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늘리기"합심 전국서 10만일 헌신-1909년 백만명 구령운동
백만명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서울 평양 의주 부산등 주요도시마다 초교파 전도집회가 열렸다. 사진은 평양에서 개최된 알렉산더목사의 부흥집회.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열기도 한풀 꺾인 여름. 황해도 개성 땅에서 활동하던 남감 리교 스톡스(M.B Stokes) 갬블(F.K Gamble) 리드(W.T Reid)선교사는 한국인 교인들과 입 산기도회를 가졌다. 점점 식어 가는 부흥기운을 되살릴 수 있는 새 계기를 마련키 위함이었 다. 1주일간의 산상기도회를 끝내고 하산한 스톡스목사는 곧바로 지방순회여행을 떠나면서 1년내에 5만명의 신자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여 줄 것을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했다. 산상기도를 통해 국면전환의 실마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실마리는 곧 전 교계의 호응 하에 한국최초의 전국적 전도운동으로 전개된다. 이름하여 「백만인 구령운동」.
「새 신자 5만」을 위한 기도가 「백만명 구령(救靈)」까지 확대되는 과정은 아주 비약적 이다.
리드목사등 선교사주도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스톡스 등 세 사람은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린 남감리교 재한선교부 연차대회에서 「20만명의 심령들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선교표어가 채택되게 하였다. 이어 개최된 범교단적 복음주의선교회 통합공의회에서는 리드선교사의 발기로 20만명이 「1백만 명」이라는 슬로건으로 확대되었다.
실로 대담하면서도 다소 지나친 목표설정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 신도 수를 20만명 정도로 추정했으나 실제 학습교인을 포함한 인원은 8천명 수준. 재한선교사가 모두 2백명에 불과하던 때였다. 「1년만에 1백배 성장」은 현실적으로 무모하 기까지 했다.
전도운동은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의 비운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사진은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뜻에 반하여 공포된 칙서.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한국교회 전환의 계기가 될 것으로 믿었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있는 수많은 백성과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 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라고 확신하고 있다』
선교지 「The Missionary」 1910년 5월호에 게재된 게일선교사의 고백이다.
선교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때마침 동양을 순회전도 중이던 채프만(J.W.Chapman) 알렉산더 (C.M. Alexander) 데이비스 (G.T.B. Davis)등 미국 부흥전도단이 방한했다. 이들은 선교사 들을 모아 닷새동안 전도회를 열어 부흥열기를 고조시켰고 데이비스는 한국에 계속남아 전 국 순회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계는 이 운동에 가담하여 열성을 기울임으로 제재 하에 사는 민중 에게 자아를 표현할 수 있게 했다…남녀노소, 신자들과 학생, 평신도와 모든 교역자들이 전 신전력 이 표어의 구현에 노력했다」(백남준, 「한국개신교사」)
연말부터 선교사들을 비롯한 전 신도들은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수만명이 참여해 「1년내에 백만명」 구호를 외치는 부흥집회를 열었고 「백만명 구령가」를 널리 보급시켰다. 또 범교 단적 전도단이 전국을 순회했다.
이즈음에 출현한 한국교회의 독특한 전도방법이 「날연보」(day-offering). 전도인인 물질 적 헌신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헌납하는 방법을 말한다. 각 교인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을 다른 동네에 가서 전도를 해 그 전도일을 사경회 기간 중 교회에 보고하면 되었다. 지금은 사회 경제적 상황이 그때와 달라 이 방법이 잘 쓰이지 않지만 당시 한국교회는 전도 인원이 나 재정이 절대 부족하던 때라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아주 효과적이었다. 또 살림형편에 관 계없이 성의만 있으면 누구나 헌일이 가능했으므로 신도들간에 전도동료로서의 일체감을 증 진시키는데도 이 방법은 한 몫을 했다. 평양에서는 1천여명이 연 2만2천일을, 재령에서는 1 만일을 바쳤고 전국 연일수는 10만일이 넘어 그 호응도를 짐작케 한다.
날연보는 이후에도 사경회 등 특별집회 때는 꼭 등장했고 아프리카교회에서도 이것을 모방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학지남」1권 2호)
한편 선교초기 매서인들로부터 계속적으로 진행되어온 방법이지만 백만 구령운동과 관련, 대규모의 문서전도도 행해졌다. 가가호호 방문, 길거리 전도 등을 통해 70여만권이 방방곡곡 에 뿌려졌다. 전도에 나선 일반교인의 대부분은 자기 생계유지에도 급급한 서민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한국교인들은 10만일을 바쳤다…새로 작정한 사람들의 신앙 을 지도하기 위해 한 달을 전부 바친 이도 있다…신자들이 대금을 내어 구입한 70만권의 마 가복음을 무료로 배포했고 간곡한 기도와 함께 복음을 권고했다. 그때 심방을 받지 않은 가 정은 거의 없을 것이요, 열매를 맺기 위해 수천명이 매일 기도하고 있다」 (「The Korean Mission Field」1911.1)
그러나 결과는 한마디로 실패였다. 범교단적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의 교인증가 는 전년에 비해 1만~2만명에 그쳤으며 일부 교파의 경우 오히려 줄어든 예도 있다. 연도별 로 이 운동이 계속된 1911년까지는 다소 늘었지만 이듬해에는 답보 내지 감소 상태였다.
아프리카 교회서도 모방
농촌순회 여선교사가 소녀들을 모아놓고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고 있다. 날연보와 문서전도는 구령운동의 특징적 전도방법이었다.
백만명이란 목표가 무색할 정도였다. 전교인의 운동참여를 통한 한국교회의 공동체의식 강 화와 초교파적 연합을 통한 일체감 고양이라는 잠재적 측면을 제외한 가시적 성과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외형적 결과만을 놓고 실망하거나 하진 않았다.
평양의 베어드(Baird)선교사는 『온 교회가 굳센 믿음과 유례없는 열성으로 이 운동에 가 담했다』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백만명 이상의 영혼이 이번 신자 화운동 기간 중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KMF 1911년 11월).
이 점은 중요하다. 이 운동이 교인들의 전도열을 진작시켜 미래교회의 터전을 준비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어드는 『이 운동에 관심이 쏠림으로써 한일합방의 시련기에 국내 평화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견해도 또한 밝히고 있다. 백만명 구령운 동의 실패 원인과 관련, 이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구령운동이 선교사 주도로 전개된 탓에 통역을 통한 외국 유명 부흥사의 설교가 한국인의 심성에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는 점 외에도 이 운동은 당시 한국의 민족적 현실을 너무 외면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운동이 한창 진행될 때에는 일제의 한국 침탈야욕이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최대 교단인 장로회의 총회(당시는 노회가 하나뿐이었으므로 독노회)에서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결의를 한 것은 정확히 한일합방이 공포된 지 20일만의 일이었다.
민족적 위기 무관심 비판
이런 지경에서 「백만명 구령」은 호응을 얻기 어려웠던 것. 「이때를 이용해 교회나 부흥 시키자」는 식으로까지 매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국가존망은 세상사인 만큼 영혼구원 에나 주력하자」는 선교사들의 일반적 인식은 되레 한국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것이다.
표면적 「평화와 질서」에만 머물기에 너무나 비통한 현실, 즉 몰역사성이 반역사성으로 직결되는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안일한 신자 늘리기 운동은 무의미했다. 항상 교회사와 긴장 관계를 갖는 민족사적 입장에서 볼 때 구령운동의 역사적 한계성은 간과될 수 없는 측면이 다. 이 때문에 당시 대표적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등도 전도운동의 방향에 우려를 표했 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만명 구령운동은 △「하나된 교회」경험 △「열심전도」라는 한국교회전통 수립등 종교운동으로서의 순기능은 인정할 만 하지만 정치와 종교가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안되는 현실에서 민족사적 한계를 드러내는 아쉬움도 있었다고 정리될 수 있다.
/전인철
백만명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서울 평양 의주 부산등 주요도시마다 초교파 전도집회가 열렸다. 사진은 평양에서 개최된 알렉산더목사의 부흥집회.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열기도 한풀 꺾인 여름. 황해도 개성 땅에서 활동하던 남감 리교 스톡스(M.B Stokes) 갬블(F.K Gamble) 리드(W.T Reid)선교사는 한국인 교인들과 입 산기도회를 가졌다. 점점 식어 가는 부흥기운을 되살릴 수 있는 새 계기를 마련키 위함이었 다. 1주일간의 산상기도회를 끝내고 하산한 스톡스목사는 곧바로 지방순회여행을 떠나면서 1년내에 5만명의 신자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여 줄 것을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했다. 산상기도를 통해 국면전환의 실마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실마리는 곧 전 교계의 호응 하에 한국최초의 전국적 전도운동으로 전개된다. 이름하여 「백만인 구령운동」.
「새 신자 5만」을 위한 기도가 「백만명 구령(救靈)」까지 확대되는 과정은 아주 비약적 이다.
리드목사등 선교사주도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스톡스 등 세 사람은 그해 9월 서울에서 열린 남감리교 재한선교부 연차대회에서 「20만명의 심령들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선교표어가 채택되게 하였다. 이어 개최된 범교단적 복음주의선교회 통합공의회에서는 리드선교사의 발기로 20만명이 「1백만 명」이라는 슬로건으로 확대되었다.
실로 대담하면서도 다소 지나친 목표설정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 신도 수를 20만명 정도로 추정했으나 실제 학습교인을 포함한 인원은 8천명 수준. 재한선교사가 모두 2백명에 불과하던 때였다. 「1년만에 1백배 성장」은 현실적으로 무모하 기까지 했다.
전도운동은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의 비운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사진은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뜻에 반하여 공포된 칙서.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한국교회 전환의 계기가 될 것으로 믿었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있는 수많은 백성과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 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라고 확신하고 있다』
선교지 「The Missionary」 1910년 5월호에 게재된 게일선교사의 고백이다.
선교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때마침 동양을 순회전도 중이던 채프만(J.W.Chapman) 알렉산더 (C.M. Alexander) 데이비스 (G.T.B. Davis)등 미국 부흥전도단이 방한했다. 이들은 선교사 들을 모아 닷새동안 전도회를 열어 부흥열기를 고조시켰고 데이비스는 한국에 계속남아 전 국 순회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계는 이 운동에 가담하여 열성을 기울임으로 제재 하에 사는 민중 에게 자아를 표현할 수 있게 했다…남녀노소, 신자들과 학생, 평신도와 모든 교역자들이 전 신전력 이 표어의 구현에 노력했다」(백남준, 「한국개신교사」)
연말부터 선교사들을 비롯한 전 신도들은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수만명이 참여해 「1년내에 백만명」 구호를 외치는 부흥집회를 열었고 「백만명 구령가」를 널리 보급시켰다. 또 범교 단적 전도단이 전국을 순회했다.
이즈음에 출현한 한국교회의 독특한 전도방법이 「날연보」(day-offering). 전도인인 물질 적 헌신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헌납하는 방법을 말한다. 각 교인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을 다른 동네에 가서 전도를 해 그 전도일을 사경회 기간 중 교회에 보고하면 되었다. 지금은 사회 경제적 상황이 그때와 달라 이 방법이 잘 쓰이지 않지만 당시 한국교회는 전도 인원이 나 재정이 절대 부족하던 때라 이 방법은 현실적으로 아주 효과적이었다. 또 살림형편에 관 계없이 성의만 있으면 누구나 헌일이 가능했으므로 신도들간에 전도동료로서의 일체감을 증 진시키는데도 이 방법은 한 몫을 했다. 평양에서는 1천여명이 연 2만2천일을, 재령에서는 1 만일을 바쳤고 전국 연일수는 10만일이 넘어 그 호응도를 짐작케 한다.
날연보는 이후에도 사경회 등 특별집회 때는 꼭 등장했고 아프리카교회에서도 이것을 모방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학지남」1권 2호)
한편 선교초기 매서인들로부터 계속적으로 진행되어온 방법이지만 백만 구령운동과 관련, 대규모의 문서전도도 행해졌다. 가가호호 방문, 길거리 전도 등을 통해 70여만권이 방방곡곡 에 뿌려졌다. 전도에 나선 일반교인의 대부분은 자기 생계유지에도 급급한 서민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한국교인들은 10만일을 바쳤다…새로 작정한 사람들의 신앙 을 지도하기 위해 한 달을 전부 바친 이도 있다…신자들이 대금을 내어 구입한 70만권의 마 가복음을 무료로 배포했고 간곡한 기도와 함께 복음을 권고했다. 그때 심방을 받지 않은 가 정은 거의 없을 것이요, 열매를 맺기 위해 수천명이 매일 기도하고 있다」 (「The Korean Mission Field」1911.1)
그러나 결과는 한마디로 실패였다. 범교단적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의 교인증가 는 전년에 비해 1만~2만명에 그쳤으며 일부 교파의 경우 오히려 줄어든 예도 있다. 연도별 로 이 운동이 계속된 1911년까지는 다소 늘었지만 이듬해에는 답보 내지 감소 상태였다.
아프리카 교회서도 모방
농촌순회 여선교사가 소녀들을 모아놓고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고 있다. 날연보와 문서전도는 구령운동의 특징적 전도방법이었다.
백만명이란 목표가 무색할 정도였다. 전교인의 운동참여를 통한 한국교회의 공동체의식 강 화와 초교파적 연합을 통한 일체감 고양이라는 잠재적 측면을 제외한 가시적 성과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외형적 결과만을 놓고 실망하거나 하진 않았다.
평양의 베어드(Baird)선교사는 『온 교회가 굳센 믿음과 유례없는 열성으로 이 운동에 가 담했다』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백만명 이상의 영혼이 이번 신자 화운동 기간 중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KMF 1911년 11월).
이 점은 중요하다. 이 운동이 교인들의 전도열을 진작시켜 미래교회의 터전을 준비했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어드는 『이 운동에 관심이 쏠림으로써 한일합방의 시련기에 국내 평화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견해도 또한 밝히고 있다. 백만명 구령운 동의 실패 원인과 관련, 이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구령운동이 선교사 주도로 전개된 탓에 통역을 통한 외국 유명 부흥사의 설교가 한국인의 심성에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는 점 외에도 이 운동은 당시 한국의 민족적 현실을 너무 외면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운동이 한창 진행될 때에는 일제의 한국 침탈야욕이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최대 교단인 장로회의 총회(당시는 노회가 하나뿐이었으므로 독노회)에서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결의를 한 것은 정확히 한일합방이 공포된 지 20일만의 일이었다.
민족적 위기 무관심 비판
이런 지경에서 「백만명 구령」은 호응을 얻기 어려웠던 것. 「이때를 이용해 교회나 부흥 시키자」는 식으로까지 매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국가존망은 세상사인 만큼 영혼구원 에나 주력하자」는 선교사들의 일반적 인식은 되레 한국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것이다.
표면적 「평화와 질서」에만 머물기에 너무나 비통한 현실, 즉 몰역사성이 반역사성으로 직결되는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안일한 신자 늘리기 운동은 무의미했다. 항상 교회사와 긴장 관계를 갖는 민족사적 입장에서 볼 때 구령운동의 역사적 한계성은 간과될 수 없는 측면이 다. 이 때문에 당시 대표적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등도 전도운동의 방향에 우려를 표했 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만명 구령운동은 △「하나된 교회」경험 △「열심전도」라는 한국교회전통 수립등 종교운동으로서의 순기능은 인정할 만 하지만 정치와 종교가 구분은 되지만 분리는 안되는 현실에서 민족사적 한계를 드러내는 아쉬움도 있었다고 정리될 수 있다.
/전인철
출처 : 레드 컴퍼스 Red Compass
글쓴이 : David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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