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기도에 대한 오해와 올바른 이해☆

수호천사1 2012. 12. 8. 16:30

 

 

☆기도에 대한 오해와 올바른 이해☆

(1)

이번 주부터 기도의 깊이를 위하여 기도에 대한 나눔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토대로 개인적 경험과 지식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짤막한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주변 사람과의 기도의 성향이 다른 것 때문에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왜 부르짖으면서 기도를 할까?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또는 남이 듣도록 기도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저 사람은 말도 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 졸음도 올 것이고,

또한 잡념이 잘 생길 텐데! 힘없는 기도로서 어떻게 귀신을 물리칠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에는 크게 두 가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나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분과 대화를 하기위해 만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만나기 위한 기도를 한다고 보아서도 안 됩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과 깊은 대화를 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묵상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해도 능력으로 문제가 풀어지기도 합니다.

저는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성령님에 의하여 예언과 비밀한 일들이 흘려 나올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부르짖는 기도를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조용히 기도를 할 때도 성령님께서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조용히 기도를 하면서 응답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는 소리 없이 기도를 한 사람이면서 또한 부르짖는 기도를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삼상1:13, 삼상2:1-10)

그러므로 기도가 능력이 있고 깊이 있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의 성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의나 자신의 생각의 기도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성향적인 주장을 내 세우는 것은 자신이 가진 성향안에서 기도의 어떤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만이 전부라면 하나님은 너무나 좁은 하나님입니다.

전능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적은 사고의 그릇안에서 만나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경험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묵상이나 명상의 기도를 할 때의 장점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면서 기도의 깊이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에 위험성도 있습니다.

이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 없이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 현상으로 기도의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잡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줄거리가 유연하거나 순조롭지 못하고, 생각지도 아니한 하루 일과 중에 있었던 부정적이고 정결치 못한 생각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맥이 잡히지 않고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마치게 됩니다.

또 다른 양상은 자신도 모르게 졸고 있으며, 그리고 자신이 기도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시간만 채울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심, 걱정의 일들이 생각나면서 정작 믿음의 기도보다 한탄과 원망과 정죄, 판단의 말만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소리가 없어도 눈물과 웃음과, 감사가 흘려 나오게 됩니다.

이 기도의 장점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가 친밀한 기도를 할 때 유익함이 많습니다.

친밀한 기도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흘려 나올 때가 많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이나 교회와 도시,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알려 주시기도 합니다.

성령님께서 알려 주시는 수준들이 있는데 이는 그 주님과의 친밀감의 정도나 사랑, 정결함과 경외감, 그리고 믿음으로 감당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행하십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 상황 가운데에서 도구로 쓰시고자 할 때 일어납니다. 이러한 기도의 경험을 하시려면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깊은 비밀의 응답을 얻고자 하려면,

먼저 깊은 중보기도 가운데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달라고 하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품을 때 흘려 나옵니다.

먼저 본인부터 하나님의 비밀을 열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 다음 타인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을 얻는 응답은 어떤(묵상이나 부르짖음) 기도의 방법에도 응답을 하십니다.

응답을 받게되면 더욱 겸손하시고 더욱 정결하시고,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정죄와 판단은 성령님을 근심시키게 되며 그 근심이 계속되거나 오래가면 안 됩니다.

정결과 거룩의 성령님은 아주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저도 영적인 관계의 기도를 할 때에는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관계의 기도란

나 자신의 연약함과 마음, 또는 영의 상태를 놓고 주님과 대화를 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주님의 관심을 두고 함께 대화의 기도를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즉 주님과 나와 관계의 주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소리를 내어 기도 할 때도 많습니다.

관계의 기도의 유익함은 허락이 되면 후에 따로 나누겠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장점은

기도를 방해하는 생각들의 처리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졸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과, 소리를 냄으로서 자신이 귀로도 듣게 됨으로 좀 더 분명하게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집중력이 높아서 빠르게 기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단점은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소리를 내어 기도한다는 이유 때문에 부르짖는 기도만이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로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에는 전투적인 기도를 하는데 유익하며,

특히 선포나 귀신을 향하여 꾸짖는 것에는 효과를 크게 나타냅니다.

즉 영적으로나 삶에서 다가오는 방해물을 향하여 대적할 때는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묵상의 기도에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환상이나 계시를 받기에 적합하고,

부르짖는 기도는 성령의 임재로 방언이나 치유, 축사를 하는데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고자 하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하면 쉽고,

환상을 보거나, 음성을 듣고자 하면 조용히 기도하면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기도를 하든지 기도의 성향을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양쪽 다 교만의 영이 지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나 지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더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기도가 주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기도가 전체적인 기도의 내용에 반대되는 것이나.

또는 개인의 기도가 어떤 개인에게나 전체에게 대적을 한다면 이는 방해를 받습니다.

방해의 일들이 일어나면 성령님은 먼저 방해의 장본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때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속에서도 계속적인 기도를 드릴 때가 있는데 이는 그의 연약함 때문에 그 기도의 장점을 고집하는 경우와,

또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발로이기도 합니다.

또는 그가 부르짖어야 하는 영적인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 할 수 없습니다.

방해를 느끼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중에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계시의 방법에 대한 것과 크게 나눈 두 가지의 기도의 뒤에 영적으로 흐르는 악한 영과 천사들의 도움에 관한 것은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기도는 사단에게 기도한다)

물론 기도의 제목이나 또는 기도 모임의 내용 따라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조용히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기도를 하다가 조용히 기도를 드릴 때가 있고, 조용히 기도하다가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겸손함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가진 문제 앞에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함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둘째,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없이는 어떤 일과 문제 앞에서 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지요.

연약한 자신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호소입니다.

셋째,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갈급함 때문에 기도 합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무거운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맛보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넷째는 그 분과 함께 있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더 가까이, 또는 그 분과 함께 함으로서 오는 영적, 정신적, 육적으로 하나 됨과 충족함과 친밀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사랑의 발견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더한 이유가 있습니다.

더한 이유를 경험하려면 깊이 있는 기도로 들어가야 합니다.

같은 기도를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께 향한 신뢰와 친밀한 관계의 정도에 따라

깊이에서 오는 응답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며, 응답에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8장 20-21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가지고 더 깊이 있게 나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시면서 중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이유는 알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중보로 통하여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은 니느웨성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요나처럼 전도자로 보내 달라고 구하지 못했습니다.

불순종하는 요나로 통하여 니느웨성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볼 때

아브라함이 구했다면 적어도 아브라함이 소돔성에서의 외침은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다 알지 못하여 적은 소득(롯과 그의 가족)만 얻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창세기 18장 32절의 말씀에는 의인 10명을 찾게 되면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이 10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구한 마지막 숫자입니다.

저의 믿음의 생각으로는 아브라함이 한명을 두고 구하였다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생각하시는 분입니다(렘29:11)

제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구하는 한사람을 찾았습니다(렘5:1).

이 한사람이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한사람의 기도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합의 우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고 우상숭배자들이 심판을 당하는 회개의 일이 있었습니다(왕상18:37-40).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니엘의 한 사람의 기도로 인하여 응답받고 자기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야곱,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상속권에 대한 갈망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낳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 한 사람의 순종과 믿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와 온 세상이 굶어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 왔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롬5:12-19).

그러므로 소돔에서도 한 사람이 눈물과 회개의 중보기도를 하였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과 친밀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긍휼에 한계를 긋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내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이삭이 성장 한 이후에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살았습니다.

긍휼의 한계를 그은 이유는 아브라함의 거절감입니다.

창세기18장에서의 아브라함은 계속되는 거절감이 두려웠고, 힘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에 대한 기대가 몇 번씩, 그리고 약 25년 동안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거절을 경험했습니다.

이 같은 경험의 아픔이 하나님의 긍휼을 더 구하는데 어려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거절의 경험속에서도 건강한 믿음이 있어서 10인까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한두 번 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창세기 19장 13절의 말씀에는 천사들이 롯에게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롯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롯은 중보를 하지도 않았고, 도시를 위하여 회개를 하지도 않고,

자신의 사위 될 사람에게만 소식을 전하고 도망하기에 바빴습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참고로 니느웨성의 회개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회개를 하였다기보다

한 사람의 통곡의 회개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회개가 되었읍니다.

이것이 니느웨성의 왕에게 알려져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니느웨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한사람의 회개가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에게 전파되고,

이러한 사실이 왕에게 보고되어 왕이 나라를 살리고자 회개의 결단을 내림으로서 니느웨는 살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삼일 길 되는 니느웨성을 하루만 외쳤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욘3:3-4)

롯은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롯의 기도에는 응답과 그 이유들이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기도를 하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다면 깊이 있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떤 기도 입니까?

깊이 있는 기도는 소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담대한 큰 소리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막7:26).

그러나 소리가 없어도 능력의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막5:28)

먼저 깊이가 있다는 개념부터 정리해 봅시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표면보다 그 속에 있는 깊은 속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깊은 우물이란 지면에서 흐르는 물로 만들어진 우물이 아니라

깊은 땅속에서 나오는 우물을 깊은 우물이라고 합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자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을 얻게 될 때, 깊은 물을 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깊이가 있다는 것은 기도의 대상자인 하나님께 나아가서 깊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장소적인 깊이가 있고, 비밀함이 드러나는 대화의 깊이가 있습니다.

먼저 장소적인 깊이에는 실재적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사6:1-4)가 하나님을 존전에서 뵙게 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열상19:9-21),

모세는 시내산(출33:17-23)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바울도 삼층층의 하늘을 다녀왔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막9:2-7)이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 즉 신적인 예수님인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4장)은 계시록에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전을 뵙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장소의 깊이가 있습니다.

장소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듣게 됩니다.

대화의 깊이는 개인적인 것과, 교회나 도시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열방을 향한 대화의 깊이가 있습니다.

비밀한 것들의 대화의 깊이를 경험한 평범한 사람들인 노아(창6:13), 아브라함(창18:16-21), 하갈(창16:10-12), 야곱(창28:11-15), 요셉(창37:6-9), 기드온(삿6장). 여호수아(수1:1-9), 등과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나 왕들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인 열방추수교회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이 깊이 있는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처럼 깊이 있는 기도에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깊은 친밀감이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얼마나 사랑하는 관계인가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경험하고 싶다면 자신이 주님과 얼마나 친한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친하다는 것에는 기본적인 7가지 기준을 제시해 봅니다.

첫째: 친한(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심지어 자신보다 더,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시간이 친밀한 관계의 척도입니다.

둘째: 친한(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과 많은 대화(기도)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그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대화의 시간이 친밀한 관계의 척도입니다.

셋째: 친한(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하는 비밀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누구에게 비밀을 먼저 나누는가? 입니다. 비밀을 다른 사람이 많이 알수록 친밀한 관계의 척도는 적어집니다. 비밀은 먼저 그분의 뜻 아래서 다른 사람에게 흘려가야 합니다.

넷째: 친한(사랑하는) 사람과는 여행도 합니다.

시간의 여행에서 그분과 얼마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정도에 따라 친밀감의 척도가 나타납니다.

다섯째: 친한(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 앞날을 계획합니다.

가장 먼저 누구와 함께 계획하느냐에 따라서 친밀감의 척도가 이루어집니다.

여섯째: 친한(사랑하는) 사람과는 불신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신뢰합니다.

모든 일에 그 분을 얼마큼 실재적으로 신뢰하는가에 따라 친밀감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친한(사랑하는) 사람과는 항상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장소, 모든 감정과 생각, 그리고 시간에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같이 산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시간이 얼마인가에 따라 친밀감의 척도가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환경과 고난, 감정과 지식 유혹과 욕심, 지위와 명예도 그리고 인간적 자존심도 이것을 빼앗아 가지 못할 때,

친밀한 관계의 깊이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만 지켜집니다.

2007년 12월 8일 토요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시봉 목사

기도에는 불신의 기도가 있고, 믿음의 기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어머니에게 부침게를 먹고 싶다고 청하였다고 합시다.

어머니는 지금은 재료가 없으니 네가 학교를 갔다 오면 어머니가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와가지고 해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아이는 어떤 행동을 합니까?

어머니를 신뢰하는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부침게를 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아이는 불안하여 신뢰가 형성 될 때까지 전화를 하게 되고,

재차 확인을 받고 난 후에도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에 따라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아이는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아이들이 “너의 어머니는 부침게 안 해준다”라는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친한 친구에게 방과 후에 부침게를 먹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집에도 가지전에 군침을 삼키며 친구를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불신의 기도와 믿음의 기도에는 기도 후에 우리의 행동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에는 약속을 받은 내용에 대한 기도와

약속을 받지 못한 기도에 대한 기도의 간구는 달라야 합니다.

사무엘 어머니인 한나는 자녀를 얻고 싶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얻지 못했을 때는 계속 기도를 하면서 아이를 달라고 간청 하였습니다. 약속을 받고 난 후에는

그는 기도를 하지 않고 찬양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얻고 나서 찬양과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응답을 받고 나서, 바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준비를 했겠지요. 기저귀와 아기 옷, 침대. 그리고 놀이기구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응답을 받고 난 후에는 간구를 멈추고 감사의 찬양을 하여야 합니다.

응답을 받기 전에는 계속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이러한 기본적인 요소(태도)가 있습니다.

만약 응답을 받고나서 응답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시간속에서 자신이 생각한 응답의 방법과 다르게 나타날 때,

불평과 원망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는 이러한 원망과 불평에는 역사가 일어 날 수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원망과 불평을 함으로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응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기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이 세상의 방식과 같았기에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응답을 받고 난 다음에는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루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을 받아도 여전히 환경과 여건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더 좋지 못한 조건으로 변합니다.

그래도 응답을 받은 성도는 믿음과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 보이는 장소까지 오는 동안

자신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여러 가지 악조건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이 보이는 그 앞까지 도착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응답을 취하는 순간까지 편한 일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난과 우울한 환경과, 어려움(세속적인 생각으로는 후회할 수 있는 일들)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응답을 받고나서의 원망과 낙심은 응답의 시기를 더욱 늦추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함으로 40년이나 응답이 늦추어졌습니다.(민14:1-34)

아브라함이 적어도 두 번 이상의 낙심(창15, 16장사건)을 함으로서 응답이 늦추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갖게 된 기간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말들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과 자신의 감정을 완전하게 정복하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연약함을 채우셨는데,

그 방법은 그들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17:5)(이전의 이름은 아브람 )

사라의 이름의 뜻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창17:16)(이전의 이름은 사래 이는 “공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의 연약한 점을 이기는 방법으로는

이들이 믿음의 말을 할 수 있도록 이름을 바꾸어 매일 부르게 하였습니다.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하나님의 복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하고 약속을 하여도 정작 본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응답을 가질 수 없기에 취해진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면 원망과 불평, 부정적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말들을 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8장 5절에서 7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 말씀처럼 육신은 불신에 의해 불평과 원망을 따르는 것이고, 영은 믿음의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7절 말씀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도 그 응답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의 해석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와 기적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녀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린 생물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가능성은 하갈이 이스라엘을 낳은 얼마 뒤부터 가능성은 없었다. 왜냐면 하갈이 또 자녀를 낳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 유일한 흔적이고 사랑이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만나기 위하여 하갈의 장막에 자주 갔다고 본다. 하갈의 교만은 아브라함의 방문에서이다.=

만약, 자녀에 대한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이유만 있다면 98세도 임신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약13-14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의 힘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은 후, 약 10년 동안(창16:3.16절)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였고,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함으로 자신의 시간속에 응답이 없음으로 낙심도 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14년 동안 지켜보고 나서 자녀를 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14년을 지켜보았는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을 사용한 불신과 낙심의 전체기간인 10년과,

첫 불신의 기간인 약 4년의 기간을 지켜봄으로서 아브라함이 가진 자신의 힘과 불신을 살펴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또는, 숫자적 의미로 본다면 완전수 7을 두 번 지났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완전한가를 두 번 확인 한 셈이 된다. 한번은 약속에 대한 신뢰의 완전함이고, 한번은 아브라함의 불신을 회복하는 완전함이라고 본다.)

이 기간은 은혜로 줄인 것입니다.

심은데로 거두는 법칙에는 더 많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호세아8장 7절에는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것이라...”라는 말씀이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였을 때, 그들은 40일을 40년 동안 응답이 늦추어졌다.

이스라엘을 대표한 율법사와 지도자들이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지금도 그들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신의 기도와 믿음의 기도의 측량은

기도 후에 우리의 태도와 믿음의 말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열방추수교회 모든 성도는 불신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를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08년 1월 19일. 토요일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시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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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숲속 옹달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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