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학과 종교다원주의
김희백 교수
종교 다원주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 윤리적 적합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역사적 상대주의, 종교간의 대화와 공존의 원리, 그리고 인간의 해방과 발전에의 추구라고 하는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절대적 신념 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듯이 다른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의 신념 체계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여러 종교들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원리를 모색하며, 종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종교간의 대화 운동과 이해의 차원에서 논하여진다.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종교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해야 하며, 타종교와 대화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세속화 사회에 처해 있는 종교들의 현실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현대의 세속화된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어느 특정 종교가 내세우는 절대주의적인 교리 체계나 우월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기보다, 각 종교들을 공정하고 현상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종교 다원주의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근거를 두고 종교현상학과 종교철학, 그리고 종교신학의 학문적 맥락에서 논의된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라는 학문적 경향이 나오게 된 배경은 비교종교학의 발달로부터 연원한다고 볼 수 있는데, 먼저 그 영향을 끼친 학자들에 대해 살펴본다.
제1항 비교종교학적 이론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프리드리히 쉴라이어마허(F.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를 '절대 의존(絶對 依存)의 감정'으로 규정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이성이나 의지보다도 주관적 감정(主觀的 感情)이나 직관(直觀)을 중시하여 종교적 상대주의(宗敎的 相對主義)에로의 길을 연 선구자였다.
그리고 현대 종교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막스 뮐러(F.Max Müller, 1823∼1900)는 언어들의 비교연구를 통해 종교의 기원을 밝히고자 했으며, 동양의 종교 경전들을 대부분 영어로 번역하여 51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집대성한 『동방 성전』(東方 聖典)은 19세기에 이룩한 학문의 최대 기념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으며, 유럽에 동양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열을 일으켰다. 그는 1870년 2월과 3월에 영국의 왕립 연구소에서 행한 4회의 강연을 1873년에 출간하였는데, 이 책의 제목을 처음으로 『종교학 입문』(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종교철학과 신학과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분명히 구별되는 별도의 학문으로서 '종교학'(宗敎學)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종교를 모른다'는 원칙 하에 종교들의 신화와 메시지들을 언어학적, 역사적으로 비교하여 객관적인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의 성립을 주창하였다.
독일의 종교사학자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사를 보고, 계시나 종교 역사는 절대자를 향해 가는 점진 운동으로 보았다. 그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그것의 반대 사조들』(1894)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역사적으로 상대성을 띨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절대성과 종교사』(1902)라는 책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진리성에 대해선 주관적 확신으로서의 절대성을 갖는 것이지 객관적인 논증의 차원과는 다른 별도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판단은 불가능한 것이며 세계의 큰 종교들과 그리스도교는 개종이나 변형보다는 상호 이해와 합의의 차원에서 상호 평행적으로 발전될 것으로 보면서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는 쉴라이어마허가 주장한 종교체험의 직관성을 받아들여, 종교체험의 비합리적(irrational) 요소와 성스러움(das Heilige)의 의미를 밝히고 종교를 주정주의(主情主義)적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옷토는 종교에는 명확한 개념적 이해나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irrational) 요소가 확실히 있으며, 그것을 체험하는 것을 '누멘적 감정'(Das numinöse Gefühl)이라고 부르고 있다. 누멘(Numen)이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대상으로서 신성한 것이면서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옷토의 이러한 입장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합리주의적 영향 속에 교리와 신학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을 탈피하고, 종교체험이란 결코 다른 어떤 체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종교체험에는 '성스러운 것'(the Holy, the Sacred)의 자기 현현(顯現)을 감지하고 느낄 수 있는 '누멘적 감각'(sensus numinis)이 선험적(a priori) 능력으로 인간 내면에 공통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를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리고 요아킴 바하(Joachim Wach, 1898∼1955)는 종교경험을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하며 종교 경험의 보편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Eliade, 1907∼1986)는 각 종교 안에서 체험되는 종교 경험을 성현(hierophany) 즉 '거룩함(the sacred)에 대한 경험'으로 해석하면서 종교체험의 유형을 종교 형태론적으로 대등하게 다루고 있다.
이처럼 종교들을 객관적으로 비교하여 종교의 본질을 밝히려는 종교학의 방법론은 종교의 교리와 윤리들에 대한 우열의 판단을 중지하거나 보류한다. 그리고 종교들을 현상적으로 고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종교들의 다원성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2항 구원 패러다임의 전환
그러면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 다원주의 이론을 제창하고 있는 학자들을 살펴본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각 학자들의 이론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중요 사상만 개괄적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그 이론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제시된 참고 서적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종교 다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의 하나는 구원 체험의 패러다임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은 현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을 해명하는 개념으로서 토마스 쿤(Thomas S.Kuhn)에 의하면 '일정한 공동체의 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의 총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스 큉도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여섯 가지의 작은 신학적 패러다임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즉 1) 원시 그리스도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유형, 2) 고대 그리스적 그리스도교 유형, 3) 중세 로마 가톨릭적 유형, 4) 종교개혁의 개신교적 유형, 5) 계몽주의 시대의 근대 그리스도교 유형, 6) 현대의 에큐메니칼적인 그리스도교 유형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학적 패러다임의 유형들은 당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의 종교들은 각각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기에 그러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구원 체험을 이해하는 구조(패러다임)는 각각 그 시간과 장소의 산물이기에 다양할 수밖에 없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부분과 전체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부분은 전체를 계시(啓示)하는 창이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계의 고등 종교들은 나름대로 하느님을 참으로 체험하면서 구원을 경험하지만, 어느 한 종교가 참 하느님의 모습을 독점적으로 남김없이 체험하고 구원을 독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들은 서로 대화하면서 '삶의 자리'와 '구원 체험의 패러다임'의 다양성을 해석학적 순환과 지평 융합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종교적 체험을 나눔으로서 상호 발전과 성숙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특히 문화와 종교의 긴밀한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면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은 여러 종교들에 작용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에 대해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칼 바르트식의 케리그마 신학과는 달리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을 인간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묻고 답변하는 변증 신학(Apologetic Theology)적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종교나 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 관심'(窮極的 關心)을 갖도록 하는데 있으며, 그리스도교인은 이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그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말로 '존재 자체'(Being-itself)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와 문화를 영원한 진리와 상황의 변증법적 관계로 인식하면서 창조적인 상호 변화의 필요성을 중시했으며, '모든 종교들 안에는 계시하고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하며 종교―문화 신학(宗敎 文化 神學)을 주장하였다.
폴 니터(Paul Knitter)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그리스도교가 다원 사회 속에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종교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신 중심적 세계관(神中心的 世界觀)으로 전환하여야 한다고 하며, 그 근거로서는 예수의 유일회성과 배타적 중보자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방법과는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신약성서에서 고백되는 예수께 대한 그리스도적 배타적 언명은 당시 로마 시대의 박해와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절박한 처신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현대 민주주의적 다원 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배타적 유일성을 고백하지 않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폴 니터는 또한 예수 자신이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으며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였지만, 초대 교회가 예수를 유일한 구원자요 계시자로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하느님과 하느님을 특수하게 계시하는 예수를 구분해야 하며,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이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계시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니터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삶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 중심으로 궁극적 관심을 옮겨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참 인간이 되는 길과 참 평화를 실현하는 관점에서 종교간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터는 자신이 믿는 종교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종교 해방신학'(宗敎 解放神學)적 관점에서 인간의 복지와 평화 실천을 위한 종교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간 대화에서는 자기 종교의 교리적 입장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것, 즉 하느님의 뜻, 인간 복지와 인류 평화를 위한 일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모범에 있어서 고유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Smith, 1916∼)는 캐나다 출신의 미국 종교학자로서 이슬람교 전문가이다. 그는 여러 종교들에게서 경전·제도·의례·교리 체계·관습 등 과거로부터 전승되는 축적적 종교 전통(accumulative traditions)과 '주의'(-ism)로 명명된 종교의 물상화(物像化, reification) 현상을 제거하고, 사랑·경외심·헌신 등과 같은 '신앙'(faith)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종교인들이 각각의 종교 안에서 고유하고 살아 있는 신앙 체험을 하고 있는 공동성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즉 이기적 존재로부터 이타적 존재로의 변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 자기 종교에의 헌신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개방성, 봉사 정신, 이러한 종교적 헌신은 상호간에 존중해야 하며, 모든 종교의 목표와 종착점은 신(神)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축적적 전통과 신앙과의 상호 영향과 순환 관계 속에서 영위되는 인격적(人格的)인 삶의 질을 종교로 보면서 타종교인의 입장을 '신앙'(信仰)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주장하는 '인격주의적 다원주의'(Personalistic pluralism)를 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신앙을 초월에 응답할 수 있는 인격적 바탕으로 보고 개인의 성향에 따라 역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인이 동의할 수 있는, 신앙이 가진 심오함과 다양성을 드러내는 '세계 신학'(世界 神學)의 구축을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 신학이란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신앙을 연구함으로써 세계의 모든 신앙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을 말한다.
영국의 신학자 존 힉(John Hick, 1922∼)은 에른스트 트뢸치의 영향을 받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한 분뿐이며 모든 종교는 각기 다른 역사적, 문화적 전통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문화 전통이 다양하듯이 종교도 다양한 형태로 이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며, 현상적으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존 힉이 말하는 '하느님'은 그리스도 교인에게는 '하느님'이며, 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라마' 혹은 '크리쉬나'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름은 다양하지만 궁극적 실재인 신(神)을 말한다. 존 힉은 인간이 현상 세계에서는 하느님에 대해 '∼으로 체험'(experiencing as ∼)하므로 세계의 종교현상의 실상을 궁극적으로 규명하여 실재 자체이신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와의 관계로 탐구하는 '철학적 다원주의'(Philosophical pluralism)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힉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배타적인 신학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신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존 힉은 신학의 패러다임이 종교 다원 현상을 맞아 종래의 그리스도교 중심적, 혹은 예수 중심적인 모델은 타종교와 대화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패러다임이므로 신앙의 보편적 모델인 신 중심적 모델로 패러다임의 전이(轉移)가 필요한데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하였다. 종교 다원 상황에 대해 언급할 때 많은 빈도 수를 가지고 인용되는 이 말은 신학적 사고의 변환을 말한다. 즉 중세 시대에 지구 중심적 천동설(géocentrisme) 입각한 사고방식인 프톨레마이오스(Klaudius Ptole- maios, 90∼168년경)적 사고로부터, 태양중심적 지동설(héliocentris- me)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Kopernikus, 1473∼1543)적 사고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영역에서도 과거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종교들의 가치와 순위를 결정하던 사고방식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제종교들이 신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한다는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을 말한다. 그리하여 존 힉은 예수 그리스도교의 신성과 육화사건을 신화적 이야기로 전제하여 이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
인도의 가톨릭 신학자인 레이몬드 파니카(Raymond Panikkar)는 힌두교 전문가이다. 그의 부친은 인도인으로서 힌두교인이며, 그의 모친은 스페인이며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힌두교라는 두 종교 전통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는데 그의 사상은 『힌두교 안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라는 작품 속에서 잘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힌두교 안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포괄주의적 구원관을 펴고 있다. 그러나 그 후 17년이 지난 후 같은 제목으로 뉴욕에서 출간한 책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우월성을 대폭 수정하며 종교 다원주의론을 펴고 있다. 그는 종교간의 우열을 비교할 수 없는 이유로서 '언어'적 모델을 들고 있다. 즉 한가지 언어를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듯이, 하나의 종교로도 신심 행위와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종교간의 대화는 동화(同化)나 대치(代置)가 아니라 상호 수정(mutual fecun- dation)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평행주의(平行主義)와 환원주의(還元主義)를 피하고 있다. 그리고 파니카는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를 구분하며, 그리스도는 역사에 한정된 인물인 예수 안에서만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다른 종교의 구원적 인물에게서도 그리스도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하며 구원자 그리스도의 다원성을 주장한다. 그는 보편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의 예수 이외에도 힌두교의 라마(Rama), 크리쉬나(Krishna), 불교의 붓다(Buddha), 이슬람교의 무함마드(Muhammad) 등의 역사적 이름으로도 나타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나자렛 예수를 통해 실현된 그리스도 신앙을 성실하게 살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과 대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재와 행복을 추구하고 불행과 갈등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느님을 그리스도인만이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은 타종교를 믿는 이들을 이해하고 함께 인간 구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탠리 사마르타(S.Samartha)는 타종교와의 대화적 접근법을 강조한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인이 헌신해야 할 대상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역설하였다.
존 캅(John Cobb)은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견지하면서도 타종교와 만나 상호 변혁할 것을 주장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변혁적인 다원주의'(Transformational pluralism)을 제창하면서 신 중심적 다원주의를 비판한다.
한편, 한국의 감리교 소속 변선환 목사도 한국 개신교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풍토에서 타종교인들의 구원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종교간의 벽을 넘어 대화를 시도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선구자였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표명한 타종교에 대한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입장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개신교계에 심도 있게 소개하였으며,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그리스도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과 타종교 안에서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하였고, 1980년대에는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과 같은 이론에 보조를 같이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은 '한국 기독교 100년 기념 신학과 대회'(1984.10.10∼13)에서 '타종교와 신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나타난다. 그는 이 발표 이전까지의 자신을 가톨릭의 포괄적 성취론과 같은 노선에 있었다고 규정하고 자신은 이제 종교 다원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감리교 신학대학 학장까지 역임한 그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의문시하며 상대성을 주장하고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다가 1991년 10월에 감리교단으로부터 홍정수 목사와 함께 출교 처분을 당하는 불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아시아에서도 서구 중심적인 신학을 탈피하여 아시아의 독특한 학이 전개되기를 주장하고 있는데, 스리랑카의 발라수리야(T. Balasuriya)와 피어리스(A.Pieris, 1934∼), 일본의 고야마(K.Koyama)와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의 '불교적 신학' 그리고 타이완의 송천성(宋泉盛, C.S.Song)이 전개하고 있는 '아시아의 상황 신학'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특히 과거의 전통적 그리스도교는 서구 중심적이며 우월적인 사고 방식에 근거하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자세를 취하였으므로 타종교의 전통적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다원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교리들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기에 아시아인은 아시아의 상황에서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된 토착화 신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절대 우월주의적인 사고를 버리고 타종교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에서도 동양 종교를 연구하고 대화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 독일 출신 예수회 신학자인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 1931∼)는 동양의 대승불교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요 주제로 삼아 '자기 비움의 신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제3항 자유 민주주의적 요청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적 경향은 단순히 종교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신을 숭배하고 있으며 구원을 보장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종교현상은 다양하게 나타남을 인정해야 하며, 종교의 제도나 믿음 체계들은 종교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져야 하며, 종교 그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종교학자 헤롤드 카워드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의 각 종교가 다종교 현상의 도전에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나서 다음 세 가지 원리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다종교 현상은 하나[一]가 여럿[多]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논리이며, 초월적 실재가 다양한 종교들로 현상화된다고 보는 논리로 통할 때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각 종교가 갖는 특수한 경험들의 도구적 가치(道具的 價値)를 일반적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즉 종교는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갖기에 초월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길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에 있어서 붓다의 가르침[法], 규율[律], 승단[僧] 등은 고해(苦海)를 건너 열반(涅槃)의 피안으로 건너게 하는 나룻배로서 일단 건넌 다음에는 버려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 소승 불교는 그 나룻배로, 혼자 건너가는 것이며, 대승불교는 그 나룻배로 여럿이 함께 건너가는 도구이다. 힌두교에 있어서도 '베다'경과 구루, 아슈람, 요기 등이 필요한 도구이지만 일단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면 버리도록 가르친다. 여기서 베다는 브라만에 이르게 하는 '사다리'로서의 도구로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신학, 영성, 기도, 찬송, 성사, 교회 공동체 등은 하느님께 응답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하느님을 알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종교는 결국 '하나의 실재'에 이르기 위한 도구적 수단의 통합체로서 이해되며, 각각 상이한 종교 전통들은 불변의 진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실재 자체'에 이르기 위한 여러 길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종교의 형식들을 절대화할 때 종교적 갈등과 분쟁이 야기된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타종교의 영성에 대한 타당성을 자기의 선험적 기준(先驗的 基準)에다 맞추고 투사(投射)하든지 환원(還元)하여 판단한다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의 경우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포괄주의적 노선에 있던 파니카의 '힌두교의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 이슬람교에 있어서는 코란이 다른 모든 계시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 다원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현대 민주 사회의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평등, 자유, 공동선, 대화, 협력의 가치가 존중되고 있다. 이것은 다양성(多樣性)과 상대성(相對性)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현대 사회 속에서의 종교는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처럼 똑같은 규율과 조건이 적용되기에 어떤 특정 종교를 특별한 것으로 대하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종교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전제로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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