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강해요약
김남준목사
하늘에 계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I. 본문해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먼저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호칭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 는 지난주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누구든지 단지 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만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체로 믿는 믿음으로서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여러분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II. 하늘에 계신 하나님
A. 유대인의 하늘개념 오늘은 하나님을 수식하고 있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 까요? 먼저 유대인의 하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하늘이라는 단수로 나오지만 희랍어 성경 에서는 ‘호 엔 호 오우라노스’( ν τος ορανος· )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하늘들 안에 계 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삼중의 하늘로 생각했습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하늘이 있고 어떤 악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가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라고 한 것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에 계시지만,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과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악의 하늘도 주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심을 기도할때마다 명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늘은 하나님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의 유대교적 표현은 하늘 영광입 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자신의 나라의 기원이 하늘과 관계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이란 말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앞에 기도하는 우리는 땅에 있다고 하는 지극 히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과 창조세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인간도 그 범주에서 예 외가 될 수 없습니다.
B.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서 하늘에 계 시다는 의미를 이 질문에 비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수많은 흔적들로 가득 차 있습 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편견과 아집에 강력하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신 것과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렷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 는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기뻐하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성격들을 성경 계시의 빛으로 해석해서 올바른 지식으로 드러내어 누구든지 그 지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1. 구별된 존재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에 당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모두 합친 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남아 있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처 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뜻을 정할 수 있는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든 인간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연속성을 이루고 계신 분입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셨음에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한 질적인 격차를 성경은 거룩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빽빽한 구름과 천 둥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들려주신 율법속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선언이 묻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아 죽어가면서까지 백성들을 탄핵하고 하 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이유는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택 받은 백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들 이 위기를 만나고 핍박을 당할 때 매일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던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거룩하심이었습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도 록 만드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사도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 십자 가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신명을 바쳐 가르치려 했던 교훈은 “하나님이 거 룩하신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복음 증거를 위하 여 갇힌바 된 몸임에도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거룩하심 은 피조물들에게는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한적으로 당신과 관계 를 맺는 사람과 제도, 물건과 도구들에게까지 이 거룩하심을 분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이후 거룩함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로 씻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주실 때 우리는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임이 거룩할 리가 없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거룩하신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거룩한 성도의 무리라고 불러 도 좋은 것입니다.
거룩하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한 순간에 지 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전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며 나의 지성을 넘어서는 무한히 광대하시고 엄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성의 벼 락을 맞고 자신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 고 자신이 무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 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그 존재의 크기와 위대함은 곧 가치의 크기와 위대함과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후’하고 부시는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말 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며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당신이 창조 하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돌보시고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이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신 분이 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에도 드러나지만 영혼을 가 진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가운데 당신의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십니다.
한 가지 예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사랑도 있고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지 않아도 사랑 할 줄도 알고 사랑 받는 것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율법을 통해 자신이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리고 차마 인간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며 바 로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조잡하게 흉내 낸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 신 분이시고 자신은 같은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도 죄악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인간이 보여줄 수 있 는 반응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얼룩으로 물든 자신의 도덕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때 인간은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생각과 기대들을 포기 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3.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자각을 하나님을 높이면서 표현하는 정수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가소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우러나오는 사랑과 경건으로 경 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건성의 삶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민하는 문제 가 끝나도 종류만 다르지 또 다른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문제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일어나도 해결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문제들에 에워 쌓여 고통을 받을수록 눈을 들어 위에 것을 바라보는 사 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땅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우러른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충만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주권을 앙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릴 수 있게 됩니다.
IV. 결 론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이 땅에서 생겨났지만 결국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 도록 그 분을 앙망하며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I. 본문해설
드디어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도제목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일곱 개의 기도제목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의 영광에 대한 찬송으로 마무리 됩니다. 세 개의 기도제목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네 개의 기도제목은 인 간들을 위한 기도제목입니다. 첫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 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제목을 설교하기 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II. 하나님과 이름
A.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등장합니다.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첫째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과 인간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전자에 속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고, 이 이름은 하나님의 본명과 같은 이름이기에 지극히 거룩한 이름입니다. 나머지 이름들은 하나님과 인간 을 비롯한 만물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적시한것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유일하신 신이시며, 크고 무한한 권능으로 이 세상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라고 번역된 구약 성경의 ‘아도나이’는 하나님이 자기 가 창조하신 모든 만물과 인간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의 관계를 적시하는 이름입니다. 이 외에도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등등의 이름들입니다. 이 이름은 각각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당신 자신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B. 성경의 이름신앙
1. 불변하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이름과 관련한 신앙도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이름신앙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 나님이십니다.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셔서 그 무엇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거나 변화되지 않으시는 불 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가변적인 그 이름 그러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 사회에 두셔서 가변성을 가진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어떤 태도를 갖던지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 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짓밟히기도 하고 존귀히 들려지기도 하는 가변성이 있는 이름입니 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자신을 거의 동일시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 하는 것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완전히 동의어입 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이름과 언약적으로 묶여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 속에 드높여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고, 또한 당신이 인간에게 주신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 히 여김을 받도록 이 세상속에 이바지 하며 살도록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것입니다.
3. 그 이름의 영광 다윗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들이 대치하고 있는 전쟁터로 갔습니다. 양쪽 나라의 군사들이 마주 대치해 있고 어느 거인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가만히 듣고 보니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이름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며 그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와 겨루겠다고 물맷돌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하나 님을 향한 사랑이 주님의 이름이 모욕 받고 있는 현실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골리앗의 망발에 가까운 소리를 들으며 침묵을 지켰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느냐 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 게 짓밟혀도 반응하지 않았고 오직 다윗 한 사람만이 주님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한마디에도 치를 떨며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은 잠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지 모르지만, 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가진 것 없고 누린 것 없어도 주님의 이름을 위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헌신하며 살았던 이름 없는 성도의 섬김은 그 날에 찬란한 영광처럼 빛날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관계입니다.
III.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A. 거룩히 여김의 두 요소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룩히 여 김의 두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무한하고 광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의 위엄과 크고 무한한 존재 앞에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근본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은 또 다른 원인을 갖는데 바로 교만입니다. 모든 죄의 출 발은 지성의 교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은 인간의 모든 죄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만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될까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기사는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것을 따서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죄가 물밀 듯 밀려들어 오게 만들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 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자신의 판단이 충돌할 때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고 하나님조차도 자신 아래 굴복 하여야 할 존재라는 교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신앙은 바 로 이런 사실을 뒤집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끝없는 우주를 하나의 점보다도 못한 존재로 만드시는 시간 과 영원을 걸쳐 계시며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은 불면 날아가 없어질 티끌 같은 존 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두려움에 떨며 그 분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사는 것입 니다.
또 한가지 요소는 하나님의 무한한 완전 앞에서 자신이 비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동안 에는 자신이 제법 온전한 존재이며 쓸 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면 자신은 존재에 있어서 티끌 같을 뿐만 아니라 매우 도덕적으로 더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티끌 같은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 성품을 직시하게 됩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율법의 요구대로 짊어지고 율법의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신 하나 님의 도덕적 완전성의 표현입니다. 아울러 당신이 그렇게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우리가 그 죄에서 씻음 받아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리스도의 고난 앞에서 읽게 됩니다.
B. 완전한 의존과 사랑을 바람 이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의존과 사랑을 바라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티끌 같은 존재이며 자신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덕스러운 삶을 살아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십자가에 나타난 구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절 박하게 깨닫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사는 삶입니다.
C.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기뻐함 주님께서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많은 영적인 은혜와 육적인 섭리 속에서 주시는 모든 일반 은총 의 복들을 사용하여서 이 땅에서 그 분의 이름을 기뻐하며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매일 매일 살아가야 합니다. 어디선 가 주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장소가 당장 내 가족이 아니라 땅 끝에서 들려온 소식이라 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 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주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분의 이름이 짓밟힌 것이 마치 자신의 죄악이 되는 것처럼 가슴을 찢으며 비통해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운명이 어야 합니다.
IV. 결 론: 그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이바지 하지 않으면서 사는 모든 삶이 무위도식하는 삶입니다. 지난 한 해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 자신의 본분인 것처럼 주님의 계명에 어긋나게 살아온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죄들보다는 짧은 눈물의 참회를 더 기억하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새롭게 일어나 주님의 이 름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들을 창조하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처 럼 그 분을 사랑하고, 아무도 위하여 울어주지 않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구촌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흐느끼는 사 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애통할 것이지만 주님이 위로해 주실 것이고,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만 하 나님이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고난을 당하지만 하늘나라에서 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주님의 보좌 앞에 둘러설 미래의 주역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주기도문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두 번째 간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 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으니 ‘그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 는 매우 중요한 개념, 하나님의 나라와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주기도 문의 두 번째 간구의 뜻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 신약에 전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연관을 만나게 됩니다.
II.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
A. 하나님 나라의 개념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희랍어로 하나님 그 나라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α)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 생겨난 개념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느 정도 이 해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들만의 소유인 영토 가 있어야 하고, 그 영토 안에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하며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 지로 성경에서 바실레이아 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똑같이 영역이 있고 사람이 있고 통치하는 왕권이 있을 때에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쿳샤마임'이라는 낱말로 나오는데, 샤 마임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을 가리키고 말쿳은 왕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늘의 왕권, 하늘의 왕 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왕권입니다. 왕권이 확립되어 있을 때에 영토도 있고 국민도 있고 왕국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인 왕권은 크게 세 가지와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과 관련이 있습니 다. 즉, 하나님이 직접 왕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 주 실효적인 통치를 이루는 왕권입니다. 하나님이 왕권을 실현하실 때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통해 이루십니 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주시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왕권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난 모습입니다. 둘째는 메시야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왕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통해 다스리지만 이 나라는 불완전한 나라인데 이후에 보다 하나님의 왕권을 직접 수여받은 강력한 통치자와 구원자가 나타날 터인데 그 분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이 나라는 인간 왕들이 다스리던 나라와는 비교 할 수 없는 평화와 권능과 영광의 나라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권이 메시야와 관련된 것입니다. 셋째는 다니엘서 7장 13절에 인자와 같은 이가 등장하는데, 이는 메시야를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영원한 인 자와 관련된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이 분이 메시야이지만, 메시야가 영광스럽게 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영원한 나라 를 이 세상에 완성한다는 왕국의 개념과 연관 지은 것입니다. 이런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 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말씀하셨을 때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왕권과 관련하여 구약에 개시되었을 때 사실 그것은 미 래에 이루어질 신약의 영적 하나님 나라와 연속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잃어버 렸습니다. 인간들은 연약함과 죄에 휩싸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왕국을 그 땅의 나라에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그 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나라의 궁극적인 원인이 땅의 크기나 백성의 크기, 왕들의 권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 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궁극적으로 죄로부터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목 적을 완성하실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메시야는 신약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야의 통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왕권으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속하여 어디에 살든지 그들 마음속에 임하는 영적인 나라로 영역을 삼으시고 성령으로서 은혜로 통치하심으로 당신의 주권을 삼으시고, 그들 모두를 자기 나라 위하여 헌신하는 백성들로 삼으심으로 메시아의 왕국을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결국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이 세상 의 질서들을 완전히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그런 나라의 전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구약이 가르쳐준 순수한 하나님의 왕국의 사상, 메시야 왕국의 신학을 변절시켰습니 다. 이것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어 지고,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1940년대에 새로운 시온 국가를 건설하기 전 까지 약 2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는데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 곧 ‘흩어진자들’이라고 부 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차지하고 다시 왕국을 건설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자 기의 역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이 보내실 메시야는 신은 아니지만, 신과 가까운 존재 로 왕국을 건설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하여 제 2의 다윗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사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갖고 있 었습니다. 그들이 꿈꾸고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수만 명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송했습니다. 이 뜻은 ‘제발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뜻으로 예수 님에 대한 순수한 찬양이 아니라 잘못된 메시야에 대한 그림과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 왕국 그림 두 장을 예수님에게 투 영한 것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세상의 인간적인 지도자로서 로마를 뒤엎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되찾아주실것이라는기대를가지고있었습니다.
B. 하나님 나라의 세 차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세 차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미 온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만약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미 온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싶으셨습니다. 전쟁을 해서 영토를 정복하는 그런 종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것을 명백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커다란 능력과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임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없이 이 세상에 오셨고 군대를 조직하시지 않았습 니다. 오히려 진리의 말씀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사랑으로 돌보심으로 하나님이 도입하고자 하는 나라가 능력의 나라인 동시에 사랑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 던 것입니다.
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인간을 굴복시킬 사단의 카드는 죽음이었습니다. 많은 사 람들이 죽는 것이 두려워 죄에 종노릇 할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죽음 너머에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심으로, 인간 을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데려갈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통과하면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도입되었고, 진리의 복 음과 약속의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로마는 껍질만 소유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왕국을 통치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온 것입니다.
둘째는 성취될 나라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신적인 통치가 실현될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라를 도입했지만 완성 하지 못하고, 결국은 이 세상에서 완성될 것을 전망하셨습니다. 그날은 바로 모두가 부활하는 날이며, 그 전에 많은 나 라와 민족에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이 될 것입니다. 불순종하던 자들을 지옥에 던 지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터인데 그 나라가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 은 나라이고, 우리는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오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틈바구니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 세상적인 차원에서 입증됩니다. 먼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입증됩니다. 우리가 예 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합니다. 신분은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상태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 우리의 마 음이 묶여 있다가 풀려 나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완전히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사 망이 우리를 위협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는 흔들림이 없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있 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이미 왔지만 완전히 성취된 나라는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사랑할 때도 있지만 죄의 경 향 때문에 자기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음을 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악을 행 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입증됩니다.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고 그 분의 통치를 받고 그 분과 생명적으로 결합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누구도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교회는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 는데,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입니다. 지역교회는 망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영적인 연합인 보이지 않는 보편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틈바구니에 끼어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은혜 에서 멀어지거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입증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도처에서 죄와 타협하고 미끄러지지만 또한 도처에서 충성스럽게 이 나라를 전파합니다.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만들고 막살던 인간들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어두운 세상에 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완성해 가실테지만 그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인간의 순종과 헌신을 사용하셔서 확장해 나가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렬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이 속속들이 파고들기를 갈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아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명예이고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세 번째 마지막 차원이 이제 완성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 세상 나라 를 모두 완성한 후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순결한 나라가 될 것이고, 자연도 창조 당시의 영광스런 광휘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 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전망하며 온 맘을 다해 헌신하며 살아 이 세상의 나라를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합 니다. 여기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III. 결 론: 신적통치를 갈망함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땅 끝까지 단 한 뼘의 땅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의 혀가 굳어지고, 우 리의 핏줄의 피가 식어지고, 우리의 심장의 고동이 멎을 때까지 우리를 구원하여 새 생명을 주고 새로운 소망가운데 살 게 한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으로 전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전력을 가다듬어 이 일 하나에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자원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인 자원과 물질적인 모든 자원들을 사용하여서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은 바로 이렇게 신적 통치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헌신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주 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원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분투하며 살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2)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 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I.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입하시고, 그 나라를 확장하시는 방법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하 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해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II.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A.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1. 구약의 경륜: 율법→복음 우리는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이 일을 구약과 신약의 경륜을 통해 나타내신 것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경륜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다음 율법을 주십니다. 이 율 법은 이미 구원받은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표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대로 살 수가 없음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살 수 없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베풀고,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뜻들을 이루어 가도록 구속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메시야의 필요성과 함께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2. 신약의 경륜: 복음→율법 이에 비해 신약 시대의 경륜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복음을 보여주십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 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 사심으로 보여주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 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율법을 통해 보여주셨으니, 이 율법은 하나님 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한 좌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율법을 통해 복음을 보이시고, 신약에서는 복음을 통해 율법을 보이심으로 하나님 나 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백성들인지를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B.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여기에서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날카로운 대조를 신약에서 읽어냅니다. 먼저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다릅니다. 세상 나라는 국경과 국경이 맞닿고 이루어져 그 렇게 나누어진 나라지만 하나님 나라의 국경선은 영적인 국경선입니다. 수많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 이에 걸쳐있습니다. 이 모습은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분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는 교회에 속했으나 사실은 하나님 나 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질서의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각자가 모두 가치의 중심이고 존재의 중심이 된 나라입니다. 각 사람들은 자신이 우주와 세상의 중심이 된 것처럼 중심을 세우고 질서를 만들어 갑니다. 돈과 권력 으로 사람들을 굴복시켜 자기의 뜻과 질서에 순종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각자 가 이런 질서를 세우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중심이 됩니다. 하나 님의 말씀으로 질서들이 펼쳐지고 그 질서에 사람들이 순종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자신이 또 주인이 되어 자기 사랑 의 질서를 세우지만 은혜를 받으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로 돌아옵니다. 크고 작은 질서들을 세우려고 하지만 언 제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보다 더 강력한 진동할 수 없는 질서가 있어서, 그것들이 사람들을 복종시켜 최종적으로 하나 님의 통치로 돌아오도록 만듭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다른 사랑을 가진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확장한 나라이지 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은 후 어느 순간 자신의 불행과 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 죄 때문 에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형벌 당하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깨달으며 하나님 앞 에 회개합니다. 이 회개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동반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난 후에는 자기가 진정 사 랑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는 하나님이 죄인인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난 사람들은 반드시 그 영혼과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동기는 하나님 사 랑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하게 됩니다. 이 선행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받아들이고 그 성품에 어울리게끔 살아가 려고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선행은 세상 나라에도 있는 선행과는 구분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행은 하나님 사랑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목 받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버 리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나오는 선행입니다. 둘째는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나는 선행입니다. 이 신앙의 원리는 신뢰 의 원리입니다. 나를 믿고 세상을 신뢰할 때의 결과는 비참한 멸망과 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 하기 때문에 그 분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에 순종하는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을 깨닫고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꺼이 복종할 수 있는 마음과 거기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행인 것 입니다. 우리는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열렬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양심을 따라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고, 어떤 은혜를 받고 있는지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은 드러나기 때문입 니다.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삶이 좀 온전해져야 합니다.
넷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선행을 해야 합니다. 화란의 신학자 아브람 카이퍼는 “우리 의 신앙은 우리의 삶 모든 곳에 부어져야 된다.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우리의 삶 모든 부분에 스며들게 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다”고 그의 책에 서 말했습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개혁이 없이 그냥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하나 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마음의 진액을 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C.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 이런 선행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길어 올릴 수 없습니다. 구속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을 통해 하나 님이 자신의 백성을 통치하십니다. 이것이 구속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 서 한사람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중생입니다. 중생이 영혼의 거듭남이라면 회심은 죄에 대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는 중생의 첫 번째 의식 속에서의 움직임입니다. 자기중심의 왕국이 무너지고 새 나 라를 먼저 만드시는데,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의 영혼과 본성이 예전에는 살지 않았던 방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으면 아무 동작을 할 수 없지만, 영혼은 불 멸하는 존재이기에 그런 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죽어있는데도 많은 행실들을 만들어 냅니다. 영혼이 죽 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이 끊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중생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주입하시는 통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때마 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의지를 갖게 하시고, 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은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없었던 영적 인 에너지를 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구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 생명과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III. 은혜로 통치하시는 나라
A. 하나님의 통치: 율법과 은혜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과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의 불신자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두 군데에 새기셨는데 돌멩이에다가 새기 시고 사람의 마음속에도 새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 율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신문에 보니까 여 대생 둘이 지하철 앞에서 2450만원이 들은 가방을 주었습니다. 잠시 '여행 갈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경찰서로 가서 맡겼답니다. 이들이 여행 가지 않고 경찰서에 돈을 들고 가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율법과 양심 에 의한 통치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사랑의 방향을 바꾸도록 만들어 줍니다. 신앙의 진정한 힘은 징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깨닫는 마음과 그의 마음을 녹이시는 하나님 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누가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자기 안에 일어나는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세워져 가는 이 기쁨 속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가는 것 입니다.
B. 성령과 은혜의 통치 성령은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과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통로입니다. 성령이 강한 은혜로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이길 수 없는 환경들을 극복하고 참을 수 없는 일들을 참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 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 람이 정말 제대로 된 신자가 되고, 주님의 나라의 통치를 온전히 받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들이 되어 갈 때에 그때 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두 번째 기도의 제목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기도가 진솔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의 삶도 이 기도의 제목과 초점이 같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무위도식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신 것은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하여 티끌만큼이 라도 이바지하며 헌신하며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가지 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영혼과 육체를 포함해서 인생의 생명, 심지어는 물질과 여러분들의 건강, 젊음까지 모든 것들 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주님께 빚진 것들입니다. 주님은 이것들을 주님 의 이름의 영광과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여러분들에게 아주 주신 게 아니라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들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기도문은 여러분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나 라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너희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 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데 적절하 게 이바지 하도록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IV. 결 론: 빛으로 부르신 백성들
여러분에게 재능이 있다면, 물질이 있다면, 시간이 있다면 아까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허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채워주십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살아도 저 멀리 캄보디아에서, 중국에서, 태국에서, 필리핀에서, 카자흐스탄에서, 레바논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한국에서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의 살아 있는 것이 하나 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바지 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어울리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아내셔서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를 주십니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I. 본문해설
예수님은 세 번째 탄원인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앞에 나온 그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의 보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탄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라는 수식어구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아울러 창조하셨는데, 이 두 세계는 각각 다른 세계이지만 동일한 목적을 가집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모든 세계 안에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 릅니다. 천상의 세계는 영원한 사물들과 영적인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지상의 세계는 모든 우주를 포함하는 것인데 이 모든 우주와 이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는 사물들을 통해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한때는 천상의 세계에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곧 소탕되었고, 이제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아무런 장애 없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버지의 뜻 이 누구의 반역도 없이 성취되는 것처럼 지상 나라에서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하는 것입니 다.
II. 뜻(뗄레마)의 의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희랍어 ‘뗄레마’(θλημα)는 ‘벨로’라고 하는 ‘의지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언제나 단수로 사용이 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크게 세 가지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는 하 나님의 기쁨입니다. 시편 40편 8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습니다’ 라고 시인이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뜻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뜻이 무엇이 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충만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의지입 니다. 시편 143편 10절에 보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옵소서’ 라고 노래하고 있 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행하고자 하는 그 의지가 어떤 것인지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 내가 하나 님의 의지에 부합하도록 나도 내 의지를 행사하겠다고 하는 노래입니다. 셋째는 은혜로운 목적입니다. 이사야 25장 1 절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습니다’ 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백성들의 행복과 명예를 위하여 미리 정해놓으신 은혜로운 궁극적 목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뜻이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의미,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상 세계에는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셔서 만물을 조직하 고 움직임으로 노동을 보태어 이 세계가 보다 더 찬란한 영광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도록 의도하셨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던 세계는 죄와 사망으로 뒤덮였습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뜻대로 고치시고 인간을 그 목적에 이바지하는 본래의 의도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III. 그리스도와 하나님 뜻의 성취
A. 대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며 바로 대속을 위 한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쏟으며 아버지 앞에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만약 이것이 아버지의 뜻 이라면 내가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 는데 이 잔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으시기 위해서 사 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둘째는 고난을 터득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셋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시려고 죽을 수 있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가장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구속의 우주적인 계획 을 위해서는 죽으셔야 했으니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이미 당신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바라본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의 인간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두루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 하여 이 세상에 오신 생애였고, 그 뜻을 이룬 핵심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나서 망가지고 타락한 이 절망적인 세계에 유일한 희 망입니다.
B. 잃은 자를 구원하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관계를 맺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잃은 자의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 단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최고의 관심사는 이 땅에 와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나라의 번영을 통해 구원을 생각해 보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쳐 깨닫게 해 주시고, 또 병든 자들을 기적의 능력으로 고쳐주심으로 써 예전 시대와는 다른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시대가 임하였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종처럼 섬기심으로써 사랑하는 자기의 양떼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 깊은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 애동안 하신 일이었고, 이 일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셔 서 누리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바로 그 문 앞에서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거기서 죄의 심각성과 무서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다시 당신의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나라에 들어가서는 이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 하게 되는 사람들의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만납니다.
IV. 신자의 삶: 그 뜻의 성취를 위함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완전히 성취된 나라는 아닙니다. 이미 그 나라 는 힘 있게 이루어졌고 곳곳에서 이 세상을 이제까지 지배하던 죄와 마귀의 권세에 더 이상 복종하며 살지 않겠노라고 감연히 일어서서 모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인 표가 바로 교회 마당 앞에 붙어있는 붉은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기꺼이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왔고, 누구도 그 나라의 번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는 신자의 삶의 정체성 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그 뜻의 성취를 위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 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온 나라를 성취해 가실 때 혼자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 섬기는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게 하시기도 하고 늦추시기도 합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그 나라는 더 많은 사람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더 속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향한 타오르는 구령의 열정, 전도와 선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가 오게 하는 첫 번째 긴급조치인 것입니다. 전도하고 예수 믿게 된 다음에는 그들을 더욱더 뜨거운 사랑으로 돌보고 가르쳐 그의 전 포괄적인 영역 속에서 자기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뜻에 성취를 위해 이바지하 며 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V. 결론
오늘 이 말씀 세 번째 주님이 가르쳐 주신 탄원은 우리에게 폭풍과 같은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고 묻는 질문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낭비하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 일입니다.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오늘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너희의 살아 있는 것을 통해 이 세상에 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 달라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자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할 때마다 기뻐합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 심지어는 가보지도 못하고 들어보지 도 못한 나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일어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그는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라고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 가까이 계셔서 지키고 생명을 연장시키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수고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12월에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날들을 돌아보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거치는 돌로 살았던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를 온전 히 우리를 위해 주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주어 그 뜻 의 성취의 도구가 되도록 오늘도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폭풍처럼 다가오는 ‘너희의 인생은 과연 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느냐’고 묻는 이 질문 앞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눅 11:3)
I. 본문해설
앞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할 우선적인 기도제목 세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1 부라고 한다면 네 번째 기도는 2부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이하의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충족될 때 1부에 서 가르쳐주신 신자의 존재의 대의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도제목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2부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양식’은 그리스어로 ‘알토스’[ρτος]이며 본문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알토스는 유대인들의 주식인 빵입니다. 등가번역을 하면 우리에게는 주식인 밥입니다.
A.'양식‘이란 무엇인가? 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성찬의 떡 첫 번째는 성찬에 제공되는 떡입니다. 성찬의 떡은 교회 공동체의 회원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혀져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그 떡을 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항상 교회의 흠 없는 한 회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성례의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됩니다.
2. 영적인 떡, 그리스도 첫 번째 의미보다는 초대 교회부터 중세 초기까지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던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떡을 물리적인 떡 이 아니라 영적인 떡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영적인 떡인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 리가 주님을 먹고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적인 일체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3. 음식의 떡 세 번째 견해는 역사적으로 소수였고, 여러분들 대부분이 취하고 있는 견해입니다. 음식으로의 떡이라고 해석을 한 것 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하루 쓸 양식을 주시옵소서입니다. 이틀 치도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매 일 매일 간구해야 하고 저축이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쌓아놓는 모든 것들은 복음의 교훈에서 이탈한 생활의 원리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4.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 네 번째 해석이 가장 어울립니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 르틴 루터는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여기에 양식은 단지 식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 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 인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 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 학문과 문화의 누림, 이 모든 것을 총칭하여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 귀금속은 안 된다.’ 귀금속은 일용할 양식에 안 들어갑니다. 일 용할 양식의 범위는 시대와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조금씩 변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된 삶을 영위하는데 이바 지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복된 삶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답게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 게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B. '양식‘, 제유법적 표현 그래서 양식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제유법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원래 식물인 떡의 의미 예수님이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그 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이스 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식량의 문제를 해결 해주셨는데 바로 만나입니다. 꼭 하루 먹을 것만 거둘 수 있었고 이틀 치를 거두면 썩거나 벌레가 났습니다. 만나를 먹 이셔서 백성들의 육체를 보호해 주신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이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빵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에서 모세가 16장 사건을 해석합니다.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 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즉, 양식이 인간의 총체적인 존재에게 공급되는 필수불가결한 양식임을 확장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2. 영혼+육체로 이뤄진 인간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이 영혼과 육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은 형상, 육체는 질료여서 형상이 질료를 찾 아가고 질료는 형상을 구해서 영혼과 육체가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고 있을 때 인간이며 완전한 실제이며 실체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완전한 존재가 된다고 보는데 이것을 가리켜 영혼의 질료형상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고귀함 이런 것들은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체도 아울러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양자 모두 하나님 형상발현 요함 하나님의 뜻은 육체와 영혼 모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굶주리며 심각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굶주림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교도라 할지라도 양식을 제공하여 기본 적인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심각한 의무입니다.
4. 둘 다 신적 돌봄 대상 결국은 육체와 영혼 모두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 합니다. 건강과 탁월한 지식,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회적인 요구도 있고 육체적인 요구, 영적인 요구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저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III.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공동체적으로 올리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에게’입니다. 성경에는 아버지 되심이 크게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창조된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창 조의 아버지, 둘째는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일체 내적인 부격인 아버지 되심입니 다. 셋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신정 국가에서 아버지 되시는 것이며 넷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 인 양자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양식의 문제에 대해 고 민하며 자신이 이바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A. ‘날마다’-‘오늘날’
1. 날마다(에피우시온) 그러면서 성경은 이러한 양식을 날마다 혹은 오늘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식을 꾸미는 수식어가 있습니 다. 그것을 마태복음, 누가복음 모두에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희랍어로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입니 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번역이고 역사적으로 아주 치열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에피우시 온’이라는 단어를 ‘에피웃사’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에피웃사’는 ‘잇달아 일어나는, 연달아 발생하는’ 그런 뜻입 니다. 그래서 유대인 학자들은 이 단어를 ‘마할’이란 히브리어 즉, 내일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날들에 꼭 있어야 하는 그 양식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출16장이 배경임 이 문제를 풀기위해 출애굽기 16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가 퍼지기 전에 갔 어야 했습니다. 해가 퍼지면 이슬처럼 사라지면서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나를 구하러 간 시간은 새벽 미명일 것입니다. 이 만나는 해가 퍼지면 사라질 테니까 해가 퍼지고 그 다음날 다시 만나가 내릴 때까지 쓸 수 있도록 미리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우시온’을 ‘잇따라 오는 그 날에 필요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기가 막힌 일치를 이 룹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전날에 이틀 치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날의 양식 이 아니라 명백하게 그 다음날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을 모으 고 미래를 예비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으로 보는 것은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의지하 는 대신 맘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이바지하는 모든 좋은 것은 그분께 받아서 우리가 빚지고 덕을 입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티끌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 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생활 속에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하라 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 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있고 없고 지식의 많고 적음이 근심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평안과 근심의 차이는 오늘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와의 인격 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결국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은 결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없이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과 함께 스스로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교만한 삶이고 패 망의 앞잡이의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싸울 때에는 담대했으나 거룩하 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IV. 결론
낮고 천한 우리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채우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해가 새롭게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존하며 원망과 불신앙 속에 한 해를 더럽히시렵니까? 아니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을 의존하면서 주님과 함께 충만한 공급의 삶을 사시렵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2)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눅 11:3)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이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이 본문을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양식 이라는 단어가 히브리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서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해서 필요한 영혼과 육체와 정신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어지는 날들의 필요한 양식이며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이 기도 속에서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I. ‘우리에게’-공동체의 기도
A.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 오늘은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라는 말이 갖는 공동체의 기도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 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을 보여줍니다.
1. 일차적 지평: 그리스도의 지체 이 기도 속에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우리가 몸담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굶주리는 사람이 없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가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소유를 그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그들도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으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믿는 지체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이 고 나아가서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보편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되 교회에 속한 지체들, 나아가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굶주리고 일용할 양식을 공 급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드리며 함께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궁극적 지평: 이 세상의 이웃들 궁극적인 지평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이웃들이 이 기도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해 주신 양자적 아버지 되심과 함께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돌보고 기르시는 창조주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 들, 심지어는 이교도들까지도 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고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이웃들을 생각하며 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B.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접하면서 이미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풍족하게 주시는데도 사람들은 탐욕과 방탕으로 이런 식량의 공급들을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땅의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함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 리는 삶의 모든 필요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 할 양식을 넘치도록 주셔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조건들을 해결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급해 주 시는 것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 리에게 사용하여 야 할 사물과 누려야 할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용하여야 할 사물은 우리 인간이 사람 다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연필은 글을 쓰는 목적에 기여하고 책은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목적에 이바지 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누리고 사랑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누려야 할 사물은 하나님 한 분 뿐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일에 합당하 게 쓰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사물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하나님이 은혜 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그것에 탐닉하고 최종적으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용할 양식을 두고 두 가지 극단을 경험하며 교회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하나는 극단적 금욕주의이고, 또 하나는 극단적 방탕주의입니다. 4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 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극도의 금욕과 절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아닌 그리스 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 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은 열등하고 정신과 영혼은 고등하기 때문에 육체를 천하게 취 급함으로 영혼은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고양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그 속 에서 맛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호리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음식에서 맛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입니다.
또 하나의 비성경적인 음식에 대한 태도는 그 맛이 호리는 감각에 취하여 무작정 자기 마음을 풀어버리고 방탕과 탐욕 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몸을 위해 사용하여야 할 음식을 먹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고 음식 자체 가 주는 맛에 취하여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 를 하였습니다. “여자와 함께한 잠자리는 한 번에 결단하고 끊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음식은 그렇게 결단하고 끊을 수 있 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몸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고 적당히 맛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과 또 한편 으로는 식생활의 방탕에 흐르지 않으려면 이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양립하는데 이 경계가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그리고 나는 차라리 이 경계가 애매한 것이 즐거워 식욕의 노예가 되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 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극단적인 식생활의 방탕, 그 사이에서 어디엔가 우리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복음적인 경건일진대 그것이 어느 지점일까요? 칼빈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다가 맛 을 느끼게 되면 그러한 맛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그 분께 감사하자. 그러니까 어떤 음식에서 맛 을 느끼는 것을 죄악시 했던 금욕주의를 버리고 어떤 음식에 맛난 맛이 나면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정말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맛난 음식을 주신 하나님, 그런 맛을 이 세상의 물질들 속에 주셔서 그것을 요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 사하자.”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지나치지는 말자. 지나치지는 말자. 그래 서 그 음식에 입맛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놓으신 그 거룩한 뜻과 어 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극단적인 금욕과 극단적인 방탕 사이에서 이 음식은 우리의 몸을 위하고, 우리는 그리스 도를 위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하시는 이 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노동을 통한 응답 두 번째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기도 에 대한 응답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기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 기도가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하게 울려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래서 어느 주석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언제나 주시지만 우리의 떡으로 주실 때도 있고, 남의 떡으로 주 실 때도 있다고 그렇게 주석하였습니다. 남의 떡으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로 자기의 힘으로 자립해서 양식을 얻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 로 굶주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 결단을 요구하는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결핍한 세상 한복판을 흘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 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들을 나누어 줌으로 그들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 리를 이 궁핍한 세상에 두신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충분히 노동의 여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 신이 진심으로 노동하고 양식을 받고 그 양식 중 남은 일부를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그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인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 남는 양식들은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넘쳐 교회로, 교회 안에서 쓸데가 없어서 넘쳐 다른 보편 교회로, 다른 보편 교회에서도 쓸데가 없이 더 넘쳐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난한 굶어 죽어가는 아프 리카와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로 그렇게 전달되어 가야 합니다.
C.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 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 부르심을 따라 살 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대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육신의 필요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염 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인격적인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 고 신뢰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며 그 영적인 평화 안에서 그 분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III. 결론
지난 한 해에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태웠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우리의 마음을 더럽혀 신앙생활하기 힘들었습니다. 금년에는 하나님을 정말 잘 믿고,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때에는 주신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무엇인가 모자라고 부족할 때에는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해서 하나님과 보다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성 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용할 모든 양식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 생활 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 라”(눅 11:4)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의 네 번째 간청이 육체를 위한 간구인 양식이었다면, 다섯 번째 간청의 제목은 영혼을 위한 간구입니다. 용 서와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와 악에서 구출해 달라는 세 가지의 필요한 요구사항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육체 도 하나백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무한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은혜를 주십니다.혼은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영혼다운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A. 두 본문의 차이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 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이렇게 완료형으로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사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현재형으로 등장 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 으로, 마태복음의 예상되는 독자는 유대인들이고, 누가복음의 독자는 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원래 예수님 께서 아람어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람어를 희랍어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희랍어나 영어처 럼 시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말하는 시점에서 연상되는 동작이 완료된 것이면 완결, 완료되지 않은 것이며 미완결형을 사용합니다. 마태는 아람어를 희랍어로 옮기면서 완료형 시제를 사용했으며, 누가는 희랍어가 익숙 한 사람들에게 희랍어의 양식을 따라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시제의 문제는 원래의 이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전혀 문 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시선을 끄는 대목은 ‘죄지은’과 그 다음에 오는 ‘우리의 죄도’입니다. ‘오페이레마타’[φελημα] 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빚진’ 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오니 우리 가 당신께 대해 빚진 것도 탕감하여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죄를 빚으로 생각하 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죄를 빚으로 표현하는 어법에 더 큰 호 소력을 느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는 비유대인들을 향해 기록했기 때문에, 마태처럼 기록하면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갚기만 하면 되는 경제적인 거래 관계로 생각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말티아 스’[μαρτα]라고 하는 죄라는 단어를 들여오고, 사람에 대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개념은 마태와 똑같이 ‘오페이 론티’[φελω]라는 단어를 사용 합니다. 이 모든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이 두 기도문 사이 에 신학적인 논쟁이 될 정도의 차이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는 것은 이 미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이냐 아니면 하고 있기 때문이냐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삶의 성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과거든 현재이든 계속 용서해 주면서 살고 있사오 니 우리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오니 주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B. 주기도문의 주체
1. 용서받은 제자들 그러면 이 주기도문을 주도록 예상한 일차적인 주체는 누구겠습니까? 이미 용서받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아들여진 제 자들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의 가르침이 나오기 전에 산상수훈이 꽤 길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그 나라의 백성인 제자들의 정체성, 이 어두운 세상에 살아가는 윤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기도문을 받 은 제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까지 염두해 두고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한때는 살 수 있으나 항상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못하다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있 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매일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용서를 먼저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간청의 제목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이 주된 간청의 제 목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해달라는 기도가 주된 간청의 내용입니다. 용서 받았으나 지금도 하 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허물 많은 제자들에게 주신 주기도문이었습니다.
2. 유대인들과 다른 기도 이러한 기도의 방식은 당시 유대인들이 드리던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기도였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의 개념은 신인보상 개념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만큼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가 한 것만큼 갚아주셔야 할 의 무를 가지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던 유대인의 관습에서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수 행하는 제자들의 의식과 방식은 충격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가 변질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 다.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신학에 대한 오해입니다. 구약에서 이 언약관계는 쌍방적인 관계를 염두 해 둡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심에 넘 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제하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 이 복 주신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업적으로 해석을 해서 빚지고 빚을 갚는 것과 같은 관계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교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외경에 보면 하나님께 선을 행한 것을 기초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면서 당당히 그 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 기도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예수를 따라 다니고 핍박을 받고 물질도 바칩니다. 그러나 모두 잊어버리고, 자기가 정말 천국 시민답지 못한 인간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자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인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적 영성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을 받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C. 죄는 무한한 빚임 복음적 경건, 복음적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처하 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스스로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이 죄가 무한한 빚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두신 것입 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나 자신이 스스로 일으켜서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이 딱 한 개 있습니다. 아우구스티 누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물 중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 그 것은 죄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의 죄가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가 무한한 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 또한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죄를 무한히 빚 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갚지 않으면 안됩니다.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영원한 용서와 경험적 용서를 구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의 인간과 만물을 보실 때 시간의 구애됨이 없이 한 번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보 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 뿐만 이 아니라 현재,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한번에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에 대한 감각이 변하기 때문에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죄를 또 짓습니다. 이미 용서하신 죄인데 시간 속에서 때가 되면 인간은 자기 의지로 죄 를 짓습니다.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그래서 경험적 용서는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 어 주십니다. 이러한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용서를 통해 사랑, 의존 알게 함 성경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또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탁월한 영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안 사람입니다.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지만, 죄의 용 서를 통해서 깨닫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III. 결론: 두 양식을 주심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기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죄인을 향한 주님의 자비의 아 름다움을 알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적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 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미천한 종교 생활을 보게 됩니다. 윤리적으로 많은 흠과 우리 안에 있는 탐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죄인이라도 십자가의 사랑만이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고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 라”(눅 11:4)
I. 용서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이어 이 간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이 기도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악을 행한 사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면 커다 란 손해가 갈 텐데 그것을 탕감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나 탕감해주는 것만이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용 서를 통해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모든 사람들 속에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될 때, 제일 먼저는 영원히 형벌 받을 끔찍한 죄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죄인이었고, 지금은 용서받은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II. 죄사함과 용서
A. 절대적 용서: 하나님 이 기도에는 죄사함과 용서라는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죄사함과 용서 모두 용서이며, 또한 죄사함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절대적인 용서와 상대적인 용서로 풀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용서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만 하실 수 있는 용 서이며,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 하 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시기에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 고 싶어 하십니다.
B. 상대적 용서: 인간 그에 반해 상대적인 용서는 인간이 인간을 향해 베푸는 용서입니다. 먼저 자기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점 에서 절대적인 용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용서입니다. 또 하나님은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심으로 다시는 그 죄로 인해 어 떠한 복수도 생각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은 이전에 용서하고도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용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 의 용서는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용서는 소극적인 면에서 어떤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는 사면의 성격 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적극적 면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바로 관계를 맺고 자 하는 사랑의 성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회개했을 때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사랑으로 불러주십니다. 당신과 새로운 영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셨고, 그 속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와 관계를 갖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용서의 완성입니다.
C. 용서의 요건과 오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한 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책임을 묻게 되어 있으며, 또한 손해를 입은 당사자도 일정 부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 은 인간들이 존중받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오직 피해를 입은 당사자만이 손해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권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했을 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회개만 하면 된 것으 로 생각하는 태도가 비난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이웃에게 악을 행해 손해를 끼쳤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 질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용서에 대해 진지한 견해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III. 용서에 대한 경륜
A. 하나님 사랑의 회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매일매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라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용서 의 의무를 생각나게 하시고, 또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용서 에 대한 우주적인 경륜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무한히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이웃을 사랑하며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뜻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죄는 제일 먼저 사랑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그 결과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자신 자신으로 돌렸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 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놀라운 용서의 경륜을 베풀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기회입니다.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인간은 비참한 열매를 맺게 되고 어느 한 순간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을 깨닫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진정으로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 고 용서해 주신 즉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그 분의 인격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 받는 놀 라운 교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아가페와 구별하여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형상을 닮은 인간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B. 용서의 실천 그러나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사랑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작정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도 정확하게 함께 끊어집 니다. 여기서 우리는 용서의 실천을 배우게 됩니다. 며칠 전까지 기도가 잘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있었습니 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해 악한 감정을 품고 복수를 꿈꾸기 시작할 때 기도 할 수 없고, 예배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 랑도 간곳없게 되었던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복수를 꿈꿉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악한 것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모르는 악한감정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칼을 갈아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자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때 너무나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때마다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불하신 큰 희생과 고통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IV. 용서, 영혼의 자유
희생 없이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을 생각하게 됩 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제일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 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큰 혜택을 받습니다. 다시 기도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 닫도록 해주십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는 이유는, 우리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기 때 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리지 않고는 절대로 이 용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희생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 용서받은 것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 받은 것이고, 내가 이웃을 용서해 주는 것은 나한테 한 달란트 빚진 사람들의 잘못들을 탕감해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서 하나님께서는 맺힌 것을 풀어야지만 우리의 영혼이 살도록 끊임없이 경륜해 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 속에 비추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V. 결론
그러므로 신앙의 깊이는 용서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의 모본을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쓸모없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무한한 고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희생하고 고통을 치룰 그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분의 고 난에 참여하는 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끊임없는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 예수 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극도의 이기심과 포악함입니다. 그는 하 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어야 하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죄 용서받은 자녀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신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I. 본문해설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탄원입니다. 앞에 나온 다섯 개의 탄원은 모두 긍정의 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탄원은 부정의 탄원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기도문을 외우다 보면 두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하 나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원인이 모두 하나님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마치 하나님 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기 위해서 힘을 쓰시는 분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탄원은 이런 종류의 상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도문입니다.
II. '시험'이란 무엇인가?
A. 시험(페이라스모스) 먼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시험이 무엇인지 성경에 입각해서 규명해야 합니다. 시험이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페이라스 모스’(πειρασμς)라는 단어이며, 동사로는 ‘페이라조’입니다. 문자 그대로 ‘무엇인가를 시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동사와 명사를 합쳐서 약 60회 정도 사용이 되었는데, 용례를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험의 의 미와 현저히 다릅니다. 시험의 주체가 크게 네 가지로 신약성경에 등장합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체는 마귀입니다. 두 번째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악한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도 등장하지만 인간이나 미혹 받은 인간의 마음도 시 험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B. 복음서에서 '시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시험의 용례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복음서에 나오는 시험의 주체가 크게 세 가지로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마귀가 시험의 주체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귀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을 위한 복음 사 역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또 다른 용례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이 시험의 주체가 되는 것 인데 마태복음 19장 3절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이렇게 시험하였습니다. ‘어떤 연고로든지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 이 가능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어떤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이 평소에 가르쳤던 사랑의 원리에 위배가 되고, 버릴 수 없다고 하면 여자를 버릴 때에는 이혼 증서를 써주고 허락한 모세의 가르침에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기 위 한 악한 의도로 질문 한 것이며, 이것을 가리켜 ‘시험하다’ 라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아주 적은 용례지만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신의 힘을 다 하여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러나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도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의 연약함 이 시험의 주체가 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III. '시험에 들지말게'
A. 시험: 복음을 위한 환란과 유혹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기도에서의 시험은 복음을 위한 환란이나 시련, 유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처음에 나오는 기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라는 간절한 소명을 느끼며, 그런 세상이 되기 위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는 복음을 위한 환란관 시련을 의미합니다.
1. 신자의 삶: 영적전투 이것을 전쟁으로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치열하게 전투하는 군인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입니다. 성 경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 대함이라”(엡 6:12)고 말입니다. 씨름은 희랍어로 ‘팔레’(πλη)인데, 정확한 번역은 격투기입니다. 로마시대 때에 사 람들이 노예들을 시켜서 가죽에다가 금속을 박고 밴드처럼 감은 다음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 흘리면서 서로 싸우 는 격투기를 가리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처절한 팔레 경기를 지켜보던 생생한 기억을 기지고 있는 에베소 교회 교인 들에게 사도바울이 우리의 씨름은 이런 영적인 전쟁이며, 이 세상 나라와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정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전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시험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시험 안에서 우리를보호해 달라고 하는 기도라고 해설을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하나님 뜻의 성취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우리를 그렇게 살고자 방해하는 마귀가 우두머리가 된 이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투이며 어느 한쪽이 파멸해야 끝나는 싸움입니다. 물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 활하심으로 사단은 머리가 깨졌고 허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아직까지 신앙의 원리를 따라 거룩한 경건으로 살지 않는 신자들을 넘어뜨려 하나님의 나라에 아주 쓸모없거나 오히려 방해하는 사람 정도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남 아있습니다. 마음이 미끄러지고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사명감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환 란을 당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갈 수 있도록 합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은 왕국의 소명을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게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도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B. '시험 들게 마시고'
1. 에이세넹케스: 에이스페로 그렇다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는 무엇일까요? 들어간다는 말은 희랍어로 ‘에이세넹케스’라는 단 어인데 ‘에이스페로’(εσφρω)의 변형입니다. ‘에이스’는 속으로라는 뜻이고 ‘페로’는 짊어지다는 뜻이니 영어의 Bring입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고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다보면 악한 세상과 대적하여 환란과 시련과 핍박을 만납니 다. 만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 적절히 이기면서 산다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뜻들이 성취될 것이지만, 그렇치 않다면 미끄러지고 죄악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순결하게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올리는 탄원입니 다.
2. 마귀의 시험과 신자의 이끌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놀란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렸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고 예수님이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무의식중에 베드로를 움직여서 예수님이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마귀의 궤계가 뒤에 도사린 것이며 예수님은 이것을 꾸짖으신 것입 니다.
3. 준비된 마음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 을 넣었더라.”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토대로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지 않았더라면 가 룟 유다가 배신자가 됐겠느냐고 하면서 그도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치는 그렇치 않습니다. 사단도 성령도 사 람의 마음에 역사하기 때문에 모두 각각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역사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예 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에는 돈에 대한 욕심과 예수님을 능히 배반할 수 있는 마음으로 충분히 숙성이 돼있었습니다. 그때 마귀가 그 생각을 넣었고, 넣자마자 이것은 마귀의 생각이 아닌 가룟 유다가 매우 기뻐하는 자신의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시험도 악으로 빠지도록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니 오히려 이 기도 는 그것을 막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기도에 태만 기도에 태만했던 제자들은 결국 잠들어 시험에 들게 되었고 이후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배반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 니다.
C. 탄원에 마음을 묶음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간절한 탄원은 하나님께 우리의 시험의 상태를 알려드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탄원에 우리의 마음을 묶기 위해서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섯 번째 탄원을 올릴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 여 살고자 할 때 환란과 시련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그 시간에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미끄러져 죄에 빠져 아주 부패하고 더러운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가르 침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탄원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며 이 탄원을 하나님 앞에 올 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두려움도 사라지고 어떤 교만함도 멀리하게 되어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이 믿음의 길을 가게끔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요즘 거의 기도할 수 없다면 거의 주기도문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 제목이 많고 열렬 하다면 삶의 많은 방면에서 열렬하게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이 기도는 우리에게 폭풍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에게 정당한 시험이 있습니까?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영적인 전쟁터에 있기 때문에 수시로 복음 때문에 환란, 시련, 고난,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까?
IV. 결론
우리는 그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신실하게 싸 우는 모든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때로 는 위기를 만나고 때로는 동료들에 의하여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고독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단은 무한히 강하고 세상은 무한히 크고 나는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두려움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 히 탄원하며 치열하게 주기도문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체는 순전하게 보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한 빛으로 나타나도록 그렇게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여섯 번째 간구의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첨가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악에 빠지기 때문입니 다.
II. '악'이란 무엇인가?
A. 악(포네로스)의 용례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할 때 악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악은 희랍어로 ‘포네로 스’(πονηρς)입니다. 용례를 보면, 구약에서는 악한 사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 혹은 고의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훨씬 다양한 용례로 나 타납니다. 육체가 허약한 것과 악한 사람 혹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는 악한 것, 나쁜 것을 가리 키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악이라고 하는 단어를 성경을 통해 전체적으로 미루어 보면 무엇인가 하나 님이 가지고 계신 판단 앞에 비열하고 그 판단에 부적합한 판정을 받은 어떤 상태나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 사물들, 성 격 등등을 의미하게 됩니다.
B. '악'의 판단기준
1. 선악의 기준 이 문제를 좀 더 규명하기 위해 악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악은 선과 대조를 이룸으로 악의 정 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만 아는 것으로 어두움의 정체를 알 수 없고 빛을 경험해야만 어두움을 알게 되는 것 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악을 가리켜 ‘선이 결핍된 상태가 바로 악이다’ 라고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 하는 철학자들의 고집스러운 비판에 맞섰습니다.
2. 성경의 기준: 계명 성경으로 볼 때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가 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건과 인간을 아무 목적과 계획 없이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속에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만물들, 학문, 지혜 이런 것들을 가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명백한 계명을 주심으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계명을 따라 살 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은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성경 에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믿어야 할 규칙들과 살아야 할 교훈들입니다. 믿어야 할 규칙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고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말하고 성경은 악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야 할 교훈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것이며 이것대로 따르지 않 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성경에 말하는 악입니다. 그러므로 계명들이 기준이 되어 계명을 믿거나 계 명대로 살지 않아 악이 됩니다. 이 모든 계명들의 뿌리를 더듬어 가면 창조의 목적이라는 뿌리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 로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고, 타락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의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구원해 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III. '죄'(sin)와 ‘악’(evil)
여기서 악과 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죄가 뿌리라면 악은 그 뿌리에서 나오는 줄기, 가지, 열매를 의미합니다. 죄 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이며 악은 그 경향성이 흘러나와서 마음 안에서 혹은 마음 바깥에서 실제적으로 실행 이 된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아주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구원해주신 계 획과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물질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돈을 많이 벌어 혼자 호위호식하며 방탕 하게 사는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노력해서 번 돈을 선교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 하는 것은 우리들이 선한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 적에 이바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빗나가는 모든 것들이 악입니다.
IV. 시험과 ‘악’으로 이끌림
A. 시험은 내면에 작용함 여기에서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와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 다. 이것이 바로 시험과 악으로의 이끌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시험은 내면에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험은 객관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위해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환란과 시련을 의미하지만 주관적으로 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부적합하게 된 모든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주관적인 시험은 먼저 인간의 내면에 작용 하게 됩니다.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시험은 죄의 영향으로서 제일 먼저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고, 우리의 감정 을 부패하게 만들고, 우리의 의지를 충동적으로 만듭니다.
B.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음 그래서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험은 객관적인 것이지만 시험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떻 게 적용하냐에 따라 선으로 이끌릴 수 있고 악으로도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신앙으로 그 시험을 직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 계십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물질도 바치고 시간도 바칩니다. 그런 데 어느 순간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그 뜻의 성취를,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기도하며 인내하고 견뎠더라면 시험을 만나기는 했으나 악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했고 악에 떨어졌고 앙심을 품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것은 주기도문과는 상관없는 삶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 니다.
C.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함 주기도문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심적인 사상이 이 마지막 간구에도 배어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우 리의 위치,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들의 연약한 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매일 생각하며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V.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살아가려고 하면 시련도 만나고, 환란도 만나고, 고난도 만납니다. 이것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날지라도 하나님 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태하여 악 에 미끄러질 때마다 거기로부터 우리를 건져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만 합니다. 시험 속에서 악에 빠지고, 시험 속에서 미끄러져 허비했던 우리의 인생의 날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만이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 종하고 이 은혜에 굳게 붙들려 주기도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구하면서 힘차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I. 본문해설
본문에는 주기도문의 송영이라 불리는 한 구절이 괄호 속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 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포함 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주기도문이 낭독되어 오면서 역사적으로 송영 부분이 첨가되어서 교회에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II. 주기도문의 송영
A. 사본상의 증거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본상의 증거를 보면, 초기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고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베자 사본이라고 불리는 권위 있는 희랍어 성경의 사본들에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B. 후대의 첨가임 그래서 거의 모든 학자들은 송영 부분이 원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고 후대에 첨가 됐다라는 것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학자들에 따라서 주기도문에 송영을 생략할지 첨가할지를 놓고 의견이 갈라 져 왔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기도문에 넣자고 한 사람들은 소수였고 많은 학자들은 넣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송영을 넣는 것을 적합하지 않다고 믿었고, 칼빈과 벵갈같은 학자들은 넣는 것이 적합하다고 가르쳤 습니다.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송영 부분을 주기도문에서 사용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이전의 유대주의 문헌에서 도 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하는 송영의 어구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유대주의에서는 모든 기 도문들이 송영으로 끝나는 예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송영이 없는 기도문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라고 하는 학자는 ‘유대인들에 있어서 기도가 간구로 끝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기 도문 뒤에 붙은 송영은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준 기도문은 아니지만 주기도문을 우리가 받아서 낭송할 때에는 아주 적 합한 요소다’라고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할 때 마지막에 자기의 기도를 받으 시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신앙고백을 송영으로 바치는 것이 주기도문의 아름다운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송 영을 포함하여 예전적으로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III.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
A. 그 나라(바실레이아) 본문을 해석하기 전에 주기도문의 구조를 살피고 송영과의 관계를 규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구하고 그 나라의 도래, 그 뜻의 성취를 간구한 수직적인 기도를 드리고 수평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은 구조적으로 그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나라는 희랍어로 ‘바실레이아’(βασιλεα)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그 통치아 래 살아가고 있으나 아직은 그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전체는 그 긴 장 관계 속에서 투쟁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전투적인 삶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매일매일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전투적인 삶을 살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모든 싸움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이기시고 이 세상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권세로 임하게 하신 하나님의 왕 국이 이미 도래하였고, 그 나라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 속에서 이 기도를 하나님 앞 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B. 그 권세(뒤나미스)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올리는 이유 두 번째는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뒤나미 스’(δναμις)라고 나오는 이 권세는 능력과 혹은 힘을 가리키고 폭발적인 위대한 권세를 가리킵니다. 그 권세는 아버 지께서 도입하신 그 나라를 성취할 능력이며, 각 사람들의 의지와 지성을 하나님의 사랑 앞에 꺾어지게 함으로써 사랑 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까리따스의 나라를 오게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나라를 성령의 능력과 복 음의 은혜를 가지고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함으로 이 세상에 잘못된 질서들과 하나님이 세계를 창 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에 어긋나는 질서들에 항거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선이 패한 것 같고 잠시는 신앙이 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며 궁극적으로 권세가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그 권세 아래 악들이 다시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능력이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삶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고 주기도문의 삶을 살면, 잠시는 꺾어지는 것 같지만 당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우 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C. 영광 마지막으로 영광입니다. 희랍어로 ‘독사’(δξα)인데,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가치가 있는 유일한 존재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며 모든 만물이 회개하여 돌아가게 될 목적이기도 합니다. 위 대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피조 세계 속에 펼쳐 보이시기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 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무한한 우주의 세계, 지금도 폭발하며 팽창하고 있는 끝없는 우주의 세계를 통해 그 충만한 신성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세계와 우주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지금도 도처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특별히 그 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속의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방의 땅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의 정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시대 말에 나타날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의 도래에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 다. 그때에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찬란한 영광이 온누리를 뒤덮을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과 같이 온누리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 불의하게 사는 자들이 없을 것이고, 그 사랑이 모자라 악을 행하는 자들이 없을 것이니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이 땅에 오게 하시기 위하여 몸부 림치며 사셨던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마지막 열매로서의 영광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아버지께 영원히 있고, 이미 도래하기로 작정된 나라이고, 무엇도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가로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 다.
IV. 결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기도문을 버리고 주기도문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 나라는 올 것이고, 그 권세는 임할 것이며 영광은 충만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기도문의 삶을 잃어버리고 주기도문과 반대의 삶 을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들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어둠속을 걷고 있는 빛의 자녀로 살 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갈등과 두려움과 어두움에 가득 찬 삶을 살 것이고 환란과 시련을 만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바지하는 것이 없는 방종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하지도 못 하고 세상 나라의 기쁨에도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신앙이 없어 버림받고 세상 나라에서는 세 상을 버렸기 때문에 또한 버림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목 적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삶인 것입니다. 모든 그 위대한 나라, 그 끝없는 권세, 그 한없는 영광이 바로 하나님께 영원히 있을 것인데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의 아버지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권세와 영광을 생각하면서는 우리는 티끌 같은 피조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위대하신 하나님 위 엄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워 떠는 자들이 되지만 아버지라는 이 신앙 고백 앞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힘으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바 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져 아버지의 뜻이 성취됨으로 그 안에서 하나 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한없이 행복한 존재들이 되는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소명된 것입니다. 우 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고 우리의 입술의 혀가 굳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삶을 알지 못하는 모든 창조의 목적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주기도문에 담긴 위대한 경륜들을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말로, 우리의 복음의 전파로, 우리의 윤리적인 삶으로 사람들에게 빛처럼 드러내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 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어 다시 이 세상에 빛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강해는 열네 번의 설교로 끝을 맺었지만 주기도문의 삶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품에 안기는 날까 지 주기도문을 따라 사는 충성스런 주님의 자녀들이 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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