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영혼 소멸설과 영혼 수면설에 대한 비판 (요약편) (2013년 9월 21일 버젼)

수호천사1 2013. 11. 22. 11:58
           앞으로 설명 드리고자 하는 내용의 이해를 위해 먼저 지옥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지옥론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그 이론들에 대한 제 입장은 “기독교”로 분류되어지는 교단과 교회들에서 일반적으로 믿고 가르치는 “전통적인 지옥론” 임을 먼저 밝힙니다—저는 “전통적인 지옥론”이 성경적으로나 실험적으로나 옳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설명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전통적인 지옥론”에 대한 요약과 “전통적인 지옥론” 입장에서 “영혼 소멸설”과 “영혼 수면설”에 대한 고찰이 될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그리고 이미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전통적인 지옥론”에 대해 요약해 드리게 될 것이므로 시간과 지면 관계상 성경 구절 등의 근거 제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더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전통적인 지옥론”에 대한 신학 서적 등을 참고 바랍니다. 지옥론 자체가 길고 복잡한 내용이 아니므로 10 Page 분량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지옥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지옥”에 대해 두 종류의 지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구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재의 지옥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표현한 곳으로 백보좌 심판 후 불신자들이 악한 영들과 함께 던져지게 될 지옥 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두 지옥들이 그냥 “지옥”이라는 같은 단어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 지옥이 현재의 지옥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분간해야 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많은 성도님들께서 그 두 지옥을 구분 못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현재 “땅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와 백보좌 심판 후 불신자들이 악한 영들과 함께 던져지게 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입니다.
 

           앞으로 설명 드리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혼동을 예방하기 위해 단어 정리 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현재 “땅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옥”에 대해서는 이하 “지옥”으로 표현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표현한 곳으로 백보좌 심판 후 불신자들이 악한 영들과 함께 던져지게 될 지옥에 대해서는 이하 “불못”으로 표현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불못”(이라는 지옥)은 구약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게헨나”이고, 방금 설면 드린 것처럼, “백보좌 심판”으로도 일컫는 최후의 심판 후에 불신자들이 악한 영들과 함께 던져지게 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입니다—물론, 모든 게헨나가 “불못”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불못”을 의미 할 때도 있고 예루살렘 성전 (자리) 근처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불못”(이라는 지옥)이 미래에는 분명히 존재 하지만 이미 존재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데 사용 하셨던 “불과 유황”이 “불못”(이라는 지옥)에서 온 것이라면 “불못”은 이미 존재 합니다.
 
           성경에서 땅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옥”은 구약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스올”이고 신약 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하데스” 입니다. 단 한군데만 그리스어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단어를 사용 했습니다(벧후 2:4) —물론, 모든 “스올”과 “하데스”가 “지옥”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지옥”을 의미 할 때도 있고 “무덤” 등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타르타루스”가 의미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 내기 위해 결국은 당시 그리스 문헌들과 히브리 문헌들을 참고 해야 합니다—사도 베드로께서 베드로 후서를 쓰실 때 원활한 언어 소통을 위해 당연히 그 당시 통용되던 단어를 그대로 사용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문헌들에 의하면 타르타루스는 소위 일컫는 “지옥 아궁이”로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타르타루스는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무저갱”과 같은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르타루스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사도 베드로께서 타르타루스에 대해 어떻게 말씀 하시는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타르타루스의 흑암에 가두어 두어 그 심판 때까지 갇혀 있게 하셨다”(벧후 2:4; 제 번역). 범죄한 천사들—타락한 천사들; 악령들—은 계속 활동을 합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사단의 보고(욥 1:7, 2:2)”와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귀신들을 쫒으셨던 사실들’”에 나타나듯이 다른 악령들은 이 땅에 나타나서 활동 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을 쫒아 내는—소위 일컫는 “귀신을 쫒아 내는”—축사 사역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저도 많이 내쫒아 봤습니다. 그러나 타르타루스에 갇힌 천사들에 한해서는 ‘백보좌 심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은 “그 심판날”까지 흑암에 갇혀 활동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 천사들이 유다서 1장 6 절에 나타나는 “(‘백보좌 심판’ 일 가능성이 높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힌 천사들 일 것 같니다. 그러므로 타르타루스는 범죄한 천사들—타락한 천사들; 악령들—중 “특정 범죄를 저지른 천사들”이 갇혀 있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을 의미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서는—정확하게는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는—아직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죽었어도 생전에 지은 죄들이 사해지지 않은 상태 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는 제사로 죄를 속하지 않았습니까?”는 질문이 예상 됩니다. 잘 아시고 계시듯이, “제사 제도”가 죄를 사한 적은 없습니다. “제사”가 죄를 사한다면 예수님께서 궂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사실 ”제사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주장 하시는 것은 예수님 이외에 “제사”라는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것과 일반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통로 이십니다. 제사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면, 생각컨데, 예수님께서 굳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제사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예수님의 희생은, 어떻게 보면, 무고히 죽어가는 짐승들을 몇 년 더 살라고 구원하신 것 밖에 안됩니다. 그러므로 제사가 죄를 사할 수도 없고 그래서 누가 제사로 죄사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단지 (그 향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려뜨려 하나님의 심판을 지연 시켰던 것 뿐입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을 경우에 한해서 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서는 아직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죽었어도 생전에 지은 죄들이 사해지지 않은 상태 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는 아무리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죽었어도 예수님의 희생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생전에 지은 죄들이 사해지지 않은 상태 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죽었던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죽었던 자들—신자들—도 불신자들처럼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신자들과 불신자들 모두 다 땅 속으로 내려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불신자들과 같이 대우 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속 어딘가에 신자들만을 위한 장소를 구분해 두셨습니다. 그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누가 복음 16장 19 ~ 31 절에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방금 언급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질 때까지는 신자들과 불신자들 모두 죽으면 땅 속으로 내려 갑니다. 그러므로 그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 둘 다 땅 속으로 내려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가 있는 장소와 거지 나사로가 있는 장소가 다릅니다. 같은 땅 속이지만 그 부자는 고통스러운 장소에 있는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고통스럽지 않은 장소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있는 곳에 아브라함도 있습니다. 천국에 계셔야 할 아브라함께서 땅 속에 계신 것입니다. 게다가 서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보는 정도가 아니라 대화까지 합니다—그 두 장소들이 거리상으로도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증명 합니다. 그 사실이 “아브라함이 거지 나사로와 계신 ‘고통은 없는’ 장소”가 “그 부자가 고통 받고 있는 땅 속 어딘가의 장소”와 매우 인접해 있다는 사실을—즉, 같은 땅 속이라는 사실을—또한 증명 합니다. 단지 왕래가 불가능 할 뿐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 죽었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위해 땅 속 어딘가에 구분해 두신 ‘고통은 없는’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희생으로 속죄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 이후에 죽은 신자들은 천국으로 바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희생 전에 죽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희생 후 어떻게 되는가?”하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분들을 천국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후 이 지구(음부; 스올; 하데스)를 “불못”에 던지실 때  않으면 그분들도 함께 불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들도 구원 받습니다—음부와 함께 불못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희생으로 속죄를 이루신 후 그분들에게 가셔서 그분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분들을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께서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벧전 4:6)라고 하신 말씀이 예수님께서 그분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분들을 천국으로 옮기시기 위해 그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것을 의미 하는 것 같습니다—즉, 그 말씀에서 “죽은 자들”은 구약 시대에—정확하게는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죽으신 분들을 의미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보신 분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구약 성경에 나타나시는 분들이 실제 천국에 계시다고 합니다—더 이상 “땅 속 어딘가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위해 구분해 두신 ‘고통은 없는’ 장소”에 계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희생으로 속죄를 이루신 후 그 희생 전에 죽었던 신자들에게 가셔서 그분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 분들을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신자들을 거기서 천국으로 옮기신 싯점이 궁금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 하시기까지의 3일의 기간 사이에 예수님께서 그분들을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편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십니다. 그러나 부활 후 예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요 20:17)—천국에 가신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40일이 지나서 승천하시면서 천국에 들어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돌아 가신 날 그 우편의 강도와 가셨던 낙원은 천국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낙원은 (죽은) 신자들이 가는 곳 입니다(눅 23:43). 구약 시대에—정확하게는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죽은 신자들이 가는 곳은, 위에 설명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위해 땅 속 어딘가에 구분해 두신 ‘고통은 없는’ 장소 입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그 신자들이 가는 곳은 낙원 입니다(눅 23:4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 지기 전에 죽은 신자들을 위해 땅 속 어딘가에 구분해 두신 ‘고통은 없는’ 장소가 바로 낙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아 가신 날 낙원에 가셔서 거기에 계신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죄를 사하신 후 그분들을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에 사도 바울께서 아시는 분도 낙원을 보셨다고 합니다 (고후 12:4). 게다가 예수님의 희생 이후에 죽은 신자분들은 무두 천국으로 가는데 의외로 예수님께서 그분들 중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고 하십니다. 천국에 계시는 분들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낙원이 천국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땅 속에서 지옥과 이웃 했던 낙원이 천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위치를 추적하면 낙원이 천국 어디쯤에 위치 하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바가 아니므로 생략 하겠습니다—궁금하신 분들은 요한 계시록 22장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하여간,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땅 속 “낙원”에 계신 분들만 천국으로 옮기셨던 것이 아니라 “낙원” 전체를 천국으로 옮기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이제 낙원은 천국 어딘가에 있습니다.
 
           이제 지구 속에는 “지옥”(스올; 하데스)만 존재 합니다. 그리고 그 지옥의 가장 깊은 부분이 타르타루스 입니다. 그 타르타루스는 특정한 범죄를 저지른 천사들(악령들)이 갇혀 있습니다. 다른 악령들은 지옥에서 나와 이 땅을 활보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반면에 타르타루스에 갇힌 악령들은 심판날까지 타르타루스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년 왕국”이 끝나고 집행하실 “백보좌 심판” 후 사단과 악한 영들과 불신자들은 지옥과 함께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못에서 사단과 악한 영들과 불신자들은 영원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지옥론”을 요약 합니다.
 
  
“영혼 수면설”과 “영혼 소멸설”에 대한 제 고찰 입니다.
 
“영혼 수면설”에 대한 고찰 입니다.
 
           간단히 요약 드려서, “죽은 불신자들은 최후의 심판날까지 의식 없는 수면 상태로 지낸다”는 이론이 “영혼 수면설” 입니다.
 
           “영혼 수면설”에서 가장 거침돌이 되는 부분이, 앞에서 설명 드린,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최후의 심판날이 되기 전인데도 수면 상태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분명한 상태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눅 16:19 – 31). “영혼 수면서”에서는 그 사실을 실화가 아닌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결코 비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 하실 때에는 구체적인 “이름”을 사용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복음 16장 19 ~ 31 절에 “나사로”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사용 하셨습니다—그 사실이 비유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실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추적 했을 때 그 부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지목 되었습니다. 실제 지옥을 보신 분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지옥은 땅 속에 있으며 거기서 영혼들이 당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누가 복음 16장 19 ~ 31 절에 하신 말씀은 비유가 아닙니다—실화 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불신자들은 최후의 심판날까지 의식 없는 상태로 지내 않습니다—지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매 순간 당하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립니다. 즉, “영혼 수면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영혼 수면설” 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도 안하시고—즉, ‘최후의 심판날’ 전에; ‘백보좌 심판’ 전에—형벌을 내리시는가?”는 의문을 제기 합니다. 지옥은 (최후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의하면 믿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기는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불못 입니다. 지옥은 그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가는 장소 입니다—연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옥이 있다면 불신자들이 천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연옥에서 그 심판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이 없기 때문에—천국 아니면 지옥 이기 때문에—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불신자들은 최후의 심판날까지 의식 없는 상태로 지낸다”는 “영혼 수면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혼 소멸설”에 대한 고찰 입니다.
 
           간단히 요약 드려서,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언젠가는 소멸 되어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그러므로 영원히 고통 받지 않는다”는 이론이 “영혼 소멸설” 입니다.
 
           “영혼 소멸설”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영혼들은 언젠가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성경에서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심판에 쓰여졌을 때에는 실제 ‘영원하다’라는 의미가 아닌 ‘형량이 끝날 때까지’라는 일시적 의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이—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영혼들이—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구절들의 실제 의미는 형량이 끝날 때까지만 형벌을 받고는 소멸 되어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서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영혼 소멸설”의 논리 입니다.
 
           이에 대한 분별을 위해 문학적 접근이 필요 합니다.
 
           성경에 문학적 표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시 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 지 문학적으로 이해 해야 할 지를 구분하셔야 합니다. 역시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해석학의 일부 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문학적 표현입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시기 때문 입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고유 명사이고 사랑은 추상 명사입니다—고유 명사와 추상 명사가 같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표현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사랑이 넘치신다는 것을 강조한 문학적 표현 입니다.
 
           예를 들어,유다서 1장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 영원한(아이오니오스)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후서 2장 6절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로 설명 합니다. 그렇게 실제 멸망한 도시를 향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고 했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문학적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 받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도시, 지역, 나라, 종족 등)을 향하여 성경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그 “영원한 형벌”이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 문학적 표현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불못에 떨어질 사단과 악령들과 불신자들이 받게 될 형벌이 영원하다고 표현 할 때에는 그 표현이 결코 문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 직설법 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 복음 25장 46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저희는 영벌(영원한 형벌; eternal punishment)에, 의인들은 영생(영원한 생명; eternal life)에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쓰신 두 “영원한”(Eternal)은 같은 단어 입니다—받게 될 형벌과 생명이 다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게 될 “끝이 없는—영원한—생명”을 말씀하셨고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단어인 “영원한”을 쓰시면서 그들이 받게 될 “끝이 없는—영원한—형벌”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영혼들이 영원히 소멸 되지 않듯이 지옥 가는 영혼들도 영원히 소멸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코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분명한 직설법 입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사후 처소에 대한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문제들 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밝혀 주셔야 하고 그래서 구원의 문제 처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지옥과 불못에서 진행될 형벌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문학적 표현이 아닌 직접적인 표현도 많이 쓰셨는데—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게”도 많이 말씀 하셨는데—왜 성경에는 “지옥과 불못에서의 형벌은 일시적이다,” “지옥이나 불못에 떨어진 영혼은 형량이 끝날 때까지 고통을 받은 후 소멸 된다”는 등의 직접적인 표현이 전혀 없는지? “영혼 소멸설”이 정말로 맞다면 성경에 그러한 표현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러한 표현들이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영혼 소멸설”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과연 유대인들도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심판에 쓰여졌을 때에는 실제 ‘영원하다’라는 의미가 아닌 ‘형량이 끝날 때까지’라는 일시적 의미”라고 이해를 하는지?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해 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이 제안은 제가 임의로 드리는 제안이 아닙니다. 성경 해석학에 나오는 “Grammatical–Historical Criticism”이라는 성경 해석의 원리 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그렇게 이해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유대 문화 역시 “영혼 소멸설”을 지지 하지 않습니다.
 
3. 영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이온”에는 “영원” 외에 “세대,” “세상”이라는 뜻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아이온)이 하나님의 심판에 쓰여졌을 때에는 문자 그대로 “영원”이 아닌 “심판이 끝날 때까지”라는 일시적 의미로 이해 해야 한다면 “영혼 소멸설”을 주장하는, 예를 들어, 안식교에서 차라리 성경을 안식교 전용으로 따로 출판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쓰여진 “영원”(아이온)을 “세대”라고 의역해서 번역 해야 합니다—“영혼 소멸설”을 믿는 안식교에서 최소한 안식교도들만을 위해서라도 성경을 다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심판에 쓰여진 “아이온”이나 “아이오니오스”는 “영원,” “영원한”이 아닌 “세대” 나 “일시적”으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번역한 성경이 어떻게 보일련지? 왜 안식교 마져도 기존 성경—일반 기독교에서 번역한 성경—을 사용 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독자님들께 맡기겠습니다.
 
           그러므로 “영혼 소멸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혼 소멸설”을 믿는 한 후배에게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는 그의 부모님을 속히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부모님이 지옥 가게 되신다면 형량을 마치신 후 소멸되어 존재 자체가 없어 지실텐데 궂이 부담 드려가며 전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영혼 소멸설”이 신학의 세계를 떠나 현실에 적용될 때 나타나는 악영향 중의 하나입니다. “영혼 소멸설”을 경계 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Dean`s Study
글쓴이 : De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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