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신학사상 연구
들어가는 말 김홍기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칼빈에 관하여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네바시 목회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가로서, 교육 가로서,저자로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 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 력, 주석적 재능, 언어 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있는 저 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강요 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 에 가장 권위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 김홍기, 세계기독교의 역사이야기, 예루살렘, 1992, 99-100쪽. 후스토 L. 곤잘레스는 그의 기독교사상사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 고 있다 : 그의 지적이며 신앙적인 발전과정에 관한 자료는 아주 희박하다... 그 는 어릭 때부터 인문주의와 접촉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예를 들면 그는 젊은 시절에 왕의 의사였던 윌리엄 콥 (william cop )과 친구로 지냈는데, 콥은 또 다시 에라스무스와 뷰데(Bude)와 긴밀한 관계였다... 칼빈은 자신 을 학자적인 소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려고 했었다... 그는 제네바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파렐(Farel,1489-1565) 은 칼빈을 붙잡으며 종교개혁의 고삐를 당겨 달라고 부탁하였다. 칼빈이 이러한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자 파렐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퍼부으면서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칼빈은 제네바에 머물기로 결심했으며, 종교개혁의 지도자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 Justo L. Gonzalez,기독교사상사 (Ⅲ),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1988, 183, 185쪽. 곤잘레스에 의하면 기독교 강요 는 개신교 신앙에 대한 조직적인 해 설이요, 개혁전통의 근본문서이다. 또한 이책은 칼빈신학을 연구하는 우리 들의 주된 자료이다. 또한 이 책은 칼빈신학을 연구하는 우리들의 주된 자료이다.) Ibid., 186쪽.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가 당시의 어려운 시기에 그리스도인을로 살 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안내서가 되기를 원했다. 분명히 칼빈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가장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 이다.) Ibid., 238쪽; cf. 윌리엄 A. 스코트, 개신교 신학 사상사, 80쪽. 루터는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창조적인 사상가이다. 이에 비하면 칼빈은 보다 논리적이요 체계적인 인물이다. 여기서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칼빈이 생각했던바를 먼저 다루 고, 이어서 그의 논문 성만찬 소고 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칼빈은 당시 카르펜트라스 ( Carpentras)의 주교였던 추기경 사돌레토 (Sadoleto, 1477-1547)의 서신에 대한 답신(Responsio ad Sadoleti epistolam)에서 종교개혁의 대의명분을 뚜렷하게 밝혔다. 따라서 그의 답 신은 변증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돌레토는 종교개혁자들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은 개인적 야망 을 채우려는 기독교 통일과 평화의 적들 이라고 했고, 교회에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라고 주장했다. 칼빈은 사돌 레토의 글을 읽고 6일 간에 걸쳐서 사돌레토에의 답신 을 썼다.) Cf. 칼빈 작품선, 사돌에토의 답신, 성만찬 소고 , 바실래, 1989, <편자 서문> 참고. 1. 사돌레토에의 답신 칼빈이 쓴 이 글은 제네바 시민과 원로원에 보내온 사돌레토 추기경에 서한에 대한 칼빈의 답신 이다. 칼빈은 문제의 본질을 확실히 파악하고,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자신과 파렐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개인적 유익을 추구하려 했다는 비난을 물리치면서 서두를 열었다. 만일 그대가 나를 개인적으로 비난했었더라면, 나는 그대의 학식을 생 각하고 그대의 학문을 존중하여 그러한 비난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a call from God)에 의해 지 지받고 또 인정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나의 사역이 도전받고 공격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만일 여기에서 침묵을 지키고 그대의 말을 무시하 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인내가 아니요 배신행위(perfidy)가 될 것입니다. ) John Calvin, A A Reformation Debate, Baker Book House, 1976, p.50 나는 내 자신이 명석하고 박학다식하고 사려 깊고 능력이 있고 또 근 면하다고 지금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나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성실성(sincerity)을 가지고 노력했던 것만 은 확실합니다. ) Ibid., p.50 내가 만일 내 자신의 이익(my own intersest)만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나는 결코 교황의 세력으로부터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 은 나이에 이미 고위 성직에 오른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와 대등한 인물들이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자들 로 생각됩니다. ) Ibid., p.54 우리는 결코 우리의 탐심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남용한 적이 없습니다. ) Ibid., p.57 칼빈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제일차적 존재 동기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시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고 모든 생각들을 자기 중심하여서만 전개하 는 것은 그다지 건전한 신학은 못되는 것이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선적으 로 하나님을 위하여 태어났지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의 선과 유익에 대한 모든 생각과 염 려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는 열심이 우리에게 있어 더욱 커야할 것을 가르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the salvation of his own soul)만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 Ibid., p.58 칼빈은 말씀의 우선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령의 역할을 언급하 고 있다 : 선지자들이 교회의 갱신(the renewal of the Church)과 전세계로의 확 장(its extension over the whole globe)을 예언할 때에 그들은 언제나 말 씀에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성령의 구실하에 우리들을 복음의 단순한 교리(the simple doctrine of the gospel)로부터 호도하려는 어떤 사람도 용납하지 말도록 충고하였던 바, 매우 옳은 말이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은 새로운 교 리를 밝혀주시기 위함이 아니요 복음의 진리를 우리의 마음에 새겨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Ibid., pp.60-61.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리들을 검사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성령은 교 회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주시는 분이다. 성령없이 말씀 자체 만을 강조하는 것이 불합리하듯이 말씀없는 성령만을 자랑하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불합리한 일입니다. ) Ibid., p.61 칼빈에 의하면, 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교회의 형태가 로마 교회보다 초 대교회 형태에 훨씬 더 가깝다. 개혁자들은 처음에는 무식한 자들에 의 해 왜곡되고 더럽혀졌으며 후에는 로마 교황과 그의 도당들에 의하여 극 악무도하게 난도질 당하고 거의 파괴되다시피한 교회의 본래의 형태를 새 롭게 하고자 노력해 왔다.) Ibid., p.62 칼빈에 의하면, 개혁자들은 부패하고 타락 한 기존의 교회 상태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고대의 경건함과 거룩함 (ancient piety and holiness)을 열망하여,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을 개선 하고 초대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이다. 칼빈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 이신칭의에 대한 지식이 제거된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소멸되고 종교는 무너지고 교회는 파괴되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없어지 고 맙니다. ) Ibid., p.66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이와같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공적 이나 가치있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gratuitous mercy)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된다는 것입니 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법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때,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표현을 따라 믿음의 의(the righteousness of faith)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분명코 공로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지푸라기(straw) 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 Ibid., p.67 칼빈의 의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의 공적들과는 상관없이 그의 불 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신다. 칼빈은 칭의와 선행과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선행이 칭의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삶 속에서는 선행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 Ibid., p.68 우리 가 값없이 택함받은 목적이 순결하고 오염되지 않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 함인 것처럼, 값없이 주어지는 칭의의 목적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 Ibid., p.69 2. 성만찬 소고 칼빈의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부터 성찬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기독교강요 는 판을 거듭하면서 성찬에 많은 분량을 할래해 나갔다. 칼빈은 성만찬 속 에서 명쾌하게 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칼빈의 견해 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찬관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만찬 제정의 이유 하나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로 인도하신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을 양육할 수 있는 유일한 양식 이다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 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visible signs)을 더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함에서 건지신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보이는 표식을 통해서 약속의 실체(substance)를 나타내시기 위해 서이다. 우리의 영적 둔감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수용하 는 정도에 맞추어 우리를 이해시키고자 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제한다는 이 신비 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찬을 제정하셨다. 둘째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 다 온전히 찬양하게 된다. 세째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모든 성 결에 힘쓰게 된다. (2) 성찬의 유익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거울로서 성찬을 주셨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칼빈 작품선, 성만찬 소고(박건택 역), 91-92쪽. 우리가 성찬에서 얻는 특별한 유익은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를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무슨 불의가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비참함이 있든지 지복 으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신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이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 고,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를 정죄함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에게 의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자. ) Ibid., 92쪽. 칼빈에 의하면 성찬에서 두 가지 것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첫째는 모 든 선의 근원이요 실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요, 둘째는 그의 죽음과 고난 이 주는 열매와 효과이다. ) Ibid., 93쪽. 우리는 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실제로 받아야 한다. 성례 의 내적 실체는 보이는 표지(visible signs)와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 이는 표지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누 구에 의해 주어졌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를 배은망덕에서 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부 어주신 유익을 잊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게 하고,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를 고 백케 한다는 것이다.) Ibid., 98Whr. 또한 성찬의 유익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게 하고, 특히 우리 안에 사랑 과 형제애을 지키도록 강력히 촉구하는 데 있다.) cf. H. Beveridge and J. Bonnet (ed), Selected Works of Calvin (Tracts and Letters), Volume 2, Baker Book House, 1983, pp.173-174. 왜냐하면 성찬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머리되신 그와 하나가 됨으로 그의 지 체가 된 까닭에, 우선 우리를 그의 청결과 순결(purity and innocence)에 부합시키고 또한 특히 동일한 몸의 지체가 가져야 할 그런 사랑과 일치 (charity and concord)를 서로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 Ibid., p.174 (3) 성찬의 올바른 사용 성찬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누구든지 이 성찬에 업신여김(contempt)이나 무관심(indifference)으로 접근하여 우리 주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는 성찬을 사악하게 능욕하는 자요 더럽히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 토록 거룩하게 하신 것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 독(intolerable blasphemy)이다.) Ibid., p.174 칼빈에 의하면, 하늘과 땅위에 주님의 몸과 피보다 더 귀하고 더 존엄 한 것이 없을진대, 경망스럽고 준비없이(inconsiderately and without being well prepared)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사소한 실수일 수는 없다. ) Ibid., p.174 또한, 주님의 성찬에서 합당한 영양(proper nourishment)을 얻기 위해 선 마땅히 우리 영혼은 기근으로 고통당하여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 하는 것이다. ) Ibid., p.176. ...our souls must be pressed with famine and have a desire and ardent longing to be fed,...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 특히 교회에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을 미워 하거나 그에게 원한을 품고서 성찬을 대하려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이, 우리 역시 끊을 수 없는 우정(indissoluble friendship)으로 하나가 됨이 마땅하다... 그런데 만일 우 리가 서로 싸우고 다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여러 조각으로 찢게 되며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 Ibid., p.177 칼빈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 시하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믿음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며 우리의 양심이 수 많은 죄악들을 책망하지 못할 정도로 순결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그렇다 고 그것이 주의 거룩한 식탁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 다. ) Ibid., p.178. 물론 이런 연약함 가운데서도 마음에 위선(hypocrisy)이 나 기만이 없어야 한다. 성찬은 우리의 허약함(our weakness)을 돕고 우리의 믿음을 강건케 하며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고 더욱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 님의 치료책(remedy)인 까닭에, 우리가 질병으로 억압된 느낌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찬을 삼가하기 보다 더욱 활용해야 한다. ) Ibid., p.179 칼빈에 의하면, 성찬의 사용 횟수에 관해서는 어떤 확실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삼가해야 할 특별한 경 우도 있다. 더우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억지로 성찬을 이요케 하기 위해 성찬을 제공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받은 일도 없다. 그러나 우 리가 우리 주님이 의도하셨던 목적을 신중히 고려해보면, 성찬의 사용은 지금 많은 곳에서 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해야한다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다. 연약함이 우리를 억누르면 누를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해주고 순결한 삶(purity of life)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 성찬에 의지함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수요할 능력 (capacity)에 따라 자주 성찬을 거행하는 습관이 모든 교회에 잘 세워져야 한다. ) Ibid., p.179. 칼빈에 의하면, 합당치 못하다는 이유로 성찬을 오랫동안 삼가해서는 안된다. (4) 성찬을 부패시키는 오류들 칼빈에 의하면, 사탄은 성찬의 유익을 오류와 미신으로 더럽히며, 그 열 매를 부패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마침내는 주님의 성찬을 거짓과 허식 으로 뒤바꿔 놓기까지 했다. 성찬을 희생 제사(sacrifice)로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이다. 칼빈은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거부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에 아무런 기초가 없고 고대 교회로부터의 어떤 흔적도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고 조화되지 않는다. 성찬의 빵 앞에 부복하거나, 또 마치 그리스도가 그 빵에 포함되어 있 는 듯이 빵 속에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것은 우상을 성찬으로 바꿔놓는 것 이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그것을 경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 먹으라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또한 피의 상징을 분배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행히도 가려 한 신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을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 다. 우리의 양식으로 주님의 피를 받는 것이 적지 않은 유익일진대 이것 을 탈취하는 것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기이한 능력에 의해(by the secret and miraculous power of God) 완성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성 찬의 참여의 띠(the bond of participation)이시다. 이 때문에 성찬은 영적 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신앙으로 성찬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진정한 실체(the proper substance of the body and blood of Jesus Christ)에 참으로 참여하게 된다. 종교개혁사 제 8 강 칼빈주의의 전파 들어가는 말 16세기 이후 서구문명의 흐름은 칼빈주의를 모르고서는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사회의 중심은 교회였고, 교회의 개혁은 바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쳤다.) 정성구 저, 칼빈주의의 역사적 소고, 한국칼빈주의 연구원, 1991. 7쪽. 칼빈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칼빈 이 이 사상을 모두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사상의 중요한 해설가였 다.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사상을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였고, 그의 성 경 강해와 논문 및 서신들은 말씀 중심의 그의 신학 체계를 잘 보여 준 다. 칼빈은 단순한 신학자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참다운 그리스도인 으로서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독교강요 는 300년 동안 개혁교회들의 필수적 신학 교과서가 되었다(The Institute became for three centuries the essential textbook of theology in the Reformed churches.))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Oxford Univ. Press, 1979, p.234 복음적 신앙에 대한 칼빈의 짜임새있는 확증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Ibid., p.234. 칼빈의 가르침은 어떤 다른 개혁가의 그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정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위그노들에 게 용기를 주었고, 화란인들을 준비시켜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영웅적으 로 수호하게 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으며, 영국의 청 교도주의를 형성했고, 뉴잉글랜드 특성의 기반이 되었다. 칼빈의 신학은 그것이 침투해 들어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들을 취했으나 그것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Ibid., p.235 참고. 1. 프랑스의 개혁교회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Ibid., p.237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루이 11세(1461-83)는 후에 마키아벨리적인(Machiavellian) 것으로 생각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충고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통치했다.) 루이 11세(Louis 11)는 1480년에는 완전히 봉건 세력을 억압하고 중앙 집권을 달성하였다. 그는 절대주의 왕권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 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 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는 서구 최초로 강력한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를 형성하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 에 있어야 했다.) 김 광채, 근세, 현대 교회사, 기독교문서 선교회, 49쪽.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근세 초기 프랑스인의 민족감정에 매우 일치하는 주장 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 르러 갈리아주의 (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 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 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 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광채, op.cit., 50쪽.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 (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레오 10세에 대항하여(토스카나의 패권을 둘러싸 고) 이탈리아 전쟁을 수행한 후, 승리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 조약은 절대왕정에 유리하였고 교회에는 불리하였다. 레오 10세는 1521년 루터 를 파문했던 교황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혼란 중에 사망하였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 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 (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 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John T. McNeill, op.cit., p.238.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 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the pleasure of the king)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 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Ibid., p.238.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the new learning of the Renaissance)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 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 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 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 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 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 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프랑소아 1세는 왕권 강화에 열중하였지만, 또한 문예의 보호에도 힘 을 기울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 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 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 이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 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 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 김 광채, op.cit., 52쪽. 이 그룹을 모 그룹이라 한 것은 플아스 파리 동쪽에 위치한 도시인 모(Meaux)의 주교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1470-1534)가 이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 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 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 (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 John T. McNeill, op.cit., p.239.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 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Luther's doctrine of justification)를 기대하 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 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 풀었다.) 그의 여동생인 나바라(Navarra) 왕비 마르가레뜨는 모 그룹을 음양으 로 지원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 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 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 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칼빈이 바젤로 망명한 것도 프랑소아 1세 때의 일이었다(1534년). 1525년 이후 프 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 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정 성구, 칼빈주의의 역사적 소고, 23쪽.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 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 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 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 가 되었다.) 기독교강요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초판은 1536년 4월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칼빈의 나이는 27세였다.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Ⅷ., p.329. 칼빈은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신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 요 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다.) 신 복윤, 기독교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 , 기독교강요 (상권), 생명의 말씀사, 18쪽 참고. 기독교강요 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야말로 지대한 것이었 다. 이 책이 출판된 지 몇 주 후에 부처(Bucer)는 칼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귀하를 그의 종으로 택하셔서, 가장 부 요한 은혜를 교회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를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소위 <벽보 사 건>이 있었다. 즉, 1534년 10월 17일 밤에 미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벽보 가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여졌다.) 이 벽보를 작성한 사람은 느카텔 교회의 목사 앙트완느 마르코르트 (Antoine Marcourt)였다. 다음 날 아침, 파리 시민들은 자기들 의 집과 공공건물과 교회에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대담한 전단을 뿌린 자들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왕의 식탁용 냅킨이 놓여있 는 그릇에다 그 전단을 한 장 놓고 갔다. 화가 난 프랑소아는 뚜르농 (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들과 상의한 후 가혹한 조처를 취했 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 John T. McNeill, op.cit., p.242. 교묘하고 야만적인 고문들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는 사 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 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다.) Ibid., p.242. 친구 이름은 Etienne de la Forge이다.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 가 출판된 것이 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 명서(a reasoned exposition of their faith)를 가지게 되었다.) Ibid., p.243.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 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프랑소아가 살아있는 동안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존속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 는 방 (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 하게 했다.) John T. McNeill, op.cit., p.244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 Harold J. Grimm, The Reformation Era, Macmillan Publishing Co., p.295.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 (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 (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 였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 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 혹은 휴그노. 그 말은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정성구, op.cit., 24쪽.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 를 주었다.) Harold J. Grimm, op.cit., p.376. "The Edict of Nantes"(1598. 4. 13). 소위 개혁 신앙 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 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 섭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책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칙령 의 폐지로 경제계의 타격은 매우 컸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 가?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 었다.) 루이스 W. 스피츠, 종교개혁사, 229쪽.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 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1549년 6월, 칼빈은 한 부인) 그 편지는 Madame de la Roche-Posay에게 보내진 것이며, 1549년 6월 10일 발송된 것이다. 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 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다 : 우리 구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God our Saviour)가 확장될 때, 그리고 주의 가르침의 좋은 씨앗(the good seed of his doctrine)이 널리 모든 곳에 뿌려질 때 우리가 기뻐해야 하듯이, 나는 당신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이르러 당신으로하여금 주님 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크게 기뻐하였습니 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옥의 심연까지라도 당신에게 손을 내미 셨다는 것과 이와같이 하심으로써 당신을 향한 무한한 동정심을 표현하셨 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요. 따라서 성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사용하는 것 은 당신의 의무(duty)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 부르심으 로써 우리의 전생애(our whole life)가 그의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구별시 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무엇보다도, 즉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철저히 확신해야 합니다. )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Edited by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 Baker Book House, Volume 5 (Letter, Part 2, 1545-1553), pp.229-231. 또한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가 우리를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you must remember, that wherever we may go, the cross of Jesus Christ will follow us, even in the place where you may enjoy your ease and comfort) 라고 했다.) Ibid., p.230. 또한 칼빈은 복음적 신앙때문에 옥에 갖힌 리용(Lyons)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고 있다:) Ibid., pp.391-393. To the Five Prisoners of Lyon. 이 편지는 1553 년 3월 7일에 쓴 것이다. 그들은 이단죄(the crime of heresy)로 정죄되 었다 ; cf. W. Standford Reid, John Calvin, p.79.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두신 능력을 아무 것도 동요시킬 수 없 을 확신합니다. 분명히 오랫동안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the last conflict) 에 대해 묵상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주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다스릴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은혜가 모든 시험들을 이길 것임을 확신하십시요...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세상 보다 더 강하다는 말씀을 명해야 합니다. 여기있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리용의 신자들은 5월 16일, 용기를 내십시요. 나의 형제여, 용기를! 이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순교하였다. 칼빈은 1557년 9월, 파리의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우리는 여러분께 위대한 스승(the great Master)이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바, 인내로써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육신에 있어서 지극히 힘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들(our enemies)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 때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격 정에 대항하여(against ourselves and our passions) 싸울 때라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요... 복음때문에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비 난을 하나님의 복음이 받는 것 보다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전멸 당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종들의 재로 부터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God will always cause the ashes of his servants to fructify,...). 그러나 지나친 행동과 폭력에는 아 무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 Ibbid., Volume 6(Letters, Part 3, 1554-1558), pp.360-361. "..., but excesses and violence will bring with them nothing but barrenness." 칼빈은 이 서신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술책(the craft of Satan)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한 목소리로 일치단결할 것을 강조 하고 있다.) Ibid., pp.362-363. 1557년 9월, 칼빈은 파리의 감옥에 감금된 여성들에게 보낸 격려의 서 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남자들이 연약하고 쉽게 곤란을 당한다면, 여성의 연약성은 여러 분의 타고난 체질(your natural constitution) 때문에 더할 것입니다. 그러 나 연약한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연 약함(the infirmity of his followers)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법을 잘 알고 계십니다. ) Ibid., p.364. 칼빈에 의하면,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증오의 대상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칼빈은 옥에 갇힌 여성들이 그들이 가진 은혜의 분량에 따라(according to the measure of grace)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Ibid., p.364 "it is needful that you do your duty to give his glory,..."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셨 고, 주님을 통해서 여러분이 구원을 소망하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 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영예를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겁내 지 말아야 합니다. ) Ibid., p.36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들이 반박할 수 없을 말과 지혜(mouth and wisdom)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확고함과 불변함(firmness and constancy)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고, 부활의 증인이 되기 도 한 여성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여성들이 어떠한 용기와 절개 를 지니고 잇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사도들이 주님을 버렸을 때 어떻 게 그들이 그와같은 놀라운 불변함으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리 고 여성이 어떻게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자(messenger)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그들 [많은 여성들]의 순교가 열매 맺도록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순교자의 영광 뿐만 아니 라 세상의 영광도 얻지 않았습니까? ) Ibid., p.365. 칼빈은 그들을 격려하면서, 고대의 그리고 최근의 이러한 고상한 본보 기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Set before you, then, these noble exemplars, both ancient and recent, to strengthen your weakness, and teach you to repose on His who has performed such great things by weak vessels.)) Ibid., p.366. 1557년 10월, 칼빈은 프랑스 왕에게 개신교의 신앙을 간략하게 소개하 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의 신앙을 해설한 것이다.) Ibid., pp.372-377. 이 글은 프랑스 왕 앙리 2세(Henry Ⅱ, 1519-1559)에게 보내진 것이다. 앙리 2세의 재위 기간은 1547-1559년 이다. 그는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칼빈은 제일 먼저 프로테스탄트의 신 관을 설명하고 있다(In the first place, we believe in one God, of a simple essence, and yet, in which there are three distinct persons, as we are taught in the Holy Scriptures, and as the doctrine has been laid down by ancient councils ;...). 칼빈은 고대의 박사들이 거부한 모든 분파들(sects)과 이단들을 혐오한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Ibid., p.373. 인간관에 관해서는 말하기를, 인간이 순결하고 완전하게(흠 없게) 창조 되었으나, 그 자신의 범죄에 의해 그가 받은 은혜로부터 타락했다고 진술 하고 있다(We believe that man, having been created in purity and integrity, has fallen by his own fault from the grace which he had received, and by this means is alienated from God who is the source of justice and all good ; so that his nature has been wholly corrupted, and being blinded in mind, and depraved in heart, he has lost all integrity, nothing whatever remaining of it.).) Ibid., p.373. 칼빈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을 거부한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Ibid., p.373. 아담 의 모든 후손(all the race of Adam)은 원죄에 감염되어 있다. 그 원죄는 유전적 악덕이다(... that original sin is a hereditary vice). 원죄는 단순한 모방(simple imitation)이 아니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죄를 일종의 모방으로 보고 있고, 원죄의 유 전적 성격을 부인한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빠져있는 파멸로 부터 선택받은 자들(the elect)이 건짐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 모두는 멸망할 수 밖에 없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와 구 원을 주시기 위해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다.)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Volume 6, p.373.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 이 희생 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온전한 확신을 가 지고(with full confidence)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 유를 갖는다. 또한 양자됨(adoption)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본래 소유 하고 계신 것을 누리게 된다.) Ibid., p.374.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by faith alone) 이 의(義) 의 참여자가 된다. 성령의 은밀한 은혜는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을 불러 일으켜 주신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 별한 선물(peculiar gift)이다. 성만찬(the holy supper)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고 있 는 연합에 대한 증거이다.) Ibid., p.376.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에 대한 증거이다. 양 자됨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의 피에 의해 깨끗해졌고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삶 가운데서 새로와졌다.) Ibid., p.375. ... be washed and purified by his blood, and then renewed in holiness of life by his Spirit.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법과 규정에 순종해야만 하며, 세금이나 부과금 을 내야 한다. 단, 하나님의 주권적 제국(the sovereign empire of God)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호의로써 복종의 멍에를 메야 한다.) Ibid., pp.376-377. 칼빈의 서신만으로 쉽게 30여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 칼빈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거절당한 사람은 없었다. 실업자가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학 생들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도를 얻도록, 복음전파자들이 항상 강건한 영혼을 소유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그는 편지를 보냈다. ) 루이스 W. 스피츠, 229쪽. 칼빈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 다 : 낮에 해가 비치는 동안에는 창밖을 내다 볼 시간도 없다네. 만약 이대로 계속된다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일 세. 일상업무를 다 마친 후에도 수많은 편지를 써야 하고, 수많은 문의에 답해야 하지. 이 때문에 잠을 걸르는 밤이 너무도 많은 실정일세.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 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 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 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 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 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 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 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 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Ibid., 231쪽. 앙리 2세(Henry Ⅱ)는 이단을 별도로 재판하기 위해 특 수 법원(chambre ardent)을 설치하였다. 그는 가학적 취미가 있는 다로 서, 말년에는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 자기 양복을 짓던 제봉사가 불타 죽으면서 얼마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 보았던지 앙리 2세는 그 후 며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2.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a distinctive factor in the life of the Dutch nation)가 되어왔다.) John T. McNeill, op.cit., p.255.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 제단 (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것은 반(半) 수도원 단체로서 청빈, 순결, 순종의 세가지 규율을 지 키기는 했지만 형식적 맹세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이 형제단은 탁발 수 도와는 달리 조용히 연구에 몰두했으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자 신들의 직업을 갖고 손수 일을 하였다. 흐루트가 페스트로 죽자, 라데빈 스가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395년에 교황 보니페이스 9세는 그들의 조직을 인정하였다. 공동생활 형제단 의 많은 회원과 그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독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 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 (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 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 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 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 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 ) The Usefulness of Reading Sacred Scripture in the Common Speech. 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 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 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본명은 Thomas Haemerken)는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데오피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는 14세기 말에 시작된 종교적 갱신(religious renewal) 운동이다. 그 운동은 후기 스콜라주의의 지성주 의에 대한 반동으로써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성(personal, interior spirituality)을 강조하였다. 그 운동은 네덜란드로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으로 퍼져나갔다. 스페인에서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of Loyola)가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운동의 고전적 표현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이다. 그 운동은 대중 교육과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자극했다. cf. The Westminster Dictionary of Church History, p.264. 의 신앙 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를 쓴 것 으로 인정한다. 그는 라덴빈스(F. Radewins)의 영적 지도 아래 있게 된 12세 때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운동에 전적으로 몰두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혹은 the Modern Devotion)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 교적 학교들을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덕과 하나님 경외를 배웠으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수도원과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로서 준비를 갖추었 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와 수도원은 신비적 명상의 삶(the mystic life of contemplation)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 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그들의 학교는 학문의 발전 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전 연구를 격려하였다.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 의자들은 이러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 의 악덕을 보았고, 교회의 부패에 대한 저항을 글로 표현하였다.) John H. Bratt(ed.), The Rise and Development of Calvinism, p.64.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그의 우신예찬 (The Praise of Folly)에서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 을 편집하여 출판했다(1516년). 이것은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공헌이었 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 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 (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 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 Ibid., p.64.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 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 (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Ibid., p.65. 그 두 사람의 이름은 하인리히 뵈스(Heinrich Voes)와 요 한 에쉬(Johann Esch)이다. 그들은 개신교 신앙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 들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화란의 개신교들은 처음부터 탄압을 받았다 ; 김광채, op.cit., 71쪽. 종교개혁 당시 화란의 통치자는 카알 5세(Karl Ⅴ, 1500-1558)였다. 그 는 1519년 신성로마 황제(1519-1556)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신성로마 황 제가 된 다음부터 화란의 개신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화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베네룩스(Benelux)삼국이라 부른 다. 16 세기 중엽 화란은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Luxemburg)와 함께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화란은 정 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6세기 중엽의 화란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고, 당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 다. 또한 화란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화란은 일찍부터 인문주 의가 발달하여 북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 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란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0년대 말 독일 출신의 호프만(Melchior Hofmann, c. 1496-1544)) 호프만은 1530년 이후 화란의 재세례파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열정적인 종말론을 가르쳤고, 천상적 육신 (heavenly flesh)의 기도론을 주장했으며, 성만찬에 있어서 신령주의적 (spiritualist)견해를 가졌다. 또한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그는 그의 말 년(10년 기간)을 스트라스부르크 감옥에서 보냈다. 이 화란과 독일의 북부 국경지방인 프리즐란트 (Friesland)에서 전도활동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 은 재세례파를 멜키오르파라고 한다.) 멜키오르파(Melchiorites)는 멜키오르 호프만의 추종자들이다. 그들 가 운데 일부는 뮌스터 반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열렬한 종 말론, 신령적, 비유적 성경해석 그리고 성인 신자의 세례에 대한 강조이 다. 또한 영지주의적(Gnostic) 기독론을 갖고 있고, 교회의 순결(purity) 을 강조한다. 멜키오르파의 지도자였던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복켈손(Jan Bockelson)이 독일 서북부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 이라는 재세례파의 천 년왕국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1533년 이후, 화란의 수많은 재세례파 신 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로마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의해서도 심하게 박해받았 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이 모두 비판하였다. 그들은 수만명이 죽었고, 오늘날까지도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찬송학과 순교론 이 동정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있다. 재세례파의 교리는 후에 보다 평화적인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시몬스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에 서 루터의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재세례파의 견해로 옮겨간 인물이었다. 메노파(Mennonites)는 16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뮌스터 폭동 이후 침체된 재세례파를 재규합하여 형성되었다. 메노파 는 성인 신자에 대한 세례를 주장하고,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 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 덜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메노파는 성만찬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있으며, 평신도 중에서 선발된 장로들이 성만찬을 집례한다. 또한 설교는 남녀 아무나 할 수 있고, 국 가의 군대 징집을 거부한다. 1980년 현재 전세계 메노파 교인은 64만 3 천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참고. 기독교사전, 기독교문사). 카알 5세의 지하에서 화란의 개신교도는 전반적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5세 때에 화란에서는 종교로 인한 국가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 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개신교도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칼빈주의적 회중은 1548-1550년 무렵에 망명지에서 형성되엇다. cf. John H. Bratt(ed.) op.cit., p.67.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로마교회에 항거하는 폭동이 개혁교회 신도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군중 봉기는 성공했으나, 무자비한 억합 정책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장군 알바 공작(the duke of Alva, 즉 Ferdinand Alvarez de Toledo, 1508-1582)은 필립 2세의 충성 스러운 심복이었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 정책을 펴, 기를 꺾었다. 1567년 8월, 알바 공작은 브뤼셀에 입성하여 여러 귀족들을 체포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9월 20일부터 법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소위 피의 의회(Council of Blood)를 조직하였다. 알바 공작은 유죄에서 처형까 지 사이에 죽은 10만명의 신교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교회사 핸드북, 382쪽. 1584년 북부 네덜란드는 오렌지 공(公) 윌리암(1533-1584)) 그는 침묵자 윌리암(William the Silent)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는 경험 많고 유능한 군 지도자이기도 했다. 1584년 7월 10일 그는 칼빈주 의자로 변장하고 있던 카톨릭 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cf. Harold J. Grimm, The Reformation Era, pp.355f. 의 지휘 아래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긴 기간 동안의 쓰라린 투쟁을 거쳐 그들은 로마교회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1574년 최초의 신교 회의가 도르트(Dort)에서 열렸다. 다음 해에 윌 리암은 라이덴 대학을 세웠다.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서 와 벨직 신앙고백서 를 채택하였다.) John H. Bratt(ed.), op.cit., p.70. 벨직 신앙고백서 (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 (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 서 승인을 얻었다.) A. Dakin, Calvinism, p.138. Dordrecht는 Dort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 Ibid., p.138.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 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 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 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 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Their influence on Protestantism generally was very great and accounted for the further spread of Calvinism).) Ibid., p.139. 한편,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 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 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아르미니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한 일부 인간에게만 있 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이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 선 사람들(에피스 코피우스, 위텐보가에르트)은 그들의 5개조 항의문 을 의회에 제출해 신앙고백 및 교리문답을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항 의파 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 5개항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요 신조가 되었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 (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 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 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김 광채, op.cit., 89쪽 참고.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철저 한 칼빈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지 그가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 난 부분이 칼빈주의의 핵심으로 알려진 예정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아 르미니우스라 하면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잘못 인식하 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 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 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 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에게 그의 글을 반박 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오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 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Ibid., p.90. 코오른헤르트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1563 도 인간 의 가르침에 불과하며 오류투성이라고 매도하였다. 코오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 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 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 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로부터 힌트 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 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동안 숨겼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학 교 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같 은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고마루스(Gomarus, 1536-1641)와의 격렬한 신 학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에 반대하였다.) Ibid., 91. 아르미니우스도 정통 칼빈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예정이 있음을 분명히 믿었다. 그 는 유기의 작성 혹은 이중예정을 부정하였다. 고마루스는 타락전 예정설 을 고수하고 유기의 작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정된(선택 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 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다음에는 화란 개혁교회 전체가 소위 아르미니 우스 논쟁 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 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 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 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 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 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 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 (Remonstrance)을 제출했 다(1610-년).) 이 문서 때문에 그들은 Remonstrants 로 불리운다. cf. WDCH, p.707 ; Harold J. Grimm, op.cit., p.441.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 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예정 개념은 결정론적 예정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적 선택이나 절대적 유기를 믿지 않았다(개방적 예정론).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 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지닌 보편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 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펠 라기우스(Pelagius)의 가르침은 주후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정죄를 받 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그들은 자유의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했다.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 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 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 (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마루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협 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 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 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 (反) 항의서 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화란 의회는 처음에 항의파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 다. 이 회읜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도르트 회의를 소집함에 있어서 화란의 교회 대표 뿐만 아니라, 영국, 스코틀란드, 스위스, 독일, 프랑스의 모든 개혁교회 대표들도 초정하였 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 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 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 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김 광채, op.cit., 98-99쪽 참고 ; 정 성구, 칼빈주의의 역사적 소고, 30-31쪽 ; cf.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265 ; A. Dakin, Calvinism, p.139 ; W. Stanford Reid(ed.), John Calvin, pp.104-109. 이 5대 원 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 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 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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