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는 선교의 싸이클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정)
행전15:36-18:22
바울 사도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 교회적 신앙생활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차 선교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들까지 잠잠케 하여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도 늘 상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일이 잘 풀릴 때 우리의 감정은 고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반대급부가 진행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라는 사실입니다.
고무되어 있던 사도 일행도 크게 작정을 세우고 2차 선교 여행을 출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처음 출발부터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2차 선교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어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이 점들을 염두하면서 사도의 2차 선교를 3가지 문제에서 접근하고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다툼의 문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음은 연속되는 고난의 문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끝으로 만남의 문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다툼, 고난, 만남과 늘상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인간 행위나 삶의 문제로 보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만이 우리의 제반 문제에 진정한 답이 있습니다. 이점들을 바로 할 때 진정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사도의 제2차 선교여행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다툼을 통해서 섭리하신 선교의 사이클이라는 점입니다.
1차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지도자들은 그 기분들을 그대로 간직하고서 2차 여행길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출발직전부터 일대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성경대로 표현하면 “심히 다투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 했고, 신앙이 철저하고, 예수님 사후 직후에 신앙의 열정이 오늘과 같지 않았던 시절, 그것도 평신도들도 아닌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단 말인가? 결코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늘과 같으면 너무나 흔한 일이기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기록은 항상 의문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단순히 다툼이라는 차원에서 처리하고 넘어간다면 영원한 해결점을 찾지 못합니다. 단순히 다툼의 차원에서 평가를 하게 되면 먼저는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싸움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식의 문제 해결은 한쪽은 잘했고 한 쪽은 못했다는 결론이 나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도 이러한 수준에서 평가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 오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누가 큰 사람이냐’ ‘누가 작은 사람이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이러한 단순히 다툼의 문제에 걸려 해석을 하니까 요즘 바나바가 옳고, 바울이 그르고, ‘바나바가 대인이고’, ‘바울은 소인이다’라는 식으로 이 부분을 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창 ‘바나바 성경공부’, ‘바나바 전도, 혹은 전도학교’ 등의 그룹들이 막 생성되어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망하는 길을 선택하는 그릇된 관점입니다. 왜인가? 이 사건 이후 바나바는 성경의 역사와 교회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이런 식의 신앙의 문제가 대두되는가? 바로 성경의 해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는, 즉 신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는 ‘자의적 해석’입니다. 이 다툼의 사건을 오늘의 시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 할 때 자의적 해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바나바적 관점입니다. 바나바는 이 다툼의 문제에서 한 역할은 ‘인정의 관점’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을 데러갈 것인가 데러가서는 안 된다’라는 관점을 ‘인정의 문제’로 풀었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서 4:10에 보면,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바나바는 오늘의 성경해석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결코 옳은 행동을 하였고, 대인이라는 점을 입증해주는 대상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조카였기에 매몰차게 대하지 않은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이 이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의적 해석의 배경은 인간중심, 즉 이성이 주도하는 임의적인 해석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깔리는 바탕이 무엇인가? 정서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보는 해석자의 신앙적 정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점입니다. 그 정서가 감성인가, 체험인가, 은사인가, 이론인가 등의 정서는 성경을 임의대로 해석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서가 신앙의 상태 또한 좌우 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있어서 바나바의 역할은 마가 문제를 인정적 차원에서 데러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부분은 오늘의 평가들은 자의적으로 풀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목적성취에 적용하는 말씀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해석을 오늘의 현실에 잘 맞추어 나가거나, 자신의 성향에 잘 맞추어서 풀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덮어버리는 것이 ‘이것도 능력이다’라고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성경해석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조명’하심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의 관점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마가의 영적 성숙의 차원에서 보았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적용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성령의 영감’ 차원입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을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의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사사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에 압도되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의 문제도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장면을 바라보는 오늘의 해석자들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 부분을 해석 하는가? 바로 ‘성령의 조명’하심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성경기록자들을 완전히 주도하셔서 성경저자들에게 있는 지식, 언어, 문화, 재능 등 기능들로 성경을 완전무결하게 기록하도록 감동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성경을 보는 독자들에게 성령이 밝히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여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도록 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자들이 이러한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해석을 하지 않고 이성중심의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서가 해석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그 정서가 은사입니까? 그 정서가 체험입니까? 그 정서가 논리입니까? 그 정서가 과학입니까? 그 정서가 관계입니까? 이것들이 해석의 바탕이 되어 자신들의 신앙의 배경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감동하심은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마가에 대한 바울의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성령의 감동하심에 의해서 마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러 갈 수 없다”라고 호되게 질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을 단순히 다툼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소인배 같은 기질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라면 이러한 책망과 지적을 받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진정으로 뉘우치고 바르게 자신을 만들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석 하는 줄 아십니까? 자신의 조카를 사랑으로 대한 바나바의 용납 때문에 훗날 마가가 변화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들을 보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소위 오늘로 보면 사회학적 성경해석, 정치학적 성경해석, 혹은 관계학적 성경해석으로 보는 관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을 바나바와 관계해서 풀어가도록 용납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이 사건 이후에 더 이상 성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책망을 받게 되고 그 책망으로 인하여 오히려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 사건 이후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4:11, “네가 속히 마가를 데러 와라, 저가 내 일에 유익한 자니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몬 1:24에 보니까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라고 바울 사도가 친히 그렇게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벧전5:13, 베드로사도께서 야고보를 소개할 때 “나의 아들 마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의 꾸지람을 받고 난 마가는 그 이후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 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마가 사건의 다툼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해석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바나바에다 엮어서 사랑으로 해석을 하니까 신앙의 책망을 받으면 그 시로 보따리 싸서는 옆집으로 옮겨가는 진풍경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왜 그러지요? ‘우리 목사님은 사랑이 없는 분이냐’ 하고 자신 행위에 스스로 면죄부를 줌으로 정당성을 깔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그럼 왜 바울 사도께서 이렇게 까지 했던 것입니까? 대충 넘어가면 될 것을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목사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까지 왜 이렇게 어렵게 문제를 풀어간 것입니까?
행전 12:12에 마가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옥에 갇혔고. 성도들 120명의 문도가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마가 요한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이 많은 수의 무리들이 모두 들어갈 정도인 것을 볼 때, 마가 요한의 집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마지막 성만찬을 하기 전에도 바로 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이 주로 모여 기도회나 집회, 그리고 교제를 나누던 장소가 바로 이 요한의 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마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 말에 갓 태어났으며,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행이 주후 51-52년경이니, 막 20대 초반이나 십대 후반 정도 되는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재력으로도 부자요, 초대교회에서 위치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가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자 집의 도련님이자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니, 오늘로 말하자면 소위 중진 집안의 자녀, 그것도 메인 중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의 아이였던 마가는 교회 중요한 행사, 예배집회 등의 은혜의 행위 참여를 어려서부터 해 왔고, 더군다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자라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특징은 자신도 모르게 건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건방진 부분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큰일 날 행동을 한다는 차원에서 건방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슬렁슬렁 넘어가려는 자세가 몸에 벼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분처럼 은혜의 일을 자신의 기분 따라 처리하는 건방짐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고 지목 했던 것입니다. 마가는 자신도 모르게 들어있는 기분으로 선교 여행에 동참하겠다고 선교 보고시 감동 먹은 감정으로 지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면서 겪는 어려운 육신적 삶에 인내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을 쉽게 결정하고 만 것입니다. 갑자기 그렇게 행동을 해 버리면 주위의 사람들이 얼마나 낙담을 하게 됩니까? 사도들의 마음이 이 일로 인하여 얼마나 낙담이 되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점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기분 따라 쉽게 선언을 했다가 금방 변개케 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그래서 빌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께서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마가를 귀하게 사용 하실텐데 저렇게 자신의 편리를 따라서 ‘임의대로 오고가고 한다면 안 되겠다’싶은 평가를 하여 호되게 책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라고 두둔만을 하고자 했으니 다툼이 일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 친척이었던 바나바는 모르는 척 했어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사도의 성령의 감동에 의한 마가 사건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이점이 바나바와 다른 점입니다. 바나바는 그 자신의 성격과 자신의 조카라는 인정적 차원에서 마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해석자들이 사랑의 관점으로 일방적 해석을 하여, “좋은 게 좋은 거지”가 되어 버리니까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정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데 인간의 바른 역할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세워가야 할 것을 고집한 발로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어야 하는 문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툼자체가 윤리의 중점으로 올라서게 되면 누가 옳고, 그릇 되었느냐, 누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 정도로 해석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가, 이렇게 선택하면 하나님의 뜻이 바로 세워지겠는가? 라는 차원을 세워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헬라과부와 유대과부들의 다툼의 문제도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다투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게 진행되는데 가만히 있으면, 더군다나 다툼을 더 중요시 하여 그것을 사랑의 문제와 연결해서 처리하면 교회는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현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십니까? 눈가림식으로 유지만 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약화되어가는 과정 속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께서 다툼의 문제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2차 선교 여행의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는 선교의 사이클입니다.
고난의 과정입니다.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무너지기 직전으로 들어가게 했던 과정이었습니다. 절망하기 직전에 놓일 번한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발생하는 과정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섬김에 있어서, 봉사에 있어서,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 분명히 주님의 일인데 왜, 어째서, 문제가 발생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이 문제를 하나님은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략 2차 선교 여행의 고난 코스를 짚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안디옥 → 루디아, 더베(디모데 할레 조취) → 드로아(선교지역 선정 갈등, 마게도냐 환상) → 빌립보(루디아 가족 회심, 귀신들린 여인 고침과 경제인 연합에 의한 감옥, 간수장 가족 회심) → 데살로니가(유대인 조직적 반대 1) → 베뢰아(유대인 조직적 반대 2) → 아덴(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 우상의 도시, 바울 우상화)
이 코스는 선교가 잘 안 되고 반대급부가 심하게 발생한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들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어렵게 느껴지는 코스였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여전히 진행되는 섭리로 진행되는 선교의 사이클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좀 더 구체적으로 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조직정비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질서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지도자들의 인격적 측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을 진행 할 때, 은혜의 방편이라 해서 아무 정비도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진행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면서 밀어 붙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을 육적이니, 마귀적이니 하여 도외시 하고자 합니다. 정말 어리석고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뽑았고, 70명과 120명의 문도들을 조직했습니다. 전도를 하게 할 때에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내 보냈습니다. 그리고 왜, 3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했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서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행정적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2차 선교 여행을 하기 직전에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서로 갈라져서는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먼저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렀습니다. 왜 이곳에 들렀습니까? 바로 이곳은 1차 선교 여행에서 구하여 낸 디모데 가족이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에 들러서 디모데를 2차 선교 여행에 동참시키고자 했습니다. 즉, 궐이난 바나바와 마가의 자리를 실라와 디모데로 채우고자 해서 였습니다. 즉, 조직 정비이지요.
당시 디모데는 1차 선교 여행시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고향 근처인 이고니온에서 오늘로 말하면 전도사로 사역을 하는데 그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를 대동하기 위해서 이곳을 들린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데리고 가고자 하는데 걸리는 것이 하나 보이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출신성분의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이방인으로써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2차 선교 여행을 하던 중 주위의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을 미리 직감하여 할레를 행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조직력 강화와 개인이 앉고 있는 문제의 소지를 해결해 주는 지도자의 신중성과 배려심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기 위해서 하는 조직정비와 조치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자기의 유익에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특징은 더욱 강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 많지 않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자신을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보는 신앙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의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조치를 취해 주었듯이 주님의 몸 된 일을 섬기거나 봉사와 헌신을 할 때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사도는 하나님과 더욱 확고한 신뢰 관계로 들어가는 과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여주신 고난의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는 신앙관 적립이라는 것입니다. 1차 선교 여행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부자 바나바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1차 선교 여행을 잘 마쳤는데 엄청난 부자였던 바나바가 함께 동행을 했었다는 사실이 또 머리를 쳐드는 것입니다. 진행이 잘 되는 것 같은 문제 였습니다. 그래서 잠복되어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이 잘나서 개입되는 일의 진행은 되는 것 같은데 후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 부자 바나바가 함께 했던 선교 여행은 좋았던 것 같았지만 두 가지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진행되고 있는 점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이 드러날 소지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를 시사해 주는 것입니까? 주님의 일을 진행하면서 세상의 힘이나 돈의 힘, 조직의 힘으로 진행을 합니다. 과정에서는 잘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훗날 교회가 더 어려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세상의 힘으로 하는 일처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항상 덮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사용하여 이루시기를 허용하셨다’라는 논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원칙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세상의 힘인가?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세상인가의 차이는 너무 큰 문제입니다. 이점을 바울 사도는 확고하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난의 문제는 바로 이 점을 확인시키는 과정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바나바가 마음에 무게로 남아 있었습니다. 1차 선교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이 바나바가 충당을 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갈라지고 나서 홀로 이 문제를 감당하려고 하니 얼마나 갈등과 자기와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 현실의 문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와 똑같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이 문제를 확고하게 정립을 못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어려움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신뢰하라! 해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을 의지하거나 세상의 힘을 빌려서 이루어가고 그래 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었다고 치부하는, 그래서 세상으로 하여금 웃어버리게 만드는 저급한 신앙의 환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진정한 기독교 환경을 조성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고난의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진행 된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덴에 이르기 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는 경제인들의 연합체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조직체의 반대급부의 조절에 의해서 더 이상 선교를 못하고 나오게 되었고, 아덴에서는 에피쿠로스 당시 유명한 전통 철학과 스토아 철학파와 우상에 부딪혀서 선교를 더 이상 하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중에 바울은 지치기 직전에 놓이게 될 정도로 낙심직전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들어갔지만 간주장의 가족을 모두 구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를 그 성에서 나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론 자주 장사 루디아 온 가족 또한 구원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살전지역에서도 경건한 무리들과 귀족 부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뢰아 지역에서도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게 하셔서 참 된 복음이 심어지도록 했습니다. 비록 부족했지만 하나님의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은 그대로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일이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일이 더디고, 막히고, 꼬이고, 사람들이 떠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그래서 나누이고, 정말 주님의 일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잘 진행이 됩니다.
만약에 그 곳이 너무 교만해서 영적으로 가로막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무 완강하여 거부하거나 방해를 하면 그를 비켜서 하나님의 일은 진행이 됩니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처음에 들려오는 소리에 응해야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면 주님의 일은 지나갑니다. 이것이 복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진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주님의 일에는 언제나 반대급부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특히 이것은 조직력과 관계가 깊습니다. 오늘 사도에게는 조직적으로 가는 곳마다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먼저는 경제인 연합체에 의해서 감옥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유대인 조직체들입니다.
오늘날 신앙이 이익의 문제 때문에 기로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이슈로 등장해 있습니다. 신앙이 중심 되어 표현되는 감정이 아닙니다. 이익이 자신들의 중심에 놓이기 때문에 신앙보다 이 문제에 의해서 신앙의 노선을 택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앞으로 경제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년 사이에 금융 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경제인들이 앞으로 사용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일정한 기간 동안이 될 것입니다. 그 이후는 통제 시스템이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유대인 조직입니다. 이것은 배타적 조직체입니다. 자신들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는 조직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행은 탁월한 포용성으로 다가오는 조직체입니다. 또 이 조직은 철저히 자신들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거나 버리는 조직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러한 조직의 생리에 의해서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죽인 조직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회심한 제자들을 박해하고 역시 바울 사도의 전도 여행을 적극적으로 방해를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의 전도여행을 적극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시장의 거리의 강패들을 선동하여 방해를 했습니다. 조직적으로 방해를 한 것입니다. 선동선전으로 패거리들을 선동하여 파괴시킨 것입니다. 더욱이 조직력을 가동하여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따라와 방해를 할 정도 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를 핍박하거나 조롱하는 자들은 언젠가 때가 되면 회심하여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서 체험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조직들에 국한 된 조직원들은 회심하기 힘든 대상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배후에서 조직이 버티고 있어서 컨트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가 요즘 조직적으로 혼란을 겪는 것도 이러한 정체불명의 조직들이 준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신천지와 통일교 그 외에 자신들의 조직을 한국에 중심이 되게 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세력들을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초대교회와 같이 가만히 교회 안에 들어와 온갖 궤계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바른 신앙에서 떠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유대인 조직이 가동하니까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도라 할지라도 막혀서 도망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조직력은 이처럼 신앙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 세상의 힘입니다. 그러나 잠간 동안이고 영원히 교회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악함 때문에 자신들에게 훗날 후회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조직은 바울 사도의 선교 여행을 방해하여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급속도로 열리는 과정이 되었고, 유대인 자신들은 점차 고통의 세월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이 고난의 코스는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는 선교의 사이클이었습니다. 너무나 깊은 곳으로 인도해 가신 하나님의 섭리이었습니다. 더욱 신앙을 깊은 곳으로 인도해 가신 하나님의 섭리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존하도록 하시는 섭리였습니다. 바나바의 부유한 인간적 그림자를 모두 거두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는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형편으로 볼 때는 막힌 것 같고, 아리랑 고개 넘어가듯이 더딘 것 같고 때로는 갈라 설 정도로, 너무나 힘든 반대의 급부에 봉착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가시는 놀라운 섭리가 진행되고 있는 순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만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써 선교의 사이클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정은 말 그대로 난코스 이었습니다. 걸리는 것이 왜 그리 많으며 왜 그리도 반대를 하는 무리들이 그리도 많이 있는지, 지치기 직적이었습니다. 사도도 사람인지라 쓰러지기 직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행전18:1). 이곳에서 사도는 자신의 선교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동역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행18:2).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서 이달이야를 거쳐 고린도에 와서 정착을 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아굴라는 본래 본도 출생(18:2 상반절)으로 로마로 이주해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래 전에 조상들이 뿌리를 내렸던 가문의 여인으로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인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로마에 실제적으로 브리스가라는 저명한 가문이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로 황제 때에 로마시에 화재가 발생하여 3/1 이 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네로 황제의 위치는 정적들에게 공격을 받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네로가 당시 마침 유대인들이 로마 시민들과 잦은 시비가 발생하던 터라 로마 시민들이 유대인들을 향한 감정이 좋지 못한 기류가 일어나고 있던 감을 잘 알고서 네로가 화재를 유대인들의 소행으로 떠넘겼던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위의 상황을 가장 잘 이용할 줄 아는 힘을 부릴 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랬다 할지라도 네로는 자신의 황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밀려 났고, 그 뒤를 이어 글라우디오 황제가 등극을 하였습니다. 마침 때를 같이 하여 유럽과 소아시아 일대에 대 흉년이 들었습니다. 겹친데 겹친다고 이렇게 되고 보니 로마시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결국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부부는 로마를 떠나서 이달리야로 왔고 그 곳에서 다시 고린도로 바울 보다 앞서서 와서 텐트 만드는 공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할 때 바울 역시 마게도냐 일대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차 별 성과 없이 지쳐 있던 차였습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든 과정에 있었겠습니까? 당시 바울 사도를 경제적으로 서포팅 해주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물론 안디옥 교회를 비롯해서 1차와 2차 초기에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로부터 약간의 후원이 있었습니다마는 넉넉하지 못한 상태 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당도하여 먼저 일거리부터 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굴라의 텐트 만드는 공장을 알게 되어 일을 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바울이 언제 텐트를 만드는 기술을 갖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추축을 해 볼 때 대학 과정에서 아르바이트 등의 일이나 학교의 전공과정에서 익히게 되었지 않았나 하는 설에 대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바울과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선교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만나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사도께서는 일만 했겠습니까? 전도를 했고 이 부부들이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귀한 사도의 동역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울 사도의 사역은 장기전으로 들어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 두 부부를 만나기 전까지는 거의가 순회 전도 방식이었습니다. 3 주, 혹은 1달, 3달, 6개월 등 단기간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굴라 부부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길어지는 형태가 진행 된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3차 시 에베소에서 거의 3년을 보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로 만나는 관계는 놀랐고 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만남은 진정한 관계이며 이것은 놀랍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실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2차 말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신 사도와 아굴라 부부의 만남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아니 아굴라 부부의 사도를 향한 선교적 동역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먼저는, 목회적 자유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유 함”
요즘 성령론의 문제점을 크게 꽂으라 한다면 두 가지입니다. 기독론 약화와 구속입니다. 구원할 때 구속이 아니라 속박할 때 구속입니다.
바나바를 통한 경제지원에는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복 되어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나바의 인격 또한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했을 때, 예루살렘 제자들이 소문으로 인해 바울에 대해서 마음의 문들을 열려고 하지 않을 때(행전9:26), 바울의 회심의 상태를 제대로 전해 주며 바울을 제자들에게 열심히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 이었습니다(행전9:27).
그리고 바울이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찬밥 신세로 자신의 고향이었던 다소에서 소일하고 있을 때, 바나바가 바울의 고향으로 찾아가 끌고 나와 본격적으로 사역의 장으로 불러내 세운 사람이 바로 바나바 였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바울 사도의 사역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진행되는 경제적 후원이었다고 볼 수 있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하며 받는 후원이 때로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굴라 부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만나고 도움을 주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바울 사도가 경제적으로 마음껏 자유 함을 누리는 차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사역을 함에 있어서 주의 종들이 말씀과 신앙의 상식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이처럼 자유함을 누리는 사역이 되도록 해주는 관계가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간혹가다 어떤 분들은 보면 얼마나 목회자에게 꼬장꼬장 하는지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사적으로 물질을 제공하고서는 촌지를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하며 뒤에서 말을 만들어 곤란하게 하는가하며, 미리 돈을 주는 것이 이 목회자가 돈에 욕심이 있는가 없는가 시험하기 위해서 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역할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다 올무에 걸리면 얼마나 흔들어 되는지, 그러니 현대 목회자들이 제대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솔직히 꼬장꼬장 하는 교회 중진들이나 성도님들치고 일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업도 꼬장꼬장하게 진행되고 물질도 꼬장꼬장하게 들어오고 그런데 주의 종들에게 아굴라와 브리스 길라 처럼 시원스럽게 자유 함을 주는 분들은 하는 일도 고속도로처럼 잘 풀리고 노년이 행복하게 살더라 이 말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아굴라 부부를 지칭해서 “나의 동역자”(롬16:3)라고 불렀습니다. 평신도 성도들을 향해서 동역자라고 할 정도입니다. 요즘은 사회적으로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너무 설치기 때문에 걱정입니다마는 그러한 이들을 가리켜서 동역자라 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일심의 문제와 관련이 큽니다.
즉 아굴라 부부를 신실한 동역자라고 합니다.
오늘 2차 선교 여정 앞서서 심히 다투었던 내용을 사도는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왜 처음 마음과 나중 마음이 달라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신실함이나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 일심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난 후의 아굴라 부부는 사도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동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변치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하다가 유대인들이 고린도 지역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밀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선교를 못하고 떠나 에베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굴라 부부가 자신들의 사업체를 접고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바울 사도의 사역을 동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차 선교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로 이송하여 갔습니다. 이때 에베소에서 사업체를 접고 로마로 재입성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를 돌보며 동역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사도께서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느냐 하면 나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이라도 내어 놓고자 했다(롬16:4)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동역 자들이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일심의 마음, 즉 신실한 마음입니다. 오늘 날 과연 이러한 성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심이나 교회에 대한 마음, 주님께 대한 열심 등이 변하지 않는 일심,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처음의 마음과 나중의 마음이 달라지고 색깔이 빛바래지는 것입니까?
끝으로, 화목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위치는 화목케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시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가 서로 화목 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백성들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가 사역을 하는 동안 많은 오해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하나님께 붙잡혀 있는 사도이다 보니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집중하여 일처리를 하고 말을 하다보니 직선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만큼 가장 다른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맞추다보니 인간들 사이에 오해가 많이 발생합니다. 우리 목회자들 사이에도 이러한 분들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타입니다. 그래서 말이 부드럽게 나가지 못할 때가 많고 너무 냉정한 것 같습니다. 이 때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자들이 이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께서도 바로 이런 경우에 많은 오해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많이 중간에서 건강하게 관계를 만들어 가는지 너무나 귀한 부부였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데 이 관계 문제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중에 많이 일어나는 문제가 바로 중재자들이 역할에 의해서 발생하는 건수들입니다. 어쩌면 중간에서 말을 잘하는데 사이를 더 벌어놓는 쪽으로 운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 금이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묘한지 일반 성도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 성도와 성도들 사이를 화목케 하는 역할을 잘하는 화목케 하는 역할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잘 할 때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가 평안히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를 이간시키고, 하나님과 교회의 사이를 이간시키는 역할을 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오늘 날 이러한 역할을 하는 교회 안에 가라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을 잘 파악하여 교회를 지키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목회자가 이단적 요소만 없다면 목회적 자유함을 마음 껏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마음 변치 마시고 주 안에서 끝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중간에서 화목의 사람들이 되어 교회와 주님의 관계,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 성도와 성도의 관계를 화목케 하는 축복의 도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 우리는 이제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는 선교의 사이클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선교의 사이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우리 개인적 신앙의 사이클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다툼의 문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의 싸이클이었습니다. 다툼의 문제로만 보면 누가 옳은가, 그릇되었는가 하는 기 싸움과 큰 사람 작은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끝나고 맙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 영혼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아 갈 뿐입니다. 그래서 기 싸움이 되고 교회의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은 고난의 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문제였습니다. 고난의 과정은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통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더욱 섬기고 받들고자 하는 굳은 절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반대급부에 의해서 더욱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특히 조직적으로 들어오는 어려움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 문제 앞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우리가 이기게 되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바나바의 만남은 바울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그것이 역할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의 만남은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만남이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해 주었고’, ‘일심으로 동역하는 신실함이었고’ ‘화목케 하는 동역’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귀한 만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전적으로 적용되는 선교적 사이클로 진행되시는 삼광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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