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한국교회 예배의 갱신과 과제 (문성모)

수호천사1 2012. 9. 9. 11:50

 

한국교회 예배의 갱신과 과제


1. 한국 예배학의 문제점

'한국 교회 예배'라는 제목 속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한국이라는 개념이다. 지금까지 예배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모두 서양 교회라는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것은 비단 예배뿐만 아니라 신학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목회 현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실천신학 분야는 전적으로 한국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학문 체계를 새롭게 구성해 나가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 이유는 한국의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서양과는 다른데 서양에서 수입된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 볼 수 있다. 목회나 교회 성장을 위한 외국 학자들의 이론은 우리에게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되는가? 서양의 학자들이 일주일에 10번도 넘게 다른 설교를 해야 하는 한국 목회자들을 염두에 두고 설교학 책을 썼겠는가? 서양의 예배학자들에게 문화와 전통이 다른 한국적인 상황이 조금이라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까? 서양 사람들이 정한 교회력의 색깔들은 우리 민족의 색의 정서와 일치하는가?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며, 따라서 이러한 수입 이론들은 하나의 참고 자료는 될 수 있어도 우리의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둘째 이유는 이렇게 서양 학자들이 만든 실천신학 이론은 한국 교회 현장을 위해 별로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한국을 축으로 하는 이론을 형성하는데 대단한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학문과 현장이 모두 우리 것에 대한 기반이 없이 수입 이론을 오랫동안 써 왔기 때문에 한국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어떤 시도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배척 당할 수도 있다.

이것은 특히 예배를 논하려 할 때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 교회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예배의 이론을 그대로 수입해서 써 왔고 그것이 보편적인 예배의 모습이라고 여겨 왔다. 서양 찬송과 서양 악기를 동반한 서양적인 예배 분위기에 오랫동안 젖어 왔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서양의 문화를 보편적인 기독교 예배 문화로 오인(誤認)하게 되었으며, 한국이라는 현주소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되었다.

2. 한국 교회 예배 현장의 문제점

한국 교회에 예배는 없고 설교만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예배를 위해서 설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설교를 위해서 예배가 있다. 따라서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으러 간다. 예배를 '보러' 간다고 한다. 예배, 즉 설교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예배를 '내가'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예배 행위, 즉 설교 행위를 관람하고자 하는 것이다. 관람료(헌금)는 각자 알아서 내고 말이다.

따라서 현행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점은 설교자를 중심으로 예배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사회자(집례자), 기도자, 성가대의 역할은 설교자의 등장을 위한 준비 단계와 같다. 설교자는 예배의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설교 시간에 제왕처럼 군림한다. 그 앞에서는 모두가 엄숙해야 하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 오직 복종과 충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예배는 초대교회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던 축제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즉 민중 문화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엘리트 문화로서의 예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회중은 축제의 주체자가 아니라 구경꾼이다. 그리고 회중은 예배 안에서 스스로 헌신(獻身)과 헌심(獻心)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삶 가운데서 예배드린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즉 회중 예배의 감동은 생활 예배로 연결되지 못한다.

1. 예배의 3요소

초대교회의 예배는 주후 3세기 경에 기본적인 골격이 완성되었는데 예배를 이루는 3대 요소는 설교와 성만찬과 음악이었다. 예배는 두개의 큰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 부분은 설교 중심의 말씀 예배가 있었고 그 후 성만찬 중심의 다락방 예전이라고 불리는 성찬 예배가 있었다. 그리고 예배 전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음악이라는 제3의 요소가 있었다. 시편 찬양, 알렐루야 찬양,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상투스(Sanctus) 등의 음악 요소와 더불어 성경봉독이나 기도, 봉헌 등의 모든 순서가 낭송이나 낭창과 같은 음악적인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예배는 입체화되고 축제적인 분위기로 거행되었다. 설교와 성만찬이 예배라는 수레의 두 바퀴였다면 이 정지되고 죽어 있는 수레 바퀴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음악이었다.

2. 축제의 예배

예배의 원형에서 중요한 요소는 축제이다. 예배의 시작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축제였다. 한 자리에 모여서 떡을 떼며 물건을 서로 공유하며 너와 나의 신분, 지식, 빈부, 성별, 출신 등의 장벽을 허물고 부활의 주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확신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였다.

예배의 자리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기능적 구분은 있었지만 신분적 구분은 없었다. 예배 인도자는 감독이나 신부(목사)였으나, 평신도인 집사도 예배 순서에 참여했다. 회중의 질서를 지도하고 성경을 봉독하고 대표 기도를 하고 헌금 순서를 담당하고 심지어는 성찬을 위한 떡과 포도주를 내오고 분배하는 일까지도 집사나 평신도가 하였다. 예배의 원형은 인도자(성직자)의 독주가 아닌 회중들이 참여하는 예배였다.

예배는 몇 가지 순서, 즉 성경봉독, 기도, 수르숨 꼬르다(Sursum corda), 상투스(Sanctus) 등을 제외하고는 자유스러웠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축제의 자리였다. 경직된 예배가 아닌 기쁨과 자유가 보장된 예배였다.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지 않은 영적이고 감동적인 예배였다.

3.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

예배의 첫 부분인 말씀 예배가 끝나면 세례 받은 사람들은 계속 남아 성만찬 예배에 참여하고, 세례 받지 못한 자(입교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 관습은 처음부터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후 112년경의 문서인 플리니우스(Plinius)의 편지에는 이런 구분이 없다. 그러나 주후 13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Didache: 12사도의 교훈)라는 문서에는 처음으로 성찬에 세례 받은 이 만 참여하도록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하여 이 관습은 교회의 불변의 교리로 확립되었다.

예배는 입교자 예배(Missa catechumenorum)와 세례자 예배(Missa fidelium)로 구분되어 있었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말씀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 예배 인도자는 "ite! missa est"(가십시오, 해산합니다.)라고 회중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미사(라틴:Missa/독:Messe/영:Mass)라는 예배 용어가 나왔다. 그러므로 이 미사(Missa)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모이는 예배(회중예배)를 말하며, 또 하나는 흩어지는 예배(생활예배)를 의미한다. 즉 회중 예배에서 세상의 삶 가운데로 파송되어진다는 선교의 의미가 함께 있다. 선교를 의미하는 미션(Mission)이라는 말은 바로 예배를 일컫는 미사(Missa/Missio)에서 나온 말이다. 선교란 주의 이름으로 모였던 성도들이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을 말하며, 예배의 영역은 세상의 삶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한편 세례 받은 자들은 다락방 예배라고 불리는 성찬 예배에 참여했는데 이 예배의 끝에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마라나타"(Maran Atha)의 고백이 있었다. 이 말은 "우리 주님이여, 오소서"(marana ta) 또는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maranata/maran ata)라는 뜻으로 세상에 나가 살 동안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믿음으로 환난과 시련을 이기고 주님의 뜻을 이루며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살 것을 다짐하였다. 즉 삶으로 예배드릴 것을 고백하는 의식이었다.

1.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

주후 4세기가 되었을 때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가 되었고 비밀리에 모이던 교회 예배는 공개적인 예배로 전환되었다. 후에 모든 로마 시민들은 의무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사회가 되면서 교회는 점점 제도화되고 권위주의의 옷을 입게 되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제사장적 신분이 있다는 생각은 점차 퇴보하고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신분적인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더 이상 선교를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고, 모든 시민이 교회의 지배 아래에 놓여지게 되자 성직자들은 자신들과 평신도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성직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주교(Bischop)라는 제도가 생겨났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이 때부터 가운을 걸치고 구별된 복장으로 시민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다. 예배 중의 성직자의 비중이 점점 더 높아졌다. 예배의 거의 모든 부분을 성직자가 맡기 시작하면서 회중은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회중은 예배 중에 노래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성가는 성직자만이 부르도록 못을 박았다.

특히 성만찬의 의미가 강화되었다. 성찬을 받는 행위 자체가 구원의 효력이 있다고 믿게 되면서 성찬을 집례하는 성직자들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결국 예배(미사)하는 것이 공적을 쌓는 일이 되어 성직자는 '회중 없이' 예배 드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사 집례 전문 성직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성직자의 저질화, 사이비화와 함께 모든 교회가 함께 타락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2. 종교개혁 이후의 예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예배를 통하여 높아진 성직자의 권위와 특권을 비판하고 예배의 원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예배가 하나님을 위한 수단이 되지못하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 것을 바로 잡았다. 예배 의식 자체를 거룩한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미화시켰던 많은 외형적 요소들을 예배로부터 제거하였다. 성찬은 구원을 받는 행위요, 집례하는 성직자는 구원의 열쇠를 쥔 자라는 교리를 일축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원형을 찾기 위하여 예배 안에서 소외된 회중의 자리와 역할을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회중에게 노래하는 즐거움을 되돌려 주었다. 회중 찬송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코랄을, 칼뱅은 시편가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뿐 아니라 성직자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성경이 회중의 손에 쥐어졌다. 성만찬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일 수 없었다. 만인제사장설(루터)과 성가대 폐지론(칼뱅)이 나왔다. 온 회중이 말씀과 찬양이라는 초대교회의 유산을 되찾았고 성찬의 바른 개념을 알게 되었다. 예배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축제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축제의 틀 안에서 예배는 그 영역을 삶에까지 넓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설교가 중심이 되면서 예배는 다시 경직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는 다시 구별되기 시작했고 권위의 벽은 점점 더 높아만 갔다. 이제는 설교자의 말 한마디가 구원까지도 좌우하게 되었다. 설교자인 성직자는 회중의 자리를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전권대사의 자리로 올라갔다. 설교자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설교자를 섬기는 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시간이 아닌 설교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시간으로 전락되었다. "종놈"이 "종님"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로 둔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성가대에서도 나타난다. 회중의 자리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성가대가 중세의 영광을 꿈꾸기 시작했다. 즉 성가대원들은 성직자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성가대는 이제 성직의 높은 자리에서 오히려 노래를 회중에게 들려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회중은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자신이 함께 하나님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의식은 없고 오히려 성가대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성가대는 진정한 찬양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기교적으로 훌륭한 연주를 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락된 중세 성가대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칼뱅은 성가대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을까? 성가대는 회중의 자리로 내려가 회중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 역사를 보는 눈

예배의 역사를 말하기에 앞서 필요한 것은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이다. 역사는 자료의 나열이 아니며, 본대로 느낀 대로 적어 나가는 기행문도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역사를 써 나감에 있어서 여러 자료만을 나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역사를 논한다는 것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추적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역사를 쓰기 이전에 반드시 여기에 필요한 충분한 자료가 모아져야 하며, 이 자료가 말해 주는 역사를 입체화시켜 통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안목, 즉 사관(史觀)이 필요하다. 같은 자료를 가지고도 사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역사가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사실은 예배는 본래 민중(民衆) 예배였으며, 이 민중 예배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엘리트 예배에게 도전을 받고 예배에서 배척받는 시련을 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 예배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예배에서의 자기 위치를 지켜 나가고 있고 오늘날에는 그 가치를 더욱 더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역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보편적인 논의와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즉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엘리트 예배 편에서 예배의 역사를 기술해 왔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예배는 민중 편에서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할 때 예배의 과거의 모습을 바르게 볼 수 있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예배의 원형으로서의 민중 예배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출15:20)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시150:3-4)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대상13:8)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삼하6:15-23)

우리는 위의 성경 본문에서와 같은 상황을 예배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 문화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노래하고 각종 악기를 두들기고 불며 춤을 추는 예배 분위기는 우리의 현 상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위의 것은 '다른' 예배 행위이지 '틀린' 예배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고 배워 온 예배 행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의 문제점은 그 것과 다른 어떤 예배 행위에 대해서는 배척할 수밖에 없고, 성경에 나타난 본래의 예배 행위의 모습에 대해서도 '틀린 것'으로 정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틀리고 내가 맞는다는 갈등과 모순을 해결할 길이 없다.

위의 사무엘하 6장에는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때 춤과 더불어 이에 걸 맞는 노래와 악기 연주가 함께 있었다. 한국의 예배 분위기에 젖어 있는 우리는 이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솔직히 다윗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미갈의 편에 서야만 하는 딱한 위치에 있다. 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중에 다윗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또는 교회 앞 마당에서 스스로 도취되어 이렇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면, 우리는 대부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갈처럼 그 사람을 비난하고 꾸짖을 수밖에 없다. "어찌 감히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몸을 드러내 보이며 춤을 출 수가 있겠는가?" 라는 미갈과 비슷한 심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미갈의 행위를 옳지 못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다윗의 행위에 대해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 미갈의 잘못은 무엇인가?

 

첫째 잘못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정죄한데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예배 행위를 절대시하여 그것과 다른 타인의 예배 행위를 죄악시한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과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은 인간이 처한 각각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지금까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오늘날도 여러 형태의 예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어떤 예배 문화와 접했을 때 손쉽게 그것을 '틀린 것'으로 정죄해서는 안된다.

미갈의 두 번째 잘못은 예배 행위에 대한 엘리트적인 생각을 가지고 민중적인 예배 행위를 비판했다는데 있다.

 

미갈은 주지하다시피 사울 왕의 딸이다. 그녀는 공주로서 어렸을 적부터 왕실에서 자라났고 궁중의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왕이었고 남편도 왕이었다. 그녀는 남편인 다윗이 왕실의 법도를 알고 귀족적인 예절을 갖추었을 때 그를 만났으며 아마도 지금까지 다윗의 이러한 비 엘리트적인 행동을 보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다윗은 그 출신이 평민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평민들의 춤과 음악에 익숙해 있었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행한 가무(歌舞)는 그가 어렸을 적부터 몸에 익혀 온 것이다. 다윗은 왕이 되고 공주를 왕비로 맞아 드린 후에도 자신의 두 삶의 자리, 즉 평민과 왕이라는 것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지 않았다. 그는 너무 흥분하고 기쁨에 도취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왕의 옷을 벗고 평민이 되었으며, 엘리트가 아닌 민중으로 돌아가서 춤추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엘리트 문화와 평민 문화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으며, 이 둘 사이의 구분도 없었다. 그리고 기쁨과 흥분의 절정에서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미갈과는 다른 다윗의 위대성이 있다.

미갈의 세 번째 잘못은 예배 행위자의 중심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가무(歌舞)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집에 모신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기뻐서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감사와 감격과 흥분과 기쁨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최상의 예배 행위를 여호와 앞에서 표현하고 있다. 미갈은 이와 같은 다윗의 중심을 파악하여 그 행위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겉의 행위를 기준으로 다윗의 속 마음을 헤아리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미갈은 자신의 문화적 환경 안에 안주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중심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민중적 가무(歌舞) 행위자들은 그 중심도 바르지 못하다고 속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에 대해 자유롭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중심에 대한 표현은 민중적일 수도 있고 엘리트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의 표현이든지 그 중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갈의 네 번째 잘못은 삶과 예배를 분리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삶이 곧 예배이며 예배가 곧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삶의 문화가 곧 예배 문화이며 예배 문화가 그대로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삶 속에서의 가무(歌舞) 행위가 예배로 이어져야 하며 예배의 노래와 음악이 삶 속에서 불려져야 한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예배와 삶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그 삶 자체가 예배하는 삶이었다. 예배 안에서도 예배 밖에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동일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삶 속에서 그가 익혔던 가락과 춤과 악기들을 하나님 앞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표현을 그대로 삶에까지 연장시킬 수 있었다. 예배의 자리는 성(聖)스럽고 삶의 자리는 속(俗)되다고 생각하는 미갈은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예배의 자리만큼이나 성(聖)스럽고 귀하다는 생각 속에서만이 우리는 다윗과 성경의 증언을 이해할 수 있다.

3. 예배의 역사 - 민중 예배와 엘리트 예배의 투쟁


위와 같은 다윗 시대의 민중 예배로서의 예배는 그후 솔로몬 시대의 성전 중심의 예배 공간에서 엘리트 예배에게 그 자리를 빼앗겨 버린다. 예배가 성전이라는 제도권 안에서 행해지면서 예배를 위한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예배 행위가 고정되고 제도화되어 그 밖의 '다른 것'을 정죄 하게 되었으며, 엘리트 예배가 민중 예배를 몰아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고, 예배자의 중심보다는 그 행위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으며, 삶과 예배는 높은 성벽 사이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예배는 점점 인간 중심으로 변질되고 삶의 자리를 무시하게 되었고 위선적인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인간에 대한 관심도 없는 형식적인 제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예배 행위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역겨운 것이 되고 말았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2-23)

그러나 민중 예배는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시편은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바벨론 포로 이후 제2성전의 찬송가로 불려질 만큼 예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편은 대부분 표제를 갖고 있고, 이 표제 중 어떤 특정한 가락을 지정해 준 것이 11개가 있는데 이는 모두 당시 민중의 노래에 맞추어 시편을 노래하라는 지시이다. 아마도 가락이 지정되어 있지 않는 다른 대부분의 시편도 이와 유사한 민중의 노래에 얹어 불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시편에 나타나는 예배 행위와 악기들이 거의 같으며, 이후 구약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약 시대의 예배 행위와 음악이 강한 민중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민중 예배에 대한 엘리트 예배로부터의 박해는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된다. 예수의 예배 행위는 지극히 민중적이며 민중의 지지를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예수는 예배에 있어서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정죄 하지 않았으며 엘리트적 사고를 갖지 않았고 예배자의 외식(外飾)보다는 중심(中心)을 더 귀하게 보았고 삶과 예배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예배 행위로 미루어 보아 그의 예배도 민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엘리트층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층은 예수의 예배 행위를 '틀린 것'으로 정죄 했고 비 엘리트적인 예배 행위를 배척했으며 외식하는 예배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고 삶을 속(俗)된 것으로 보아 예배와 삶을 이원화시켜 버렸다. 예수의 죽음은 민중적 예배 행위가 엘리트적 예배 행위에게 거세당한 상징적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민중적 예배는 그 맥이 끊기지 않았다. 주후 4세기까지 시리아, 비잔틴, 밀라노 교회의 예배는 민중적 요소를 받아들이며 발전되었다. 특히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는 당시 유행하던 민중적 예배와 음악을 적극적으로 교회에 도입하였고, 그의 찬송은 종교적 민요(Spiritual Folksong)라고 불려진다. 민중(民衆)은 교회 안에서 회중(會衆)으로 불려지며, 이 회중을 위한 언어와 가락으로 예배가 행해졌다.

주후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교회는 점점 더 조직화되어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부(富)를 소유하면서 예배는 다시 엘리트 화(化) 되었다. 예배의 축은 회중으로 불리는 민중에서부터 성직자로 불리는 엘리트 층으로 옮겨진다. 엘리트 층은 성직자의 권위를 높이고 민중과의 차별을 강화하기 위해서 7세기 경에 회중으로부터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 권리를 빼앗아 버렸다. 그들은 거룩을 상징하는 특별한 가운을 걸치고 예배를 집례하였으며 나중에는 성직자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엘리트 층의 또 다른 형태이다. 그들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틀린 것'으로 간주되어 죽어야 했으며, 엘리트 문화는 민중 문화로부터 확연히 구분되는 특권을 누렸고, 예배의 내용보다는 외형적인 의식에 치중하여 외식(外飾)적인 가증스런 예배 행위가 극에 달하게 되었고, 삶은 속(俗)된 것으로 취급당하여 예배로부터 멀리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예배는 점점 더 회중이 알 수 없는 언어와 음악으로 엮어지게 되었고, 회중은 이해할 수 없는 예배를 단지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배의 축을 엘리트 층에서 다시 민중으로 원상 복귀시킨 사건이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은 엘리트 층의 특권 의식을 일축하는 말이며, 쯔빙글리의 오르간과 음악에 대한 강한 거부와 칼빈의 성가대 폐지론은 모두 중세의 귀족화 되어 버린 예배와 음악에 대한 타도였다. 루터와 칼빈은 입장은 달랐지만 엘리트적 예배를 거부하고 민중을 포용하고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예배를 지향하였다. 그 결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회중들은 다시 성경을 손에 들고 회중의 노래를 부르며 예배에 구경꾼이 아니라 동참자로서의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는 중요한 종교개혁자들의 공로이며,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며, 예배의 원형을 되찾은 것이다.

4. 예배 현장에서의 반성

우리는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민중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다윗과 예수와 종교개혁자들로 이어지는 민중의 자리를 동경하면서도 실제 예배와 음악에 있어서는 오히려 솔로몬과 바리새인과 중세 교회의 엘리트 문화를 지향하고 있지는 않는가? 민중의 교회에서 시작한 한국 교회가 점점 엘리트 화(化) 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이 합당하다.

첫째로, 예배에 있어서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정죄 해서는 안된다.

 

예배 행위에 있어서 내 것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생각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배에 있어서 엘리트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예배에서 행해지는 모든 내용은 민중이라는 축에서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성가대에 대하여 엘리트적인 특권을 부여하려고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가대원을 성전 시대의 제사장이나 중세의 성직자에 비유하려 하는 것은 현대 교회에 있어서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성가대의 임무는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지 성직의 높은 위치에서 엘리트의 노래를 '회중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특권층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회중의 자리로 내려가는 목회자, 민중이 되어 버리는 목회자만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예배의 참 정신을 실천할 수 있다.

셋째로, 예배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그 중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화려한 예배 의식이나 건물, 의복, 음악, 언어 구사 등은 자칫 우리의 생각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커지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야 한다. 나의 문화 환경과 다른 어떤 예배 행위를 접했을 때도 미갈처럼 외형적인 현상에 의해 속단하지 말고 그 예배 행위자의 중심을 헤아려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로, 예배와 삶을 구분시키려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예배의 현장은 성(聖)스럽고 삶의 현장은 속(俗)되지 않다. 또한 예배는 성스럽고 삶은 속되지 않다.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배는 삶에서 출발하여 삶 속에서 열매 맺어야 한다. 예배 음악이 삶의 음악이 되어야 하며 반대로 삶의 음악이 예배 음악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믿는 사람들, 예배와 삶을 혼동하지는 않지만 구분하지도 않는 사람들, 이 사람들만이 삶과 예배 사이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예배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예배의 원형을 되찾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엘리트 적인 한국 교회 예배를 민중 예배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한국 교회 예배는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축제와 삶이라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예배 요소를 회복할 수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의지를 오늘의 한국 교회에 실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예배의 3요소인 설교와 성만찬과 음악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비대해진 설교의 군살을 빼어 내고 성만찬 예식을 강화하며 찬양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음악은 설교 중심에서 나오는 경직되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해소하는 무기이다. 음악은 강팍한 마음을 부드럽게 녹이며 권위주의적인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음악은 전달된 말씀의 감동을 배가시키며, 설교자가 말로 못 다한 부분을 보충한다.

둘째, 예배 중에 회중을 위하여 가능한 한 많은 찬양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특히 설교 후에 반드시 찬송 순서를 넣도록 한다. 설교 후에 부르는 찬송을 통하여 회중은 말씀에서 얻은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음악이 인간에게 어떤 감화력을 끼치는가를 아는 목회자들은 말씀 후의 찬송 순서를 빼놓을 수 없다. 설교 후에 곧 바로 광고를 한다든지, 헌금과 찬송을 병행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셋째, 이제 예배는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드려질 수 있다.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하여 응답하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예배의 자리이다. 음악은 이러한 응답이라는 관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예배 요소이다. 찬양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께 응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적인 분위기가 예배 전체를 지배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설교 위주의 예배, 설교에 매달리는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된다. 설교를 들은 것과 예배를 드린 것은 다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케이블 TV에서 아무리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해도 예배의 자리는 소중히 지켜질 수 있다.

넷째, 이러한 응답적인 예배의 자세는 삶에까지 이어져야 한다.

 

구속의 은총에 대한 응답적인 자세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곧 예배하는 자의 마음이다. 삶이 예배가 될 때 예배하는 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응답적인 자세로,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부끄러운 교회의 모습도 바로잡을 수 있다. 고질적인 교계의 선거 풍토가 개선되어질 수 있다. 물질 만능으로 멍든 상처투성이의 우리의 현주소를 바꿀 수 있다. 명예에 사족을 못쓰는 초라한 우리의 병든 마음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사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예배의 원형을 되찾는 일은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문성모 박사 (대전신학대학교 교수)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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