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이슬람의 정체

수호천사1 2014. 3. 10. 20:44

 

모하메드는 메카를 정복한 다음 맨 먼저 성역(聖域)으로 낙타를 타고 가서, 카바(이스람의 본산) 동쪽에 있는 흑석(黑石)에 지팡이를 대서 경의를 표하였다. 그 후, 카바를 왼쪽으로 7번 돈 다음 그 곳에 모셔져 있는 수 십 개의 신상(神像)을 모두 쓰러트려 버렸다. 주신(主神) 후바르의 거대한 신상이 땅에 쓰러졌을 때, 모하메드는 <하크(진리)는 왔다, 바탈(거짓)은 멸망했다. 진실로 거짓은 멸망해버린 것이다....>고 외쳤 으며, 이때가 그의 생애 중 최고의 달한 때이다.

630년 메디나 시대에 도합 11명의 처를 두었지만 또 다른 아내를 맞으려 했는데, 그 여인은 네지드 고원(Nejd高原) 킨다가(Kinda家) 혈통의 공주인 아스마 라는 소녀였다. 그런데 예식을 올릴 단계에서 혼인이 취소되었다. 모하메드의 아내들 사이에는 그들만 통하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이 몸은 알라와 더불어 당신을 피하겠나이다>라는 말이었는데, 이 말만하면 모하메드는 그 여인을 찾지 않았다 한다. 아마도 킨가 족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공주가 모하메드의 하렘(Harem:後宮)으로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누군가가 몰래 공주를 꾀어 그 말을 하면 더욱 특별한 총애를 받을 수 있다고 거짓 일러 속였다는 속설이 있다.

 

632년 멕카의 대제(大祭)를 지휘한 모하메드는 <우리 모스렘은 모두 형제입니다. 여기 모인 당신들은 모두 평등합니다....>라는 고별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Medina)로 돌아와 6월 어느 날 해뜰 무렵 가장 사랑하고 가장 어린 아내 아이샤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알라(Allah)의 옆으로 날아갔다.

이슬람의 교전(敎典)을 코란(Koran:Qur'an)이라 하는데, 이는<쿠루란>이라는 아라비아어에서 온 말이며<독송(讀誦)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언자 모하메드가 종교적 황홀감에 들어가서 한 말 즉 종교적 직관(直觀)과 체험을 수록한 것으로 처음엔 신자(信者)에 의해서 기억되었다가 야자 잎, 가죽 골편(骨片) 등에 기록되어 오던 것을 서기(書記) 자이드 빈 사비 등이 필사(筆寫)했고, 아무 바르크 결집(結集:631--634)을 거쳐, 다시 제2결집 후에 원형(原型)이 생겨났다 하는데, 근간까지 번역이 허용되지 않았었다. 내용은 길고 짧은 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모하메드는 하리파(카리프: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후 벌써 3파로 분파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656년부터 하리파가 이교도들에 의해 참살되거나 또는 척살(刺殺)되기도 하고, 우마이야조(朝) 압바스조(朝) 이짚트의 파티마조(朝) 에스파니아의 우마이조(朝) 오스만터키 제국들의 군주들이 칼리프로 자칭하는 등 이스람 세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또한 하리파는 하리프, 카리프, 또는 아미르 알 무미닌(amir al-Mumin:신도의 통솔자) 몸미니, 미라로밈, 모문왕(暮門王)등으로 표시되기도 하였다. 당시 높은 문화수준에 있던 이란 사람들은 대다수가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타교)를 믿고 있었으므로 이스람을 업신여겼으며, 아랍쪽 사이에도 우마이야 왕조의 정통성이나 하리지파 (harihite派 )또는 시아파(Shiites派) 등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자들도 적지 않았고, 부족간에도 또 형제간에도 반목과 피 비릿내 나는 파쟁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740년대까지 패권을 잡았던 이스람의 우마이야조(朝)는 흰옷과 흰 깃발을 썼었으나, 그 후 860년대까지 패권을 잡았던 압바스조(朝)는 검은 옷에 검은 깃발을 썼었으며, 패권을 잡은 후 우마이야조 사람들을 이 잡듯이 뒤져 잔악하게 살육했다. 심지어 전 왕조 때의 중요한 인사들은 그 무덤까지 파헤쳐서 뼈까지 매질을 했다. 여하간 모하메드 이후, 패권 싸움이 심하였음에도 이스람 세력은 날로 번성하여 로마제국을 위협하고 스페인 이집트 까지 뻗쳤고 720년대 스페인 안다루스에는 맑은 하늘, 해산물이 가득한 바다, 그리고 잘 익은 과일과 어여뿐 여인들이 그들썩한 실락원(失樂園)을 새로 만들었고, 우리 나라 고려 태조 19년인 930년에 압둘 라흐만 3세(Abdal Rahman III)는 카리프가 되어 코르도버의 궁전이 좁게 느껴졌는지 새로운 도시 <자프라>를 세웠다. 새로 세운 도시의 궁전에는 궁녀만 6,300명, 궁내(宮內)를 지키는 노예 환관(宦官)이 3,750명, 하루에 소비되는 양고기 만도 13,000근 이었다니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인간세상의 천국인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 바그다드의 영화는 이를 테마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영화(榮華)를 누리다가 961년 죽은 압둘 라흐만 3세는 죽을 때 그의 곁에서 쪽지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있었다. <50년간 치세 중 14일 박게 평안한 날이 없었다..> 그것은 수 백 명에 달하는 각지방 부족 왕들을 통솔하는 정치적 어려움도 있지만, 혹 카리파의 패권을 노린 자에 매수된 노예 환관에 의하여 척살(刺殺)될까 또는 아름다운 궁녀에 의하여 독살(毒殺)될까 항상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회교의 특색의 하나는 승려계급인 성직자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아라신(Allah神)은 무한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앞에 존재하는 유한(有限)한 모든 존재는 동일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교도들은 모두가 서로 형제라고 한다. 아마도 이런 평등사상 때문에 이슬람이 정복한 정복지에서, 기독교에서와 같이 선교활동을 하지 않아도 피지배자들은 자발적으로 회교에 귀의(歸依)하는 자가 많았는지도 모른다.


경전 코란(Qur'an)에는 여인(女人)은 그대의 발(足 )이다, 그 발을 그대가 원하는 대로 경작하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이때까지의 이야기로서 성(性)과 불가분의 관계인 여성의 존재를 가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유대인들이 말하듯이 <전세계에 열 그릇의 매음(賣淫)이 분배되었는데, 그중 9그릇을 아라비아 사람들이 찾이 하고있다>고 아라비아 사람들을 호색적이라고 비난한 연유가 짐작될 것이다.

이스람권은 세계에서 가장 남아존중 남성위주의 전통사회이었기로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딸의 행실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가차없이 딸을 처형하였다. 금세(今世)에도 어느 왕녀(王女)가 외교관의 자제와 연애 끝에 그를 따라 도망치려다가 비행장에서 붙잡혀 자신의 할아버지인 무하마드 이브 압둘(Muhammad ibn Abdul)에 의해 린치(Lynch:私刑)로 사형(死刑)당한 일이 있었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약 20년 전인 1977년, 사우디 아라비아의 미샤(Mishaal) 공주(公主)가 베이루트에서 유학 중에 평민 출신의 레바논의 알리 새르(Shaer) 장군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었다. 해서 본국에 강제송환 당하게 되었다.

 

이에 공주는 강물에 투신(投身)한 것처럼 위장하고 남장(男裝)을 한 채 국외 탈출을 기도(企圖)하다 공항에서 잡힌 몸이 되어 끝내 총살당했고 그의 연인인 새르의 아들은 참수(斬首)로 공개처형(公開處刑) 당한 일이 있었다. 이슬람권(圈)에서는 부계(父系)의 4촌으로부터 청혼이 들어오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라 한다. 또한 사촌간에 적당한 배필이 없으면 가급적 핏줄이 진하게 연계된 친척끼리 혼인하는 전습(傳習)이 있어서 친척 외의 사람이나 부족(部族) 외의 사람, 외국인, 특히 종교가 다른 상대와의 결혼은 사리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제재(制裁)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란의 가르침에 준(遵)하는 이슬람 율법을 <샤리아:Sharia>라고 하며 가혹한 형벌로 유명한바, 절도범은 공중(公衆)앞에서 오른 손목을 자르고, 간통(姦通:기혼자의 혼외 성행위)이나 사통(私通:미혼자의 혼전 성행위)한 자는 광장(廣場)에 묶어두고 군중들이 돌로 타살하는 투석형(投石刑)에 처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변하였다. 20년이 흐른 요즘 파키스탄 라흐르 법정(法廷)은 이슬람 법 상 아니 인류의 인권사상 획기적인 사랑을 허용하였으니, 한 집권당 정치가의 딸 후마이라가 아버지가 정해준 사촌과의 결혼을 마다하고 한 마을에서 자란 천민(賤民) 출신의 마흐무드와 가족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밤에 몰래 해외로 야반 탈주(夜半脫走)하려다 잡혀 법의 심판을 받게 뙤었던 것인데, 법에서는 전례대로 가공할 투석형(投石刑)을 내리지 않고 이들 연인들을 무죄방면(無罪放免)하고 해외 출국을 허용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남성존중 사회였기로 여자들에게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8--9세 때 할애[割愛: 남자의 포경수술과 마찬가지로 여성 성기의 음핵(陰核:clitoris)을 절제해 내는 Female Circumcision을 행함으로서 성충동이나 극치감을 억제 시키고저 한데서 비롯된 풍습]도 이 이슬마권에서 시작한 악습일뿐만 아니라, 여성은 조혼과 남아생산이 강요되었고 시집사리가 심하여 눈물단지까지 준비하고 있어야 했으니 우리 나라 여성보다 더 여성의 인권이 박탈당하고 있음은 물론 일부사처(一夫四妻:Tetragamy)로 성을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조선조 때 여성들이 장옷으로 얼굴을 가렸던 남녀차단문화가 아직도 세습되어 아랍여자들은 차토르(Chador)를 쓰고 다니며, 여성의 자유나 여권(女權)은 남의 나라 이야기 이기만 하다. 이슬람인들의 일부 사처제에 대하여 그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처가 하나이면 바가지를 긁어 구찮고, 둘을 두면 서로 질투 시샘하여 싸우고, 셋을 두면 둘이 짜고 하나를 바보로 만들고, 넷이면 모두 시샘도안하고 오직 남자에게 복종하니까 4처(妻)를 두는 것이라고. 또한 이스람권(圈)에서는 아직도 남성은 여성을 인연이 없다는 구실로 3번식이나 이혼할 수도 내 쫓을 수도 있지만, 여성은 남편이 자기를 부양 못한다거나 혹은 학대(虐待)나 유기(遺棄)하였다고 법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다.

 

일부사처제(一夫四妻制:Tetragamy)는 코란 율법에 의한 관습이며, 부유한 자는 4처 외에 능력 것 축첩(蓄妾)이 허용된다, 또 남색(男色:Buggery, sodomy)이던 여성동성애자(lesbian)이던 동성애자(Homosexuality)들의 항문성교(肛門性交:Anal Sex)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남녀 모두 포경수술을 하는데 특히 어린 소녀의 포경 즉 할애(割愛)는 열악한 부족들에게 있어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시술하는데 음핵(陰核:Clitoris)이나, 대.소음순(大.小陰脣:Labia major or minor)의 일부분을 절제하는 방법으로 성욕과 성의 쾌락을 박탈할 목적으로 행하는 것이며 아직도 미개한 이슬람권(Chad, Djibouti, Somalia, Sudan 등)의 90%가 이를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Purdah
퍼르다(purdah)란 스크린(Screen)또는 베일(veil)이라는 뜻의 인도 말에서 유래하였는데 모슬렘(Muslim)부족들이 자기 남편 외의 외갓 남성들을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관습을 말한다. 집안에서도 높은 장막 또는 가리개로 남성과 차단하며 그들 모슬렘 사회에서는 여성의 처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외출할 때는 면사포(面紗布:veil)나 야시막(Yashmak)이라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에는 챠도르(Chador)라는 검은 겉 옷(garment)을 입는다. 이런 관습은 모두 코란(Koran) 율법을 지키는 부족이나 국가에서 행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50%를 차지하는 Persian을 위시하여 백수십종족 이상의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는 중동지방이기에 예외도 있다. 여러 부족들 중에 쿠르드(Kurds:Kurdish), 루르(Luri), 박티아리(Bakhtiari)족의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종족의 여성들 보다 자유를 더 많이 누리고 있으며, 차도르를 쓰지 않고 남성들과도 동행할 수 있으며 격리되어 있지도 않다고 한다.

 

여자다운 부위를 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남녀차단문화의 소산인 이 차도르는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 말 이래로 약 100년 전 개화시대까지 있었으니, 여성들의 모자인 갓의 차양을 깊게하여 얼굴을 가리고 하반신은 부채로 가렸으며, 조선조 초기에는 <나올>이라하는 박사(薄紗)로 가렸고, 세조(世祖)때부터 쓰게치마 혹은 덮치마라고 하는 장옷으로 변하였으니, 끝단을 두른 두루마기를 머리위로 뒤집어 씌워 눈만 노출시켰으니 모슬렘들의 챠도르와 다를게 없다.


여담이지만,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수자(數字)의 발명은 인도에서 인도아리안에 의해서였지만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71년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부기용(簿記用)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이고, 또 아라비아 여인들이 챠토르를 쓰기 시작한 것은 907년 경 부터라고 하는데, 그 시작은 회교에서, 여성격리 습관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로맨틱하게도 보여져서 금새 유행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슬람에서 한 남자가 4인의 여성까지 거느리도록 허락한 일부다처제를 964에는 노예에까지 적용시켰으니 그것은 이슬람의 하나파(派) 마아리왕 종파(派)에 의해 다산(多産)장려를 목적한 조처였다. 요약하면 이슬람들은 친족간의 결혼을 장려하며 일부다처제가 인습되었으며, 독신주의를 기피하고, 간음이나 남녀차단문화에 반하면 엄한 형벌이 가해진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슬람은 패륜적인 종교임과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처럼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잘 먹고 온갖 부귀와 욕망을 채우는 반인륜적인 집단에 불과한 것임을 명백히 알고 이들을 대처해야 할것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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