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종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수호천사1 2012. 10. 15. 15:12

예수가좋다오

종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글/김병삼 목사

 

1. 열정과 전략이 만날 때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부정적인 일에 열정을 가질 수도 있고 긍정적인 일에 열정을 가질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열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을 통해 이 부분을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잘못된 열정에 헌신된 사람들 때문에 피폐해지는 것 같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꼭 남의 단점만을 가지고 늘어지는 사람들. 분명히 사회적인 부조리와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참여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긍정적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불만족이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명이 되는 것 말입니다.

 

언젠가 제가 facebook에 글을 올렸는데,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날 저도 글을 써놓고 만족하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이런 댓글이 올라왔더군요. “저는 목사님의 왕 팬입니다. 그런데 오늘 글은 영... 아니네요.” 굳이 그런 글을 써야 하는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어떤 일에든지 열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긍정적인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열정이 좀 전략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로마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5장 22-24절에 보면,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라고 기록합니다.

 

결국, 그의 꿈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면서 이루게 되지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그곳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 사도로서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사역과 피는 얼마 되지 않아 전 유럽을 복음화시켰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은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첫 시간에 잠시 살펴보았던 부분인데,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로마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는 누구냐?”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당신은 누구이며,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서 인용한 이야기가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중에 좀 고통스러운 불평을 말했습니다. "애써서 음식을 마련하지만 제 남편이 늘 밥투정을 해서 괴롭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어 보아도 뭐 이래 맛이 없고 저래 맛이 없고 타박을 하는데. 참 힘듭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그녀를 위로하노라고 "그거는 부전자전이다. 너의 시아버지도 어지간하단다. 내가 그런 어려운 시아버지를 지금까지 모시고 시중들고 있단다."


며느리가 마음이 좋았어요.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기분이 좋아서 이제 입을 열고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거예요. 남편의 흉을 계속 보았습니다. 늦잠 자고, 화를 잘 내고, 늦게 돌아오고, 뭐 어쩌고 어쩌고……. 한참 흉을 보다 보니까 시어머니 눈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때 혼자 생각했습니다. '나 이 집 며느리 맞아?' 아니 며느리가 어찌 시어머니에게 그의 아들을 흉보는 거예요. 지금. 가끔 우리는 이렇게 나됨을, 내 정체를 잊어버리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출처/김홍진 목사)

 

한참 이야기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보니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불만족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드러내기보다는 잘 감싸고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에 대하여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내가 숨 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나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청년들과 함께 “코리아”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현정화 선수가 북한 이분희 선수에게 말합니다. “남한에서 살고 싶지 않아?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살잖아?” 그러자 이분희 선수가 말합니다.

“미국이 너희 나라보다 더 잘살지? 그래 너는 미국에서 살지 그러니?”
조국은 우리에게 영원한 조국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사랑하고 감싸줘야 할 조국입니다.역사를 바꿔야 할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지지고 볶더라도 우리 안에서 해야 할 일이지요.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교회의 잘못된 점을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지만, 교회를 허무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여러분이 교회의 몸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자신이 “종”이라고 말한 정체성이 왜 중요할까요?


이미 로마서를 쓰던 때 사도 바울은 잘 알려진 사도였습니다. 이미 고린도에서 그는 목회의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로마에 그렇게 가고 싶었을까요? 그곳은 가장 위험한 곳이고, 결국 그것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하는 장소였는데 말입니다. 그자 자신을 “종”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이란 의미가 무엇일까요?
당시 로마시민이 소유한 세 종류의 소유물이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는 말 못하는 소유물, 둘째는 소리 내는 동물과 같은 소유물, 셋째는 사람이지만, 짐승취급을 당하는 노예였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는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늙어 쓸모가 없어지면 내다 버리는 존재가 노예입니다.


그런 비참한 존재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이 무엇입니까?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임을 고백하던 때, 우리는 얼마든지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어떤 부르심에도 응답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유용한 존재가 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하나님보다 내가 더 드러나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제일 경계해야 할 부분이 나도 모르게 찾아오는 “나의 존재”인 것 같습니다.

 

지난주 조선일보에 보니까,
지난달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로 선임되면서 국내 학부모들 사이에 “글로벌 인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김용 씨뿐 아니라, 강영우 박사, 고경주 미국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 고흥주 국무부 법률고문 같은 사람들을 보면 부모들의 교육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실력 이상의 무엇을 가르쳤다는 것이죠.


김용 씨의 어머니는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가르쳤고, 그의 꿈은 마틴 루터 킹처럼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는 “실력은 기본입니다. 인격과 헌신이야말로 세계화 시대를 앞서 가는 인물로 성장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예일대 교수였던 전혜성 씨는 “인간성이 빠진 엘리트주의는 사회의 리더를 만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풍족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실력을 갖추고 세상을 지배하라고 가르칩니다. 뭔가 교육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보다 이유와 방향이 더욱 중요합니다. 신문에 인상적인 글귀가 있었습니다.
“개같이 공부하면 짐승 된다!”
김용 씨의 어머니는 늘 아들에게 “1등보다 위대한 무엇에 도전하라!”라고 가르쳤다죠.
미국에서는 재미있는 조사들을 종종 하는데, 하버드대학 그룹과 빈민층 그룹의 삶을 72년간 추적한 결과 마약, 알코올 중독자의 분포가 비슷했고, 캘리포니아 지역 영재집단인 IQ 145 이상 되는 1,528명의 삶을 90년간 추적한 결과 다른 집단과 비슷하게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비율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은 실력을 키워 자신을 위해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헌신하는 삶을 살려고 했더니 위대해졌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종 된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지식을 키우려고 노력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력을 키우지만, 자신을 위해서 쓰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자신만을 위해 쓴다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큰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업적을 이루는 것인가요? 아니죠,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누군가를 위해 우리의 삶이 헌신 될 수 있을 때, 위대해지는 것이죠.


요즘 저는 참 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가 아니라 큰 교회의 목회자로 알아보는 사람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대우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특별대우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끊임없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은 그를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노예는 자기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노예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하인과도 다릅니다. 일을 해서 품삯을 받아도 그것도 주인의 것입니다. 물건을 빌려주고 사용료를 주인이 받듯이 노예의 품삯도 주인이 받습니다. 노예는 자신의 영광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롬 14:8). 그의 고백에서 그의 삶이 명백해지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보게 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 칭했을 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이 사도직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사역자인 아볼로, 실라, 바나바, 디모데 같은 이들을 사도라 칭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도란 예수님과 친히 동행을 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에게 주어진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엄밀하게 말해 바울을 ‘사도’라 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여러 번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다른 사도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아니요!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자신의 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사도직을 주장하는 이유는 출세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도직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이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직은 그에게 있어서 늘 ‘빚’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사도권을 주장해도 그가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늘 그 은혜를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그것을 은혜로 여긴다면, 그렇게 쉽게 받고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 은혜가 가슴에 사무쳐야 진정한 은혜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 사도 바울의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가 빚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니, 그 은혜를 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송구한 것입니다.  그는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사도가 아니라 그가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사도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당당함이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당당함’과 ‘겸손함’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제목이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입니다. 제목만으로도 그냥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미 이 책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기에. 엘리제 쉐핑, 한국이름 서서평으로 평생을 살았던 한 미국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17년의 사역을 마치고 첫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돌아올 때, 참 절망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찾아온 대공황으로 경제는 어려웠고, 더 이상 선교에 열정적이지 않은 교회 때문에 그녀는 빈곤하게 한국을 찾아와야 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인이라는 자존심도 선교사라는 자존심도 다 내려놓고, 한복에 고무신 신고, 꽁보리밥에 된장국 말아 먹으며 사역을 해야 했습니다. 영양실조로, 풍토병으로 시달리며 그녀가 해야 했던 것,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한센병 환자들, 아무도 돌보지 않아, 일제는 그들의 씨를 말리려고 불임시술을 결정하죠. 그녀는 그들을 데리고 서울로 찾아가 항거했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 줍니다. 그리고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의 애향원의 주춧돌을 놓죠. 그녀는 이 땅의 여인들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배운 것 없이 일찍 시집가 지질이도 고생하는, 아무런 인권도 없는 조선의 여인들.


그들을 위해 서서평은 학교를 세웠고, 간호사를 배출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학회를 세웠죠.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100년을 기념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섬길 수밖에 없었죠.

 

그의 ‘종’ 됨도 그의 ‘사도됨’도 “택정함”을 빼고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 혹은 그냥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종이 될 수도, 사도가 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의 삶을 살 때에는 종 되기보다는 자랑할 것이 많았고, 그의 인생의 목적은 사도됨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었죠.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심으로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열정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택하심을 받는 순간 그는 구별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도를 의미하는 희랍어 '하기오스'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별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바리새적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앙아메리카의 사카포악스틀라 아즈텍 족은 말하기를 "성도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엔곡 팅카 족은 말하기를 "성도는 하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코놉족은 성도의 특징에 대해 이르기를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한 소수 민족은 성도를 "거룩한 종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좀 특별하게 살게 하였습니다. 종으로 섬기며,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자신이 사도임을 주장하게 하는 그런 인생 말입니다.

 

전략적 열정
로마서 전체를 묵상하고 설교준비를 하면서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그의 열정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전략과 만난 열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렇게 로마에 가기를 원했을까요?
실제로 사도행전 27장부터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경험하기도 하고, 멜리데 섬에서는 독사에 물려 죽지 않자 놀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지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로마에 도착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기에 언제든지 그곳에 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헬라 철학도 공부하고, 당시의 학문에 뛰어난 사람이기에 로마에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은 열정이 있었지만, 정작 그곳에 가게 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던 때, 그리고 멋진 사역자의 모습으로 로마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좀 더 자세히 그가 로마에 가게 된 배경을 살펴보죠.

 

사도행전 2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있을 때, 총독 베스도를 통해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그렇게 미워하고 죽이려는 것을 보고는, 로마로 보내 가이사의 재판을 받게 해 달라는 바울의 요청을 수용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던 모습은 아닐지 모르지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에서 “우리의 열정” 때문에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참 신기하죠. 그렇게 많이 들었고, 가지려고 했었던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정의를 내려 봅니다.

“나의 열정과 하나님의 전략이 만날 때” 그것을 하나님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으며, 최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고 말입니다.우리가 열정을 가진다는 것은, 늘 우리의 머릿속에 계획도 존재한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었을까요? 바로 그가 가졌던 복음의 열정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당시 로마를 말할 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했는데,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즉 로마가 복음화된다는 것은 로마가 다스리는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도하며 부르짖었고, 복음을 증거 할 기회를 잡기 위해 연구했던 것이죠.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초창기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거나, 교육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우리나라에서 최초를 커피를 마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아마도 고종황제였을 것이라고 하지요. 당시에 ‘가배’라 불리는 차를 마시며 고종황제가 선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고종황제와 커피만 마셨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전략적인 방법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략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고통을 피해 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묻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그렇게 로마에 가고 싶었지만, 그의 전략과 열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앞서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준비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된 시간에 그를 로마로 보내시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처음 복음을 전하게 되는 신분은 “죄수”의 신분입니다.

로마서 1장 10절에 보면, “어떻게 하든지…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15절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죄수의 모습으로 쓰시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혹, 그렇게 한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그렇게 오래도록 준비했는데, 그곳에 그렇게 가기를 원했는데, 로마시민권도 있고, 공부도 했는데, 왜 죄수의 모습인가요? 아마도 처음 사도 바울의 생각과 열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스스로,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죄수가 돼서 보니까 알게 되죠.
이교도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논리적으로 복음을 전할 길은 죄수가 되는 길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는 법이 아주 발달되어 있었고, 논리적 수사학과 법정에서의 논리가 아주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아마 법정에서 사도바울은 가장 고위급의 인사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고, 그의 재능을 가장 확실하게 발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야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되었겠죠.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수로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을,


아마도 사도 바울이 먼저 로마에 갔다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거기서 그렇게 죽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다른 곳에서 사용하신 것은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훈련하시고 연단시키셔서 가장 확실하게 사용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전략이 있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되게 합니다. 단지 우리가 실망하는 것은 철저히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8절에서 그 유명한 고백을 한 것,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의 깨어짐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우리의 계획이 실패할 때 경험하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자란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한 번도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서 실패는 필연적인 신앙의 코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실패라 하지 않고 “연단”이라 하지요.

 

전략적 열정에서 연단의 과정 또한 필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고, 택함 받은 사도로 살아가는 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늘 계속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단지 복음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을 보세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복음에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담대해집니다. 왜냐하면, 복음 그 자체가 능력임을 믿기 때문이죠. 적어도 사도 바울의 열정은 그의 인생에서 자신의 계획을 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열정적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이죠.

 

지난주에 이선일 장로님이 청년부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많은 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갈 때, 보고할 만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하나님께 보고할 수 있나요? 당신의 열정이 하나님의 칭찬과 관심을 끌 만한 무엇인가요? 오늘도 우리는 한 자 한 자 우리 인생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열정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열정이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큰일을 꿈꾸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이기적 열정은 부끄러움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열정이 만날 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말입니다.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하나님의 가슴을 안고, “작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섬기는 인생이 “큰일”을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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