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한국의 도교사상

수호천사1 2014. 3. 6. 19:26

한국의 도교사상

 

 

         Ⅰ. 한국 도교의 성격

     1. 단군신화와 신선설
   중국에서의 신선방술의 발생과는 별도로 우리나라에는 고대로부터 도교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토착적인 고유문화현상으로서 산악신앙·신선설 및 그것들과 연관이 있는 각종의 방술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진다.
   우선 고대의 건국신화가 산악신앙 및 신선사상과 직결되어 있으니 단군신화를 보면 그것을 곧 알게 된다. 천제 환인의 지차아들인 환웅이 3천의 도중을 거느리고 강림한 곳은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 밑이었다. 환웅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을 본원으로 하여 이 땅 특유의 신선사상이 전개되고 이 땅의 선파(仙派)가 생겨나게 된다. 단국신화에 언급된 홍익인간은 한국신선사상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후세 선파에서 내세운 환인과 환웅에 연결시킨 단군의 정신과 교훈은 인간만사의 도리와 우주삼라만상의 이치를 두루 포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潔淸之學', '練養之道', '人間善事', '神道妙德之訓' 등의 용어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환인의 도가 환웅과 단군을 거쳐 전해져서 그것이 다시 문박씨·을밀·영랑·안류·보덕성녀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와같은 선가설은 퍽 오래전부터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파로 지목된 인물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내려온 것 같은데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불우한 은자들이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선파 사이에서는 중국의 지배를 배격하는 주체적인 사관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고, 중국문화에의 동화를 경계하며 자주적인 문화의 건설을 모색하려는 경향을 나탸내기도 했다.

     2. 과의적(科儀的) 도교
   이 땅에 도교가 정식으로 도입된 것은 고구려 말기였고, 그것은 주로 국가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재초(齋醮)를 중심으로 한 과의적인 도교였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도입해서 당시의 고구려사상계를 개편함으로써 정권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던 연개소문은 큰 판도를 지탱해 나가는 국력을 배양해서 중국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고려 예종에 와서는 도관인 복원궁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 종교로서의 도교가 강화되었다. 대외정책도 한때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국을 창건하고, 고려는 발해의 혈통을 이어 결국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도교와 관련시켜서 볼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과의적인 도교가 국가의 비호 아래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유신들 사이에서는 한낱 제후국에 지나지 않는 조선에서 하늘을 제사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 도교의 재초를 극렬하게 반대하였고 논란이 되풀이된 끝에 소격서가 혁파되고 말았다.

     3. 수련적 도교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수런적인 도교는 신라말기에 유당학인들이 당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땅의 도맥도 이로부터 형성되었다. 신라때에는 최치원이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였고 고려시대는 비약이 심해 보잘것이 없으며 조선 초기에 내려와서는 김시습이 중흥시조 같은 지위를 차지하여 그 전승이 뚜렷하여진다. 불로장생 같은 현세적인 이익의 추구가 그 중심을 차지하는 도교에서 수련을 통하여 불로장생을 획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것들은 결국 마음의 평정과 신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적인 도교에 양생법이 있음을 인식하고, 심지어 이황·이이 같은 도학자들까지도 그것을 받아들여 실생활에 응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들어온 도교의학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교의 이론에 따라 체계화하였는데 예방의학이 대단히 강조되어 평소에 신체의 조화를 깨서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는 것이 최상의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도교적인 의학사상이 <동의보감> 편찬에 수용되어 엄연한 체계를 갖추게까지 되었다.

         Ⅱ. 도교의 수용과 그 전개

     1. 五斗米道
   중국의 도교는 후한말기를 전후하여 성립을 본 태평도와 천사도를 조형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천사도는 곧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오두미도란 입교자에게 쌀 닷말씩을 바치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후한 환령제 때 장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장릉은 신이 전수해 주었다는 신출정일맹성법으로 질병을 고쳐주고 수만의 신도들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형성하였다. 다시 그의 손자 장로가 오두미도의 교법과 조직을 정착시키고 신도들에게 <도덕경>을 읽히고 천·지·수신에게 참회문을 써바치는 삼관수서의 법을 시행하고 부적을 먹이고 기도를 하여 질병을 고쳤다. 장릉을 천사라고 호칭한 데서 오두미도를 천사도로 부르기에 이른 것으로, 이것이 곧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일교의 전신이다.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인용된 <고려본기>의 기사에 의하면 7세기 전반에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오두미를 신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2. 도교의 도입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따르면 "624년(영류왕 7)에 당나라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니, 영류왕은 나라 사람들과 함께 그 강론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도교가 정식으로 고구려에 전래하였으나 그것이 국가적인 종교로 정착하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뒤 20년이 경과하여 643년(보장왕 2)에 당시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보장왕은 불교사원을 도관으로 만들어 도사들을 거기에서 거처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각종의 도교행사를 곁들여 국가를 진호하는 재초를 행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도교강화책을 쓴 데에는 고구려에서 유·불의 세력을 감쇄시킬 기도도 있었겠으나 도교를 숭상하는 당나라의 종교정책이나 문화정책과 맞서보겠다는 속셈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3. 불교측의 반발
   고구려에서 종교적 지반을 굳히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의 본격적인 도입과 그 강화로 인해서 극심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불교측은 도교강화책에 대해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승려 보덕은 고구려의 국도인 평양에 있던 반룡사에 거처하던 당시 불교계의 영도자였는데 그가 "좌도가 정도에 맞서서 나라의 명맥이 위태로워짐을 슬펴하여 누차 국왕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 한것이 <삼국유사> 권3 보장봉로조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도교강화책의 여파로 보덕과 같은 사례가 많이 생겨, 불교는 고구려 이외의 나라에 전파되었다.

         Ⅲ. 신라의 도교 - 수련적 도교와 방술

     1. 도교의 잡술
   1) 신라초의 호공은 박혁거세를 도와 인접국과 수교의 사명을 수행하여 신라의 국위를 떨친 인물인데 바람과 비, 새와 집승을 마음대로 부리는 대단한 방술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2) 김유신(삼국사기 권41∼43의 본전, 삼국유사 김유신조 등)
   : 김유신은 등에 칠성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칠요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여 생래적으로 신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그는 17세 때에 이미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서 통삼대공을 성취할 힘을 내려주기를 기도하였는데 신이한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의 요청대로 방술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그뒤 또 열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천관에게 빛을 드리워 자기 보검에 강령하여 달라고 비니 두 별에서 광채가 내려와 그의 보검을 동요시켜 신령한 기운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김유신에 관련된 신이한 설화들은 도교적인 색조가 농후하고 도교의 잡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3) 시가와 결부된 이적
   :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앴고 융천사가 <혜성가>를 지어 왜군을 제발로 물러가게 했다는, 향가를 둘러싼 전설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수있다. 이러한 일들을 방술만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방술과 전연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다.

     2. 나말 학인들과 도교
   당나라에는 각처에 도교의 사원인 도관이 건립되어서 국가나 개인을 양재기복(禳災祈福)하는 재초, 곧 과의적인 도교의 제례행사가 빈번하게 거행되어 당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학인들에게는 도관의 재초는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최치원과 같이 한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살면서 문한을 다루던 사람은 당나라에 있을 때 이미 재사나 청사를 짓기까지 하였고,그 글이 문집 등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전하여진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의 학인들에 의하여 수련적인 도교가 이 땅에 이입되었다고 할 것이다. 9세기 중엽에 신라의 학인 최승우·김가기와 승려 자혜 등 3인이 중국에 유학하여 종남산 광법사에서 천사 신원지를 만난 것이 기연이 되어 그의 알선으로 종이권으로부터 <청화비문>을 비롯한 여러가지 도서와 구결의 전수를 받았고 3년동안 수련한 끝에 丹 즉, 심신의 수련을 통한 공행이 양전한 득도의 경지에의 도달을 이룩하였다.
   유당학인이 이 땅에 형성한 새로운 도맥이 고려와 조선에까지 전승되었는데 그 계보는 최치원에서 직접 뻗어나가지 않고 이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갔다. 이청은 명법에게 구결을 전수하고, 명법은 다시 자혜로부터 도요를 배운 뒤에 권청에게 전수하였고, 권청은 최치원과 도법을 연마한 뒤에 그것을 후대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3. 수련적인 도교의 전승
   본성적인 단학은 중국에서는 금대에 성립된 도교의 한 종파인 전진교에서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전진교에서는 여동빈을 종조로 받드는데, 여동빈은 종이권의 전수로 득도하여 선화했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진교의 성립은 12세기초부터 시작되는 금대에 내려와서이므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본성적인 단학을 중심으로 한 도교의 수련을 받은 일을 전진교와 결부시켜서 논할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전진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단 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도교의 일파가 당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김가기 등 신라의 유당학인들이 그 계통의 도교와 접촉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이들이 전승한 단학은 환반(還返)지학과 시해(尸解) 두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나, 전수된 도서와 도법은 다양하다. 환반의 뜻은 금단 연조에서의 칠반구환의 법을 본성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대체로 심신·성정·육체에 걸쳐 분산된 정력을 수습해서 응집된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장생불로에 이르게하는 수련방법이며, 시해는 도법을 수련한 끝에 죽는 형식만을 빌려 신선이 되어가는 방법이다.

         Ⅳ. 고려의 도교 - 도교의 재초와 습속

     1. 재초의 거행과 그 종류
   1) 의종같이 군왕 자신의 개인적인 소재초복을 위하여 국비를 기울여 각종의 재초를 번거롭게 지내는 광망한 사례까지 빚어내었듯, 고려에서 과의적인 도교가 성행한 데는 고려초 이래 대량 이주한 발해인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발해는 고구려인에 의하여 세워졌으므로 도교를 숭상하던 작풍도 전승되었을 것이다. 옥촉정에 원시천존의 도상을 안치하고 월초를 지내게 한 일, 도관인 복원궁을 국도에 창건하여 각종의 도교행사를 집행하게 한 일이라든지 하는 것은 예종 때 특히 두드러진 도교숭상사례이다. 그러나 수련적인 도교는 고려시대에 별로 성행한 것 같지 않아서 그 방면의 전설이나 설화는 그다지 많이 전하여지지 않는다.
   2) 재초의 종류
   : 천계를 대상으로한 호천상제·호천오방제·천황대제·태일·천조·삼계·삼청 등과, 성수를 대상으로 한 남두·북두·노인성·11요·28수·12궁신·27위신·100신·본명성수 등과, 재변·양제를 위한 도우·도병·5온신·성변기양 등과 기타 전성제천·별공재초·마리산참성초·하원초 등이며 그 문체는 대체로 사륙변려체이며 내용은 도교의 설법에 곁들여 국왕의 처지에서 재앙을 양제하고 복록을 기축하는 뜻이 있다.

     2. 도교 습속
   고려시대에는 도교의 장생법과 사과신적 신앙에서 생겨난 수경신의 습속이 상하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지속되었다. 도교에서는 사람마다 주어진 수명은 2주갑, 즉 120세인데 그가 저지르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 비례로 수명이 단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삼시충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인체내에 기생하면서 그 숙주가 저지른 악생을 살펴 60일 마다 오는 경신일 밤 숙주가 잠든 사이에 빠져나가 천제에게 고해 바친다는 정례보고를 막기 위하여 삼시충이 체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경신일 밤을 자지않고 지새우는 것이 수경신이다. 수경신의 습속은 조선초에 이르는 동안 1년의 6경신을 다 수야하는 일은 줄어들고, 연말 무렵의 마지막 경신일을 철야축제행사로 지키게 되었다.

         Ⅴ. 조선의 도교 - 도교비판과 그 변천
   조선시대에 와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도교가 선봉되어 대체로 고려의 유제를 계승하였으나 그 규모가 축소되었고, 중고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있어서 국가 중십의 도교의식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1. 과의적인 도교의 존속
   1392년에, 고려때 쓰던 복원궁·신격전·소전색·대청관·청계배성소 등 제초 거행장소를 폐지하고 소격전 한군데만 두기로 하였다. 1466년 소격서로 개칭하였데 이는 도교 재초를 거행하는 국가의 관서로서 그 직제는 제조 이하 서원 8인과 도류 약간인 및 도학생은 10인으로 되어 있었고, 도류의 공과와 도과의 제도가 있었다. 소격서에는 태일전·삼청전 및 내외 제단이 있어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에 이르는 도교 제신의 신위를 마련하고, 헌관·서원 및 도류가 분담하여 재초를 종합적으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집행된 재초의 종류는, 성신을 제사하는 성수초, 태양성 및 화성초, 남·북두초, 금성초·태음초·진무초·직성초·형혹기초·혜성기초  등이 있고 그밖에 개복신초·청명초·도병초·기우초·본명초재·진병초·삼원초·삼계초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중종 때에 조광조가 주도하는 신진사류들이 소격서의 혁파와 왕의 천지신 제사 중지를 고집하여 1518년(중종 13)에 소격서를 혁파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도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행사는 참성초라 하여 도교의 재초로 거행되었고 소격서 혁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 지식인들의 도교에 대한 태도
   1) 김첨과 공부
   ; 김첨은 도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부흥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는데, 그 목적은 결국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구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 이래 국가에서 도교를 숭봉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하겠다. 1404년 김첨이 성수초제를 상정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그는 대청관을 수리해서 천황대제를 초제하려고 하였으나, 권근과 하륜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08년 소격전의 제조로 있던 공부를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딸려보내어 당시 종국의 도교 초사의 법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2) 중종 때 신진사류
   : 소격서 혁파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고 왕실측과 대립하여 간접적으로는 기묘사화의 불씨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3) 임진왜란 이후 관제신앙이 흘러들어와 관왕묘의 건립을 보게도 되지만 과의적인 도교는 쇠퇴하였고 성리학을 표방하는 지식인들은 표면적으로는 도교를 이단으로 물리치는 태도를 취하였다.

     3. 민간의 도교
   민간에는 직성기양 같은 성수와 연결되 행사와 습속이 적지 않았다. 도교에서 다루는 성수 중 주요한 것은 칠정사요·남두육성·북두칠성이다. 그 중 남·북두에는 모든사람의 궁함과 통함, 안락과 근심걱정이 다 달려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북두가 더욱 존숭되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북두칠성과는 달라서 북신성, 즉 북극성을 중심으로한 일곱개의 별을 말하는 것으로 그 존승의 핵심은 북극성에 있다. 북극성은 군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록빈부와 생사화복을 위시한 모든 명운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옥추경>은 북극성 경배의 진원이고 또 의약과의 관련이 있어 옥추단이나 벽사문으로 예방하는 습속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밖에 민간에는 삼재예방, 방위의 길흉, 동토 및 입택의 방법 등 인간만사에 부수되는 예방과 선택에 도교적인 풍습이 있었다. 그 중에도 특이한 것은 맹인, 즉 판수가 독경해서 민간의 제반사를 지시, 해결해주는 구실을 하는 일이었다. 한때는 명통사를 총본부로 하여 계층이 뚜렷한 그들의 조직이 있어 도사 중심의 도교교단과 방불하였다.

         Ⅵ. 도교의 양생론과 도교의학

     1. 도교의 양생론
   도교의 수련은 건강을 유지하여 장수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므로 그것은 곧 양생법이라고 할수 있다. 김시습은 이론상으로는 불로장생을 꾀하는 것을 반박하였으나 그의 잡저 <수진>과 <용호>에서 도교수련법의 요체를 천명하였다. 한편 주자가 <참동계>와 <음부경>같은 도서에 관심을 가지고 교주작업을 한 것 등에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까지도 그러한 부류의 도서를 기탄없이 열람하였고 도교적인 수련법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사들도 나왔다. 이이도 도교적인 방법을 감안한 의약책을 피력하였다. 그는 도교의 연단 등선의 설은 믿지 않으나 도교에서 개발한 창양·황정 같은 연년익수한다는 약물의 사용은 그것 나름의 이치가 있어 받아들일만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유교적인 효행이 강조되던 시대이므로 사친양로를 위해 지식인들이 도교의 양생론과 의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 도교의학
   <동의보감>은 그 체계정립에 도교의 철리가 솔직하게 받아들여져 있고, 후생과 실용을 존중하는 도교의 특성이 의약의 본의 천명에 적용되어 있으며, 심지어 도교잡술에 속하는 방법까지도 소개되어 있다. 그 밖에도 조선시대의 의서 가운데 도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많다. 이종준의 <신선태을자금단방>, 박운의 <위생방>, 정추인의 <이생록>, 정사위의 <이양편>, 이창정의 <수양총서유집>, 최규서의 <강기요결>, 서유구의 <임원십육지> 중 <보양지>등은 다 그러한 의서들이다.


                           - 참고 문헌-
       
       한국도교사상연구  차주환 저              1983   서울대학교출판사
       도교와 한국사상                          1987   아세아문화사
       도교사상의 한국적 전개                   1989   아세아문화사
       한국도교사상의 이해                      1990   아세아문화사
       도교의 한국적 수용과 전이                1994   아세아문화사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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