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24)

수호천사1 2014. 7. 12. 12:04

신 현 수 박사
평택대학교 부총장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주 되심의 영성

<하나님 형상>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그러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될 수 있는가?
그것은 첫째,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화목의 메시지다. 그것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고 죽은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였기 때문이다(고후 5:19).

복음은 또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라고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고후 2:12; 9:13; 10:14). 한 걸음 나아가,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였기 때문이다(살전 2:2; 8:2; 고후 11:7; 롬 1:1). 하지만 마가복음에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지다(1:14).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이것이 “복음”이란 용어가 예수 전승을 포괄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이유다(막 1:1, 4). 복음이란 용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공동체에 소개하였는데, 이러한 바울의 사용이 후에는 예수의 메시지로 전환되었다.

스툴마하에게 복음이란 용어가 구약의 종말론적 평화의 사자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평화의 메시지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에벨링, 바르트, 및 판넨베르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내용 면에 있어서 이것은 닦아오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것이 자신의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비슷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종말론적 평화를 선포하는 사람으로 보았는가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다. 스툴마하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판넨베르크와 빌켄즈에 따르면, 종말론적 평화를 전하는 사람은 - 이 인물은 쿰란 공동체를 통해 매개되는데 이 공동체는 이 사람을 의의 교사와 연결한다 -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인의 삶에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복음”이란 용어는 우선적으로 그것의 내용 즉 하나님의 주되심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임재함을 나타낸다.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주되심의 침입과 관계할 때에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뜻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는 구원의 일에 우선적으로 관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인류를 그의 주되심의 영역으로 이끄는 수단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다르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주되심이 구원의 방식으로 임재하는 것이 미래에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하지만 바울에게 복음이 갖고 있는 구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이미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과거 사건들 특히 그의 십자가 죽음이 그 자체 안에서 닦아올 하나님의 주되심의  침입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여전히 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라도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수단이다.

스툴마하는 주장하기를, 바울에게 하나님의 의는 그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비록 종말론적으로 모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여전히 미래에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새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화목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었다. 이것이 초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으로 바꾼 이유다.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주님 자신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본래적 의미가 하나님의 주되심이 구원의 방식으로 임하는 것이라면, 화목의 메시지로서의 복음이라는 바울의 개념은 복음이란 말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와 관련성이 있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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