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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멜기세덱 프로젝트

수호천사1 2013. 1. 10. 20:07

멜기세덱 프로젝트

 

욕단 계열의 역사속 실존인물인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할

한 이방 제사장 민족의 모형

 

유석근 목사

(알이랑코리아 대표, 알이랑교회 담임)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격퇴한 후에 멜기세덱을 만나 그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멜기세덱은 살렘(아마 예루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부순 것도 역사적인 사건이고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 역사적인 사건 속에 나온 멜기세덱은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멜기세덱에 대한 히브리서의 기사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7:3). 실제의 인물 중에 부모와 족보가 없는 사람, 시작도 끝도 없는 인물이 있는가?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과 달리 독특한 멜기세덱형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히 5:10, 시 110:4). ‘세덱’은 ‘의’를 뜻하고 멜기세덱은 ‘의의 왕’을 뜻한다.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다. 멜기세덱은 성경에 부모와 족보가 언급되지 않았다. ‘의의 왕’ ‘평화의 왕’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이 없이 영원한 제사장’ ‘아브람을 축복한 대제사장’. 이런 면에서 멜기세덱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예표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히브리서가 멜기세덱에게 부모와 족보와 시작과 끝이 없다고 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기록상 없다는 것이다(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렇게 해석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의 기록상 그런 것이 없는 점을 들어서 멜기세덱이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취하여 그가 삼위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으로 계신 분이 성육하시기 전에 나타나신 분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의 기원에 초점을 맞춘 책인 창세기에 멜기세덱이 등장하였고, 그것도 그의 족보를 추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뿐이다.

 

  멜기세덱이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구원 역사에 등장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처럼’이라고 제시한 것은 적절하였다. 멜기세댁은 그의 특이한 모습으로 인해 영원한 제사장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멜기세덱은 당대에 개인적으로 경건한 인물로서도 독특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미신과 온갖 부패로 가득 찬 나라에서 하느님만을 순전하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가까이 있었고, 다른 편으로는 가나안 사람들 가까이 있어 그는 온통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이처럼 칼빈도 멜기세덱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해석했다.

 

  그렇다. 시날 왕 아므라벨(창14:1)과 소돔 왕 베라(창 14:2)가 아브라함 당시의 역사적 인물이었던 것처럼 멜기세덱도 그들과 동시대의 살렘 왕이었던 역사 속의 실재인물이다(창 14:18). 주석가 벵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분명히 당시 한 왕이었고, 제사장이었고, 정말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란 뜻이다. 멜기세덱은 일찍이 등장하였던 압제하는 왕들(cf. 창 10:8~12)과는 달리 의의 왕이었다. 멜기세덱의 두 번째 명칭은 ‘평강의 왕’이다. 이는 멜기세덱이 통치하였던 도시 또는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 도시는 궁극적으로 ‘평강의 도시 또는 기초’라는 의미를 지닌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가 통치한 장소는 평강으로 복을 받았다.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믿음이 있고 경건한 왕이었으며,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 평강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구원 역사에 있어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구원자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아주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이처럼 멜기세덱은 역사적으로 실존한 사람이었다. 아브람 당시에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것 같다. 멜기세덱은 우리 조상 단군처럼 왕이면서 제사장이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부수고 돌아온 아브람을 만났고 아브람을 축복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 아브람이 가공의 인물을 만나 가공의 인물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다. 아브람은 실제의 인물을 만나 실제의 인물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멜기세덱이 실제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느니라”(히 7:1,2,14).

 

 

  여기서 독자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멜기세덱이 어떻게 선민 아브라함 당시 하느님의 제사장이었는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계열 외에 다른 인물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받으셨는가? 그렇다. 욥과 그의 네 친구는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 당시 아라비아 북부 지방에서 하느님을 섬긴 자들로 알려져 있다. 욥이 살던 ‘우스’ 땅이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개 학자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북부 지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욥은 누구일까? 이 ‘욥’은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의 ‘새벌’(스발)로 천동하여 배달나라를 세운 욕단의 막내아들 ‘요밥’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창 10:21~30). 왜냐하면 홍수 생존자들이 서부 시날 평지에 집결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느님을 반역할 때, 바벨탑 건설에 가담하지 않고자 알이랑 정신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동방의 새 땅으로 천동한 단 하나의 제천민족이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욕단 족속은 그 시대의 ‘남은 자(remnant)’였다(게시판 “또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에 들어가셔서 1~3번 글을 일독하십시오).

 

  욕단의 자손을 제외한 전인류는 바벨탑 건설에 가담했던 배역자들의 후손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하느님을 경외하던 ‘욥’은 욕단의 아들 ‘요밥’이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신숭배가 만연하던 그 당시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족속은 오직 '알이랑' 민족인 욕단의 후손뿐이었기에!(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조차도 우상숭배자였고,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는 다신숭배자였다). 이 ‘요밥’이 동방으로 왔다가 서쪽으로 역이동해서 ‘우스’ 땅에 정착해 알이랑 정신, 곧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타당한 것이다. 

 

 

 

씨름하는 사람 청동상- 두 남자가 머리에 단지를 이고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 BC 2400년경의 수메르 유물. 상대의 샅바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라. 우리 겨레 고유의 씨름과 똑같은 형태이다. 바그다드의 동쪽 하파자(khafajah)의 닌투 신전에서 출토되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 소장. 수메르인은 우리처럼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형태의 씨름을 했으며, 고구려, 가야, 신라 등에서 쓰인 회도를 사용했다. 또한 파미르 고원이 원산지인 파를 즐겨 먹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인과 수메르인이 같은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으로 이동했던 우리 한국인의 형제 족속들로서, 바이칼호(天海)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다시 역이동해 중앙아시아(실크로드)를 거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들어가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인 S. N. Krammer 박사는 수메르인은 동방에서 왔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도 셈족으로서 서쪽으로 역이동해 ‘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던 욕단의 후손 중 한 분이었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했듯이 고대에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은 바벨탑 건설에 가담하지 않고 동방으로 천동했던 욕단 족속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멜기세덱은 동방의 의인인 욥의 후손일 개연성이 크다. 

 

  욥기 42:13~14에 보면 욥은 말년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는데, 이상하게도 세 딸들의 이름은 전부 기록되어 있으나, 일곱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록돼 있지를 않다. 왜일까? 여러분은 이 문제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욥의 일곱 아들들 가운데 멜기세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역사적 인물 멜기세덱은 장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기자들에 의해 아비도 어미도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예수님의 ‘모형’과 ‘예표’로서 기록될 위대한 사람이었다(시 110:4; 히 7:1~25). 따라서 성령께서는 욥기의 기자로 하여금 ‘모형’(멜기세덱)과 ‘원형’(예수), ‘예표’(멜기세덱)와 ‘실체’(예수)가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멜기세덱의 아비와 족보를 감추고자 의도적으로 욥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게 했다고 해석된다.

 

  바로 이것이 욥의 세 딸들의 이름은 모두 명시되어 있으나 일곱이나 되는 아들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은 이유이다. 그 밖에 다른 타당한 까닭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정의의 임금’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멜기세덱은 우리 겨레의 조상인 욕단 계열 천손민족의 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분으로서 아브라함 당시에 실존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인 멜기세덱이 유대인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한 일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원대한 하느님의 목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놀랍게도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선민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창 14:18).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런 왕 멜기세덱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람을 축복했다. 이방인(멜기세덱)이 유대인(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 기사는 오늘날 어떤 유대인의 마음에 몇 가지 어려움을 일으켰고 그들의 시기심을 자극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보다 탁월한 존재다. 어떻게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이 이방인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십분의 일만 아니라 노략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그에게 드리며 이방인에게 복종의 표현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신약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분이었으며, 심지어 그는 유대인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지위가 높고 영예로운 것처럼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히 7:4).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땅에서 그의 선물을 받을 만한 하느님의 대사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정말 그랬을까? 성경에서 이방인이 구약성경의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으로 제시될 수 있었을까? 물론 가능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방인(멜기세덱)이 유대인(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그런즉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이 기사를 읽을 때 시기심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서 축복을 받았을 때 그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멜기세덱보다 열등한 위치를 점하였다. 아브라함은 분명 멜기세덱보다도 더 부자였을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이을 구체적인 상속자였다. 하지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예배를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데 있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분명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보다도 탁월하다.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경건한 이방인 멜기세덱 사이의 관계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멜기세댁이 갖고 나온 떡과 포도주는 메시아 예수를 예표한다. 떡은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멜기세덱(이방인)은 피 묻은 ‘복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유대인)에게 나와 그를 축복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벌써 마지막 때에 욕단의 후손인 한국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져갈 것이라는 사실이 예표로서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사46:10~13, 41:25~27, 52:7, 55:1~9, 계7:1~8)이방인인 한국 백성이 장차 선민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제사장 민족이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진리를 아브라함을 축복한 하느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하여 이미 창세기 14장에서 모형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을 대표하고, 의의 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계열의 백성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그들에게 피 묻은 복음을 전할 특별한 한 이방 민족을 예시한다(롬 11:11~14). 그 거룩한 백성은 알이랑 민족 한국인이다. 한국인은 멜기세덱의 영적 후손이다. 충분히 그렇게 규정할 수 있다. 왜? 우리 겨레는 멜기세덱의 시대에 동방에서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던 욕단 계열의 천손민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멜기세덱 역시 우리 민족처럼 알이랑족 즉 에벨의 자손 욕단 계열의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시기케 할 한국 백성은 예루살렘까지 떡과 포도주, 곧 구원의 복음을 능히 가져가 성경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할 것이다(사46:10~13, 41:25~27, 52:7, 55:1~9, 계7:1~8)바로 이것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동방 코리아의 『멜기세덱 프로젝트』이다. 구속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지막 세기의 멜기세덱으로 부름받은 거룩한 백성 알이랑 민족이여, 나중에 쓰시려고  하느님이 동방에 감추어 두신 왕같은 멜기세덱의 흰 옷 입은 제사장들이여. 스스로를 자각하고 이제 일어나라!

 

 관련기사: < 하나님의 동풍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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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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