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없는 주일예배 김택규교수 petertk28@gmail.com #1. 설교의 ‘위기’ 시대 미 UMC의 유명한 예배학자 제임스 화잇(Dr. James White)교수는 그의 ‘예배의 새 형태’라는 책에서, ‘오늘날은 설교의 위기 시대’ 라고 진단했다. 설교는 2천 년간 내려온 가장 오래된 교회의 ‘전달’ 방식이다. 오래전 시절,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대체로 낮고, 또 ‘매쓰 미디어’ 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교회가 선포하는 설교나 ‘구두’(口頭 oral) 가르침은 대단히 ‘파워’가 있었고 사람들을 어떤 ‘길’로 인도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며, 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현대에는 너무나 많은 온갖 ‘전달수단’이 발달되어 있고, 개교회 강단에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도 여러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더 ‘좋은’ ‘유익한’ 말씀이나 정보들을 얻을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전달방법’으로 ‘설교’의 효용가치는 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한데 교회가 여전히 ‘구두(口頭,oral)적 방법인 ‘설교’라는 옛날방식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점점 설교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충고나 유익한 말을 하면 ‘나에게 설교하지 마!’ (Don't preach to me!)라고 한다. 설교를 일종의 충고나 ‘잔소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오늘날 설교자들은 점점 설교 시간을 짧게 해 보려고 노력한다. ‘15분정도면 좋다’는 얘기도 한다. 어떤 교회는, 교회 강단에 ‘설교단’(pulpit)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할수 있는 첨단 장치를 마련하였다.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러 나오면 자동적으로 설교단이 올라온다. 15분의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설교단이 내려가 더 이상 설교를 할수없게 했다. 과연 그런 장치라도 해야 할까? 사람의 ‘듣는’ 집중력은 15분 정도라고 하는데, 1시간 정도 설교를 하는 분도 많아서 청중으로 하여금 퍽 피곤하게 만든다. 대안의 방법으로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 중에 간단한 ‘토막극‘을 넣거나(쌔들백 교회의 릭 워런 목사가 애용하는 방법이다.) 혹은 스크린에 영상물을 올리는 밥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이제 현대인에게 단순한 ’구두‘(oral)적 설교 방식은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목사님들 중에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혹 지적(知的) 수준이 낮거나, ‘자료’를 정확하게 수집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인지, 설교중에 사실과 다른 말, 역사적으로 틀린 말, 변조된 예화, 억지 부리는 말, 자기 아류의 주장, 어떤 때는 ‘엉터리’같은 엉뚱한 말로 큰소리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다. 오늘날의 회중은 지적 수준이 대체로 높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설교는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대단히 듣기에 불편할 것이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고 하면서, 어떤 때는 ‘시사 강연’ ‘사상 강좌’ ‘철학 강의’ ‘기타 연설’을 하는 분도 있고, ‘잡담’ ‘개그’ 같은 저질 토크를 하는 분도 혹 있다. 전혀 감동이 없는 설교, 영성이 없는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보다 귓청을 더 어지럽힌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때, 잘못한 것 중에 하나가, 예배‘에서 ’성례전적‘(sacramental) 중심’을 깨트려 버린 것이다. 대신 예배에서 ‘설교’를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캐톨릭과 달리 개신교 예배는 ‘설교’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가 되었다. 자연히 개신교회에는 ‘설교 잘하는 목사’ 와 ‘설교 못하는 목사’간에 차이가 생길수밖에 없게 되는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혜성같이 나타나 설교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한다. TV 방송에서도 그의 설교 시청자는 나날이 늘어 간다. 언론 매체에서는 그를 ‘설교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스타 목사’가 되어 사방에서 ‘집회 강사’로 모셔 간다. 자연히 사람들이 몰려들어 교회도 크게 부흥된다. 그런데 반면 설교가 정말 형편없는 목사님이 있다. 그 교회의 형편은 어떨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물론 교회 부흥이 꼭 설교 잘하는 것에만 관계된것은 아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자기가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주일날 교인들이 자기 설교에 모두 아멘하며 은혜받는줄 생각한다. 그러나 목사들의 부도덕, 비리, 부정 등이 너무 많이 노출된 세상이라, 사람들이 목사를 향해 ‘너나 잘하세요!’라고 한다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목사가 많다. 그것은 잘못된 태도다. 루터는 성경말씀도 ‘지푸라기(bits of straw)가 섞여있다’고 말했다. 하물며 설교에 ‘지푸라기’가 없을 수 없다. 한데 온통 ‘지푸라기’투성이의 설교를 하는 분도 있으니 문제다. 목사는 높은 ‘강단’(pulpit)에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던저주는, 일종의 (갑)의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평신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질문을 할수도 없고, 이의를 제기할수도 없는, 오로지 듣기만 해야하는, 일종의 ‘을’의 입장이다. 목사들은 이런 ‘을’의 입장에서 설교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현시대에 개신교 예배에서의 ‘설교’ 에 대한 문제를 얘기하자면 한두가지가 아닐것이므로 이만 줄인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설교없는 예배’를 생각해 보았는가? 아마 많은 목사님이나 평신도들 가운데는 ‘설교가 없는 주일예배는 있을수 없다. 설교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다’그렇게 말할 분도 있을것이다. 한데 종교개혁 이전 교회와 개혁 이후의 교회 예배 형식을 비교해보라. 종교개혁 이전 시대에는 교회 예배의 중심이 ‘성찬’이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부터 내려오던 전통이었다. 예배에서의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매주일 재현되며, 속죄의 은혜를 받았다. 따라서 ‘성찬’ 없는 주일예배는 있을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지금 개신교예배에서는 대부분 매주일 ‘성찬’없이 주일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예배 형식 즉 16세기 때의 인류 사회 환경이 필요해서 시작되어 500년간 내려온 즉 교회의 설교 중심 예배도 얼마든지 바뀌어질수 있는것 아닐까? 개혁자들이 설교를 개신교 예배의 중심에 놓은것은 그 시대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오직 사제들의 독점물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말씀’을 가질수도 없었고, 가까이 할수도 없었다. 사제들이 던저주는 ‘빵부스러기’나 얻어먹었다. 말씀의 ‘기근’이었다. 모두 말씀에 기갈들려 있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말씀의 둑을 허물었다. 그리고 말씀을 예배의 중심에 올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말씀의 홍수’ 시대다. 현대는 ‘설교 범람’ 홍수시대다. TV, 인터넷, DVD, 책, 인쇄물 등, 각종의 매체들을 통해서 유명, 무명 목사님들의 설교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게 너무 많으면 부작용이나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물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너무 많아지면 ‘홍수’의 피해가 난다. 다음편에서 계속합니다. 이 시대는 이런 설교의 홍수를 조절할 필요가 있는 때가 되었다. ‘설교없는 예배’, 대신 신령과 진정의 ‘영성’(SPIRITUALITY)이 충만한 예배 형식으로, ‘파래다임’을 바꾸는 시도를 해 볼 필요가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필자는 S.M.U.의 , James White 교수 아래서, 예배학을 주로 공부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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