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관점에서 장례 용어 바로 알기
신자란 모든 면에서 거룩해야 하며 부하뇌동 해서도 안 되고 전통이니까 다 받아들이는 자들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성경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상고해야 하고 바로 알아야 올바로 행할 수 있다.
49제(재)(四十九齋)
많은 사람들이 49제라고 하지만, 49재(四十九齋)가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49재란,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에 좋은 곳에 태어나길 기원하며 거행하는 불공의식이라고 한다. 원칙적으로 매 7일마다 7차례 재를 지내므로 칠칠재(七七齋)라고도 한다. 참고로, 재(齋)란, 상복 아랫단 재이다.
<구사론 俱舍論>에 의하면 한 인간의 존재 양상은 4유(有)로 구분되는데 생명이 결성되는 찰나를 생유(生有), 이로부터 임종 직전까지를 본유(本有), 임종하는 찰나를 생유(死有), 이로부터 다시 생명이 결성되는 생유 이전까지를 중요(中有)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죽으면 중음(中陰)이라고도 불리는 중유의 상태로 얼마동안 있게 된다. 카톨릭의 연옥(煉獄) 개념과 비슷한 면이 있다. 중유에 대해 만일 출생의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수차례 죽고 태어나는 식으로 7일을 여러 번 경과하는데, 그 최대 기간은 49일이라 한다. 즉 사람은 죽어서 7일마다 다시 생사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49일째는 반드시 출생의 조건을 얻어 다음에 올 삶의 형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49재가 사자(死者)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 정착되고 중시된 것은 이런 관념에서 연유한다. 49재는 사자의 중유 상태 즉 중음신(中陰身)이 좋은 세계로 재생하도록 최종적으로 결정되길 기원하는 불공의식이며, 이 날에 이르기까지는 좋은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7일마다 경을 읽고 재를 올린다.
천주교의 연옥 개념이나 불교의 49재 개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영혼이란 죽음과 동시에 육체와 분리되어 떠나는데 살아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느냐 불신했느냐에 따라 낙원과 지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을 기다린다고 한다. 49재는 성경의 안식년 개념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따라서 불신자들이 지키는 49재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나 신자들은 결코 49재를 지켜서는 안 된다. 살아있을 때 잘 해라. 기회가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우제(三虞祭)
삼우제란, 염려할 우, 우제우로 유교식의 전통상례의 용어로써 죽음 사람을 장사한 후 3일째 되는 날에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삼우제가 끝난 뒤에는 고인의 산소를 찾아 첫 성묘제사를 한다. 우제(虞祭)라는 말은 시체를 매장한 뒤 그의 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를 말하며, 초우제(初虞祭), 재우제(再虞祭), 삼우제(三虞祭)로 나뉜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지천에 떠돌아다니거나 방황한다고 하지 않는다. 곧 바로 낙원이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한이 맺힌 영혼이 편안하게 쉬지 못하거나 귀신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따라서 신자는 영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해서 드리는 유교의 삼우제를 결코 드리지 말아야 한다. 살아있을 때 잘 해라.
위령제(慰靈祭)
위령제란, 위로할 위, 영혼 령으로 죽은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말한다. 진혼제라고도 한다. 진혼이란 망혼(亡魂)을 진정시킨다는 말이다.
이 또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떠난 혼령을 위로 할 수도 없고 위로도 되지 않고 위로를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하는 무지의 행위들이다. 카톡릭에서도 위령미사가 있는데 매우 잘못된 것이다. 위로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위령제(진혼제)를 드리지도 말고 참여해서도 안 된다. 살아있을 때 잘 해라.
영결식(永訣式)
영결식이란, 오랠 영, 이별할 결로 장례 때 친지가 모여 죽은 이와 영구히 헤어지는 의식을 갖는 것을 말한다. 고별식이라고도 한다. 주로 사회장이나 국장이나 국민장 그리고 유명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사망했을 때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사망 혹은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 즉시 생존자와 망자는 헤어진다. 그런즉 기독교 사상 관점에서 볼 때 영결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단지 의식적 절차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영결이라는 표현은 성경적 사상과 맞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신자가 사망했을 때는 영결식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장례식이라고 하면 된다.
명복(冥福)
명복이란, 저승 명, 혹은 어두울 명으로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을 빈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망자가 저승에서 좋은 곳에 가고 행복하기를 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현수막이나 깃발 혹은 사람들이 ‘명복을 빈다.’라고 한다. 아나운서도 그리 중계방송 한다.
그러나 명복을 빈다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명복을 빈다고 해서 그리된다고 하지 않는다. 고인에게 전혀 유효하지도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단순히 소망하는 차원에서 그리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명복을 빌면 진짜 좋은데 간다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는 전혀 옳지 않다. 그런즉 신자들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신실한 신자로써 사망을 했으면 ‘하나님의 품에 갔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는 할 수 있어도 불신자가 사망했는데 위로한답시고 ‘명복을 빈다느니,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등의 비성경적인 말을 하면 안 된다. 살아있을 때 복을 빌라. 꼭 무슨 말을 해야만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니 적합하지 않은 대상일 때는 침묵이나 손을 잡음으로 위로를 해야 한다.
분향(焚香)
분향이란, 불사를 분으로 부처 또는 죽은 이를 위하여 향을 피우는 것을 말한다. 죽은 이를 위하여 향을 피우는 장소를 ‘분향소’라고 한다.
단순히 애도 차원에서 분향을 하고 국화를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죽은 이를 위하여 분향과 국화를 헌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산자가 죽은 자를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므로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성경적이지 않다. 특히 분향을 하고 고인의 영전에 엎드려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잔을 돌리고 음식을 차려놓고 고인을 위하여 제사와 예배와 미사를 드리는 행위들은 성경적이지 않다. 따라서 신자들은 비성경적인 의식과 행위들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생전에 자주 찾아뵙고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가 옳다. 신자들은 망자를 통해서 얻은 교훈을 살아있는 분들을 위해서 실천해야 한다.
조문(弔問)
조문이란, 불쌍히 여길 조로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며 상주를 위문함을 말한다.
조문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자 성경적이다.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과 아는 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우는 자와 함께 울며 유가족들을 위문해야 한다. 그러나 조의를 표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은 좋으나 삼가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유족들에게 불편을 주는 말이나 상처가 되는 말은 금해야 하며, 조문 시 고인의 영전에 엎드려 절하고 고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명복을 비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사후에 약방문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생전에 찾아뵙고 서로 섬기고 교제함이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배(參拜)
참배란, 참여할 참과 절 배로 무덤이나 기념탑 등의 앞에서 절하고 기리는 것을 말한다.
단순하게 고인의 업적이나 뜻을 생각하며 묵념을 하는 것은 좋으나 무덤이나 영전이나 인격이 아닌 조형물 앞에서 절하고 빌거나 실제 고인을 위해서 뭔가를 기원하는 행위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금해야 한다. 살아있는 인격이라 해도 숭배하면 악한 것이며 영혼이 없는 비인격물에게 절하고 기도하고 기원하는 행위도 악한 행위가 된다. 그런즉 신자들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성경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참배를 해야 한다. 사후에 참배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살아생전에 잘 찾아뵙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조(謹弔)
근조란, 삼갈 근, 불쌍히 여길 조로 삼가 남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를 표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존경하는 분이나 공적인 분들이나 가까운 분들이나 조직 내의 사람들이 죽으면 근조 리본을 달기도 하고 글씨를 써 놓기도 한다. 특히 신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이웃의 죽음에 대하여 함께 슬픔하고 울고 돕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나 지속적인 애도는 신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노제(路祭)
노제란, 길로, 제사 제로 운상도중에 친척이나 친지가 상여 옆에 제상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거리제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노제를 드리는 자들도 적지 않으나 신자들은 삼갈 것이 있다. 고인의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함이나 망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신념이나 지식으로 하는 노제는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금해야 한다. 단지 고인이 살던 곳이나 평소 즐겨 찾던 길이나 장소를 도는 것과 슬퍼하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살아생전에 누군가를 모시고 여행을 하거나 구경을 시켜드리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추모(追慕)와 추도(追悼)
추모란, 따를 추와 그리워할 모로 죽은 이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추도란, 슬퍼할 도로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의미는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하나 굳이 구분을 한다면 사망 직후에는 추도식이라고 하고 그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고인을 기리는 행사나 모임을 갖는다면 추모식으로 명하고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자는 죽음과 이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믿기에 마냥 슬퍼만 하면서 사는 것은 또 다른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망자는 계속 슬퍼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전의 그분의 생을 생각하고 나누며 그리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교회나 신자들은 신자로 살다가 죽은 자에 대하여 ‘추모식’으로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추모나 추도식 때에도 신자였거나 불신자였거나 고인을 위해서 음식을 차려 놓거나 기도하거나 예배하거나 고인을 위해서 춤을 추거나 복을 비는 행위는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므로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살아있을 때 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묘(省墓)
성묘란, 살필 성과 무덤 묘로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말한다. 참묘라고도 한다.
요즈음은 화장(火葬)을 하므로 납골당에 고인의 유골을 안치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매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성묘는 신자나 불신자나 바람직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성묘 시에 삼가 해야 할 것이 있다. 묘에 절하거나 묘 앞 비석이나 잔디 위에 음식을 차려 놓거나 술이나 음료를 묘에 뿌리거나 엎드려 기도하거나 절을 하는 행위들은 성경적이지 않으므로 금해야 한다. 단지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만 해야 한다. 성묘명절이나 장례식 후 3일만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날에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 온 가족들이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을 정하여 하면 된다. 사후에 성묘보다 평소에 부모나 형제나 지인들을 자주 찾아뵙고 사는 것이 후회가 없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명당(明堂)
명당이란, 밝을 명과 집 당으로 풍수지리에서 이르는 좋은 묏자리나 집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터를 명당자리라고 일컫는다.
성경적으로 보면 집터나 묘 자리는 명당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 터가 좋은 곳이다. 단, 지리적, 교통적, 재해적, 수리적, 시간적으로 볼 때 적절한 곳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을 뿐이다. 그런즉 신자들은 어디가 명당이니 어디가 잘되는 터니 하는 터무니없는 말과 소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해서 집터와 묘 자리를 정하면 된다. 또한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서 풍수지리 관련자를 찾거나 점집을 찾아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길일(吉日)
길일이란, 좋을 길로 다른 날과 다른 길한 날 혹은 좋은 날을 말한다.
성경은 모든 날이 거룩하고 길일이라고 한다. 특별히 좋은 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날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날이 어느 날보다 더 편리하고 한가하고 모이기에 좋을 뿐이다. 어느 날이 어느 날보다 더 우월하고 좋다는 것은 없다. 이 또한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을 잡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서 장례 일정과 결혼 날짜와 개업 날짜나 기타 날짜를 잡는 것은 매우 미신적인 행위로 성경적이지 않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해서 날짜를 잡으면 된다.
지금까지 14가지 장례 및 제사 관련 용어들을 살펴보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매우 성경적이지 않아 신자들이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로 인하여 갈등이 불가피한 것들도 있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타협하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서 성경에서 허락하지 않는 문화에 대하여 동화되거나 합리화를 시키면 안 된다. 또한 전도를 내세워서 성경에 반하는 문화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교회와 신자는 지혜와 온유와 인내와 설득을 통해서 비성경적인 문화를 지혜롭게 변혁시키는 자지 동화되거나 타협해 버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갈등과 고난과 핍박과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아무쪼록 성경적인 바른 안목과 지식을 바탕으로 구별되고 온전한 모습으로 장례 문화와 제사 문화를 선도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혹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개혁신보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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