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역사
서론
신학이라는 개념: 간략한 서론
신학(theolgy)이라는 용어는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두 헬라어로 간단히 구분된다. 따라서 신학은 “신에 관한 말” 이다. “신학” 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나 초기 교부시대에 종종 기독교 신앙의 특정 측면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2세기 후반에 활약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기독교의 ‘데올리기아(theologia)'를 이교도 작가의 ’뮈톨로기아(mytholgia)'에 맞세우면서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도의 진리청원”으로 “신학”을 명료하게 이해했다.
초기의 기독교 작가들의 과제 중 하나는 종교시장에 즐비한 다른 신들과 기독교의 신을 구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은 오직 하나요, 이 신이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시된다는 가정은 널리 파급되어 유럽의 중세 초기에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신학은 하나님의 본성과 섭리와 사역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처음에 서유럽에서 기독교 연구는 대성당과 수도원에 부설된 학교에 쏠렸다. 일반적으로 신학은 신천적인 것들, 곧 이론적 주제보다는 기도와 영성에 관한 것들과 관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용어를 일반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인정되는 저서가 13세기에 등장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신학대전
종교개혁 시대에 마르틴 루터 같은 저술가는 신학의 실천적인 측면을 재발견하려 했다. 1559년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 관심과 연관시키는 전통은 수많은 프로데스탄트 신학교와 대학 안에 지속된다. 18세기 계몽시대의 발흥으로 특히 독일에서 대학 내의 신학의 위상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계몽작가들은 학술적 논구는 그 어떤 외부 권위의 사슬에서도 자유로워야 할 것을 주장했다. 신학은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세속주의를 강하게 채택한 국가에서는 기독교 신학이 사실상 대학 정규과정에서 축출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모든 단계의 공공교육에서 기독교 신학을 제거하는 일련의 조처가 취해졌다.
그러나 서구에서, 특히 북미에서 더 편만해진 것은 세속적 접근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접근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육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종교연구의 한 측면으로서 일뿐이다. 지난 십 년 동안 북미에서는 신학의 바른 기능에 대한 논쟁이 새로이 재개되었다. 이 논쟁은 에드워드 팔 리가 1983년 출판한 책『신학: 신학교육의 분열과 통일 theologia: The Fragmentation and unith of Theolgical Educatioa』로 촉발되었다. 신학은 (상호) 무관한 이론적. 실천적 학과목들의 수집체로 분해되었고 결속체라는 의미를 상실했다. 신학은 더 이상 통일적 학과목이 아니다.
신학의 구성
위대한 중세철학 연구가 에띠엔느 질송은 스콜라 철학의장대한 체계를 “생각의 대성당(cathedrals of the mind)"으로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힘찬 이미지인데, 곧 항구성, 견고성, 조직화, 구조 등 당대의 저술가들에게 높이 평가된 특성들을 암시한다.
성경연구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 소재는 성경이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 안에 있는 기독교의 역사적 토대를 증거한다. 흔히 지적하듯이 기독교는 경문(성경)에 대한 신앙보다는 한 인물(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신약에서 배우는 것 이외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실상 아는 것이 전무하다. 그 결과 기독교 신학은 내적으로 성경해석과 비평학과 관련을 맺게 된다. 신학에 있어서 성경연구의 중요성은 쉽게 드러난다. 1500년대 초기에 발흥한 인문주위자의 성경에 관한 노작은 성경의 현존 라틴역에 일군의 번역상 오류를 드러냈다. 16세게 종교개혁은 신학을 경전과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 곧 신학이 경전과 주목할 만한 편치를 보인 후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용어 “systematic Theology"는 ”신학의 체계적 조직화(the systematic organization of theology)"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systematic(조직적, 체계적)”이란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가? 첫째, 이 용어는 “교육적, 혹은 관념적 관심사라는 토대 위에 조직된 것” 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둘째, 이 용어는 “방법에 관한 전제라는 토대 위에 조직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신학의 고전기에 신학적 주제는 대체로 사도신경 혹 니케아 신조가 제시한 대로 하나님 교리로 시작해 종말론으로 끝나는 순서로 체계화되었다. 서구 신학의 첫 번째 신학교본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사명제집 Four Books of the sentnces」으로서 12세기경, 대략 1155-1158년 어간 파리 대학에서 편찬되었다. 이 명제들을 언급하는 것은 중세 신학자들에게는 규범적 관행이 되었다. 아퀴나스나 보나벤트라, 둔스 스코트스 등이 그들인데, 그 중 한 세기 후에 나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전체 기독교 신학을 롬바르두스가 채택한 것과 유사한 원칙을 채용하면서 세 부분으로 개괄했으나 철학적 질문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문제) 교부들의 저서 속에 나오는 상이한 견해를 조정하는데 큰 비중으로 두었다.
종교개혁 시대엔 두 가지 상이한 모델이 제시되었다. 루터 교회의 입장에서 필립 멜랑히톤은 1521년에『문구/일사어 Loci Communes』를 편찬했는데 기독교 신학의 주요 측면을 주제별로 배열, 개괄한 책이다. 장 칼뱅의『기독교 강요』는 프로데스탄트 신학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널리 간주되었는데, 첫 판은 1536년에, 결정판은 1559년에 나왔다. 현대에 들어서 방법론은 휠씬 더 중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서설(Prolegomena)"이 현안이 되었다.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
신학은 그 자체로 지적인 학과로서 역사의 여명기부터 인간을 자극했던 수많은 질문과 관계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무엇과 같은가? 이런 질문은 기독교 공동체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기독교의 논의는 서구 철학전통 재부의 논의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양자간 공통적 토대가 있는가?
이러한 작업 과정 중 우리는 철학적 고찰이 기독교 신학에 끼쳤던 주목할 만한 영향의 진원지를 탐구할 것이다. 실례로서 그리스 고전철학에서 받은 현저한 영향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교부들의 분석,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의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역사발전에 관한 헤겔적 이해를 도입한 D.F. 슈트라우스 같은 19세기 기독론, 루돌프 불트만이 발전시킨 실존주의적 기독론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기독교 신학 내부에는 신학에 세속철학을 도입하려는 시도에 극렬한 반대하는 경향도 존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세기 때 테르툴리아누스가 질문한 바 있다: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목회신학(Pastoral Theology)
기독교가 대학의 신학분과나 종교학부 때문에 범세계적 신앙으로서의 현재의 위상을 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과장할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는 강력한 목회영역이 존재하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학술적 논의에 충분하게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청교도주의는 양자가 상호 불가결적임을 확신하면서 목회적 적용가능성 옆에 신학적 온전성을 배치하는 운동의 탁월한 일례이다.
교회사(Church History)
기독교 역사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 특히 그 제도적 요소를 이해하는 것은 신학이라는 학과의 필수적 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정 기독교 전통 안에서 사역하기를 원하거나, 자기가 속한 전통으로 더 깊이 이해하려는 학도는 그 전통의 역사가 아주 중요함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사의 많은 과정에는 역사 신학적 요소가 포함된다.
교회사가 이렇게 역사신학의 관심사와 교차되는 것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교회사는 자체로(독립)학과로 간주해야 마땅하다. 발레리우스의 관용 칙령(311년 4월)은 교회사에 아주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로마 제국 내의 합법적인 종교 중 하나로 기독교를 인정했고, 양적 성장과제도적 발전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교회사는 제도(교황권, 감독제도, 형제단 등)와 운동(감리교운동, 오순절운동, 카타르파 운동등)의 출현을 연구한다, 기독교는 역사의 흐름 안에 속해 있고, 교회사는 기독교의 사상, 개인, 제도의 고유한 위상을 그 역사와 흐름 속에 탐구하려는 것이다.
역사신학: 목표와 위치
역사신학은 기독교 교리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하교, 교리 형성에 영향을 끼쳤던 요인들을 확인하려는 신학적 탐구의 한 부문이다. 교회사는 역사신학에서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회사는 기독교 신학이라는 측면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교회의 역사 안에서의 요인들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의 역사적 발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현대적 재해석에 있어서 핵심에 속한다
역사신학의 발전
대체로 역사신학의 기원은 16세기라는 데 동의한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본성의 관한 투철한 논쟁을 증언하는 바 여기서 프로테스탄트 개혁과 가톨릭 개혁 양자와 초기 교회 사이의 연속성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역사신학은 18세기 여간 독일어 Dogmengeschichte로 알려진 교리사 운동의 발흥과 더불어 더 큰 발전을 보게되었다.
F. C 바우어와 A. B. 리츨 등이 확장한 이 기획의 정점은 아돌프 폰 하르낙의 저서였다. 『교리사 History Dogma』(영문번역은 일곱 권으로 구성됨)에서 하르낙은 교의는 그 자체로 기독교적 개념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르낙은 성육신의 교리야말로 헬레니즘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중 가장 명료한 형태로 간주했고 역사적 분석으로써 그것(성육신교리)을 제거할 길이 열렸다고 주장했다. 하르낙에게 있어서 복음은 예수 자신에 관한 것이었고 그가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비록 복음의 “헬라화”에 대해 하르낙이 강조한 것은 이제 과도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가 전개한 일반적 원칙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역사신학에 대한 하르낙의 각별한 관심은 교리의 교정과 제거를 위한 수단을 역사가 제공한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교육학 도구로서의 역사신학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도 중 다수가 이 매력있는 학과의 사회적. 경제적. 제도적 측면에 집중하다가 사상적 측면을 등한시한다. 역사신학은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요자원이 되며, 교회사의 고비마다 교회에 영향을 끼친 사상들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역사신학이 단지 과거의 이해를 돕는 것만은 아니다. 신학을 위한 자원이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과거의 신학에 대한 책임감을 현대의 신학에 대해서만큼 느끼지 않고서는 교회 안에 머무를 수 없다.” 이렇게 역사신학은 현대의 신학적 진술에 본질적인 교육적 자원이 된다.
비판적 도구로서의 역사신학
기독교가 문화적 배경에서 사상이나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기도 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인 것 같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 내에 잠정적이거나 상황 의존적 요소가 존재하며. 그 요소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자원에 불가결한 것으로 요구되지도, 내포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신학의 정태적 관점을 바로잡는 강력한 교정물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교부시대)의 저술가들은 이 질문에 부정적 경향을 보였다. 대략 1945년 이후 “신정통” 경향의 답변은 긍정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현안에 대한 교부들의 논의는 하나님은 완전하다는 관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완전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완전하다는 것은 불변, 자족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자에게 있어서 외부에 있는 어떤 사물로 인해 영향을 받는다든지 변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이런 이해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 유입되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에게 존경받은 책들의 저자인 헬라인 유대인 필로는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것(Quod Deus immutalibis sit)"이라는 논문을 남겼는데, 이는 하나님의 무감성을 열렬히 옹호한 것이었다. 필로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치 않고 “고통”이라 할 어떤 것도 겪지 않는다.
두 번째 압력은 중심사상 - 이 경우 “사랑”이라는 사상 - 에 대한 이해의 변화에서 나왔다. 고전적 전통에 뿌리박은 신학자들(안젤무스나 아퀴나스)은 사랑을 타인에 대한 관심과 선의의 표현이라는 취지로 정의했다. 이렇게 간략한 분석으로도 신학이 철학적 경향, 문화적 변천. 심리학의 변화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드러난다. 신학적 반성은 언제나 복합적 배경을 바탕으로 일어나며 - 이것이 인정되든 안되든 간에 - 그 배경적 측면을 자기(반성)으로 흡수한다. 동일한 질문에 대한 현대적 논의는 고통이라는 인간 경험에 대해 응답하라는 문화적 압력에 영향을 받았고 “고통의 동참자(fellow-sufferer)"로서(A. F. 화이트헤드) 하나님의 철학적 이념에 대한 점증즉 일체감에서도 비롯됐다.
제1장 교부시대(약100-451)
교부시대 개관
교부시대는 기독교 사상사 중 가장 자극적이고 창의적인 시대 중 하나였다. 이 시대는 신학적 이유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최초의 중요한 과제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관계를 명시하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의 바울 서신은 기독교 역사의 첫 세기 어간 이 현안의 중요성을 증거 한다. 2세기 어간 특히 중요한 현안은 ‘변증론(apologetics)' - 비판자들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방어하고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비록 초기에 몇몇 탁월한 신학자들- 서방에서는 리용의 이레내우스(대략130-200년),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대략185-254년)가 배출되었지만 신학적 논쟁은 교회가 더 이상 핍박받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기원은 팔레스틴, 좀 더 구체적으로 유대지역 도성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주위가 정착한 이웃지역으로 급속히, 부분적으로는 다소 출신의 바울 같은 초기 기독교 전도자의 노력으로 확산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언제 출현했는지는 불확실한데, 일반적으로 40년대부터라고 생각한다. 마가복음서가 64년을 전후로, 네로의 박해 직전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리라는 증거가 있다. 40년대 로마에서 설립된 이래 기독교의 법적 지위는 모호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박해기간은 249년 데시우스 황제 즉위 이후였다. 그가 처음으로 보인 기독교에 대한 적대행위는 250년 1월 로마주교 파비안의 처형이었다. 데시우스 박해는 251년 6월 데시우스가 원정도중 살해됨으로써 끝났다. 이 박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타락하거나 박해에 직면해 신앙을 잃게 되었다. 가장 가혹한 박해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303년 2월경에 일어났다. 모든 기독교도의 예배장소를 파괴하고 그들의 책을 몰수 제거하고 기독교 예배행위의 금지를 명하는 칙령이 발동했다. 311년 갈레리우스는 박해 금지령을 내렸다. 갈레리우스는 기독교도가 다시 정상적으로 살도록,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종교집회를 유지하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이 상황을 영영 바꾸어 놓았고 전 로마 제국 내의 기독교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21년 황제는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했고, 기독교 상징이 로마 주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이제 단지 합법적인 것을 넘어섰다. 그 결과 건설적 신학논쟁이 공적 업무가 되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재위기간(361-363년)의 일시적 불안정기를 예외로 할 때, 교회는 이제 제국의 지원을 업게 되었다. 점차 교리논쟁이 정치적, 신학적으로 중요안건이 되었다. 로마의 교회가 점차 강력해지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지도자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훗날 각각의 세력 중심지에서 유래한 서방, 동방교회의 분열을 야기한다.
주요 신학자
순교자 유스티노스 Justin Martyr(약100-165)
유스티노스는 최대의 변증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가라함은 이교도 문서로 된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여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2세기의 기독교 저술가를 말한다. 유스티노스는 우리에게 복음을 헬라 철학이라는 외양에 연계하려는 신학자들의 초기모범- 특히 동방교회와 관련된 경향의 모범-을 보였다.
리용의 이레내우스 lrenaeus of Lyons(dir130-200)
이레내우스는 현재 터키의 서머나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이며, 후에 로마에 정착했다. 대략 178년경 리용의 주교가 되었는데, 이 직위를 20년 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이레내우스는 특히 영지주의(74쪽을 보라)에 직면해서 기독교의 정통성을 열렬히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리게네스 Origen(약185-254)
3세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수호자 오리게네스는 동방교회 사상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성경해석 부문에서 우의적 해서개념을 발전시켰으며, 경전의표면적 의미는 그 내적인 영적 의미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부문에서 그는 성부의 완전 신성과 이에 못미치는 성자의 신성간의 구별이라는 전통을 확립했다.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약160-225)
테르툴리아누스는 본래 북아프리카 도시 카르타고의 이교도였는데 서른 살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는데 이는 그가 서방교회에 끼친 큰 영양 때문이다. 그는 마르시온에 대항해 구약. 신약성경의 통일성을 옹호했고-반면 마르시온은 신. 구약의 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는 삼의일체 교리의 초석을 놓았다.
아타나시우스 Athanasjus(약296-373)
아타나시우스의 중요성은 기독론과 연관되어 있고, 이것은 4세기 어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아직 이십대였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에 관하여(De incarnatione)”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격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는 사상을 힘차게 옹호한 것이다.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354-430)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흔히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혹은 그저 “아우구스티누스”로 알려진 이 신학자로 향하면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 상 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사상가를 만나게 된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이끌린 그는 극적으로 개심을 체험했다. 그의 여생 35년은 미래의 서방교회에 큰 의미를 지닌 수많은 논쟁으로 점철되었고, 각 논쟁의 결론에 끼친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은 지대했다. 그의 세심한 신약 주해- 특히 바울서신 주해- 는 오늘까지도 그에게 명성 즉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수립자”(히에로니무스)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헌 중 중요한 것은 학술적 학과로서 신학의 발전에 있다. 초기교회는 “조직신학”이라 할 만한 것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은 기독교사상의 종합에 있었다: 주저[신의 도성에 관하여 Deciuitate Dei]는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같이 세상과 하나님의 두 도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삼대영역에 핵심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도나트스 논쟁에서 유래한 교회와 성례전 교리;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유래한 은총교리; 삼위일체 교리.
주요 신학적 발전
신약정경의 범위
처음부터 기독교 신학은 경전에 근거한 것으로 자각했다 교부시대는 신약성경의 범위를 제한하는, 흔히 “정경확정”으로 알려진 결의과정을 증언한다. 정경(canon)이란 용어 “규준” 혹은 “고정된 참고점”을 뜻하는 헬라어 ‘카논(Kanon)’에서 유래했다. “정경적(canonical)”이란 용어는 정경 안에 속할 것으로 수용된 경전문서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하여 누가복음서는 “정경적”인 것으로, 반면에 도마복음서는 “외경적(extra-canonical)” 즉 경전의 규준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지칭된다.
신약기자들에게 “경전” 이란 용어는 본래 구약의 문서들을 의미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유스티노스 같은 이들)은 (“구약”에 대비되는) “신약”을 언급하게 되었고, 양자를 동등한 권위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점차로 영감받은 경전으로 승인된 책의 목록과 배열순서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27권이 정경적이라고 확인하는 자기의 서른 아홉 번째 축일서신을 돌렸다. 초기의 신약경전 목록에 때때로 네 편의 작은 서신들(베드로후서, 요한 2, 3서, 유다서)이 누락되기도 했다. 정경의 배열도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명예상 복음서가 정경 첫머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은 초기에 의견일치를 보았고, 사도행전이 그 뒤를 이었다. 동방교회는 일곱 “공동서신(Catholic letters,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1, 2, 3서, 유다서)”을 바울의 열네 서신 (히브리서 포함)앞에 배치하려고 했으나 서방교회는 바울 서신을 사도행전 바로 뒤에 배열했고, 공동서신을 뒤따르게 했다.
전통의 역할
초대교회는 영지주의로 알려진 운동이라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이 다양하고 복합적인 운동은 현대의 뉴에이지 운동과 다르지 않은 바, 후기 로마 제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에 호소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전통”이란 용어는 문자적으로 “건네받은 것”을 뜻하며 “전달하는 행위”라는 뜻도 내포한다. 이레내우스는 “신앙의 규준(regula fidei)”이 사도적 교회에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고, 그것은 바로 정경 안에 표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은 “경전의 전통적 해석”이거나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 진술”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는 교회의 신경과, 교회의 공공연한 교리의 선언 안에 반영된 것이다. 이리하여 전통은 사도들에게 받은 유산으로 간주되었고, 이로써 교회는 경전의 올바른 해석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오히려 전통은, 경전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회가 사도들에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범교회적 신경의 확립
신경(CREED)이라는 말은 라틴어 “credo (나는 믿는다)”에서 유래하는데, 신경 중 가장 친숙한 사도신경의 첫머리가 이 credo로 시작한다. “나는 믿나이다. 하나님을...”그것은 신앙적 진술, 곧 모든 기독교도에게 공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골자를 요약한 것을 언급한다. 반면“신경”은 전체 기독교회에 속하며 기독교도라면 누구나 수용하고 복속해야 할 신앙적 진술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포함한다. 사도신경은 아마도 서방 기도교인들에게 알려진 신경 중 가장 친숙한 형태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관한 세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교회와 심판, 부활에 관한 것도 있다. 니케아 신경 (좀더 엄밀하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알려짐)은 예수의 위격과 성령의 사역에 관련된 추가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상 교부시대가 기여했다고 인정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이것에 관한 신학분과를 흔히 기독론이라 한다)과 신성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325년까지 초대교회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에 속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독론적 진술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로 지적 수준에서 기독교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중요성을 공고히 하며, 둘째로, 단순한 신 개념에 대해 강력히 대응한다.
초대교회의 기독론 논쟁은 주로 지중해 동안지역에서 발생했고, 헬라어로 수행되었다: (1)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며, “도성인신”이라는 관점에서 신성을 해석한다. 이 학파의 핵심적 경문은 요한복음 1장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이었다. 반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도덕적 모범을 부각시켰다. (2) 논쟁 4세기의 아리우스 논쟁은 교회사상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아리우스(대략250-336년)는 경전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 즉 그가 하나님과 동일한 지위에 있음을 가리키는 듯한 칭호는 공경하는 칭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아리우스주의(아리우스와 관련된 운동)는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3)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초대 기독교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했는데, 자기 제국 안의 기독론의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최초의 “초교파적 교의회”, 즉 전체 기독교계에서 뽑혀온 기독교의 회합이었다-
삼위일체 교리
기독교 신학 중 아주 창조적이며 흥미로운 이 기간에 삼위일체 교리는 주목할 만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교리의 골자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아버지. 아들, 성령-이 있으며, 이들은 똑같이 신성하며 지위 또한 같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논쟁의 주요논점은 그 교리의 근원적 타당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대략330-379),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89),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대략330-395년), 갑바도기아의 교부로 알려진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경험되는 상이한 방식에 유의하면서 삼위일체에 관해 성찰했다.
교회에 관한 교리
서방교회의 대 논쟁은 교회의 거룩성 문제에 집중되었다. 도나트스주의자들은 현재 알제라아에 소재한 일군의 아프리카 토호 기독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북 아프리카에서 점증하는 로마 교회의 영향력을 대표한다. 도나트스주의자들은 교회는 성자들의 모임이요 죄인들이 설자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 자행된 박해로 인해 대두되었는데, 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개종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가 끝나자 이들 ‘변절자(traditores, 문자적으로 “[자기 경전을]넘겨준 자들)”중 다수가 교회에 합류했다. 도나트스주의자들은 그들의 추방을 했다.
아우구티누스는 이와는 달리 교회는 성자와 죄인의 혼합체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선언하면서 박해나 그 밖의 이유로 죄를 짓게 된 자들을 제거하기를 거부하는 논증을 제시했다. 교회의 서역과 설교의 유효성은 교회 사역자의 거룩성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거한다. 도나티스트 논쟁은 교회에 관한 교리(“교회론 ecclesiology”이라 지칭)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것이었고 성례전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와 연관된 것이었다.
은총의 교리
은총의 교리는 헬라어권 동방교회에서 신학발전상 중요한 현안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쟁이 420년대에 폭발했다. 로마에 체류한 브리타니아의 수도승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의 필요성을 경력하게 제기했다. 로마 교회의 도덕적 해이에 경악한 그는 지속적인 자기 향상, 즉 구약율법과 그리스도의 모범 아래 자기향상을 강조했다. 페라기우스주의는 자율적 인간의 종교로 간주되는 바, 인간은 자기구원의 주도권을 스스로 쥘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격렬히 반대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인의 삶 모든 단계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구원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필요한 자유를 소유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적 주제는 인간 본성의 ‘타락성(fallenness)’이었다. 아우그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지금 태어날 때부터 죄로 물들었다. 그의 원죄교리에 더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는 이 통찰은 죄와 구원에 관한 그의 교설의 핵심을 이룬다. 아우그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성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 누구의 행위로도 죄의 사슬을 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나 타락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인간을 구원하고자 예수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인간세에 들어오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장했고 이 은총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는 죄를 자발적으로 분쇄한다. 구원은 신의 선물로써만 가능하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외부, 곧 하나님 자신 안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전혀 달리 보았다. 그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내부에 있음을 가르쳤다. 개별 인간은 모두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며, 이 선행으로 인해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된다. 펠라기우스주의의 사조는 “공로로 인한 구원”으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으로 인한 구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이해에 대해선 별도의 언명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당신의 은총의 선물을 몇몇에게 (모두는 아니다) 베푼다면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약에 암시된 이런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교리를 전개한다. “예정(predestination)”이란 용어는 어떤 자를 구원키로 혹은 버리기로 한 하나님 고유의 영원한 결정을 의미한다. 카르타고 공의회(418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과 죄에 관한 견해에 찬성했고 강경한 어조로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다. 그러나 페라기우스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그 후세대에 쟁점으로 지속되었다.
사례연구 1.1 성경과 전통
기독교 역사상 신학논쟁의 주요현안은 성경해석 방법과 관계가 있다. 아주 다른 이유로 이단적인 것으로 정죄받은 아리우스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는 자기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말씀에 다양하게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적은 이들 경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고 논증했다. 성경을 정통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초기에 기독교는 어느 정도 고정된 형식의 가르침을 구두로 전달하는 형태로 전파되었다. “전통(tradition)”이라는 용어는 문자적으로 “건네주기”라는 의미의 라틴어 ‘tradition’에서 유래했다. 초대 기독교 연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요소가 스승에서 제자로 “건네진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이 오늘 “공관복음서”로 알려진 작품으로 최종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에 구두로 전달된 일군의 자료모음에 기초한 것임이 밝혀졌다. 2세기 교부 신학자들-리용의 이레내누스 같은 이들-은 어떤 경전 본문에 대한 권위적인 해석방식이라는 사상을 전개했는데, 그는 이것이 사도시대까지 소급된다고 주장했다. 그 해석의 시금석은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주어진 것이다. 여기서 “전통”은 단순히 “신앙 공동체 안에서 경전을 해석하는 전래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이단들의 약점을 파헤치는 데 몰두한 신학적 자료의 3세기 초엽의 분석에서도 테르툴리아누스는 같은 점을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 신학을 규정하는 데서 전통과 사도적 계승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다. 정통성은 사도들과 역사적으로 연속된 상태로 남아 있는지, 신학적으로 사도들에게 의존하고 있는지에 좌우된다. 반면 이단은 이런 연속성을 증명할 수 없다. 테르툴리누스의 논증은 역사적 연속성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본래적인 기독교 교훈에 관한 논쟁은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하나의 주요관심사는 새로운 교리적 사상에 집중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레랑의 빈켄티우스의 공헌(434년)이 컸다. 때로 “페레그리누스”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진 그는 펠라기우스 논쟁 여파속에서 저술하면서 당대의 신학논쟁이-어떤 성귀를 새로이 해석하는 등-신학사사에 혁신을 야기했다는 소신을 천명했다. 이 난제에 대해 그는 본래적 기독교 교훈이 정립될 수 있는 삼중 척도를 제시했다. 보편성(어디서나 믿어져야 함), 고대성(고금을 통해 믿어져야 함), 동의성(만민에 의해 믿어져야함). 이러한 삼중 척도는 종종 “빈켄티우스 카논”이라 불리우는데, 이 “카논”이라는 용어는 “잣대” “규범” 등의 의미를 지닌다.
사례연구1. 2 아리우스 논쟁: 그리스도의 신성
교부시대는 그리스도의 본성교리에 깊이 몰두했다. 처음 논쟁이 시작된 것은 동방교회였다. 기독론 발전의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신성문제에 집중되었고.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묘사되는 것이 적법한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에 등장한 견해 중 두 개는 이내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에비온주의(Ebionitism)’, 1세기초기에 번성했던 유대분파였던 이들은 예수를 일반적 인간존재, 곧 마리아와 요셉의 인간적 아들로 생각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정반대의 견해였는데, 헬라어 동사 ‘도케인(dokein, 나타나다, 보이다)’에서 유래한 ‘가현설(Docetism)’로 알려진 것이었다. 이 접근방법은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요 그의 인성은 단지 외양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가현설은 2세기에 그 정점에 도달했던 영지주의 저술가들에게서 각별히 주의를 끌었다.
2세기 변증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유스티노스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고전 그리스 철학과 유대주의의 통찰을 열매맺게 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그리스도는 로고스(말씀)와 노모스(율법)이다” 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유스티노스는 당대와 스토아 학파와 중기 플라톤주의에서 통용된 “로고스” 개념의 변증적 잠재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사상은 중기 폴라톤주의에서 유래한 듯한 ‘로고스 종자(logos spermatikos)'라는 사상이다. 신적 로고스는 인간사에 씨앗을 뿌린다. 따라서 이러한 “로고스를 간직한 씨앗”이 부분적으로나마 비 기독교인에게도 알려질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유느티노스는 기독교가 이방 철학을 통해 획득한 하나님의 계시의 암시와 예견 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로고스를 가장 완전히 계시한 존재다.
아리우스 논쟁은 고전적 기독론 발전상 큰 전기로 남아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비교적 잘 연구된 신학적 측면의 논쟁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자기본질을 강조했다. 하나님관은 기독교 신학이라기 보다는 헬라 철학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신관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즉각 아리우스의 미묘한 차별을 공격했다. 첫째, 아타나시우스는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만이 죄의 권세를 부술 수 있고 우리에게 영생을 제공할 수 있다. 구원하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가 해결하기 어려운 논리적 귀결로 나아간다. 신약성경과 기독교 예전전통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가 성육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두 번째 요점은 기독교도가 예수께 경배.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상 예배와 기도라는 기독교도 관습의 중요성에 대한 탁월한 연구를 대표한다. 4세기경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와 경배는 공적 예배를 구성하는 규범적 방식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주장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면 기독교도는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지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참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육하신 하나님.
사례 연구1. 3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 아폴리나리스 논쟁
아타나시우스가 대표인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외견상 구원론적 성격을 강하게 풍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자(구속자)이다. 여기서 “구원(구속)”은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옮기우기”나 “신같이 되기”를 뜻하는 바 전통적으로 신격화(deification)로 표현된 개념이다. 기독론은 이 구속론적 통찰이 뜻하는 바를 표현한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 전승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신격화되려면 인간은 신적 본성과 합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나눌 수 있게끔 인간 본성과 합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 일어난 일이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은 인간 본성을 취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신격화를 확증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저술가들을 이렇게 인간 본성을 취한 로고스 사상을 크게 강조했다. “취하다(assuming)”라는 용어는 중요하다: “인간(성)안에 거주하는” 로고스(구약 예언자의 경우)와 구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라는 것은 세사에 로고스가 오심을 기리는 것이었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자체에 인간 본성을 취한 것을 기리는 것이었다.
아폴리나리스는 로고스가 인간 본성을 모두 취했다는 점차 만연된 신앙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앙은 로고스가 약한 인간적 본성에 감염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견해로는 그리스도가 순수한 인간의 성정을 소유했다면 그리스도의 무죄성이 제약당할 것이다. 오직 인간의 성정이 순수한 신적 동기와 인도적 힘에 의해 대체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무죄성이 유지될 것이다. 이것은 디오카이사레아의 주교에게 보낸 아폴리나리스의 편지에 잘 나와있는데, 여기서 그는 기독론의 골자를 전개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육신에 안에서 말씀이 “가변적” 인간의 성정을 취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데 있다-오히려 로고스는 “하늘의 불변적, 신적 정신(성정)”을 취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란 부를 수 없게 된다. 만일 로고스가 인간 본성을 부분적으로만 취했다면 인간 본성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되었다. 이런 입장을 개진한 가장 유명한 진술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서간 101편에 나온다-이 서간은, 성육신에서 인간 본성을 전체적으로 취한다는 것이 뜻하는 구속론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380년 혹 381년경 그리스에서 기록된 이 편지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아폴리나리스주의의 골자를 정면을 논박한다. 오직 성육신 안에서 말씀이 취한 것만 구속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 성정을 취하지 않았다면 인간(성) 구속되지 않는다.
사례연구1. 4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 네스토리우스 논쟁
고대 시리아(현재 터키)에서 발원한 기독론 학파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과 사뭇 다르다. 그 차이 중 가장 큰 것은 기독론적 사색이 전개된 배경에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가 구원에 대한 불완전한 관념으로 이어졌다는 것과 관련해서, 그들은 인간(성)의 완전한 구원과 일치하는 그리스도의 상을 확증하고자 세속 헬라 철학사상을 원용했다. 여기서 “로고스” 개념은 특히 중요했고, 성육신 개념과 연결될 때 더욱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안디옥 학파의 사유의 기본적 전승제도는 다음과 같이 추적할 수 있다. 인간은 불순종 때문에 부패한 상태에 빠졌고 거기서 인간은 벗어나올 수 없다. 구원이 있으려면 인간측의 새로운 복종의 토대 위에서나 가능하다. 여기서 인성과 신성을 연합한 자로서 구원자의 도래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의 재정립이 대두된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열렬히 옹호되었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나님이며 인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간의 “완전한 결합”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일성은 그가 신인 양 본성을 소유했다는 사실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다.
안디옥 학파 저술가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그리스도의 신인성을 “섞거나” “혼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대신 그들은 신인성 고유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두 본성간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양성은 결코 상호 영향을 주지도 혼합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데오도로스가 신인성의 연합을 부부지간처럼 순수하게 도덕적 연합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로고스가 겉옷을 입듯이 단지 인성을 입은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들이 이렇게 접근한 이유 중 가장 타당한 설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욕구로 인해 신인성의 독특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네스토리우스가 기독론적 견해를 개진하는 방법에 관한 논쟁의 소지가 생겼다.: 네스토리우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두 본성의 공통된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나님을 낳은 자)’로 제대로 부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집중된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했다. 네스토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테오토코스’라는 칭호는 항간의 경건과 학술적 신학 내에서 모두 폭넓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그 칭호의 함의에 경종을 울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인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제안은 (그간)데오토코스라는 용어와 연루되어왔던 수많은 신학적 투자 때문에 분노와 적개심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논쟁은 의심할 나위없이 콘스탄티노플의 수장지위에 대한 비등하는 정치적 논쟁에 의해 더 고조되었다. 430년경 작성한 제17편 서간 중 한 중요한 단락에서 키릴로스는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과 관련된 열두 명제를 정죄했다. 키릴로스가 이들 견해를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그의 일차적 관심은 안디옥 한파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월성을 확립하려는 데 있었다는 암시가 엿보인다.
사례연구 1.5 삼위일체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은 기독론의 전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하나님과 “유산한 본질(호모이우시오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오스)”에 속한다는 데 점차로 동의가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교리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었다고 강조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규명해야 할 부담을 더 안게 되었다.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시발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대한 신약의 증언이다. 이레내우스에게 있어서 구원의 전과정은 시종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에 대해 증거한다. 이레내우스는 훗날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상 골격이 되는 용어를 도입했다: “구원의 경륜(the economy of salvation)”. 이래내우스에게 있어서 “구원의 경륜”은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역사 안에서 조종하는 방식이다.
때때로 이레내우스는, 창조주 하나님을 구속주 하나님과 아주 다르다고(또한 열등하다고)주장하는 영지주의 비판가들의 압박에 직면했다. 마르키온이 선호하는 형식으로 이 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립되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며 신약의 구속주 하나님과 전혀 다르다. 그 결과 구약은 기독교도가 버려야 할 것이며 오로지 신약에만 몰두해야 한다. 이레내우스는 이 사상을 극렬히 배격했다. 그는 구원과정 전체가 창조의 첫 순간에서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일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주장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 신학에 특별한 용어를 부여했다. 그도 역시 삼위일체 신학에 독특한 형식을 구축했다. 구원의 경륜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 활동은 복합적이다. 분석하자면 이러한 신적 활동은 통일성과 독특성을 드러낸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구원의 경륜의 세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본질(substance)’이요, 세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 ‘위격(person)’이라 주장한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구별되나, 나뉘지 않으며 다르나 상호간에 분리되거나 독립되지 않는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성부. 성자 관계에 대한 논쟁은 거의 확정된 듯하다. 성부와 성자를 “한 존재”로 공인한 것으로 아리우스 논쟁은 종식되었고, 성자의 신성에 대한 교회 내의 동의도 확립되었다.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 같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성령의 신성을 설득력 있는 용어로 옹호하여 삼위일체 신학의 최종적 요서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과 동등성은 합의를 보게 되었다.
대체로 동방교회 신학은 세 위격 혹 세 본질의 독특한 개성을 강조하며,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일체성을 옹호하는 경항이 있었다. 이리하여 성자의 성부에 대한 관계는 “낳은 바 됨”과 “아들됨”이라는 말로 규정되었다.
반면 서방교회는 주로 하나님의 통일성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계시와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그러했고, 상호교제라는 관점에서 이들 세 위격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그러했다. 동방교회의 접근은 삼위일체가 아주 다른 사물들을 다르고 있는 독자적인 세 중재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비록 이런 사상들이 교리 발전상 후대에 만개되기는 했지만 의심할 바 없이 이 사상들은 이레내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 작품 안에 암시되어 있었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저술속에서 더 본질적으로 표현되었다.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6세기에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개념은 위격들의 개성을 강조한다 사상을 표현하는 데 쓰인 표상은 “존재의 교제”라는 표상인데, 이 안에서 각 위격은 각기 톡특한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두 위격으로 침투하며 두 위격에 의해 침투된다. “전유”라는 개념도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과 관련되며 거기서 유래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외적 행위에 관여하여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창조사역 안에 관여하며, 이것은 성부 혼자만의 사역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창조를 성부의 사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 창조에 연루되어 있다 해도 성부의 독특한 활동이라 간주할 수 있다. 유사하게 삼위일체 전부가 구속사역에 관계하지만 구속을 성자의 독특한 사역으로 간주함이 마땅하다. 총괄하면 상호침투와 전유개념으로 우리는 신을 “존재의 교제”로 간주하게 되는데, 이것(교제)안에서 모두가 공유, 연합, 상호 변화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고립되고 흩어진 신성의 부분이 아니라 국제적 협력의 상관적 세 요소와 같은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복잡한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 배후에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함을 단언한다.
양태론 Modalism
“양태론(modalism)”이란 용어는 독일의 교리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이 삼위일체 이단교리 그룹-2세기 말 노에투스와 프락세아스, 3세기의 사벨리우스와 관련된 그룹-의 공통적 요소를 지시하려고 도입한 것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삼위일체 교리가 삼신교리의 형태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신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은 신적 계시의 세 가지 상이한 방식이나 양태(modes)로 설명해야 했다-여기서 “양태론”이란 용어가 나온다.
삼위일체에 대한 갑바도기아식 접근-The Cappadocian approch to the Trinity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확립하는 데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이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증되었다. 성부, 성주, 성령의 본질적 동일성을 인정함으로써 삼위일체 안에서 삼위의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삼위일체에 대한 갑바도기아식 접근은 신의 통일성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접근을 표시하는 공식이 바로 “세 위격(hypostasis)속의 한 실체(ousia)”이다. 이 접근상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성부에게 부여한 우월성이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성령이 종속적이라는 주장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부는 삼위일체의 근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했다. 이리하여 가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는 삼위일체 안의 한 실체는 보편적인 것으로, 세 위격은 개별적인 것으로 비유. 표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이사라이의 바실리우스에 따르면 각 위격의 독특성은 다음과 같다. 성부는 부성으로 성자는 자성으로 성령은 성화하는 능력으로 구별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부는 “자연적 존재”(agennesis) 성자는 “의존적 존재”(gennesis), 성령은 “보내어짐”혹 “나음”으로써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모델-Augustine's model of the Trinity
삼위일체 전체의 행위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행위 배후에서 판별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성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모상 안에서 창조된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설 중 가장 독특한 요소는 성령의 위격과 위상에 관한 것이리라; 그러나 성부 성자를 함께 묶는 사랑으로서의 성령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념은 초기단계에 주의를 끈다.
성자를 “지혜”로 간주한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으로 인식하려 한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과 묶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자체 내에 이와 상응하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게 한다. 그것이 사랑의 효과이다. 따라서 성령은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이런 투의 논증은 그 명백한 약점으로 인해, 적어도 성령이라는 개념을 기묘하게 몰 인격화한다고 비판받았다. 성령은 마치 성부와 성자를, 또한 성부 성자와 신자들을 한데 묶는 아교풀 같은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 묶임”이라는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의 중심사이며, 삼위일체 논의 중 이러한 관심사가 부각되는 것은 그에게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심리학적 유비”의 전개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제 삼자가 보기에 불운한 운을 떼었다. 신플라톤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정신을 인간성의 감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창조 속의 삼위일체 흔적”을 찾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개별적 인간 정신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사유의 삼중구조를 찾아내었고, 이 사유적 구조가 하나님의 존재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았다. 비록 기억, 이해, 의지라는 삼원성(triad)에도 탁월한 지위를 부여했지만 그 자신은 이러한 삼원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신. 지식. 사랑이라는 삼원성이라고 주장한다. 종종 지적된 것처럼 인간 정신은 이렇게 산뜻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삼분화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필리오케 논쟁 -The filioque controversy
초기 교회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동. 서방을 막론하고 전로마 제국을 니케아 신경에 동의한 것이었다. 니케아 신경은 교회사에서 특히 중요한 이 시기에 교회에 교리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의한 문서 중 일부는 성령을 “성부에게서 나오는 존재(proceeding from the father)”로 언급한다. 그러나 9세기까지 서방교회는 일상적으로는 이 구절을 변경하여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존재”로 불렀다. 성령의 “이중 산출” 개념은 헬라 저술가들을 크게 자극했다: 이 개념은 그들에게 신학적인 난점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소위 불가침적 신경 본문을 변조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필리오케 논쟁은 신학적 현안 그 자체로도 중요할 뿐 아니라 당시 동. 서방 교회관계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문제의 골자는 성령이 성부에게만 나오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헬라 교부작가들은 삼위일체 안에는 오직 하나의 존재적 근원이 있을 뿐이라 주장했다. 삼위일체 안의 성자와 성령도 포함하여 성부만이 만물의 유일, 무상적 원인이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나 방식은 다르다. 이 관계를 정확한 용어로 표현하려던 차에 신학자들은 마침내 아주 독특한 두 개의 표상을 구축했다: 성자는 성부에서 나오며(출산되며/begotten)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온다(산출된다/proceeds). 성부는 자기 말을 발한다. 동시에 그가 이 말을 할 때 그는 이 말을 듣고 받을 수 있게 하려고 숨을 내쉰다. 여기서 도입한 것은, 성경적 전통에 토대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자의 표상이요, 하나님의 숨으로서 성령의 표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 이유: 그것은 모든 신성의 유일 근원으로서 성부의 원리를 전적으로 양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신성의 두 근원이 있음을 확증하기에 이르고, 그 결과 여기서 모든 내적 모순과 갈등이 발생한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 진술로써 조심스럽게 제기. 발전되었다. 아마도 힐라리우스의 암시에 근거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 성자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진술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동, 서방교회 모두가 동의하는 바를 요약했다고 생각했다. 불운하게도 그의 헬라어 지식은 그가 헬라어권 갑바도기아 저술가들이 좀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만큼 충분치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그가 하나님 안에서 성부의 독특한 역할을 옹호하려한 흔적이 있음을 본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했겠는가? 성령을 성부와 성자간의 “사랑의 끈”으로 간주하는 그의 독특한 이해에 그 해답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내적 관계 개념을 전개하면서 삼위일체의 위격들이 상호간의 관계로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사례연구1 . 6 도나투스 논쟁
교부시대에 관한 역사적 개관에서 언급한 대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13)때 교회는 온갖 박해에 시달렸다. 박해의 시초는 303년까지 소급된다. 박해가 끝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로 밀라노 칙령이 발효되면서부터였다(313년). 303년 2월 칙령으로 기독교 서적과 교회에 소각과 파괴명령이 떨어졌다. 자기가 소유한 책을 불태우도록 넘겨준 교회 지도자들은 “트라디토레스(traditores; 넘겨준 자들)”라 불리웠다.
많은 지역의 기독교가 이런 인물이 이러한 성직 수임에 관여하도록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그 결과 카이킬리아누스의 [주교로서]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보편교회의 위계는 얼룩졌다. 구속론적 논쟁이 신학계를 풍미했다. 도나투스주위자들이 토착민들의 지원을 받은 데 반해 보편교회(가톨릭교회)는 로마 이주민의 지원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신학적 현안은 특히 중요하며, 또한 3세기 아프리카 교회의 주도적 인물- 키프리아누스-의 신학 내의 심각한 긴장과 직결되어 있다. [보편 교회의 통일성Unity of Catholic Church](251)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관련괸 양대 신앙을 옹호했다: 분파주의(schism:교회에서 고의로 떨어져 나가기)는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다. 따라서 타락한 분파적 주교는 성례전을 집행할 능력이나 기독교회의 사제로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박탈당한다.
분파주위에 대항한 키트리아누스의 논증은 아주 명료하게 전개되었으며 세밀하게 살펴볼 만하다: (1) 키프리아누스는 오직 교회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를 분파주의에 내맡기려는 사람은 교회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요. 교회와 단절되는 것이다. (2) 교회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고자 키프리아누스가 사용한 표상에 유의하라. 교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입고 갔던 솔깃없는 성의(천의무봉적 성의)와 같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그 성의와 유사하다고 논증한다: 그것은 찢거나 나눌 수 없다.
따라서 키프리아누스가 분파주의를 열렬히 배격한 것은 자명하다. 키프리아누스의 학설은 아주 양의적이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계열의 해석이 가능하다: (1) 타락함으로써 주교는 배교의 죄악을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의 경계 밖으로 나간 것이며, 더 이상 성례전을 유효하게 집행할 수 없다. (2) 회개함으로써 주교는 은총으로 복권되며, 계속해서 성례전을 유호하게 집행할 수 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첫 번째 입장을 지적했고, 가톨릭주의자(그들의 적대자들이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을 때)는 후자를 지지했다. 그 결과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성례전 체계가 부패 했다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변절자들(트라디토레스)을, 박해 하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킨 자들과 대치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트라디토레스가 세례하고 서임한 자들을 다시 세례하고 서임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이것은 분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키프리아누스는 어떤 형태의 분파도 불허했다. 도나투스분파의 가장 큰 역설은 키프리아누스가 제안한 원리에서 유래한 분파주의가 그 동일한 원리 자체와 상충한다는 점이다. 도나투스주의자는 배교라는 천인공노할 측면을 강조했고, 가톨릭주의자는 분파 불가성을 똑같이 강조했다. 그는 키프리아누스의 유산에 입각해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고, 그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했던 “아우구스티누스적” 교회관을 제기했던 것이다.
첫째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도의 죄악성을 강조한다. 교회는 성자들의 사회가 아니라 성자들과 죄인들로 “섞인 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며 적당하지 않다. 그 구별은 역사의 종말, 하나님 고유의 때에 발생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문제의 거룩성은 교회 구성원의 거룩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뜻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화되고 거룩하게 된다- 이 거룩성은 최후의 심판 때 완성되고,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분석 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자기가 실정한 고차적 도덕성에 따라 살지 못하고 있다는 실천적 관찰을 추가한다. 둘째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분파주의나 ‘트라디타오’(traditio; 기독교서적을 넘겨주기. 혹 신앙에서 타락한 행위 일반)를 모두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도나투스주의자는 위대한 북아프리카의 순교자 주교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한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나투스 논쟁의 관심사는 교회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트라디토르(변절자)가 성례전을 온전해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사제들이 집행한 세례, 서품, 성찬예식은 무효라고 논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으로 키프리아누스의 권위에도 기인한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밖에는 진정한 성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아누스가 애초에 의도한 바를 넘어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사목행위를 하는 개인 당사자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교회의 활동이 무효가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주의가 인간적 매체의 자질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누가 순수하고 불순한지, 가치있고 무가치한지를 구별할 수는 없다고 것이다. 이렇게 말한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요한 맥락 속에 그것을 규정한다. “세례”와 “세례권”은 구별해야 한다. 비록 이단이든 분파주의자들이든 간에 그들이 거행한 세례가 유효하다 해도 그것은 세례를 베풀 권한 누구나 소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례전을 집행할 권한은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들에게, 사도들을 통해 그 후계자에게, 주교들에게,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에게 위임되었다.
신학적 현안은 두 개의 라틴 슬로건으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는데 성례전적 효능이 근거에 대한 상이한 견해를 반영한다: (1) 성례전은 유효하다-“일하는 자의 일 때문에(ex opere operantis).” (2) 셩례전은 유효하다-“이루어진 일 때문에(ex opere operantis).” 여기서 성례전의 효능은 성례전이 표현하고 전해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의거한 것으로 이해된다. 도나투주의의 입장은 “엑스 오페레 오페란티스”와 일치하고, 아우구스타누스의 입장은“엑스 오페레 오페라토”와 일치하는 바, 성례전적 인과론의 이해를 반영한다.
이제 “세례에 관하여(on Baptism)”라는 논문에서 밝힌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살펴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견해 즉 오직 의로운 자만이 성례전을 집행할 수 있고 온전히 수용할 수 있다(성례전 효능상 엑스 오페레 오페란티스[사제의 개별적 자질]관에 입각)는 견해에 대항해 성례전의 효능이 집행자나 수혜자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 의거한 것이라 주장했다.
사례연구 1 . 7 펠라기우스 논쟁
5세기 초엽 불거져 나온 펠라기우스 논쟁은 인간의 본성, 죄 은총 같은 난제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 논쟁으로 인해 상황은 돌변했고,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들은 서방교회의 현안으로 굳게 자리잡았다.
“의지와 자유” -The "freedom of the will"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권과 순수한 인간적 책임과 자유는 똑같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전권이나 인간자유 중 하나를 부정함으로써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크게 제약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생전에 그는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단순화하거나 제약하는 두 이단을 처리해야 했다. 마니교는 일종의 운명론이었는바(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초기에 탐닉했던 사상), 이는 하나님의 전권을 주장하는 반면 인간의 자유는 부정했고, 다른 한편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자유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전권을 부정했다.
“자유의지(라틴어 liberum arbitrium의 역어, free will)”는 성경에서 유래한 용어는 아니고 헬라 철학사조, 특히 스토아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2세기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가 서방 기독교에 소개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 좀 더 바울적 의미를 추가하면서, 인간 자유의지 위에 죄라는 한계를 설정. 강조하면서 이 용어를 견지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적 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이 자유롭게 타고난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필연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한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되고 치유되려면 신적 은총이 작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 같은 추종자들은 인간은 의지상 전적 자유를 소유하며 자기 죄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생각했다. 인간 본성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우며 선하게 창조되었고, 어떤 신비적인 약점 따위로 인해 제약당하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인간의 불완전성을 상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벽한 균형 속의 저울 접시 같아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413년 펠라기우스는 당시 수녀가 되려고 부를 등지기로 작정한 테메크리아스에게 긴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수미일 관한 견해를 당당한 논리로 전개했다. 하나님은 인간(성)을 만드셨고, 인간(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내린 계명은 복종할 수 있는 것이며, 복종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죄의 본성 -The nature of sin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간성은 타락의 결과로 죄의 보편적인 영향을 받았다. 인간의 성정은 죄로 인해 어두워졌고 약해졌다. 죄로 인해 죄인들을 명료하게 사유할 수 없었고, 특히 더 높은 영적 진리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그러했다. 우리의 병환을 진단하고(죄), 치료할 수 있는 길(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는 우리가 우리의 죄악성을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삶을 오염시키고 내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그 무엇이다. 환언하면 죄가 죄를 낳는다: 악한 상태가 개별적 악행을 유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점을 세 개의 중요한 유비, 즉 “질병”과 “힘”과 “범법”으로서 원죄로써 전개한다: (1) 첫 번째 유비는 죄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월하는 타고난 질병으로 취급한다. (2) 두 번째 유비는 우리를 사로잡는 힘, 그 아귀에서 우리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세력으로서 죄를 표상한다. (3) 세 번째 유비는 죄를 본질적으로 사법적 개념- 범법-으로 취급하는데, 이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죄를 아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한다. 인간이 죄를 향한 경향은 그의 사상에 자리잡을 곳이 없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엄격한 형태의 도덕적 엄격주의(엄격한 도덕주의;moral authoritarianism)로 보인다- 인간은 죄가 없어야 한다면서 실패에 대한 어떤 변명도 철저하게 거부하는 주장. 펠라기우스는 구약의 여러 인물들이 실상 무죄한 상태로 머물렀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만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다.
은총의 본질-The nature of grace
아우구스티누스가 애호한 성귀 중 하나가 요한 15:5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것도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존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인간 본성은 섬세하고 연약하고 유실된 것이요, 회복하고 갱신하려면 하나님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은총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고 무조건적인 관심이요 이것으로서 치유의 도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이란 용어를 아주 달리 쓴다. 첫째, 은총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성이 은총을 통해 무죄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단언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은 이성과 의지 같은 인간 본유의 기능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회피하도록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었다. 둘째로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공한 외적 계몽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으로써 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율법과 교훈 속에 놓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은총은 외적이고 수동적인 그 무엇, 우리 밖의 그 무엇이다.
구원의 토대 -The basis of salvation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성)은 은총의 행위로서 정당화된다. 인간의 선행도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결실인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모든 것은 죄인들을 향한 사랑에서 유래한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무조건적인 은사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포도원 품꾼 비유해석(마태20:1-10)은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비유는 각인이 받은 보상의 근거는 각인이 받았던 약속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에 있다는 중요한 신학근거 결론을 도출했다. 하나님은 그 약속에 충실했고, 이렇게 죄인들을 의롭게 만든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 있어서 인간은 그 공적의 토대 위에서 의롭다 인정된다; 인간의 선행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인간 자유의지의 실행 결과, 즉 하나님이 지운 의무를 완수함으로써 이룬 결과이다. 이런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영벌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구원”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외양을 대표하며,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해 극심한 견해차를 보인다.
사례연구 1. 8 신앙과 생활
기독교의 기원은 팔레스틴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후반부는 로마 제국 내의 여러 가지 지역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리게 된 과정을 살피는 바, 특히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팔레스틴에서 시작해 현재의 터키, 그리스 지역에 이르는 기독교회의 확장에 대해 보도한다. 이집트, 소아시아, 그리스 같은 지역으로 기독교가 확산됨으로써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제기된 현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고전철학간의 관계였다. 이 지역 문명세계는 대부분 헬라어를 구사했고 형태상 고전적 플라톤주의든 고전적 이교주의의 변양으로 나타났든지 간에 적어도 고전 헬라 철학사상과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문제는 기독교 복음이 이런 사유방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와 고전적 이교간의 초기 충돌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아테네 소재 아레오파구스에서 행한 설교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마케도니아 여행 직후에 아테네에 도착한다. 누가는 아테네가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그가 우리에게 우상들이 공공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는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 같다. 바울의 “아레오파구스 설교”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에피쿠로스주의자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들의 만남이 아고라에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연설에서 바울은 기독교 복음이 스토아 학파의 철학적 신념과 상응하며, 그 위에 자리잡을 수 있다고 논증하는 것 같다. 헬라인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 혹 알려질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한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 졌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창조의 주제를 ‘예비적 복음(praeparatio evangelica)’, 곧 그리스도 안의 구속의 주제를 인도하는 길로 활용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계열을 따른 접근방식은 다양한 형태의 고전 헬라 철학이 여전히 계승하고 있었던 문화적 배경 속에서 교부들의 작품에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다. 148-161년 어간 로마에서 헬라어로 기록한 기독교 신앙을 위한 두 편의 변증론에서 유스티노스는 기독교를 열렬히 옹호하면서 복음을 세속의 지혜와 연결시키려 했다. 헬라어 “로고스(말씀이라는 번역이 가장 좋아 보인다)”는 관념들의 세계와 일상세계를 잇는 매개적 원리를 언급하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용어였다. 유스티노스는 모든 지혜와 로고스에서 유래하며, 비록 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이 구절을 사용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이 “로고스”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지라도 기독교인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보다 조금 후에 클레멘스도 이와 연관된 접근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고전철학이 복음에 이르는 길을 예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제기했다. 3세기 초엽 본래 헬라어를 기록한『스트로마타』의 발췌문에서 클레멘스는 하나님이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모세의 율법을 하사한 것과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철학을 하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초기의 기독교 저술가들이 모두 고전철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테르툴라아누스는 기독교 사상 내에서 철학이 점하는 위치에 대해 크게 불신했는데 그것이 도처에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은 외양상 이교적이며 그것을 신학에 도입하는 것은 교회 안에 이단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3세기 첫해에 라틴어로 기록한 “이단의 규준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그는 이교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계시간의 갈등을 상징하면서 그 유명한 아테네와 예루살렘간의 대립을 규정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있어서 “아카테미”의 이교적 사상은 기독교 안에 설자리가 없었다.
397년경 라틴어로 쓴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와 이교철학간의 관계를 한동안 다루고 있다. 출애굽을 모델로 삼아 있는, 기독교인이 철학의 선한 모든 것을 차출해 복음선포에 봉사하도록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접근방식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유비는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이는 흔히 “엑소더스”로 알려진 사건, 곧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의 상황, 즉 이스라엘이 압박받은 후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 짐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전에 압제하던 자들의 보화도 들고 나왔다는 상황을 말해준다.
제2장 중세와 르네상스(약500-1500)
중세의 탄생
로마의 멸망은 지중해 지역 전체에 충격파를 던졌으며,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체적으로 라인강으로 경계를 정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북쪽 전선은 “야만인들이”의 공격에 직면하자 404년 무너지고 말았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지역은 이제 프랑크족, 고트족, 그리고 반달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불안이 더 심화된 것은 7세기에 있었던 아랍의 침략 때문이었다. 이슬람은 바야흐로 이 시기에 아랍 사람들 가운데서 중요한 종교적 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지 점령 지역에서 이슬람이 취한 강압적 태도는 서방 교회로 하여금 큰 무리를 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1095-1204년 동안에 십자군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태가 더 복잡해진 이유는 9-10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지중해 헬라어 권역 기독교인들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쪽의 라틴어 권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점증하는 긴장 때문이었다. 서쪽의 가톨릭과 동쪽의 정교회 사이에서 발생했던 최종적인 결렬 상태는 보통 10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원 제도의 기원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었다. 이 운동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3세기 동안 이집트의 변방 구릉지역과 시리아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의 예는 이집트의 안토니인데, 그는 사막에서 수련과 고독한 생활을 가지기 위해 273년 부모의 집을 떠났다. 죄 많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주제가 이들 공동체의 핵심이 되었다. 하나의 중요한 초기 수도원이 후기 수도원 제도에 규범이 될 만한 에토스를 발전시켰다. 그 수도원의 외적 구조는 중요했다. 즉 전수도원은 벽으로 둘러싸였는데, 이것은 세상에서의 분리와 도피의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생활의 특징은 공동으로 의복과 음식과 독방(영어로 cell로 표현되는 수도자들의 방)을 소유하고, 그리고 공동체의 살림을 위하여 함께 손으로 노동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의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매력을 심어주었다. 4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쪽 기독교 지역, 특히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곳에 수도원들의 세워졌다. 5세기에 이르면, 수도원 공동체들이 이탈리아(특히 서쪽 해안지역을 따라), 스페인. 그리고 고올(Gaul)에 생겨나게 되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400-425년 어간 어떤 시점에서 북아프리카에 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공동생활(이제 라틴어 문구로 vita communis라고 명명된)은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는 지성적 활동과 영적 연구의 중요성에 대하여 올바르게 평가함으로써 이 공동생활에 대한 그의 강조점을 보안했다.
6세기 동안, 그 지역에서 수도원의 수는 상당히 증가했다. 가장 포괄적인 수도원 “규칙”중의 하나인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베네딕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개념에 의해 지배되는 규칙을 준수했으며, 그것은 규칙적인 공동 기도와 개인기도, 그리고 성경 읽기로 유지되었다. 수도원들의 등장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도원은 자주 신학과 영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에,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들은 모두 수도원 공동체의 회원이거나 수도원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었다. 안젤무스, 성빅토르의 휴,아퀴니스, 그리고 보나벤투라는 모두 수도원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서방의 중세 신학자들에 대한 예들이다.
켈트 기독교의 등장
유럽의 켈트 지역-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콘월, 브라타니, 그리고 웨일즈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등장은 상당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켈트 기독교의 발상지가 웨일즈에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5세기와 6세기에 특색 있는 선교의 중심지로 드러난 곳은 바로 아일랜드이다. 전통적으로 아일랜드의 복음화 책임진 것으로 간주된 사람은 마고누스 수카투스 파트리시우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로마화된 영국인이었는데, 그는 보통 “패트릭”(Patrick;약390-460)이라는 켈트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어졌다. 7세기 혹은 8세기로 소급되는 한 전승에 의하면, 패트릭은 아일랜드로 돌아오기 이전에 고올에 머물렀다고 한다. 패트릭은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그 지역에 기독교를 확고히 세웠다. 패트릭의 회심 이야기는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수도원적 개념은 아일랜드에서 매우 신속하게 자리를 잡았다. 고독과 은둔을 향한 수도원적 추구는 아일랜드의 생활방식과 이상적으로 들어맞았다. 아일랜드 교회가 감독보다는 수도원장을 수장하는 수도원적 교회였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켈트 기독교 안에서 등장한 권위 체계는 이처럼 그 당시의 로마화된 영국 교회를 지배하게 된 권위 체계와 사뭇 달렸다. 아일랜드식 수도원적 모델은 교회운영이 감독의 손에 확고하게 쥐어져 있는 로마식 감독 모델에 대한 위협으로 비취지게 되었다. 켈트 교회 지도자들은 세속적인 부와 지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그들은 말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또한 어떠한 형태의 사치도 거부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켈트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는 수단으로서 자연세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패트릭이 썼다고 알려진 “성 패트릭의 흉패”라는 오래된 아일랜드 찬송을 보면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일랜드 수도원들은 선교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는데, 그들은 종종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해로를 이용했다. 브랜던(Brendan; 580년경 사망)과 콜롬바(Columba; 597년경 사망)는 이러한 선교사의 형태를 보여주는 휼륭한 예다. “성브랜던의 항해”(1050년경)라는 제목이 붙은 시에서, 브랜던은 “북쪽과 서쪽의 섬들”(보통 스코틀랜드 해안쪽에 있는 오크니와 헤브라이드 군도로 가정되는)까지 여행한 것을 두고 찬미를 받고 있다. 콜롬바는 아이랜드 북쪽 지방에서 스코틀랜드의 서쪽 섬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를 전파했고, 선교기지로서 아이오나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아이던(Aldan; 651년 사망)은 이러한 방식으로 선교활동을 한 휼륭한 아이오나의 수도사의 예에 속한다. 켈트 기독교는 프랑스까지 침투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지역에서 영향력이 증대되기에 이르렀다.
켈트 기독교와 로마의 경쟁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이 간과될 수는 없을 것이다. 켈트 기독교는 위협적으로 감독제도를 훼손시키며, 로마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더욱 어렵게 했다. 597년, 콜롬바가 죽은 해가 될 때쯤이면 켈트 기독교의 비전은 분명히 우세를 획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아일랜드의 중심부 밖에서는 켈트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쇠퇴하게 되는 일련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켈트 기독교의 쇠퇴를 야기한 사건은 바로 콜롬바가 죽은 바로 그해에 일어났다. 로마화된 기독교의 형태가 영국에 뿌리를 내리게 됨에 따라, 북쪽과 남쪽의 영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긴장이 조성되었고, 전자는 켈트 전통에 계속 충실했으며 후자는 로마 전통을 따르게 되었다. 위트비 대회(the Synod of Whitby; 664)때가 되면, 영국에서 로마의 기독교가 지배권을 확립한 것이 널리 인식되게 된다. 700년은 확실하게 켈트 기독교의 성장이 종지부를 찍게 된 해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해는 또한 이제 “중세”라고 알려진 상황이 유럽에서 시작됨에 따라, 문화적이고 지성적인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린 해로 널리 간주되었다. 11세기에 이르면, 중요한 정도의 정치적, 사회적인 안정이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세 개의 주요한 권력집단이 이전의 로마 제국의 자리를 대신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1. 비잔티움 이는 콘스탄티풀 시(현대의 터기에 위치했고, 지금은 “이스탄불”로 부름)의 중심에 위치했다. 이 지역에서 우세했던 기독교 형태는 헬라어에 기초했고, 아타나시우스, 갑바도기아 학자들, 그리고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같은 지중해 동부지역의 교부학자들의 문헌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2. 서부 유럽 이 지역은 주로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들,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를 일컫는다. 이 지역에서 지배적이었던 기독교 형태는 로마시와 “교황”이라고 알려진 감독을 중심으로 했다. 이곳에서 신학은 대성당과 파리와 다른 곳에 있었던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행해졌고, 그것은 대부분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그리고 포이티어스의 힐러리의 라틴어 문헌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
3. 캘리페이트(the Caliphate) 이는 대부분의 지중해 동쪽과 끝과 남쪽 끝의 지역을 포함하는 이슬람권이다. 이슬람은 확장을 계속했는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5세기말에 이르러, 이슬람은 유럽대륙에서 스페인과 발칸의 두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이슬람의 전진은 마침내 15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스페인에서의 무어족의 패배와 1523년 비엔나 교외에서의 이슬람 군대의 패배로 인해 멈추게 되었다.
다양한 이유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근거를 둔 동방 교회와 로마에 근거를 둔 서방교회 사이의 관계가 9세기와 10세기 동안에 점점 긴장의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니케아 신조의 “필리오케(filioque)” 절에 대한 점증하는 의견의 불일치는 이와 같이 적대감이 증가하는 분위기에서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서방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사이에 있었던 최종적인 결렬연대는 다소 유동적이긴 하지만 보통 1054년으로 보고 있다.
용어의정의
중세 The Middle Ages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의 저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말이 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 같다. 르네상스의 저술가들은 고전적 고대의 영화와 그들 자신의 새대 사이에 끼어 있는 시대를 평가 절하하려고 노력했다.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암흑 시대의 끝에서 16세기 사이의 기간에 있었던 서방의 유럽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소위 암흑시대가 마침내 서구 유럽으로부터 사라지고 중세로 이어졌을 때, 11세기 말 프랑스에서 정치적인 안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유럽지성의 중심으로 인식되었던 파리 대학이 신속하게 재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한 학교 중 하나는 솔본느 대학이었는데, 그 대학은 결국 매우 유명하게 되어 “솔본느”라고 하면 파리의 대학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16세기에 이미 파리는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장 칼뱅과 같은 휼륭한 학생들과 함께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데 주도적인 중심지로서 널리 인식되었다. 중세시대 초기는 프랑스에서의 발전에 의해 주도되었다. 여러 수도원들은 특출한 기독교 저술가들과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예를 들어 랑프랑 안젤무스가 있는데, 이 둘은 모두 노르망디에, 대 알베르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보나벤트라와 같은 학자들과 함께 신학적 성찰을 위한 주도적인 중심지로서 입지를 확보했다.
신학에 대한 중세의 새로운 관심이 일게 된 핵심적인 자원 역시 파리와 연결되고 있다. 1140년이 되기 직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가 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해 파리에 도착했다. 그가 남긴 것은 하나의 교과서인데, 그것은 아마 이제까지 쓰여진 책 중 가장 지루한 책 중 하나일 것이다.『사명제집 Sententiarum libri quattuor』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성서와 교부작가들로부터 인용문을 함께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왜냐하면 학생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을 가지고 고심하며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며, 불일치 한 부분에 대해 적절한 신학적 설명을 찾아냄으로써 상반되게 보이는 본문을 조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The Renaissance
프랑스 말인 “르네상스”는 이제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부흥을 지칭하는 말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546년에 파올로 지오비오는 14세기를 가리켜 “라틴 문자가 ‘다시 탄생한(renatae)’ 것으로 간주되는 행복한 세기”라고 말했는데, 마치 이 전문용어를 예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가장 뚜렷하게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같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는 근대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사상에서 왜 이탈리아가 이 눈부신 새로운 운동의 요람이 되었는지 완전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고대의 문화적인 영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중세의 지성적인 성취를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르네상스 저술가들은 중세의 성과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고대의 보다 위대한 성취에 비해 그들의 비중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중세의 저술가들은 후기 고전 시대가 내용과 방식 모두에 있어서 중세의 신학 저술을 전적으로 능가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스콜라주의 Acholasticism
스콜라주의는 아마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비하된 지성적 운동의 하나일 것이다. “바보(dunce)”라는 영어 단어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라는 가장 위대한 스콜라 학자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다. “스콜라주의”라는 바로 이 용어는 그것이 대변하는 운동을 평가절하 하려고 애썼던 인문주의 저술가들에 이해 창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는 문화적으로 장엄한 고대와 고대가 부활된 르네상스 사이에 있었던 막간극 정도로 인식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스콜라 철학(scholastics; 라틴어로 scholastici)”이라는 용어는 똑 같이 깔보는 어투로 중세의 이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스콜라주의는 1200-1500년 사이에 풍미했던 중세의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좋겠는데, 그것은 종교적 신앙의 합리적 정당화를 강조하여 그 신앙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스콜라주의”는 ‘신앙에 관한 특별한 체계’가 아니라 ‘신학을 조직화하는 특별한 방식’을 가리킨다. 스콜라주의는 그래서 자료를 제시하고, 휼륭하게 자료를 구분하며, 신학에 포괄적인 견해를 취합하고자 하는 고도로 발전된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콜라주의는 기독교 신학의 많은 핵심 영역, 특히 이성의 역할과 신학에 있어서의 논리와 관련된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의 스콜라주의가 있었는가?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는 이 방법을 적용해서 나온 결론인 특별한 교리 체계를 말한다기보다 접근방식이나 방법론을 가리킨다. 그래서 서로 다른 여려 개의 스콜라주의의 형태가 존재한다.
실재론과 유명론(Realism and nominalism)
스콜라 시대 전기(약1200-1350)는 실재론에 의해 주도된 반면에, 후기(약1350-1500)는 유명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실재론은 이 두 글이 형상화하고 있는 보편적인 “백(whiteness)”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특별한 돌들은 보편적인 “백”의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 흰 돌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반면에 “백”의 보편성은 다른 형이상학적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유명론은 “백”의 보편적 개념은 불필요하며 대신에 특수한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재론에 영향받은 두 개의 주요 “학파”가 초기 중세시대를 지배한다. 이것은 각각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의 저술에서부터 파생된 ‘토미즘(Thomism)’과 ‘스코티즘(Scotism)’이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주의는 실재론보다는 유명론에 치우친 두 개의 다른 학파의 의해 지배받게 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근대적 방식(via moderna)”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schola Augustiniana moderna)”라고 알려지고 있다.
근대적 방식(The modern way)
“근대적 방식(via moderna)”이라는 용어는 한 때 “유명론”이라고 알려진 운동을 가리키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현재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편인데, 이들 추종자들 중에는 오캄의 월리엄, 피에르 달리, 로버트 홀코트, 그리고 가브리엘 비엘과 같은14-15세기의 사상가들이 있다. 15세기 동안에 “근대적 방식”은 많은 북유렵의 대학들, 예를 들어 파리,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에어프르트에 있었던 대학들에 깊이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펠라기우스 주의”라고 명명된 칭의의 교리를 채택했다.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The modern Augustian school)
14세기초에 있었던 “근대적 방식”의 거점 중의 하나는 옥스퍼드 대학이었다. 브래드워딘은 『펠라기우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라는 책을 통해 옥스퍼드의 “근대적 방식”의 개념에 불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아우그스티누스의 견해로 돌아가는 칭의의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반펠라기우스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다. 브래드워딘의 생각이 존 위클리프에 의해 영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유럽 본토에서는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그리고 프란시스 수도회가 둔스 스코투스의 견해를 전파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의 사상을 전파하곤 했다.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로부터 비롯된 아우구스티누스 전승의 전수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 점차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라고 언급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안에서였다.
첫째로, 그레고리우스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 관한 유명론자의 견해를 채택했다. 둘째로, 그레고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구원론 혹은 구원에 관한 교리를 발전시켰다. “근대적 방식”의 옹호자들이 인간이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들의 의롭게 됨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레고리우스는 오직 하나님만이 칭의를 주도하실 수 있다고 고집한다.
“근대적 방식”은 필요한 구원론적 방편의 대부분 (‘모두’가 아니다)은 인간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인간성 ‘밖에’ 존재하는 방편의 예라고 본다; 인간성 안에 위치한 중요한 구원론적 방편의 예다.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방편들이 전적으로 인간성밖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죄를 그만두고 의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 역시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인문주의 Humanism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 하나님의 존재나 관련성을 부인하는 세계관을 의미하거나, 순전히 세속적인 세계관에 관심을 가진 것을 의미하는 정도가 된 말이다. 최근의 과거 역사에서, 인문주의에 대한 두 개의 주된 해석 노선이 매우 우세했다. 첫 번째 노선에 따르면, 인문주의는 고전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에 공을 들인 운동이었다. 두 번째 노선에 따르면, 인문주의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르네상스 철학을 구성하는 일련의 사상이었다. 인문주의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헬라와 라틴 고전이 원어로 널리 연구되었으므로 인문주의가 본질적으로 고전시대 연구에 헌신한 학문적 운동이었던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인문주의자들이 ‘왜’ 무엇보다도 고전을 연구하려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대에 문장이나 말에 있어 수사법(eloquence)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인문주의자들은 영감과 교훈을 얻기 위하여 문장 수사법에 대한 모델로서 고전을 연구했다. 고전에 대한 지식과 철학적 능력은 단순히 고대의 자원을 활용하는 데 사용된 도구였다.
이 운동은 새로운 르네상스 철학을 구체화했는데, 이는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반종교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를 미리 예시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주요한 난점이 이와 같은 꽤 야심찬 인문주의에 대한 해석을 가로막고 있다. 첫째로, 인문주의자들은 일차적으로 수사법 향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둘째로, 인문주의자들의 저술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인문주의”는 놀라울 만치 이질적이라는 걱정스러운 사실을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많은 인문주의 저술가들은 진정으로 플라톤주의를 선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은 텔레스주의를 선호했다.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어온 보다 현실적인 접근방법은 인문주의를 다양한 형태의 수서법의 향상과 일차적으로 관계된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운동으로 보는 것이다. 도덕, 철학, 그리고 정치에 대한 관심은 이차적 중요성을 가진다. 인문주의는 본질적으로 문화적인 프로그램이었는데, 설득력의 모델로서 고전적인 고대에 호소한 프로그램이었다.
북유럽의 인문주의
신학적으로 특별히 중요하다고 판명된 “인문주의”의 형태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북유럽의 인문주의이다. 북유럽의 인문주의가 그 모든 발전단계에 있어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로부터 결정적으로 영향받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북유럽의 학자들이 남쪽의 이탈리아로 이동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또 하나는 이탈리아 인문주의들이 외국에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인쇄된 책들을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베니스의 알다인 출판사와 같은 거점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북유럽의 인문주의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이상이 그 운동을 통틀어 광범하게 수용되었던 듯하다. 첫째로, 우리는 문장과 말의 수사법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에서와 같이 고전시대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기독교회의 집단적 부흥을 목표로 행해진 종교적 프로그램을 발견한다. “다시 태어난 기독교(christianismus renascens)”라는 라틴어 슬로건은 이 같은 프로그램의 목적을 요약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의 연관된 문학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스위스 인문주의
스위스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스위스는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관념을 수용하기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비엔나 대학은 이 지역의 매우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교양학부 내의 무혈혁명은 콘라드 셀티스의 영향력을 통하여 대체적으로 조종되었고, 이것은 비엔나가 15세기의 마지막 몇 해 동안에 인문주의 학문의 증심지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비엔나는 일명 바디안(Vadian)이라고 하는 와트의 요아힘과 같은 위대한 인문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스위스 인문주의는 집중적인 연구주제가 되었고, 그것의 기본적인 기풍(ethos)은 꽤 잘 이해되고 있다. 스위스 인문주의의 주도적인 인물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일련의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일차적으로 하나의 생활방식이었다. 개혁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도덕성에 관계되었고, 개별 신자들의 인격적인 도덕적 갱신의 필요와 관계되었다. 스위스 인문주의의 기풍은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바른 도덕적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기풍은 특별히 칭의의 교리(doctrine of justification)와 관련하여 많은 중요한 내용을 암시라고 있다.
이러한 관찰이 가지는 중요성은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관련된다. 츠빙글리가 1519년 취리히에서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스위스 인문주의 도덕운동의 성공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1520년대까지는 츠빙글리의 사상 속에 “은총의 교사(doctor of grace)”인 아우구스티누스는 특출나게 등장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츠빙글리는 결국 스위스 인문주의의 도덕론과 결별했지만(아마 1523년 어간에 1525년까지는 확실), 이 시점까지 그의 개혁 프로그램은 당시의 스위스 인문주의들 동지회의 특징이었던 도덕주의적 교육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프랑스 인문주의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법 연구는 급진적인 개혁과정에 있었다. 프란시스1세 치하의 절대주의적 프랑스 군주제는 행정적으로 집중화 경향을 점차 더해가는 가운데 사법적 개혁을 프랑스 근대화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개혁 과정에 속도를 내기 위하여, 그리고 프랑스 전역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법 체계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갖고, 일단의 학자들을 후견했는데, 이는 부르주(Bourges)와 오를레앙(Orleans)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법전학자들 중 선구자는 기욤 뷔데였는데, 그는 수사적이면서 경제적인 프랑스의 새로운 법적 필요를 층족시키는 수단으로서 로마법으로 직접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원전으로부터(ad fontes)’ 직접 가져오는 프랑스 인문주의 프로그램이 파생시킨 직접적인 한 결과는 주석(본문에 대한 주해)과 논평을[더 이상] 참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석과 논평은 유용한 연구의 도구로 인식되기 보다 오히려 원전과 관계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으로 점점 더 간주되기 시작했다. 1528년경 오를레앙에 도착한 부르주와 오를레앙의 한 학생은 미래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었다. 칼뱅은 오를레앙과 부르주에서 민법을 공부하는 가운데, 인문주의 운동의 주요 구성요소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다. 가장 위대한 성서 주석가요 당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된 칼뱅의 방법론의 기원은 오를레앙과 부르주의 수준높은 학문적 분위기에서 법을 공부한 것에 기인한다는 논의는 타당할 것이다.
영국 인문주의
16세기 초기 영국 인문주의의 중심지로서 옥스퍼드와 런던의 중요성이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했던 곳은 캠브리지 대학이었다. 캠브리지는 초기영국 종교개혁의 진원지였으며, “백마 광장”(White Horse Circle;)을 중심으로 1520년대 초에 로버트 반즈 같은 사람들이 모여 마르틴 루터의 최근 저술을 탐독하고 토론했던 곳이다.
주요신학자들
캔터베리의 안젤무스(Anselm of Canterbury 약1033-1109)
안젤무스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니. 곧 프랑스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학문의 중심인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빨리 논리학과 문법을 숙달했으며, 노르만의 베크 수도원에서 선생으로서의 놀라운 평판을 얻었다.『프로슬로기온 Proslogion』은 1079년 어간에 쓰여졌다. 그것은 뛰어난 저술인데, 안젤무스는 이 책에서 최고의 신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성격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해줄 논증을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결과적인 분석은 “존재론적 논증”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인식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추론한다.
영국에 대한 노르만의 침공(1066)에 이어, 안젤무스는 1093년에 켄터베리 대주교로 초청받게 되는데, 이로써 영국 교회에서 노르만이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안젤무스의 생애에 있어 전적으로 행복한 시기는 아니었다. 영국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한 시기 동안에 안젤무스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일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를 썼다. 이 글에서 안젤무스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필요성을 잘 설명하려고 하며, 성육신과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 결과 인간에서 주어진 혜택을 분석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약 1225-74)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로카세카 성에서 아퀴노의 란둘프(Landulf of Aquino)백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44년 그가 십대 후반이었을 때, 아퀴니스는 “설교수도회”라고도 알려진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아퀴나스는 1248년 콜로뉴로 이주하기 전에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252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다음 3년 동안 그는 마태복음에서 대해 강의했고 『이방인들에 대한 총론 Summa contra Gentils』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1266년에 그는 보통『숨마 테올로기아이 Summa Tbeologiae;신학대전』라는 라틴어 명칭으로 알려진 그의 많은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1273년 12월6일, 아퀴나스는 더 이상 저술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내가 쓴 모든 것은 나에게 지푸라기와 같이 보인다”고 말했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약 1265-1308)
스코투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중세의 가장 휼륭한 지성의 한 사람이다. 그의 짧은 생애 중에서 그는 캠브리지, 옥스퍼드. 그리고 파리대학에서 가르쳤으며, 『명제에 관한 주석Commentaries on the Sentences』을 개정하여 세 번 출판했다.
(1) 스코투스는 아리토델레스와 관련된 지식론의 대가였다. 보다 초기의 중세에는 지식에 대한 상이한 이론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계몽 이론(illuminationism)”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지식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지성을 계몽함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2) 스코투스는 종종 ‘주의설(voluntarism)’이라고 언급된 교리인 신적 의지가 지성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아퀴나스는 신적 지성이 우위에 선다고 주장했다; 스코투스는 신적 의지의 우선설에 대한 가정을 기초로 하여 신학에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다.
(3) 스코투스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무죄수태설의 대가였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인간의 공통적인 죄의 주장을 고유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그리스도가 그의 완전한 구속사역의 덕택으로 마리아를 원죄로 물드는 것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오캄의 월리엄(William of Ockham 약1285-1347)
많은 점에서 오캄의 월리엄은 스코투스와 연관된 몇 가지 논증적 방법을 발전시킨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가 주의설적 입장을 일관되게 옹호한 것인데, 이는 신적 의지가 신적 지성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첫째, 오캄의 면도날은 종종 “절약의 원리(the principle of parsimony)”로 언급되었다. 오캄은 단순성이 신학적이고 동시에 철학적인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면도날”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가설들을 제거했다. 이것은 그의 칭의 신학에 있어 주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보다 초기의 중세 신학자들(아퀴나스를 포함하여) 중간적인 초자연적인 실체가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영혼에 주입되어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캄은 이러한 개념을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폐기처분하고,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둘째, 오캄은 유명론의 열렬한 옹호론자였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그의 면도날의 사용에서 비롯되었다; 보편주의 이론은 전적으로 불필요한 가설이라고 보아 제거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약 1469-1536)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 저술가로 간주되며, 16세기 전반부 기독교 신학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정받는다. 비록 그가 어떤 의미에서도 개신교도는 아니었지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지성적 기초를 놓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기독교인 군사의 교본 Encbiridion militis Cbristiani』이라는 그의 책은 종교 출판물의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비록 이 책이 1503년 처음으로 출판되고 1509년에 재판되었지만, 진정한 영향력은 1515년에 나온 제 3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은 에라무스가 교회가 소유한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간주한 교육받은 평신도와 여자들에게 호감을 샀다.
『교본』은 당시의 교회가 교부들의 문헌과 성경으로 집단적으로 돌아옴으로써 개혁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논지를 개발했다.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는 것은 새로운 평신도의 경건의 열쇠로서 제시되었으며, 그것에 기초하여 교회는 갱신되고 개혁될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도록 요청받는 “그리스도의 율법(lex Christi)”이다. 그는 내적 종교에 대하여 특징적으로 인문주의적인 강조를 보여줌으로써, 성서 읽기가 독자를 ‘변호시키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도록 새로운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많은 특징은 특별히 중요하다. 첫째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의 미래적 활력이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와 더불어 존재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둘째로, 내적 종교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강력한 강조는 교회, 즉 교회의 의식, 신부 혹은 제도들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
주요 신학적 발전들
교부적 유산의 강화
암흑시대 기운의 걷히게 되었을 때, 기독교 신학자들은 위대한 교부 저술가들이 그만두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서방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서방 교회의 신학자들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쓰여진 중요한 수집 문헌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여기에서 그들 자신의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을 삼았다.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의 탐구
기독교 신학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토대 위에 세우려는 새로운 관심으로 말미암아, 신학에서 이성의 역할에 이성의 역할에 대해 사려 깊은 탐구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스콜라주의의 핵심적이고 명료한 특징이었다. 초기 중세시대의 신학적 르네상스가 진행됨에, 두 가지 주제가 신학적 토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하고 ‘확대’해야 할 필요성과 그 신학의 ‘내재적 합리성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었다. 11세기 저술가인 캔터베리의 안젤무스는 기독교 신학의 합리성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그의 이름과 연관하여 생각하게 된 두 가지 문구로 표현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과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egam).” 그의 기본적인 통찰력은 신앙이 이해보다 우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내용은 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쓴『독백 Monologium』서문에서, 안젤무스는 성경 자체에서 기초하여 성경 안에서 아무런 확실한 이론도 세우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 대신에 그는 “합리적인 증거와 자연스런 생각”에 기초해서 모든 확실한 이론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11세기와 12세기 초기에는 철학이 두 가지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철학은 신앙의 합리성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었고, 그래서 신앙을 비기독교적 비평가들에 대해 옹호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철학은 신앙의 요목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정리하는 방법들은 제공했고, 그 결과 신앙의 요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에 기초해서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한 신학적 발전이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옹호하는 중요한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 이후로 헬라어 “방어(apologia)”라는 단어에서 온 “변증론(apologetics)”이라고 알려져온 학문분야이다. 이러한 방식에 의한 신학의 발전을 오르비에토의 휴골리노와 같은 후기 중세 저술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의 개념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의 개념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게 되었다.
신학체계의 발전
스콜라주의 핵심인 체계화시키려는 압박은 복잡한 신학체계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시대의 저명한 역사가인 에띠엔느 질송은 이를 “마음의 성당(cathedrals of the mind)”으로 설명했다.
성례전 신학의 발전
초대 교회는 성례에 대한 논의에 있어 다소 부정확한 모습을 보였다. 세례와 성만찬은 일반적으로 성례로서 인정되었다. 교회는 공적 예배의 행위를 안전한 지적 기초에 두어야 할 새로운 압력을 받았고, 따라서 예배의 이론적 측면을 강화해야 했다.
은총의 신학의 발전
아우구스티누스적 유산이 핵심적인 요소는 은총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의 신학은 논쟁적인 상황에서 주장되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의 교리를 강화할 임무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것을 보다 믿을 수 있는 토대 위에 세우고 그 결과를 탐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은총과 칭의의 교리는 그 시기에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핵심적인 쟁점들에 관한 종교개혁의 논쟁에 기초를 놓게 되었다.
구원의 구도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은총과 칭의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역할에 새롭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마리아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은 원죄와 구속의 성격에 강렬한 신학적 성찰과 연결되어 마리아와 관련된 일련의 신학적 발전으로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중 많은 것들은 둔스 스코투스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는 마리아론을 지금까지보다 상당히 더 발전된 토대 위에 놓았다.
기독교 신학의 자료로 직접 회귀하는 문제
인문주의적 주제의 핵심적인 요소는 고대 로마와 아덴이라는 서방 유렵문화의 원래의 자료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소에 대한 신학적인 대응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가 되는 자원,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으로 직접 돌아가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결과 주위 하나는 신학적 원천으로서 성경의 기반적인(foundational)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중세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던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 중 하나인 “불가타(Vulgate)”였다. 인문주의적인 본문 비평 기술과 언어학적 기술의 도입은 불가타와 변역하려는 원문 사이에 존재하는 골치아픈 차이점들을 부각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교리적 개혁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신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성경의 불가타 번역에 대한 비판
인문주의의 문학적이고 문화적이 프로그램은 “원자료로 돌아가라(adfontes)”는 구호로 요약될 수 있다. 기독교회에 적용해보면, 그 ‘ad fontes’라는 구호는 기독교의 권리증서(title-deeds)인 교부들의 글과 무엇보다도 원어로 연구된 성경으로 직접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을 직접 다룰 것을 요구했다. 최초로 인쇄된 헬라어 신약성경은 에라무스에 의해 1516년에 출판되었다. 에라스무스의 본문은 마땅히 그래야 했던 만큼 그렇게 신뢰할 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라어 성경은 문학적 이정표로 판명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헬라어 원문과 나중에 나온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에 의해 쓰여진 글을 인용하면서, 에라스무스는 몇 권의 주요한 신약성경 본문에 대한 불가타 변역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번역의 발전은 불가타의 번역의 신빙성을 침해했으며,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바탕으로 신학적인 수정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 그것은 또한 신학과 관련하여 성서학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비잔틴 신학
“비잔틴 신학”은 비잔티움이라는 헬라 도시로부터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새로운 수도로 정한 도시이다. 이때 비잔타움은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도시)이라고 개명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527-565)시기에, 비잔틴 신학은 일정한 중요성을 지닌 지성적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비잔틴 사상가들은 종종 서방 신학과 다른 입장을 강조했고(예를들면 필리오케 논쟁), 논쟁적인 글들을 통하여 그들의 독특한 방법론을 강화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비잔틴 저술가들은 구원을 서방의 법적 혹은 합리적 법주보다는 오히려 ‘신성화(deification)’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쯤에는 동방과 서방의 차이가 이전보다 더욱 벌어져 있었다.
비잔틴 신학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놓여 있는 기풍(ethos)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잔틴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체계적인 구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주어진” 무엇이었다. “조직 신학”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인 비잔틴 기풍에는 다소 어색한 것이었다. 그의 책『정통 신앙에 관하여 de fide orthodoxa』로 동방의 독특한 기독교 신학을 강화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다마스커스의 요한(약675-749) 까지도, 통찰력이 있거나 창조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의 해설자로 보아야 한다. 비잔틴 신학 (현대의 그리스와 러시아의 정통주의를 포함하여)은 이처럼 “전통(parodosis)”의 개념, 특별히 헬라 교부들의 문헌이란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고 있다.
두 가지 논쟁이 특별히 중요하다. 725-842년 기간에 발생한 첫 번째 논쟁은 보통 “성상 파괴 논쟁(iconoslastic controversy)”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황제 레오3세(717-742)가 성상이 유대인과 모슬렘의 개종에 장애가 된다는 근거에서 성상을 파괴하라는 결정에 대하여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4세기에 발생한 두 번째 논쟁은 정적주의 (hesychasm; 헬;hesychia=침묵)의 쟁점에 모아졌다. 그것은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눈으로 “신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신체적 훈련을 통한 명상 양식이다. 그것은 새로운 신학자 시므온과 1347년에 데살로니가에 대주교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와 같은 저술가들과 특별히 관련되었다. 팔라마스는 현재 일반적으로 “팔라미즘(Palamism)”이라고 알려진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신적 에너지와 신적 본질을 구별하고 있다. 팔라마스의 신학은 특별히 평신도 신학자인 니콜라스 카바실리스에 의해 지지되고 발전되었는데, 그의 책『그리스도 안의 생명Life in Christ』은 비잔틴 영성에 관한 고전적인 책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곧 선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860년 어간 어떤 때에, 모라비아의 통치자였던 라스티슬라프는 비잔틴 황제에게 중부 유럽의 그의 백성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두 명의 그리스 형제들인 시릴과 메토디우스가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여 파송되었다. 시릴은 슬라브어를 쓰는 데 적합한 알파벳을 창안했다. 이것은 현대 시릴 문자의 기초가 되었으며, 아는 두 명의 “슬라브 사도들” 중 동생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 모라비아의 개종에 이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그 세기의 나중에 개종했다. 이것은 988년 어간 러시아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동서방 교회가 점차 소원해지면서 (1054년 최후의 분열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불화의 산물이었다) 동방사상들은 빈번하게 서방신학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으로 정교회의 지적. 정치적 주도권은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10세기에 비잔틴 선교로 개종한 러시아인들은 1054년 분열에서 그리스편에 섰었다.
중세 시대에 러시아에서 동방 정교회가 융성하게 된 것이 모스크바 러시아의 형성에 매우 중요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리도니즈의 성 세르기우스 같은 지도자들의 인도 하에 일어난 수도원 부흥은 러시아 교회의 선교 노력에 더욱 자극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13세기에 카렐리아 지역의 핀란드어를 말하는 민족들이 정교회가 개종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의 함락은 러시아 정교회 내에 중요한 발전을 가져왔다. 러시아 교회는 그야말로 비잔틴 교회의 딸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함께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은 과거사가 되었다. 결국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 정교회가 스스로 통치하게 되었다. 1523년이 되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져서 어떤 저술가들은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라고 언급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를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 똑같은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줄 것을 기대했다.
사례연구 2.1 하나님의 존재 증명
“존재론적 증명”은 1079년에 출판된 안젤무스의 『프로슬로기온』에 처음으로 나온다 안젤무스 자신은 그의 논의를 “존재론적” 증명으로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의 방법론을 언급하고자 할 때, 그것에 “안젤무스의 증명”이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그의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젤무스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생각되어질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aliquid quo maius cogitari non potest)”로서 제시한다. 하나님의 실재는 하나님 개념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더 이상 생각되어질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한다면,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의 실재를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야만 한다. 이는 중요한 논증이지만, 그에 대한 최초의 비평가들 중 한 사람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는 “어리석은 자를 위한 응답”이라고 알려진 응답을 한 가우닐로라는 베네딕트 수도사였다. 가우닐로에 의하면, 안젤무스의 “증명”에는 분명한 논리적인 약점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이상 완전한 섬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하나의 섬을 상상해보라고 가우닐로는 제안한다. 가우닐로에 의해 제시된 반응은 안젤무스의 증명이 심각한 약점을 드러내는 널리 간주되고 있다.
매우 다른 방법론이 위대한 스콜라 저술가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제시되었다. 아퀴나스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이끌러내어, 하나님의 존재를 지시해주는 것들(=암시들)을 식별하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었다. 아퀴나스를 인도하는 사상의 기본노선은 세계는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로서 나타낸다-이는 그의 “존재의 유비”라는 교리에서 더 공식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첫째 원인이며 세계의 설계자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존재케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 신적 이미지와 유사성을 심어놓았다. 아퀴나스는 세계의 질서가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에 대한 가장 신빙성있는 증거하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가정은, 비록 그것이 종종 “설계 증명”혹은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언급되는 논증의 경우에 특별히 중요한 것이지만, 각각의 “다섯 가지 방법들”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세상에 있는 만물이 움직이거나 변화하고 있다는 관찰로부터 비롯된다. 세계는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아퀴나스의 첫 번째 논증인 이것은 보통 “운동 증명”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고 자연은 어떻게 움직이게 되었는가? 아퀴나스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움직임의 각 원인은 그 자체가 원인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퀴나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배후에는 전체적인 일련의 움직임의 원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방법은 인과개념으로 비롯된다. 다른 말로 하면, 아퀴나스는 세상에 원인과 결과의 존재를 지적한다. 하나의 사건(결과)은 또 다른 하나의 영향력(원인)에 의해 설명된다.
세 번째 방법은 부수적(contingent)존재의 존재와 관계한다. 세계는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 (인간과 같은)을 포함하고 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필연적인 존재인 반면 인간은 부서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아퀴나스는 어떤 존재가 존재하게 된 것은 이미 존재하던 무엇이 존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네 번째 방법은 진리, 선함, 그리고 고귀함과 같은 인간의 가치로부터 비롯된다. 아퀴나스는 그 자체가 진실하고, 선하고 그리고 고귀한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진리, 선함 그리고 고귀함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존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념의 근본은 그들의 처음 원인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아퀴나스는 제안한다.
다섯 번째 마지막 방법은 목적론적 증명 자체이다. 아퀴나스는 세계는 지적인 설계의 분명한 흔적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자연의 과정과 사물들은 마음속에 있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따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논증하면서, 아퀴나스는 이 자연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결국 아퀴나스의 증명은 오로지 세계의 창조자, 혹은 세계 속의 결과들을 야기시킬 수 있는 지적 존재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비약은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이 창조자 혹은 지적 존재가 기독교인들이 알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 “이다” 라는 사실은 여전히 증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사례연구 2 .2 속죄에 대한 이해
중세시대에는 학문적인 신학과 대중적 종교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사역(또한 종종 “속죄”로서 언급된)에 관한 교리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대중 종교에서 특히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하나의 주제는 “지옥의 정복(the harrowing of Hell)”개념이었다. 이 개념의 배경은 신약성경 안에서 발견된다.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 그리고 사탄에 대하여 거둔 승리를 상당히 강조했다. 이 승리의 주제는 종종 부활절 축하와 제의적으로 결합하면서 계몽주위에 이르기까지 서방 기독교의 신학적 전통 안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주제들을 이끌어내었다.
대속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표상은 이레니우스와 같은 헬라 교부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물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간 지불되었어야만 했던 것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주장했다. 하나님은 대속물을 가지고 죄인을 볼모로 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속물을 하나님에게 지불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귀에게 지불되었어야만 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러한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마귀에 대한 승리의 표상은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옥의 정복”에 대한 중세의 개념은 마귀에 대한 승리의 개념을 증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서 갇힌 영혼들을 풀러주려고 지옥문을 부수었다. 그 개념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베드로전서 3:18-22의 내용에 근거 (희미하게나마)하고 있다.
매우 다른 접근방식이 안젤무스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그는 마귀를 속이는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개념이나, 타락한 인간에 대한 어떤 종류의 “권리”를 마귀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그러한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어떤 개념에도 반대했다. 기껏해야 마귀는 인간에 대하여 ‘사실상의(de facto)’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은 비록 불법적이고 부당한 힘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다. 안젤무스는 구속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귀를 속인다는 어떤 개념도 거부한다. 구속의 전체적인 길은 하나님의 근거하며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안젤무스는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의 특성에 전적으로 일치되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속하신다. 그의 논문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인간 구속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대화의 형식으로 계속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안젤무스의 접근방식에 존재하는 분명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진보가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전과정을 통틀어 정의의 원리에 따라서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안젤무스가 주장함으로써, ‘승리자 그리스도’ 방식의 모호한 도덕성과 결정적으로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퀴나스는 안젤무스에 의해 설명된 “만족”의 개념을 그것에 대해 제기된 많은 반대 주장을 다루면서 발전시키고 있다. 아퀴나스의 분석은 속죄의 “만족” 모델에 대한 신학적 잠재력을 보여 준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제가 정말 적절하게 탐색되었는지에 관해 의구심을 가졌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방식에 더 큰 강조점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러한 강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중세의 진술은 아벨라르두스의 저술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벨라르두스에 있어, “성육신의 목적과 주의 (cause)는 그리스도는 그의 지혜로 세상을 비추고 자기를 사랑하게 하려고 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벨라르두스는 이 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류로부터 사랑의 반응을 촉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를 공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을 재 진술하고 있다. 아베랄르두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정확히 어찌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우리를 설득하는 적절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찾는 그의 방법론은 그러한 죽음이 가지는 강력한 주관적 영향력을 바로 깨닫게 해주었다.
사례연구 2. 3 성례에 대한 논의
기독교 전통의 처음 몇 세기에는 성례전 신학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것이 특징이다. 2세기 중에는 일반적인 성례의 성격에 관한 약간의 논의가 디다케와 이레니우스의 글과 같은 저술에서 발견된다. 성례전의 정의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여 성례전적 쟁점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시작 한 것은 비로소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였다: 첫째, 성례는 표지(sign)이다. “표지가 신적인 것들에 적용될 때 성례라 부른다”. 둘째, 그 표지는 지시된 것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만약 성례가 되는 것과 일종의 유사성을 갖지 못하면, 그것은 전혀 성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은 여전히 부정확하고 부적절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례를 단순히 “거룩한 것에 대한 표지”로 정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더 상세한 설명이 있게 된 것은 바로 성례전 신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인 중세 초기였다. 12세기 전반부에 파리에 근거를 둔 신학자인 성 빅토르의 휴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제시된 바로 그 부정확한 정의를 수정했다. 성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네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음을 유의하라. 그것들은 “외적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물리적 혹은 물질적인 요소, 어떤 보이지 않으며 영적인 은총의 요소를, 유사성을 가지고 대표하며 그 제도를 가지고 지시해주며 포함하는 것”이다
중세 신학에서는 “옛 언약의 성례”(할례와 같은)와 “새 언약의 성례”를 조심스럽게 구별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옛 언약의 성례가 단지 영적 실재를 지시한 것이라면, 새 언약의 성례는 그것이 지시한 것을 현실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가 내린 성례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었다. 휴에 따르면, 성육신, 교회 그리고 죽음과 같은 것들은 “성례”였다.
이 상황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공헌을 통해 해결되었다. 1155-58년에 파리에서 쓴 『사명제집』에서, 그는 어떤 물리적인 요소(빵, 포도주, 혹은 물과 같은)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휴가 제시한 것과는 다른 성례에 대한 정의를 제안했다. 롬바르두스는 이러한 정의를 사용하여 일곱 성례의 목록을 확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중세 가톨릭 신학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사례연구 2. 4 성경의 해석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항상 신학적으로 중요했으며, 중세시대에도 어느 정도 많이 논의되었다. 보통 “성경의 4중 의미”라고 알려진 해석의 체계가 완성된 것은 바로 기독교 사상사 중 이 시기였다. 당시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 내에서 가장 큰 영항력은 유대인 저술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저속적인 영향이었다. 필로는 본문의 겉표면 아래 숨어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성경의 피상적인 의미 아래에 감추어진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오리게네스를 포함하여 알렉산들리아에 근거를 둔 신학자 집단에 의해 채택되었다. 알레고리적 방법의 범위는 오리게네스가 핵심적인 구약의 표상(images)을 해석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한 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를 정복한 것을 가리켰고, 마찬가지로 레위기의 희생 제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제사를 앞서서 지시한 것으로 본다.
이와 대조적으로 안디옥 학파는 성경의 문맥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 학파는 특별히 다소의 디오도르, 요한 크리소스톰, 그리고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와 같은 저술가들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입장을 강조했다. 이처럼 테오도로스는 구약성경의 예언을 다루면서 예언의 메시지가 기독교 독자들에게는 발전된 의미를 가진다고 보면서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말해진 사람들에게는 발전된 의미를 가진다고 보면서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말해진 사람들에게 적절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든 예언적 신탁은 단 하나의 일관된 역사적 혹은 문자적인 의미만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방 교회에서는 약간 다른 방법론이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결국 “꽈드리가”(Quadriga; ‘4중의미’의 뜻)에서 온전하게 표현되고 있다. 밀란의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많은 저술에서 성경의 의미에 대한 세 가지 이해를 발전시켰다: ‘자연적’의미에 덧붙여, 해석자는 ‘도덕적’ 의미, 그리고 ‘합리적’혹은 ‘신학적’의미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방법을 따라 해석하면서도 2중 의미를 또한 주장했다-‘문자적. 물리적(fleshly). 역사적’ 해석방법과 ‘알레고리적 신비적. 영적’ 해석방법이 그것인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때때로 어떤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석방법을 사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특별히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에 관하여 말할 때, 성서적 해석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게 된 글에서 이러한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안에 감추어져 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의해 접근 가능하다(In Vetere Novum latet et in Novo Vetus patet).”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문자적’의미와 , 다른 한편으로 보다 깊은 ‘영적’ 혹은 ‘알레고리적’의미 사이의 차이는 초기 중세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중세시대에 사용된 표준적인 성서해석 방법은 보통 “꽈드리가(Quadriga)” 혹은 ‘성경의 4중 의미’로서 알려지고 있다. 성경은 네 가지 다른 의미를 소유하고 있다. 문자적인 의미에 덧붙여, 세 가지 비문자적 의미를 구별해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믿어야 할 것을 말하는 알레고리적 의미;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것을 말하는 비유적(tropological), 혹은 도덕적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희망해야 할 것을 말하는 신비적(anagogical)의미,
사례연구 2 . 5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성경
중세 신학자가 “경전”을 언급할 때. 그는 거의 변함없이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 성경은 ‘텍스투스 불가투스’(textus vulgatus; 문자적으로 ‘평범한 본문’ 이라는 뜻)로서 널리 언급되던 것인데 이는 위대한 교부 성서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Jerome)가 4세기 후기와 5세기초기에 번역한 것이다.
11세기에 지적 활동의 새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러한 지적 르네상스의 일부로서 발전했던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 이 본문에 대한 표준판이 요구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표준화에 대한 이러한 필요는 1226년에 파리의 몇몇 신학자들과 출판업자들이 함께 위험한 모험을 함으로써 채워지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불가타 본문의 “파리 판본”이 생겨났다. 그것은 순전히 상업적인 모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문주의적인 본문비평과 언어학적 기술의 발흥은 불가타와 그것이 번역하려고 목적했던 본문 사이에 존재하는, 우려할 만한 차이를 드러내곤 했다. 그 결과 교리적인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1)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는 필요성에 대한 위대한 인문주의적인 강조는 성경의 주석가들, 특히 중세의 주석가들보다 성경을 우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확립했다.
(2) 성경을 라틴어 번역으로보다는 오히려 원어로 직접 읽어야 했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아람어로 기록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로 연구해야하며,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읽어야 했다.
(3) 인문주의 운동으로 새로운 성경 연구방법에 필요한 두 가지 본질적인 도구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첫째로, 인문주의 운동 덕분에 원어 성경의 인쇄본이 통용될 수 있었다. 둘째로, 인문주의 운동으로 고전어 교범의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학자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습득하기 불가능한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
(4) 인문주의 운동은 가장 휼륭한 본문을 정확하게 확정하는 데 필요한 본문비평 방법을 발전시켰다.
(5)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본문들이 적절한 문학적 방법을 통해 재포착될 수 있는 경험을 매개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원전으로 돌아가라”는 주제에 포함된 것은 본문에 의해 매개된 경험을 재 포착한다는 개념이다.
(6) 에라스무스는 1515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던 그의 책『엔키리디온 Enchiridion』에서, 성서적 전문지식을 갖춘 평신도가 교회 갱신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평신도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던 이와 같은 견해는 1519-25년 기간에 루터와 츠빙글리에 의한 성서적 개혁 프로그램을 확실하게 예비했다.
사례연구2. 6 후기 중세 스콜라 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
후기 중세시대에는 몇 가지 놀라운 신학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보다 후기 중세시대의 스콜라 신학에서 “유명론(Nominalism)”과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ism)”의 대결이라는 용어로 종종 해석되고 있다. 어떤 “유명론자”신학자들(오캄의 월리엄과 가브리엘 비엘과 같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데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다른 “유명론자”신학자들(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와 오르비에토의 휴골리노와 같은)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 없이 그러한 관계에 전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암시함으로써, 똑같은 인간의 능력에 철저하게 비관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 학자들은 “유명론적 다양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방식(via moderna)’이라는 용어는 이제 “유명론”이라고 한때 알려진 운동을 가리키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의 대표자들로는 오캄의 월리엄, 피에르 달리, 로버트 홀코트 그리고 가브리엘 비엘과 같은 14세기와 15세기 사상가들이 있다. 철학적 유명론에 더하여, 그 운동은 많은 비평가들이 “펠라기안”(Pelagian;펠라기우스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칭의의 교리를 채택했다. ‘근대적 방식’의 구원론, 혹은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보다 후기의 중세시대에는 언약의 개념(예를 들어 왕과 그의 백성 사이의)을 기초로 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론이 발전되었고, ‘근대적 방식’의 신학자들은 이 개념의 신학적 잠재력을 재빨리 인식했다. ‘근대적 방식’의 신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세계로부터 빌려온 개념을 사용하여 이 주제-이미 구약성경의 독자들에게 친숙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 신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칭의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켰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 먼저 특정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조건으로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요구는 라틴어 문구 ‘facere quod in se est’로 요약되었다. 그 뜻은 문자적으로 “너의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것” 혹은 “너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이러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때,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 그들을 받아들일 의무가 지워졌다. 이 점에서 ‘근대적 방식’과 펠라기우스의 유사성이 분명해진다. 양자 모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다고 주장한다. 양자 모두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상할 의무를 가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방식’의 신학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의 비난에 반격하기 위해 이러한 경제적 유비를 사용했다. 그들이 인간 행위의 가치를 과장하고 있다는 말에 대해(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점수를 매길 능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그러한 종류의 일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는 납화와 같아서 내재적 가치가 거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통하여 그들을 마치 매우 큰 가치가 있는 것처럼 대우하기로 정하셨는데, 이는 왕의 납화를 금화처럼 취급해주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이 14세기초기에 있었던 ‘근대적 방식’의 요새 중의 하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운동에 대한 첫 번째 반격이 일어난 곳은 바로 옥스퍼드에서였다. 이 반격에 책임이 있었던 개인은 토마스 브래드워딘이었는데, 그는 후에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근대적 방식’의 옥스퍼드 대변자들의 생각에 격렬한 공격을 가한 책을 썼다. 그 책은 『펠기우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 De causa Dei contra Pelagium』였다. 이 책에서 그는 그의 머톤 동료들을 “근대 펠라기우스파들”이라고 비난했으며, 반펠라기우스 저술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로 되돌아감을 보여주는 칭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브래워딘의 생각이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에 의해서 발전될 것이었지만, 그 생각은 파리 대학의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유럽 본토에 계승되었다. 첫째로, 그레고리우스는 보편주의자들의 질문에 관하여 유명론자의 견해를 채택했다. 둘째로, 그레고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반영하는 구원론, 혹은 구원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근대적 방식’의 신학자들은 인간이 “최선을 다함으로 써” 칭의를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학문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특별히 아우그수티누스 수도회와 관련되어 있긴 했지만, 모든 아우구스티누스 계의 수도원 혹은 대학이 이 견해를 채택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면에서 있어서, 비텐베르크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반펠라기우스 저술을 특별히 강조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전통을 재발견하고 다시 활성화시킨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나 칼뱅과 같은 몇몇 주도적인 개혁자들의 견해가 이 학문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견해와 비슷한 것 같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의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이 종종 계기되었다.
칼뱅은 1520년대에 파리 대학에서 그의 학문적 활동을 시작했다. 칼뱅과 후기 중세 신학과의 특별히 분명한 하나의 유사성은 주의설(voluntarism)에 대한 관심인데, 이 교리는 공로의 궁극적인 근거는 행동의 내적 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행위의 도덕적(즉 인간적인 것)인 가치와 공적이 되는 (즉 신적인 것)가치의 관계는 후기 중세 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두 가지 구별되는 접근방법이 개발되었는데, 주지설적(intellectualist) 방법과 주의설적(voluntarist) 방법이 그것이다.
주지설적 방법은 하나님의 지성이 어떤 행동의 내재적인 도덕적 가치를 알아차리며, 그래서 그에 따른 보상을 하신다고 주장했다. 주의실적 방법은 그것이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이 가지는 공로가 되는 가치는 그것의 내재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에 부여하기로 선택한 가치에만 오로지 근거하는 것이다. 보다 후기의 중세시대에 주의설적 입장은 더욱 많은 공감을 얻게 되었는데, 특별히 급진적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열에서 그러했다. ‘근대적 방식’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에 속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채택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뱅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관련하여 정확하게 이 주의설적 입장을 채택했다. 이것이 보다 초기의 판본에서는 암시적이지만. 1559년판에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는데, 이는 이 주제에 관해 칼뱅이 라일리우스 소시누스와 편지를 주고받은 후에 나타났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사상과 예배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루터가 주장했던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내재적인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루터에게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죽음을 독특한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선언하게 만드는 데 적합한 근거였다. 이 가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내재하고있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부여되었는가? 칼뱅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기초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드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기초’라는 주지설적 입장에 상응할 것이다). 그러한 드림이 인류를 구속하기에 충분한 공로가 된다고 받아들이기로 한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는(이것은 주의실적 입장에 상응할 것이다) 그의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칼뱅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뻐하심을 떠나서는, 그리스도는 어떤 것도 공로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과거에는 칼뱅과 스코투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성이 스코투스가 칼뱅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실은 칼뱅이 연속성이 오캄의 월리엄과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에서 비롯되는 후기 중세의 주의실적 전통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와 관련하여 스코투스는 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호의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공로로서 받아들이기로 정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가지는 공로적 성격을 설명할 아무런 근거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제3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1500-1750)
서구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새 시대가 16세기에 열렸다. 중세와 관련한 기독교 신학은 새로운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개혁, 즉 서구 교회를 신앙체계, 도덕성 및 구조에 있어 더 성경적 토대로 돌리려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란 용어는 마르틴 루터,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구 지역에서 일어난 도덕적, 신학적 및 제도적 개혁에 관심을 두는 서구의 운동을 지칭하고자 역사가와 신학자가 사용한다. 초기 약 1525년까지는 종교개혁이 루터와 오늘날 독일 동북부에 위치한 뷔텐베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 또한 복잡한 일련의 변화를 겪은 후, 취리히의 개혁은 점차 잇단 정치적. 신학적 변화를 겪은 후 결국 오늘날 스위스의 일부이지만 당시는 독립 도시국가였던 제네바시와 칼뱅과 주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카톨릭 교회는 내부의 질서를 잡았다. 프랑스와 독일간의 긴장으로 인한 서구에서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일찍 공회를 소집할 수 없었으나. 당시 교황 바울 3세는 결국 1545년 트렌트 공의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개신교에 맞서 가톨릭 사상과 실천을 천명하고 옹호하는 임무를 자임했다.
루터교 개혁 The Lutheran Reformation
루터교 개혁은 독일 영토와 카리스마적 인물인 마르틴 루터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인적 영향력과 특히 관련이 깊다. 그는 칭의 교리에 특히 관심이 있었고 이는 그의 종교사상의 중심을 이루었다. 루터의 개혁은 처음에는 뷔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육을 개혁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둔 학구적 운동이었다. 1517년10월31일 그의 유명한 95개조 공고 등의 루터의 개인적 활동이었다. 95개조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에 쓸 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를 파는 행위에 대한 항거였다. 면죄부 판매의 배경이론은 정연하지 않으나 죄 사면에 죄인이 감사한다는 개념에 근거했던 것 같다. 헌금은 용서의 조건이 아닌 결과였다. 그러나 루터 시대에는 그릇된 표현과 오해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면죄부를 죄의 용서를 사는 신속하고 편리한 수단으로 믿었던 듯하다.
엄밀하게는 루터의 개혁은 그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어쩔 수없이 고립되었다가 뷔텐베르크에 돌아온 1522년에야 시작되었다. 여기서 루터의 학구적 개혁안은 교회와 사회 개혁안으로 변했다. 루터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사색하는 대학세계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서구에서 새로운 사회적, 종교적 질서를 새로 개척하는 종교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개혁운동의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루터의 개혁안은 츠빙글리 같은 개혁동료들의 개혁안보다 휠씬 더 보수적이었다. 더욱이 일부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휠씬 덜 성공적이었다.
칼뱅주의 개혁 The Calvinist Reformation
개혁교회, 예컨대 장로교를 있게 한 칼뱅주의 개혁은 스위스 연방 내의 변화에 연유한다. 루터교 개혁이 학구적 상황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비해, 개혁교회는 더 성경적 틀에 따라 교회의 도덕과 예배(그러나 교리는 꼭 포함되지는 않음)를 개혁하려는 일련의 시도에 그 기원을 두었다. 그 기원은 스위스의 주요 도시 취리히에 기반을 둔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 같은 초기 개혁자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츠빙글리 같은 초기 개혁 신학자들 대개는 학술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개혁안들은 성격상 학구적이지 않았다. 그 개혁안들은 취리히, 베른, 바젤 같은 스위스 도시에 위치한 교회의 상황을 대상으로 했다. 그들의 개혁안은 제도적, 사회적이고 또한 윤리적이어서, 인문주의 운동에서 나온 개혁에 대한 요구와 여러 모로 비슷했다. 개혁교회의 강화는 1531년 츠빙글 리가 전사한 후 그의 후계자 불링거의 지도로 취리히 개혁이 안정될 때 시작해서 1550년대 제네바가 세력 근거지로, 칼뱅이 주요대변인으로 떠올랐을 때 끝났다고 대개 생각한다. “칼뱅주의”는 종종 개혁교회의 종교적 사상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16 및 17세기 후반 개신교 사상을 “칼뱅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칼뱅의 사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대개 칼뱅이 사상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미묘하게 바뀌었다고들 본다.
급진적 개혁(재침례교회) The Radical Reformation(Anabaptism)
재침례주의는 1520년대 츠빙글리의 개혁이 있었던 취리히 근방에서 처음 일어난 듯하다. 그것은 츠빙글 리가 개혁이 있었던 근방에서 처음 일어난 듯하다. 그것은 츠빙글 리가 자신의 개혁 원칙에 충실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콘라드 그레벨 같은 사람들의 집단이 중심이었다. 츠빙글리는 설교와 실천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레벨 같은 사상가들의 수중에서 ‘성경만으로’라는 원칙은 급진적으로 변화할 형편이었다. 즉 개혁 기독교인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가르친 것들만 믿고 행하게 될 처지였다. 재침례교회 운동의 여러 분파들 내에서 여러 가지 공통요소를 식별할 수 있다. 즉 외부 권위에 대한 일반적 불신, 성인 신자 침례를 옹호하고 유아세례배척, 재산 공동소유, 평화주의와 무저항의 강조 등이다.
가톨릭 종교개혁 The Catholic Reformation
이 말은 종종 트렌트 종교회의 개최 이후 시기의 로마 가톨릭교 안에서의 갱신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이전의 학술작품에서는 이 운동이 “반종교 개혁” 이라 자주 불렀다. 이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 개혁의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개신교 개혁과 싸울 수단을 개발했다. 이 운동은 개신교 개혁에 대한 반응인 동시에 로마 가톨릭의 개혁이었다. 가톨릭 교회 제일 구성요소인 트랜트 종교회의는 혼동을 일으키는 여러 사안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해명했고 성직자의 처신, 교회 규율, 종교교육 및 선교활동에 관한 시급한 개혁을 시행했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운동은 많은 유서깊은 신앙교단들의 개혁과 예수회 같은 새 교단의 설립으로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처음에는 문과대에서 공부했고 그 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분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512년 뷔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성경연구 교수로 임명받고 1513-15년까지 시편에 관해, 1515-16년까지 로마서에 관해, 1516-17년까지 갈라디아서에 관해, 1517-18년까지 히브리서에 관해 강의했다. 이 기간 중 루터의 신학은 일련의 변화, 특히 칭의 교리에 관한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루터는 1517년 면죄에 관한 95개조를 공표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1519년6-7월 사이의 라이프치히 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스콜라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1520년 그는 신학적 개혁자로서 높아지는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글 세 편을 발표했다. “독일 기독교인 귀족에게 호소”에서 그는 교회의 필요성을 열렬히 주장했다. 이 작품의 큰 성공에 용기를 얻어 루터는 이어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퍼냈다. 이 힘찬 작품에서 그는 복음이 제도적 교회의 포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세 교회가 성직자의 복잡한 성례전 제도로 복음을 감금했다고 주장했다. 이 점은 루터가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칭의 교리에 담긴 뜻을 탐구한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더욱 깊이 논했다. 루터는 개혁자 중 가장 독창적인 인물인 듯 하다. 대체로 그 작품의 역할은 목회적이어서 아마 신학적 작품으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신학의 면모가 기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1518년 하이델 베르크 논쟁에서 간단히 언급한 그의 “십자가 신학”은 위르겐 몰트만의『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Crucified God』이 나타내듯 20세기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1509년 파리 북동쪽에 있는 노용에서 태어났다. 스콜라주의가 지배하던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나서 더 인문주의적인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겨가 민법을 공부했다. 개혁자 제2세대는 첫 세대보다 조직신학 저술이 필요성을 휠씬 더 의식했다. 제2기 개혁의 주요인물인 칼뱅은 복음주의 신학의 기본개념을 명사하고, 성경에 근거하여 그 개념의 근거를 밝히고 가톨릭의 비판에 대해 그것을 지켜낼 저술의 필요성을 느꼈다. 1536년 그는 『기독교 강요』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출간했는데 단지 여섯 장 분량에 불과했다. 이후25년간 칼뱅은 계속해서 장들을 추가하고 자료를 재배치했다. 마지막 판이(1559년) 나왔을 때, 그 책은 여덟 장으로 된 네 권의 책이 되었다. 제1권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다룬다. 제2권은 인간의 대속 필요성가 이 대속이 중보자인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지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제3권은 인간이 갖게 된 이 대속의 방식을 다루고, 제4권은 교회와 교회의 사회와의 관계를 다룬다.
1536년 초 노용에서 그의 일을 끝낸 후, 그는 대도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개인적으로 연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멀리 이웃 사보이 영토로부터 막 독립한 제네바 시를 통해 우회해야 했다. 당시 제네바는 지역 주교를 막 내보내고 프랑스인 귀욤 파렐과 피에르 비레의 인도 하에 논란 중인 개혁안을 실천하려는 혼란상태에 있었다. 칼뱅이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그가 거기 머물며 종교개혁을 도와주기를 요구했다. 제네바 교회에 탄탄한 교리와 계율의 기반을 마련해주려던 그의 시도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칼뱅은 거기서 쫓겨나 스트라스부르크로 피신했다. 신속히 연달아 그는 주요 신학저술들을 내놓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수정 중보된 그의 『기독교 강요』(1539년)와 이 책의 첫 프랑스어판(1541년)일 것이다. 스트라스부르크 개혁자 마르틴 부처와 사귀며 칼뱅은 도시와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펼 수 있었다. 칼뱅이 제네바에 없는 동안 종교적 .정치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1542년 9월 제네바 시 당국은 그에게 돌아와 질서와 신뢰를 회복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제네바에 돌아온 칼뱅은 자신을 기다리는 일을 하기에 3년 저보다 휠씬 더 잘 준비된 더 현명하고 경험있는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휼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1484-1531)
스위스 개혁자 휼드리히 츠빙글리는 비엔나 대학교와 바젤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동부 스위스에 교구 사역을 맡았다.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 의제에, 특히 에라스무스에 글에 유난히 관심이 있어 당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했던 것이 분명하다. 1519년 그는 취리히에서 목회직을 맡았고, 그 도시의 중심교회에서 원목(the Great Minister)의 강단을 개혁안 전파에 활용했다. 이 개혁안은 초기엔 교회의 도덕성 개혁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츠빙글리적”이라는 말은 츠빙글리와 관련되어, 그리스도가 성찬에 참여하지 않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는 게 가장 좋다는 신념을 가리키기 위해 특히 잘 쓰인다. 츠빙글리는 초기 개혁전파에 있어서, 특히 동부 스위스에서 주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루터나 칼뱅만큼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에게는 루터의 독창성과 칼뱅의 체계적 접근방법이 부족했다.
주요 신학적 변화
신학의 근원 The Source of Theology
종교개혁의 주류는 새로운 기독교 전통의 갱신과 교정에 관심이었다. 기독교 신학이 궁극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루터와 칼뱅 같은 개혁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제일 중요한 근원으로서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구호가 개혁자들의 기본신념을 나타냈다.
은총 교리 The Doctrine of Grace
교회가 자신도 미처 모르는 채 펠라기우스 노선에 빠져들었다고 확신한 루터는 자기 말을 들으려는 누구에게나 칭의 교리를 선언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칭의 교리는 루터교 개혁과 특히 관련이 깊다. 칼뱅은 이 교리를 계속 인정하면서 이후 개신교 신학에 더 중요해진 사조를 유발해, 예정 교리와 관련된 칭의 보다는 은총을 주장했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과분한 은총의 성격을 간단히 요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례 교리 The Doctrine of Sacraments
1520년대가 되자 성례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의 외적 표시라는 견해가 개혁계에서 자리잡았다. 성례와 칭의 교리를 연결시킴으로써(루터와 그의 뷔텐베르크 동료 필립 멜랑히톤과 특히 관계 있음) 성례 신학적 관심이 새로이 부각되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가 성찬식 때 실제로 참여하는지 여부에 대해 격렬히 논쟁하게 되었다.
교회 교리 The Doctrine of Church
개혁 첫 세대가 은총문제에 몰두했다면 둘째 세대는 교회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은총 교리로 가톨릭교 주류에게서 떨어져나간 개혁자들은 이 분리를 정당화하고 서구 도시에서 일어나는 새 복음적 교회의 기초를 제공할 정연한 교회론을 펼치라는 압력을 점점 많이 받게 되었다. 교회에 관한 개신교의 견해를 진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마르틴 부처와 장 칼뱅이었다.
개혁이후의 운동 Post-Reformation Movements
개신교와 가톨릭의 개혁 이후 양측의 운동 속에서 신학적으로 강화되는 시기가 뒤따랐다. 개신교 안에서는 루터교와 개혁교회(즉 칼뱅주의자 모두에게 “정통”으로 알려진 시대가 열렸다. 이 시대는 교리적 규준과 정의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었다.
정통개신교/신교정통주의 Protestant Orthodoxy
개혁 때의 통찰력을 유지하려는 열망 때문인지 개혁이후 시대에는 신학에 대한 강한 학술적 접근방법이 발달했다. 개혁자들의 통찰력은 법처럼 자리잡고 기독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달아 발표하는 과정을 거치며 맥을 이어갔다. 칼뱅사후, 사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정연하게 추론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관심이 힘을 얻었다. 칼뱅이 어는 정도 의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이제는 우방으로 넙죽 받아들였다. 칼뱅주의가 내면적으로 일관되고 정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점점 중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칼뱅주의 저술가들은 그의 방법에 관한 글에서 그들 신학을 더 견실한 합리적 기초 위에 세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넷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칼뱅에는 신학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또 그 사건에서 나왔다. 그리나 후기 칼뱅주의에게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에게 두었던 중심위치를 일반원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1550년대에 루터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제대로 자리잡았다. 종교적 교착상황으로 인해 루터교는 가톨릭교 지역으로 더 이상 세를 넓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터교 저술가들은 자기 교파와 내적 일관성과 성경에 대한 충실성을 보여주어 학문적 측면에서 루터교를 옹호하는데 치중했다. 가톨릭 저술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을 빌어 더욱 세련된 조직 신학 작품으로 대응했다.
칼뱅주의가 이전에 루터 교회 영역이던 곳에 침투하기 시작하자 1560년대 및 1570년대에 독일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루터 교회, 칼뱅주의, 가톨릭 교회의 세 주요 기독교파들이 그 지역에서 단단히 자리잡았다. 교리를 새로 강조한 특징을 지닌 1559-1622년에 이르는 기간을 “정통시대”라고 부른다.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자기들의 체계가 합리적이고 세련되었다고 입증하려고 노력한 결과, 양쪽 신학계에 새로운 형태의 학풍이 발달했다. 대부분 교리에 있어 루터교와 칼뱅파는 폭넓게 일치했다. 허나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예정론이었다. 1559-1662년 기간 중 칼뱅주의자들이 예정론을 강조한 것은 이 교리가 루터교 동료들과 자신들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임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헨리8세(1509-47년)하의 16세기 영국 종교개혁은 독일의 경우와 거의 무관했다 영국에서는 헨리8세가 자기 통치영역에서 단 하나의 국교회가 있으리라고 단호히 선언했다. 독일 루터교회는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서 교리로 자신의 존재와 경계를 밝히고 옹호했다. 가톨릭 교회는 루터교 주변지역에 계속 머물러 루터주의가 자신의 존재를 계속 정당화하도록 강요했다. 영국 상황은 엘리자베스 1세 통치하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1559년 “엘리자베스 결정”은 영국에 단 하나의 기독교회가 있다고 못박았다. 즉 영국교회로 종교개혁 이전 교회의 독점권을 유지하고, 교황 아닌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교회로 이전 교회를 대치하는 교회였다. 이 기간 중 다음의 두 변화는 특히 중요하다:
1. 방법에 대한 새로운 관심: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성경적 신학” 작품으로서 성경의 사상을 정연히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럽 전체 칼뱅과 목사를 훈련시키는 기관인 제네바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칼뱅의 후임인 데오도레 베자의 글에서 위에 말한 것 같이 방법론 문제가 새로운 관심으로 부각된다.
2. 조직신학 작품의 발전: 루터교, 칼뱅과 로마 가톨릭 신학계 내에서 학술적 연구가 일어난 광범위한 조직 신학 작품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여로 모로 비교될 만했다.
아래 나타나는 저술가들은 중요한 인물로 특기할 만하다:
1. 테오도레 베자(1519-1605) 저명한 칼뱅파 저술가로 1559년부터1599까지 제네바 아카테미에서 교수로 일했다. 세 권으로 된 『신학논문 Tractationes theologicae』(1570-1582)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로 개신교 신학의 주요 요소를 합리적으로 정연히 설명한다.
2. 요한 게르하르트(1582-1637) 루터교 저술가로 1616년 예나에서 신학교수로 임명받아 평생 봉직했다. 그는 칼뱅주의의 강한 저항에 직면해 루터교 신학을 체게적으로 제시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루터교 조직신학 작품의 기본형식은 1521년 필립 멜랑히톤이 『문귀/ 일상어 Loci sommunes:Commonplaces』첫 판을 출판했을 때 갖쳐졌다.
로마 카톨릭교 Roman Catholicism
1545-63년까지 있는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결정적 대응이었다. 공회의의 업적은 이렇다. 첫째, 이 회의는 우선 종교개혁의 출현에 적지 않은 원인을 제공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 교회 내 부패와 직권남용을 없애는 대책을 세웠다. 둘째, 이 회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관한 가톨릭 교설의 골간을 정했다. 16세기 마지막 십 년동안 가톨릭 교회 안에서 개신교에 대한 자신있는, 지속적이고 중요한 비판이 나타났다. 이 새로운 자신감의 분명한 표지들 가운데 하나는 가톨릭의 교부에 대한 학술연구에서 볼 수 있다. 16세가 말엽에 가톨릭 저술가들은 교부 저술가들과 자신을 사이의 연속성에 관해 더욱 자신감을 가졌다. 이 연속성을 자리잡게 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마르거랭 드 라비뉴의 『교부 장서 Biblitheca Pateum』로서 1575년에 여덟 권의 대형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가톨릭 전통의 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으로 가톨릭의 가르침이 항상 계속된다는 점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이를 야기한 가장 유명한 저술가는 자크 베니뉴 보쉬에였는데, 그의 『개신교의 변형의 역사 Histoire des variations des eglises protestantes』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토론에서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언제나 같다(semper eadem)”라는 구호는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 논쟁의 중요 요소가 되었다. 보쉬에에게 개신교는 별 무리없이 혁신으로 비쳤다. 그래서 이단이었다. 이 가톨릭 신학 황금기에 저명해진 신학자들 가운데 아마 로베르토 벨라르미네가 가장 중요 인물이리라.
청교도 주의 Puritanism
청교도주의는 신앙의 경험적이고 목회적 측면에 특히 중점을 둔 개신교 정통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주요 신학자들인 월리엄 퍼킨스, 월리엄 에임스 및 존 오웬의 저술이 베자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범위와 섭리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 주권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있어 그러했다. 청교도 목회 전통은 대개 리차드 박스터의 사역과 글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본다. 그의 명성 일부는 그의 묵직한 『기독교 색인 Christian Directory』(1673)때문인데, 그 네 부분은 일상 기독교인 생활에서 실현되는 신학의 전망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목회 신학 작품은 여전히 『개신교 목사 Reformed Pastor』(1656)로서 이책은 청교도 관점에서 사역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청교도주의가 17세기 초 영국에서 주요 신학적 정치적 세력이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발전을 일어났다. 찰스 1세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많은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북미에 정착했다. 가장 중요한 청교도 신학자는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는 합리적 세계관이 제기한 새로운 의문들을 기꺼이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는 청교도 사상과 연결시켰다. 영적 지도자로서 그는 특히 18세기 “대각성 시대(이 시대에 그는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의 여파 속에서 크나큰 요구에 직면했으며, 그의 신학은 특히 그의 윤리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났다.
경건주의 Pietism
“경건주의”라는 말은 라틴어 ‘pietas’(“경건” 또는 “돈득함”으로 번역 가능)에서 왔고, 당초에 기독교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이 운동의 반대측이 사용한 경멸조의 말이었다. 경건운동은 필립 야콥 수페너가 『경건한 소원 pia desideria』(1675)을 출간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대개 본다. 이 저술에서 30년 전쟁(1618-1648)후유증 가운데 있는 독일 루터교회의 상황을 슬퍼하며 당시 교회의 재활계획안을 펼쳤다. 이 가운데 특히 개인 성경공부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제안은 학문적 신학자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독일 교계에서는 영향력 있다고 판명되었다. 경건주의에서는 교리개혁이 항상 생활 개혁과 함께 해야 한다. 경건주의는 여러 방향으로 발전했고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그러했다. 이 운동의 여러 대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특기할 만하다:
1.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그라프 폰 진젠도르프는 독일 동네 헤른흐트(Hermhut)에서 이름을 따와 “헤른후터(Hermhuter)”로 흔히 알려진 경건주의자 공동체를 세웠다. 당시 그가 삭막한 합리주의와 척박한 정통이라 간주한 대상들에게 소외되어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친밀한 개인적 관계에 토대를 둔 “마음의 종교”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진젠도르프의 개인 고유의 신앙에 대한 강조는 “살아있는 신앙”이란 구호에서 나타난다.
2. 존 웨슬리는 영국 교회 내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그 후 그 나름대로 한 교파로서 감리교가 탄생하게 했다. 자신이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이 모자랐다”고 확신했던 그는 “살아있는 신앙”에 대한 욕구와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낀 1738년5월 올더스케이트 거리에서의 모임에서 얻은 회심 경혐을 통해 기독교인의 삶에서 경험의 역할을 발견했다.
사례연구 3. 1 종교개혁에 있어 성경과 전통
정경인 성경 The canon of Scripture
성경을 규준으로 삼을 때 항상 중심이 되는 문제는 성경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다. “정경”(헬라엉로 “규칙” 또는 “규준”을 뜻함)은 교회가 본래적이고 인정한 경전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중세 신학자들에게 “성경”은 “라틴어판 성경에 실린 작품들”이었다. 히브리성경중 구약내용을 불가타 같은 라틴어 및 희랍어판과 비교하면 후자에는 전자에 없는 작품이 여럿 있음을 볼 수 있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을 본떠 개혁자들을 정경에 속한 것으로 볼 구약내용은 히브리 성경에 원래 실린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구약”과 “외경”은 구분되었다. 전자는 히브리 성경에 나온 작품으로 이루어지고, 후자는 헬라어 및 라틴 성경에 나오나 히브리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작품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중세 신학자들은 1546년 트렌트 공의회가 뒤따른대로 “구약”을 “헬라어와 라틴어 성경에 실린 구약작품들”로 정의하여 “구약”과 “외경”사이의 구분을 아예 제거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만으로(scriptura sola)”라는 슬로건은 가톨릭측과 하나가 아닌 두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즉 성경에는 다른 위상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실제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성경의 권위
개혁가들은 하나님 말씀과 관련지어 성경 권위의 기초를 세웠다. 일부에게 그 관계는 일치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뱅에게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쓴 사람들이 “성령의 비서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했다 하인리히 불링거가 말했듯이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자주적이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므로 성스러운 성경은 그 자체로 또한 저절로 충분한 지위와 신빙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측은 교회가 성경의 정경을 규정했고, 현 성경을 정경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확정했다는 점에서 교회가 성경에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몇 가지 사항들이 “성경만으로 scriptura sola”라는 원칙이 중요성을 적시한다. 첫째, 개혁가들은 교황, 공의회 및 신학자들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아래에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개혁가들은 교회 안에서의 권위가 공직자의 지위로부터가 아니 그들이 봉사하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연속성은 하나님 말씀을 충실히 선포하는 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개혁 분리교회들에게 가톨릭 제도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이 거부당한 것은 분명하다. 가톨릭이 제도적 또는 역사적 연속성의 중요성을 역설한 반면, 개혁가들은 교리상 연속성은 똑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신교회들이 대개 주교직의 역사적 연속성을 제시하지 못했으나(영국 또는 스웨덴 개혁의 경우 가톨릭 주교들이 이탈한 예외는 있음), 그들은 성경에 대해 충실함으로써 개신교의 교회 내 직책에 합법성을 부여했다. 이렇게 ‘성경만으로’원칙에는 교회권위가 성경에 대한 충실성에 좌우된다는 주장이 내포되어 있다.
전통의 역할 The role of tradition
대다수 중세 신학자들에게 성경은 실질적으로 충분한 기독교 신조의 원천이었다. 즉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중세 말경에 “전통”의 개념이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있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하이코A. 오버만 같은 학자들은 중세 말에 두 가지 판이한 전통에 대한 개념이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를 ‘제일 전통’ ‘제이 전통’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교회 내 여러 논쟁들에 대응하여, 특히 영지주의 위협에 직면해,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이해하는 “전통적” 방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용의 이레내우스 같은 2세기 교부신학자들은 성경의 어떤 본문을 해석하는 공인된 방법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는데, 그는 그것이 사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그 해석의 척도는 역사적으로 고정되었고 부여되었다. 오버만은 이 전통의 이해를 “제일전통”이라 부른다. 여기서 “전통”은 단지 “신앙공동체 내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전통적 방법”을 뜻한다.
그러나 14. 15세기에 전통에 대한 좀 다른 이해가 나타났다. 이제 “전통”은 성경에 덧붙여 별개의 근원에 속한 계시로 이해되었다. 소급하여 사도들에게까지 글로 쓰이지 않은 전통, 이 전통은 교회 내에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다. 오버만은 이러한 전통이해를 “제일전통” 이라 부른다. 이 중요한 구분을 요약하면 “제일전통”은 교리의 유일근원 이론이다. 즉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고 “전통”은 “성경해석의 전통적 방법”을 가리킨다. “제이 전통”은 교리의 이중근원 이론이다. 즉 교리는 두 가지 판이한 근거인 성경과 글로 쓰이지 않은 전통에 근거한다. 개혁가들이 비판대상으로 삼은 것은 주로 이 교리의 이중근원 이론이었다.
16세기에 전통을 완전히 거부하는 대안을 급진개혁의 대표자들이 줄기차게 옹호했다. 토마스 뮌쩌, 카스파르 수벵크펠트 같은 급진 개혁가들에게 있어서 개인은 제각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세바스찬 프랑크에게 성경은 “다윗의 열쇠 즉, 성령의 조명 없이는 아무도 열 수 없는 일곱 봉인으로 봉함 된 책”이었다.
연관개혁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이 전통적 성경해석이 옳다고 개혁가들은 확신하여 교회 전통적 교리 대부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연관개혁은 개인주의의 위협을 뼈저리게 의식했고, 교회의 전통적 성경 해석을 강조하며 이 위협을 피하려 했다. 교리적 비판은 가톨릭 신학과 관행이 성경을 위배했거나 성경과 모순된다고 보이는 부분에 집중되었다. 개혁가들이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 중 하나는 교부들을 성경적 신학의 해석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즉 개혁가들은 교부들이 성경에만 근거하여 신학을 펼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546년 회의에서 트렌트 공의회는 양원론을 확인하여 개혁의 위협에 대처했다. “전통2”를 이렇게 확인하여 가톨릭은 기독교 신앙이 성경과 글로 쓰이지 않은 전통이라는 두 근원을 통해 모든 세대에 전달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을 할 때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에 관한 중세의 두가지 핵심적 이해 가운데 덜 영향력있는 후자를 택함으로써 더 영향력있는 전자를 개혁가들에게 내어준 듯하다.
사례연구 3. 2 칭의 교리: 마르틴 루터와 트렌트 공의회
칭의 교리가 개혁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점은 폭넓은 동의를 얻고 있다. “칭의”라는 말과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되다” 이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칭의 교리는 구원받기 위해 개인이 해야 할 일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고 간주되었다. 당시 자료가 보여주듯이 이 문제는 16세기가 시작되면서 더욱 자주 거론되었다.
마르틴 루터
그가 죽기 전 해인 1545년, 루터는 자신의 저술 완간판 첫 권의 서문에서 당시 교회를 이탈하게 된 동기를 해명했다. “자서전적 단편”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개혁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게 된 배경을 밝히려 한다. 1519년에 이르는 역사적 상황을 개괄한 후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난관에 대해 언급한다. 원래 루터는 의인의 전제조건을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기 전에 죄인이 먼저 해야 할 인간적 업적이라 여겼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점점 확신하여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처벌적 의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그가 어떻게 “새로운”의미를 찾았는지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죄인에게는 주는 의이다. 달리 말한다면, 죄인들이 의롭게 되려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애롭게 죄인에게 주어 이 전제조건을 충족시킨다.
이 자서전적 글에서 루터가 말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하나님은 개인들을 그들의 공로대로 보상하는 무자비한 재판권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선물로 의를 주는 자애로운 하나님이라는 통찰이다. 루터 연구가들은 그의 의인 신학이 1515년 어느 시점에 결정적 변화를 겪었다고 대체로 공감한다. 루터의 통찰에 중심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 교리였다. “사람들이 믿음만이 의롭게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못하는 까닭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루터는 “믿음”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단순한 말에 우리가 더욱 천착해야 할 것을 권한다. 루터의 믿음에 관한 개념과 관련된 세 가지 점이 그의 의인 교리에서 특히 중요하다:
첫째, 믿음은 단순한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루터는 복음이 역사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믿는데 만족하는 믿음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구원사역을 우리를 위해 성취했다는 것을 믿고 의탁하는 일과 관계있다. 둘째, 믿음은 “신뢰(fiducia)”라고 이해해야 한다. 신뢰의 개념은 종교개혁시 믿음에 대한 개념으로 중요하다. 믿음은 어떤 것이 옳다고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다. 루터의 비유를 보면 믿음은 배가 있다고 믿는 것만이 아니라 배에 발을 들여놓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셋째,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 루터는 그의 1520년 『기독인의 자유The Liberty of Christian』라는 글에서 원리를 천명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교리 덩어리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신자의 결합이다.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용서, 의인, 희망 같은)은 신자에게 유용하게 된다.
이처럼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죄인이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믿음을 인간의 행위 또는 업적으로 취급하는 셈이 되리라. 루터는 의롭게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제공하셔서 죄인이 할 일이라곤 그걸 받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하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신다는 증언이다. 믿음 그 자체조차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의 행동이 아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 교리의 주요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각 죄인이 자기를 의롭게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의롭게 하는 데 주도권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이고 그 죄인을 의롭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밑천을 하나님이 제공한다. 이 밑천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의가 자신의 일부가 되게끔 의롭게 하는 의를 부여한다. 그 결과 비록 죄인 밖에서 시작했지만 이 의는 그 인간의 일부가 된다. 루터로서는 그 의는 죄인밖에 그대로 있어서 “외적 의 (iustitia aliena)”이다.
루터가 시사하기를 믿음을 통해 신자는 에스겔 16:8에서 하나님이 그의 옷으로 우리 벗은 몸을 덮으시듯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 루터에게 믿음은 옳은(또는 의로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죄와 의는 이처럼 공존한다. 내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외적으로 의롭다. 루터는 신자의 의가 자란다는 점에서 기독인의 삶이 역동적이라고 완전히 의식했다. 오히려 그의 요점은 죄의 존재가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지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 우리 죄를 막아주신다. 이 의는 우리 죄와 싸울 수 있게 하는 보호 방패와 같다. 이 접근방식은 신자에게서 죄가 지속되고, 동시에 신자의 점진적 변화와 장래 그 죄를 없애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기독인이 되려고 완벽하게 의로워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생각을 그의 후계자 필립 멜랑히톤이 그후 발전시켜 “법리적 의인”이라는 익숙한 교리를 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인을 의롭게 하심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 데 비해 멜랑히톤은 죄인이 의롭다고 간주되거나 판단된다고 가르쳤다. 멜랑히톤은 의롭다 선언당하는 일과 의롭게 됨을 당하는 과정을 분명히 구분하여 전자를 “의인”이라고, 후자를 “성화(Sancitification)” 또는 “중생(regeneration)”이라 불렸다. 멜랑히톤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늘 법정에서 심판을 곧 죄인이 의롭다는 판결을 내리신다. 이러한 의인에 대한 사법적 접근으로 “법리적 의인(forensic justification)”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트랜트 공의회- The Council of Trent
1540년경 루터는 유럽 전체에서 일상용어처럼 되었다. 1545년 소집된 트렌트 공의회는 루터에 대한 포괄적 대응안을 마련하는 긴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제 6차 회기가 1547년 1월 13일로 끝났다. 이 회기의 본질적 산물로서 의인에 관한 트렌트 교령은 이 협의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일 것이다. 16개장에 이르는 이 교령은 로마 가톨릭의 의인에 관한 가르침을 상당히 명확하게 규정했다.
1. 의인 /칭의의 본질-The Nature of Justification
1515년부터 1519년 사이, 초기의 루터는 의인을 죄인이 내적 갱신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1530년 중반 이후 아마도 멜랑히톤의 의인에 대한 좀더 법리적인 접근방법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루터의 어조는 의인을 의롭게 되는 과정보다는 의롭다고 선언받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띤다. 점점 더 그는 성령의 작용으로 중생의 독특한 과정과 내적 갱신으로 보안된 사건으로 의인을 보게 되었다. 트렌트는 이 견해에 강하게 반대했고 원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인, 의인은 인간성 안에서의 중생과 갱신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죄인의 외적 지위와 내적 성격 모두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했다.
트렌트로서는 의인이 세례와 고해성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죄인은 처음에 세레로 의롭게 되나, 죄 때문에 그 의인이 박탈될 수 있다. 그러면서 트렌트는 요약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세 전통을 주장했다. 그 전통은 의인화 사건과 과정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보았다. 즉 그리스도와 사역으로 인해 의롭다고 선언되는 사건과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과정이다.
2. 의롭게 하는 의의 본질-The Nature of justifying righteousness
루터는 죄인 자신이 어떤 의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의롭게 할 하나님의 자비로운 결정의 근거가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다. 루터의 “그리스도의 외적 의(iustitia Christi aliena)” 교리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가 그들밖에 있음을 밝혔다. 그것은 전가된 것이지 분유된 것이 아니며, 외적인 것이지 내적인 것이 아니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따라 초기 종교개혁 비판자들은 하나님이 죄인들 안에 자애롭게 주입하고 심어준 내적 의에 근거해 죄인들이 이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트렌트는 내적 의의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인개념을 옹호했다.
“단일한 형상적 원인(songle formal cause)”은 설명이 필요한 말이다. “형상적”원인은 직접적인, 즉 최근접 원인이다. 트렌트는 의인의 직접원인이 자애롭게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의 -“운동인(efficient cause, 하나님)” 또는 “공덕인(meritorious cause, 예수 그리스도)” 과 같은 더욱 먼 원인들과는 대립되는 의-라고 말한다.
3.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 The Nature of justifying faith
루터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심한 비판을 받았다. 제12규칙은 루터의 의롭게 하는 믿음이라는 사상의 핵심을 정죄하여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때문에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념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배척한다. 트렌트는 누구든지 순종 또는 영적 갱신의 필요 없이-트렌트적 의미의 용어로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게 될까 두려워했다. “의인”이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과 지속 및 성장 모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 트렌트는 루터가(죄인이 하나님에 의해 바뀌고 갱신될 어떤 필요도 없이)단지 하나님의 신뢰하는 것만이 기독인의 삶 전체의 근거임을 천명한다고 믿었다.
4. 구원의 확신-The assurance of salvation
다른 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루터도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공감했다. 구원의 근거는 자비로운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있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비록 기독인의 신앙의 기초가 안전해도 이 기초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열심은 흔들릴 수 있다. 트렌트 공의회는 개혁가들의 확신교리를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았다. “이단들의 헛된 확신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제9장의 의인에 관한 교령은 개혁가들의 “불신자의 확신”을 비판했다. 트렌트는 “그 누구도 오류에 빠지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례연구 3. 3 실재설의 본질: 루터, 츠빙글리와 트렌트 공의회
화체설: 트렌트 공의회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규정한 화체 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있다. 구체적을 “실체(substance)”와 “우유(accident)”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한 것이 그것이다. 사물의 “실체”는 본질적 성격이며, 반면 “우유”는 외관(색, 모양, 냄새 같은)이다. 화체설은 봉헌 순간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은 바뀌지 않은 채 있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뀐다고 단언한다.
1551년 10월11일 끝난 13차 회기 중 트렌트 공의회는 성찬 때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하는 것에 관해 결정적으로 언명했다. -“화체”라는 용어는 봉헌 결과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가리키기에 적당하다. 이 교령은 그리스도의 현실적, 실체적 임재를 강하게 확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루터 : 공재설-Luther: consubstantiation
마르틴 루터와 관계있는 이 견해는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한꺼번에 동시에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실체에 있어 변화는 없고, 빵과 그리스도의 몸 모두의 실체가 함께 임재한다. 화체 교리는 루터에게 불합리한 신비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성찬 때 실제 임재한다는 것이지 임재 방식에 관한 어떤 이론이 아니었다. 믿어야 할 것은 화체 교리가 아니라 단지 성찬 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의 [교회의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성례에 관한 중세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평하고, “화체”개념은 논리가 약하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 기념설- Zwingli:memorialism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지 희생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몸이라(마태 26:26)”는 말씀, 곧 실제 임재에 간한 전통적 가톨릭 견해의 모퉁이 돌이었으며 또한 실제 임재를 변호하는데 루터가 원용한 이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츠빙글리는 “성경에는 이다라는 말이 상징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구절이 무수하다”고 주장했다.
장 칼뱅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주된 토론은 성례적 표지와 그것이 의미하는 영적 은사의 관련성에 관한 것이었다. 칼뱅은 어림잡아 이 양극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성례에는 상징과 상징이 나타내는 은사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우리가 “쉽게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갈 수”있다고 주장한다. 표지가 가시적이고 영적이지만 표지와 상징된 대상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여 이것을 저것에 적용할 수 있다. 칼뱅의 생에 신학이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진 타협으로 볼 수는 없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받는 방법에 대한 이해, 특히 “조절(accommodation)” 개념에 관한 이해를 반영한다.
사례연구3. 4 교회의 교리: 개신교 안에서의 경향
여려 면에서 개혁가들의 교회관은 그들의 약점을 드러낸다. 가톨릭측에게 교회는 가시적 역사적 제도로서 사도교회와 역사적 연속성을 지녔고, 급진 개혁파에게 참교회는 하늘에 있고, 땅위의 어떤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연관 개혁가들은 양극적 견해 사이에서 중간지대를 점유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심각한 모순에 빠졌음을 알았다. 루터는 당시 교회가 은총 교리를 잊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은총을 기독교 복음의 중심으로 보았다. 가톨릭 교회가 이 교리를 잊었다고 확신하여 그는 교회가 진정한 기독교회로 주장할 근거를 잃었다고 결론지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을 배척하려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듯이 보였다. 루터는 머뭇거리는 분리론자였다. 그의 시대에 학구적 개혁가로서 그는 분열을 혐오하는 데 깊이 공감했다.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에 대한 95개조에 대한 소동에서도 그는 교회의 탈퇴를 확신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가 비텐베르크 개혁측을 더욱 소외시키는 현상은 순전히 일시적인 것이라는 추측이 1520년부터 1541년 어간 루터파 저술가들 배후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비덴베르크 복음주의 분파는 아마도 개혁 협의회를 소집하여 수년 내에 가툴릭 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여, 갱신되고 개혁된 교회에 루터파가 재가입하도록 허락하리라고 믿은 듯하다. 1545년 트렌트 공의회가 결국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웅을 위해 모여 가톨릭 교회 내의 주요 개혁안을 제정했다. 공의회는 개신교의 주요사상을 밝히고 정죄했다. 화해의 희망은 깨졌다. 개신교회들을 이제 자신들의 분리된 존재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임을 인정해야 했다. 개혁가들의 교회 이론에 관한 관심은 주로 1540년대부터 시작되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초대보다는 후대 개혁자 세대가 관심을 쏟은 문제이다.
마르틴 루터
교회 성격에 관한 루터의 초기 견해는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말씀은 정복하러 나아가며, 말씀이 정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을 얻는 곳이면 교회는 어디든 존재한다. 여기서 루터의 견해는 참교회를 이루는 데 하나님 말씀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래서 주교가 서품한 사제직은 교호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불가결한 것은 아닌 반면, 복음의 설교는 그 교회의 본성에 필수적이다. “말씀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참교회가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설교로 이루어지고, 어떤 인간의 모임도 이 복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할 수 없다. 교회나 임직자들을 합법화하는 것은 사도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이 아니라 신학적 연속성이다.
급진적 종교개혁
세바스찬 프랑크 같은 급진 개혁가들은 사도교회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이래 국가와 긴밀한 유대를 누림으로써 완전히 타협하고 말았다고 본다. 프랑크는 참교회가 사도 이후 더 이상 없었다는 특유의 급진적 견해를 세운다. 참교회는 그리스도가 흩어진 자기 교회의 백성을 자기 왕국에 모으려고 영광 가운데 돌아올, 시간의 종말에 존재하게 될 뿐이다. 그때까지 참교회는 숨겨진 채 있을 것이다.
급진 개혁가들 대부분이 ‘성경만으로’라는 원칙을 적용하는데 극도로 엄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도 교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도 일관적이었다. 참교회는 하늘에 있었고 그 어설픈 제도적 모조품들이 땅에 있었다. 이 급진적 방식에 대응하여 루터는 두 가지 난점을 해결해야 한다. 교회가 제도적이지 않고 복음설교로 정의된다면 어떻게 급진 개혁가들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를 구분할 수 있는가? 루터가 ‘성경만으로’라는 원리의 급진적 내용을 전통에 호소(사례연구3.1참조)하여 완화시킨 것과 같이. 교회를 역사적 제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참교회에 관한 잠재적인 급진적 견해를 완화시켰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교적 직분을 갖고 있더라도 그릇된 교회는 겉모습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해야 했다.
도나티스트들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리 운동가였다. 그들은 당시의 가톨릭 교회가 박해시 로마 제국에 대한 그릇된 처신으로 타협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종교적 전일성 (온전성)을 타협하지 않는 이들만이 참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과 잡초의 비유(마태복음13:24-31)”를 원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이 비유는 교회에 적용된다. 비유 속의 발처럼 교회는 밀고 잡초,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담고 있고, 그들은 심판대까지 공존한다. 이처럼 교회에 대한 “도나티스트”와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은 판이하다. 루터는 “혼합된” 단체로서 교회를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받아들인 데 반해, 급진파들은 의로운 이들의, 의로운 이들만의 단체로서 교회를 보는 도나티스트의 견해를 전개했다. 도나티스트처럼 급진파들은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완벽을 요구했다.
장 칼뱅
교회론이 제기한 문제와 씨름한 개혁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칼뱅이다. 교회론에 관한 첫 주요논의는 1539년 출간된 『기독교 강요』2판에서 볼 수 있다. 제 2판이 나올 무렵 그는 새로운 복음중심 교회에 대해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칼뱅에게 참교회의 표시는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바로 집행하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최소한의 규정조차도 지키지 않았기에 복음주의자들이 그곳을 떠나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또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 교회의 정의와 부합하여 그 내부에서 더 이상 분열한 근거가 없었다. 1543년이 되자 칼뱅은 교회에서 맡은 일에 휠씬 더 경험을 쌓았는데 특히 그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을 때 그러했다.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 이후의 지적 세력인 마르틴 부처가 교회 행정가로 상당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교회에 관한 칼뱅의 후기이론이 그의 개인적 영향을 반영하는 것 같다. 목사, 박사, 또는 교사, 장로 및 집사의 네 직책은 그 기원을 부처에게서 찾는다. 칼뱅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확실한 표지”가운데 “생활의 모범”을 포함시키시는 했지만 훗날 개정판에서 하나님 말씀의 올바른 설교와 성례전의 집행을 강조하게 된다.
칼뱅은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로 크게 구분했다. 한 면으로 교회는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로서 가시적 집단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성도의 교제이며 선택받은 이들의 사귐으로서 비가시적 존재이기도 하다. 비가시적 측면에서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진 선택받은 자들의 집단이다. 가시적 면에서 그것은 땅위에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전자는 단지 선택받은 이들로만 구성되고, 후자는 선한 자와 악한 자 또한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모두 포함한다. 전자는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며, 후자는 현재의 경험적 대상이다. 가시적. 비가시적 교회 구분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 가시적 교회는 선택받은 이와 버림받은 이 모두를 포함하게 된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에게 그의 견해의 근거로 가라지 비유를 써서 이 점을 나타냈다. 둘째로 여러 가시적 교회들 가운데 어느 교회가 비가시적 교회와 일치하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칼뱅은 어떤 교회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객관적 기준을 강조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두 가지 판단기준이 정해졌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경청하는 것을 보거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대로 성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어디에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사례연구 3 . 5 신학과 천문학: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논쟁
1543년 5월 코페르니쿠스의『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soelestium』가 마침내 출간되었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이 책은 태양계를 태양 중심적 견해로 보았다. 이전의 모델은 중세 신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그들은 지구중심적인 기존의 성경 해석방법 때문에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태양계의 태양중심 이론이 대두되어 신학자들은 특정한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을 재고해야 했다. 세 가지 개괄적 방법을 기독교 성경해석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1) 문자적 접근: 해당구절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의 문자적 해석은 24시간이 여섯 주기에 걸쳐 창조가 일어났다고 주장할 것이다. (2) 비유적 접근: 성경의 어떤 부분이 완전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알맞지 않은 문제로 쓰여 있음을 강조한다. 이 견해는 창세기의 도입장을 시적이고 비유적 설명으로 보고, 거기서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3) 조절(accommodation)개념에 근거한 접근: 성경해석과 자연과학의 상호작용과 관련하여 단연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방법은 계시가 문학적, 인류학적으로 영향을 받는 방식과 유대교 안에서 또한 나중에 기독교 신학 안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교부시대에 영향력이 컸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셋째 방법이 16. 17세기 신학과 천문학의 관계를 논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명한 개혁가 장 칼뱅이 자연과학의 평가와 발전에 두 가지 주요하고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적극적으로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라고 격려했다. 둘째, 그는 “조절”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이해방식을 통하여 그 연구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장애물들을 제거했다. 그의 첫 번째 기여는 구체적으로 창조의 정연성을 강조한 것과 관계있다.
이렇게 칼뱅은 천문학과 의학연구를 호평한다. 그것들을 자연계를 신학보다 더 깊이 조사할 수 있어서 창조의 질서를 창조자의 지혜의 더 깊은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칼뱅이 자연에 대한 과학적 조사에 대해 새로운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네델란드에서 유난히 영향력을 행사한 칼뱅주의 신앙진술인 『벨기에 신앙고백Confessio Belgica』(1561년)은 자연이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우리 눈앞에 존재하며, 이 안에서 하나님의 비가시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대소막론하고 모든 피조물이 글자로서 존재한다”고 천명했다. 칼뱅의 주요 공헌은 자연과학 발달에 놓인 중요한 장애물, 곧 성경 문자주의를 제거한 일이다. 그는 성경이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에 관심이 있음을 직시한다. 그래서 성경을 풀 때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과 마음의 능력에 “맞추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계시가 자리잡으려면 하나님이 우리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렇게 계시는 우리의 제한 된 능력에 합당하게 차원을 낮추거나 “조절된”하나님의 판본(a scaled-down or accommodated version of God)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닿으려고 몸을 구부리듯 하나님도 우리 수준까지 몸을 구부려 낮추신다. 계시는 신적 겸비 행위다.
성경에 있는 창조 보도의 경우(창세기1장), 칼뱅은 그 설명이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능력과 범위에 맞춰 조절되었다고 주장한다. “창조의 엿새”는 24시간이 여섯 차례 있었던 것을 가리키지 않고 긴 시간을 가리키려고 단지 인간의 사고방식에 맞춘 것뿐이다. “궁창 위의 물”은 단지 구름에 맞춰 표현한 방식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이 특히 17세기 과학적 이론화에 끼친 영향은 주목할만하다. 예를 들면 영국작가 에드워드 라이트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의 태양중심설을 변호하면서 성경 문자주의를 다음과 공격했다. 첫째, 성경은 물리학과 무관하며 둘째, 성경의 언어방식은 마치 보모가 유아를 대하듯이 대중의 언어와 이해방식 수준에 맞춘 것이다.
태양계의 태양중심적 형식에 대해 새로운 논쟁 일어나자 17세기 첫 십년대의 이탈리아에서 비슷한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오를 정죄하게 되었는데 갈릴레오는 코페르티쿠스의 태양계의 이론을 단단히 변호했다. 갈릴레오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 과학 대 종교의 논쟁으로, 또는 자유의 지론자 대 권위주의자의 논쟁으로 자주 묘사되지만,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성경의 정확한 해석이었다. 갈릴레오와 그의 비판자들간의 논쟁은 대부분 특정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조절문제가 그 논쟁의 핵심이었음을 곧 보게 된다.
1615년1월 출판된 『피타고라스 학설 신봉자들고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관한 글 Lettera sopra l' opinione de' pittagorici e del Copernico』에서 까르멜 수도회 수사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는 태양계의 태양중심적 모델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포스키리니의 혁신성은 그가 채택한 해석방식이 아니라 그가 적용한 성경구절에 있었다. 환언하면 포스카리니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문자적인 것으로 해석해왔던 경문을 조절된 방식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점차 코페르니쿠스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포스카리나와 유사한 성경해석 방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성경해석이었다. 갈릴레오는 비판자들은 몇몇 성경귀절이 그와 상충한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여호수와 10:12은 여호수와의 명령으로 태양이 멈추었다고 말한다. “대백작부인 크리스티나에게 띄운 서신(Letter to Grand Countess Christina)”에서 갈릴레오는 이것은 일상적 언어방식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우리는 여호수와가 복잡한 천체의 구조를 파악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적당한(accommodated)”언어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 견해에 대한 공식적 정죄는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한 것이다:
(1) 성경은 “말씀의 본래적 의미에 따라”해석되어야 한다. (2) 성경은 “성부와 신학자들의 일상적 해석과 이해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포스카리니와 갈릴레오의 견해는 모두 기독교 사상사에 전례가 없었던 혁신적인 것으로서 배격당해야 한다.
제4장 현 대(1750-현재)
15세기 후반기에 기독교는 점차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항해 5.6세기 전에 “성전(jihad)”을 선포했다. 1450년 군사적 정벌의 직접적 여파로 이슬람은 유럽의 서남부와 동남부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비록 기독교 공동체는 유럽 외부에 존속하고 있기는 했지만(이집트, 에디오피아. 인디아 시리아 등)기독교는 지리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했다. 20세기까지 기독교는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나라에서 주도적 종교로 굳건히 서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 외부에서 경험한 극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본거지-서부유럽-에서 일련의 내적 좌절을 겪었다.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적 무관성
유럽의 종교전쟁이 끝나면서 이 대륙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왔다. 종교전쟁으로 유발된 혐오감으로 인해 종교적 관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두되었다. 종교에 관한 한 다양성을 용인해야 한다. 고전적 논증은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서간 Letters Concerning Toleration”(1689-1692)에서 볼 수 있다. 로크는 종교적 관용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반적 고찰에 근거해 전개한다. 첫째, 국가가 대립하고 있는 종교간의 진리주장을 판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비록 한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에 비해 우월하다고 확증된다 해도, 이 종교의 사법적 실행은 그 종교가 바라던 바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라고 로크는 주장한다. 셋째, 실용적 관점에서 종교의 획일성을 강요하려는 것의 폐해는 종교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양한 종교의 관용이 다양한 도덕으로 치닫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몇 가지 점에서 로크는 종교-유대교, 기독교, 모슬림-들이 공중도덕과 일치하며, 그것을 지지한 다고 생각한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9세기에 이 견해를 크게 옹호하면서 “미합중국에는 수많은 분파가 존재하지만” 의무와 도덕에 관한 동의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로크의 분석은 결국 종교란 공적인 것과 무관한 사적문제라는 결론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접근방식은 동시에 종교적 관용을 천명했고, 그것은 종교가 순수하게 사적인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계몽주의로 인해 고무되었는데, 계몽주의는 동일한 궁극적 실재를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이성을 통해 알려질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북미의 기독교: 대각성과 미국혁명
현재 미국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국가로 인정된다. 기독교는 이 초강대국의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기독교가 이 나라의 삶에 이토록 중요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1620년 이주민들은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1627-1640년 사이에 약 4천명이 대서양을 건너는 모험 끝에 메사추세츠 만 해안선에 정착했다. 북미의 첫 정착민들은 대체로 기독교 신앙에 굳게 헌신한 자들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730년대 메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발흥한 “대부흥”운동에서 유래했다. 부흥의 첫 징후는 1727년 뉴저지2주 라리탄 벨리에서 회중들을 섬기던 화란 출신 목사 테오도레 프라이링하우젠에 의해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 부흥이 노샘프턴에서 시작된 것은 1734-35년 겨울철이었다. 부흥운동은 다음해까지 지속되었고 1735년 3,4월에 절정에 달했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의 사건을『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관한 신실한 보고A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부흥이 뉴일글랜드 지역에서 지속되었을 띠 당시 영국에서 건너온 조지 화이트필드는 이 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했다. 1740년 그는 남쪽의 조지아에서 북쪽의 메인에 이르는 식민지들의 전도여행을 감행했다.
이 부흥은 미국 기독교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으로 특정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순회설교가 들의 역할이 정립되었고, 기성교회의 성직자의 권위를 잠식하게 되었다. 대중문화의 토대가 놓였고, 여기서 기독교는 기성 사회질서의 보존에 헌신하는 엘리트 성직자들의 보호구역이 아니라 대중에 직접 호소하는 세간의 활동이었다.
미국혁명의 원인은 복합적이며 다수의 상호 연관된 현안을 내포한다. 아마도 주요주제는 점차 간섭, 압제 착취적인 것으로 보였던 영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욕구였으리라. 자유를 향한 욕구는 정치, 경제, 종교적 영역에서 표출되었다. 영국교회는 점차 영국의 식민통치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1760년대 미국 신교도들은 그 지역에서 영국교회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격렬한 투쟁의 벌였다. 1773년 영국의회가 동인도 회사에게 북미에 대한 차 판매 독점권을 주기로 결정하자, “보스톤 차 사건”이 터졌고, 메사추세츠에서 소요가 확산되었다. 1775년 일련의 전투가 벌어졌고 1776년7월 47일 독립선언으로 이어졌다. 전면적인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교회의 강단은 종종 혁명적 집결지 역할을 담당했다. 결과적으로, 혁명으로 인해 거의 모든 기독교 종파는 더 큰 목표를 위해 대동 단결하게 되었고, 영국교회는 고립되었으며 한 때 누렸든 모든 특권을 잃게 되었다.
유럽의 분수령: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종교적 반감의 정점으로 꼽히곤 한다. 1789년 프랑스의 안정된 사회구조는 민중봉기로 뿌리 채 흔들렸고 결국 군주체제의 몰락과 공화국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사회의 전통적 두 기둥-왕정체제와 교회-에 개혁이 필요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운명의 그해 1789년 늦여름까지도 프랑스 왕정이 봉건주의를 폐지하고 교회의 특권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허락했다는 일반적 분위기가 있었다. 11월2일, 모든 교회 토지는 국유화되고 사제들을 위한 기본적인 임금을 책정하여 국가가 보장하는 것 등에 동의가 이루어졌다. 사제들의 자치헌장(The Constitution of the Clergy,1789년7월)은 교황의 권위를 배격했으며 교구와 대성당 사제를 축소했다. 모든 것이 이내 바뀌었다. 로베스 피에르가 영도하는 더 과격한 혁명 단체가 득세하면서 그 유명한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1793년 1월21일 루이 16세는 공개적으로 길로틴 형을 당했다. 1793-94년 사이에 탈 기독교적 기획이 실행되었다. 이성의 여신에 대한 제사의식이 공식적으로 인가되었다. 옛 월력이 공화국의 월력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일요일과 기독교 축일을 없애고 세속 명절로 대치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종교정책은 곧 이웃나라에도 확산되었다.1792년 11월, 프랑스 혁명군은 인근지역의 정복길에 올랐다. 1799년까지 네덜란드, 스위스, 북이탈리아 일부, 라인란트 지역에 걸쳐 여섯 개 위성국을 건립했다. 1798년2월에 교황국을 점령, 교황은 프랑스로 끌려가 6개월 후에 거기서 죽었다. 1814년 부르봉 왕가가 재건되었고 루이 18세는 프랑스 왕위에 복귀하고 가톨릭을 재건했다. 상황은 결코 쉽지 않았고 19세기 내내 교회와 국가간의 실제적 갈등은 경감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적어도 과거에 잃어버린 영향력과 명성과 성직권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계몽운동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용어는 오직 19세기를 마감하는 세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말이었다. “계몽운동”은 명료한 정의룰 불허하는 거친 용어로서 1720-80년 어간을 풍미했던 일군의사상과태도를 포괄하는 바 여기에 개인과 사회를 과거의 압박 속에 얽어매려는 경향이 있는 옛 신화를 분쇄하려는, 자유롭고 건설적인 이서의 사용이 포함된다.
흔히 계몽운동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성의 시대”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중세시대는 계몽시대 만큼이나 “이성의 시대”였다. 다만 이성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이성사용에 부과된 제약상 큰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세계의 신비를 파고드는 인간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을 계몽운동의 규정적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계몽운동을 언급할 때 “합리주의”라는 말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본래 의미로 합리주의는, 외부세계가 이성으로서, 더 나아가 이성만으로 알려질 수 있다는 교설로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와 볼프 같은 초기의 저술가들의 특징이었던 이 교설은, 18세기 후반 존로크의 경험주위 인식론이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호된 비판을 당했다. 흔히 순수이성의 충족성을 대변하는 자로 알려진 칸트도 실상 이성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전개한 인식론은 순수 합리주의 (이성에만 의지)와 순수 경험주의(경험에만 호소)의 통찰력을 종합하려는 시도였다.
계몽운동은 서유럽과 기독교에 심각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초래했다.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종교전쟁의 충격은, 기독교에 대한 더 과격하고 새로운 도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유럽에서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외적 현실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면, 계몽운동은 기독교의 지적 신빙성 그 자체(어느 한 측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가 여러 전선에서 큰 위험에 직면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도전의 근원은 17세기까지 소급되는데, 유럽 대륙의 데카르트주의와 영국에서 점차 대두하는 이신론(Deism)의 영향이 그것이다.
기독교 신학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 :개관
전통적 기독교에 대한 계몽운동의 비판은 인간이성 만능이라는 원리에 의거한다. 이런 신념은 여러 단계에 걸쳐 발전했다. 첫째,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이며 비판적 검증을 견더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존로크의 「기독교의 합리성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16950과 독일의 초기 볼프 학파에서 등장한다. 둘째, 기독교의 근본적 사상은-합리적이기에- 이성 자체에서 추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적 계시 같은 개념을 끌러들일 필요는 없다. 존톨랜드의 『비신비적 기독교 Christianity not Mysterious』(1696)나 매추 틴테일의 『창조만큼 오랜 기독교 Christianity as Old as Creation』(1730)등에서 발전된 사상에 따르면, 본질적인 기독교는 자연종교의 재판(re-publication)이다. 셋째, 계시를 판단할 이성의 능력이 확증되었다. 비판적 이성은 만능이기 때문에 이성은,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할 목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실천을 판단하는 최고의 자질을 갖춘 것으로 간주되었다.
본래 계몽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현상이었고 숫자적으로 가장 중요한 형태의 종교인 기독교 문화 안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종교 일반에 대한 계몽주의 비판은 종종 기독교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부각되었다. 전례없이 강한 열정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기독교 교리였다. 종교에 대한 계몽주의 입장은 주목할 만한 지역적 편차를 보였다.-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지역적 요소를 반영하면서, 이런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경건주의인데 영국과 미국적 형태로 메소디스트(감리교파)라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운동은 종교의 경험적 측면을 특히 강조했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기독교는 대중의 종교적 상황과 근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는 [대중과 무관한 듯이 보인]루터교회 정통주의의 지성우위적 태도와 크게 대조적이었다. 경건주의는 17세기 말 독일에서 잘 발달했고 영국에서는 18세기에 들어서나 발전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계몽운동은 영국에서 경건주의 발흥에 앞서서 존재했고 그 결과 18세기의 위대한 복음부흥운동은 종교에 대한 합리주의의 영향을 제법 무디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몽운동은 경건주의 이후에 등장했고, 따라서 주로 종교적 신앙으로 틀잡힌 상황 속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학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 개별주제
기적의 가능성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중요성에 관한 전통적 기독교 변증론은 부활을 정점으로 한, 신약의 “이적적 증거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우주의 기계적 규칙성과 질서가 새로이 강조됨으로써-신약의 이적사건 보도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흄의 『기적론 Essay on Miracles』(1748)은 기적의 불가성을 증거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계시개념
계시라는 개념은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장 칼뱅 등 다수의 신학자가 신에 관한 자연적 지식의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 지식이 정경에 증언된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신적 계시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는 초자연적 계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발전시켰다. 레싱에게 있어서 역사와 이성 사이에는 “추악한 큰 도랑(ugly great ditch)”이 존재한다. 계시가 역사 안에서 발생한다-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인간이성에 의한 탐구에 개방적인 것이나. 나사렛 예수의 역사 같은 “사건들”안에서 드러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원죄교리
인간 본성이 어떤 의미에서 흠있고, 부패했다는 정통적 원죄교리에 표현된 사상은 계몽주의의 열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볼테르나 장자크 루소는 이 교리를 인간능력에 관해 비관주의를 부추기는 것으로, 그리하여 인간의 사회적 점차적 발전을 저해하고 방임적 태도(laissez-faire attitudes)를 유발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기독교의 구속교리는 인간이 원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전제위에 기초하기 때문에 원죄를 배척하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계몽주의가 있어서 원죄교리는 바로 압제의 주체요, 인간이 자유를 얻으려면 벗어나야 할 것이었다.
악의문제
계몽주의는 세상 속의 죄의 존재에 대한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중세 때 악의 존재는 기독교의 전일성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신의 복된 전능성과 악의 공존에 내재한 모순은 신앙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단지 학문적인 과제였을 뿐이다. 계몽주의로 인해 상황은 급변했다. 악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 자체의 신빙성과 전일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볼테르의 소설『깡디드 Candide』는 자연적 악의 존재(당시 유명한 리스본 지진 같은 것)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이 봉착한 어려움을 부각시킨 작품들 중 하나였다.
경전의 위상과 해석
정통기독교 내에서, 신교와 로마 가톨릭을 막론하고 성경은 여전히 신의 영감을 받은 교리도덕의 근원이요 여타 문학유형과는 다른 것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계몽주의는 이 전체를 의심했고, 결국 경전에 대한 비판적 접근방식이 대두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의미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계몽주의가 도전한 최후의 영역 중 하나는 나사렛 예수의 위격에 관한 것이었다. 이신론이나 독일의 계몽주의는 모두 역사적 예수와 그에 대한 신약의 해석 사이에 심각한 편차가 있는 명제를 전개했다. 초자연적 구속자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안에서 인정될 수 없다면, 계몽된 도덕교사의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마루스가 열렬히 전개한 이 사상은, 예수에 관한 신약의 보도를 넘어서 좀 더 단순하고 인간적인 예수를, 새로운 정신의 세대에 합당한 예수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예수에 관한 정통적 사상이 도전을 받은 두 번째 영역은 그의 죽음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정통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계몽주의는 이것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에 않았다)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로 해석되었다. 계몽운동 중 이 “대속이론”은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신학운동
낭만주의 Romanticism
“낭만주의”라는 말은 정의하기가 아주 어렵다. 이 운동은 계몽주의의 핵심주제 중 어떤 것을 겨냥한 반동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실제가 인간이성에 알려질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권리주장이 그 목표였다. 계몽주의가 인간이성에 호소하는 반면 낭만주의는 인간의 상상력- 이 상상력은 인간정신이 무한한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유한한 세계조차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신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에 호소했다. 이 정서는 영국시인 월리엄 워즈워드가 잘 표현했는데 그는 인간의 상상력을 인간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그리면서, 이성을 넘어 유한한 것을 통해 무한한 것의 본을 뜨는 데에 이른다. 낭만주의는 이렇게 전통적 기독교 교리와 계몽주의의 진부한 합리적 도덕 모두를 혐오했다. 양자는 “우주의 신비”(아우그스트 슐레겔의 표현)를 깔끔한 공식으로 축약하려 함으로써 세계의 복합성을 올바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성은 인간정신을 연역된 것에 제한하려는 위험이 있다. 상상력은 인간영혼을 스스로 부과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인간영혼의 실재의 새로운 심연을 발견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존키츠가 그렸듯이 “나는 가슴이 사랑하는 거룩함과 상상의 진리 이외에 그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노발리스(프리드리히 폰 하르텐베르크)의 영향 하에 독일 낭만주의는 “게퓔”(Gefuhl. 이 용어는 “느낌”이나 “정서”로 번역될 수 있지만 외국어 사용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은 이것을 “느낌[feeling]”으로 대치해도 된다)에 관한 두 개의 공리를 발전시켰다. 첫째, “느낌”은 주체성과 내적 개별성을 의식하게 된 개별적 사유주의에 관계한다. 둘째, “느낌”은 무한 영원을 지향하며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열쇠를 제공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계몽주의가 상상력과 느낌을 “이단적”이라 금지했던 것이라고 노발리스는 주장한다.
낭만주의의 발전은 유럽 기독교에 큰 의미가 있다. 합리주의가 혐오했던 기독교의 측면(특히 로마 가톨릭주의)은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을 유발했다. 합리주의는 경험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결핍된 것으로 보였고, 전통적으로 기독교신앙이 전하고 만족시켜주었던 참된 인간의 욕구에 부응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합리주의가 종교를 침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영국, 독일 북미의 발전을 볼 때 확실해진다. 독일 경건주의와 영국 복음주의(18세기)에서 명백히 드러난 힘찬 모습은 합리주의가 보편적 인간의 요구와 의미에 강력한 대한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슐라이어마허의 기여는 바로 이런 상황, 곧 합리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깨지고 인간의 “느낌”을 새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종교 일반, 특히 기독교는 느낌 혹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의 조직신학 대저 『기독교신앙 The Christian Faith』(1821.1830개정)은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절대의존”의 느낌과 관계하는가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 Marxism
현대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세계관 중 하나인 마르크스주의는 지난 세기 기독교신학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고, 앞으로도 중요한 대화상대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는 독일 사상가 칼 마르크스와 관계한 일련의 사상체로 간주된다.
유물론개념은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이다. 이것은 세계가 단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단언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적 교설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질생산과 더불어 시작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종교적 관념을 포함한 모든 관념은 물질적 실재에 대한 반응이다. 만일 이런 것들이 (혁명 같은 것으로)근본적으로 변화한다면 그들이 산출하고 유지했던 신앙체계는 함께 소멸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상은 기독교와 어떻게 관계하는가? 1844년 마르크스는 정치 사회 수고에서 종교 일반은 (그는 개개 종교를 구별하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라는 사상을 전개했다.
그러나 종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대답은 소외개념에 집중된다. 종교는 사회적, 경제적 소외의 산물이다. 종교는 소외에서 발생했으며, 동시에 대중으로 하여금 자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소외를 부추긴다. 유물론은 물질세계의 사건이 지적 세계에 상응하는 변화를 유발한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종교는 일련의 사회 경제적 상황의 결과이다. 이 조건이 바뀌어 경제적 소외가 제거된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종교가 소외된 인민들의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 존속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세계에 대한 종교적 반영은...일상적 삶의 실천적 관계가 인간에게 완전히 지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동료인간과 자연과 맺은 관계)를 제공한 때에만 소멸될 수 있다.”말하자면 종교를 제거하려면 실제 세계를 한 번 흔들어야 한다(a shake-up in the real world)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일차대전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 운동 내부의 불이치 때문이며 또한 정치적 확산의 호기를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혁명은 마르크스주의에 필요한 돌파구를 제공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수정된 형태(마르크스 -레닌주의)로 소련에 건립되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차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거둔 마르크스주의의 성공은 주로 군사력과 정치적 불안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실험하다가 맞이한 1970년대와 80년대의 경제적 실패와 정치적 부피로 인해 이 새로운 철학은 환멸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쇠락의 나선에 빠져들었고 이 철학의 주요 옹호자들은 점차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떨어져나간 추상적 이론가- 실상 정치적 경험이 전무한 이론가-가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 Liberal Protestantism
신교 자유주의는 현대 기독교 사상에서 발흥한 운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 기원은 복잡하다. 그러나 그것을 슐라이어마허가 제기한 신학적 기획에 대응하려한 것이라 보면 좋겠다 신교 자유주의의 고전적 형태는, 기독교신앙과 신학이 모두 당대의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고조된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의 기안은 전통적 기독교신학과 관련해 현저한 유연성을 요구했다. 그 주도적 저술가들은 기독교가 지성적 선택권을 유지하려면 신앙의 재구성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대한 전통적 해석방식이나 전통신앙의 해석방식이 인간지식의 발전으로 제약되는 듯이 보일 때, 그것들을 세계에 관해 새로이 알게 된 것과 일치시키기 위해, 버리거나 재해석해야만했다.
기독교신앙을 성경이나 예수그리스도의 위격 위에서만 정초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감지한 자유주의는 기독교신앙의 닻을 일반적 인간경험에 내리려고 했고, 그 신앙을 현대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자유주의에 새로운 진보와 번영의 세계로 치솟아 오르고 있던, 인간의 비전으로 고취되었다. 진화교설은 이 신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그것은19세기 서부유럽의 문화적 안정이라는 강력한 증거로 배양되었다. 종교는 점차 현대인간의 영적 욕구와 관련된 것으로, 사회에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교 자유주의의 윤리적 경도는 특히 알브레히트 벤야민 리츨의 저서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 개념은 중추적 의미가 있다. 리츨은 이것을 정태적 영역의 윤리적 가치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당대에 독일사회에 발전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역사는 신의 인도를 받아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운동은 인간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종교와 문화는 실상 동일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칼 바르트나 북미의 라이놀드 니버 같은 다수의 비평가는 신교 자유주의를 인간본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낙관적 견해에 근거한 것이라 비판했다. 그 최선의 상태로 볼 때 자유주의는 기독교신앙을 당대의 문화에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재진술하려는 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신교 자유주의가 가장 진보적으로 영향력 있게 전개된 곳은 폴 틸리히의 저술일 것인데 그는 19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미국에서 명성을 얻었고, 조나단 에두워즈 이래 가장 영향력있는 미국의 신학자로 널리 인정되었다. 틸리히의 기획은 “상호연계(correlation)”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틸리히는 칼 바르트가 전개한 신학적 기획에 경악하면서 이런 것이 신학과 문화 사이에 쐐기를 박는 잘못된 시도라고 배척했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실존적 질문-인간문화에 의해 제기되었고 계시되었다
“자유적”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슐라이어마허와 틸리히의 전통에 속한 신학자(당대의 문화에 대응하여 신앙을 재구성하려는 전통에 속한 신학자)”에 적용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이렇게 이 용어는 저명한 현대의 저술가들을 묘사한다. 전통적이며 존경 어린 의미로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타인의 견해에 대한 불가 침해적 존경과 개방성을 내포한 말이다. 그것 자체로 자유주의는 기독교신학의 모든 부문의 근본적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 용어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독특성을 부정하는 사상 등을 포함하기도 한다.
모더니즘 Modermsim
“모더니스트(현대적)”라는 용어는 19세기말에 활약한 일군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에게 처음 적용되었는던 말인데, 이는 전통적 기독교교리, 특히 기독론과 구속론에 관련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운동은 과격한 성서비평에 긍정적인 입장을 옹호하며 신앙의 신학적 측면보다는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느슨한 용어이며, 공통된 연구방식이나 창시자에 의존하는 어떤 고유한 학파의 사고방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로마 가톨릭의 저술가 중 특히 유념해야 할 사람은 알프레드 루아지 와 조지 티렐이다. 1890년대에 루아지는 성경의 창조보도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참된 교리적 발전이 경전 자체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대표작 『복음과 교회 L, evangile et I' eglise』는 1902년에 출간되었다. 영국 예수회 수속 조지 티렐은 루아지를 쫓아 전통적 가톨릭 교의를 과격하게 비판했다. 루아지와 같이 그는 기독교 기원에 관한 하르낙의 설명을『교차로 상의 기독교 christionity at the Crossroads』(1909)에서 비판하면서 하르낙이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를 “깊은 우물바닥에 비추인 신교 자유자의자의 얼굴”로 기각했다.
미국에서 발흥한 모더니즘도 유사한 패턴을 좇았다. 19세기 말 20세기초 신교자유주의 성장은 더 보수적인 복음적 관점에 대한 직접적 도전으로 널리 간주되었다. 뉴맨 스미스의 저서 『소멸하는 신교주의와 도래하는 가톨릭주의 passing Protestantism and Coming Catholicism』(1908)는 몇 가지 점에서 적어도 교의에 대한 비판이나 교리적 발전에 관한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 모더니즘이 미국 신교주의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일차대전으로 인해 라이놀드 니버와 같은 급진적 사회현실주의 작가를 통해 강고해진 미국 모더니즘은 자기 반성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 모더니즘은 갈 길을 잃은 듯이 보였다. 1935년 12월 4일자 크리스천 센추리에서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모더니즘을 넘어설 필요성을 역설하는 영향력있는 논문을 게재했다.
신정통주의 Neo-Orthodoxy
일차대전은 슐라이어마허와 그의 휴예와 관련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환멸을 경험했다-비록 그 신학을 모조리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일군의 저술가들은 슐라이어마허가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종교적 경험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켜버렸고 결국 기독교를 신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했다. 하나님의 “타자성”을 강조하면서 칼 바르트 같은 사상가는 몰락한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러한 사상은 20세기에 이룩한 신학적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교회 교의학 Church Dogmatics』(1936-1969)에서 전개되었다. 바르트는 이러한 거대한 기획을 생전에 마감하지 못했고 구속교리는 미완성은 채 남아 있다. 그의 교의학을 관통하는 근본주제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한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르트주의”라는 진부한 용어 외에 바르트와 연관된 접근방식을 지시하는 두 가지 용어가 있다. “변증법적 신학”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특히 바르트의 1919년판 『로마서 주석 Commentary on Romans』에 등장하는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 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변증법”이란 개념에서 취한 것이다. 두 번째 용어는 “신정통주의”로서 이는 바르트와 특히 17세기 어간 개신교 정통주의자들과의 유사성에 착안한 것이다. 바르트의 접근방식 중 가장 독특한 면모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 할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학은 기독교회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대에 충실하게 그가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한 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학과목이다. 신정통주의는 1930년대 북미 신학계를 풍미했는데 특히 당대의 신교자유주의의 낙관적 전제에 의거한 사회사상을 비판하는 라이놀드 니버나여타 저술가들의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로마 가톨릭 주의 Roman Catholicism
현대 로마 가톨릭 신학 발전상 가장 중요한 전기는 제2 바티칸 공의회 직전 몇 년(1962-5)동안에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주로 신교지역인 북유럽에서 교회는 종종 수세에 몰려 있었고 건설적인 것보다는 논쟁적인 신학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것은 비스 마르크가 독일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문화전쟁(Kultuekampf)을 선포 한 19세기 어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성이 고갈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마 가톨릭 주의는 부쉬에의 사상으로 깊이 영향을 받아왔는데, 특히 가톨릭 전통의 항구성에 대한 그의 강조로 그러했다. 독일의 로마 가톨릭주의는 낭만주의적 관념론의 발흥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그것은 가톨릭 신앙과 실천의 온갖 측면- 그것의 경험적 측면을 포함- 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경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830년대 가톨릭 튀빙겐 학파의 발흥 속에서 볼 수 있는데, 이때 요한 세바스티안 폰 드라이와 요한 아담 묄러 같은 저술가가 교회의 생생한 음성으로써 전통의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의 주요한 갱신은 이차대전(1939-45)이후에 그 징후를 보였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부와 중세의 가톨릭 유산을 되찾는 것이었고 이것은 앙리 드 뤼박과 이브 꽁가르의 작품에서 확연하다. 제이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 성례전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논의에 불을 붙였고 가톨릭 신학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대했다.
20세기 로마 가톨릭 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한스 우어스 폰 발타자르와 칼 라너를 꼽는 것이 통상적이다. 폰 발타자르의 주저는 『영광 HerrlichReit』이란 표제로1961-69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는 기독교 관념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응답으로 특히 강조했다. 칼 라너가 가장 인상 깊게 이룩한 업적은 에세이(단상)를 신학구축을 위한 도구로서 복권시켰다는 점이다. 라너의 신학적 기획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초월적 방법”일 것이다-그는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했다. 라너는 초월자에 대한 느낌은 기독교 신학의 고전적 자료-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시 차용함으로써만 되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동방 정교회주의 Eastern Orthodoxy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침략자에게 함락당함으로써 동방 기독교 시장의 중심지는 러시아, 특히 키예프와 모스크바 같은 도시로 옮겨갔다. A. S. 코미야코프와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 같은 저술가들은 19세기 러시아 정교회 신학의 정신적 토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20년대 그리스는 마침내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이로써 정교회 내의 신학적 전통을 갱신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갱신 작업은 실제로 1960년대까지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없었다. 1960년대이래 요한 지지울라스, 크리스토스 얀나라스 같은 저술가가 동방 기독교 전통의 독특한 사상을 재발견하는 데 큰 자극이 되었다.
폐미니즘 (여권신장주의) Feminism
폐미니즘은 현대 서구문화의 주요한 구성인자가 되었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위해 매진하는 범세계적 운동이다. 근래에 이 운동은 점차 잡다해졌는데, 그 이유는 문화적, 종족적으로 상이한 그룹에 속하는 여성들편에서 다양한 접근방식을 기꺼이 인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북미의 흑인여성들의 종교적 저술은 점차“흑인 여성 신학”으로 지칭되게 되었다.
폐미니즘은 기성종교가 여성을 2등급을 인간으로 취급한다고 인식한다는 점 때문에- 기독교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제2의 성 the Second Sex』(1945)같은 시몬느드 보봐르의 작품은 이런 사상을 길게 전개했다. 그래도 기독교의 대한 페미니스트의 평가는 이들 작가가 암시하듯이 그렇게 일률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적대극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 작가들은 기독교 전통의 형성과 발전상 여성들이 얼마나 활동적이었는지- 신약시대 이래- 기독교 전체 역사상 중대한 지도력을 발휘했는지를 강조했다.
폐미니즘이 기독교 사상에 기여한 공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신학도식에 도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1) 남성적 신개념(The maleness of God):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시종 남성형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많은 페미니즘 작가들의 비판 표적이 되었다. (2) 죄의 본성(the nature of sin): 다수의 페미니즘 저술가들이 교만과 야심과 지나친 자기사랑으로서 죄의 개념은 본질상 남성지향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죄를 긍지의 결핍, 야망의 결핍, 자기사랑의 결핍으로 체험하는 여성들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의 위격(the person of Christ): 다수의 페미니즘 저술가는- 그 중 로즈매리 래드포드 뤼터의 『성차별주의와 하나님 담론』이 가장유명한데- 기독론은 안의 만연한 성차별의 최종근거하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포스트머도니즘 확고한 토대없이 어떤 문화적 감각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다원성과 다양성을 선호하며 모든 인간적 사유의 근원적인“상황성”을 통해 사고하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호하고 잘못 규정된 개념인데 이는 모더니즘의 붕괴 이후 발흥한 일반적인 지적 사유양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완전한 정의는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 주도적 면모를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다-특히 북미 신학교정에서 신학도들이 만날 수 있는 형태의 면모는 가능하다.
이러한 사조를 잘 대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측면- 또한 원문과 언어로 사로잡힌 강박성을 지시하는 측면-은 ‘해체(deconstruction)’이다. 이것은 비판적 방식으로서 어느 한 원문의 저자의 본성과 의도는 그 원문의 해석과 실제로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1. 성경해석(Biblical interpertation): 전통적으로 학술적 성경해석은 역사비평적 방법이 지배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19세기에 발전한 것으로서 복음서 구절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재구성하는 비판적, 역사적 방식의 적용을 중시했다. 1980년대에 해롤드 블룸이나 프랭크 커모드 같은 주도적 문학비평가들은 성경해석에 돌입해“제도적을 합법화되거나” “학적으로 존중된” 성경해석이라는 생각에 도전했다. 성경원문에 하나의 의미가 있다는 관념은-포스트모더니즘 안에서 아주 미심쩍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미셸 푸코의 해석자와 공동체간의 세력관계 분석은 “공인된” 성경 해석자들의 잠정적 억압기능에 관해 중요한 질문을 듬뿍 안겨주었다. 데리다의 작품은 성경의 모순적 독법이 어떻게 성경원문의 상이한 해석에 의해 야기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2.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포스트모더니즘은 태생적으로 “체계화”라는 개념에 적대적이며, “의미”를 파악했다는 주장에 반감을 보인다. 마크 테일러의 연구『Erring』는 조직신학에 끼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충격을 잘 보여준다. “실수(erring)”라는 표상으로 인해- 신학적 체계 구축에 대한 좀더 전통적인 접근방식보다는-테일러는 반체계적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는 진리나 의미라는 문제에 대해 다의적 접근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흑인신학 BlacR Thoelogy
“흑인신학 (검은 신학,Black Thoelogy)”은 특히1960, 70년대 미국에서 맹위를 떨친 운동으로서 검은 경험의 실체가 신학적 레벨로 대변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미국의 흑인 공동체 안에서 신학적 해방으로 변모하는 첫 번째 큰 징후는 1964년 조셉 위싱턴의 『검은 종교 BlacR Religion』의 출판에서 나타났는데 이는 북미적 상황에서 검은 종교의 독특성을 입증하려는 강력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 접근은 알버트 클리그의 『검은 메시아 BlacR Messiah』의 등장으로 크게 편향되었다.
이 운동은 1969년 자체의 신학적 독특성을 몇 가지로 단호하게 규정했다 “흑인 선언 (Black Manifesto)”-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모인 공동체 조직을 위한 초종파적 협의회에서 채택된 선언-은 흑인들의 경험이 신학적 현안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운동에 가장 중요한 기여자로서 흔히 제임스H.콘을 꼽는데 그의 저서『흑인 해방신학 BlacR Theology of Liberation』(1970)은 해방을 의한 흑인의 투쟁의 관여한 하나님이라는 핵심개념에 호소했다.
후기 자유주의 Postliberalism
알라스테어 맥킨타이어 같은 철학자의 노작에 의거하여 후기 자유주의는 “보편적 합리성”에 호소하는 전통적 계몽주의나 모든 인간에 공통적인 즉자적 종교경험을 전제하는 자유주의에 반대한다. 모든 사유나 경험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후기 자유주의는 신학적 기획의 기초를 종교적 전통으로 회귀하는 데 둔다.(이들 전통의 가치는 내적으로 승인된다).
후기 자유주의의 현안 중 가장 중요한 논술은 조지 린드벡의 『교리의 본질 Nature of Doctrine』(1984)이다. 교리에 대한 “사변적 -명제적”접근 방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거부하며 자유주의의 “경험적 표현주의적” 이론을 인간경험의 다양성이나 인간사유와 경험 안에서 문화의 메개적 역할을 모두 해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거부하면서, 린드벡은 후기 자유주의의 주도적 상을 구현하는 “문화-언어적”접근방식을 계발했다.
(1) 조직신학 신학은 본래 기독교 전통의 규범적 토대를 규명하는 서술적 학과목으로 이해되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진리는 기독교 신앙 특유의 교리적 전통에 대한 충실성과 동일시 될 수 있다. (2) 기독교 윤리 스탠리 하우워스는 후기 자유주의적 윤리를 탐구한 학자 중 하나다. 계몽주의가 제기한 윤리적 이상과 가치라는 보편적 틀을 거부하면서 하우워스는 기독교 윤리의 과제는 역사적 공동체(교회)의 윤리적 비전을 확인하는 일이요 그 구성원(신자)의 삶에서 그 비전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복음주의 evangelicalism
“복음적(evangelical)”이라는 용어는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후기 중세 교회 저술가보다 더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원했던 가톨릭 저술가들을 지칭하려고 16세기에 유래한 말이다. 근본주의는 세속문화의 대두에 직면해 미국 내 몇몇 교회가 보인 반응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반문화운동(a counter-cultual movement)으로 남아 있으며 문화적 경계를 설정하는 수단으로써 핵심교리를 확정한다. 고립적 강박관념이 이 운동의 특색인데, 근본주의자들만의 반공동체(Counter-Community)는 자신을 옹벽으로 둘러싼 성이거나 그리스도의 현세적 재림을 강조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상 안에서 자유주의들이 주장하는 지상의 하나님 나라 개념(사회적 활동을 통해 이룩하려는 신국개념)에 대항해 강력한 무기를 찾은 듯하다. “세대주의 (dospensationalism)”, 특히 세기말 재림(문자적으로 새 천년기가 시작되기 전에 재림이란 의미역자)타임의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통합적 요소가 되었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라는 대체로 세 가지 차이가 있다:
(1) 성경적으로, 근본주의는 어떤 형태의 성서비판 개념도 불허하며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몰두한다. 복음주의는 성서비판 원리를 수용하며 성경 안의 다양한 문학양식을 인정한다. (2) 신학적으로, 근본주의는 일군의 교리에 편협하게 헌신하는데, 이 교리 중 어떤 것은 복음주의자들이 기껏해야 부수적인 것이요 아니면 전혀 무용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3) 사회학적으로 근본주의는 반문화적 운동으로서 회원의 규준이 엄밀하고 주로 “블루 칼라”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주의는 점차 느슨한 자기 규정적 규준을 지닌 문화적 운동으로서 좀더 전문적이고 “화이트 칼라”로 구성되어 있다.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간의 알력은(1940년대 말 50년대 초)신복음주의의 본질과 공공의 평판에 변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새로운 스타일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빌리 그레함은 영어권의 저명한 인물로서 젊은 복음주의 사역자들에게 모델이 되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의 중요성이 대중에게 새로이 부각되었다. 다수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차대전 이후 이 운동의 대표주자로 등장했는데 그 중 칼 H.F.헨리는 여섯 권으로 구성된 『하나님, 계시, 권위 God, Revelation and Authirlity』(1976-83)라는 저서로 유명하며 이는 성경권의 대한 전통적 복음주의적 접근방법을 열렬히 옹호하는 것이다.
오순절 카리스카 운동 Pentecostal and Charismatic Movements
20세기 기독교 발전상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카리스마적 오순절 그룹의 발흥이었다. 이들은 현대 기독교가 신약, 특히 사도행전 기록된 성령의 능력을 재발견,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리스마적” 이란 용어는 헬라어 “카리스마타(charismata, 은사, 특히 영적 은사)”에서 유해한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재현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카리스마적 기독교도들은 확신한다.
현대에 영적 은사를 재발견하는 일은 “오순절 운동”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분명 카리스마적 성향을 보이는 첫 번째 현대적 운동으로 흔히 간주된다. 20세기의 카리스마 운동의 발전을 연구한c, 피터 와그너는 이 운동 안에서 세 가지 파동을 구별한다. 첫 번째 파도는 고전적 오순절 운동으로 1900년대 초에 발흥했고 방언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두 번째 파도는 1960-70년대에 일어났는데 로마 카톨릭을 포함한 주요교파와 관련이 있는데 영적 치유와 다른 영적 행위를 수용했다. 세 번째 파도는 존 윔버 같은 인물이 그 대표인데 “이적과 기사”를 강조했다.
카리스마적 운동이 오랜 역사적 연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20세기의 발전은 대개 찰스 폭스 파람의 사역에서 유래한다. 1901년, 파람은 훗날 오순절의 운동의 귀감이 될 기본원리를 제창하는데 여기엔 “방언”과 신자의 회심에 뒤따르는 “성령의 세례”라는 두 번째 복에 대한 믿음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카리스마적 운동의 전반적 영향은 1960년대 이르러서 시작되었다. 1959년 캘리포니아 반 누이스에서 대중의 이목을 끄는 사건이 발생했다. 더 근래의 “이적과 기사”운동, 영적 치유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는 운동은 논쟁을 유발했다. 게다가 논쟁은 치유의 신학 그 자체에 집중되었다.
개발도상국의 기독교 성장
신교는 아메리카와 같은 새로운 지역의 도전에 휠씬 더디게 대응했다. 칼뱅주의자 선교사들이 16세기 어간 브라질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교 상황은 가톨릭 교회가 장악했고 그 중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라틴 아메리카:해방신학
남미의 식미종주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이들 국가는 16세기에 이 지역에 등장했다. 다음 몇 세기에 걸쳐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선교 정착지가 확장되었고, 제수잇파가 크게 활약했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라는 용어는 이론상 압제적 상황과 관련된 신학이라면 어디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이 용어는 1960-70년대의 남미라는 토양에서 유래한 아주 독특한 형태의 신학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 Theology of Liberation』(1971)에서 이 운동을 이끌게 될 독특한 주제를 도입했다.
남미 해방신학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를 지향한다. “가난한 자는 기독교 진리와 실천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원천적 자원이다(소브리노)” 남미 상황에서 교회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있다. (2) 해방신학은 실천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한다. 구티에레즈가 명시하듯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기독교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해방신학이 마르크스 이론에 의지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서구의 학자 중 다수가 이러한 이유로 이 운동을 비판한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불경한 동맹을 맺었다고, 실제로 해방신학은 자본주의를 크게 비판하며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이다. 해방신학이 최근의 신학논쟁 중 최대의 현안임이 명백해질 것이다. 일례로 성경은 해방설화로 일어야 한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 예언자들이 압제의 해지를 선포한 것, 가난한 자들과 버리운 자들에게 예수가 복음을 선포한 것을 특히 강조한다. 해방신학은 구원의 본질에도 깊이 관여한다. 해방신학은 종종 구원을 해방과 동일시하는 듯이 보이며 구원의 사회, 정치,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다. 이 운동은 이미 부패했고 구원이 필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라고 지적하면서“구조적 죄악”이라는 개념을 특히 강조한다.
동-남 아시아
1521년 위대한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은3,141개에 달하는 섬들을 발견했다. “필리핀”으로 알려진 이 섬들은 스페인 식민지가 되었다. 스페인 지배하에 복음화 작업이 다양한 종교단체, 특히 프란치스칸과 도미니칸에 의해 수행되었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기독교가 지배적인 국가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현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주도적인 기독교 형태이긴 하나 많은 신교출신 선교사가 스페인 통치의 말미를 이었다. 그 외의 동남아 지역에서 기독교는 기껏해야 성장하는 소수민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일본에서 기독교는 1549년 제수잇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가 가고시마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1865년 일본의 서구에 문호를 개방했을 때 이 나라에는 대략 6만명의 기독교 신자가 존속하고 있었다. 메이지 시대(1868-1912)에 기독교는 꾸준히 성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는 근래 중국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성장을 결코 이루지는 못했다.
동남아시아의 발전 중 가장 흥미있는 것이 바로 중국과 한국의 경우일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프란치스코 선교사들이 도착한 1294년으로 알려져있다. 781년을 추정되는 사건부 서간은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가 그 지역에 146년 전에 도착해 활동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 시대에 이미 동방교회 기독교가 선교사역에 힘썼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허드슨 테일러는 본래 중국 복음화 협회의 선교사였다. 이 협회에 불만을 느낀 그는 1865년 중국 내륙선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직면화 문화적 장애를 자각했음을 보여준다-일례로 그는 자기 선교사들에게 서양옷 대신 중국옷을 입도록 요구했다. 그럼에도 중국민을 복음화하려는 서구의 시도는 제한된 가치를 지닌것이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 서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비중국적인 것이었다.
한국의 상황은 이 지역의 기독교 이래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1883년 이전 한국의 인구는 극소수였다. 그러나 1883년 한미조약의 체결로 인해 오랜 기간의 국제적 고립에 종지부를 찍은 결과 1884년에 미국의 장로교회 선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처음 전도자들은 여성과 소외 그룹에 역량을 집중했고, 한인 전도자의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전 인구의 30퍼센트가 기독교도이며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룬다. 이곳의 기독교 성장의 요소는, 서구문화가 압제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과 (중국은 이와 반대)역으로 해방자로서의 면모(일본과의 전쟁 중에 드러난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기독교는 기원 첫 세기에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교회는 현재 알제리아. 튀니지아, 리바아로 알려진 북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건립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세력이 강성했던 곳은 이집트였고 그 중 알렉산드리아은 기독교의 생각과 삶의 중심지의 부상했다. 그러나 7세기 아랍의 침략으로 인해 기독교는 대부분 소멸되었고 소수신앙의 형태로 이집트에서 잔존하게 된다. 오직 에디오피아라는 작은 왕국만이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16세기가 시작될 즈음, 아프리카 북부는 이슬람이, 남부는 토속종교가 지배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남아프리카로 내려온 것은 18세기로부터였고 이 시대 영국의 복음적 대각성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엽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영국의 대규모 선교단체에는 침례교 선교회 (1792년 창립)이들 협의회는 제각기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침례교 선교회 (Baptist Missionary)는 콩고 분지에, 런던 선교회(LMS)는 마다가스카르 섬을 포함한 남아프리카에,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는 서부와 동부 아프리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모든 선교회는 신교 소속이었고 대체로 복음주의적 사상을 간직했다.
아프리카 기독교도는 이 당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유럽 이주민과 아프리카 원주민, 전자는 감상적이거나 문화적 이유에서 가능한 한 자기 고향의 삶의 양식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더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기독교를 점차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초기 개종자들은 대개 아프리카의 전통사회 중 변두리에 속한 사람들, 즉 노예, 여성, 가난한자들이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의 기독교회와 관련해 교역의 중요성을 확신했다. 그는 아프리카로 가는 의도를 “기독교와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으로 선포했다. 남아프리카의 경우는, 20세기 후반기에 그 지역이 경험했던 난관을 고려할 때 특히 흥미롭다. 유럽인들이 희망봉 지역에서 터잡은 것은 화란의 동인도 회사에 의한 것으로 1658년의 일이었다. 1790년대 선교사역으로 원주민들 특히 코이 부족 안에서 작은 기독교 공동체가 창건되었고 점차 인근 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일차대전(1914-18)이후 기독교는 튼 변화와 발전을 겪게 된다. 그 중 가장 현저한 것은 이 지역 내 기독교인 숫자의 증가로서 이는 해당지역 정책에 대한 영향을 의미한다. 이차 대전과 함께 식민통치는 종식되었다. 벨기에, 프랑스, 영국 등 식민 종주국은 점차 그 지역에서 철수했고 독립국가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독립하게 되면서 해당지역 교회는 점차 유럽의 모교회로부터 자립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것이 아프리카 독립교회(African Independent church)의 대두이다. 교회는 때때로 강한 카리스마적 취향을 보이는데, 영적치유, 축귀술, 꿈해석, 예언적 지도 등을 교회는 체험과 상징을 강조한다.
남태평양
“오세아니아”라는 용어는 이제 태평양에 산재한 1.500여 섬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셋으로 나뉜다. 폴리네시아는 북쪽의 하와이부터 (이전엔 “샌드위치 제도”라 불렀다)남쪽의 뉴질랜드에 이르는 타히티와 핏캐언 섬을 포함한 곳이다. 마이크로네시아는 하와이와 필리핀 사이 케롤라인. 길버트, 마샬 군도 등을 포함한 작은 섬들로 구성된 것이며 멜라네시아는 마이크로네시아 남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곧 피지, 솔론몬 군도, 뉴 헤브라이즈를 포함한 일군의 섬으로 구성된 곳이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쿡 선장의 향해 보고서로 인해 처음으로 촉발되었고 1795년 런던 선교회가 “남태평양 제도”에 선교사를 파송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첫 번째 선교탐험은 1796년 8월 타히티행 선교사 30명의 출항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은 복음화를 수행할 믿음직한 수단, 즉 선교기지 건립을 확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선교선박을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유럽 선교사들은 현저의 원주민, 전도자, 목사, 교사들을 지시 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선교단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이 지역의 선교사역의 대부분을 책임진 선교기지가 되었다. 1788년 호주에 기독교가 들어왔다. “덤불 형제단(Bush Brotherhoods)”이 창립되면서(1897)이 대륙 오지의 복음화 작업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뉴질랜드의 선교사가 처음 도착한 것은 1814년의 일이다. 이 지역 기독교가 뿌리내린 것은 주로 조지 아우그스투스 셀윈 주교의 공로였는데 그는 1841년 뉴질랜드의 선교주교로 임명되었다. 남태평양 권역에서 주된 현안은 기독교와 원주민, 특히 오스티레일리아 쿠리(지금도 쓰는 “원주민”에 대한 부당한 표현)와 뉴질랜드 마오리족과의 관계였다.
인도
전통적으로 사도 도마가 첫세기에 인도의 마르토마 교회를 창건했다고 믿는다. 1498년 5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대양을 통한 교역로를 개척하기 전까지 유럽의 여행객들을 육로로 인도를 찾아왔고 이 지역의 기독교에 관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렸다.
포르투갈인들의 도착은 인도 기독교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탄을 의미했는데, 인도의 토착적 기독교 전통은 수입된 복음 전통으로 보완되었으며 각자는 유럽적 배경의 측면을 반영했다. 이 정착의 중요성은 1542년 5월6일 프란스시 사비에가 도착함으로써 더욱 부가되었다. 교황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예수회는 인도에 건립되었고 사비에르는 기독교 서적을 타미르어로 번역하는 것을 포함해 포괄적인 선교사역을 전개했다.
『동인도 영국 정착사, 이 지역의 기독교 전파를 위한 몇 가지 제안 』에서 프리도는 복음의 특수사역을 위해 신자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선교사역자들을 예비하기 위해 영국에 “신학교(seminary)”를 건립해야 한다-인도 스스로가 지원하는 대리인이 이 선교사역을 이어받을 때까지, 이 제안에서 선교운동의 토대가 엿보이는데 이는 훗날 인도 기독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인도를 겨냥한 신교의 첫 번째 대규모 선교사역은 마드라스 남쪽200Km에 위치한 코르만델 해변 크란퀴바르에서 시작되었다. 독일 루터 교회 선교사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은 바르쿨로매우스 지겐발코(선교 초창기부터 활약, 1706-19)와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슈바르츠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영국의 정치적 세력이 점차 확대됨으로써 영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그 중 첫 번째 인물이 (침례교인 월리엄 캐리)1793년 벵갈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영국의 선교회나 개인들은 인도에서 다른 유럽의 대리인들의 저항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국 당국에서 후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813년 7월 13일 영국회의가 승인한 현장조례(charter Act)는 회사가 활동하도록 허락받은 규약을 갱신했다. 새 헌장으로 인해 영국 선교사들은 신분상 보호를 받게 되었고 인도대륙의 선교사역을 수행하는데 제한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1830년 벵갈 지역에 난입한 서구화에 반대하여 다르마 사바(Dharma Sabha)가 결성되었다. 1857년도 소요(흔히 인도 폭동the Indian Mutiny이라고 지칭)는 서구화에 대한 분개심이 누적된 결과로 간주된다. 기독교와 힌두교의 관계에 대한 더 영향력있는 접근방식은 케쉽 쿤더센이 개발했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인도 종교 중 최고의 것을 모두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 장 칼뱅 같은 다양한 저술가들과 관련된 서구 유럽의 사상과 아주 유사한데 그들은 기독교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표현되어 있는 고전적 기상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므라흐마’가 나눌수 없고 묘사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트(sat,존재)’, ‘시트(sit, 이성),’ ‘아난다(Ananda, 지복)’는 내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세 관계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 곧 “존재” 로서 성부, “말씀”으로서 성자, “위로자”혹은 “환희와 사랑의 담지자”로서 성령이라는 신관과 평행한다.
이와 연관된 사상이 근래에 라이문도 파니카에 의해 더 전개되었다. 그는『흰두교의 익명의 그리스도 UnRnown christ of Hinduism』(1981)에서 힌두 관습에서 , 특히 정의와 자비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숨은 임재를 주장했다.
마르 토마적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M. M. 토마스는 현대 신학에서 인도 토착기독교를 대변하는 걸출한 인물로 꼽힌다. 간디주의를 비판하는 토마스의 논지는 흥미롭다 첫째. 토마스 자신은 본래 간디주의였으나 간디주의의 부적절성과 오류에 환멸을 느꼈다. 둘째, 그것은 인도 특유의 이념에 대한 인도 기독교의 응답을 대표한다.
토마스는 간디가 기독교를 일련의 도덕적 원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축소해버렸다고 보았으며, 그 증거로 E. 스탠리 존스가 간디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했다: “본인은 그대가 기독교 신앙의 어떤 원리를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그 원리를 파악했으나 그 인격은 놓쳤다.” 최근 인도에선 다른 현안이 부각되었는데 그 중 특기 할 것이 기독교 복음과 가난한 자들과의 관계였다. 분명 남미의 해방신학의 촉발된 이 사상은 존 테스로처스의 『해방자 예수 Jesus the Liberator』(1976),세바스찬 카펜의 『예수와 자유 Jesus and Freedon』(1978)같은 저서에 반영되어 있다.
사례연구 4. 1 역사적 예수 연구
“탐구”라는 용어는 위대한 아더(Arthurian)의 “거룩한 성배에 대한연구”와 유사성을 암시하는 전기 소설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 용어는 1906년에 발행된 알버트 슈바이처의 명저를 번역한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영어판 역사(영어 번역서는 1911년에 출판되었다)에 의해 소개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원적 탐구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초자연적인 구원자로서 예수를 거부하는 동안에, 예수는 단지 감화를 주는 도덕선생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특히 라이마루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발생된 이러한 생각은 예수에 관한 신약성서 이야기의 배후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고, 단순히 그 당시의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이라고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인간적 예수만을 제안했다. 예수의 도덕적 권위는 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정통적 교리에 있기보다는 그의 가르침과 종교적 인격의 특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원적 탐구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와 교회가 예수를 해석하고 있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전제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배후에 놓여있는 “역사적 예수”는 단순히 종교적 교사이며, “신앙의 그리스도”는 이 단순한 인물에 대한 초대교회 저자들의 오해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비록 영국의 17세기 이신론자들에 의해 자주 주장되어왔지만, 18세기 후반 독일에서도 그들의 고전적인 주장들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특별히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르스의 사후에 출판된 글을 통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라이마루스는 신앙적 교리와 예수 자신의 의도, 그리고 사도 교회의 신앙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라이루스에 의하면, 예수의 언어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재한 된 연대와 정치적 관련성이 함께 당대의 유대적 묵시문학적 환상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외적인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정치적 관점에서 예수의 구체적인 모습을 대체하면서 “정신적 구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 의해 초래된 곤혹스러움을 덮기 위해서 예수의 부활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신약성경은 속이기 위해 삽입된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적 예수는 사도 교회에 의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불멸의 저서에서 슈바이처는 라이마루스의 과격한 제안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중요성을 요약하고 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예수는 로마에 대항해서 대중의 인기가 올라가고 그의 죽음에 의해 실패한 유대적 정치 지도자에 않는다는 것이다.
1890-1910년에 제기되었던 탐구에 대한 비평 The critique of the quest, 1890-1910
1. 묵시문학적 비평(The apocalyptic critique):
요한네스 바이스와 슈바이처가 주로 연합하여 주장한 이 비평은 종말론으로 크게 경도된 예수의 신국선포가 그 개념(신국개념)에 대한 칸트식 자유주의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주장했다. 1892년에 요한네스 바이스는『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는 그는 “하나님 나라” 개념은 자유주의적 개신교에 의해 사회에서 도덕적인 삶의 연습이나 최상의 윤리적 이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주로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어떤 것으로는 이해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설교에서 종말론을 재발견하는 의의는 단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질문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유적인 초상을 찾아낸다는 데 있다.
그러나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예수의 공생애가 지니고 있는 전체적인 특징은 그의 묵시문학적 관점에 이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바이스가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주관적인 일부분의 요소를 과격한 종말론적 기대로 점철된 것을 간주했던 반면에, 슈바이처는 예수가 전한 메시지 전체를 철저하게 묵시문학적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에 대한 이러한 철저 종말론적 해석은 예수상을 아주 낯설게 묵시문학적 비세계적인 인물로 묘사하여 그의 희망이나 기대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낳았다.
2. 회의주의적 비평(skeptical critique):
특별히 월리엄 브레데와 같은 학자들이 제기했던 이 비평은 처음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역사적 상태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역사와 신학은 공관복음 설화 속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나뉠 수 없다. 브레데에 의하면, 마가복음 역사의 옷을 입고서 신학적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그가 다루고 있는 자료 속에 그의 신학이 나타나 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진정한”역사의 예수를 역사적 근거에 입각해서 복원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종착역에 도달했던 것이다.
3. 교리적 비평(dogmatic critique):
마틴 캘러에게서 비롯되었던 이 비평은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 신학적 중요성에 도전을 불러일으켰다.“역사적 예수”는 신앙과는 무관하고 “신앙의 그리스도”가 신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캘러는 공정하고 임시적인 학문적 역사의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했다. 캘러는 “예수 생애”연구 운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 증언을 추상적인 교조주의에 비교하는 한에 있어서 올바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 운동의 경솔함을 지적하면서, 예수 생애 연구 운동은 막다른 골목에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캘러가 그리스도를 “역사적” 인물보다는 “초역사적” 인물로 간주하여, 이 경우에 역사적 연구방법이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역사비평적 방법은 예수의 초역사적(그러므로 초인간적)특정을 취급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 켈러는 예수의 인격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이 우리자신과 예수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전제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캘러에 의하면, 그러한 구분은 교리적 차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캘러가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유비의 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캘러는“우리는 역사가가 신뢰할 만하고 충분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예수의 삶에 대한 어떠한 근거들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캘러는 복음서들이 공정하고, 편견이 없는 관찰자들의 보도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신앙의 보도이고, 그것은 형식에서든지 내용에서든지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 캘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신자들을 위해서 곧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중요성이 결핍되어 있다. 캘러에게는 “진정한 그리스도는 설교된 그리스도”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역사적인 예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를 실존적으로 의미있는 분으로 신앙하는 형태에 근거한다.
역사로부터의 후퇴: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은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재구성의 전체 구상을 막다른 것으로 간주했다. 역사는 기독론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불트만은 기독론의 전체 역사적인 면을 하나의 단어 “그것(dass)”으로 휼륭하게 정리했다. 그것은 오리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 선포 “케리그마”뒤에 놓여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부활은 실제로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아에 의해서 성스러운 사건들로 구별되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부활은 “케리그마”안에서 심판의 성스러운 행동과 구원의 성스러운 사건과 연결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The new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에벨링은 불트만의 그리스도론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한다.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론을 연구(“증명”이라는 말은 너무 강한 용어인 것 같다)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개방성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문제는 일반적으로 1953년10월에 있었지만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대한 캐제만의 강연으로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강연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에 관한 불트만 학과( the Bultmannian school)의 전체와 방법들이 얼마나 조명되고 검증되고 있느냐 하는 사실에 있었다. 캐제만은 공관복음서가 주로 신학적 문서이며, 공관복음서의 신학적 진술들이 종종 역사의 형식 속에 표현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캐제만은 즉시 중요한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퍼나갔다. 공관복음서의 분명한 신학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복음서기자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역사적 정보에 접근해 있고, 또한 이러한 역사적 정보는 공관복음서의 본문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근거하여 캐제만은 예수의 선포와 예수에 관한 선포 사이의 연속성으로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지상의 예수와 올리우고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에는 분명한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포된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 안에 이미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는 19세기의 의심스러운 탐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분명하다. 캐제만의 논증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불연속이 -후자가 전자 안에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양자가 상호별개의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다시 말해서, ‘케리그마’는 나사렛 예수의 선포와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옛 탐구”가 신약성서에 표현된 그리스도상을 의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면, 새로운 탐구는 예수 그 자신의 선포와 예수에 대한 교회의 선포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통합하여 정리하고 있다.
제 3의 탐구- The third quest
1960년대의 “새로운 탐구”가 일반적으로 사라신 후에, 일련의 작품들이 역사적 예수를 재평가하면서 나타났다. “제3의 탐구”라는 용어는 종종 이러한 일련의 연구에 적용되었다. “기원적 탐구”는 합리주의적인 전제를 가지고 예수의 이야기에 접근했고, 복음서 설화의 기적적인 측면을 걸러내었다. “새로운 탐구”는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두고 경향이 있었다. “제3의 탐구”는 예수의 치유와 축귀에 초점을 두고서 예수의 선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과 예수의 목표를 이해하는데 치중했다.
사례연구 4. 2 구원의 근거와 성격
기독론과 속죄론의 관계-The relation between Christology and soteriology
스콜라 철학과 개신교 정통주의 시기부터 조직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구별이 아주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신학적 주제가 기독론과 구속론으로 첨예하게 나누어지면서,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별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론과 구속론은 점차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칸트의 인식론은 이러한 토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칸트는 ‘물 자체(Ding-an-sich)’란 용어로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1874년에 출판된 알브레히트B. 리츨의 『의인과 화해에 대한 기독교 교리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에 채택되었다. 리츨은 기독론과 구속론을 나누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주장했는데 “존재를 결정지우는 본성과 속성은 오직 우리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범위 안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 이라고 인식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기독론적 칭호들과 그것에 대한 구속론적 구조를 상호 연결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기독론과 구속론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구속론적 관심, 즉 그리스도의 사역(beneficia Christi)속에 있는 구원에 대한 관심은 예수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묻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판넨베르크)”.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 of the work of Christ
회생(Sacrifice)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이미지와 기대로부터 도출된 십자가에 상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특히 히브리서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효과적이고 완벽한 희생으로서의 예수의 희생제물을 묘사하고 있다. 이 생각은 계속적으로 기독교 전통 속에서 발전되어나갔다. 예를 들면, 희생 제물에 대해 숙고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고통스런 십자가에서 완전한 희생제물로 그 자신을 드림으로써 죄를 위해 희생의 대가를 지불했다고 진술했다.
그 십자가에서 당하신 희생제사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삼중직능(munus triplex Christi)의 한 측면과 연관되었다. 16세기 중반으로부터 시작된 유형론에 따르면 예수의 사역은 세 가지 직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예언자 직능(이것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드렸다), 제사장 직능 그리고 왕 직능(이것으로 예수는 그의 백성들을 권위있게 다스렸다)이다. 희생의 이미지에 대한 사용은 1945년 이후로 눈에 띄게 약하게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특히 독일 신학에서 아주 미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에 대한 이미지는 계속해서 성만찬을 통해서 희생을 강조하려는 현대 로마 가톨릭의 성레전 신학에서 중요시되었는데, 이 이미지를 통해서 신학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계속 발전시키게되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Christus Victor)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와 사망과 사탄을 이김으로써 얻으신 승리에 중대한 강조점을 두었다. 종종 이러한 승리의 주제는 근동의 축제와 제의적으로 연결되어 계몽주의 때까지 서양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같은 접근방식은 일반적으로 구스타프 아울렌의 『승리하신 그리스도 Christus Victor』가 출현했던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울렌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고전적인 기독교 개념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죄의 권세를 능가하는 그의 승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신앙에 요약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접근은 두 개의 대안 사이에서 그 둘 모두를 무효화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주요 흐름 안에서 자유로운 개신교주의에 눈뜨게 했던 ‘제3의 것(tertium quid)’, 즉 제3의 가능성을 제안했던 것이다. 아울렌은 합법적 접근의 어려움을 회피했지만, 강력하게 속죄의 객관적 본성을 지킨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울렌 『승리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접근은 약간의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그의 접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방식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기하지 않았다.
합법적 접근(legal approaches)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접근 방식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했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전통적으로 11세기의 작가인 캔터베리의 안젤무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용서에 근거하여 성육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모델은 정통주의 시대 동안에 고전적인 개신교 교의학에 영향을 미쳤고, 그 표현들이 18세기와 19세기의 많은 찬송시에서 발견되고 있다.
1. 대표성(representation): 여기서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해서 언약의 대표자로 이해되고 있다. 신앙을 통해서 신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언약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한 것은 언약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개개인은 언약을 맺을 수 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죄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
2. 참여(participation): 신앙을 통해서 신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 그들은 바울이 자주 말한대로 “그리스도 안에”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킴을 받고 부활 생명을 누린다.
3. 대속(substitution): 여기서 그리스도는 대리자로 이해되어 우리 대신에 십자가를 지신 분이 된다. 죄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의로우신 그리스도에게 담당하게 했으며, 십자가를 순종함으로써 그의 의로우심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러한 비평은 “교리사(Dogmengeschichte)"의 원리가 발전하면서 더 강력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의 대표자가 G. S. 스타인바트로 시작하여 하르낙으로 이어지는데, 일련의 가정, 곧 안젤무스의 대속이론을 기독교 신학의 중심적인 내용으로 간주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의를 회복하신다. 그런데 그 의의 방법은 안젤무스의 속죄론의 중심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더욱 더중요한 것은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Church Dogmatics』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속죄” 또는 “화해”라는 주제를 확대하여 논의했다.
모법적 접근들(Exemplarist approaches)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신약 성서적 이해의 중심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 분명하게 서있다. 부활에 대해 점차 증가하는 회의적인 태도로 인해 신학자들은 속죄 신학과 부활을 연결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에 찬동하는 신학자들이 강조점은 십자가 자체에 초점이 맞추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계몽주의 신학자들은 또한 “두 본성”의 교리에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십자가에 대한 합리주의자에 이런 접근에 가장 중요한 도전은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니는 종교적 가치를 역설했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체계를 만들거나 두둔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숭고함이 인간 안에 확립되도록 하기 위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는 속죄에 대한 관점은 삶의 일종의 도덕적 고양이라 할 수 있는 ‘Lebenserhohung(삶의 고양)’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고 있다.
존 힉의 입장은 종교간의 대화(inter-faith dialogue)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짓는다는 점에서 특별히 흥미가 있다. 종교 다윈주의자들의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동일시하는 의제에 동조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특정한 근본사상들-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성육신 교리들, 속죄와 삼의일체-과 관련지을 때 받아들이기 곤란한 의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동일성의 중요한 측면을 나타내는 성육신과 같은 교리들을 자유주의가 폐기한 교리로서, 이들은 자유주의의 수정 프로그램에 더 적합한(다른)다양한 기독론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폴 니터는 “예수-사건(Jesus-evest)”과 “그리스도-원리(Christ-principle)”를 분리하는 데 관여한 종교 다윈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학자이다. 이러한 종교 다윈주의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른 방식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것이고, 보편적인 종교의 가능성으로 이해된다.
십자가: 본질적인가 예증적인가?-The cross: constitutive or illustrative?
1898년에 출판된 『화해의 교리 Doctrine of Reconciliation』에서, 마틴 캘러는 속죄의 이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 상황에 관하여 어떤 통찰을 주었는가? 또는 그는 새로운 상황을 세웠는가?” 이 질문과 더불어 우리는 구속론의 중심적 국면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를 보여주는가? 또한 십자가는 처음으로 구원을 가능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본질적인가 예증적인가?
이와 유사한 접근방식이 모리스 윌스에게서도 나타났는데, 그는 1974년에『기독교 교리 재구성 RemaRing of Christian Doctrine』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이 어떠한 것인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속죄의 실제 Actuality of Atonement』에서 콜린 컨턴 속죄에 대한 비본질적인 접근은 모법적이고 주관적인 구원교리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주제는 버논 화이트가 1991년에 쓴『속죄와 성육신 Atonement and Incarnation』에서도 취급되었는데, 그는 도덕적 기준에서 그리스도-사건이 지니는 본질적 내용을 논증했다. 진정한 화해는 “도덕적 악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특성-The nature of salvation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알려지고 가능해진 구원은 무엇인가? 우선 강조할 점은 구원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 배후에 신학의 주요 주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수세기 동안에 기독교가 주로 선교사역에 의해 발전되어오면서, ‘토착화(contextualization)’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어떻게 기독교의 전통적인 틀과 개념과 언어적인 내용이 기독교를 전파해나가는 새로운 상황에 연결될 수 있을까? 하비 콘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한 학자인데, 구원이란 복음서에 진술된 상황을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구원의 개념이 하나의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또 다른 문화로 변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화(Delflcation)
신성화 모티브는 초기 교회의 구속론에 우세했던 것으로,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작품에서 약간의 실례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의 (Righteousness before God)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에 대한 개념은 16세기 루터의 의인 교리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18세기에 루터 정통주의는 의인사상을 강조했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학자들은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 개념에 의문을 제기 했고, 그것을 법적 사기나 도덕적 사기 정도로 간주했다.
그리스도와의 합일 (Union with Christ)
신도와 예수와의 개인적인 연합의 언급은 교부철학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와의 합일은 개혁시기의 루터와 칼뱅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러나 오직 후기의 저작물에서 그것은 주요 구속론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완전(Moral perfection)
계몽주의의 독특한 관점은 종교-그것이 승인될 수 있는 곳에서-가 인류의 도덕적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전형적인 형식에 있어서, 이러한 관점은 예수를 도덕적 삶의 교사로 여기고 도덕적 삶을 하나님의 의지로 확증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결과적으로 임마누엘 칸트, 특히 그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에서 유래한 사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자각(Consciousness of God)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의 순수한 이성적이거나 도덕적인 개념에 반대하면서, 인간 구원은 신 의식의 지배하는 관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진정한 인간성(Genuine humanity)
20세기에 실존주의의 출현은 당대의 서구문화에서 비인간화라는 의미와 연계되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구원은 진정한 인간성의 재발견과 회복의 조건이라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해방(Political liberation)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구원개념의 정치적 관점을 강조했고, 그 주제에 대한 성서적(특별히 구약)접근방식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점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구스타보 구티에 레즈가 1971년에 쓴『해방신학 Theology of Liberation』과 호세 미구엘 보니노가 1983년에 쓴 『기독교 정치 윤리학에 전망하여 Towards a Christian Political Ethics』는 로마 가톨릭과 복음주의 전통으로부터 이끌어진 정치화된 구원개념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사례연구 4. 3 부활에 대한 논쟁
계몽주의: 부활은 없었던 사건-The Enlightenment: the resurrection as non-event
이성에 대한 전능성과 과거 사건들에 대한 당대의 분석의 중요성에 대한 계몽주의의 특별한 강조점은 18세기의 부활에 대한 강한 회의적인 태도에 엄청난 발전을 주도했다. 레싱은 이러한 회의적 태도를 채택한 학자의 아주 좋은 예이다. 레싱은 자신이 직접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해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라이마루스나 레싱과 같은 합리주의적인 학자들은 과거사건(부활과 같은)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 현재의 직접적인 경험에 위배될지라도, 충분히 믿을 만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과 원래 사건이 제대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계몽주의의 중심 주제인 인간의 자율성이다. 현실은 합리적이고, 인간은 세계의 합리적인 질서를 드러낼 수 있는 인식론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개개인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증명을 위해서 진리 자체가 나타내는 것 사이에 일치하는 인식에 근거하여, 자율적 사고를 하는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받아들여진다.
슈트라우스: 부활은 신화이다. -David Friedrich Strauss: the resurrection as myth
1835년에 발간된 그의 책『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에서, 슈트라우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아주 과격하고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슈트라우스는 “정통주의 체계 속에 있는 기독론”이라는 용어의 이해는 계몽주의 이래로 심각한 공격을 받았으므로, 적어도(부활과 같은)기적은 불가능한 전제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기적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인 부활을 제거하면서, 슈트라우스는 신앙의 기원을 순수하게 주관적인 차원에 두었다. 부활 신앙은 “삶을 객관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나타난 주관적 개념” 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죽은 예수가 상상에 의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절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화적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슈트라우스가 벌인 논쟁의 특히한 점은 “신화”라는 범주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즉 신화는 복음서 기자들의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전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당대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해주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에 의하면, 복음서 기자들은 혼동을 했거나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불트만: 부활은 제자들이 경험한 사건이다. Rudolf Bultmann: the resurrection as an event in the experience of the disciples
불트만은 과학시대에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슈트라우스의 기본적인 확신을 공감했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객관적인 부활에 대한 신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는 “결과의 완결적 지속(a closed continuum of effects)”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개개의 사건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부활도 자연의 완결된 체계를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객관적인 부활에 대한 신앙이 1세기에는 아주 타당하고 지적으로도 인정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진지하게 취급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인류는 신약성서의 신화적인 세계관을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세계관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주어진 것이며, 그들이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부활을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신화적 사건”으로 간주했다. 부활은 제자들의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일어났던 어떤 것이지 예수는 참으로 부활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케리그마”속에서 부활했다. 일반적으로 반역사적 접근방식을 취했던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완전히 구별지었다. “케리그마”를 담지한 교회의 신앙이 부활절 신앙인데, 부활절 신앙은 “케리그마”속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칼 바르트:부활은 비평적 접근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이다. Karl Barth: the resurrection as an historical event beyond critical inquiry
바르트는 1924년에 『죽은자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the Dead』이라는 작은 책을 출판했다. 그러나 부활을 역사에 관련지은 보다 원숙한 작품은 후에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분명히 불트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25년에 바르트는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 An Attempt to understand Him』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불트만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칼 바르트는 초기 저서에서, 빈 무덤은 부활과 관련해서 그 중요성이 별로 크게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부활에 대한 불트만의 실존론적 접근이 객관적 역사의 근거가 희박하다고 판단하여 점차로 불트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부활을 역사적 탐구에 문을 열어놓은 것으로 간주하여 처음 신자들의 사적인 내적 경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의 공적인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어떤 경우든지 신앙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 응답하는 것이지 빈 무덤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빈 무덤을 분명하게 강조했지만, 그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바르트는 아주 공격받기 쉬운 입장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트만의 주관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부활을 공공연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변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바르트는 결정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저 역사적 사실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
판텐베르크: 부활은 비평적 탐구에 개방된 역사적 사건이다. Wolfhart Pannenberg: the resurrection as an historical event open to critical inquiry
1960년대에 나타났던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프로그램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보편사에 대한 호소이다. 그러한 관점은 1961년 판넨베르크에 의해 출판된 저서『역사로서의 계시 Revelation as History』에서 발전되고 정당화되었다. 판넨베르크의 논문 “계시론에 대한 교의학적 주제들(Dogmatic Theses on the Doctrine of Revelation)”은 보편사에 대한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었다. 그 문장은 즉각적으로 불트만의 무역사적 신학(ahistonical theology)과 다른 한편 마틴 캘러의 초자연적 접근(suprahistonical approach)으로부터 판넨베르크를 구별하게 해준다.
마르크스가 역사는 사회주의의 재배로 종식된다고 예언함으로써 사회과학이 역사해석의 열쇠가 된다고 주장한 반면, 판넨베르크는 이것(역사해석의 열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역사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선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역사적의 종말의 선취적 현시”라는 관념은, 판넨배르크가 예수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신약성서 해석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제공한다고 논의한 묵시문학적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계시적 요소들을 성서에 대한 비신화화 프로그램을 전개하기 위해 선택한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해석할 해석학적 규준이나 그 틀로서 그 요소들을 취급했다.
부활의 역사성을 논쟁함으로써 판넨베르크는 묵시문학적 의미 속에서 부활을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역사의 종말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해석은 매우 뛰어나다. 예수의 부활은 시간의 마지막 때에 일반적인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과 충만함과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속에서 선취된 것이다.
사례연구 4. 4 20세기 시상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19세기 사상사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 요인으로 삼위일체론을 모순된 교리로 여기는 경향이 자유주의에 팽배였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의 글에서도 분명해지는데, 그는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경건에 불합리한 방해물로 간주했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토론에서 『기독교신앙』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학의 부산물로 간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20세기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흥미있는 연구가 다시 일어났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에 르네상스는 우선 칼 바르트의 근본적인 연구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바르트는 그의 저서 『교회 교의학』을 시작하면서 삼위일체론을 다루었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일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며, 삼위일체론은 계시에 앞서서 말해야 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는 삼위일체론을 교회 교의학의 첫머리에 두고 있으며, 그 주제가 그 어떤 주제보다 첫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계시의 “정합적 설명(explanatory confirmation)”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통해서’ 그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형식을 이끌고 있는 계시적 틀을 세우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재-사유(Nach-Denken)’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에 관해 “추후에/뒤따라 사유”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과, 그 존재와 본성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사이를 주의깊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진술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틀을 만들었다.
계시를 말하면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그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계시자와 계시의 직접적인 연관성이다. 만일 “하나님이 주로서 자신을 제시한다.”(이것은 아주 특징적인 바르트의 주장이다)면, 그는 “그 이전에 스스로”주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삼위일체론의 용어를 빌어서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계시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바르트의 가장 어려운 단면을 접하게 된다. 즉 그의 “계시성(Offenbarsein)”에 대한 개념이다.
계시로서 계시에 대한 해석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는 사역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성령의 사역이다. 인간은 주의 말씀을 파악할 수 없으며(capax verbi domini), 말씀을 듣지도 않는다. 듣는 것과 듣는 능력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어진다. 이러한 설명은 바르트가 일종의 양태론자라는 인상을 풍긴다- 계시의 상이한 계기들을 동일한 하나님의 상이한 “존재적 양태들”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칼 라너- Karl Rahner
현대 삼위일체 신학의 발전에 대해 라너가 특별히 기여한 것은 “경륜적인” 삼위일체론과 “내재적인”삼위일체론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것에 있을 것이다.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계시하는 방식을 우리가 경험함으로써 알수 있고, “내재적인” 삼위일체론은 신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우리가 경험함으로써 알 수 있다.
라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접근은 오래된 로마 가톨릭의 삼위일체 신학에 나타나 있는 어떤 경향을 강력하게 수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하나님에 대한 인간 경험과 구원에 대한 성경적 증언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내재적인 삼위일체론”에 초점을 두는 경향을 수정한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은 “구원의 경륜과 그 삼중적인 구조에 관한 성서적 진술”에 관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표현은 구원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는 인간적인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네 역사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취한 역할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삼위)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삼위일체로 나타난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이다.
로버트 젠슨- Robert Jenson
루터교의 관점으로 책을 쓰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에 깊이 젖어 있는 현대의 미국 신학자 로버트 젠슨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 신선하고 창조적인 이론을 제기 했다. 젠슨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바르트의 입장을 발전시켜 나갔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충실하게 그 특징적인 내용을 강조했다.『삼위일체의 본성: 복음서에 근거한 하나님 The Triune ldemtotyL God According to the Gospel』(1982)이란 책은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삼위일체론에 대해 참신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아주 기본적인 참고도서가 되었다.
젠슨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당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확인하여 명명한다-그러나 이 확인과 명명을 성경의 증언에 합치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삼위체론은 우리가 선택했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선택된 이름이며, 우리가 사용하도록 권위가 부여된 이름이다. 이런 방식으로 젠슨은 신 개념에 관한 인간적 구성에 반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우월성을 옹호한다.
교부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초기 교회가 헬라적 상황으로부터 유래한 기독교 신관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방식을 지적했다. 젠슨이 말했던 것처럼, 삼위일체론은 그런 발전에 반대한 적절한 방어수단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례연구4. 5 교회론에 대한 20세기 토론
주제에 대한 다양성: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또한 공 교회가 있다.
“Wherever Christ is, there is also the Catholic Church”
1세기의 작가 안디옥의 이그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또한 공교회가 있다”고 선언했다.
1. 그리스도는 성만찬 속에 현존한다- Christ is present sacramentally
교회론의 발전에 있어서 제2 바티칸 회의가 남긴 가장 특징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성만찬이 지니고 있는 특성에 관해 기여한 것이다. ‘lumen gentium'에서 밝힌 것처럼, “교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일종의 성만찬이다. 즉 모든 인류를 하나되게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 상징이자 제도이다.” 제2 바티칸 회의는 교회가 성만찬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성만찬과 같은(celuti sacra- mentum)”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말하면서, 제2 바티칸 회의는 한편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보이는 실체로 간주했다.
성만찬으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사상은 20세기의 가톨릭 교회론에 있어서 충격적인 내용이 되었다. 제2 바티칸의 회의 이전에, 그러한 사상은 교회안에서 추진력을 얻어왔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신학의 보교시대”가 발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로부터, 가장 현저하게는 교부시대로부터, 일련의 발전 가능성이 있는 주제를 전수받는 것을 의미한다.
드 뤼박은 교회의 공교회적 개념에 주체성과 목표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곧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1953년에 오토 세멜롯은 매우 영향력있는 연구서적을 발표했다. 『원시적 성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Primordial Sacrament』로 명명된 이 연구서적에서 그는 “원시적 성체(Ursakrament)”로서 존재하는 교회, 곧 세속적 조직 속에서 어떤 영적인 것에 대해 증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화 시키는 교회 모습을 주창했다. 한스 우어스폰발타자르는 교회가 곧 ‘elongetur Christi’, 즉 시간과 공간에서의 그리스도의 연장이라는 주장하며,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방식으로 매우 강력한 성육신적인 접근방법을 채택했다. 예수회의 학자인 칼 라너는 이러한 방법들의 연장선상에서 교회가 역사적이고도 가시적이며 또한 구체적인 형태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이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언하며, 위의 이전의 접근방식들을 계속 되풀이했다.
라너에게 있어 교회는 곧 미래와 현재의 연속성 속에서 이해되는데, 곧 교회는 종말론적 승리이며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 안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결정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당대의 현존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세상 속에서 지속되는 하나님의 현현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서 현존한다-Christ is present through the Word
교회의 성향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의 주된 주제는, 말씀과 설교와 성만찬으로부터 초래되는 그리스도의 현현에 초점을 맞춘다. 칼뱅에게 있어서는 말씀의 선포와 올바른 성만찬의 집행은 그리스도의 현존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교회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적인 주제는 20세기에 들어, 특히 칼 바르트의 저서에서 매우 뚜렷이 나타난다. 바르트에게 있어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응답해가는 공동체이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공동체로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증거되는 곳, 그리고 그 말씀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곳에는 어디든지 존재한다.
성령의 역할은 특별히 중요하다. 비록 성령을 장확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바르트는 교회를 “카리스마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르트는 교회를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이 교회의 제도의 틀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성령에 권능을 부여하고 교회의 부흥과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속죄,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현존하는 것을 주장한다.
불트만 역시 교회의 본질에 강력하게 ‘케리그마’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사건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선포”라는 기본적 역할을 강조한 바르트와 연결하여 접근하고 있다.
3.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현존한다-Christ is present through the Spirit
20세기 교회론에서 세 번째 중요한 주제는 교회를 구성하는 데 성령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의 경구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 안에 있는 성령의 필요성에 대한 해석이다. 그것은 레오나르도보프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와 요한 지지울라스의 글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이 같은 두 학자의 성령론(그리스어: Pneuma =“영”)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있다. 보프는 그리스도를 주된 관심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의 강조점은 강력하게 성령과 서방의 삼위일체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반면에 지지울라스는 더욱 더 전통적으로 발전된 접근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다.
보프는 교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구조적인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실체에 의거하고 있다. 그리고 보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에 기초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프는 교회를 제도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비평적으로 보고 있다. 보프의 이러한 “교회의 의식”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인데, 사람들과 사역은 부활한 예수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보프는 이 점을 확증하면서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의 성령의 발현(Procession)이라는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지울라스의 경우에 성령은 상당히 독특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지울라스는 특별히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교회 안에서 성령의 구조적인 역할에 대해 설명한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지만 성령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제2 바티칸의 공의회의 견해
VaticanⅡ on the Church
사실상 교회는 16세기 후반부터 사회적 제도의 모델이 되었다. 개신교든지 가톨릭이든지 교회의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제도상의 특징은 항상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모두 제도상의 요소를 교회의 중요성을 정의하는 척도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복음이었다. 점차 위험일로의 유럽 정치상황에 직면해- 제1바티칸 공의회는 강력한 제도적 관점하에 교회를 정의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존재하게 했고, 교회의 형태를 결정했고, 교회의 제도를 만들어주었다. 교회의 이러한 강력한 계급개념 아마도 “목자와 양떼”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이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가톨릭 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지니고 있는 잘못된 관점을 점차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강력하게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교회가 발생하게 된 것은 점차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 기독교가 국가의 종교로 인정받은 결과로서, 이러한 일은 사도 시대 이후에 비롯된 것이며, 부분적으로 정치적인 압력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뤼씨앙 세르포와 다른 사람들은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에 치우쳐 과거에 보지 못하고 넘어갔던 교부들의 성서적 통찰력을 재발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브 꽁가르 같은 사람들도 평신도의 신학적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했고, 교회의 제도권 속에서 평신도가 도외시되는 현상(marginalization)을 염려했다. 그 결과로 제2바티칸 공의회는 에쿠메니즘과 복음주의를 모두 포괄하여 로마 가톨릭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회의가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를 우리는 ‘Lumen Gentium(이방인을 향한 빛)’에서 볼 수 있다.
1. 교제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communion
1943년에 독일의 가톨릭 학자 루드비히 폰 허틀링은 『교제: 교회와 초기 기독교의 교황제도 Communio: Church and Papacy in Early Christianity』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교회의 본성에 적절한 이해를 위해 “교제” (그리스어‘koinonia’를 종종 언급한다)라는 주제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교제(communion)”라는 용어는 현재 그 단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의미 때문에,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요점을 명시하기 위해서는 영어“ fellowship”을 사용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이 용어에 표현되어 있는 기본적인 성경적 주제는 공통된 삶 안에서 나눔을 가리킨다.
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The church as the people of God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설명했던 교회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강력한 성서적인 사고방식이다. 실제로 교회 내부 생활에 관한 공의회의 텍스트의 두 번째 단락은, 교회를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선택은 이스라엘의 배척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3.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a charismatic community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카리스마적인 움직임을 타고 큰 관심 속에서 열렸다 교회의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했던 제2 바티칸 공의회는 벨기에 출신 추기경 수에넨스의 강력한 호소를 옹호했다. ‘Lumen Gentium(이방의 빛)’이란 슬로건은 교회적 삶에서 카리스마적인 은사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이 공의회에서는 어떤 특별한 봉사를 수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사나 능력을 언급하기 위해“charism(그리스어:charisma=은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례연구4. 6 과정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
과정신학은 20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등장한 매우 의미있는 신학운동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 기원은 앵글로 아메리카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1929)에서 비롯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실체substance”와 “본질 essence”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되는)과 연관되어 있는 세상의 정적인 입장에 맞서서, 화이트헤드는 실재(reality)를 과정으로서 이해했다.
이런 모든 “존재들”이나 “사건들”(화이트헤드의 원문을 빌리자면)에게 발전하며, 주변환경에 좌우되는 어는 정도의 자유가 허락된다. 그것은 아마도 생물학적 진화론이 인정할 수 있는 영향권 안에 서있는 것 같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질서라는 항구적 바탕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 이는 성장에 필수적인 유기적 원리로 간주된다. 화이트 헤드는 신을 그 과정에 내재한 이런 질서의 바탕과 동일시 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신을 “존재(entity)”로 취급했지만 불후성이라는 토대에서 다른 존재들과 신을 구별했다.
그러므로 유념할 것은 주어진 방식 속에서 행동을 강요받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영향을 주고 설득을 시키는 존재의 문제이다. 존재는“쌍방간의” 방식-정신적, 육체적-으로 영향을 준다. 신은 과정 속에서 “규칙을 통제한다”. 신이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신도 그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에의하면 신은 “아량있는 고난 동료(a fellow- suffer who understands)”이다.
과정신학 사상은 세상의 모든 과정 안에서 설득이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신의 전능을 재정의하고자 한다. 도덕적 악에 대한 전통적 자유의지 옹호가 인간은 신에게 불복종하거나 무시라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곳에서, 과정신학은 세계의 개별적 구성요소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설득하거나 영향을 끼치려는 신의 시도를 무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정신학 사상은 신이 신의 뜻에 자연을 복종하게 하거나, 혹은 그것을 의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은 단지 설득과 인도로서 그 상황으로부터의 과정에 영향을 주고자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정신학을 비평하는 학자들은 과정신학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루었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신의 초월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포기한 것으로 보였고, 혹은 신의 초월성도 과정 속에 있는 존재로 간주하여 영속성이 관점에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과정신학의 초기 설명들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것 중의 하나가 찰스 하트손의 『신에 대한 인간의 비전 Man's Vision of God』(1941)인데, 거기서 그는 “고전적인 신관”과 “신고적인 신관”에 대해 상세하게 비교하고 있다. 전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에 관한 설명에 이용했고, 후자는 하트손에 의해서 발전된 견해를 설명하는 데 이용했다.
사례연구 4. 7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비평
신약성서나 구약성서 모두 하나님에 대해서 남성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어 ‘테오스(theos하나님)’는 의심할 나위 없이 남성이며, 성서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인 칭호, 즉 아버지, 왕, 목자, 등은 모두 남성이다. 이는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이브 New Eve in christ』라는 글에서 메리 헤이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이 하나님의 본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사실상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성적인 역할로 이해하려는 것을 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교도적인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가나안 풍속에서 다신을 비는 제사는 남신과 여신의 성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성이 무엇인가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노력하면서 학자들은, “어머니”혹은 “친구”로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이 여성이다”라는 데서부터 비롯되며 친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은 중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남성성(maleness)”에 대한 문제를 넘어섰다. 삼위일체설에 대한 주장은 전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다. 폐미니스트 작가들이 이것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표현은 분명히 남서이라고 지적한다. 나사렛 예수는 남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성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고 생각되어, 여성에 대한 잠재적 상향에 대해 논쟁되고 있다. (최소한 몇몇의 폐미니스트 작가들의 관점에서 )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특별히 남성들에 의해 지지를 받은 권력과 통치라는 범위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례연구 4. 8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
배타주의적 접근-the particularist approach
아마도 이러한 입장의 가장 유력한 진술은 헨드릭 크래머의 저서들, 특히『비기독교 세계에서 기독교적 메시지 christian Message in a Non-christian World』(1938)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크래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계시하고있으며, 또 이러한 계시를 전세계가 알릴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몇몇의 배타주의자들(칼 바르트와 같은)은 그리스도와 분리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다는 입장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들(크래머와 같은)은 하나님이 많은 방법과 장소에서 그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바르트는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천명했다. 그렇지만 그는 역사의 종말에 불신앙에 대한 궁극적인 종말론적 은혜의 승리가 임할 것임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히 승리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오직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이르는 길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특수성은 구원의 보편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포괄주의적 접근-The inclusivist approach
이 모델을 가장 중요하게 옹호하는 학자들 가운데 예수회 소속 학자인 칼 라너가 있다. 그의 『신학 탐구 Theological Investigations』제5권에서, 라너는 네 개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네 개의 비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는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전통들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유일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절대적인 종교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들이 잘못했거나 결함이 있을지라도,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할 때까지, 비기독교적 종교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고 중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기독교적 종교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는 옹호자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다른 종교전통은 기독교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라너는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원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기독교 전통에 서있다. “기독교는 그 자체가 모든 사람을 위한 절대적인 종교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동등한 입장에서 인식될 수 없다”. 그렇지만 라너는 한가지 강조점, 곧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첨가하고 있다. 라너는 구원의 은혜가 교회의 영역 밖, 곧 다른 종교전통에서도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크래머가 비기독교적인 종교전통이 인간의 자기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반면에 라너는 그러한 전통이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라너는 다른 종교를 옹호하는 자들이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은혜를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라너는 이렇게 은혜를 알지 못하지만 신적인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자들을 일컬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용어를 소개했다. 라너의 의도는 비기독교적인 전통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은혜의 진정한 결과를 허락하려는 데 있다. 라너에 의하면, 기독교와 그리스도에는 다른 종교적 전통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배타적 지위가 부여된다. 그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다른 종교전통도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의 은혜에 똑같이 도달할 수 있는가?
다윈주의적 접근-The pluralist approach
종교전통에 대한 다윈주의자의 접근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가 존 힉이다. 『하나님과 신앙의 보편성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1973)에서, 힉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접근으로 나가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가 중심이라는 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중심이요, 우리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분 주위를 선회하며 섬긴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부르짖었다.
힉은 다른 신앙의 질문에 대한 중심 내용인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특징이 보편적 구원의지라는 사실을 제안했다. 힉은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결론으로 이끌었다. 힉은 실제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다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신앙은 힉이 나아가고자 하는 한 쪽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힉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방식보다는 단순히 하나님 중심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했다.
사례연구 4. 9 현대에 나타난 신학방법
경험에 호소한 슐라이어마허와 틸리히- The appeal to experience: Schleiermacher and Tillich
많은 학자들은 계몽주의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합리적인 사람이 되었을 때, 예수는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저명한 독일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도전에 대해 아주 숙고할만한 학자로 논의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 혹은 경험이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기독교의 분명한 주체성을 추구했다. 이러한 경험은 나사롓 예수를 통해서 매개체로 하여 이러한 것을 해석하는 경험과 연결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두드러진 신학방법론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진술은 그의 책 『종교론: 기독교를 경멸하는 교양인들을 위한 경연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에서 발견된다. 그는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삶과 문화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분명하며 통합적인 요소”라고 천명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요소를 어떤 절대적인 분에 대한 철저한 의존의 감정이라고 간주한다. 그의 후기 저서인『기독교신앙』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 신앙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히려 교리는 기독교의 우선적인 진리, 즉 구원의 경험을 설명하는데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의 경건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인 근거로서 간주될 것이다. 기독교의 개개인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연합적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건의 본질은 어떤 합리적 혹은 도덕적 원리가 아니라 “감정”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인간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존 감정은 기독교 신앙의 콘텍스트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해석되고 또한 인식된다. 이러한 “절대 의존의 감정”은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는 이러한 경험을 합리화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경험에 대한 호소는 20세기에 폴 틸리히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는데, 그의 “상관의 원리”(principle of correlation)는 슐라이어마허의 접근방법을 연장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인간의 문화는 기독교 신학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한다.
칼 라너 :초월적 현상학-Karl Rahner: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현대의 로마 가톨릭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발전은 벨기에 출신인 예수회 신학자인 요셉 마레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의 책『형이상학의 출발점Point of Departure for Metaphysics』에서, 마레칼은 아퀴나스의 기본사상을 현대의 철학운동, 특히 칸트의 초월적 형이상학에 적용시킬 것을 주장했다. 라너는 이러한 근거를 세웠고, “초월적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발전시켰다.
라너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하여 기본적인 인간의 강렬한 욕마에 대한 중요성을 주목한다. 인간 존재는 현재보다 혹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이제껏 기대한 것보다“더[크게]” 빚어진 존재라고 자각한다. 기독교 계시는 이러한 “더 [큰것]”을 제공하는데 이는 인간 경험이 지적하는 바이다. 그의 책『기독교 신앙의 근거Foundations of the christian Faith』(1978)에서, 라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러한 “초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라너의 관심은, 우리가 비록 유한하고 제약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하는 데 있다. 라너는 인류학(anthropology)을 근본적으로 중요한 학문으로 인식시켜 주었으며,『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통해서(인간의 의식을 초월하여)인간의 본성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했다. 궁극적인 의미를 향한 인간의 탐구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야기했으며, 오직 하나님이 발견될 때만 충족된다.
칼 바르트: 계시에 대해 응답하기-Karl Barth: responding to revelation
현대 신학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하나로 그 기원이 되는 작품을 꼽을 때, 일반적으로 학자들을 1919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둔다. 이 작품은 새로운 신학적 경향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신파로 간주될 수 있겠다.
이 작품 전체에 걸쳐서 텐마크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에게서 통찰을 얻고 있는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존재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적인 거룩성과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것과 특히 인간의 문화와 종교로부터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무한한 질적 차이 속에서 인간성과 인간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신다”. 바르트는 레싱의 유명한 수사적 표현, 곧 역사의 “흉물스런 큰 계곡”, 시간과 영원 사이의 “크레바쓰(방벽 틈)”라는 알프스 산맥의 현상을 변형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totaliter aliter)이며, 우리와는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종교의식은 오직 하나님에 의한 우리의 자포자기적 의식일 뿐이다(the consciousness of our abandonment by God). 초기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인간의 경험이나 문화로 탐구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계시에 관해 응답하는 것이다.
후기 자유주의: 공동체와 신학- Postliberalism :community and theology
1980년 이후 북미주 신학에서의 중요한 발전은 소위 “예일 학파”혹은 “후기 자유주의”의 발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나 틸리히의 전통에 서 있었던 과거의 자유주의 학자들은 신학이 인간적 경험의 우주적 실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후기 자유주의는 특별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며 어느 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적인 언어나 정신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를 계승하는 학파의 주도적인 인물들 가운데, 우리는 특히 조지 린드벡과 스텐리 하우워스를 주목해야 한다.
린드벡에 의하면, “인간의 경험은 문화- 언어적 형식에 의해서 형성된 모델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언어적 형식은 모든 인간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전통 그 기준이나 자료나 가치에서 볼 때 그자신의 고유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전통이다. 그러므로 린드벡에 의하면, 기독교신학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수행된다.
해방신학: 실천으로서 신학-Liberation theology: theology as praxis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본래적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사회- 정치적 상황의 분석에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신학적 분석의 대상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압제나 착취 혹은 소외와 같은 유형이다.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이 추구했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가난한 자들에게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이었다.
해방신학은 실천개념을 강조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프락시스(praxis)라는 용어는 “삶의 방식”혹은 “실천”이라는 뜻이며, 기독교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추상적이며 이론적인 방식을 의미하는 이론(theoria)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신학은 교회생활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가깝게도 하고 멀게도 하는데, 교회로 하여금 비판적인 기능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신학의 중요한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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