회는 이 지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부활의 의문은 얼마나 꼬리를 달고 있는가? 세상의 남은 사람은 구원이 있을까? 없을까? 없다면 성경적 명확한 근거는 있는가? 있다면, 죽는 순간에 즉시 부활하는가? 무덤에 일단 들어갔다가 부활하는가? 무덤에 들어가면 그 기간은 얼마인가? 1년인가? 10년 100년 1000년인가? 부활은 개인적인가? 재림 때처럼 집단적인가?
그 밖에도 의문의 의문들은 수 없이 더 있다. 제 강의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전천년설을 비교해 보면 여러분도 의문들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천년설주의자들도 이러한 의문의 의문을 잘 모르고, ‘천년’이라는 숫자에만 목숨을 걸면서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제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의 문제점들을 거의 해결할 수 있다.’는 이 장엄한 주제를 이해할 것이다.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의 이런 문제점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데, 세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첫째는 사도 요한의 예언의 기록을 진실하게 따르면 해결할 수 있다. 무천년설이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신학적 논제나 비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일예가 바로 계20:1-6절에 대한 해석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둘째는 천년 왕국이 문자적인 숫자가 아닌 요한이나 베드로가 사도라고 할지라도 감히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기간인 상징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 예수님 재림 이후에 바로 심판과 사단의 영원한 결박이 바로 이루어져 새 예루살렘이 임재하면 모든 성도는 그토록 염원했던, 천국, 하나님의 나라, 주의 나라로 바로 직행하기 때문에, 부활체와 육신체의 조화가 있을 수 없으며. 부활도 두 번도 아닌 한 번으로 모두 해결된다.
세째는 사도 요한이 기록하는 순서를 그때로 따르면 된다. 예수님의 재림, 성도의 부활, 사단의 결박과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4. 무천년설이라고 해도 완벽한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솔직한 심정으로 표현한 말이며, 다른 하나는 무천년설보다 더 성경적인 견해가 있으면 기꺼이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나타낸 말이다. <보충설명>
<결 론>
고로 원장은 무천년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종말 사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부분이 무천년설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으로 특강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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