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원고 써서 설교하기

수호천사1 2012. 12. 6. 15:35

예수가좋다오

원고 써서 설교하기

김기현 목사/ 부산수정로침례교회

 

 어떤 목사님에게 설교 쓰기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하자, 대번에 "아니, 설교를 쓰지 않고 설교하는 목사님이 계시나요? 그런 분들은 어떻게 설교해요?" 하고 묻는다. 그 속사정을 낸들 알겠는가. 다만 돕고 싶을 뿐이다. 그저 돕는 것이 내 할 일이라 여길 따름이다.

 

그리고 모두가 쓸 필요가 있을까 싶다. 설교자마다 나름의 신학과 개성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청중도 다르다. 말씀의 세계를 열어 보여 주는 설교가 진짜 설교라고 여기는 이들도 다수이고,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려지는 설교를 반기는 이들도 많다. 설교를 쓰기 전에 유념할 것이 하나 있다. 설교를 하는 것과 쓰는 것은 문법이 다르다. 원고를 잘 썼다고 해서 감동적인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의 파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고전 2:4)

 

여기에 설교자의 영성과 묵상, 기도, 그리고 교회와 청중이라는 변수까지 가세하면 설교 원고가 좋은 설교가 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가 예외이지만, 설교 원고를 읽는 것은 금물이다. 한번은 원고를 모든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같이 읽었다. 한마디로 '아니올시다!'이었다. 내가 에드워즈가 아닌 탓이 크겠지만, 설교란 본시 문자 언어가 아니라 구두 언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한 때문이다. 무슨 깜냥으로 내가 설교 원고를 읽었는지 좀 우습다. 이동원 목사와 이재철 목사가 원고를 외워서 하는 까닭을 그제야 알았다.

 

또 하나 원고 설교를 하다가 낭패를 당한 경험이 있다. 정성껏 준비하고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강대상에서는 말이 꼬였다. 원고에 충실하게 곧이곧대로 하자니 말이 안 되고, 자유롭게 하자니 준비한 것이 아깝고, 설교가 어디로 가서 어디에 당도할지 알지 못해 걱정스러웠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지 못한 탓이라기보다는 말과 글의 차이였던 것 같다. 하여간에 설교 원고가 명문장이라고 해서, 명설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설교하기와 설교 쓰기는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설교를 굳이 쓰자고 하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첫째, 설교를 위한 묵상과 연구, 기도에 헌신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를 풀 스크립트로 작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준비를 많이 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는 결코 과장이나 과언은 아닐 게다. 글을 써 보면 자기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정확하게 구분하게 된다. 대충 아는 것은 글로 쓸 수 없고, 써지지 않는다. 전체 설교 내용을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간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선다는 것은 일주일을 온전히 투자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설렁설렁 준비하면 결코 설교 원고를 쓸 수 없다.

 

둘째, 교인들이 노트에 적을 거리를 줄 수 있다. 말로 들었을 때는 은혜가 넘치지만, 막상 노트를 넘겨 볼라치면 적을 게 없다는 푸념을 종종 듣는다. 무릇 설교에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요한은 은혜와 진리를 동시에 보았다. (요 1:14) 진리 없는 은혜는 공허하고 은혜 없는 진리는 맹목적이다. 귀로 들었을 때 은혜가 되었다면, 눈으로 읽을 만한 진리가 듬뿍 담겨져 있어야 마땅하다.

 

셋째, 설교 쓰기는 목사가 의당 해야 할 일이다. A. W. 토저는 목사란 말씀을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선포하는 예언자라고 했고, 존 스토트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수받아 전달하는 서기관이라고 했다. 나는 스토트보다는 토저에 조금 더 기울기는 하지만,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라는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마 13:52)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게 성경을 외우고 베껴 쓰던 서기관의 후예인 목사들이 응당 설교 원고를 써야 하지 않을까.

 

넷째, 출판계를 섬기는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 내에 유통되는 책들의 종류는 내 임의로 분류하면 크게 세 부류이다. 첫째는 알차고 내용 빵빵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학자들의 전문 서적, 둘째는 내가 만난 하나님 이야기에서부터 남 보란 듯이 우뚝 일어선 교회 성장이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생 성공 스토리를 담은 간증류, 세 번째는 목회자들의 설교집이다.

 

한때 나는 설교집이 그만 나왔으면 했다. 뭐랄까, 들을 때는 은혜가 되지만 적을라치면 별 것 없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한번 읽을 때는 그런 대로 괜찮은데 다시 볼 만한 값어치가 없는 책들이 좀 있다. 지금 새물결플러스 기획실장으로 일하는 정지영과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좋은 설교를 출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청교도의 작품들이 대부분 설교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나쁜 설교집이 없어지거나 줄어들기를 바란다면, 좋은 설교집이 많이 나와야 한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본 아돌프 하르낙이 편지를 보냈다. 그건 학문이 아니라 설교라고. 바르트의 대답이 가히 걸작이다. 한때 선생이었던 하르낙에게 "그렇습니다. 신학은 설교입니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는 신학이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신학이어야 한다는 바르트의 말에 감동 먹은 나머지, 나는 일찌감치 신학과 교회의 경계선 아니면 양자가 포개지는 영토를 점차 넓히는 일을 사명으로 삼은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목사들이 설교를 써야 할 이유는 현재 기독교 내에 이렇다 할 작가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작가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중간 정도 되는 글을 쓰는 이들을 말한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아우른 글쓰기 역량으로 학문적인 지식과 평범한 일상을 말씀으로 이어 주는 일군의 무리를 일컫는 단어다.

 

이런 기독교 작가 풀이 가장 많은 곳이 목회자 집단이다. 성경과 신학을 전문적으로 수련하고, 독서에 몰두하고, 정기적으로 주보에 칼럼을 꼬박꼬박 쓰고, 설교를 글로 쓰는 사람들이 목회자들이고, 당연히 이들에게서 유의미한 기독교 작가들이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많다. 실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많은 기독교 내 도서들이 목회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미권도 마찬가지다.

 

목회자 중, 특별히 관심을 두는 층은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시간을 성경 연구와 독서에 쏟아붓고, 틈틈이 이런저런 글을 끼적거려 보고, 교우들에게 내용은 참 좋은데 좀 딱딱하다, 어렵다는 반응에 힘들어 하면서도, 청중을 소비자로 여겨 그들의 취향에 맞게 설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하나님께 부끄럼 없이 서려는 젊은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을 남몰래 고민하며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설교를 글로 써서 출판한다면, 자신의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는 일이 될 것이고, 목회자에게는 자부심과 목자 잃은 양 신세인 교인들에게 갈 곳, 쉴 곳을 알려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의 취지에 동감하더라도, 안 그래도 그 많은 설교를 일일이 준비하는 부담이 큰데, 짐을 덜어야 할 판인데, 더하느냐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각인의 헌신과 더불어 횟수를 줄이고, 잡다한 사역을 일부 덜어서 분담하고 위임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매주 쓴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적어도 원고지 분량 40장 이상을 매주 쓰는 것은 고된 노동이다. 계산을 해 보자. 40매 x 52주 = 2,080매. 이것은 대략 300쪽 가량의 책 2권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미션 임파서블!

 

하여, 나는 같은 설교를 3번 한다. 보통 8-12주짜리 연속 설교를 하는데, 연이어 2번을 하고, 4-5주 정도 쉰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한다. 처음에는 전력투구해서 설교를 준비하고 원고를 쓴다. 두 번째는 가다듬고 보완한다. 건너뛰었다가 다시 할 때는 묵히고 우려낸다. 글쓰기 과정으로 본다면 퇴고와 수정 작업을 한다. 그리고 2, 3회 차 설교 시에는 다음 설교를 계획하고 준비한다.

 

지난주 설교를 이번 주에 다시 하면 식상하지만, 2개월에서 3개월 후에 다시 들으면 새삼 은혜가 된다. 절기나 특별 설교를 제외하면, 이런 식으로 1년에 두 개의 연속 설교를 하면 된다. 설교자는 깊이 있는 설교를 하고, 다른 설교를 준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고, 교우들은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마음에 새기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나는 소망해 본다. 목회자들이 설교를 원고로 작성하리만치 충성스러운 말씀의 일꾼이 되고, 성도들이 기록한 다음 두고두고 읽을 만한 설교를 하고, 그것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 울타리 너머의 성도들에게도 영적인 유익을 끼칠 수 있기를 말이다. 해서, 유진 피터슨이나 맥스 루카도 같은 작가들이 목사들 안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설교하기가 설교 살기와 설교 쓰기로 나아가야 하겠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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