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한 웃음은 예배를 쇼로 만든다
안선희(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목사)
토저는 막대 사탕을 주는 기독교를 황금 송아지를 섬기는 기독교라고 비판한다.
예배에서 웃음과 유머가 한창이다. 교회 예배에서 참여해도, 방송예배를 시청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분위기에서 웃음과 유머가 없는 예배는 예배 참여자로 하여금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실패한 예배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설교자들은 예배참여자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퍽이나 애를 쓰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유머와 웃음이 예배에서 이토록 지배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는가?
어떤 이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종교적 의례는 본디 축제적, 놀이적 성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는 이러한 축제적, 놀이적 성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예배는 이러한 축제적, 놀이적 성격을 거의 상실했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이도 이 상실된 축제적, 놀이적 요소의 흔적이 웃음과 유머에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서 웃음과 유머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이는 “경박단소 키치의 시대, 원본이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진지함이란 새로운 형태의 소외일지도 모른다” 는 어느 유명한 인터넷 블로그의 대문에 있는 말을 예배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실제로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진지함을 거부하는 대신 가벼움을 즐기고 유쾌하게 인생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진지하고 무겁고 심각한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사실에 주목 하면서 이 진영은 현대인이 예배에서도 가벼움과 유쾌함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근자에 와서 예배학계에서는 예배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축하하는 잔치 자리로 이해하는 흐름이 부각되고 있다. 축제는 마땅히 즐거워야 하기에 축제로서의 예배는 웃음으로 활기를 띠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런 예배 이해에 근거해보면 웃음과 유머로 가득 찬 예배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다른 한편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 결과들도 웃음을 만병통치에 효험이 있는 명약으로 내놓는다. 이런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웃음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심리적 에너지이기에 그것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인생까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유머와 웃음을 통한 자극은 학습에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사정이 이럴진대 이렇게 효과 높은 처방을 예배에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오늘날 교회들은 사람을 모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지 않는가. 심지어 각종 생활용품을 내걸면서 경품 행사까지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이렇듯 교회들에서는 효과와 효력의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에게 인기 좋은 웃음과 유머의 수단을 차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에이든 토저라는 복음주의 신학자는 이러한 교회 현상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196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토저에게 이러한 상황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싫증 났다고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들은 종교 영화, 게임, 기분 전환용 오락 같은 ‘막대 사탕’을 주지 않는다면 집회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교회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막대사탕 작전’은 당시 미국 크리스천의 사고에 너무나 깊이 파고 들었고 그 결과 그들은 이런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잘못된 현상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니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토저는 막대 사탕을 주는 기독교를 황금 송아지를 섬기는 기독교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그의 비판에 대해 황금 송아지 숭배자들은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면 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한다. 이에 토저는 황금 송아지 숭배자들이 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끄는 곳이 어디인지 묻는다. 참 제자의 길로? 거룩한 삶과 성품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으로? 그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결단코 “아니다” 라고 한다.
토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일하는 기관의 노력에 힘입어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인이 많은 신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진정한 예배가 지금보다 더 낮은 수준에 처했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통탄한다. 많은 교회들이 예배드리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토저의 신학 사상 전체에 동의하는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당시 미국 교회의 예배들이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하고 집례자나 설교자가 쇼맨십으로 청중을 사로잡고 청중에게 유머와 웃음을 선사함으로써 많은 수의 청중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교회의 재정 사정을 향상시키고 교회의 명성을 높이는 사이에 진정한 예배가 사라져버렸다는 그의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아가 이런 그의 비판적 통찰이 오늘날 우리 예배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배에서 우리는 꼭 웃을 필요가 없다. 웃음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감정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 감정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서의 웃음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더욱이 웃기 위한 예배 혹은 다른 효과를 누리기 위해 웃음이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예배에서는 그 어떤 것도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의 목적은 예배 그 자체다. 사람을 모으는 일이나 모인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은 예배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웃음을 수단으로 사람을 모으는 일도, 웃음을 통하여 사람을 치유하는 일도, 웃음으로써 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일도 예배의 지향점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다만 예배에서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일 뿐이다.
효과를 의도한 어떠한 행위도 예배의 구성요소가 될 수 없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고양된 신앙심을 표현하는 신앙 실천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는 따로 목적이 있으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행위일 수 없다. 심지어 교회의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지는 선교나 교육도 예배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예배는 그저 예배 일 뿐이다.
가벼운 유머와 웃음이 테크니컬하게 주어지는 예배에서 우리는 세상의 비극적 전개에 맞서야만 하는 기독교의 사명에 관해 진지한 숙고를 수행할 수 없다. 냉정히 따져보면 이런 예배에 참여하는 기독교인은 TV쇼를 보면서 키득거리는 시청자와 다를 바가 없다. 때로 전쟁이나 인종 차별과 같이 성난 항의와 진지함이 필요한 세상의 구체적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 주의를 끌기 위한 테크닉에 의해 유발되는 웃음은 예배를 영성의 보고로 만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배에서 신앙인은 웃을 수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무력한 사람이 힘을 공급받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되고 인간적 조건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그 안에 구원과 해방의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 신앙인을 웃게 만든다. 이처럼 신앙인의 웃음은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역설들을 꿰뚫어 볼 때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웃음은 테크닉으로 주어지는 웃음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진정한 예배 속에서 나오는 웃음은 고요하고 관조적이며 희망적이다. 그것은 예배를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이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환희다. 삶의 굴곡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속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생겨나는 희망의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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