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개요
1. 교리: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축복/ 1-3장
-핵심 사상:축복
-핵심 절:1장 3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소유/1장 1-14절
(1)아버지(성부)로부터 온 소유/1장 1-6절
(2)아들(성자)로부터 온 소유 /1장 7-12절
(3)성령으로부터 온 소유/1장 13-14절
-교화를 위한 기도/1장 15-23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 /2장
(1)부활하여 보좌에 오름 /2장 1-10절
(2)화목케 되어 성전을 이룸 /2장 11-22절
-능력을 위한 기도 /3장
2. 의무: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의 행위 /4-6장
-핵심 사상:행하라
-핵심 절:4장 1절
하나됨으로 행하라 /4장 1-16절
순전함으로 행하라 /4장 17-32절
사랑함으로 행하라 /5장 1-6절
빛으로 행하라 /5장 7-14절
주의깊게 행하라 /5장 15-17절
조화되게 행하라 /5장 18-6장 9절
(1)남편과 아내 /6장 18-33절
(2)부모와 자녀 /6장 1-4절
(3)주인과 종 /6장 5-9절승리함으로 행하라 /6장 10-24절
교리와 의무에 관한 책으로서 본 서신이 얼마나 균형을 잘 유지하는지 보라.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들을 상기시킨 다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교훈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행함은 우리를 부르심에 달려 있다.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1-3장대로 살기를 원하고 교리를 연구하지만, 우리는 4-6장에 따라 움직이며 그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
엡 1:1-6
▣ 놀라운 이야기-에베소서 1장-
이 장에서의 핵심 사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소유하는 “축복“ 즉 우리가 소유하게 된 영적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기인한다는 사실이다(1:3). 바울은 하나님의 삼위가 각각 우리를 축복하셨음을 알리며, 이 축복과 능력을 우리가 이해하여 우리의 삶에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15-23절).
1.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1:1-6)
우리를 택하심(3-4절)-이것은 선택에 대한 놀라운 교리로서, 우리가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즐거워할 수는 있는 교리이다. 은혜의 신비한 비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보아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고전 1:26-29/살후 2:13-14/요 6:37 참조).
우리를 양자로 삼으심(5절)-선택이란 사람에 대한 말이며 목적에 따라 예정하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도들(따로 분리되어진 사람들)이 되도록 선택하셨으며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예정하신다(롬 8:28- 참조). 신약에서 “양자“란 미성년인 아들을 온전한 성인의 지위에 두는 아버지의 공식적인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는 외부에서 맞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가족을 성년의 특권과 축복의 지위에 두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어린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를 용납하심(6절)-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용납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납되어졌다.“ 이에 대한 아름다운 예화를 빌레몬서에서 읽어 보자. “너의 노예 오네시모를 영접하되 나를 영접하듯 하라“고 바울은 썼다. 비록 우리가 죄를 범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를 영접하듯이 이 성도를 받아 주소서“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을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하여 추적해 보라. 감동을 느낄 것이다!"
엡 1:7-12
2.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1:7-12)
우리를 구속하심(7상반절)-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값주고 사셨다. 우리는 죄의 형벌과 권세에서 현재 구속되었으며, 죄의 면전에서 우리를 구원하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의 미래의 구속도 소유하고 있다(4절).
우리를 용서하심(7하반절)-“용서한다“는 단어는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죄는 무거운 짐이며,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향할 때 멀리 보내어진다. 그리스도는 그 짐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다(벧전 2:24). 속죄일에 광야로 보내어지는 속죄 양은 이것을 상징한다(레 16:20-22 참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심(8-10절)-“비밀“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지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데, 이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모으는 일이다. 오늘날 현대는 서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전쟁이 있고, 대립과 분열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실 것이다.
우리를 상속자로 만드심(11-12절)-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주셨을 뿐 아니라(벧전 1:3-4) 우리를 그리스도의 기업으로 삼으셨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성전이며 신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날 주님의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미래를 소유하고 있다!"
엡 1:13-14
3.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1:13-14)
우리를 인치심(13절)-이 중요한 구절은 구원을 요약해 준다. 죄인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을 받고, 영원히 인침을 받는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믿고 난 후)“라는 말은 “너희가 믿을 때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그의 마음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의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뜻한다. 아무도 하나님이 인치신 것을 폐할 수 없다!
우리에게 보증이 되심(14절)-사업상 “보증금“이라고 하면 구입한 소유물에 대해 지불하는 돈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미래를 사셨지만 우리는 아직 그 모든 축복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체험하고 영광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을 받을 수있음을 확신하도록 “보증금“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이 세 부분의 끝절마다 자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왜 우리들을 축복하셨는지에 대해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바론 주의해서 살펴 보자.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6, 12, 14 하반절)라고 귀결되어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죄인을 구원하실 때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엡 1:15-23
4. 이해를 위한 기도(1:15-23)
에베소서에는 “너희가 알게 되기를 원하노라“(1:15-23)와 “너희에게 있게 되기를 원하노라“(3:13-21)는 두 가지 기도가 나온다. 첫번째 기도는 교화를 위한 것이며, 두번째는 능력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알게 될 것과, 두번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축복이 적용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이 기도하는 바를 살펴 보자.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해를 주실 것(17-18상반절)-영적인 진리들은 영적으로 분별되어야 하며(고전 2:9-16), 이러한 이해력은 오직 성령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성령은 말씀을 기록하셨으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될 것(18 중반절)-하나님께서 세상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우리는 영원에 대한 복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 4-6절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요약하고 있다. 위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빌 3:14)과 거룩한 부르심(딤후 1:9) 하늘의 부르심(히 3:1)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기업의 부요함을 알게 될 것(18 하반절)-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기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기업이 된다(11절). “부요함“이란 단어는 에베소서에 종종 나오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더이상 필요한 것이 없음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게 될 때 어느 정도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주님의 능력을 알게 될 것(19-23절)-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능력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미 죄와 죽음과 세상과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다. 우리는 승리를 위하여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승리로부터 싸움을 시작한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앉아 있으며, 그 곳에는 능력과 평화와 승리가 있다.
물론 이 모든 축복들은 1-2절에서 설명한 조건들을 갖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확실히 바울은 죽은 성도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러한 성도들은(구별된 성도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고 이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린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성도“라 이름지운다고 가르치는 곳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하나님만이 죄인을 성도로 만들 수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성도가 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엡 2:1-10
▣ 놀라운 기관(몸)-에베소서 2장-
1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하여 강조하였는데, 2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지위에 강조를 두고 있다. 인간의 지위는 그의 소유와 능력을 결정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육체적으로 어느 곳에 있든지 상관없이 백악관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지위로 말미암아 권력과 권위가 부여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어디에 있거나 상관없이(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감옥에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로 말미암아 영적인 영역에서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1. 부활하여 보좌에 앉음(2:1-10)
우리의 과거의 상태(1-3절)-잃어버린 죄인의 모습을 보라.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속 사람이 죽어 있으므로 영적인 일들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예들을 보자. 12세 된 소녀(눅 8:49-55), 젊은이(눅 7:12-15), 노인(요 11:1-) 등 이들은 모두 죽어 있었지만 부패의 상태는 달랐다. 나사로는 장사된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 모든 죄인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죽어 있다. 구원받지 못한 교인과 부랑자 소굴의 주정뱅이에 차이가 있다면 다만 주정뱅이의 악취가 좀 더 심하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죄인은 영적으로 죽은 자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노예로서 세상의 쾌락과 정욕을 위해 산다. 만일 그에게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으므로 거기서 떠나라“고 말하면 그는 비웃을 것이다. 그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 사단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삶에 역사한다. 이 말은 사단이 그들을 주정뱅이나 살인자로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방법이란 “자기 의“를 통하여 거짓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이고 훌륭한 시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지식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 그러나 책임 있는 나이에 도달한 이후 그리스도를 알기를 거절할 때는 고의적인 선택에 의해 불순종의 아들이 되어진다.하나님이 행하신 일(4-9절)-“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말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마귀와 더불어 영원히 살도록 버려두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편을 택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소생시키심) 죄의 무덤에서 일으키셨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게 하셨다는 점이다! 우리는 함께 소생되어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며, 천국에서 함께 앉아 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신 이유는 자비가 풍성하시며 사랑이 크시기 때문이었다. 자비는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데 내게 주시지 않는 것을 뜻하며, 은혜는 내가 받을 만하지 못한데 나에게 주시는 것을 뜻한다.
현재의 우리의 상태(10절)-우리는 주님의 솜씨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빌립보서 2장 12-13절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담대히 믿으라! 미래에 어떤 일들이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를 쥐고 계신 분을 알고 있다.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동일한 분이신 사랑의 아버지께서 내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나타내셨다. 참으로 우리는 얼마나 은혜에 빚진 자인가! 늘 숨이 막힐 듯한 은혜가 아닌가!"
엡 2:11-22
2. 화목케 되어 성전을 이룸(2:11-22)
본 장의 전반부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반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제 특별한 부분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 논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과는 메시야의 언약을 맺지 앉으셨으나, 유대인에게는 왕국을 약속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위치는 어떠한가?
이방인의 산분(11-12절)-하나님은 항상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있어서 종족적으로는 구별하셨으나(고전 10:32) 개별적으로는 구분하지 않으신다(롬 10:11-13). 이방인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로서, 다시 말하자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사실상 구약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큰 간격을 두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보다 동맹자들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참 하나님도 없는 나그네들이었다. 이 비참한 모습을 로마서 9장 4-5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위치와 대조해 보라. 13절은 이것을 “멀리 떨어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죄인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죽음“인데 비해 이방인들의 특정적인 문제는 “거리“였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도우실 때에는 거리를 두었던 점에 유의해 보자(마 8:5-13/마 15:22-28 참조).하나님이 하신 일(13-17절)-13절의 “그러나 이제“는 4절의 “그러나 하나님은“과 유사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서 있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유대인의 성전에는 성전의 여타지역과 “이방인의 뜰“을 구분하는 벽이 있었다. 이 벽은 이방인이 이것을 넘으면 죽임을 당한다는 경고의 표시였다. 예수께서는 그 벽을 헐어 버리셨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육체의 벽을 무너뜨리셨다(15절/ 갈 3:28-29 참조). 또한 주님은 영적인 벽을 헐어서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을 가까이 데려오셨다(13절). 주님은 율법의 벽을 허셨다. 그가 몸소 율법을 성취하시고 십자가에서 모세의 율법의 통치를 끝내셨기 때문이다(14-15절). 그리스도는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를 이루셨을 뿐아니라(롬 5:1)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를 이룩하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죄악된 유대인과 죄악된 이방인들을 “새 사람“ 즉 교회로 만드셨다.
3장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교회의 “비밀“이 바울을 통하여 계시되었음과,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었을 것임을 명심하자.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분리해 놓으셨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대인이 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인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둘 다 정죄한다는 것을 드러냈으며, 또한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을 나타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현재 신분(18-22절)-이들은 둘 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한다. 유대인의 조직에 의하면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창조를 통해서 모든 신자는 지성소에 들어갈 특권을 가진다(히 10:19-25). 이방인과 유대인들은 둘 다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속해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제 더이상 “보다 나은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의롭게 된 것은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바울은 교회를 성전으로 비유하며 본 장은 끝맺는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적절한 상징일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거룩한 성전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베소 사람들은 그 시에 아데미를 섬기는 큰 신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도 역시 이해하기 쉬운 비유였을 것이다(행 19:21-41).
실제로 각각의 각 신자는 살아 있는 성전을 세우는 살아있는 돌이다(벧전 2:4-8). 사도들과 선지자들(신약 선지자들, 4:11)은 기초석이 아니다. 이들은 기초를 놓는 사람이며 처음으로 멧세지를 선포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신 동시에 기초석이시다(고전 3:11).오늘날 교회는 살아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성전이다. 그 성전이 완성되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것이며, 그 성전을 영광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장막(출 40:34)과, 솔로몬의 성전(대하 7:1)과,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거하셨으며(요 1:14/요 2:18-22), 이제는 각 신자 안에(고전 6:19-20), 그리고 교회 안에 거하신다(엡 2:21).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엡 3:1-12
▣ 놀라운 건물-에베소서 3장-
본 장은 에베소서의 전반부를 끝맺고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우리의 부요함을 설명하였다. 이제 그는 실천적인 부분(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행함)으로 이동해 가려 하고 있으며, 이에 앞서 잠깐 멈추어 기도를 한다. 그는 1절에서 기도를 시작하고는 13절에서 다시 기도를 잇고 있다. 그 사이에 끼어든 삽입 구절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몸된 기관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자신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설명(3:1-12)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첫번째 내용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갇힌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에 그가 갇혀 있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도행전 22장으로 돌아가면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귀를 기울여 경청했으나(행 22:21) “이방인“이란 말이 나오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사실상 이것은 사도행전 10장과 15장에 나타나 있는 대로 초기의 유대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문제가 되어 왔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셨고 경륜에 관한 특별한 직분을 맡기셨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계시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불렀다. 로마서 9-11장에 대한 본 서신의 설명과 사도행전 서론 부분을 다시 복습하면 좋을 것이다.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을 계시하셨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왕국을 건설해 주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세례(침례)요한을 통하여 왕국을 제공하셨으나(마 3:2) 유대인들은 그가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 두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하셨을 때는 그를 죽이라고 요청하였고, 사도들과 스데반을 통하여 제공하셨을 때는 사실상 그들 스스로 이들을 죽였다.
세 차례에 걸쳐 이 민족은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였고, 성자 하나님을 거절하였으며,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신 성령을 거절하였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왕국의 제공은 끝이 났다. 멧세지는 사도행전 8장과 10장에서 사마리아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로 넘겨졌고, 사도행전 9장에서는 바울이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바울의 사역은 이방인에 대한 사역이었다. 바울의 멧세지는 은혜요 바울의 특수 사역은 한 몸의 진리, 곧 교회의 비밀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엡 6:19/롬 16:25-26/골 1:26-27/골 4:3-4 참조). 그는 여기 6절에서 그 신비한 비밀을 명백하게 언급한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이와 같은 비밀은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제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도들과 신약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셨다. 열 두 사도가 교회의 이러한 비밀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곳에 기록된 바울의 영감받은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베드로조차 이방인들에게 가기 앞서 하늘로부터 특별히 알리는 말씀을 들어야 했다. 한 몸의 진리는 바울에게 주신 계시였으며, 초대교회에 그 의미의 중요성이 점차적으로 부각되었다.
8절에 나오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이란 말을 직역하면 “추적할 수 없는 풍성함“이란 뜻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됨의 비밀을 추적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비밀이었다. 9-10절에서 우리는 이중의 사역을 본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비밀의 경륜“을 알렸으며, 교회는 천사들에게(정사와 권세들, 6:12)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한다. 천사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배우고 있었다(벧전 1:10-12).
사단도 역시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의 계획을 감추어 두심으로써 사단이 이 계획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끌고 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을 운명에 인을 쳤다. 오늘날에도 이 시대에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 없이 방황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을 보게 됨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들이 사도행전 1-6장에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로 이동할 수 있다면 시간과 재능과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엡 3:13-21
2.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재(3:13-21)
에베소서에 나오는 두 가지 기도(본문/ 1:15-23)가 상호 보충적임을 기억할 것이다. 첫번째 기도는 교화를 위한 것이며, 두번째는 실현 능력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원하며, 다음으로는 그들이 알게 된 대로 생활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을 위하여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바로 주님의 가족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땅 아래“ 있지 않다(빌 2:10). 이것은 연옥을 뜻하거나, 지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속 사람이 영적인 능력을 알도록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속 사람을 얼마나 부주의하게 취급하고 있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내면에서 능력을 주신다. 20-2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기도할때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지적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능력을 입혀 주신다고 가르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하였으며(행 6:4),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위대하게 역사하셨다.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거하시기를 원하였다. 물론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신자의 마음에 거하신다. 그러나, 모든 마음이 그가 계시기에 편안한 집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베다니에 가기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그 곳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그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으로 배부르며 그를 섬겼기 때문이다. 창세기 18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러 오셨을 때도 천사를 앞서 보내어 롯을 방문하게 하셨다(창 19장). 왜냐하면 세상적인 신자의 집에서는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편안함을 느끼실 수 있겠는가? 믿음과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서 편안함을 느끼신다. “뿌리가 박히고“란 굳건한 위치, 믿음과 사랑의 습성을 암시한다. 영적인 일들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18절의 “알아“는 “파악하다, 이해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미 그들이 이해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는데, 이제 그는 이 놀라운 일들에 대해 그들 스스로 이해하게 될 것을 기도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한다. 바울은 특히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모든 것을 충만케 하는 사랑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하게 되기를 원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가 아닌 성난 심판자나 또는 엄격한 주인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한다“(19절)는 말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요 1:16/골 2:9-10 참조). 골로새서 2장 10절에서도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충만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구호대상자처럼 산다. 공허한 생활은 실의에 빠진 위험한 생활이다. 만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채우시지 않으면 불순종의 영이 와서 역사하며 죄에 빠뜨린다.
20-21절은 감동적인 축복 기도이며 이 편지의 첫부분을 끝맺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가! 이 능력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열 때, 내적인 교제를 구할 때, 기도할 때, 말씀에 순복할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을 때(2:6),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져 있을 때 “쓰레기더미 안에“ 있을 이유가 없다.이 전반부를 끝마침에 있어서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자세는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었고(2:6)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으며(2:20), 그의 무릎을 꿇었다(3:14). 이로 인하여 바울은 걸을 수 있고(4:1), 성장할 수 있으며(4:15) 사단에 대항하여 설 수 있었다(6:1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지위는 이 땅 위에서 우리로 승리할 수 있게 한다."
엡 4:1-16
▣ 놀라운 행실-에베소서 4장-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강조하는 본 서신의 후반부를 시작한다(4:1/4:17/5:2/5:8/5:15). 그리스도인의 삶은 걸음에 비유되는데 그것은 믿음의 일보를 내딛는 것으로 시작하며, 전진할 것이 포함되어 있고, 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걷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결코 달릴 수 없을 뿐더러(히 12:1-2), 더 나아가 전투를 할 수 없을 것이다(엡 6:11-).
1. 하나됨으로 행하라(4:1-16)
우리는 한 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연합하여 하나됨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바울은 1-3장에서 이러한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이제는 이러한 축복의 생활을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권고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많은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단합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이미 존재하는 연합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적인 통일체, 즉 하나의 “초월적인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유기적인 연합이며 통일이다(요 17:20-23 참조).
이러한 연합의 근거가 4-6절에 열거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한 분이신 주님“이 중심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 몸“이라는 개념이 신자의 지체로서의 중요성을 파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전체계획과 영적 진리들을 관련지우고 있음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이러한 진리들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디모데전, 후서, 디도서, 고린도전-후서 등). “한 몸“(보편적인 교회)은 선교사를 보내거나 고아원을 짓거나 성찬식에서 교제를 하지는 않는다. 신약에서의 주된 강조는 지교회에 두고 있는데, 다만 지교회의 치리는 한 몸에 관하여 바울이 가르친 내용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연합을 위한 은사들은 7-11절에 주어져 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 강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은사들을 주셨고, 주님은 이러한 은사받은 사람들을 지교회들에게 보내셨다. 1-6절이 한 몸과 그 연합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7-11절은 여러 지체들과 은사들의 다양성을 다룬다. 결국 한 사람이 어떻게“보편적인 교회“를 목회할 수 있겠는가?
교회의 목표는 12-16절에 설명되어 있다. 목회자와 교사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하며 봉사의 본을 세워야 한다. 성도들은 섬기는 일(치리의 일)을 실행한다. 그리고 각 성도가 성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인도함에 따라서 전체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다. 12절은 “성도들이 성장하여 섬기는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하기 위하여... “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 각자는 교회의 성장에서 담당할 몫이 있으나, 불행하게도 아직 젖먹이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안정되지 못하고 쉽게 곁길로 빠진다(14절/ 고전 3:1-). 사단과 그의 사역자들은(고후 11:14-15) 그들의 거짓말로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화된다(건설된다, 행 20:32/고전 14:4).
따라서, 교회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프로그램이나 잔치들, 오락 또는 “조절“을 통하여 양육되거나 힘을 얻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몸이므로, 영적인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몸이 완성될 때에 그리스도는 돌아오실 것이며 그의 몸(그가 이 몸의 머리이시므로)을 영광된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엡 4:17-32
2. 순전함으로 행하라(4:17-32)
이 장의 전반부는 신자가 교회와 맺는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제 바울은 신자가 세상과 가지는 관계에 대하여 설명한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몸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세상에 있으며, 이곳은 유혹과 더럽힘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전함으로 행해야 하며 세상이 우리를 더럽히도록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부정문으로 시작한다.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행하던 방식으로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불경건하게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즉, 그들은 거짓말을 믿었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눈이 어두워졌으며,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온갖 종류의 죄에 자신들을 굴복시켰던 것이다(2:1-13/고후 4:1- 비교). 그들의 곤경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생명을 받지 못하였음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제시된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처할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옛 생활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만 했다. 바울은 그들이 변화를 경험할 것을 기대하며 “벗어버리라“(22-23절), “입으라“(24절), “버리라“(25절 이하)는 세 가지를 권고한다. 로마서 6장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고 간주할 때에 우리는 옛 사람을 “벗게 된다.“ 하나님 편에서는 일을 이루셨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그가 하신 말씀을 믿는 것과, 믿음으로 “옷을 바꾸는“ 것이 날아 있다.
예수께서 나사로와 연관하여 하신 말씀은 각 신자에게 적용된다. “그를 풀어 놓으라... 수의를 벗기라... 그를 가게 하라.“ 옛 생활에 대하여 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부활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선포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옛 생활의 “수의“를 벗고 새 생활의 “은혜의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의 일부분이다(24절/2:10). 따라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롬 6:4).
우리는 죄들을 단번에 모두 “버려야“ 한다. 바울은 이런 죄들을 25절 이하에서 열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각 명령을 영적인 진리에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는 서로 지체들이며(25절), 구속의 날에 인침을 받았다(30절).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다(32절). 교리와 의무, 즉 그리스도인의 부요함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함은 성경에 있어서 한 쌍의 축복들이다.
우리가 진리에 속하였다면 어떻게 거짓말에 탐닉할 수가 있겠는가? 사단은 거짓말의 아비이며(요 8:44) 그의 영은 거짓을 말한다(요일 2:21/요일 2:27). 어느 날 전 세계는 “거짓말“을 믿게 될 것이다(살후 2:9-11). 죄가 되지 않는 분노도 있다(막 3:5). 만일 우리가 사람에 대하여 화를 낸다면, 죄가 따라올 것이나, 만일 죄와 죄악된 원리들에 대하여 화를 낸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다.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성냄을 “의로운 분노“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약 1:20).
거짓말과 분노는 마귀에게 활동할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27절). 왜냐하면 사단은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위선과 분노는 사단이 들어올 문을 열어 준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가인의 거짓말과 분노가 어떻게 살인으로 진행되어 갔는지 읽어 보라(창 4장 참조).
28절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2절과 관련되어 있다. 구원받지 않은 도둑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훔친다. 그러나 그가 구원을 받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기 위하여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은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놀라운 변화이다.
우리의 입술은 건설적인 말을 해야만 한다(골 4:6/시 141:3). 입술의 타락은 마음의 타락을 의미할 뿐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인치셨으므로(1:13-14)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이러한 행위와 마음 가짐의 죄들을 허락함으로써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 성령은 비둘기로 상징되고 있는데, 비둘기는 평화를 사랑하는 정결한 새이다. 분노와 불평은 용서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버려져야만 한다."
엡 5:1-6
▣ 놀라운 신부-에베소서 5장-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관한 설명을 계속한다.
1.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6)
“본받는 자“란 “흉내내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범은 우리를 감동시킨다(요 15:3/요 15:12/요일 3:16-18). 여기서 바울은 죄인을 위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신 향기로운 제물로서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물론, 올바른 사랑에는 우리가 어떤 것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성도들(구별된 자들)은 그 이름도 말하지 말아야 할 죄들도 있다! 4절은 유우머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지 못하고 부정한 농담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의 입술로 의문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으로 맛을 고르게 함같이 말해야 하므로“(골 4:6) “대강 줄잡아서 들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자들도 습관적으로 살며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가 있다. 바울은 이들의 가르침을 “허탄한 이야기“라고 불렀다(5-6절/갈 5:21-/고전 6:9-10 비교).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으나(2:1-10),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여야만 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정결하게 지켜 주리라는 것이다."
엡 5:7-14
2. 빛 가운데서 행하라(5:7-14)
“참예한 자“란 말은 공동으로 갖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어서, 종종 “교제“ 또는 “협력“으로 번역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벧후 1:4), 하나님의 약속(엡 3:6), 그리스도의 고난(벧전 4:13), 거룩함(히 12:10), 하늘의 부르심(히 3:1)과 하나님의 영광(벧전 5:1)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이러한 놀라운 교제를 이루면서 어떻게 죄와 어두움에 속한 일들에 짝이 될 수 있겠는가?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빛과 어두움이 어찌 공존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우리는 빛의 자녀이므로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어두움은 죄와 거짓말을 만들어 내며,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산출한다. 빛은 어두움과 타협할 수 없다. 다만 드러낼 뿐이다(요 3:19-21/요일 1:5-10)."
엡 5:15-17
3. 주의깊게 행하라(5:15-17)
“주의하여“란 말에는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것은 지혜롭게 행하려는 뜻이며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에 걸려 넘어져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는지 모른다. “정확하게“ “주의하여“ 행하는 대신 목표를 잃고 길을 잃고, 마침내는 우회하는 괴로움을 당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와서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기회를 사는 것“(시간을 구속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시간과 힘과 재물과 재능을 낭비하는 일이 없으며,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엡 5:18-6:9
4. 조화있게 행하라(5:18-6:9)
이 부분은 6장에까지 이어져 있으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일꾼과 주인 사이의 조화에 대하여 다룬다. 가정과 직업에 있어서의 조화와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에 있다. 교회의 일치와 가정의 조화는 둘 다 성령에 의존한다(4:3/5:18). 즉, 외적인 강압이 아닌 내적인 능력에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의 증거는 기쁨(19절)과 감사와(20절) 희생적인 순종(21절)이다. 골로새서 3장 15-17절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한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절을 받는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감정적인 동요나 기적, 방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에서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는 그러한 증거들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있다.
머리됨의 원리가 가정을 통솔한다. “그리스도께 하듯“이 동기가 된다. 아내들은 그리스도께 하듯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하며,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고, 자녀들은 주님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가정이 분열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고 있다. 교회가 성경의 첫 신부인 하와에 비유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창 2:18-25 참조). 그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취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옆구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찔림을 당했다. 그녀는 아담이 잠들어 있을 때에 만들어졌으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쉬고 계실 때에 형성되었다. 하와는 아담의 본성을 나누어 가졌는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예한 사람들이 되었다(30-31절).
하와는 자기의 짝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대상이었는데,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돌보신다(딤전 2:11-15). 아담은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죄를 범하였고, 그리스도는 교회를 인한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죄 있는 자가 되셨다. 하와는 죄가 인간의 가족에 끼어들기 전에 창조되어 아담에게 인도되었다. 교회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심중에 있었다. 로마서 7장 4절과 고린도후서 11장 2절을 살펴보면 이 결혼의 진리가 개별적인 신자에게, 그리고 지교회에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지금 교회에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성결케 하시며 깨끗하게 하고 계신다. 주님은 그가 선택하신 종들을 통하여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신다(4:11-16).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영광으로 인도해 가실 때 교회는 완전하며 점도, 흠도 없을 것이다(요 17:22-24). 말씀은 교회를 정결케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양육한다(29절). 이것은 신자들의 새로운 본성을 위한 영적인 음식이다.
6장 1-9절에서 바울은 자녀와 종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진리를 적용시킨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즉, 순종함이 옳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명령이며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아버지는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아내의 충실한 사랑을 얻는 데에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바울은 4절에서 아버지에 대해 경고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의 자녀를 불필요하게 노엽게 꾸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황금율을 가정에 적용하며 자녀를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훈계(양육)하며, 주 안에서 조언(권고)을 주어야 한다.
종들은 그들이 모든 것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거나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하면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마 6:24). 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에 마음을 고정시키며, 세상적인 소득을 얻는 데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눈가림“이란 주인이 보고 있을 때에는 일하고 그가 없을 때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면 눈가림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엡 6:1-10-12
▣ 놀라운 전쟁-에베소서 6장-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승리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가를 말해 준다(6:10-24). 하나님께서 사단을 정복하고 승리를 얻기 위하여 어떤 대비책을 만들어 놓으셨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사단과 그의 군대를 정복하셨는데(골 2:13-15/엡 1:19-23) 그의 승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다.
1. 우리의 대적(6:10-12)
사단은 강한 적이므로 바울은 우리가 강해질 것을 권면한다. 그는 우리의 육신이 연약한 것과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11절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일어서라“고 말하기 앞서 “강하여지라“(10절)고 명령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우리가 일어서기 위한 이러한 힘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정사와 권세 위의 높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알며(1:19-23)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도 사용할 수가 있다(3:14-21). 우리가 걷고 서기 앞서서 우리는 앉아야만 한다. 우리가 영적인 능력을 가질 수 있기 앞서 우리의 영적인 지위를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책임지도록 임명한 천사가 사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겔 28:11-19). 교만함으로 그는 타락하였고(사14:9-) 지금 정사와 권세를 잡고 군대를 이루고 있는 천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단은 하늘에 출입할 수 있었으나(욥 1-3장) 환란 기간 동안에 하늘에서 쫓겨날 것이다(계 12:9). 그는 속이는 자요(고후 11:3) 파괴자이며(계 9:11 , 아바돈은 “파괴자“란 뜻이다) 뱀과 사자로 배회한다(벧전 5:8-9).
그리스도인은 혈과 육(방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싸우고 있지 않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며 그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같이 불순종의 영(사단과 그의 귀신들)은 불신자들의 생활에서 역사한다. 진짜 적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혈과 육을 사용하고 있을 때 혈과 육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베드로가 동산에서 검으로 마귀를 이기려고 했을 때 이러한 실수를 범하였고(마 26:51), 모세는 애굽사람을 죽였을 때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행 7:23-29).영적인 원수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궤계(엡 6:11) 즉 거짓된 책략, 마귀의 속임수(고후 2:11), 그리고 마귀의 올무(딤전 3:7) 등을 삼가야 한다. 그는 어두움의 주관자로서 자신의 목적을 조장하기 위하여 어두움(무지와 거짓말)을 사용한다(고후 4:1-/눅 22:53)."
엡 6:13-17
2. 우리의 장비(6:13-17)
그리스도인이 “마귀에게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4:27). 즉, 오점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 두어 사단이 끼어들게 하는 일과 같은 것을 말한다. 바울이 설명하는 무장은 방어를 위한 것이다. 검(하나님 말씀)은 실제의 전쟁을 위한 것이다. 영적인 무장의 각 부분은 신자가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를 받고자 할 때 그의 생활 가운데 지녀야 할 것들을 말해 준다.
진리-사단은 거짓말장이지만,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속지 않을 것이다.
의-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일상의 행실을 뜻한다. 사단은 “형제들을 고발하는 자“(계 12:10)이지만 빛 가운데서 행하는 신자는 사단에게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평화-사단은 분열시키는 자이며 파괴자이다. 신자가 평화의 복음으로 행할 때에 사단은 그에게 팔을 펴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발은 깨끗하고(요 13장), 아름다워야 하며(롬 10:15)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
믿음-사단은 불신앙과 의심의 근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이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무기이다(창 3:1 참조). 믿음은 극복하며 이기는 일을 한다(요일 5:4). 신자가 믿음의 방패를 자기 앞에 둘 때에 불신앙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다.
구원-이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살전 5:8).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에 마음을 고정시킨 신자는 사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복된 소망은 마음을 방어하는 투구와 같을 것이다. 사단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돌아오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게 하거나, 또는 오늘은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하려 한다. 마태복음 24장 45-51절을 읽고 구원의 투구를 벗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아보라.이러한 무장들은 신자의 보호를 위한 것이다. 성령의 검은 사단의 근거를 공격하여 파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무기들로 싸워야 한다(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능력이 있으며(히 4:12), 결코 무디어지지 않는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암기하고, 순종할 때에 정복하게 된다."
엡 6:18-24
3. 우리의 힘(6:18-24)
갑옷과 무기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기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군인에게는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힘은 기도로부터 온다. 우리는 성령의 검을 사용하며 성령안에서 기도한다. 성령은 우리가 전투에서 이기도록 능력을 주신다. 에베소서 3장 14-21절을 다시 읽고 담대히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적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영토를 확보하도록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두 가지 무기이며 자원이다(행 20:32/행 6:4/삼상 12:23 참조).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깨어 기도해야 한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세상(막 13:33)과 육신(막 14:38)과 마귀(엡 6:18)를 이기는 하나님의 비결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기회를 위해서도 “깨어 기도해야 한다“(갈 4:2-3).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 군사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6:19-). 바울이 교만하여서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이 비밀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를 원하였으며(3:1-12) 바로 이 비밀은 그를 감옥에 갇히게 했던 멧세지이다. “결박된 대사“는 색다른 칭호이기는 하지만 바울에게는 알맞는 것이었다. 여섯 시간마다 로마의 다른 군사들이 교대하였으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할 놀라운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바울은 몇 가지 개인적인 사항을 말하고 이 위대한 서신을 끝맺는다. 그의 교우들이 자기의 형편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바울의 상태와 필요들을 안다면 그를 위하여 보다 현명하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은 물론이다. 바울은 또한 그들을 위로하기를 원한다(22절). 바울은 참된 성도였으며 자기의 모든 필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을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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