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유대교의 역사

수호천사1 2014. 3. 6. 19:09

유대교의 역사

 

Ⅰ. 들어가며

유대교란 <구약성서>를 성전으로 하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이다. 천지 만물의 창조자인 유일신(여호와)을 신봉하며 유대인을 신의 선민으로 자처하고 메시아의 지상 천국 건설을 믿는 종교이다.  BC 538년 바빌론의 포로로부터 해방된 뒤 예루살렘 신전을 중심으로 성립된 엄격한 율법적 일신교이다. 그들의 신 여호와는 유일, 절대의 신이며 창조주로서 전 인류를 지배하는 존재라 하였다. 그 신의는 모세의 율법에 계시되었으며 그들의 일체의 일상생활은 여기에 의거하여 영위되었다. 그 율법은 유대 민족만의 것이었으므로 유대인은 신과 특수한 계약을 가지는 선민이라 하였다. 이 사상은 항상 위기에 놓여 있던 민족적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강조되었으며 BC 70년 로마제국에 굴복 당한 뒤로는 유대교에 강한 정치적 색채를 부여하였다. 그에 의하면 말세에 그들 속에서 구세주가 나타나 천사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백성에 반역하는 제민족을 벌하여 새로운 신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 비원은 19세기의 시오니즘 운동에도 연결된다. 예수가 출현했을 무렵의 유대교는 이러한 정치적 정열이 완고한 율법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예수는 이것을 비판하여 새로운 신앙을 세웠으나 그래도 유대교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유대교는 시나고그(회당)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예배 의식을 맡는 라비를 둔다. 즉 안식일을 엄수하여 일체의 노동을 쉬고 하루를 기도로 보낸다. 할례는 중요한 의식의 하나이며 기타 신년, 출(出)이집트를 기념하는 유월절 등의 축제일이 있다. 이상에서 유대교에 대해 대강을 살펴보았다. 이제 유대교의 역사를 통해 그 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그 사상과 의식, 종파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유대교의 역사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 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C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년 동안 믿어 온 신앙 체계를 가리킨다.

1. 바빌로니아의 유폐

BC 2000년대 말에 사울과 다윗 왕에서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왕조는 BC 6C 초에 신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쓰러졌다. 그 당시 국토는 큰 타격을 받아 극히 황폐하였으며, 지배층, 지식층, 기술자 다수가 포로로서 바빌론으로 연행되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민족국가가 소멸되고 민족이 그 지반을 잃어버린 것과 둘째는 신전이 파괴되어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여지던 제사 의식을 중심으로 하던 종교가 변혁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98년에 억류 생활이 시작되고 바빌론에서 활약하던 예언자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 각 개인의 주체적 신앙을 강조하고 이국 땅에 있어서의 동포들을 지도하고 격려하게 여행(勵行)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주위 환경으로부터 구별하고 주변 문화에 흡수 동화되지 않도록 노력하여 그들 선조들의 전통을 끝까지 지켜 나가 다음에 오는 시대에 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기원전 538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이 바빌로니아 제국을 넘어뜨리게 되어 그들은 고국의 땅에 돌아갈 것을 허락 받게 되고 신전의 재건과 고국의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2. 유대교 재건 시대 (BC 538-333)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칙령을 내려, 신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성정 재건을 명했다. 제스바쌀과 그의 조카 즈루빠벨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족을 데리고 귀향해서 성전 재건에 진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귀향하지 않고 눌러 살던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귀향자들은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BC 515년 3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 레위인, 평신도 가릴 것 없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앙 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

BC 444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유대인 느헤미아가 BC 437년 12월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쳤다. BC 433년 느헤미아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궁정으로 돌아갔다가 1-2년 후 다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혼종혼(混宗婚)을 금했다.

BC 428년을 전후하여 느헤미아에 이어 제사장이며 율법 학자인 에즈라가 아르닥 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종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나 모세 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법전을 생활 신조로 삼은 율법 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AD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버림으로써 성전 제사가 아주 사라져 버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 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재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 2의 모세로 일컫기도 한다.

이 시대의 유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신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하나님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 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2) 선민 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라고 지칭했으며,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3)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 제도, 성전 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 5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수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빌론 유수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미드라시 문헌(성서주석)이 생겨났다. 율법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4) 성전의 구성

이 시기에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가 신학적으로 반성되고 그에 따라 전승이 재편되었다. 유대교 경전(구약 성서)은 BC 1C에 거의 결집을 마쳤으나, 그 기본 적인 구성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의 <천지 창조> 이야기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고, 그들의 신학을 역사의 원점을 향하여 역투영하였으며 세계의 시초를 신화적, 설화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마지막 즉 종말 사상의 궁극적 전개를 가능케 하는 구성을 만들어 냈다. 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종교적 전승 가운데에 그들의 역사가, 공간과 시간이 끊임없이 끌어들여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 그리스 시대 (BC 332-63)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대제사장 야손과 메넬라우스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BC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 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모네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은 독립군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1)종파의 분화

이 당시의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바리사이파 :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 성서> 못지 않게 조상들이 구전으 로 전해 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② 쿰란 종파 :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었던 '의로운 스승'은 저 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 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BC 103-76)때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 생활을 했다.

③ 사두가이파 : 상급 제사장, 대지주, 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는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 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 정권과 결탁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 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 영혼 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④ 평민들의 종교 생활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 정결법, 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1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C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 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2) 구약 성서의 완성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C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C에 쓰여진 <아리스테아 편지>에 따르면 역자 72명 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 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C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 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을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4. 로마 시대 (BC 63- AD 135)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 2차 유대 독립 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를 로마 시대로 본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 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 또는 14세부터 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아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 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기치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라니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 숭배라는 것이었다.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2) 제 1차 유대 독립 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 로마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에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 구역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 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3)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 1차 독립 전쟁이 실패하자 독립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 제 사장, 대지주, 귀족 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 학자 요하난벤카자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 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 회의(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 의결 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 아랍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 <전도서> <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라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 12조 기도문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 사람들)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교도들은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4) 제2차 유대 독립 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 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 키레네,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 2차 유대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 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 처형되었다. 1952-62년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5) 예수와 그리스도교

에즈라 이후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27년경 예수가 출현하여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고 그에 대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게 능사가 아니고, 하느님과 이웃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돌아섬'을 강조했다. 이는 신선하고 예언자적인 외침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식민 정권의 미움을 사서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루살렘 북부 성곽 바깥 골고다에서 약 33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에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들을 처치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정당화하여 그를 부활시켰다. 제자들은 수시로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고, 마침내 30년 요순절 예루살렘에 순례 온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창건했다. 예수는 이단자가 아니라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교 동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극히 적은 반면, 그리스도교 창교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몰렸다.

기존 종교인 유대교와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 간의 결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 1차 유대독립 전쟁(66-70)때 유대계 그리스도 교도들은 독립 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요르단강 건너,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28Km 떨어진 펠라로 피신했다. 85년경 유대인들은 야브네에서 18조 기도문 중 제 12조 기도문에 그리스도 교도들을 단죄하는 구절을 덧 붙였다. 115-117년 키레네 출신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와 제 2차 유대 독립 전쟁(132-135) 때, 바르 코크바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 그리스도 교도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5. 라비 시대 (1-18세기)

(1) 타나임 시대 :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렘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타나 임 시대라고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 2차 유대 독립전쟁 때 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 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셰아림, 세포리스, 티베아리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 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타나임 시대에 모세 5경 주석서 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 <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타나임 등이 있다.

(2) 아모라임 시대 :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 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하임의 율법 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고 대별된 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 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 폼페디타, 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 초에 편찬되었다.

(3) 게오님 시대 : 640-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다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마트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 주의에 의하면 라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 뿐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4)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 독일에 자리 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 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506년에는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들과 상종하지도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 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후에 독일 유대계에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 순교, 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나케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버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라비 솔로몬 벤이사크(약칭은 라슈)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주석은 너무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탈무드> 모든 판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인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궑 톱 디 레온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전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 이사크루리아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 신학을 주장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의 출현이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는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을 하다가 오스만투르크 관헌에 붙잡혀 사형과 이슬람교 개종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자유롭게 살다가 이중 신앙생활의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6. 현대의 유대교(1750- )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 결과 멘델스존(1729-86)과 같은 계몽 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 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 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 현대 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들끼리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1860-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 1차 시온주의 세계 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 장관 A.J.벨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 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 한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 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 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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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유대교의 합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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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대교의 합리성

베버에 있어서 고대 유대교 연구의 의의는 첫째,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완성을 보게 되는 종교의 마술로부터의 도피과정의 원천을 유대교에서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즉 유대교가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사적 전제조건을 간직하고 있고, 서구의 근대 경제윤리의 발전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베버는 유대교 연구를 통해 서구 근대사회의 합리성의 종교윤리의 세계사적 의미를 명백히 하고자 했다. 둘째, 고대 유대교의 사회학적 특성인 파아리아(Paria)민족적 종교윤리를 밝힘으로써 유대교 종교 윤리의 고대적 관계를 밝히고자 했다. 셋째, 종교의 개인주의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집합의식이 개인주의를 일방적으로 규정한다는 사회존재론 또는 사회유기체설을 부정하는 사회학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에 구약성서를 유산으로 물려줌으로써 세계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기는 했으나, 유대민족의 사회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의례적 차단의 발전과 대내, 대외 도덕의 이원주의를 낳게 되었다. 이것을 경제윤리와 관련시켜 보면 유대인의 이중도덕은 천민자본주의를 낳게 했던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동포들 사이에는 이식(利息)금지령과 인도주의적 교설과 같은 동포에의 규정이라든가 사회보호규정이 강조되지만, 비동포들에 대해서는 아디아포라(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무시하는 이중윤리를 낳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프로테스탄트의 경제윤리를 보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 원칙이 불신자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근대 자본주의를 발생시킬 수가 있었다. 반면 유대교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사회학에서 베버의 분석의 중심은 종교적 신념과 사회집단의 신분권력 구조와의 관계이다. 사회에 널리 편만되어 있는 이념과 가치가 사회의 여러 신분의 물질적·정신적 생활양식을 규정함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베버는 유대교 연구를 통하여 방법적으로는 종교의 개인주의적 해석을 시도하고 나아가 근대 서구사회의 합리적 경제윤리의 역사적 근거를 찾음과 동시에 이중구조적 윤리로 인한 경제발전의 고대적 한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베버는 합리성개념을 중요시하였다. 특히, 종교적 합리성과 관련되는 용어로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 개념을 들고 있다. 목적합리적 행위는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의 행동결과를 충분히 예상하여 합리적으로 고려된 수단을 취하는 행동이고, 가치합리적 행위는 어떤 특정태도 그 자체의 절대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의식적으로 신봉함으로써 행동의 결과를 고려함이 없이 수행되는 행위를 말한다. 베버가 사용하는 종교적 합리성의 기준이 되는 두 가지 척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술탈피의 정도이고 둘째, 신과 세속과의 조직적 통일의 정도이다. 즉, 현세에 대한 고유한 윤리적 관계가 어느 정도로 조직적으로 통일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베버가 분석한 유대교의 합리성에로 접근해 보자.

유대교의 합리성은 첫째, 유대교의 신관념에서 찾을 수 있다. 유대교의 신관념은 일신교적 신관념으로 예언자의 사변과 윤리적인 비장함에 의해서 절대불변성과 전지전능성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근대 프로테스탄티즘에 계승되었다. 일신교적 신관을 가진 유대교에 있어서는 퓨리타니즈모가 같이 신의 초세속적 초월성을 강조한다.

유대교에 있어서는 예언자 아모스가 주장한대로 모든 화도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이른바 야훼 자신이 데몬화 되기 때문에 주술적 행위가 개재할 여지는 없고, 화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는 윤리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고대 유대교에 있어서 아시아적 제 종교에 존재하는 주술의 위치에 해당하는 것은 기적이다. 기적은 마술보다 합리적이다. 유대교의 기적의 강조와 마술의 결여는 모든 사건과 운명, 섭리의 원인에 대한 일체의 의문을 섭리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합리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야훼 하나님은 인간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초인간적이면서도 이해 가능한 인격적 주권자이지, 이간들이 명상으로써 신비적 합일을 이룰 수 있는 신을 결코 아니었다.

유대교의 합리성은 둘째, 예언자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베버는 법의 정체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합리화는 저지된다고 지적하고 이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예언이라고 말한다. 예언자의 종교성이 합리적 성격을 띠게 된 이유로 베버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째는 종교적 체험의 특징인데, 예언자 특히, 남방적 예언자들은 야훼의 육성을 직접 귀로 듣고 이를 이해하고 유의미화 할 수 있었다. 둘째로, 예언자들이 레위인의 토오라를 지반으로하여 자기의 표상세계를 전개해 나간 것이다. 예언자들의 신의론이 철저히 계약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화의 예언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토오라의 실체적 내용을 넘어서서 종교사상의 집중과 순화를 가져왔다. 예언자는 민족전체의 죄와 운명에 대한 기본적 관심, 정치적 이변에 의해서 지향된 종말론적 대망의 경탄할만한 박진감 등을 특징으로 한다. 예언자의 신 야훼는 세계의 군주가 되는 하늘의 신이요, 세계역사의 심판자였다.

예언자의 종말론적 미래관은 화와 복지가 돌연히 교차되는 논리적 도식을 가진다. 예언자들이 파악한 신관에 의하면 신에게 범한 죄에 대해서는 화가 내려지지만 민중의 태도 여하에 따라 화가 될 수도 있고 구제도 된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유토피아적 현세무관심은 그들의 종말론적 대망의 박진성에서 비롯되고 이로 인하여 타종교에서 볼 수 없는 실천적 윤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요약하면, 유대교의 합리적 윤리형성에 미친 결정적인 요인들은 레위인에 의한 토오라의 합리화, 경건한 평신도 지식층의 사상, 예언자의 활동 등이었다. 토오라 교사들은 윤리의 실천적 내용을 창조하고 이를 합리화하고 조직화했으며, 경건한 평신도 지식층은 고대 동방의 사상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종교에 고유한 새로운 종교사상의 창조에 위대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야훼 신관을 승화함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윤리의 합리적 형성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예언자들은 레위인의 토오라를 계승하되 이를 심술(心術) 윤리적으로 순화하고 의례적 우월성을 제거하였다.

유대교는 명백히 합리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생활방식에는 한계점도 지적되고 있다. 즉 유대교의 율법에는 "결코 관습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원칙이 존재하고 있어서 전통주의적 성격을 지니며, 이자취득아 동포간에는 금지되어 있지만 이방인에게는 인정을 하는 이중윤리가 유대민족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교에 있어서는 퓨리탄에 있어서와 같이 합리적, 무전제적으로 자기의 취할 방향을 선택하는 방법적, 조직적 목적행위는 없었으므로 퓨리탄의 세속내적 금욕윤리는 합리적 자본주의를 낳고 유대교의 전통주의는 천민적 자본주의를 낳게 된 것이다.

2. 예언과 사회변동

베버는 "왜 서구사회만이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는가?"라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하면서 서구사회의 합리성의 역사적 근거를 고대 유대교 특히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합리적 예언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합리적 예언과 인도의 모범적 예언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는 유대교에 나타나는 예언자의 합리적 예언의 특성과 그것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현세적 금욕에 미친 영향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베버는 예언자를 여타 종교적 활동가와 개념적으로 비교분석하고 있다. 즉 예언자는 사제와는 달리 그들의 사명과 권위가 신성한 전통에 근거를 두지 않고 개인적 계시와 카리스마에 근거한다.

또한 주술사와는 달리 무보수성과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 계시-교설과 계명-를 행한다. 또한 예언자는 입법자와도 구분이 되는데 입법자는 흔히 법률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든가 또는 새로 제정하도록 위탁받는 인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들의 사명을 인간으로부터 위탁받는 것이 아니고 신의 계시에 따라 이를 탈취하고, 이때 그들의 사명은 사회정책적 배려가 아니라 종교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입법자와 구분된다. 예언자는 교설가와도 구분되는데, 교설가들은 전래의 지식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지식을 터득함을 통하여 그들의 주변에 제자들을 모으고,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에게, 공공문제에 대해서는 군주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윤리적인 질서의 수립에도 참여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박진감이 넘치는 정감적 교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예언자와 확실히 구분된다. 마지막으로 예언자들은 비의(秘儀)전교자와도 역시 구분되는데, 비의전교자들은 흔히 기적을 행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주위에는 각기 특수한 교단을 형성하게 된다.

비의전교자의 기적 카리스마는 세습화되어 하나의 법통을 형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의전교자들에게서는 윤리적 교설을 찾아볼 수가 없고, 바로 이점이 예언자와 그들을 구분시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예언자의 특징 중에는 무보수성이 있다. 이것은 예언자들에게 정신적인 고독과 고립을 낳게 했다. 또한 베버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야훼 육성의 실체라는 종교적 체험에 주목을 한다. 즉 예언자의 직접적인 체험과 사유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동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이같은 체험의 실존적 존재야말로 당시의 주술적 세계관을 파괴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는 또한 청각성을 특성으로 하는데, 이는 예언자들에게만 가능했던 신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방법이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자신을 다만 신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방법이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자신을 다만 산의 명령을 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신의 도구와 노예라고 생각했다. 즉 참 예언자들은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고 화의 예언을 외치며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스스로 겸손하여 신의 도구요, 노예로 자신을 낮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화의 예언을 행한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윤리적 동기화를 부여했고, 야훼신으로 하여금 보편주의적인 장엄한 세계의 신이 되게 하였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신에 대한 요구는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야훼신은 인간적으로 이해 가능한 신이 되었다. 또한 예언자들의 심정윤리는 법률의 정체화를 막았고, 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박진성은 실천적 생활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이들의 미래 대망사상은 고대 그리스도 교단과 중세 및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유대교의 합리화에 공헌한 바로서 경전과 의식의 훈련을 받은 이스라엘 지식층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신의 활동에 대한 간접적인 간여를 통해 섭리신앙을 낳았고, 이 섭리 신앙이 개별적이고 집중적인 것이 되었을 때 기적의 신앙이 발생했다. 기적은 특별히 집중적인 것이 되었을 때 기적의 신앙이 발생했다. 기적은 특별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적당한 시간에 있어 신의 간여인 것이다. 기적을 통해 우리들은 통일적, 인격적인 신관을 예상할 수 있게 되고 이스라엘 지식층의 냉정한 합리성을 엿보게 된다.

베버는 이러한 유대교가 합리적 자본주의 발전에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유대교가 그리스도교에 반주술성의 정신을 계승시키고, 이것이 경제생활의 합리화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베버는 주술을 타파하고 생활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합리적 예언뿐이라고 지적한다.

유대교는 처음부터 평민의 종교였고, 평민 종교로서의 가치를 한번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야훼신의 의지를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평범한 말로 전달하였고, 야훼의 계명을 지키도록 윤리적인 요청을 하였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미래 지향의 박진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신의 뜻에 적합한 윤리적 행위를 하며 신의 의지에 따라 합리적으로 조직화된 일상생활을 통하여 새로운 일상적 세계질서를 창조하고 이것이 고대 그리스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개혁과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고 베버는 주장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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