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종말

[스크랩] 예루살렘(Jerusalem)의 역사

수호천사1 2014. 1. 16. 13:35

예루살렘(Jerusalem)의 역사

 

 

 

 

유대 언덕 위에 높이 서 있는 예루살렘은 3000년 전 다윗 왕국의 수도로 정해졌다. 물질적으로 축복 받은 도시는 아니지만 세계적인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가 되어왔다. 이를 합치면 세계 인구의 절반인 약 25억 이상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희망이 담긴 도시이며,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담긴 도시이며, 이슬람교인들에게는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한 곳으로 믿어지는 도시이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도시를 뜻하는 “이르”와 평화를 뜻하는 “샬롬”에서 온 합성어로서 “평화의 도시”, “평화의 터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뜻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도시이다. 예루살렘은 50번 이상 포위당했고, 36번 정복 당했으며, 10번 파괴되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이라고 처음 언급된 것은 여호수아(10:1)이며, 그 밖에 아리엘(사 29:1), 오홀리바(겔 23:4), 하나님의 성(사 60:14), 살렘(시 76:2), 모리아(창 22:2), 여부스(수 18:28), 시온(왕하 19:21), 다윗 성(삼하 5:7), 거룩한 성(느 11:1, 마 4:5) 등으로 불렸다.

 


  1. 다윗 왕 이전의 예루살렘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처음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 시대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대접한 것에서 나온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으로 왔다고 했는데, 역대하(3:1)에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을 가리켜 “모리아 산”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이 예비한 산양을 번제로 드리고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주전 1000년 경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로부터 그 곳을 빼앗아 다윗 성이라고 했다(삼하 5:7).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법궤를 옮겨 놓음으로써 예루살렘은 명실공이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2. 솔로몬 때의 예루살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지역을 넓게 확장하고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궁전과 다른 건축물을 세워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그래서 강대국들의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국제적 도시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졌고, 주전 586년 시드기야 때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

 


  3.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명에 따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 이들은 곧 성전과 성벽 재건에 착수하여 많은 방해와 어려움을 무릅쓰고 마침내 완성한다(느3장).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주전 168년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했다. 주전 167 ~ 63년 사이에는 유대인들이 독립을 누렸지만 주전 63년에 로마가 점령하였다. 주전 37년 로마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받은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솔로몬 때보다 더 웅장하게 성전을 짓고 아름답게 꾸몄으며 성벽을 수축했다. 헤롯 말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

 


  4. 로마 통치하의 예루살렘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후 135년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바르코크바 혁명을 진압할 때 다시 파괴되었으며, 유대인은 추방되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유대인은 사형을 당했다. 이때 하드리안은 유대인 말살정책을 실시하여 예루살렘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는가 하면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예수와 관계된 유적을 모두 없애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골고다 언덕을 평탄하게 만들었고 예수님의 무덤도 아주 없애 버렸다. 예루살렘의 명칭 또한 앨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고 로마식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주후 326년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의 생애와 그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헬레나의 노력에 의해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새로운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예수님의 무덤교회와 베들레헴 탄생교회가 건축되었다.

 


  5. 로마 통치 이후의 예루살렘

 


  그후 약 300년간 비잔틴에 의해 통치되었다가 주후 638년 칼리프 오말의 이슬람 군대에 의해 점령되어 이슬람 지배가 시작되었다. 1099년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어 성지 순례가 재개되었고 이슬람이 재침할 때까지 100년간 유지되었다. 1538년 오토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약 400년간 지배되었다. 이때 슐레이만 대제가 현재의 예루살렘 성벽을 쌓았다.

 


  그러던 것이 1917년 영국이 터키로부터 탈취하여 영국의 보호하에 들어갔다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이 일어났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요르단 수중에 있던 예루살렘의 구 도시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예루살렘이 다시 통합되어 이스라엘이 관장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6일 전쟁으로 구 예루살렘을 요르단으로부터 합병한 이스라엘은 모든 건축물에 옅은 베이지 색의 돌을 사용하라는 이색적인 건축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석양녘의 예루살렘은 태양 빛을 받아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환상적인 모습이 된다.

 

 

 


  예루살렘의 지역 구분

 


  예루살렘은 크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동 예루살렘, 그리고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는 신 예루살렘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1. 구 예루살렘(Old City)

 


  약 4km의 성벽으로 완벽하게 둘러싸여 있는 옛 예루살렘 성이다. 약 2만 명의 인구가 조밀하게 살고 있고,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나 있다. 예루살렘 성은 다시 4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예수님의 무덤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인 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서북지역, 모리아산의 성전을 중심으로 이슬람교인들이 밀집된 동부지역, 1967년의 6일전쟁 이후 유대교인들이 모여 사는 남부지역, 동부 유럽에서 온 아르메니안 기독교인들이 모인 서남지역이 바로 그것이다. 성 안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개의 성지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성전산 지역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승천하신 무덤교회이다.

 


  그리고 성전의 서쪽에 위치한 '통곡의 벽'은 유대교인들에게는 가장 거룩한 장소로서 이들은 벽에 붙어 서서 여호와께 소원을 빌고 자신의 소원을 쪽지에 써서 벽에 끼워 넣기도 한다. 벽의 남쪽에는 여자들이, 북쪽에는 남자들이 기도하도록 되어 있다. 왜 이곳이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성전이 파괴된 아브월(5월) 9일에 흰 비둘기가 벽 위에 나타나 유대인들과 함께 비통하게 울었다는 설과 이스라엘 멸망 후 아브월 9일에만 유대인들의 성전 출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슬피 울며 이 벽에 모여들었다는 설이다. 이곳은 유대인들의 대규모 집회와 군인들의 선서식이 열리는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 동 예루살렘

 


  동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성 북쪽 지역으로 나불러스 길과 살라 에드디니 길이 예루살렘 북쪽 벽을 따라 달리는 슐레이만 길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다. 아랍인들이 운영하는 상점, 여행사, 환전소, 호텔, 식당 등이 밀집해 있는 아랍인들의 상권지역으로 관광객과 더불어 늘 붐비는 곳이다. 동 예루살렘에는 고고학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록펠러 박물관, 솔로몬 채석장, 정원무덤, 왕들의 무덤 등이 위치해 있다.

 


  3. 신 예루살렘(New City)

 


  신 예루살렘 시가지는 한때 서 예루살렘이라고도 하였으나 사방으로 급속하게 뻗어나가 규모에 있어서 엄청난 확장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신도시 지역에는 정부기 관과 상업 지역이 위치해 있고, 고급호텔과 카페, 식당 등이 있어서 여행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도시 중심 바로 서쪽에 가장 싼 시장인 마하네 요다가 위치해 있고, 좀더 서쪽으로 크네셋(국회의사당), 이스라엘 박물관, 야드바셈, 하닷사 병원이 있다.

 


  예루살렘과 주변의 인구는 약 45만 명. 그중 유대교인이 33만 명이며 극소수의 개신교인들은 핍박과 고립된 생활을 감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유대교인들을 보면서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라도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절감하게 된다.

 


  우뚝 선 회교사원, 빽빽하게 들어찬 기념품 상점, 유대교회당과 가정집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포화상태에 시달리고 있다. 성지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찾아온 순례객들은 금방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곳곳에 자리 잡은 유적들은 수천 년 전의 역 사를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준다.






사울에게서 도망가는 다윗





뜻 : 평화의 터전

유대와 베냐민 두지파의 경계선상에 있으며 지중해 헤브론 요단강 사마리아로접경을 삼고 있다. 이 명칭은 수10:1에 처음 기재되었으나 오래전부터 있어 옛 이름이 살렘 우루살렘이라라 하나 확증이 없고 확실한 것은 여부스이며 (삿19:10-11)별명으로 오홀리바라 하고(겔23:4) 시온산의 이름을 따라 시온성 다윗왕의 도성인고로 다윗성, 고라의 자손은 하나님의 성이라 하고 하나님 의 성전이 있는고로 거룩한 성이다라 하였다(삼하 5:7,5:9, 눅 2:11,시 46:4, 느11:1,마4:5). 이로부터 유대인들은 이 예루살렘을 극히 존중히 여겼다(시122:6,137:5-6,왕상8:38, 사62:1, 7, 단6:10,마5:35).

스가랴선지자는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를 구하라고 예언하였고(슥8:22-23).사도들은 한층 더 고상히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성이라 하였다(갈4:26).너희가 이를곳은 시온산과 하나 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하였고(히12:22)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이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 하고(계3: 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니 그 예 비한 것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하였다(계21:2).(1) 역사적 종교적 중요성.예루살렘은 고대 가나안 사람의 수도였으나 B.C 1,000년경 다윗왕이 점령 령하였다.아모스와 호세아를 제외한 모든 선지자들의 활동무대였으며 구약 성경 대부분이 여기서 기록되었다.B.C.586년 느부갓네살이 점령하였고 포로 에서 돌라온 후 다시 재건하였으며 파사 희랍 로마시대를 통하여 그의 신성을을 점점 더하였다.예수의 사역,죽음,부활,승천의 무대였다.A.D.70년 타이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136년 하도리안 황제때 재건되었었다가 637년 칼리프 오말에게 점령되었고 회회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099년 십자군이 점령하였고 1517년 알렌비장군의 연합군이 점령하기까지 터키 사람 의 수중에 있었다. 1920년 국제 연맹의 결의로써 영국의 위임통치로 되었다가 제 2차 대전 이후에 독립하였다.(2) 위치와 기후고대 문헌을 참고해 볼 때 현재의 예루살렘은 고대 예루살렘의 터위에 건설된 것이 확실하다. 기후는 이탈리아의 북부와 비슷하며 겨울에는 영하2도쯤되며 눈도 내리지만 오래 쌓여있지 않는다. 여름철에는 평균 최고 30도 를 넘지 않는다.(3) 성전의 위치.솔로몬의 성전은 B.C.586년 느부갓네살의 손에 부서지기까지 존속하였고 포로 기간 중에도 그 위 치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렘41:5,학2:3,스3:12).B.C.516년 스룹바벨이 그 자리에서 다시 지었다(스6:15).요세퍼스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은 그런 것을 확장 미화한 데 불과하다고 한다.(4) 지세.가) 기드론 골짜기: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동쪽 와디 싯티 마리암일 것이다.요18:1과 막14:26 을 보면 예수가 감람산에 가실 때 이 골짜기를 건느셨다나) 힌놈 골짜기: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을 에워싼 넓은 골짜기 로서 와디엘 라바비일 것이다.다) 혈 로겔: 골짜기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샘과 못이다.왕상1:을 보면 아도니아는 엘로겔에서 대관식을 거행 하였으며 솔로몬은 기혼에서 행하였다.라) 베데스다:38년된 병자가 일어난 곳이다(요5:) 예루살렘 부근에는기혼(처녀의 샘)이 유일한 간혈천이다.아마 이것이 베데스다 못의 유적일 것이다.마) 실로암 지금은 아인이라고 부르는데 실상은 샘이 아니라 처녀의 샘 이 아니라 처녀의 샘의 물을 바위를 뚫어서 급수한 것이었다고 한다.(5) 시대적 증거가)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왕궁,바로의 딸의 집이 계속해있으며 주위는 성벽을 쌓았다.왕궁은 남쪽에 있었으리라 본다.왜냐하면 다윗궁 보 다는 높고 경전보다는 낮다고 하였다 (왕상6:36,7:8,12<사1:26,왕상8:1,9:24,10:5,왕하11:19,렘22:1,26:10,왕상7:8,9:24,3:1,9:15).나) 히스기야 시대의 예루살렘 히스기야왕은 산헤립의 침입을 예상하여 기혼의 물을 다윗성 서쪽에 끌어들이는 수로의 기록이 있다.(왕하20:20,대하32:4,30,7:3,사22:9-11).이것은 바위를 뚫은 굴인데 이 굴 의 안벽에는 옛날 히브 리어의 비문이 조각되어 있다.이것이 실로암 비문이다 다.다) 신약시대의 예루살렘.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 가장 큰 사건이다 예수님이 처음 세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은 성전과 관계가 있었다 (눅2:22-39,41-50, 요2:13-22).네번째는 베데스다 못(요 9: 다섯번째는 성전(요7:) 여섯번째는 실로암못과 관계가 있었다(요9:) 일곱번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소 수난주일 동안 일,월,화요일에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막11:-16:) 목요일에는 다락방에서 만찬을 잡수셨다(막14:15) 이 다락방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을 것이다.이곳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초대교회의 집회 장소가 되었다.전설에 의하면 욥바의 문곁 에 빌라도의 집이 있었다고 하며 헤롯 궁전과 같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십자가와 무던의 장소인 골고다에는 현재의 성묘교회가 서 있다고 한다 옹기쟁이의 밭 아겔다마는 나그네의 매장지였다(행1:18).

느헤미야 시대의 예루살렘 성의 각 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느 3:1-32).

1. 양문(1절)2. 어문(3절)3. 옛문(6절)4. 골짜기문(13절)5. 분문(14절)6. 샘문(15절)7. 수문(느 8:3, 16절)8. 마문(28절)9. 함밉갓문(31절)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

통곡의벽

유대 민족의 신앙의 상징이자 전세계의 유대인의 순례지. BC20년에 헤롯왕에 의해서 지어졌고 긴 유랑 시대에 유대인들은 해마다 한번씩 이곳에서 신전의 파괴를 한탄했다. 남자와 여자가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고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사진을 찍지 못한다.

  • 원어명

    القـُدْس

  • 위치

    이스라엘

  • 경위도

    동경35°13′ 북위31°47′

  • 면적

    126.4

  • 시간대

    UTC+2

  • 홈페이지

    http://www.jerusalem.muni.il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이다.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기후사막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東)예루살렘에는 사적(史蹟)·성적(聖蹟)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聖墓)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순례자와 관광객을 위한 호텔·레스토랑·상점 등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히브리대학교·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담배·플라스틱·신발·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역사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城市)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파라오(王)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뒤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고, 그 북쪽, 지금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이며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
바빌론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뒤 페르시아 왕 키루스(고레스)가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뒤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로데스(헤롯)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왕 이래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뒤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로데스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로데스가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뒤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야훼의 성전을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무함마드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의 앞까지 갔다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아크사의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왕조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사원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편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예외로는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1)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에서 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땅은 맘루크왕조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다마스쿠스 총독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투르크제국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투르크령이 되고 난 뒤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 축조된 것인데, 투르크령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1만 1000명 정도로 감소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이 투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이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투르크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뒤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밸푸어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국이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하였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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