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패러다임의 전환과 교회문화 개혁운동

수호천사1 2012. 9. 23. 15:10

패러다임의 전환과 교회문화 개혁운동

 

이의용 (한국교회연구소 소장)

 

 

사도행전 9장에는 사울의 개종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은 중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되고, 다마스쿠스에 가서야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을 뜬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후 평생 주님의 사도로서 헌신한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떼어낸 후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사건은 참으로 신비롭다. 그 비늘 같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굳은 생각은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은 따뜻하고 유연하지만 시체는 차갑고 뻣뻣하다. 사람의 몸 가운데에서도 뒤꿈치같이 굳은살은 사실상 죽은 살이어서 감각이 별로 없다. 그러나 겨드랑이 같은 곳은 매우 민감하다. 자주 사용하질 않아서이다. 사람의 생각도 간지럼을 탈 정도로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자주 사용하다 보면 굳어버린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전문가 중에 바보가 많다. 생각이 굳어지면 공식(公式)이 된다. 하루살이는 사실 여러 날 사는데도 하루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 기도를 할 때에는 무조건 눈을 감아야 한다는 생각, 밥은 반드시 오른손으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굳은 생각이다. 2+3은 5라는 생각도 굳은 생각이다. 2+3은 1+4도 되고, 6-1도 되고, 5 1도 되고, 10 2도 된다. 뿐만 아니라 1.1+3.9도 되고 1.11+3.89도 된다. 2+3의 답은 무한대이다. 번지점프의 줄이 고무줄이 아닌 밧줄이라고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007가방 안에 칸막이를 만들어 놓고 물건을 담아보자. 안은 텅 비었어도 물건들을 많이 넣을 수가 없을 것이다. 보자기라면 어떻겠는가?

굳은 생각이 공식(公式)이다. '공식'이라는 이름 하에 아무런 검토 없이 '진리'로 수용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굳어진 생각이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송장같이 차갑고 뻣뻣하다. 유연성이 없고 느낌도 없다. 고정관념은 원래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영향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교육, 습관, 관행 경험, 형식, 규칙, 논리, 공식 같은 것들이 사람의 생각을 굳어버리게 하는 것 같다. 잘못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다. 교육이란 생각을 유연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우리 나라의 청소년 교육은 오히려 공식을 주입시키는 경향이 있어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종교교육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가두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사울은 당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인 학식, 율법, 교리가 진리를 밝혀주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비늘(고정관념)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고정관념에 빠지면 새로워질 수 없다.

고정관념에 빠지면 사물이나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왜곡, 축소, 확대, 변질, 변색, 날조된 것을 그대로 맹신하게 된다. 절대적인 가치와 상대적인 가치, 본질과 비본질, 주(主)와 객(客), 주(主)와 종(從)을 혼동하게 된다. 고정관념에 빠지면 성경 말씀보다 교단의 헌법을 더 중시하게 된다. 젊은 집사가 나이 많은 장로에게 성경책을 던져 장로가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정작 자기에게는 잘 안 보이는 차 뒤꽁무니에 '내 탓이오' 스티커들을 달고 다닌다. 술 담배 끊고 교회 나오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교인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본다. 십일조를 하면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고 믿는다. 우리 나라 30대 기업 소유주 가운데 십일조 헌금을 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작은 교회가 추운 겨울날 텐트를 치고 떨며 예배를 드려도 자기네끼리 넓고 따뜻한 공간에서 모른 척하고 예배를 드린다.

어느 금융기관에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여직원을 위협했다. 용감한 여직원이 목숨을 걸고 강도를 잡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강도를 잡은 여직원은 자기 생명을 경시했고, 여직원을 칼로 찌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잡힌 강도는 사실상 남의 생명을 중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수(死守)해야 할 일과 포기해야 일을 구분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고정 관념에 빠지면 사물이나 현상을 다각적이고 유연하게 균형적으로 보지 못한다. 편견이나 선입관, 수직적 사고, 흑백 논리적 사고, 부정적 사고, 권위주의의 지배를 받게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의 넓은 세상을 모르고,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 고정관념에 빠지면 더 넓고 더 깊고 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다.

고정관념에 빠지면 주일엔 병원에도 안 간다. 주일예배는 오전 11시만 진짜라고 믿고, 오후 3시에 드리는 예배는 모두 가짜라고 확신한다. 다리미에 빵을 구워 먹을 수 없고, 설교 시간에 절대로 질문을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신과 다른 것은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교회 일은 성스럽고 회사나 가정 일은 속되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믿는다. 기껏 생각해 내는 것이 '마른 수건의 물 짜기'이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반대로 읽으면 '살자'가 되듯 동전의 모습이 반드시 원형만은 아니다. 사면이 거울인 방에 선 나의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고정관념에 빠지면 변화를 거부한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습관과 전통 같은 걸 붙잡고 버티다가 푹 익어버리고 만다. 변화를 거부하면, 새로운 발견을 할 수가 없으며, 새로운 피조물로 변신을 할 수가 없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가 없다.

문제의식을 갖고 처음 보듯 새롭게 보자

지금 우리 나라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교회 안팎으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상대적인 가치의 고정관념들을 맹신하고 있으며, 어떠한 문제의식도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을 떼어내려면 모든 사물과 현상을 처음 보듯 새롭게 봐야 한다. 남들이 만든 공식을 덮어놓고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왜 그럴까?",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꼭 이래야 하나?", "지금 이대로 좋은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야 고정관념을 발견할 수 있고, 고정관념의 비늘을 떼어낼 수 있다. 문제의식이야말로 고정관념을 깨는 열쇠이다.

자신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개인에게서 진정한 회심을 기대할 수가 없고, 구성원들이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조직에서 개선과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미 정신적인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문제의식을 가진 조직과 개인만이 살아남아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의식에 충만할 때 소망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나라 교회는 교인들이 문제의식을 갖는 걸 '비판'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의식은 비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열렬한 문제의식으로,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을 떼어내자.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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