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을 보며 회상하는
관동대지진과 재일 조선인 대학살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
관동대지진 당시 죽창으로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인 자경단
3.1 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로 바꾸는 듯하였다.
민간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부분적으로는 '문화통치(文化統治)'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에 대한 잔혹한 고문과 살상 등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1920년대 초기에 일본에서 있었던 조선인 학살사건은
7천여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재일 조선인 학살사건과
나카타현[中田縣] 조선인 노무자 집단학살사건이 있다.
물론 이 외에도 숱한 잔학사(殘虐史)가 있지만 가장 상징적인 사건만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조선인 폭동으로 선전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이 일제(日帝)로부터 당한 수많은 잔학행위 가운데
관동대진재학살(關東大震災虐殺)은 규묘면이나 잔학성에 있어서나 가장 첫 순위이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분경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 일어난 대지진은
순식간에 시지오카, 야마나시로 파급되었다.
도시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고 해안에는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건물이 쓰러지고
수십만의 인명이 부상당했으며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신, 전화, 철도를 비롯하여 전기, 가스, 수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학교나 병원도 대부분 쓰러져 가히 생지옥이었다.
당시 동양 제일이라는 수도 도쿄는
화재로 가옥의 3분의 2가 무너지고 불에 타 18시간만에 초토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군부와 경찰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각처에서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렸다.
대진재(大震災)로 치안이 무너진 상태에서 폭동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돌리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치 로마의 대화재 당시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씌우고 그들을 학살한 정황과 비슷하였다.
일왕의 지진 현장 시찰
유언비어 조작과 유포 경위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인 9월 1일
일본 경시청은 정부에 지진 현장에 출병을 요청하고 계엄령을 준비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내무대신 미즈노 젠타로와 아카이케 경시총감은
늦은 밤 도쿄 시내를 돌아보고 다음날 도쿄와 가나카와현 경찰서 및 경비대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폭동(暴動)'에 대한 전문을 만들어
고토 내무성 정보국장의 명의로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타전했다.
전문 내용은 "도쿄 부근의 지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는 등
불량한 목적을 이루려 하고 있다. 도쿄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린 자가 있어
이미 일부 계엄령을 실시하고 있으니 각지에서도 충분히 시찰을 하고,
조선인들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전문으로 인하여 '조선인들의 폭동'이라는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계엄령(戒嚴令)이 선포되었다.
5일에는 계엄군사령부에서 '조선문제에 관한 협정'이 극비리에 결정되어
"조선인의 폭행 혐의를 적극 수사하여 이를 사실화하는데 노력할 것"을 지시하여
'조선인들의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는데 광분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의 경찰, 군부, 우익세력이 총동원되고 이른바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구호 아래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일본의 신문들은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여 조선인 학살을 부채질하였다.
↑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자경단.
한국인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해
대진재(大震災)로 가족과 집을 잃고 당장 생계가 어려워진 이재민들은
조선인을 사냥하는 폭도로 돌변하여 무려 7천여명을 학살하였다.
도쿄와 가나카와현에서는 주로 군대와 경찰이,
지바와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이 학살을 자행했다.
군경은 총검(銃劍)을 사용하였지만
자경단은 죽창(竹槍)과 곤봉(棍棒), 참도(斬刀)를 사용하여
경찰서나 관공서로 피신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까지
관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행을 저질렀다.
군마현의 후지오카 경찰서는 9월 3일 자갈회사 사장 주선으로
조선인 노동자 14명을 유치장에 수감하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경단 대표 13명과 군중 2백여명이 경찰서로 몰려와
유치장을 부수고 죽창과 참도로 14명 전원을 살해하였다.
지붕으로 도망가는 사람은 엽총(獵銃)으로 쏘아 사살하였다.
사이타마현 구마가야 경찰서에서는 9월 4일 소방대원 재향군인의 호위로
조선인들을 후카야 방면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후송 도중 후카야초 대학 부근에서 갑자기 자경단원들의 습격을 받고
현장에서 10여명이 살해되었다.
이들은 소방용 갈쿠리와 죽창, 곤봉 등의 흉기로 닥치는 대로 찍고 찌르며
잔인하게 조선인들을 죽였다. 이 일대에선 모두 43명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우물에 독을 풀었으니 주의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벽보
9월 4일 아침 호전남평유촌 방면에서 자경단에 붙잡힌 조선인 노동자 2백여명 중
절반 정도는 자동차로 안전지대로 호송되고 남은 노동자들은
이송 도중 흉기를 든 일본인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도망치고 86명은 모두 살해되었다.
9월 4일 혼조 경찰서에서 21명의 조선인을
경관 7명이 화물자동차에 태워 호송하고 있었는데,
촌민들이 흉기를 들고 쫓아오므로 다시 파출소 앞까지 되돌아왔다.
이때 경찰서장은 후지오카서에 전화를 걸어
조선인 인계교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촌민들이 알아듣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이때 호조마치 자경단 3백여명이 촌민들과 합세하여 35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9월 5일 새벽 오사토군 요리이미치 경찰서에 유치중이던
울산 출신 엿장수 김창(金艙) 등 14명은
이웃 마을 용사촌 자경단 30여명에게 죽창과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이들은 함께 유치중인 중국인들에게도 상처를 입혔지만
유독 조선인들만 현관으로 끌어내어 찔러 죽였다.
호쿠소 철도회사는 조선 노동자 5백여명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57명은 역전 구일시에 합숙시키고 있었다.
4일 아침 이들 57명을 경찰서에서 보호하기로 하고
소방대 인솔 아래 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들이 나타나 여러명을 죽였다.
홍전촌의 자등원에 사는 조선 노동자 13명이 나라시노에 수용되기 위하여
자경단을 따라 이치카와 분서를 지나 중산재 북쪽에 이르렀을 때
부근의 경계를 맡고 있던 촌민들에게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뒤에 온 3명은 신원보증서도 갖고 있었는데 이들까지도 무차별 살해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5일 저녁부터 6일 오전까지 불태워져 매장되었다.
다음은 구정호에서 일하던 나환산(羅丸山)이란 사람의 목격담이다.
"나는 86명의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9월 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구정호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백여명이었는데,
그날 오후 1시경 기병 1개 중대가 도착, 경찰서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다무라란 자가 조선인 3명을 불러내 총살하기 시작했다.
다무라는 총성을 듣고 일본인들이 놀랄지 모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산부도 한 명이 있었는데,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뱃속에서 영아(瓔兒)가 나왔는데,
군인들은 우는 아이까지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들은 다음날 새벽 화물자동차에 싣고 어디론가 운반해 갔다."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발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도쿄에서 752명, 가나카와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현에서 239명, 지바현에서 293명 등
일본 각지에서 6661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학살자의 대부분은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 등 관헌의 학살은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에 돌리면서
일부 자경단원을 재판에 회부하였지만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인 학살 사진, 일본인들이 피비린내에 코를 막고 있다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의 '도쿄 지진 한국인 학살 보고서'
재일조선인유학생회(在日朝鮮人留學會)는 1924년 1월 대표자 김건(金楗)의 명의로
'도쿄진재 한인학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중 학살내용의 일부를 발췌한다.
'하동(河東) 광장에 한인(韓人)을 다수 포함하여 기천기백인을 한꺼번에 난사하고
병영 또는 경찰서 구내에 기백기십인을 집합시켜 살해하였다.
더구나 노상에서 보는 대로 병력 내지 경찰관이 총살한 것은 물론
보통의 살인수단이라고 할 수 없게 소위 자경단, 청년단 등은
'조선인!'이라고 외쳐 부르는 한마디에 백이 응하여 낭(狼)의 군(群)과 같이
동서남북에서 몰려와 1명의 동포를 수십인이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그위에 죽은 사람의 목을 끌고 다니면서 능욕하였다.
몸을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인 일도 있다.
동네 앞을 흐르는 것은 우리 동포의 선혈이고
이곳저곳에서 흐트러진 것은 우리 동포의 시체이다.
우리 동포의 시체가 퇴적하여 우전천은 유통도 막혀
동포의 피가 썩는 그 악취는 통행인의 호홉이 막힐 정도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당시 외국인이 한국인 학살장면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을 각서에 집합시켜 감시하고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총을 쏘고 싸움을 하면서
"이 총성은 한국인들의 총성이며 이 싸움은 한국인들이 습격하는 소리다"라고
기만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한국인이 폭행하거나 습격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조선총독은 동 6일 각 신문에 공포하여
"조사해본 결과 관동지방 조선인은 노동자 3천명, 학생 3천명, 합계 6천명 중
살해당한 자는 2명뿐이다"라고 했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 중 5분의 1이 관동지방에 있었으니
그 수가 3만 이상에 달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다.
다수의 인명을 살육하면서 2명뿐이라고 발표한 것은
실로 수심(獸心)의 궤변이 아닐 수 없다(『한국독립운동사』3 ).
관동대지진 당시 가나가와 현 방면의 철길에 내버려진 학살당한 조선인 시신들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느님께 부르짖듯...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하나님)은 일본인의 만행과 죄악을 알고 계신다!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느님께 부르짖듯(창 4:10),
억울하게 살육을 당한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일본 열도에서 하늘에 호소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국가적 죄악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느님께 부르짖는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일본땅에서 그치고
"일본열도침몰"이라는 천벌(天罰)을 면할 것이다.
일본인들의 70%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소위 '도래인'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고대로부터 한국인을 박해, 학살한 것은
사실상 "존속상해죄"에 해당하는 극악한 범죄다.
그러나 일본은 그동안 쌓아 올린 죄악이 부족해서 독도를 강탈하려고 하는가.
독도의 바위를 깨면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일본은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국가위기 와중에서도
내년부터 사용하게 될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한국이 불법 점거’라는 표현을 담기로 결정했다.
대체 이 악한 나라는 어찌 해야 침략근성이 뿌리가 뽑힐 것인가?
답은 천벌(天罰)에 있다!
금수만도 못한 만행을 자자손손 저지르고도
반성과 회개를 모르는 일본은 천벌만이 답이 될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보다 더 강한 지진과 높은 해일이 열도를 뒤흔들어
자력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하고 마침내 국력이 쇠퇴 일로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일본은 이웃 나라를 멸시하고 침탈하는 악행을 멈출 것이다.
그렇기에 슬픈 일이지만 천벌(天罰)만이 일본의 답이다.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리라”
(사 61: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8~9).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세상과 영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은 동일본 대지진을 당연히 천벌(天罰)로 인식하고
일본 열도에 회개와 변화의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도쿄도지사는 동일본 대지진을 '천벌'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14일 이번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것은 "천벌이 내린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잘 지적했다.
"일본인의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는 아욕(我欲·자신 스스로의 욕심)이다.
이번 쓰나미를 잘 이용해 아욕을 한번 씻어 낼 필요가 있다...
역시 (이번 지진과 쓰나미는) 천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천벌은
일본의 죄악을 씻어 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씻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은 일본인들의 개인적 아욕(我欲)만이 아니다.
일본의 국가적인 아욕(我欲)을 씻는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을 향해 지속적으로 자행한 일본의 국가적 죄악...
일본인의 손에는 조선인의 피가 묻어 있고,
그들의 손에 학살당한 무수한 조선인들의 핏소리가
동남, 서남아시아 및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일본 열도에서 하늘을 향해 호소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천벌'이라는 이시하라 도쿄 지사의 발언은 결코 망언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세계가 경악한 이번 동일본 대지진을 천벌(天罰)로 인정하고
참회의 기회로 삼아 그들의 국가적 죄악을 씻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일본 열도는 더 크게 흔들리리라...
회개가 없다면 일본 열도에는
이번 동일본 대지진에 성취된 아래의 말씀이 더욱 크게 다시 응할 것이다!
(에스겔 26:12)
財物은 털리고, 商品들은 빼앗기겠고, 城壁은 헐리고 豪華로운 邸宅들은 허물어져,
돌과 材木, 흙부스러기까지도 바다에 쓸려들어 갈 것이다.
(에스겔 26:19)
主 야웨가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荒廢한 도시로 만들리라.
끓어오르는 깊은 바다의 산더미같은 물결에 휩쓸려...
(아모스 5:8)
낮을 밤처럼 어둡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올려 땅에 쏟으시는 이, 그의 이름 야웨시라.
(에스겔 28:8)
너를 구렁에 처넣어 바다 가운데서 無慘히 죽게 하리라.
그러나 아래의 말씀이 일본 열도에서 먼저 실현될 것이다!
(사 24:19,20)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관련기사 링크: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
'예언,종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국의 미래, 부상이 아닌 붕괴를 생각해야 (0) | 2014.05.16 |
---|---|
[스크랩] 일본과 중국의 전쟁 배경과 결과 예측 (0) | 2014.05.16 |
[스크랩] 일본은 천벌(天罰)만이 답이 될 것 (0) | 2014.05.16 |
[스크랩] 아름다운 천국 (0) | 2014.05.14 |
[스크랩] 천국으로 보낸 재료 (0) | 2014.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