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1-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시록은 ‘속히 될 일들’에 대해 기록했다는 점에서(1:1)내용상 예언(a prophecy)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하나의 서신으로서 시작에서 종결부분에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1:1-8절 까지는 시작하는 부분으로 1:9-22:5을 본론 부, 22:6-21을 끝맺는 종결부분으로 삼분화 할 수 있다. 1:19절에 ‘본 것’ ‘이제 있는 일’ ‘장차 될 일’에 따라 구분해 보면 1:9-20절은 본 것, 2:-3:은 ‘이제 있는 일’, 4:1-22:5,‘장차 될 일’,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 말씀을 시작으로 계시록이 집필되는 것은 계시록의 저자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이 아니라 신적인 계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계시’인 단어(아포칼륍시스)는 ‘~로부터 떨어져란’ 분리의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 와 ‘덮다’(눅8:16), ‘가리다’(고후4:3), ‘숨다’(마10:26)의 동사 ‘칼륍토’의 합성어로 ‘덮은 것을 벗기다’ ‘드러나게 하다’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칼륍토’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는 ‘드러냄’ ‘벗김’ ‘계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아포칼륍시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내 보이시는 행위와 그 내용 전반을 광범위하게 통칭하는 것’을 의미하는 ‘계시(Revelation)' 혹은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묵시 문학적인 양식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말한다.
계시란 실체의 관한 환상, 혹은 환상의 형태로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도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요3:35, 5:20, 7:16, 8:28, 12:49,}
이다. 계시의 순서를 본다면 계시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계시의 주권은 예수님이시고 심부름꾼은 천사이며 수신자는 요한이며 마지막 때의 주의 종들이고 최종적으로 계시 수여자는 성도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 계시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고 계시의 소유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자신의 비밀들을 친히 계시 하시는 분이시다.(단2:28-29,45)
이 계시는 완전한 비밀이어서 누구도 알 수 가 없다.(계5:1, 마24:36, 요12:49) 그런데 길이 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성령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실 때 (엡1:17-19, 벧후1:21, 요16:13, 요일2:27)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천사를 통하여 그 천사는 요한에게 전달하고 그리고 요한으로부터 모든 그의 종들(그리스도인)에게 알리셨다.(행17:24, 사44:6,7, 단2:28-35, 계1:8, 21:6), 이 계시는 마지막 약속으로서 반드시 될 일이다.(요14:1-3, 행1:11, 계4:1, 22:6, 20)이 계시를 주의 종들에게 알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종들은 깨여 있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자가 충성스런 종이라 할 것이다. 집을 떠난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술 먹고 하인들을 때리고 괴롭히며 자신의 일을 망각하고 있을 때 주인이 와서 그 하는 모습을 보시고 책망하시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되면 슬픈 종말이 그에게 닥치게 된다.
이 계시는 속히 될 일이라고 하셨다(1절), 시기가 매우 가깝다고 하셨다(1절, 계22:7,12,20), 재림의 임박성, 종말 때의 긴급성, 이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하셨고 또 주의 종들이 증거한 완전한 계시이다. 계시를 주신 목적은 읽고 듣고 지키어서 주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하신 것이다(벧후3:4,8,9. 7:3, 14:14-16). 구약에는 읽는 자는 선지자이고 듣는 것은 회중이다, 오늘 우리는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문제는 지키는 일이다. 읽고 듣는 것은 지키기 위함이다. 행하는 자가 복되다 하셨다.
그런데 왜 이 편지를 주셨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곧 주님이 오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금방 오시지 않았다. 환란과 핍박은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생기면서 교회의 위기가 찾아 왔다. 성도들은 왜 하나님이 아직 안 오시는가 이런 회의에 빠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확신을 주기 위해서 기록하게 하셨고 세상 끝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은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주의 백성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계시고 개입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시편121편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너희 평생에 능히 당할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엇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떠나지 아니하리라’수1:5,
1, 1절에 보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를 거쳐서 요한에게 임한 계시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하셨다. 이 속히는 종말의 임박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빠른 시일내에 이루어지는 일, 사실이며 때가 가까웁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시간적으로 가깝지만 장래에 확실한 사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계22:10절에서도 때가 가까우니라고 동일한 뉘앙스를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속히 오시겠다고 하신다(계22:7, 12, 20, 2:16, 3:11) 그런데 왜 반드시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이 일은 반드시 성취될 일인데 시간적인 개념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으로 장래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다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에 성경을 거짓말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 말은 주께서 고난 중에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속히 될 일을 기억하고 믿음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잠시의 고난을 견디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상받을 것이니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하신다.(약1:12)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하게 붙잡고 신뢰한다면 환란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다 넉넉히 이기게 된다. 베드로사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기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근심할 수 있으나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다.(벧전1:6)왜냐하면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초대교회 때부터 종말적인 신앙으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였는데 주의 재림이 더디어 지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데마처럼 세상으로 가버리는 성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임을 잊지 말라(벧후3:8)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시기에 나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보다 현재에는 훨씬 주님오실 때가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약속하신 것에는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디에 이 말씀을 하셨나요? 사55:11, 내 입에서 나간 말도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실제로 인간이 조급하여 믿지 못함이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정하신 때에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임을 말씀하신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시90:4), 참고(벧후3:4,5).이 모든 것들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확정적으로 닥치지 않은 그래서 우리는 그때를 모르기 때문에 영으로 깨여있어 신부단장을 해야 한다.
하나 알고 넘어갈 부분인데 1절에서 ‘알게 하신’ 것이라의 단어는 에세마넨이다. 이 단어는 세마에서 파생한 동사 ‘세마이노’의 부정 과거형으로 ‘상징으로 표시하다 상징으로 알게 하다’라는 뜻이다(요12:33, 행11:28).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역사적으로만 미래적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상징은 오히려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1세기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늘 21세기 그리스도인에게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증거,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9절에서 밝히고 있으며, 20:4절에도 말씀하고 있고 6:9과 12:17절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로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초대교회에서는 환란과 핍박에도 믿음을 지킨 것과 생명까지도 주님께 내어 놓은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란 언급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출처임을 다시 밝히고 있다. 요한은 주께서 보여 주신 것을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다 증언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순종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주님이 부르심에 yes만 했는가, 그리고 순종했는가, 즐거운 마음으로 성실하게, 우리의 위험의 수치는 자꾸만 이성의 생각으로 말씀을 재단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잘라 버리고 이해가 안 되면 덧붙이고 이런 함정에 늘 걸리게 된다.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자입니다. 그는 훗날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자랑스럽게 설수 있고 잘 하였다 충성된 종아! 영예의 칭호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했습니다. 계시록이 기록된 것은 성도에게 복을 받아 누리게 하려고 썼다고 하십니다. 다시 계시록은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라 하신다. 그런데 원문을 살펴보면 읽는 자는 단수이고 듣는 자는 복수이다. 어떤 상황이 그려지는가, 이것은 집에서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말씀을 읽어주고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깨달아 알았으면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미 보여주신 그림이다.(느8:2, 눅4:16, 행13:15), 물론 당시에는 책도 귀했고 공중예배에 와서 들을 수 있었지만 오늘도 이 말씀은 그대로 효력이 있는 것이다.
‘지키는 자들’은 법률을 지키다. 준수하다. 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법보다 더 지키기를 원하고 계신다. 세상 법은 눈에 보이는 것에 저촉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서부터 지키라 하신다. 그것이 예수님의 율법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하셨다. 본문에서 ‘때’ ‘카이로스’는 물리적인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질적 시간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우주의 종말의 때를 의미한다. 그 때가 가깝다고 했다. 그러므로 읽고 듣고 지키면 복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제 어렵다고 덮는 책이 아니라 열어서 읽어야 하고 듣기도 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지키기 위하여 읽고 듣는 것이다. 문제는 성령의 감동으로만 깨닫게 되어 있으니 기도하여 주님께 늘 물어야 한다. 성경을 소지하고 있다고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어서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영양이 많은 호도라고 해도 깨어서 먹지 않고 들고 다니면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몸에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특히 계시록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하신다. 들었으면 행하여야 한다, 지켜야 한다, 계21:7이기는 자가 유업을 얻는 다고 하신다. 이 말씀 속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딤후3:15)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고(딤후3:16), 이 말씀대로 살아갈 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미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1:8) 지키면 바로 하늘 창고의 열쇠를 소유한 복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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