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수호천사1 2014. 1. 16. 13:30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들어가는 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들여다 볼 때면, 그들 사이에서의 독단적인 태도와 배타주의를 “마치 믿음의 증거라도 되는 양” 착각해온 일련의 무례함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무례함들은 어디서 오는가? 기독교 신앙은 사랑과 이해와 친절함과 상냥함을 지녀야 함에도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어쩌면 몰이해라 할 수 있는 성격의 행동들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러한 우려를 해온 바 있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충분한 논증의 부재로 인해 아무런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스스로의 신앙관을 매우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를 고스란히 남에게 전파하려 노력하며, 스스로를 교만과 독단과 독선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는 자들에 대한 배타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종교인이 의심의 굴레를 벗어나 전적인 믿음만으로 그들의 신 앞에 나가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위에 제시한 문구 외에도 신약성서에서만도 의심하지 말라는 구절이 여럿 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예수는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말했다[1] 내가 말하고 싶은 의심은 신의 존재여하나 신의 진정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신앙의 건전성”에 대한 의심을 논하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의 신앙의 건전성”에 대한 아무런 의심 없는 맹목적 신앙은 한편으로는 독선과 독단의 아집으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충분한 이성적 판단 없이 맹목적으로 들은 그대로를 받아들일 뿐이고 이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잘라 말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의심하는 자를 위하여 지옥을 준비하셨다네.


물론 내가 이러한 예를 든다고 해서 어거스틴이 이교도와 이단들에게 친절한 종교 다원주의자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어거스틴의 “있지도 않은” 다원주의적 성향이나 이교에 대한 포용심 등을 강조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Why”를 살펴 왔고, 그는 건전한 의심에서 시작된 “왜 그런가?” 하는 문제를 이성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당대의 지성과 플라톤주의 철학을 통해 합리적이고 겸손하게 풀어나갔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실하였고 매우 금욕적이고 영적인 기독교인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이성의 의심과 의문들을 독단과 교만과 배타주의를 통해 “그 모든 것이 악마의 것”이라는 한마디를 통해 간과해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성실하게, 건전하고 이성적 사고와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이들 의문에 성실히 차곡차곡 답했던 사람이었다.




고백록(Confessions)




어거스틴은 생전에 13권의 고백록(고해,Confessions)을 통해 자신의 어린시절과 신앙의 바깥에서 방황했던 시기들, 마니교에 심취했던 시절과 이에 실망하고 정통 로마 가톨릭의 신앙으로 복귀하기까지의 생활을 회개하며, 이를 글로 표현했다. 본 저서는 내용의 다수가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기타 그의 저서를 직접 인용한 문구들로 가득차 있다.




고백록의 맥락은 한편으로는 그의 자서전이기도 하지만 그토록 처절한 자서전(?)은 나의 생전에 본 바가 없다고 하겠다. 그만큼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회개의 내용으로 그의 저서를 가득 채우고 있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편향된 사고로 인해 근거 없이 보다 후한 형태로 내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거스틴의 경우는 달랐다. 오히려 자학적이기까지 한 고백록의 일부 문구들은 “단지 평범하고 야심만만한 청년이었을 뿐이었던” 어거스틴 스스로를 마치 “어려서부터 온갖 죄악에 물든 흉악한” 으로까지 묘사하는 듯이 보일 정도였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 자체가 죄 그자체라 생각했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해진 모든 행동들을 죄악으로 가정하고 이를 참회하는 듯한 모습을 전편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판단보다 엄격한 잣대를 세울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어거스틴의 스스로의 과거와 행실에 대한 엄격함은 그 이상의 것으로 보여진다.




동거생활




어머니, 아 어머니…




어거스틴의 고백록 속에서는 그의 형제나 아버지 패트리쿠스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은데 반해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표현은 매우 큰 비중을 이루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의 모친 모니카는 그리스도교 3대 현모 중 한 여인으로 추앙될 만큼 유명하다. 이는 그 무엇도 아닌 고백록에 나온 그녀에 대한 묘사에서 나온 것이다. “어거스틴이 그 기억에 의존하여 기록하는 가운데 모니카는 성실한 기독교 신자의 상징이자 모범이 되었다.”[2] 그녀는 성실하였고 경건한 기독교도로서 그의 나이 많고 성격 급한 남편을 현명하고 온순한 방법을 통해 끝까지 내조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마니교에 심취해 있던 그의 아들 어거스틴을 좇아 로마까지 와서 내조했던 아들을 위해서는 다소 억척스러운(?) 어머니 였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내조와 기도는 결국 아들 어거스틴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까지 성공하고 말았다.




이것이 실제로 내용 그자체만큼 객관적 관점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저 역시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어거스틴은 고백록 속에서 그 자신의 과거 모습을 평가하고 회개하던 문구들의 그 잣대만큼의 엄격함을 그녀에게 제시하고 그녀를 묘사하고 있었을까? 본저의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거스틴은 객관적으로 그 어머니를 판단하고자 하였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분석해 볼 때, 과연 그 누가 어머니에 대하여 완전 객관적일 수 있단 말인가.”[3] 그녀는 어거스틴의 극적인 묘사로 인해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진 성자의 면모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부분을 감안하고 바라본다 해도 분명한 것은 그녀는 충분히 귀감이 될만한 어머니상이었고 어거스틴이라는 성자의 출생과 성장배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훌륭한 여성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준비된 그의 언어적 능력




어거스틴은 고대 로마교회가 낳은 4대 박사, 곧 히에로니무스, 암부르시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우스 1세 가운데서 중에 제 1인자로 꼽히는 최고의 인물이었다. 마니교를 위시해서 펠라기우스, 도나티스트들 같은 이단사설을 물리치기 위해 4천권이 넘는 저서를 내면서 로마 가톨릭의 신앙과 신학과 철학을 총망라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왕성한 저작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어거스틴의 어린시절 배웠던 공부가 훗날 그의 왕성한 저작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한 일이다.




어거스틴은 어려서 아버지 패트리쿠스의 지원 하에 수사학(rhetoric)[4] 을 공부했었고, 나름대로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촉망 받는 한 학생이었다. 그는 유능한 연설가였으며 당대에 어느 정도 알려진 능력 있는 수사학 교수였다. 패트리쿠스는 아들이 수사학에 전념하여 훌륭한 법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패트리쿠스가 사망한 이후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에 빠져 수사학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고 철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키케로의 산문은 어거스틴을 성서와 가톨릭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주범(?)이 되기는 하였다. “그가 처음 성경으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다지 긍정적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키케로의 산문과 철학의 세련됨에 빠져서 성서의 투박한 표현들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수사학 공부와 철학에 대한 논의는 결국 어거스틴이 로마 가톨릭의 정통신학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던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라틴어에서만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 외에 헬라어나 포에니 어 등에 능통하지 못했던 점 등과 히브리어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지했던 점 등은 당대에 있어 크나큰 약점이었다. 헬라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방면에 매우 능통하여 라틴어 성경을 제작했던 제롬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저는 또 한편으로 어거스틴이 라틴어 표현법에 있어서만은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오히려 한우물을 팠던 덕택(?)이라고도 말한다. 당대를 통틀어 라틴어 수사법에 있어서 그보다 뛰어났던 교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마니교에 심취, 그 허망했던 세월




성서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 그의 냉소주의는 결국 마니교와의 접촉을 통해 탈출구를 얻은 듯 했다. 맹목적이고 순수한 마음뿐인 기독교도들은 그와의 논쟁에서 어떠한 설득력 있는 문구도 제시하지 못했고 이 젊은 청년은 연이은 승리로 인해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 속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대목에서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수많은 순수한 기독교인들은 그의 생각을 이성과 합리로서 전하려는 노력은 배제한 체 순수한 신앙과 열심만으로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지만 이성적 사고의 결여는 그들을 어떠한 논쟁에서도 이길 수 없게 한다. 세상의 학문에 능숙한 이 소피스트들의 후예 앞에서 정통 가톨릭 신앙 자체가 마치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는 듯이 보일 뿐이었다.




어거스틴은 수사학 교수나 웅변가로서의 명성도 쌓아가며 9년동안 마니교 신도로서의 생활을 보냈다. 마니교는 정통 로마 가톨릭이 채워주지 못했던 어거스틴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어거스틴은 이러한 마니교의 훌륭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왕성한 지적활동으로 인해 마니교는 결국 어거스틴의 지적 능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심지어 기대했던 마니교의 주교 파우스투스와 대면에서도 그의 무지에 결정적으로 실망하고 말았다. 마니교는 어거스틴이라는 그릇을 담기에는 너무 빈약하고 얇았던 한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회심, 그리고 그의 사역




어거스틴은 384년 밀라노로 가서 신플라톤주의를 접함과 동시에, 암브로즈 주교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더 이상 마니교에서 흥미를 잃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의 품 안으로 다시금 들어오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그곳에서 로마서13:13을 보는 가운데 회심을 하게 되었고 세례도 받았다. 모니카의 기도는 여기서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힙포 땅의 신도들에게 억지로 잡혀서(?) 주교의 자리에 서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어거스틴은 힙포에서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와의 논쟁을 걸쳤다. 이러한 논쟁들은 어거스틴에게는 어쩌면 익숙했던 것으로서 그는 바울과 같이 여러 논쟁으로부터 교회의 대변인이 되었고 정통 교리의 사수자가 되었다. 그는 거침없이 이단 교리나 이교도와 맞서 가톨릭 교회를 변호하였고 교회의 교회론과 성례전 및 섭리론, 타락과 원죄 및 예정론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의 신학과 논리와 저서와 웅변술은 당대를 아우러 모든 이들 가운데 우뚝 서게 되었으며, 근대의 루터 칼빈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국(The City of God),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어느덧 로마는 망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이교도들은 로마가 기독교 외의 종교에 대한 관용을 잃은 것이 망국의 원인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여기에 대항하여 이러한 10권의 신국을 작성하였다. “그는 또한 옛날의 로마 전통을 폐지한 사실이 그 멸망을 초래하였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는 곧 이교도들의 덕목들, 이상들, 신들을 소홀히 한 사실이 제국의 멸망을 불러왔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였다.” [5] 어거스틴은 이러한 신국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을 나누어 비유함으로써 인류의 역사와 철학을 통틀어 아우르는 역사철학자로서의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다.




본 저서는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위대한 신학자이며 주교이며 가톨릭 교회의 아버지이며 유능한 역사철학가이기도 한 어거스틴의 일대기를 그의 고백록과 기타 저서를 기반으로 비전공자들과 일반 신도들이 읽기 쉽도록 짧고 간략하고 명쾌하게 펼쳐쓰고 있다. 물론 어거스틴의 저서를 언급한 몇몇 구절에서의 오독[6]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나

워렌 토마스 스미스의 “어거스틴 그의 생애와 사상(Augstine:His Life and Thought)” 은 저자의 주관이 최소화되었고 여러 저서를 정확히 인용하여 매우 간략하게 요약해 놓고 있어 특히 일반 평신도들에게 좋은 도움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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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 20:29

[2] 본저 33P.

[3] Ibid. 148P.

[4] 그리스 ·로마에서 정치연설이나 법정에서의 변론에 효과를 올리기 위한 화법(話法)의 연구에서 기원된 학문

[5] 본저 258P

[6] Ibid. 211P. 이하의 편지 내용은 어거스틴이 비판을 즐기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잘못된 비판이 착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출처 : 한국교회의 문화코드 | 글쓴이 : mus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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