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삼위일체론과 이단들

수호천사1 2014. 3. 6. 19:21

var articleno = "5720094";

삼위일체론과 이단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후 1세기의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2000년 동안의 기독교 교회사는 물론, 지금도 다른 예수가 있고, 다른 영이 있으며, 다른 복음도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여야 합니다.


정통신학은 무려 2000년 동안 끊임없는 이단들의 공격과 시비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특히 삼위일체란 교리는 인간의 논리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무조건 순종하여 믿으라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저는 반대합니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의 젊은 청년들이 이단으로 미혹되는 것입니다.
가려움은 손이 닿지 않는 부위일수록 더욱 가려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란 인간들이 교권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논리라고 비난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삼위일체같은 교리는 몰라도, 뜨겁게 은혜만 받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란 성경을 그대로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으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하고 요약한 것입니다.


교회사를 공부하신 분이라면, 정통교리란 인위적으로 교권이나 교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당시 이단들의 주장이 너무 성행하므로서, 이단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정통교리는 무려 2000년동안 검증을 거쳐온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는 끊임없는 이단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삼위일체론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기독론도.... 모두 이단과의 싸움으로 발단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만을 주장하든지 인성만을 주장하거나, 혹은 단성론자와 양성론자들이 있었으므로 기독론이 세워진 것입니다.
정경이라는 오늘날의 신약성경 27권도 결국은 영지주의자라는 이단들의 무분별한 성경의 채택을 대항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이었습니다. 마르시온이라는 영지주의자는 자기 자신이 쓴 책(댓구)을 성경으로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무엇이었습니까? 비성경적으로 가는 로마 카톨릭의 타락을 보다못한 종교개혁가들의 싸움으로 분리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이 세미나의 주제는 삼위일체입니다.... 왜 이 삼위일체가 중요한 것이며, 이 삼위일체가 어떤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가, 또 이단들의 삼위일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1. 삼위일체론(신론)


306년 콘스탄틴황제가 즉위하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어느 순간에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성자는 성부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증인의 조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리우스 장로에 의하여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인가 동일본질인가 라는 문제가 대립되어진 것입니다.
장로 아리우스와 감독 알렉산더의 두 사이에서 시작된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으로 교회 분열의 문제가 대두되자, AD 325년, 318명의 감독들이 모이게 된 니케야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진리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의 도중 알렉산더 감독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당시 알렉산더감독의 서기이며 집사였던 청년 아타나시우스가 계속하여 아리우스와 토론을 계속하게 되며, 특히 황제의 비호와 많은 감독들의 정치적인 동조가 있었던 아리우스에 비하여, 전혀 알려지지 않고 동조세력이 없던 청년집사 아타나시우스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토론을 계속하게 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장로와 논쟁 중에 무려 다섯 번을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돌아올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결국 아리우스장로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존경을 받는 감독이 되어 평안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는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을 반대하고, 세상은 아타나시우스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타나시우스의 어려운 토론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항상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승리한 것은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명백히 논리적으로 주장하지 못하였고, 여러번 자기 주장을 번복하기도 하고 말을 바꾸면서,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명확히 증거하지 못하였고 오직 외부적인 정치적 공세로 아타나시우스를 압박해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니케야회의는 힘이 없었던 아타나시우스 집사가 아리우스 장로와의 토론을 승리하게 됨으로서 "성자는 피조된 것이 아니며 성부와 동질이다"라는 니케야 신조가 계승되어지게 지며 아리우스는 이단이 됩니다.


니케야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대결하여 승리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을 확립하였고, 콘스탄틴노플회의에서는 양태론자 사벨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함으로서 양태론을 비성경적인 논리로 확정짓게 되고, 즉 325년 니케야 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결론이 약 150년이란 시간을 통해 일단락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2000년 동안 이 논리들은 숱한 이단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으나, 단 한번도 성경적인 진리논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동료들과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딸 콘스탄티아의 영향력 있는 지지로 인해 아리우스는 추방 상태에서 돌아올 수 있었고, 타협신조에 동의한 뒤 교회로 다시 입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 장로는 화해를 하기 바로 직전, 콘스탄티노플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2. 이단들의 실제


여호와의 증인(단일신론, 유니테리언)
몰몬교: 다신론(몰몬교는 양태론이면서, 다신론을 주장함)
지방교회(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뉴예루살렘교회(스웨덴보그): 변형된 양태론
성락교회(베뢰아): 양태론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입니다.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의 세가지 양태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회사에서 비록 작은 사업체이지만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남편, 아빠)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의 삼위일체는 동일한 한 인격의 세가지 양태이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여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예수로, 오순절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성도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류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으며, 삼위가 동시에 존재한 성경적인 기록의 경우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성경과 모순이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잠시후에 상세한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즉 동일한 저의 직분을 말하는 회사사장인 본인과 교회 권사인 본인과 집의 가장인 본인은 동일인격이므로 서로 상호교류할 수 없습니다.
지방교회는 삼위가 한 존재내에 상호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장과 권사와 가장인 저의 직분이 셋이 동시에 한 인격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즉 이러한 주장을 사역적삼위일체, 경륜적삼위일체라고 하는데 결국 변형된 양태론입니다.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세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처럼 분리된, 서로 다른 세 본질과 세 인격을 갖는 경우는 삼위일체와 다릅니다. 그들은 세 인격의 구별된 삼위로서 상호교류는 가능하지만, 그들은 한 본질의 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때에는 삼신론자들이 존재하였지만, 최근에는 삼신론을 추종하는 교회나 단체가 거의 없으며, 단지 완전한 사이비들은 예외입니다.


또한 단일신론(유니테리언)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교의 주장이 되고 맙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를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물, 천사장으로 간주하며,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운 혹은 에너지같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통일교도 삼위일체가 있으며 몰몬교도 삼위일체가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의 증인)이나 정명석집단, 이만희집단같은 사교적인 이단들도 그들 나름대로 삼위일체를 정의하고, 때로는 그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집어 넣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엉터리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시간을 낭비하며 논리적인 공방을 할 가치조차 없다고 봅니다.
당연히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이 포함되어지지 않으며, 성경에서 언급된 신적 존재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을 말합니다.


특히 다신론이라고 하면 몰몬교가 이에 속합니다. 그들은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양태론적으로 주장하면서도, 특히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누구든지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몰몬교에서는 엘로힘은 성부하나님, 성자는 여호와(구약)와 예수(신약), 그리고 성령으로 구별합니다.


정통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세 위격(인격)은 상호교류가 가능하며 상호 구별되어지는 인격을 가졌다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즉 정통삼위일체는 본질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을 구별하여야만 합니다.
본질은 하나라고 말하지만, 인격은 셋이라고 하여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이런 비유는 양태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고,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더욱 혼란만을 가증시킬 뿐입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을지언정, 바람직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즉 세가지 명제를 만족하는 삼위일체가 정확한 삼위일체가 되어지며, 이 세가지 명제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성부, 성자, 성령 각 위는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 우리는 왜 양태론을 조심하고 유의하여야 하는가?


양태론이란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성자하나님으로 오시고, 오순절이후에는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을 말합니다. 즉 동일인격의 세 양태(Mode)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양태론적인 주장은 2000년간 항상 기독교 역사상 이단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역대 교회사에서는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프락세아스, 세르베투스, 스웨덴보그,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등이 양태론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베뢰아 김기동목사가 양태론자입니다.
양태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단이 되어집니다.....


1) 성부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성자하나님으로 오셨다고 주장하면,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되고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사이신 하나님이 죽으셨던 시간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성부고난설)


2) 성자예수님이 성령이 되어 버리셨다고 한다면, 종말적으로 예수의 재림은 누가 옵니까? 즉 양태론은 부활의 신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인격적이며 가시적,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여야만 하며, 예수님이 이미 성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적재림을 주장하여야만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여호와의 주장과 같으며,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은 예수님, 그분이 오시며, 가시적이며 영광적인 인격적 재림을 하시게 된다고 분명히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3)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버뱅크라는 학자가 말하였듯이, 첫단추를 잘못 꿰메면, 마지막 단추는 채울 수가 없어지게 됩니다. 만일 양태론을 인정하게 되면, 2000년의 기독교 전체가 모두 이단이 되어져야만 합니다. 2000년 기독교 교회사상 양태론은 언제나 이단적인 주장이었습니다.


4)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성경적 기록과 모순됩니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라고 말씀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입니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1:17에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어집니다.


6)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자신을 바쳐진 제사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가 자기에게 영혼을 부탁한다는 뜻입니까?


8)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다윗의 시편110편을 예수님이 바리새유대인들에게 직접 인용하십니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3-46, 막12:36, 눅20:43, 행2;35, 고전15:25, 히1:13, 히10:13)


이 성경본문에서 다윗은 "여호와"와 "내 주"를 분명히 구별하였습니다. 다윗이 말한 "여호와"는 하나님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다윗이 말한 "내 주"는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시대, 구약의 시대에서도 성부이신 여호와하나님, 성자이신 그리스도, 성령이 모두 함께 실존하며 상호 구별되어집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 사실은 마태복음뿐 아니라 막12:36, 눅20:43, 행2;35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선재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계신 구별되시는 분이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헬라어: 프로스)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헬라어 프로스는 "향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서로 마주 보고"라는 뜻으로서 인격적으로 구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9)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저"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another counseller)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요14:16)


10)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다른 한분 중보자가 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11)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위의 세 인격은 모두 동시에 실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들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더라"(마3:16-17)


또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삼위의 세 인격은 모두 동시에 실존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7:55-56)


12)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13)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자기가 자신에게, 자신인 성령을 어떻게 부어주셨습니까?


1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하나"는 헬라어 "헤이스"로 숫자적인 유일한 하나(One)를 가르킵니다.
즉 성령도 하나이며, 예수 주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하나인 것입니다.


▶ 삼위일체의 용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성경본문의 "본체"란 말은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로 "실상, 실체(confidence essence, of person)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님도 휘포스타시스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적 단일성은 헬라어로 "우시아"(본질, 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 세 휘포스타시스에서 한 우시아가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가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나, 후에는 단일성을 강조하는 우시아(본질)과 셋을 강조하는 휘포스타시스(위격)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곧 삼위일체를 가르키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즉 삼위일체란 하나의 신적본질을 가진 세 실체의 위격을 말하는 용어입니다.


원래 삼위일체(Trinity)는 터툴리안이라는 교부가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그런데 서방교회의 어거스틴은 위격(본체)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 대신에 라틴어 포로소폰(페르소나의 라틴어)을 사용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원래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단어는 라틴어 "수브수탄티아"로 번역되어지는데, 어거스틴은 프로소폰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 프로소폰(라틴어의 페르소나)이라는 단어는 "마스크"(Mask)라는 의미로서 "얼굴, 모양, 또는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의미합니다.
즉 단어적인 개념으로 보면 한 사람이 세가지 가면(일인삼역)을 쓸 수 있으며, 무대에서 한 배우가 세 사람의 다른 역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되어집니다. 즉 양태론적인 냄새가 물신 풍기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거스틴은 양태론자라는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양태론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변명은 어거스틴도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주장은 고전적삼위일체라고 부르며, 삼위일체가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한 논리로서, 어거스틴의 견해가 곧 정통삼위일체는 아닙니다.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또한 어거스틴이 존재양식론적인 페르소나라는 어휘를 사용하였을 때에, 그가 사용한 어휘는 양태론적인 주장으로 몰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주었던 것입니다.
즉 1인 3역, 1인 3과정, 1인 3단계의 삼위일체가 곧 양태론이며, 실제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양태론이라는 이단적인 주장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어적인 혼란이 양태론을 부채질하게 되자, 칼케톤회의는 어거스틴이 죽은지 50년 후에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동의어라고 공식선언하게 되므로 마침내 삼위일체를 정의하게 됩니다.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 정통조직신학자들의 삼위일체


이러한 신학적인 문헌과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양태론자들이 자신들의 양태론을 정통삼위일체라고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초신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빌미로 자신들이 정통삼위일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조직신학자들은 정통교회를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신성(godhead)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한다. 이 서로 다른 셋은 상호관계라는 관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이해하여야만 본질의 동일성과 이 셋의 구별이라는 형식이 만들어진다."(이종성박사의 삼위일체론, 81쪽)


삼위일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성경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distintion)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가페 성경사전 776쪽)


왜냐하면 각 위격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 위격 간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이며, 그럼에도 각 위격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366쪽)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같은 책, 333쪽)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분이시나, 이 한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85쪽)


성자는 본체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시지만 <인격적 실체에 있어서는 그들과 다르다>.(하지의 조직신학 303쪽)


"I and the Father are one. - 웨슬레는 사벨리우스나 아리우스의 설을 아래와 같이 반박하였다. 요한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라는 본문을 웨슬레는 are가 복수형이다. (are)는 인격의 복수를 실증함으로서 사벨리우스는 반박하는 반면에, 하나(one)는 하나님 안에 본성의 일치를 실증함으로서 아리우스를 반박한다."(웨슬레 조직신학, 50쪽. John Wesley's Theology Today 1960. P91)


"삼위일체 신에 관한 지식은 참된 기독교 신앙 즉 생명적 종교의 필수조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요한이 말한대로 그의 속에 성령의 증거 즉 성령이 그의 영으로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이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이신 하나님의 공로에 의하여 자신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성령이신 하나님의 증거하심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삼위일체의 신을 부인하는 자는 참된 종교를 가진 자라고 볼 수 없다."(웨슬레신학 47쪽, 웨슬레전집 6권 205-206)


▶ 여호와 증인의 단일신론에 대한 성경적인 비판


여호와 증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창조물, 즉 천사장 혹은 수석대행자가 되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성부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적으로 증명하여 보겠습니다.
이젠 지방교회와 베뢰아와 같은 양태론자와 토론하던 것과 반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세 명제는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위는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물론 다음 설명은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며, 예수님과 성부하나님이 동일인물, 동일인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태론자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세 구별되는 인격을 강조하여야만 하며, 단일신론자를 반박하기 위하여서는 삼위가 각각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야만 합니다.
또 삼신론자와 토론할 경우에는 삼위하나님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증거하여야만 합니다.


1)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으며 먼저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이었으며 평탄케 하기 위함이었으며 구약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이사야를 잘 보십시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서를 인용한 신약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눅3:4)


신약에 있어서 "주"는 예수임은 당연합니다. 누가복음 3장4절에서 말하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곧 "예수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 되며,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곧 "예수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라는 것이 되어집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더 필요하다면 마3:3, 마11:10, 막1:2-3, 눅1:76, 눅3:4, 눅7:27을 보면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신세계역을 보아도 이사야40:3은 "여호와의 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2)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8)


이 문장에서는 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의 뜻은 헬라어의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다른 곳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


22장16절을 보면 "나 예수는...."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22장12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참조 사4:4, 43:10, 48:12)


이제 요한계시록 2장8절을 보기로 합니다.


"서머나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이 문장에서 처음이여 나중인 자는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성경적인 근거가 필요하다면 계시록1:18과 21:6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로 보자면, 하나님이 처음이면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과 같은 처음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증인들에게 여호와하나님만이 유일신이기 때문입니다.


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10:11)


바울이 말한 "성경에 이르되"라는 말은 신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말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성경이 곧 구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이 구약을 인용하여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구약이 바로 이사야입니다.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49:23)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여호와를 예수님과 동일하게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음 문장에서 그리스도를 아예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


4)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


5)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요20:28)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5:20)


6)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3)


7)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6)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계17:14)


신약의 윗문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72:11, 단8:25, 딤전6:15을 보면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딤전6:15)


8)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9)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10) 주(퀴리오스)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되었다고 하여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퀴리오스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경어도 되어지며, 하인이나 종이 주인에게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범상치 않게 사용된 예가 몇 개 있어서 그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기 몇 달 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라고 말합니다.(눅2:18) 여기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내 주의 모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는 태어나기 이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퀴리오스)라는 용어는 높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용어이며, 주로 하인이나 종이 주인에게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며,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70인역에서는 이 문장의 "주"라는 단어가 YHWH(야훼)로 번역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이었으며 분명히 아무런 소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분명히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주종(주인과 하인)관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에게 "내 주"는 누구이며 아직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어떻게 "내 주의 모친"이 될 수가 있습니까?


11) 요한복음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라는 부분을 여호와의 증인은 "말씀은 하나의 신이다"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헬라어 Theos 앞에 정관사 ho(the)가 빠져있으므로 소문자로 하나님(a god)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헬라어학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러한 주장은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만의 만들어진 주장일 따름입니다.
요한복음 1장 나머지 부분에서도 하나님 Theos라는 단어에는 모두 정관사가 빠져 있습니다. 일관성있는 해석을 하려면 1:6의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의 하나님도 하나의 신(a god)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12절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하나의 신(a god)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번역하여야 합니다. 18절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도 하나의 신(a god)을 본 사람이 있으니...로 해석하여야만 합니다.


12) 죄를 사하여 주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외에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글은 약 60여 곳에서 나오는데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죄를 사하여 주는 권세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출29:36. 레23:27. 15:15. 민8:19. 16:46. 신32:43등) 다시 말하여 속죄는 하나님 만의 특권이며 제사장도 속죄함의 권세는 없었습니다. 모세도 아브라함도 엘리야도, 천사도 그 속죄의 권세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마9:6. 참조. 막2:10. 눅5:24등....)


그렇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막2:7. 눅5:21)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로 보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서기관들의 생각과 동일하여야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기에 그가 죄사함의 권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천사나 첫째 피조물이나 수석대행자도 속죄함의 권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여야만 합니다.


13)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구절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 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것입니다.(롬3:25. 엡2:13. 히10:19. 벧전1:2등....)


▶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성경적인 증거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성경적인 증거는 많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이라는 증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증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도 하나님이시요 또한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사야6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는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창화하는 모습이 있으며, 이것을 보고 자신의 부정함을 느낀 이사야가 단에 핀 숯을 가지고 그의 부정한 입술을 정케하므로 담대히 이사야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언급됩니다. 이사야의 요청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여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하노라"(사6;9-10)


이 내용을 신약에서 두번이나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연결시켰고,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연결시켰습니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12:39-41)


또한 사도행전 28장 25-26절에 보면 같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을 성령의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25절)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28:25)


또 성도에게 성령이 거하기 때문에 성도가 성전이 된다고 설명하는 바울의 주장은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聖殿)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居)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 성령의 인칭적 호칭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the counselor)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he)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가면 내가 그(him)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he)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그가(he)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6:14)


또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변호자라는 의미)라고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성령을 예수님과 같은 신적 존재로 여기신 증거이기도 합니다.(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another counseller)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헬라어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으로서, 이 단어는 "파라"(곁에)와 "칼레오"(부르다)라는 단어가 합성한 명사로써 "곁에서 부르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곁에서 부르는 분이라는 뜻은 두가지의 개념을 갖게 됩니다. 첫째 능동적인 의미로 직접 사람의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뜻과 그 분의 곁으로 오도록 불러 주시는 분이라는 수동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곁에서 도와주는 분이라는 수동적인 의미로서만 보면, 사람도 포함되어질 수 있지만, 곁으로 오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능동적인 의미로서 보면, 심판적인 개념의 변호사적 사역을 수반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보혜사, 파라클레토스란 단어는 원래 헬라의 법정용어로서, 죄를 진 피고를 도와주는 변호자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은 요일2:1을 대언자라고 번역하였고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변호하는 분"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요일2:1)


즉 자칭 자기를 보혜사라고 하는 교주들이 우리나라에 15명이 있다고 하는데, 보혜사란 어느 사람을 자칭하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변호를 맡아줄 분을 말하는 법정용어의 뜻을 갖고 있는 예수님, 또 항상 곁에서 보호하고 인도하여주시는 성령님, 즉 보혜사란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신적존재"를 의미하며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또다른 보혜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 다음 성경구절은 성령과 하나님의 구별이 없습니다.


삼상10:26 하나님께 감동된 삼상11:6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대하18:31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하사 대하24:20 하나님의 신이..... 스가랴를 감동시키어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벧후3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삼위일체가 동시에 언급되는 성경적인 증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아버지라는 세 인격적 관계와 그 각각의 사역이 잘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For Jesus Christ(말미암아), by Spirit(의하여), to Father(께)를 의미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이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이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만일 하나님이 한 분, 한 인격이시라면 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상호 독립적인 관계성을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4)


윗문장은 믿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서로 교통하는 삼위의 관계를 말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벧전1:22)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