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명은 세계선교
김태복
(홍익교회 원로목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사 60:1~3)
근시안적인 한국인들의 꿈
한국의 근대역사의 비극은 원시적인 꿈, 진정한 비전이 없다는 데 있었다. 다만 근시안적인 꿈들이 한국인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그 결과 번번이 역사가 바뀔 때마다 더 큰 실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의 꿈은 ‘조국의 독립’에 있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불타게 염원하면서 일제의 무서운 압제(壓制)를 견디어 내고 있었다.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만주의 벌판에서, 혹은 상해의 더러운 거리에서, 혹은 하와이의 수수밭에서, 혹은 징용으로 끌려가 짐승 이하의 천대를 받으며, 혹은 동경의 차가운 하숙방에서 비운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직 독립의 날이 유일한 꿈이었다. 국내에서도 낱알까지 세어 가며 착취해 가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전담(田畓) 위에서, 혹은 차가운 감방에서, 혹은 교회당의 바닥을 눈물을 적시면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의 꿈은 독립 국가였다. 해방과 동란 속에서 ‘우리의 스스로의 정부(政府)만 가진다면’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 요인(要人)이 계속 암살되는 테러의 분위기 속에서, 혹은 포연(砲煙)이 가득한 참호 속에서, 혹은 형과 동생이 각각 국방군이나 인민군으로 끌려가서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인 날들 속에서, 혹은 포로수용소의 살인적인 분위기에서 그 꿈 하나만으로 잘려져 나간 다리의 아픔을 견디고 있었다.
우리 형님들의 꿈은 민주주의 국가였다.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빛나는 민주정부’였다. 그러한 꿈을 위해서 저들은 4․19 혁명을 일으키고 독재의 앞잡이 경찰들의 총칼을 향해 어깨에 어깨를 부여잡고 나가면서 애국가를 합창했던 것이다.
우리의 꿈은 부강(富强)국가였다. 4․ 19의 혁명 이후의 혼란을 핑계로 총칼로 5․16을 일으킨 군사정권이 강제로 주입시킨 것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구호는 우리 세대에게 너무나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배고프게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태어날 1940년 당시는 일제가 대동아전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공습경보 속에 울음소리조차 입막음을 당해야 했고, 한 밤중에 개 짖는 소리에도 흠칫 놀라는 부모들의 얼굴을 의아해 하며 자랐다.
해방에 이어 터진 전쟁 와중에 수용소 천막 속에서 한글과 구구단을 깨우쳤다. 우리의 영양원이란 바싹 마른 엄마의 젖이나 구호미였던 안남미(安南米)가 전부였고 어쩌다 운 좋은 경우에는 미군(美軍)이 내다 버린 꿀꿀이죽을 먹는 것이었다. 덕지덕지 꿰맨 낡은 내의와 양말, 검은 고무신을 신고자란 우리에게는 오직 소원은 하얀 이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한 우리에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노래는 복음송이었다. 그러한 꿈을 이룩하려고 우리 세대는 목숨을 담보로 하며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중동의 열대지역에서 밤낮없이 땀을 흘려 가며 일을 하며 달러를 모았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한국 경제의 급성장에 시동을 걸게 했던 것이다.
우리의 동생들의 꿈은 민간정부였다. 대를 이어 가며 독재하는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진정한 민간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한 꿈을 달성하고자 저들은 모든 언론들이 봉쇄당한 무시무시한 유신정권 하에서나 부마사태를, 독재가 더 강화된 5공 정권 하에서 광주 민중 항쟁을 일으키며 민주화투쟁으로 젊음을 바치었던 것이다. 그러한 희생 위에 30년의 군사정권은 물러가고 문민정부와 국민정부가 탄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아들들의 꿈은 무엇일까. 분명 남북통일과 선진국 진입일 것이다. 그들의 할아버지들이 이룩한 독립이나 민주정부 위에서, 혹은 그들의 아버지나 삼촌들이 이룩한 풍요로운 물질사회나 민간정부에서 자란 우리의 아들들의 꿈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반세기 동안 미루어 온 남북통일과 세계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들의 꿈은 너무나 근시안적임을 이제 너나없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갈망하던 독립이 이루어졌더라도, 그렇게 소원하던 배를 두드리며 잘 먹는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더라도, 그렇게 최루탄으로 인해 눈물을 펑펑 흘리며 투쟁하여 얻어낸 문민정부가 되었더라도 그렇게 불타던 꿈들에 비해서 너무나 실망스러운 일들이 산적(山積)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사실을 우리 민족들이 깨닫는 데 50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의 아들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나 선진국이 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실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한 조그마한 빛이
이러한 현상들은 민족의 꿈을 세상적인 목표에 두었기 때문에 오는 현상인 것이다. 그 모든 목표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욕망의 집약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의 구멍은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만족을 모르는 것처럼 민족의 욕심인들 그 무엇으로도 충당할 수가 있겠는가. 민족의 꿈은 하늘이 주어져야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 민족을 보존하고 연단 시켜온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 민족의 큰 불행은 근시안적인 목표는 적지 않았으나 하늘이 주신 꿈, 하늘이 주신 뜻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데 있고 또 그것을 가르쳐 주는 민족의 스승이 없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고집불통의 정치가는 너무나 많은 반면, 우리 민족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이며, 이 비극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이며,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비전이 무엇인지 뜨겁게 교훈해 주는 한국의 간디가 없다는 점이 가장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상의 불모지에서 이처럼 이유 없는 허탈감에 시달리는 것일까.
이러한 사상의 불모지에서도 믿어질 수 없는 한 가닥의 소리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줄기의 희미한 사상의 빛. 그 세미한 빛의 소리는 ‘이 조국이 왜 고난을 당해 왔는가? 또 이 민족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너무나 세미하여 환청(幻聽)이 아닐까 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 소리의 내용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에 터무니없는 말로 들리어졌으나 이상한 호소력이 있어서 점점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마침내 우리의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누구의 입을 통해서 말하여지기를 이 땅의 장구한 세월의 수난(受難)들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 수난은 어느 날인가 역사 위에서 크게 쓰임 받기 위한 연단이요, 시련이라는 것이요, 한국은 세계적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힘 한번 제대로 못 써 보는 지지리 못난 민족, 해방은 되었으나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해서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 총질을 벌리며 싸움질하는 철이 없는 나라인 주제에 이러한 거창한 주장은 취한(醉漢)의 주정 소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러한 주장들은 이 입 저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민족의 비전이 되었고, 그것을 구체화한 시킨 것이 함석헌 옹의 「성경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였다. 그는 성경적인 사관(史觀)과 이전해 온 사상의 눈으로 오천년 역사를 다시 묶어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책을 통해서 이 민족의 세계적인 사명을 강변(强辯)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착한 성질이 미래의 세계사(史)에 있어 위대한 사명을 다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함석헌:「성경적인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215페이지)
<하나님은 동서양 양문명의 죄과를 우리에게 지우기도 하였다.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가 아름다운 점이 많되 압록강을 건너서는 그 죄악의 폐해만을 남겼고, 유럽의 사상과 미주의 사상이 혜택을 주는 것이 많이 있으되 부산에 올라올 때는 우리의 생명의 위협으로 왔다. 동양 문명의 폐는 퇴영적이요 보수적이요 형식적인 데 있는데, 그 고즙(苦汁)은 우리가 혼자 받은 듯 하고, 서양의 문명의 해는 물욕적이요 약탈적이요 외면적인 데 그 독아(毒牙)는 우리가 혼자 만난 듯하다. 먹고 남은 오예(汚穢)는 쓰레기통 같이 남들이 향락하고 남들이 이용하는 결과로 남은 온갖 문명의 해독을 우리 약한 등에다 졌다. 삼천리강산은 죄악의 박물관이다. 세계 온갖 죄악의 결과를 보려는 자가 여기 오면 볼 수 있다. 유교의 폐 여기 있고, 불교의 해 여기 있고, 군국주의 표본 여기 있고, 자본주의 노예의 실례가 여기 있다. 4000년 역사는 우리의 위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우리의 져야 할 짐의 위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짐을 지워 놓고 세계에서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조센징’ ‘까오리’ 모멸이다, 조소다, 손가락질이다. (中略) 세계상의 하수구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 사람들이여, 이 하수구에 감사하라. (中略) 우리의 사명 여기 있고 세계를 위하여 이것을 져야 한다. 우리가 자진하여 택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이를 우리에게 지웠다.> (上書 218페이지)
세계의 십자가를 졌기에 우리 민족이 그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다니, 그리고 어느 날인가 마지막 때 이 민족을 강하게 쓰기 위해서 그런 엄청난 연단을 받게 하셨다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비약이다. 의식 있는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한편 의아해 하고 한편 호기심에 차 있기도 했다. 어느 분은 아예 망상(妄想)이라고 비웃으며 서가(書架) 귀퉁이에 꽂아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족의 고통이 장기화되면서, 또 나라의 국난(國難)에 직면할 때마다 먼지에 싸인 그 책을 다시 펼쳐 보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이 사상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젖어 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서편으로부터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많은 역사가나 사상가들은 번영했던 서구(西歐)의 몰락을 예언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해서 그 번영을 쌓아 갔던 서구사회가 기독교 정신을 잃어 갈 때 그것은 불길한 징조임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 민주주의보다 더 근본적이며,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 기독교는 서구 민주주의보다 근본이며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만일 이 기반을 포기한다면 서구문명은 마치 신경(神經)을 죽인 치와와 같은 것이다. 외면적으로 볼 때는 이전과 똑같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어느 기간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지마는 그것이 깨어지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J. G 드뷰스:「서양의 미래」252페이지)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기독교는 형식만 유지할 뿐 그 기본정신을 잃어 가고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청교도에 의해 이룩된 미국의 부(富)의 윤리는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고 그 풍요를 구가하던 사회는 큰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나마 윤리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마저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소리가 점점 높아 가고 있다.
<수많은 서방세계의 교회들은 일종의 무덤과도 같다. 교회의 총화는 하나의 거대한 묘비다. 그 묘비는 언젠가 신자들이 그곳을 예배의 장소로 삼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종소리는 이제 성전으로 오라는 부름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소리를 기껏해야 소음으로 밖에는 여기지를 않는다. 게다가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에 의하여 대도시에서의 종소리는 최소한도로 억제되고 있다. 목사는 강대상으로 올라가게 되면 의자들이 텅 빈 채로 하품을 하면서 목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내 자신이 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서부 유럽에 있는 어느 교회는 6만 명에 달하는 교인들 가운데 고작이어야 200명밖에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300명의 등록된 교인 가운데 한 명 꼴만이 주일날에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코흐:「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5페이지)
서양은 몰락해 가고 있다. 서양 뿐 아니라 세계는 종말을 향하여 카운트 다운되고 있음을 영적인 감각을 가진 이들은 느끼게 된다. 무엇인가 막연하게 느끼는 우리의 불안감과는 달리 성경 종말론자들은 구체적으로 종말이 가까웠음을 경고하고 있다. 핼․린드세이가 저술한 「대유성 종말」이나 살렘․키르반이 저술한 「인류의 종말」에서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중심한 예언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을 통해서 성취되었음 증거 하면서 구체적으로 종말의 끝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지구는 서기 2000년을 전후하여 큰 위기가 닥칠 것을 경고하면서 그 증거들로 자연 현상의 이변(異變), 인구 폭발, 식량 기근, 연료 기근, 핵(核)의 위험성, 공해, 인간의 잔악성을 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 한국의 사명
이러한 세계 종말의 끝에서 과연 한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이러한 시기에서 한국은 과연 사명이 있는가.
‘사명이 있다’라는 이들이 기독교인들 중에서 많아 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세계 복음 선교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사명에 대한 주장은 목회자들의 설교 뿐 아니라, 부흥사나 신학자, 학생운동가이거나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인 이기혁 목사는 앞으로 세계 복음 선교의 중심지는 한국이 될 것이라고 일찍이 주장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78년 동안에 교회가 대발전한 것, 아시아에서 먼저 50년 전부터 선교사를 외국에 파송한 것, 이단사설과 독선, 편협자들의 혼란과 분쟁분열을 일으키는 회중에서라도 정(正) 복음교리를 꿋꿋이 책잡아 나아감으로 한국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있는 것, 우리 선교사의 활동이 비상함으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의 여러 나라들이 한국 선교사가 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등, 이런 형편이 모두 우리로 하여금 아시아의 중심 활동지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 계신가고 기다려집니다.> (「기독교사상」誌 62년 3월호)
부흥사인 신현균 목사는 말한다.
<우리 민족의 세계적 사명은 복음 선교다. 우리 민족은 자유우방, 여러 나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원조와 혜택을 많이 입었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그 빚을 갚을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무기, 쌀, 밀가루, 약품, 구호물자로 신세를 진 대신 복음으로 지은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중국, 태국, 파키스탄 등지에 이미 선교사를 보낸 바 있거니와 이것은 시발점에 불과하다. 앞으로 오대양 육대주 세계 도처에 한국에서 선교사를 널리 보내게 될 것이다. 그날은 온다. 오고야 만다.> (「신앙적 입장에서 본 한민족의 사명」51페이지)
한국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는 말한다.
<구라파의 영성(靈性)의 시간은 긴 밤으로의 시간이라면 미국의 영적 시간은 오후 세시다. 결코 미국은 그의 영적 청춘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의 심장부인 구미(歐美)에서 공산주의도, 나치주의도, 허무주의도, 히피도, 포스트-섹스(Post-Sex)족도 생기었다. 그래서 구미는 포스트-크리스처니티(Post-Christianity)의 25시이다. 하나님은 아시아에 새 일을 시작하시고 기독교의 새 모양을 찾고 계신다. 아시아의 이스라엘, 제2의 기독교 발상지는 한국이라고 믿고 싶다.> (「筍論노트」4페이지)
신학자인 김재준 목사는 말하고 있다.
<나는 한국 민족이 유대 민과 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을 20대부터 느껴왔다.
그 이유는,
◇지적장학(地政學的)으로 강대국에 끼어 있다.
◇정치의식은 강하나 정치혜택은 별로 없다.
◇민족적 수난이 잦았다.
◇성품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다.
◇종교적인 나라다. 무엇이든지 대뜸 종교화하려고 한다.
◇강대국 속에서 시달리면서도 민족적 주체성이 영속되고 있다.
◇전 세계에 퍼져 산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각 분야에 걸쳐 뛰어난 인물이 많다.>
이어서 우리나라의 세계적 사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앵글로 색슨족처럼 정치적 천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튜톤족처럼 냉철 철학을 즐기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일본족처럼 악착같이 제 살림 굳히는 데도 그리 흥미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서울이 뉴욕의 월가(wall street)를 대신할 날이 오리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불란서의 나폴레온처럼 군사적으로도 세계를 정복할 만한 야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권세도 없고, 돈은 없으면서도 당당하게 세계무대에서 모든 인류에게 먹일 수 있고, 줄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분야는 하나 있다. 그것은 유대인 전통에 나서 지금은 전 세계 문명과 전통이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예수의 종교입니다. 유대인의 종교는 유대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는 예수교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적 심벌은 모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를 완성한 예수를 우리의 주(主)로 믿습니다. 한민족은 동양에서 유대민족의 역할을 담당할 민족이라고 믿습니다.>
(「제3일」誌 74년 4월호)
어찌 한국인 스스로만 자위(自慰)하는 소리이겠느냐. 일찍이 뜻 있는 외국인들도 하나 둘씩 한국을 향해 그 사명을 말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중에 우리는, 유명한 작가요, 정교회 사제(司祭)로써 내한(來韓)까지 했던 비르질․게오르규를 잊을 수 없다. 그는 한국에 대한 큰 격려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빛이 무명(無名)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온 것처럼 지금 인류의 빛도 작은 곳에서 비쳐 올 것입니다. 내일 빛이 당신네 나라인 한국에서 비쳐 온다 해도 놀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네들은 수없는 고난을 당해 온 민족이며 그 고통을 번번이 이겨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고난의 수렁 속에 고개를 처박힌 민족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고개를 쳐든 사람들입니다. 당신네 한국 사람들은 내게 있어서 젊은 시절에 읽은 성경의 ‘욥’과 같은 존재입니다.> (「文學思想」誌 74년 5월호)
한국의 역사의 문제는 기독교에 의해서만 그 해석이 풀리어지는가. 이제야 모든 역사의 의문이 풀리기 시작하려는가. 그렇게도 잔인하고 끈적끈적하고 간교한 강대국이란 강대국은 다 군집(群集)해 있는 틈바구니에서 번갈아 윤간을 당하며 참을 수 없는 수모(受侮)를 다 당하면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이 민족에게 하늘의 큰 뜻이 있었다니 쉽게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약자(弱者)를 들어서 즐겨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가. 그 대표적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옳소이다. 우리는 지지리도 미련한 나라이옵고 번번이 침범만 당하고 한 번도 남을 침범해 보지 못한,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는 나라요, 온갖 강대국이 드나들며 욕(辱)을 보여도 참는 것으로 버틴 노예 같은 천한 나라이옵나이다. 이 나라를 마지막 때 들어 쓰신 다니 세상 천지에 믿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그러한 말만 듣고 세계적인 꿈을 가진다는 것, 세계적인 사명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미친 사람의 헛 수작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그 소리가 너무나 믿고 싶나이다.
현실로 나타난 그 빛나는 꿈들
1970년대 초에 산골에서 이 글을 쓰면서 사방으로 한국에 대한 꿈의 재료를 수집하면서, 그리고 쥐어짜듯이 그러한 미약한 자료들을 기초로 해서 한국의 세계적인 사명을 그려내면서도 너무나 억지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못 사는 나라,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못해 군인들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유신(維新) 치하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는 나라가 무슨 세계적인 사명을 운운할 수가 있는가.’라는 민족적인 열등감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두운 현실일수록 거기에서 탈피하고 싶은 갈망으로 더욱더 크고 아름다운 꿈을 그리고 싶었다.
그 당시 아직도 그 산골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비포장도로인 상태요,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또한 하루에 버스도 몇 차례뿐이 다니지 않아서 장날이면 대만원을 이루어 읍내까지의 10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당시는 한국의 대부분 지역이 이와 같이 문화와는 먼 지역이었다.
그렇게 가난이 몸에 이처럼 득실거리던 그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거대한 꿈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허망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빛나는 꿈들은 내 서재에 먼지를 쓴 채 걸려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낡아지고 작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70년대와 저 80년대의 정치적으로 암울하기 짝이 없던 긴 터널을 지나 90년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 그러한 구름을 잡는 것처럼 보이던 빛나는 꿈들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기독교인이 1,200만으로 부흥된 한국교회, 경제적으로 세계 11위로 잘사는 나라, 마침내 장기 군사정권을 청산하고 문민정부와 지방 자치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 올림픽 개최 후 세계 10위권으로 진입한 스포츠 강국이 된 나라요, 선진국 진입에 필수조건인 OECD에 가입한 나라,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될 나라로 세계 앞에 우뚝 서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세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적이라고 경탄하고 있다.
그렇다. 한국의 이러한 현실은 어느 정치가나 어느 경제인들이나 어느 목회자가 이룩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기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한국에게 세계 선교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이루어 주시는 은혜의 기적인 것이다.
일찍이 세계 선교사명의 촛대를 받았던 국가들은 모두가 부강국이라는 은혜를 하늘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로마가 그랬고, 독일이 그랬다. 영국이 한참 선교의 열을 올리던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영국교회가 미치지 않은 선교 지역이 거의 없을 만큼 광범위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선교사만도 대단히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이가 인도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 아프리카 선교의 리빙스턴, 중국 선교의 로버트 모리슨 등 헤아릴 수 없다. 영국교회가 이처럼 선교 열정으로 불타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 나라를 부강의 오름세를 계속 타게 만드셨다.
폴 케네디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보면 1860년경 영국은 세계 철강생산의 53%, 석탄생산 50%를 차지하고 있었고, 세계 원면생산량의 절반을 약간 못 미치는 양을 소비했으며, 세계 무역의 5분지 1을 차지했는데 특히 제품무역의 5분지 2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하며, 또한 세계상선(商船)의 3분지 1이상이 영국 국적선(國籍船)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이 후에는 선교보다는 식민지 확장에 열중하기 시작할 때는 그 화려하던 전성기에서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다음 20세기 초반에 선교 촛대를 물려받은 미국이 교회 부흥에 발맞추어 점점 선교 열정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 갔는데 마침내 1973년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59개국에 파송된 선교사의 수의 75%가 미국 선교사일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교회가 이처럼 선교 열정이 불탈 때에 하나님은 똑같이 미국에게 부강을 주셨다.
위에 소개한 폴 케네디의 저서에 의하면 미국은 2차 대전 이후에 전무후무한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는데 전쟁 종결 당시, 세계 금보유의 3분지 2를 차지했고, 세계 수출의 3분지 1을 차지함으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에 미국이 군사력 확장에 몰두하고 월남전이나 걸프전과 같이 자기 군사력을 과시하기 급급할 뿐, 선교비를 축소함으로 세계 처처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속속 귀국하는 사태가 속출할 때 미국의 교회당들은 비어지기 시작하고 미국의 경제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될 정도로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 선교사명의 촛대는 한국에 와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의 중심부는 지중해 중심에서 대서양 중심으로, 대서양 중심에서 지금은 태평양 지역으로 옮겨와 있다. 마찬가지로 선교주역의 촛대로 그 흐름을 따라 지금은 아시아권으로 옮겨와 있다. 지금 그 선교의 주역이 한국교회 임에 대해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의 시대는 동양 3국이 주도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최고 알부자인 일본, 세계 인구의 4분지 1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가장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나라인 한국, 바로 이 나라들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재력(財力), 중국의 인력(人力), 한국의 영력(靈力)이 이 세 지역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다.
<미래 세계는 동아시아의 나라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미래학자들의 지배적 견해이다. 토플러는 더 구체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이 미래 세계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지중해 중심의 세계 시대는 유럽이, 대서양 중심의 세계 시대는 미국이, 그리고 태평양 시대에는 동북아시아가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것이다.> (이성희:「미래 사회와 한국 교회」301페이지)
<더구나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나라는 중국, 일본과 한국인데 한국은 이 두 나라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인구 대국인 중국과 경제 대국인 일본에 세계가 그 시선을 집중하고 있지만 한국은 신앙 대국으로서 미래 세계에 한국이 중심이 되고> (上書 303 페이지)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을 바탕으로 해서 세계 선교열정으로 계속 불타올라야 한다. 감사한 것은 지금 한국교회가 열심히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선교사 파송에 대한 열심에 불타고 있음은 대단히 보람된 일이다. 「월간조선」지 1995년 신년호 부록에서는 「새누리신문」 백중현 기자가 쓴 글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선교사가 119개국에서 3,200명이 활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계 선교국가 중에 제4위가 되며 선교사의 81.8%가 교포가 아닌 현지인을 향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 교회가 선교에 대한 열심이 점증(漸增)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았으나 이러한 통계를 보면서 ‘어느새 한국교회가 이만큼 세계 앞에 우뚝 서 있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나님은 선교에 불타고 있는 한국에 점점 부강을 허락하고 계신다. 1962년 1인당 국민소득이 87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이 지금은 GNP 1만 달러, 수출량이 세계 11위, 철강과 자동차 생산량이 6위, 선박 생산고 1위를 차지하고 외환 보유액 14위, 세계 8위의 출판대국으로 급성장함으로 이제 선진국의 커트라인인 10위권 진입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또한 한국 경제에 대한 전문기관들의 전망도 밝다. 스위스 유니온 뱅크는 한국은 서기 2008년에 1인당 소득 면에서 미국을 따라 잡고 2010년에는 일본도 따라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고, 세계은행은 한국이 서기 2020년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제치고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독일 다음 가는 세계 7대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한 전망들을 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여하튼 쓰레기통이라고 비웃던 그들의 입에서 이런 화려한 예견을 말해 준다는 것만도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의 시련의 밤들은 지나가고 사명의 새벽이 밝아 오고 있다. 수 천 년 동안 인고(忍苦)의 세월 동안 때를 기다리던 우리에게 사명의 지팡이를 높이 들 날이 다가오고 있다. 스스로 만든 물질문명에 매이고 스스로 만든 폭탄 앞에 떨고 있고 스스로 만든 이즘(ism) 때문에 신음하는 세계를 향해 ‘너 한국아, 지팡이를 들고 일어서라.’라고 하늘은 명령하고 계시다.
어서 서둘러라.
세계의 신음 소리가 너무나 위태롭구나.
어서 속히 새로운 세기가 오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교회가 통일되어야 한다. 교파가 있어도 좋다. 교리는 다소 차이가 있어도 좋다. 그러나 민족을 위한 사명, 세계를 향한 사명을 하고자 함에는 너나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서야 한다.
두 번째, 선교의 창구가 이제는 협력적이 되어야 한다. 많은 교회들, 많은 교단들이 제가끔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바람에 선교지 난립과 소영웅주의로 인해 지나친 경쟁, 그리고 자질 없는 선교사 파송으로 선교 현지에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니 된다. 이제 본격적인 선교의 봄을 맞은 한국교회는 개교회와 개교단을 초월하여 세계 선교를 위한 협의회와 훈련기관을 시급히 구성하여야 한다.
세 번째,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분단된 50년 사이에 이렇게 서로가 달라질 수가 있는가. 남한은 병든 자본주의에 의해 개인주의와 과소비, 사치, 음란으로 병들대로 병들고, 북한은 역사의 쓰레기로 전락된 공산주의를 추종한 결과 전쟁광(狂)과 극빈과 기아로 지칠 대로 지치고 있지 않은가. ‘오, 주여. 이제는 이 백성을 광야의 연단에서 벗어나 통일의 가나안 복지에 이르게 하옵소서. 저 증오의 철조망을 걷어 버리고 통일의 열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면 홍해가 열리듯 통일의 날은 열리리라.
그리하여 얍복강 가에서 야곱과 에서가 만나서 화해의 포옹을 했듯이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날이 오도록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통일이 되는 날, 일찍이 기독교 열기로 가득 찼던 동방의 예루살렘인 북한 땅에 다시금 기독교 문화의 꽃을 피워야 하리. 저 이리들이 들끓던 평양을 세계 복음 선교 센터로 만들어야 하리. 그 날을 생각하면 가슴의 뛰놂이 어찌 이리 심한고.
2008년 03월 01일 (토) 김태복 목사
출처: 크리스천웹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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