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물려받을 선교의 유업 (박재현)

수호천사1 2012. 11. 14. 10:24

물려받을 선교의 유업 (Legacy)

-서구선교와 한국선교의 협력 차원에서-

백재현 박사 (O.M)

1. 머릿 말

선교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다. 하나는 서구 선교 방식을 비판하며, “서구 선교 시대는 막을 내려서 이제는 기존의 서구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방식으로 선교를 이루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와 반면에 일각에서는, “한국 선교는 멀었어 아직 서구 선교를 통해 배워야 한다” 라는 회의론이 있다.

안타깝게도, 위의 양극단 속에서 선교 단체들조차 “토종” 과 “국제” 선교 단체로 나뉘어져 자기 방어적인 형태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는 노력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유럽 교회의 상황만 보고 간단히 서구 선교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럽은 더 이상 선교하는 대륙이 아니라 선교 대상지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다. 복음주의 교인이 인구의 1%도 안 되는 나라들이 다수이며, 멋있게 지은 전통적인 교회는 노인들만 남았으며 더욱이 이슬람 사원으로 변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실로 근대의 계몽, 인본 물질 주의 그리고 현대의 상대주의에 의해 유럽의 교회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서구 선교 역사를 통해 연연히 흐르는 정신과 유업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서구 선교의 잘못된 부분을 우리는 똑 같이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일 민족으로 민족 주체의식이 매우 강하다. 역사를 통해 수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은 민족이어서 폐쇄적인 자기 방어의식이 강하다. 그러기에 잘못하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며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우치기가 쉽다. 한국교회는 지금 선교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한국 경제의 발전, 교회의 부흥 그리고 선교사 1만 3천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마지막 시대의 선교의 최종주자로서 제사장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이런 양적 성장에 우리의 눈이 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질적인 면에서 냉정히 돌아봐야 하며, 열린 마음으로 서구 선교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서구 선교의 따라가야 할 좋은 것들은 놓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겸손과 열정이 있어야 하며, 잘못된 것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경계 의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물려받아야 할 선교의 유업으로 무엇보다 서구 선교의 실패적 요소를 통한 교훈을 들고 싶다.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이 제일 먼저 우리의 유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서구 선교 운동의 실패적 교훈: 민족 우월주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선교를 서구 선진 문명의 전파로 이해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선교를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서구 기독교 국가의 정치적인 침입과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으며 기독교로 회심한다는 것은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서구 선교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주의와 연합했다. 이것은 식민주의의 3대 여건인 3C에서도 잘 반영된다: 기독교 (Christianity), 상업 (Commerce) 과 문명 (Civilization). 이 시대의 유럽과 영어권 선교운동은, 서구 민족의 문화, 경제, 정치적 우월을 내세우는 식민주의를 위해 원주민들의 내적인 순종과 헌신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 우월성을 후천년설의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는 마지막 주자로서의 “명백한 부르심” 라는 신학적인 확신이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확신에 편승하여 서구의 선교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현지에서의 “재생산 (reproduction)” 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선교에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도 선교를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중의 대표적인 것이 “촛대이동” 의 개념일 것이다. 하나님의 촛대가 유럽에서 북미로, 북미에서 한국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인데 마치 릴레이 경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홀로 전력 질주하는 한국 선교의 모습이 연상이 된다. 이러한 개념 뒤에는 하나님이 이 시대를 위해 한국 민족을 택하셨다는 자만심이 은연중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시대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시는 민족이 있어 왔다. 그러나 1만 3천명의 선교사 파송이라는 숫자만 가지고 자만하기에는 너무 이르며 철저한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민족적인 관점으로 선교를 보았을 때 서구 선교의 오류를 반복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폭 넓은 관점에서 한국 민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선교를 통해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겸손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선교 운동과 연합하여 동반자로서 지상 명령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3. 서구 선교 운동을 통해 물려받아야 할 유업

사랑과 희생: 서구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열악한 조건 (음식, 기후, 언어 문화 등) 을 무릎서고 선교 지에서 희생함으로 영혼들을 사랑하였다. 또한,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나라의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는 죽임 당하는 순간에 군인에게 복음서를 전달하였다. 또한, 한국에 뼈를 묻은 양화진의 수 많은 선교사의 무덤이 그 증거일 것이다. 비록, 선교사들이 때론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많은 잘못이 있었을지라도 사랑의 동기를 잃어 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선교사를 보내며 복음을 전하는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영적 부흥이 있는 곳에는 먼저 선교사의 희생적인 사랑이 씨앗으로 뿌려졌다.

한국 선교사들도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선교의 유업으로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 선교 지에서 어려운 일이 있고 낙심 될지라도 현지인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선교의 초창기 때에 낙심 되는 환경가운데도 포기하지 않은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한국이 복음화가 될 수 있었듯이 우리도 보이는 열매에 연연하지 말고 필요한 지역에 계속적으로 선교사를 보내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관대한 나눔 (Generous giving): 서구 교회는 나누는 데에 있어 매우 관대했다. 이 나눔은 민족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으로 서구 선교가 현지의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 구제, 교육, 의료, 문화의 영역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국 사람은 정이 많고 나눔에 있어서도 매우 관대하다. 그러나 우리의 나눔은 아직 관계적이고 지엽적인 경우가 많다. 선교에 있어서도 한국 선교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돕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현지 필요의 큰 그림을 보기 보다는 관계 중심적인 나눔이어서 지엽적이고 한쪽으로 치중되기 쉽다. 우리의 선교적 나눔은 민족적이며 관계적인 경계를 벗어나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 안에서 필요에 따라 우리의 가진 것을 관대하게 주는 것이어야 한다.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서구 선교사들이 선교 지의 언어 문화 연구에 있어 이룩한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윌리엄 케리는 벵골어에 대해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종래의 고전적 형태를 대신할 구어체의 언어를 고안하여 현대인에게 친숙하게 하였다. 그리고 힌두교의 대표적 서사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인도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한편, 홍콩 선교사였던 제임스 레그 (James Legge) 는 중국의 사서오경을 주석과 함께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높은 학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중국 고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그의 번역을 필히 참조해야 한다. 인도와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 선교 지에서도 서구 선교사가 선교지 문화에 남긴 학문적인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 진다.

이들의 현지 문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현지 문화에 대한 숨겨진 가치를 세상이 발견하게 했다. 특히, 이 당시 서구 사회를 지배하던 계몽주의의 영향을 고려할 때 이들의 업적은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구 선교사들의 현지 문화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 태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 문화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현지 문화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판단할 때 이들의 세계관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진정한 삶의 변화를 유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장점인 감성적인 관계성에 지적인 연구 태도가 뒷받침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현지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기록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본국에 나누는 교량적인 역할도 한국 선교사가 개발하여야 할 영역이다.

말씀 중심의 사역: 세계 기도 정보에 의하면, 전 세계에 존재하는 7,148개의 언어 중 신약성경이 번역되어야 하는 언어는 아직도 최소한 2,000개에 이르며, 다른 2,000개의 언어에 대해서는 성경 번역 필요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1999년 전 세계에 배포된 성경은 전권이 2,400만 권, 신약성경이 2,600만 권, 쪽 복음이 5억 7,700만 권에 이른다.

성경번역은 실로 엄청난 인내의 작업이다. 번역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걸리는 언어 습득 시간만 하여도 최소한 10년이 걸린다. 또한 성경 번역자는 문법, 구문, 어형론 등 언어의 세밀한 부분을 알아야 하며 현지 문화와 연관된 번역의 많은 기술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큰 스케일의 작업을 진행해온 서구 선교 단체들에게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우리는 이 과업을 서구단체와 함께 현 세대에 완수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WBT 선교회는 2025년까지 전 세계 모든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한국 선교의 초기에 있어서 선교사들에 의해 네비우스 정책과 함께 도입된 사경회는 한국 교회를 부흥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었다. 사경회는 일정 기간동안 집중적으로 하는 성경공부모임으로 이것의 확산은 한국 교회 부흥 역사에 있어 말씀의 견고한 기초를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유업일 것이다. 즉, 선교 지에서의 모든 사역은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교회 선교 방식 (네비우스 원리): 한국 선교의 초기에 있어서 장로교 선교단에 의해 도입된 이 선교 방식은 자립, 자치, 자전의 원리를 가진다. 특히, 현지 교회의 재정적인 자립은 이 선교 방식의 주된 골자를 이루고 있다. 한편, 이 원리가 네비우스 자신도 중국선교에서 실패한 이상적인 원리라는 비판이 있다. 한국에서의 성공은 특별한 경우라는 것이다. 또한, “120년 전의 이 원리가 지금의 선교지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의문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리는 성경적이다. 비록 조속한 선교의 결과를 기대하는 선교사나 본국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겠지만 현지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비판과는 달리, 네비우스 원리에 입각한 성공적인 경우들이 세계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다. 이와 반면에, 외국에서의 무분별한 자금 유입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선교 단체간에 연합은 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요하면서도 힘든 부분이다. 이 원리가 한국에서 1890년 장로교 선교 단들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타 교단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한국 선교의 초기 선교사들의 모범을 본받아 함께 연합하여 자립교회 선교의 원리를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총체적인 사역접근: 총체적인 사역은 자유주의의 사회복음과 혼동되어 지금까지 오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총체적인 사역의 예는 우선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21세기 선교에 있어서 점점 더 중요성이 강조되어지고 있다. 반면에, 총체적인 사역은 인본주의 적인 개발 (development) 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내적 변화 (transformation) 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금 세기의 환경 문제, 사회 문제, 테러, 자연 재해 등이 심각해 지는 상황에 있어 우리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성경적인 치유와 회복을 모색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단기 선교 운동: 단기 선교 운동은 1950년대 후반 오엠과 YWAM 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이전까지의 선교 개념이 장기, 전문 사역자 중심이었다면 이 두 단체를 통해 단기, 평신도 중심의 선교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단기 선교 운동은 북미지역에서 1965년에 540명이었던 것이 1998년에는 450,000 으로 지난 40년간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단기 선교는 장기 선교를 위한 주춧돌이 되어 현대 선교 동원에 있어서 큰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현 시대의 여건에 부응하며, 단기 선교 운동은 선교 동원과 사역의 중요한 수단으로 개발되어져야 한다.

단기 선교 운동을 통해 선교의 문은 낮추어졌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의 사람들은 선교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한편, 윌리엄 케리, 허드슨 테일러, 로버트 모리슨, 데이비드 리빙스톤 등과 같이 한 세대의 선교의 장을 열었던 개척자들도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평범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파트너십: 서구 선교 단체들의 네트워크와 전략적인 연합은 우리가 무엇보다 물려받아야 할 영역이다. 한국 선교 초기의 네비우스 정책도 이러한 연합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선교 지를 개척해야 하는 상황가운데 서구 단체들은 네트워킹과 전략적인 연합을 통해 사역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며 개척적인 사역에서도 위험도를 최대한 줄이는 모범을 보여왔다.

앞으로 선교에 있어 파트너십은 더욱 중요한 이슈로 부각될 것이다. 선교의 마무리를 해야 하는 이 시대는 산발적인 사역의 시도가 아니라, 선교의 나머지 과업을 위해 함께 역할 분담하는 파트너십이 강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이다. 선교에 있어서도 점점 특정 선교 지의 개념이 사라지며 세계에서 세계로 (Globe to Globe) 가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국만 하더라도 이젠 수십만의 외국인 이주자들이 있어 타 문화권 사역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세계 교회는 서로에게 배우며 연합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선교를 위해 각 민족에게 주신 독특한 은사가 있다. 미국 사람에게는 개척적인 은사를, 영국 사람에게는 학자의 머리를, 중국인에게는 상업의 은사를, 한국인에게는 기도와 전도의 은사를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은사들이 총체적으로 잘 연합될 때 하나님 나라는 더욱 능력 있게 확장될 것이다.

4. 마침 말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세계 선교를 주관하여 오셨다. 과거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우리의 실패도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서구 위주로 이루어졌던 과거의 선교 운동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서구와 비서구권 교회들은 역사를 통하여 서로 배우며 주님 나라를 위해 동반자로서 함께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J. 허버트 케인, 1993. 세계선교역사. 신서균, 이영주 역. 기독교문서 선교회
David J. Bosch, 2000. 변화하고 있는 선교 (Transforming Mission). 김병길, 장훈태 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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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Wagner (Ed.), 1972. Church/Mission Tensions Today, Moody Press, Chicago
William Jenkinson & Helen O’sullivan (Ed.),1993. Trends in Mission, New York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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