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계시록과 맞추어가는 창조와 그 진실(서론)
창조와 종말에 관한 계시록의 관계를 인류의 역사와 연결시키면 우주와 함께하는 지구의 역사로 밖에는 이해 할 기이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역사에서 모태에서 자라나는 아기의 역사가 있고, 계시록의 예언에 신앙성장의 모습을 따라 영원한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죽음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또 성경을 보이는 현상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풀어야 참 진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살아갈 영을 미숙아가 아닌 완전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껍질을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천국에서 탄생하는 것이라는 것이 역시 믿어지시면 계시록을 포함한 성경전체로 기록된 모든 말씀이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나 사람의 육체가 아닌 자아중심적인 욕심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의 본성과, 행동에 대한 포기와, 죽음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믿음과 성품의 변화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성장과정에서의 부적격 요소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창조라는 단어는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업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 인류를 있게 한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떠나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창세기의 창조라는 언어는 지금도 진화론과 함께 ‘지구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의 기원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논쟁의 대상일 뿐 하나님의 창조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우위를 증명 해 보일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기독교 안에 생활하고 있는 모든 신자들이나 그 위로 그 신앙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교회지도자들의 문제라고 보며 또 지금까지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 하도록 하늘 문을 막아놓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이나 신약의 예수님의 말씀들의 내용을 보다보면 TV에 나오는 방송 중 내용과 상관없는 광고가 보일 듯 말듯 몇 분의 몇 초 사이에 지나가는 광고와 같이 전혀 다른 맥을 가진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는 육신의 현상과는 다른, 마음속에 있는 믿음에 관한 내용들로 유의하여 보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어 성경이 조각조각 흩어진 내용들을 그냥 모아놓은 것 같이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나 계시록이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되어 사람의 본성이나 방법, 또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바꿔주시는 신앙성장의 순서 등으로 이해 할 수 있다면, 또 성경을 1,2,3차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고 오직 4차원을 보는 시각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절대적인 것을 먼저 이해 할 수 있다면, 지구의 나이나 사람과 동물의 기원 등을 가지고 기독교와 다투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앞세워 싸움을 거는 비 신앙인이나 사이비 이단들의 모든 이론에서 자유롭게 되는 그 날이 될 것이며,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성령님 성삼위 하나님만이 세상에 유일한 신이심이 증명될 것을 믿어 창조와 계시록으로 사람의 영이 자라나는 비밀을 풀어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믿던 사람의 본성을 온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뀜을 받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며, 성경의 모든 내용 역시 그 과정을 감추어 설명한 비밀이라는 것을 밝힐 것입니다.
두 번째
계시록과 맞추어가는 창조와 그 진실
성경의 예언을 이해하는 기본 개념에 대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고 성경의 논리만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혀주는 오직 유일한 경전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역사 안에서 한 사람의 육신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찾고 또 영이 자라가는 마음의 역사를 기록한 비밀이며 예언이라는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창조의 역사기록인 창세기 1장이 지구와 우주에 초점이 맞춰지면 이는 인류 모두의 과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이 모태에 있는 아기의 기록이라면 사람에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이 기록이 마음이 변하는 영의 일로 받아드린다면 우리 모두는 성경의 안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영의 몸에게 필요한 말씀과, 지구에 사는 동안 영을 보호하기위해서만 존재하는 육의 몸에게 필요한 말씀 중 무엇이 중요하냐 하는 것입니다.
또 영과 육의 일에서 구분 되어야 할 영의 일과 육의 일의 구분은 어떻게 지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은 어떻게 내리고 있는가에 두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일대기를 문자로 기록한 창세기나 계시록이나 문자의 뜻이나 상황으로 찾고 보면 눈에 보이는 지구의 역사도 육체를 말하는 사람의 일생도 있지만, 천국에서 살 자격을 갖추게 하는 영을 위한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영이 자라야 하는 당위성을 말씀하시는 숨겨진 성경의 말씀이 디도서 3장을 포함하여 많이 있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인 베드로후서 1장의 내용을 보면, 3절에는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광과 하늘의 덕을 마음에 갖도록 하는 것으로(킹제임스=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부르셨으니), 이는 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들에게만 허용된 것이라고 하셨으며, 4절을 보면, 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의 주체는, <육의 일이라고 정의 하신> 머리로 결정하여 행동하기 이전의 상태인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정욕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믿던 나의 마음 그 자체를 <영의 일이라고 하신>하나님의 성품으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믿음부터 시작하여 덕을 이룬 후,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성품을 완성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신앙성장의 순서요, 또 하나님의 성품으로 내 마음을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사닥다리와도 같은 순서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러므로, 먼저, 그러나, 만일, 이제, 또, 등의 접속사를 두고 “베드로서의 목적은 하나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말씀하는 가운데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써 가는 중에 앞 문장인 1장 3-11절과, 뒷 문장인 12-21절의 두 문장을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를 가운데 두고 뒷 문장의 예언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그 중심 내용이 하나님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으로 낸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에게 성경을 예언으로 주신 그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위함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가득 차는 그날까지의 과정을 미리 기록하신 말씀으로 인정해야 하며, 성경은 육신의 노력으로 육신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닌, 노력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마음 그 자체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채워지는 길을 예언하고 계시다고 하셨으므로, 요한계시록을 포함해 종말을 예언한 모든 예언서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영성은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기 위한 신앙성장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수순으로 마지막에 대한 예언인 계시록과, 시작에 대한 계획인 창세기를 이해한다면 앞으로 연재 되는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바로 이해되리라 믿습니다.
시각적인 문자로는 요한계시록은 지구와 그 안에 존재하는 동식물 등 모든 것의 멸망 등 종말에 관한 것이 기록되어 있어 이단 사이비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분들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요한계시록” 하면 지구의 멸망에 초점을 맞추고 누구의 것이 더 정확하냐고 하는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본 틀인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존재하는 나의 본성들을 알고, 포기하고, 버리고, 기다리고, 채우고, 바꾸고, 다시 타인을 위해 일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채워지는 과정을 66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성경에 예언으로 넣어주신 것을 기독교 전체가 인정한다면, 눈에 보이는 땅에서 사람이 움직여 행하는 것에 대한 계시록의 이해는 도태되고,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멸망되는 나의 성품이 땅이고 땅의 초목이고, 땅을 비취는 해와 달과 별 등이며, 또 그릇된 신앙의 열매들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며, 천국에 가기 위한 신앙생활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정답을 알 수 있을 것이므로 앞으로의 내용들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판과 종말을 맞는 그릇된 인간의 본성과, 믿음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시작되는 육신으로 행하는 온전한 행위까지 맞추어 기록할 것이며, 이 예언만이 참 예언이며, 육신의 행위에 관한, 마음이 행할 법은 모르면서 육신이 행할 도덕이나 예절에만 초점을 맞춘 모든 성경적 이해에 대한 것은 베드로후서 2장의 기록이나, 디도서 3장의 기록과 같은 상태에서의 모순된 예언임을 밝혀나갈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경을 주신 목적을 바로 알게 함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진 성경 해석법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구의 창조나 지구의 멸망 과정으로 이해시키려고 하는 모든 강해에서 떠나 영원 한 땅 천국에서 살아야 할 나의 주체인 영이 만들어져 나가는 것과 영 안에서 나를 죽게 만드는 육의 성품이 멸망하는 과정을 설명하신 종말에 맞춘 해석에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지구가 멸망한다고 우리의 영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소멸됩니다.
사람은 육이 죽으면 죽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천국으로 이사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을 영 안에 또 죽어야 할 육이 있다고 하시며 그 육이 죽어나가 영이 청소되어 참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심령의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 안에 있는 육의 성질이 없어지는 종말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지구의 종말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지구의 종말과 나의 영과는 무슨 상관이 있고 영을 붙들고있는 나의 육이 종말을 맞는 것은 내가 버려두어야 할 일입니까?
소중한 것을 발견 하셨다면 찾으셔야합니다.
종강 특강
창조와 계시록의 비교
류 현 수
대한신학대학교. 대학원
창조와 계시록의 비교
1. 서론
우리는 성경을 문자를 풀어 해석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나 상황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우를 범합니다.
창세기 1장에 드러난 창조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창조에 대한 기록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하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정의를 생각한다면 창조의 역사를 절대로 지구와 우주에 국한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너희는 나의 말을 들을찌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한 사람 한사람이라고 지칭하셨고 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부모의 살과 피를 물려받은 육신의 몸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와 경계를 넘어 사람의 몸 속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영의 몸이 있습니다.
첫째, 지구가 물과 흙이 뒤범벅되어 있고, 둥그런 그 수면을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진 성령으로서의 신이 감싸고 있습니다.
정자와 난 자가 만나 어머니의 모태에 막 형성된 모습이 생각나지 않으시는지요?
그 지구가 빛과 어두움이 생겼는데 모태에 막 생겨난 태아가 엄마의 몸 밖에서 일어나는 낮과 밤을 느끼며 자라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둘째, 지구 자체에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나누어지는데 머리 부분과 몸통이 나누어지면서 사람의 모양이 갖추어지는 것이 안 느껴지는지요?
셋째, 하늘의 물과 땅 아래로 흘러내린 물 사이에 뭍이 드러났는데 몸에 흐르는 피나 골수가 살과 분리되어 흐르는 길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또 지구의 표면에 풀과, 채소와 열매맺는 나무가 생겼는데 단백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살의 표피가 생기고 머리카락이 돋아나는 모습을 느끼지 않으시는지요?
넷째, 지구 밖에 일월성신이 생겼는데 몸이 밖에 것을 보게 되는 눈을 비롯한 얼굴의 눈, 코, 귀, 입이 열려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시는지요?
다섯째,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가 생기는데 이는 양식의 표현으로 먹고 소화시키고 양분을 받는 내장의 형성으로 보이지는 않으시는지요?
여섯째, 짐승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만들어지는 아담을 보면서, 영이 없이 혼으로만 살다가 돌아가는 짐승처럼 영이 없는 몸에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어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이제 몸을 자기 임의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지요?
이와 같이 창조의 날이 쌓일수록 모태에서 커가는 아이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일곱째 날에 지구와 그를 돕는 우주와 지구 안에 살아가는 모든 것과 함께 사람을 만드시는 수고를 끝내고 쉬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역시 엄마의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던 일이 끝나고 이제 스스로의 입으로 먹고 마시며 새 일을 해야 하는 안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창조에서 찾아보는 영의 일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서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신이신 성령님이 보호하시는 땅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신약의 성령님은 모두 새로 변화 받아야 할 속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완전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받은 심령의 상태를 성령의 뜻을 따라 성령과 함께 하는, 새 몸으로 사는 삶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성령의 보호를 받는 땅은 지구 자체를 보호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육체 안에 있는 속사람 마음이며 그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구나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지구창조의 기사를 기록해 놓은 것보다는 새로 태어나는 영이 자라가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비밀로 지구 창조의 기록을 기술하신 것입니다.
제품이 온전하게 쓰임을 받으려면 포장지가 벗겨져야합니다.
사람의 영이 천국에 가려면 육체가 죽어 육신의 탈을 벗어야 천국에 갑니다.
사람의 영이 천국을 사는 삶이 되려면 자아중심의 욕심이라 말하는 육의 껍질을 벗어야하는데 이 상태가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이 창조의 기본 속에 자라가야 할 참 목적이라면, 창조된 땅을 보면서 영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을 창조의 기본 목적으로 영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찾는다면,
첫째는, 성령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께 지음 받아 택함을 받은 영이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행할 착한 행실(착한행실=빛<마5:16>)이라는 것을 알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상 또는 영을 살리는 생명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행하는 착한 행실의 종류들과 사람이 본성적으로 행하는 육체가 행하는 육체의 요구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파악하여 구분하여 놓고,
셋째는, 하나님의 요구와 사람의 요구 사이에 있는 자신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기본 바탕을 점검하며 하나님께 부끄럽고 창피한 사람의 본성을 세상의 것 마귀의 것으로 하나씩 하나씩 흘려보내버리고,
‘육체적인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 ‘씨’를 맺기 위한
‘싹이 트다’라는 뜻을 가진 ‘풀’과,
‘육체적인 자손을 낳다, 열매를 열리다’는 뜻으로 맺는 ‘죄, 확실히 지키다, 불쾌하게 만들다, 상처를 입히다, 초조하게 하다’는 뜻을 가진 ‘채소’를 만드시고
‘스스로 끊다, 분리하다, 꿰뚫다, 절단하다, 첫 열매, 보상’의 뜻을 가진 ‘열매’를 맺기 위한
‘교수목, 모든 무기의 자루’ 등의 뜻을 가진 ‘나무(에츠)’ 를 만드셨으므로
육체적인 믿음의 모습과 그 믿음으로 인해 발생되는 육체로 보여지는 말과 행위들을 스스로 실행하며 잘못된 것들을 발견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섬기기 위한 새로운 믿음의 첫 행위로 새로운 마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믿음을 끊게 하기 위한 매나 칼이나 창으로서의 새로운 말씀들을 마음에서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양 우리를 만들다, 눕다, 휴식하다, 속박하다’ 등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는 ‘교합을 위해 쭉 뻗다, 엎드리다’는 뜻을 가진 ‘넷’인 ‘라바’로서 믿음창조의 넷째 날에,
‘밝음, 상쾌함, 등잔, 밝은 빛’의 뜻을 지닌 ‘광명’으로서, ‘세마포의 재료들인 실을 만들다’라는 개념으로 실의 재료들을 틀어 꼬아 실, 옷 술, 꽃 모양을 만든다는 뜻과 함께 ‘가장 큰, 소리가 큰’ 등의 ‘크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기 위해 믿음의 나이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행실을 만들어 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빛을 상징하며, 이는 성막에 들어간 신앙인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빛으로서, 마음에 평안을 얻은 때를 상징하는 낮을 주관하는 광명을 지으시고,
‘베어내다 슬퍼하다, 혐오하다, 몹시 싫어하다’는 뜻의 쿠트에서 파생된 ‘가장 작은, 가장 어린’ 등의 뜻을 가진 ‘작다’는 뜻을 가진 카톤으로 기록되었으므로 그릇된 믿음을 베어 낼 수 있도록 마음을 고백하게 하시기 위한 빛으로서, 환난을 주는 것이며, 이 환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혐오하며 싫어하고 또 슬픔에 싸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믿음은 영으로 보는 신앙성장의 나이가 가장 어린 젖먹이의 나이를 상징하는 것으로의 환난의 때인 밤을 비추는 작은 광명을 지으신 것과,
‘점성술, 굴러 커지다’라는 뜻을 포함한 코카브는 ‘찌르다, 관통하다, 쓰리다, 물집이 잡히다, 불이 타며 먹어 들어가다’라는 뜻을 가진 카바에서 유래된 말로서 별을 지으신 것과,
‘찾아내어 삶에서 드러낸다’는 뜻으로 쓰시기 위해 사용하신 ‘이루다’는 단어를 쓰신 것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육의 몸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믿음이 새 시작인 양의 집부터 만드는 과정에서
삶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행위 속에 하나님이 원치 않는 믿음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 그 자체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길을 달려가기 위해 세마포로 상징되는 마음이 성막이 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일어나 버릴 것과, 베어 버릴 것과, 혐오하고 싫어하는 것이 드러나 불에 태워 자신을 오그라트리는 곳인 번제단에서의 태움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일이 점점 커져가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받기 위한 수순을 밟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번성케 하다와 같은 의미를 지닌 ‘움직이는 떼(무리)’라는 뜻을 가진 쉐레쯔와 ‘마주 대하는 얼굴’이라는 뜻을 가진 ‘파님과 ‘~~한 방법으로, ~~와 같은’이라는 뜻의 관계대명사인 ‘아쉐르’를 쓰시고,
‘정액, 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씨’인 사상을 상징하는 ‘물’과,
‘꿈틀거리다, 우글거리다, 풍부하게 양육하다, 증가시키다’의 뜻을 가진 ‘번성하다’와
‘살고 있는 상태’라는 뜻으로의 ‘생’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죽기 이전의 신앙상태로 마귀적이며 세상적인 육에게 끌려 다니는 프쉬케적인 영으로서의 짐승적인 영이라는 뜻인 ‘네페쉬’로의 ‘물’을 쓰신 것은
사람과 부딪히며 사는 생활에서 자신의 영이 살려면 짐승과 같은 영이 물이 지나갈 틈이 없이 떼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의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므로 삶의 전 시간에 언제나 육신의 모양이 아닌 마음에 있는 영을 위해 언제나 짐승같은 자신의 모습을 성령과 하나되어 살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천국의 사상으로서 하나님의 물인 구름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하늘’과,
‘땅을 망치로 때려 쳐서 넓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라카에 어근을 둔 ‘넓게 퍼진 것’이라는 뜻의 라키아로 기록하신 궁창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한 준비가 된 시온의 땅으로 이해해야하는 ‘에레츠’인 ‘땅’과
‘!~~에서’와 똑같이 ‘가장 높은 곳, 꼭대기, 지존자 여호와, ~~위에 여호와에게’의 뜻인 알에서 파생된 ‘~~를 넘어서, 시간을 지나서, ~~안에, ~~을 통하여’라는 뜻을 가진 ‘위’와
‘날다’와 똑같이 ‘날개에 덮여 캄캄함’이라는 뜻을 가진 오프로 기록하신 ‘새’와,
‘뒤로 빼다, 물러가서 숨다’라고 하는 뜻을 가진 카나프에 어근을 둔 ‘모든 것의 말단, 뾰족탑, 최극단, 날개’의 뜻을 가지고 있는 카나프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완전히 죽인다는 뜻으로 쓰인 ‘날개 있는’으로 기록한 것은,
육신에 관한 것은 날개에 가려져 어두워 못보는 것과 같이 다 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영은 언제나 육체가 사는 공간인 지구를 넘어 다시 히브리가 되어 여호와께서 사시는 하늘에 사는 마음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장난감이나 놀이터에서 놀다 돌아 갈 때에 다 버려두고 또 자신이 하던 역할까지도 다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가듯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이나 명에나 권위나 관계를 다 청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물에서 사는 생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에 충만하고,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는 것은 육신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시작하여 그 하나가 많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는 나무의 뿌리나 줄기처럼 많은 것을 양산해서 행실의 열매가 맺히기까지 마음을 변화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완전히 하나님의 성품을 받기까지는 자신 안에 있는 영이 모든 짐승 같은 영인 프쉬케가 없어질 때까지 말씀의 물에서 놀라는 것이며,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이 프뉴마 적인 사고로 변하기까지, 사람의 마음의 땅 전체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육신의 생각이 캄캄해져 생각이 아예 없어지기까지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살게 되는 큰 물고기에서 ‘큰’은 옷을 만드는 재료인 실을 만들기 위해 실의 재료들을 ‘꼬다’라는 의미로 말하는 가달에서 유래된 가돌로 크게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물고기는 타닌으로 ‘용, 바다뱀, 뱀’이라는 뜻으로 저희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완정한 의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상의 권세 잡은 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가 큰 일을 한다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물에서 놀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자신 안에 있는 큰 마귀가 함께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며 이 일일 이루기 위한 환경에서의 고난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생물과 하늘에는 새가 빽빽이 가득 차게 하라는 공통적 현상으로 말씀하신 창조 그 다섯 번째 날의 말씀내용들을 영이 가질 믿음과 영의 상태로 재해석하면,
생활의의 개념에서는 육체는 세상에서 살지만, 자기의 욕심인 육에게 목이 매여 끌려 다니며 살던 짐승 같은 영이 세상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육신의 욕심을 바탕으로 하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육의 속성들을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의 물에 풍덩 빠져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먹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변형되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만 앞세우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뒤로 물러나며,
예배의 개념에서는 몸은 세상에서 살지만 마음으로의 영은 하나님을 만나는 하늘에 살면서 자신에게 있는 어두움의 현상들인 육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날을 소망하면서 세상을 뛰어 넘어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섯째는 ‘전멸시키고 여섯 번째 부분을 드리다, 다섯을 버리고 여섯 번째를 취하다, 표백된 실, 빛나다, 백합화, 몹시 기쁘다, 즐겁다 유쾌하다, 반점이 있는, 밝은 홍색, 빨간 황토, 주홍, 등의 뜻을 가진 ‘쉬쉬’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믿음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 만들어진 생물들을 보면 ‘땅’은 역시 ‘사람의 마음’이며, ‘생물’역시 육에게 끌려다는 영적 상태로 마음 안에 숨어 존재하는 사람의 욕심들이며 그 욕심을 부추기는 죄요 마귀입니다.
육축은 ‘베헤마’로 ‘깜짝 놀라다, 떨다, 당황하다, 서두르다, 전율, 고통, 등의 뜻을 가진 네발달린 말없는 육축, 짐승’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릇된 믿음들의 상징이며, ‘기는 것’은 ‘레메쓰’로 ‘자기를 들어 높임, 토기장이처럼 남을 모욕하며 짓밟다, 밟아 뭉개다, 압박하는 자’ 떼지어 모이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타인에게 모욕을 주면서 상대방을 철저하게 비방하며 비하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짐승은 ‘하이’로 ‘살아있는, 재생, 날것, 군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자신의 육적 생각이나 방법을 다시 동원하여 삶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땅에서 생물을 만든다는 표현인 ‘내라’라는 말은 ‘야짜’인데 이 말의 뜻은 ‘~~후에 나타나다, 튀어 나오다, 꺼내다, ~~끝에 도망가다, 떠나다, 밖으로 나가다, 분출하다, 이끌어 내다, 뽑아내다, 밖으로 보내다, 끝내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제외한 땅에 살아야 하는 모든 동물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인본주의의 사고로 살고 싶어 하는 모든 마음들을 발견하면 사람에게 입벌리지 말고 묵묵히 있으면서 잠언 4자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바라면서 마음의 땅 밖으로 내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이 믿음의 날에 이르면 모든 것이 버려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만들어지는 사람에서, ‘모양’은 ‘데무트’로 ‘포도의 즙, 살인자, 피에 굼주리다, 베어내다, 황폐하게 하다, 안정을 취하다, 조용해지다, 닮다, 같은 생각을 하다, 비교하다, 벙어리가 되다, 휴식, 거름더미, 비유를 사용하다’ 등의 뜻과 함께하는 ‘닮은 모양’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육을 죽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타인의 육을 완전히 죽이기를 소원하는 영이요, 사람 앞에 조용해지는 사람이요, 타인을 살리기 위한 소망이 있으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자신의 본성에 의한 방법을 완전히 포기하므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므로 안정을 찾은 사람이요,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요, 성경의 모든 비유를 풀어 알게 되어 타인에게 주어야 할 말씀의 거름더미가 된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형상’은 ‘쩨렘’으로 ‘중요한 사람에게 강압 받아 고통 받는 선구자, 눌러서 파낸 형상, 심부름하는 특사, 구부려 절하다, 번영을 가져오다, 돌진하다, 굴러다니는 네모난 떡덩이, 길고 네모난 접시, 소금을 저장하는 그릇으로서의 항아리, 앞으로 깊게 튀어나온 가슴, 딸랑딸랑 울리다, 불투명한 물체에 가려져 그늘이 지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먼저 육을 죽이는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본 선구자로 네 복음서로 말씀하시는 생명의 양식을 가진 그릇이며, 질그릇으로서 소금과 같은 믿음을 저장하여 타인에게 줄 준비가 된 자며, 초기 신앙인에게 먹일 젖도 준비하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하나님의 그늘에 의해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담’으로 ‘붉다, 붉게 물들다, 붉은 사람’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몸을 씻고 담근 사람, 둘째 아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창조하시다’는 ‘바라’로 ‘절대 주권을 가지고, 뚱뚱하게 하다, 창조하다, 선택하다, 찍다’라는 뜻이므로, 이 믿음을 가진 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만 선택하여 만들어 주신다는 절대 주권 안에 있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의 핵심이 ‘다스리라’는 명령의 말씀은 ‘라다’로 ‘지배권을 가지고 부수다, 짓밟다, 밟아 부수다, 이기다, 다스리다, 통치하다, 권력을 휘두르다, 옷을 펼치다, 입히다, 기절시키다, 잠들게 하다, 정신을 잃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까지의 모습을 영의 모습으로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부활을 이루어 영으로 살아가는 형태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있는 것은 안식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나 십계명의 제 4계명이나 안식일은 타인의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하는 대 제사장의 모습이 있고 또 그 대제사장에게 배우는 안식일이 있습니다.
안식을 시작으로 하는 창세기 2장에는 땅에는 경작자가 없고 안개만 가득하다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땅이나 자신의 마음의 땅을 갈아엎고 새 씨를 뿌리고자 하는 의욕도 없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움직이고 말하는 오직 본성중심의 사람을 지칭하는데, 그 사람의 마음에도 타인을 판단하고자 하는 영적 선악의 나무도, 마음에 관한 생명과를 내는 마음도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가르칠 때에는 마음을 살리는 생명과만 먹이고, 육신의 표적을 구하면서 육신의 모습으로 믿음의 정의를 삼고 또 판단하게 하는 선악과를 먹이면 절대 안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마음을 왕 같은 제사장을 만드는 말씀과, 타인의 영을 섬기게 하는 영적 종에 관한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음이 오고 불의한 일 같을 지라도 오직 순종하게 하는 말씀과 하나님의 일군으로 타인의 그릇된 믿음들을 독수리처럼 잡아먹게 하는 복음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이 있고,
스스로의 마음에 있는 짐승과 같은 믿음들에 대한 이름을 짓게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기도를 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과 결혼하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에 이르기 까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마음에 관한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못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받아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닮은 생각이 있어 마음에 전혀 거리낌이나 억지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자신의 머리로 결정하지 않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지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처음부터가 그릇된 길을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3. 계시록으로 보는 신앙 발전의 일곱 단계
인을 뗀다는 것은 봉인된 상태에서 해방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봉인이 된 믿음은 엡4:30절에서나 딤후2:19에서나 구원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신앙인이일 뿐이라고 하셨으므로 봉인이 떼어진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신앙의 한 단계를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봉인을 떼고 새로운 인침과, 나팔을 부는 모습에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들이 완전히 버려짐을 받아야 하는 것을 거쳐 새로운 영적 싸움을 싸우는 그 안에서 대접에 있는 내용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음 받아 마귀의 세력인 바벨론을 모두 죽이고 천국을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그릇된 믿음으로 목자 잃은 양이 헤매듯, 헤매고 다녔다고 고백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죽고 항복하여 행동을 포기하는 이삭의 모습과 육적 의의 상징인 지나가는 인생길에서의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의 행할 의의 상징인 버드나무를 꽂고 영적 재산인 양을 생산하는 의의 재산 싸움을 싸워 성벽의 기초믿음이 되는 열 두 아들을 낳아 음부의 구덩이에서 나오고 부활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하는 새로운 믿음으로의 요셉과 하나님의 오른 손의 아들이 되어(베냐민) 생활에서의 승리의 상징인 이스라엘이 함께하며 칠년 가뭄의 때에 타인의 새 생명을 상징하는 종자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양식과 바꾸어주는 신앙승리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특성을 잠깐 살펴보면
영원의 모습 |
특징 |
일곱 천사의 일 |
천국의 왕궁(바실레 이안 톤 우라논)에 사는 자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남 또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 |
<21:2> <21:9-22:15>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중 하나가 어린양의 아내를 보이다(21:9) 어린양의 12사도(21:14) 어린양이 그 성전(21:22)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 갈 수 있음(21:27) 모든 것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 |
일곱 대접을 엎는 일곱 천사 (세우기 위한)진노의 일곱 대접에 재앙을 담았음(15:1, 6, 7) 이기고 벗어난 자들 장막의 성전이 열렸음(15:5)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가 보이는 일들은(17:1) 욕심의 상징인 바벨론과 그들의 딸들인 음녀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짐이요(17-18장), 그 마지막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되고, 아내가 예비 되고, 성도로서 행한 의가 인정되어 세마포 옷을 입었음(19:6-9) |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 (우라논)에 사는 자 장막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믿음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 |
<19:15> <21:1> <21:3-8> 어린양의생명책 아닌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감(19:15) 장막에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3),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이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없어진다(4). 생명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준다(6) 위의 약속은 이기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유업으로 이기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백성을 삼으신다.(7) |
인을 떼는 일곱 천사 첫째 인을 떼는 천사의 의무는 이기고 또 이기는 것이다(6:2) 마지막에 인 맞은 자가 144000명이 됐다(7:4)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기는 자들을 위해 장막을 쳐 주신다(7:15).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함을 면한다(7:16). 어린양이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이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신다(7:17).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인을 맞았다는 것은 완전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 맞은 자가 144000이 찬 후에 구원하심의 찬양을 어린양께 드린 것임. <이기는 것은 회개와 세움임=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모습> |
영원한 불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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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땅에 가서도 마귀와 함께 사는) 죽은 자들을 심판하여, 미혹하던 마귀와 짐승과 거짓선지자들과 사망과 지옥과 함께 영원한 불 못인 둘째 사망의 자리에 간다(20:10-15). |
나팔을 부는 일곱 천사 인 맞지 않은 자들만 해를 당한다(9:4). 영을 파괴하는 천사 아바돈, 아볼루온이 그들의 왕이다(9:11).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하지 않으며, 우상에게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다(9:20-21). 하나님의 생기와 싸우는 짐승과 합세하여 하나님의 생기를 죽이고 승리한다(11:7). 주의 진노가 임해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땅을 망하게 한 자들을 멸망시킬 때가 됨(11:18) |
그러나 이 기록을 사람의 마음으로 본다면
일곱 천사의 일 |
특징 |
마지막 모습 |
처음부터 여섯째 까지의 봉인을 떼다 |
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말씀하신 이긴 후에 있을 새로운 일을 만드시기 위한 새로운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다 |
1. 새로운 믿음들이라고 하나님의 인정을 뜻하는 인치심을 받은 144,000의 의가 모여 생기고, 2. 복음과 성소의 문과 하나 되는 믿음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3. 구원자 예수님과 하나 되는 믿음의 상징인 어린양의 피로 씻고 4. 생수의 샘물과, 생명의 양식을 먹기 위한 준비된 과정을 설명하신다, |
일곱 천사의 일 |
특징 |
마지막 모습() |
일곱째 인 (일곱 나팔을 불다) |
천국에는 절대 가지고 갈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것들의 멸망이다 |
1.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된다. 2. 땅을 훼손한 것들을 멸망시킨 사건이다. 3. 성전이 열리고 지성소의 언약궤가 보였다(찢어진 휘장을 생각하면) |
일곱 천사의 일 |
특징 |
마지막 모습(계16:17-21) |
일곱 대접(호리병)을 쏟아 사람에게 그 내용물을 붓는다 |
영적 싸움을 상징하는 일인 육체는 지구에 살지만 영은 하늘을 사는 모양을 시작으로 일곱 대접의 사건에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일곱 마디의 내용을 발견한다. |
1.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인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있었다 2. 십자가 사건의 시작인 태양이 사라지고 온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일어난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일어나는 지진을 생각나게 하는 큰 지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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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일곱 천사들의 사건의 시작을 통한 사건의 시작이 인을 떼는 것인데, 봉인을 떼는 시작이 이기고 또 이기려하는 천사로부터 시작된 것을 알아야하며,
이긴다라는 표현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모두 이겨야 산다 라고 하신 것에 유의해야합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모습에서 모두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믿음이 모두 그릇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내라고 하는 뜻을 가진 에베소 교회가 이겨야 산다고 했으므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으로 에베소 교회는 타인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가리고 내어 쫓았음으로 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직 자신의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해가기를 거부한 신앙인이며 선악과를 먹은 교인이 된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표현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에서 처음 사랑이란 먼저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을 먼저 사랑하시고 그 영을 담고 있는 육체를 사랑하여 영이 잘되어야 육에게 복을 주신다는 의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또는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는 영의 일을 버리고 육의 것을 잡았다는 뜻으로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서 “버렸다”는 글은 잡았다가 놓았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것을 붙잡았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디서 분리되어 나왔냐고 묻는 떨어져 나온 것에 대하여 육체는 부모에게서, 영은 하나님의 입에서라고 하는 말이 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마음바탕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처음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처럼 보이지만 칭찬이 아닌 니골라 행위를 미워했다라고 하는 것은 니골라 파의 교리중 하나가 영의 일만 좋고 육의 일은 다 악하다고 하는 영지주의의 교리를 받아드린 것으로 육의 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인 영의 일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있는 육신의 행동을 강조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보이는 마음이 행해야 할 착한 행위를, 마음에서 화가 나고 판단이 되어도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착한 행실로 이해한 인본주의적인 신앙으로 보여주신 에베소 교회적인 믿음에서는 자신의 행위는 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신앙을 분별하여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시각적 교회에서 타인의 잘못을 골라내어 내치기를 지치지 않고 끝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교회인 서머나에게 주신 말씀에
‘서머나’ 교회의 뜻은 ‘몰약’으로 서머나 교회에게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를 거론한 것입니다.
에베소적인 믿음에 머물렀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자신의 육체로 오는 고난이 있는데 이 고난의 끝에 타인의 모독에 자신이 당하는 스스로의 망신이라 생각되는 것을 통해, 사람의 도리, 교인의 도리를 타인에게 요구하던 입의 말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귀가 고난의 옥에 몇 사람을 집어넣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체험하는) 고난을 두려워 말라 그 고난은 몇 가지(<격렬한 표현으로>던지고, 일어나고, 아래로 던지고, 눕히고, 위에 두고, 붓고)로 골라 만들고 세우시기 위한 ‘옥’(휠라케=수호자, 보호자, 감시자의 감시 하에, 휠랏소=복종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게 하는 것(갈4:1-5참조, 히1:14-2:4음미)에 가두는 것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영으로 살기 위한 믿음이 되기 이전에 맡겨진 청지기가 마귀라는 것이며, 마귀가 주는 이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아 죽어야 영으로 사는 자신을 완전하게 죽이기까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충성하라는 것으로 서머나 교회적인 믿음에서는 죽는 법을 모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머나 교회는 창조의 둘째 날에 있는 마음의 잘못이 무엇인지 를 말씀에서 찾아보고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삶에서 육체가 당하는 고난을 경험하고서야 자기 행위로 지은 죄들을 찾아가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셋째 교회인 버가모는 (요새화 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이 아닌 육체에 관한 믿음의 중심의 자기의 것이 너무 강해 하나님께 혼나고 있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대신하다”라는 뜻에 ‘아버지를 반대한다’는 문자의 뜻인 안티파테르의 준말인 안디바가 죽을 때에도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 목이 곧은 자라는 의미의 버가모 교회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양날의 검을 가지신 하나님이 그 앞에 서 계십니다.
‘발람’은 ‘거짓스승,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자’라는 뜻을 가진 거짓 선지자의 대표로 상징되어 배우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욕심을 위해 자며, ‘발락’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 황폐케하다, 무(無)로 만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신앙을 받아드려 우상의 정의로 나와 있는 자기의 욕심을 위한 육신을 위한 육신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고 그 음식을 먹게 하며 니골라의 교리를 따르게 했다고 했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보면 육신의 욕심<물질, 병고침, 평안, 가족의 행사가 잘됨 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을 파괴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으로, 버가모 교회적인 신앙에서는 창조 셋째의 자신의 마음의 그릇됨을 보기를 거부하고, 니골라를 수용했다는 말로 행위보다는 영적 은사나 기적을 앞세워, 풀과 채소와 나무를 성령의 열매나 역사로 잘못 오해하여 자신의 욕심을 구하고 이루어짐을 사람에게 보이고 자신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희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잘 못된 희생의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잘못된 희생을 살피시기 위한 불꽃간은 눈으로 보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본주의적 육체의 겉모습으로 행하는 행위와 사랑과 봉사와 믿음의 행위가 더 많아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두어 가지의 일로 책망한다고 하시나 책망과 행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많아진 행위의 기본 의도에 깔려있는 인식에 대한 책망이라면 사람의 눈에 보이는 행위는 전체적으로 잘못된 희생에 대한 각오에서부터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억척부인, 정숙한, 거짓선생, 의문에 거하는’이란 뜻을 가진 이세벨을 용납했는데 이는 ‘하나님께 영감된 여자’라는 뜻의 선지자를 지칭한다고 하므로 참으로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 자가 아니고 예레미야의 예언에 나오는 대로 자시 스스로 육신의 일을 말하여 육신에게 내려지는 고난이 자신이기도해 주므로 속히 떠날 것이라고 하는 거짓을 말하는, 거짓에 속은 믿음을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그는 시돈여자인데 시돈은 아들이 없다고 낙심한 믿음으로 상징되는 땅이기 때문에 이세벨은 결국 자신에게 나타나는 기도의 결과가 없으면서도 타인에게는 육의 복을 가르치고 기도해주는 신앙의지도자입니다.
(열매=믿음, 행위, 자식, 기도의 결과 등을 상징하므로 이들 중에 하나라도 잘 못되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지금 두아디라 교회는 신앙의 행위가 많아져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는 미명아래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내 종들을 유혹하여 모아놓고 가르치며 우상의 음식을 먹고 있게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행한 행위는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할 행위를 한 것이며,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닌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겉 사람의 몸으로만 행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적인 교회의 모습에서는 창조의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로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하나님의 불에 태우라고 하시지만 육체에 드러나는 자신의 은사를 앞세워 육체의 현상을 바라는 유대주의적 신앙인을 양산하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남의 물건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남의 것을 제 것인 냥 폼을 잡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는 살았다고 하고 있으나 실제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잠들어있고, 온전한 행위가 없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진원이나 말씀을 받는 장소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더 깊이 들어가면 실로 두려운 말씀).
그들의 영은 죽은 영인데 영은 하나님의 것이요 육체의 몸은 땅의 것이므로 사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남의 것이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참 몸인 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땅 천국으로 갈 때에는 버리고 갈 육체를 붙들고 살면서 자신은 영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는 창조의 다섯째 날에 말씀의 물에서 놀면서 자기의 영을 돌아보며 십자가에 죽어야 할 영의 모습을 찾아야 하나, 깨어있지도 않고 놀아야 할 물을 찾지 못하면서도 살았다고 우기며 사람 앞에 자신을 보이려고 하는 신앙인의 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형제애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이나 방법 또는 대상이 아닌 또 다른 대상에게 형제애(兄弟愛)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사랑이라는 뜻의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하나님을 나타내신 이유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칭찬의 말씀인 8-9절의 진실을 보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착각하여 그 것을 끝까지 고집하여 지켜 육신의 모습에서 보이는 증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란 뜻의 유대인들이 경배하는데 이들이 아는 사랑이란 하가페사(아가페가 절대 아님)로 의무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식이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란 단어를 썼으므로 하나님이 문을 열어 두신 것은 새로운 것에 제발 눈을 뜨고 네가 아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새로운 사랑을 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요구하시기 위해 열어두신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네 고집을 가지고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인내의 법을 지켰기 때문에 반드시 시험을 네게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 육에게 속한 행위라는 뜻의 세상 땅에 있는 사람을 심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여섯째 날에 육신에 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마음이 천국을 사는 새 영을 부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본주의적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으로 부활한 자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잘 못된 인내의 방법을 따라 육의 행위로 착한행위를 고집하는 자기의 것을 놓지 말고 자기의 믿음의 이름으로서의 면류관을 붙들고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교회인 라오디게아는 정의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정의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중심으로 하여 개이적 정의나 사회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 쯤 되면 성경적 가치관이 있어 정의를 말하고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게 되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사회의 정의나 사람끼리의 정의를 말합니다.
자신도 못하고 타인도 바꾸지 못하고 부르짖는 정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라고 하신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상대를 비방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자신을 최고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이중성격자, 일구이언하는 자, 대상에 따라 말이 변하고, 상황에 따라 말이 변하여 말과 말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행동과 행동이 다른 이중인격자라고 하십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고정 관념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르면 상대는 무조건 틀리다고 합니다. <마음에서는 더더욱>
거꾸로 내가 옳은데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내게 내가 틀렸다고 하면 나는 타인에게 무어라고 말할까 라고 생각한다면 타인의 잘못을 말하는 나에게 타인은 뭐라 할까 라고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육신의 행위를 보면서 정의를 외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행동을 율법중심으로 본다면 모두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하신대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떤 크리스챤이 술을 먹고 온 동네에서 갱처럼 난리를 쳤다면 사람들은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그 사람이 그 행동을 보고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본성이 있구나 하고 자기의 죄성을 알아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뉘우치며 새 사람이 되어간다면 이는 악이겠느냐 하나님이 주신 복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사람 앞에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기 이전에 판단하여 비난하고 정죄하고 격리시키는 일을 교회가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기본 고정관념적 도덕관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어 모 아니면 도, 흑 아니면 백이라는 사람의 논리와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논리는 흑 뒤를 보면 백일 수도 있고 또 흑일수도 있고 또 백의 뒤를 보면 흑일 수도 있지만 백일 수도 있는데 이것에 대한 결론은 그 사건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서 육의 일로 보고 육적이 방법을 택하면 모든 것이 흑이고 모든 사건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요구를 맞추어 보고 영으로 부활 하는 삶을 본다면 이는 모두 다 백이라는 것으로 인간의 정의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주장하는 신앙의 상징인 라오데게아 교회에게 가난한 거렁뱅이에 장님에 옷조차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 7일의 안식을 사는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의 법을 가르치며 타인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죄를 자신이 회개하여야 할 것처럼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대제사장으로(히13장), 사는 법을 모르고 육신이 지켜야 할, 겉으로 드러나는 착한 행실을 기본으로 배우고 자란 신앙인은 이때에 이르러서 타인이 행하는 행위를 보면서 “옳다, 그르다”를 가려 육체가 지켜야 하는 율법을 강조하며 깨끗한 사회 정직한 사회를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에 맞춰진 성경과 신앙 성장의 길
일곱째날 |
안식하시는 하나님 |
어머니가 먹음으로 자라는 일을 아기가 먹고 자라다 |
하나님을 대신하여 또 다른 땅을 위해 일하다 |
로마서 - 요한계시록 |
영과 동일한 신앙의 길 |
여섯째날 |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과 짐승을 지으시다 |
완전한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지다 |
자신의 마음이 모두 비워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을 채운 후에 십자가에 죽음으로 부활한 천국을 사는 믿음이 된다 |
사도행전 |
영과 동일한 신앙의 길 |
다섯째날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를 지으시다 |
식도와 장기를 통한 음식과 양분 섭취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다 |
생활에서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육적 요소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하여 살며 마음으로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삶의 자세로 살다 |
마태복음 - 요한복음 |
영과 동일한 신앙의 길 |
넷째날 |
해, 달, 별을 지으심 |
눈, 코, 귀, 입이 열리다 |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을 찾는 믿음이 되다 |
욥기 - 말라기 |
육신중심의 믿음을 죽이는 심판 후 하늘 소망 |
셋째날 |
풀과 채소와 씨 맺는 나무를 지으심 |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지면 피부와머리카락과 손발톱이 생기기 시작하다 |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끄럽고 창피한 자기의 마음을 보면서 마음에 있는 악한 것은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알게 되다 |
사무엘상 - 에스더 |
육적 성령 열매를 찾다 결국 포기함 |
둘째날 |
하늘 위의 물과 땅과 바다의 물로 나누심 |
살과 뼈와 물과 피가 나누이다 |
사람이 보는 착한 행실과 하나님이 보시는 착한 행실을 구분하게 된다. |
사사기- 룻기 |
육신을 위한 기도를 발견 후 실천노력 |
첫째날 |
탄생, 낮과 밤을 지으심 |
정, 난자의 결합. 낮과 밤을 구분하다 |
어두움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빛인 착한 행실을 알게 되다. |
창세기 - 여호수아 |
시각적인 선함을 발견 |
|
지 구 |
태 아 |
영 |
성 경 |
육적믿음 |
4. 창세기와 계시록의 흐름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창세기의 인류역사는 선악과를 먹고 출생시킨 가인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아담이 자기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출생시킨 셋에 의해 계보가 이어져 나가는데 가인은 네가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유리하는 곳이라는 뜻의 놋 땅에 거하였고 그의 후손으로서 신아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방법으로서의 갈 바를 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도 아비를 데리고 나가고 친척의 대표인 조카 롯을 데리고 나갔고 그의 삶은 유리 하였습니다
그 후 이삭이 태어나 번제를 드리게 되고 삶의 행위를 씻는 신앙의 상징으로 아비멜렉과의 언약을 하였고 야곱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요셉을 통해 후손으로 애굽에 편만하게 하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통치자가 된 것입니다.
봉인을 뜯어 개봉시키는 천사의 사역의 원인인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기록의 기본으로 하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처음부터 신앙의 길을 잘못 택해 걷기 시작한 아시아의 일곱 교회적으로 발전한 신앙의 오류를 지적하고 처음으로 도아가게 하여 새로운 믿음을 만드시는 사역이 봉인을 개봉하는 것이며,
그 마지막 개봉은 천국을 사는 사람의 마음에 있어 절대적으로 없어져야 할 요소들을 없애주시는 모습의 나팔 부는 일곱 천사를 등장시키시고,
야곱의 싸움과 같은 싸움의 시작을 12장으로 보여주시고 일곱 대접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일곱 말씀과 같은 내용을 만들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는 것이 성령 충만이라고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행11장의 베드로의 변명과 같이 바벨론에 속한 짐승과 장군과 새들의 고기를 잡아먹는 것 즉 부활한 자의 모습으로 안식에 이르른 대제사장이 되어 천국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다만 글을 기록하신 목적에만 그 차이가 있을 뿐,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흐름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5. 결론
창조와 계시록을 따로 보면 전혀 다른 말씀 같지만 둘이 아닌 하나로 창조로 시작된 창세기는 지구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에 대한 예언으로 “이렇게 살아가면서 신앙인 이렇게 발전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요 계시록은 너희는 이렇게 살았다 그러니 이제 다시 처음사랑인 영인 마음의 문제로 살아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와 계시록을 비교하면서 성경 전체가 우주창조라는 큰 틀 안에서 기록되고 그 틀 안에서 우리를 만드시려는 것을 알아 창조의 의미를 마음으로 되새겨 새로운 신앙의 역사를 써 나가는 새 시대의 새 신앙인과 믿음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큰 바램이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 만드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기적이 있기를 바라며 강의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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