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

[스크랩] 간단하게 읽는 중국선교역사

수호천사1 2012. 10. 4. 11:39

간단하게 읽는 중국선교역사


1. 초기의 선교활동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13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매우 천천히 중국 땅에 뿌리를 내렸다. 초창기 세 번의 선교를 시도했다. 그래서 당시 네스토리안 기독인들(618-907), 원대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1271-1368), 그리고 明(1368-1644)과 淸(1644-1911)대의 예수교 선교사들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선교 노력들이 중국인들이 영적인 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 네스토리우스파의 첫 시도(618-907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당대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했던 왕조들 중 하나였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제국이 되었다.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와의 교역은 당의 보호 하에서 번창했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비단길을 따라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왔다. 군사력과 정치적 힘에 자신감이 있던 당의 왕실은 외국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종교를 묵인했으며 후원하기까지 했다.

외국의 예술과 음악 역시 환영을 받았다. 당시 황제 자신이 종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승인했다. 황제의 칙령으로 알로펜은 수도원 건축을 허락 받았고 포교 활동을 보장받았다. 당시 몇몇의 주요 도시들에 적어도 5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대체로 금욕주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대개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AD 84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외래 종교의 수도원, 사원, 그 밖의 모든 재산들이 몰수당하고, 당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본국과의 지원도 끊어지고, 중국인 지도자들을 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중국인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10세기경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2) 원조(元朝:1279-1368年)∼송(宋)의 그리스도인

1280년경 몽골족은 위대한 징기스칸의 영도하에 동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제국을 이룩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136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13세기 초 로마 카톨릭의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이러한 선교 활동들은 몽골 제국이 몰락하기까지 번영하였다.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했던 것에 주로 기인한다. 황제는 포고를 내려 모든 종교가 각기 나름대로 존중받을 것을 보장했다.

13세기 후반, 아득한 동방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마르코 폴로와 그의 삼촌들의 놀라운 중국 여행으로 인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266년 그들이 첫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교황에게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에 헌신한 사람들을 최소한 100명 이상 중국으로 보내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인 몬테 코르비노 출신의 요한(John of Monte Corvino: 1247- 1328)을 중국에 보내고, 계속해서 교황은 로마 카톨릭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을 보내 수 천 명을 회개시켰다.

1305년에 6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뻬이징에서 성당을 셋이나 세웠다. 송의 지도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와 프란체스코파 신자들을 추방하였고 또한 친 몽골파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으로 그 종교의 개종자들을 몰아내었다.

(3) 명과 청대의 로마 가톨릭 선교

1582년에 드디어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 내에서의 예수회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의 전략은 지식 계층의 호응을 얻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층계급의 복음화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릿치는 천문학, 수학 시계수리, 지도 제작 기술로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베이징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 교회의 기반이 점차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중국의 기독교 문학이 발전해 갔다.

마침내 릿치는 2천여 명의 교인들과 기독교를 도와준 많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남겨 둔 채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중국에 기독교회와 선교의 견고한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잦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계속 뿌리를 내렸다. 청의 위대한 황제 강희제는 자신을 개인 교수하고 고위 관리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베르비스트를 초빙했다. 1692년에 황제인 강희제는 기독교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1674년 첫 번째 중국인 성직자인 로웬 챠오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양한 교단의 중국에서의 성공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논쟁"은 일부 특정의 의식 즉, 조상숭배에 참석의 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하나님의 이란 용어를 중국식으로 예수회는 대개 "상제(上帝)"나 "천(天)"을 사용했던 반면, 도미니크파 선교사들은 "천주(天主)"가 하나님의 유일한 정확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례논쟁은 1645부터 1745년까지 계속된다. 이에 반작용으로 황제인 강희제는 릿치에 의해 세워진 강령에 위배된 선교사들은 남아 있을 수 있었고, 후계자인 건륭제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포고를 내림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되거나 은신했다. 서양 및 중국인 성직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다. 신자들은 순교 당하고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2. 기독교 선교 활동 역사

1807년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모리슨이 마카오에 도착한 후부터 1950-51년 사이에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추방되기까지 개신교의 업적에 대한 기록은 아주 복잡하다. 개신교 선교의 시기를 다음의 4시대로 나눌 수 있다.
준비기(1807-1842), 개척기(1843-1869), 확장기(1861-1900), 발전기(1901-1949).

(1) 준비기(1807-1842)

19세기 중국의 힘이 쇠퇴해 가던 반면, 서양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급속 성장해 갔다.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다른 서양 국가 상인들이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그전에 이루어 졌던 독점 체제를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청조는 밀(William Milne)과 프러시아 출신의 칼 구츨라프(Karl Gutzlaff), 미국 출신의 피터파커(peter Paker)와 선교사역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들은 중국어를 배웠고,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으며,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를 출판, 배포사역을 감당했다.

최초의 중국인 목사는 리안 아파(Liang Ah-Fa)로 목사 겸 복음 전도자였다. 홍콩은 99년 동안 영국에게 양도됨으로 선교회들은 선교사들을 동남 아시아에서 중국의 5개 항구 도시들과 홍콩으로 재배치시켰다. 그것에서 개신교 선교회들은 복음 전파, 교육사업, 의료 봉사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그들의 사역을 전개해 갔다.

그러나 불평등 조약들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선교는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 기간 중 선교 노력의 간접적인 결과 중 하나로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이 일어났다. 우상으로 가득 차고 부패한 중국을 정화시키라는 상제(上帝)의 소명을 받았다고 한 홍시우취엔(Hong Xiuquan)이 천국(天國)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 난은 급히 군대를 조직해 청의 군대를 지원함으로 무산되었다. 선교사들이 이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서구 국가들을 지지했으며 만주 왕조를 도와주었다. 태평군들은 실제로 만주인들 보다도 외국인들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중국이 서양과의 교역하는 것과 여행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이길 바랬다. 그들은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 순수한 중국식 기독교운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2) 확장기(1861-1900)

태평천국의 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서양의 침략이 계속되는 상황하에 1861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으로 중국 본토에서 땅을 소유하고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인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한 것이다. 만주 정부가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지도하에 있던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위시한 다양한 선교회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시기의 선교 활동은 일반 교육과 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소개, 의료 및 사회적 봉사와 사회개혁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특징 지워 진다. 선교사들은 아편, 노름, 매춘 및 전족(纏足)을 없애려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또한 여성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벌이는 데에도 한 몫을 감당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구제의 손길을 폈다. 사회 봉사에 그들의 사역을 더욱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영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의 중국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비근한 예로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확장시키려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조종당했다. 복음 전파의 결과들을 급히 얻으려는 일부 선교사들의 조급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중국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둔감한 태도와 도전적인 방법을 서슴치 않고 사용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중국인들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반기독교 폭동이 양조우(楊洲:1868)와 티엔지(天津:1870)에서 발생하였고, 그곳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선교사들은 엄청난 손실을 치렀다.

1900명 이상의 중국인 개신교 그리스도인들, 186명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살해되었다. 3만 명 이상의 중국인 카톨릭 교인들과 47명의 외국인 성직자 및 수녀들 역시 살해당했다. 세력가들은 외세를 중국 밖으로 몰아내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반제국주의 반서구운동은 중국의 기독교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선교 사업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90년경 선교 운동의 확장기 말엽에는 중국인 개종자의 수는 112,808명으로 늘어났다. 2,00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1600여명의 중국인 사역자들이 중국에서 봉사했다. 중국 교회는 크기와 질 양면에서 성장했다. 복음은 거의 중국의 모든 지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문화와 사회의 주류에 침투되지 못한 채 수많은 중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외국 기관으로 비춰졌다.

(3) 발전기(1900-1949)

중국 관리들과 빈곤한 농민들의 격분으로 인하여 1900년에 의화단 사건(The Boxer Rebellion)이 발생했다. 태평 천국의 난은 의화단 사건을 또한 지원했는데, 외국 8개국의 군대가 베이징에서 중국 반란군들을 몰아냄으로 의화단 사건은 종결을 맺었다. 의화단사건으로 서구 열강들의 세력을 증가시켰으며, 부상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불만과 적의의 초점을 만주 왕실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중국은 또다시 굴복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큰 배상을 요구했으며, 만주정부는 중국의 내부 및 외부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의화단 사건으로 반성과 함께 선교사들과 본토의 중국인 동역자들과 평등한 동반자 의식을 발전시켜 나갔고, 기독교가 중국의 변화하는 상황과 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중국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고, 독립 교회의수는 급속하게 증가되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확신과 소망을 갈구했다. 수많은 중국인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

1911년 쑨원이 이끄는 공화국 혁명은 쇠약한 만주 왕정을 와해시켰다. 손문의 지도하에 있던 혁명 운동은 점차 대중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국민당만이 명분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상호간에 피를 부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과학적인 지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기독교 문명으로 간주되었던 서구를 본받으려든 중국 지식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베르샤이유 조약으로 중국에서의 제국주의의 통치가 종식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독일이 중국에서 소유했던 지역을 일본에게 할양 받도록 조인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추이로 중국의 지식인들을 격분시켰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직시하게 되었다. 베르샤이유 조약에 항의하는 시위가 1919년 5월4일 에 일어나고, 이를 기점으로 몇몇 지도자들은 서구의 자유주의로부터 등을 돌려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서 실행 가능한 혁명 이념과 전략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적인 위기를 견디며 중국의 민족주의가 중국적인 동일성의 기반으로써 유교문화를 대치하긴 했으나 중국을 하나로 묶어주는데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한발 앞서서 중국의 문제들을 무신론적 유물론의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이러한 이념적인 공백을 메워 버렸다.

마오쩌뚱은 비록 1920년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었지만, 그 역시 마르크스주의에로의 유사한 지적인 전향을 경험했다. 국민당과의 내전 와중에 일본은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그들의 야욕을 넓혀 갔다. 중일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마오쩌뚱의 게릴라전 이론은 1938년 - 1940년 사이에 벌어진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성공적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긍정적인 개혁들로 인하여 그들은 점점 더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해 갔다. 1946년 미국의 마샬 장군은 연합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나, 공산당과 국민당 양자는 권력에 대한 그들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내란이 일어났고, 1949년 10월 1일에 제1회 인민 정치 자문 평의회를 개최하였고, 10월1일 마오쩌뚱은 베이징 자금성의 천안문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3. 근대사와 기독교

(1) 교회에 대한 통제와 박해가 증가된 시기

1949-1966년의 기간 중, 교회는 일정 한도 내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압력은 부단히 증가되어 갔다. 1950년, 총리 죠우언라이의 영도 하에서, "그리스도인 선언(Christian Manifesto)"에 서명한다. 그 목적은, 교회를 외국과의 유대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음 해에 결성할 삼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었다.

1950년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 목사와 사역자들은 삼자회에 협조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결국 체포되어 수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1979년 후에야 비로소 복권, 석방되었다. 시골 교회는 이미 1950-1953년에 토지 개혁 운동 감행될 때 폐쇄되었다. 1958년 말기, 원래 64개였던 북경의 교회는 네 곳만이 개방되었고, 200개의 상해 교회는 23개로 줄었으며, 기타 다른 도시에도 1-4개밖에 남지 않는다.

(2) 문화혁명-전면적 종교 탄압

문화 대혁명은 1966년 5월에 젊은이들이 홍위병 집단을 구성하여 사대구습을 소멸하고, 구 지식인, 전문직업인, 종교인 그리고 마오쩌뚱과 좌파에 대해 반대할 우려가 있는 정부와 당의 지도자 등을 공격하였다. 대규모의 유혈극과 엄청난 수난이 있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박해와 홍위병과 노동자들 간의 경쟁적인 파벌로 인한 싸움의 와중에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시무시한 수난을 겪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혹독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이때 극좌 분자들은 당과 종교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1965년에는 극좌파가 득세하는데, 문혁 기간중의 박해는, 무력으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신념의 자연스런 결과로 치닫는다. 모든 종교 단체 건물은 훼손되고 폐쇄되었다. 종교 서적 및 상징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어떠한 종교적 신앙의 표현-십자가를 다는 것까지-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수색되었으며 성경 및 다른 여러 책들은 모두 몰수되어 잿더미가 되고,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노역에 처해졌다. 어떤 이들은 혹형을 받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기도 했다.

(3) 비교적 완화된 정책의 실시

1977년부터 현재까지는 고무적인 양상, 문혁 기간에 극좌 분자에 의해 폐쇄되었던 종교 사무국은, 1977년초에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받아 일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해에, 수년간 잠적했던 "애국" 종교 지도자들이 정부 기관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1978년 3월 다시금 조직되었다. 그 당시 정치적인 통제는 완화되어, 공산당은 빼이징 민주 벽을 개방할 정도로 상당한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 각 도시의 재개방된 몇몇 교회들마다 사람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청년이었다. 도시와 농촌에서는 모두 가정 교회가 급성장하여 전도하거나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문혁의 정책이 급전되었으므로, 당 간부들도 "극좌 분자"로 몰릴까봐,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보고도 종종 못 본 척했다. 그 결과, 중국은 종교적 부흥 같은 것을 겪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더불어 거짓 종교인 마오져뚱 종교에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미신이 다시 활개를 쳤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모여들었다. 이때 사찰과 회교 사원도 다시 개방되었다.

2] 중국의 기독교 상황

중국 정부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입각한 것으로, 19세기의 과학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종교란 인류의 구시대적 유물로서 그것이 혁명 과정을 저지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며 물질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없으며 사후에는 어떤 세계도 없다. 레닌주의는 이렇게 하여 독특한 중국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방면에 있어서 마오져뚱은, 철저히 공산주의 의 기본 교조에 의거한다. 마오져뚱의 천재성은 서양의 사상 체계를 중국 문화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마오져뚱에게 있어서 중국은, "인간의 왕국"이고. "우리의 신은 바로 무수한 중국 인민들이다."라고 말한다.

떵샤오핑의 경제 개혁 정책이, 마오져뚱 말년 정책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해도 그의 기본 사상은 여전히 공산주의다. 1985년 3월에 발표한 담화문에서 중국 현대화의 궁극적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1982년 당과 정부는 현황을 검토한 후 두 개의 문서를 반포하는데, "19호 문서", "국민 헌법"성명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보호는 종교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기본정책이다. 이것은 장기적 정책으로, 장차 종교가 자연히 소실될 때까지 계속 집행될 정책이다. 종교 자유의 정책은 다만 현재의 전략일 뿐이며 종교는 장차 자연히 소멸될 것이니, 공산주의의 최종 목표와 상충되지 않는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유해한 것이며, 국가의 진정한 통치권은 무신론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관점은 현재도 변하지 않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애국" 종교 단체를 승인함으로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8개의 국민 애국 종교 단체를 승인했고, 그중 다섯 개 단체는 기독교와 천주교에 속한다. 공산당은 이 단체들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각 급 애국 종교 단체의 기본 임무는, 정부에 협조하여 종교 신앙 자유의 정책을 실행하는 가운데 종교인들의 부단한 애국적·사회주의적 각성을 도모하며, 종교계의 합법적 권익을 대표하며, 종교인들이 정상적 종교 활동을 하도록 조직 및 지도하고, 종교와 관련된 공작을 잘 처리토록 한다. 모든 애국 종교 단체는 당과 정부의 영도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전도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9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입교시키거나, 사찰로 보내 중이 되게 하거나 종교 경전을 학습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1983년 12월, 「중국 청년보」는 청소년의 무신론 교육 강화를 호소했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미신의 해악과 종교의 악영향"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삼자교회의 예배 시에 어린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실제상으로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들은 출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출석을 금지시키면, 삼자 교회에 나오던 부모들이 가정 교회로 떠나갈 것임을 교회 지도자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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