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

수호천사1 2012. 9. 9. 11:41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

고통에 문제의식의 출발점을 두는 세계관은 바알신앙이다. 바알신앙의 특징은 "풍요"와 "다산"이라고 하는 현세적 복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이다. 고통이란 현세적 복의 결여에서 야기된 것이며 따라서 고통의 제거는 바알신앙의 목적이다.


바알신앙은 주로 태양신인 남신과 대지를 상징하는 여신이 결합함으로써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태양이 땅에 잘 내려쬐었을 때 곡식의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준다는 자연주의적 사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바알신앙은 풍요와 다산이라는 현세적 복을 위한 신들의 성적결합을 재현하기 위해서 성전창녀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바알신앙의 모습은 중근동, 뿐아니라 인도 등지에서도 광범하게 나타난다. 인도의 힌두사원에는 신들의 신성한 결합을 상징하는 남녀교열상들로 가득차 있으며 탄트리즘이라는 신비주의로 이론화되어 있다.


바알신앙은 풍요와 다산의 현세적 복만을 말하고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바알신앙은 죄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깨달음"의 논리, 신비주의로 나아간다. 그래서 바알신앙에서 현세적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죄'의 문제보다는 '고통'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서, 쾌락의 극대화와 고통의 극소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신의 힘을 현실에 끌어들여서 '고통의 제거'를 추구한다면 후자는 신과의 합일을 통해서 '고통의 제거'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기복적 사고방식에서는 어떤 기계적인 작용을 가함으로써 이러한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는 사람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이다. 기계적 신앙이란 자신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많은 기도, 혹은 많은 헌금 등, 어떤 투입(input)를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세상적 복을 기계적으로 산출(output)해낼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바알신앙에서 신은 마치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오는 힘세고 전능한 종처럼 램프 사용자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하지 않는다. 주문(呪文)은 신적인 능력을 기계적으로 끌어내는 패스워드(Password)와 같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처럼 주문(呪文)은 그것을 외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오늘날 주문을 사용하는 많은 종교들은 그것이 기계적 신앙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교의 디크르(dhikr), 힌두교의 만트라(mantra) 불교의 진언(嗔言), 도교의 주문(呪文), 카톨릭 등에서 기계적으로 사용되는 주기도문, 영광송 등은 기계적 신앙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이 반복된 동작이나 노래, 기도문을 사용함으로써 신과 기계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며,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무아경, 황홀경, 삼매경을 추구한다.


신비주의는 기계적 신앙, 바알신앙의 또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바알신앙에는 반드시 인격의 상실을 바탕으로 하는 신비주의가 따른다. 신비주의의 특징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몰아경, 황홀경, 삼매경, 주객합일(主客合一) 등의 용어로 설명되어져 왔다. 신비주의에서는 항상 자기 정체성(identity)의 상실을 동반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이 나타난다. 신비주의는 자아상실, 즉 인격상실을 통한 합일이며 인격적 관계를 근거로 한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에서는 신의 정체성과 나의 정체성의 구분이 없어진다. '나'라고 하는 정체성 의식의 상실, 자아상실을 통해서 신과 합일된다.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Sufi) 사상은 신에 대한 지식, 즉 신지(神智)를 얻는 길은 신과의 합일(合一)이나 신에 흡수되는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수피 알 할라즈(Al-Hallaj)도 신과 자기의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자아상실적인 주객합일의 신비주의 사상은 장자(莊子)에서도 나타난다. 장자에 의하면 모든 것이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 장자에 있어서 절대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은 극한적 대립물의 대립과 주객의 차별을 넘어가는 것이다. 장자가 생각하는 주관과 대상의 합일(合一)은 지극히 자아상실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개별적인 자아(jiva)를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몰개성적인 대자아(大自我) '아트만'(Atman)을 말한다. 개별적 자아는 환상(maya)이어서 실재하지 않으며 아트만만이 실재한다.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개별자의 정체성은 원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 즉 고정불변하는 고유의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무아설(無我說)이 가르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개체로서의 자기 정체성(identity)의 포기가 아니라 육체의 소욕(所欲)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所欲)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갈5:16,17) 성령님의 인격에 나의 인격이 완전히 순종되어 있는 것이 성령충만이고 완전한 자기부인의 상태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결코 '나'라는 의식조차 상실하게 하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아상실적인 신비주의의 결론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단의 거짓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사단은 비인격적 관계, 기계적 관계를 원하므로 항상, 무인격적 상태를 원한다. 즉 자아상실, 의식상실의 상태로 유도한다. 즉 무아경, 몰아경, 환각상태, 최면상태, 무의식 상태는 사단이 원하는 상태이다. 사단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 인격의 상실 상태에서 역사한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은 결국 자기 인격을 상실하고 귀신의 인격에 의해서 점령된 상태이며 귀신에 의해서 조종되는 상태이다. 귀신은 그 댓가로서 잠시 동안 황홀경을 허락할 수 있다. 바알신앙에서는 자기의식의 상실을 위한 과정으로서 반복된 주문, 동작, 노래, 등이 따르며 귀신의 인격에 점령되었을 때는 광란과 자해 등이 나타난다. 갈멜산에서 엘리아와 대결하였던 바알선지자들은(왕상18:26-29) 이러한 전형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현상은 마약, 오컬트(occult) 등과 결부된 팝 음악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회사상이나 행위구원의 세계관들도 기계적 신앙이다. 인과업보에 입각한 윤회사상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행위구원의 사상은 철저하고 비인격적인 인과율의 시스템에 입각한 세계관이다. 인과율에 의한 구원은 철저히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단은 이러한 비인격적 기계적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화하는 작업을 즐겨한다. 중국에서 상제는 천(天), 리(理), 도(道) 등으로 비인격화 되었고, 인도의 브라만도 비인격화의 길을 걸었다. 불교의 법신불(法身佛)도 비인격적인 절대자의 이름이다. 서양에서는 하나님을 비인격화시켜서 이신론(理神論;Deism)을 만들어내었으며 오늘날에는 성령님을 비인격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심심찮게 행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단은 왜 비인격적인, 기계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가? 인격적 관계에서는 사단 자신의 정체가 폭로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격은 결코 속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을 모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격은 모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우리의 인격적 성장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의 인격은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낼 수 있다. 사단이 기계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영적, 도덕적 성장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단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식화 제도화시켜서 기계적 관계로 만들어버리도록 역사한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므로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자에게만 역사하신다. 즉 하나님께 순종된 인격에게만 역사하신다.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자주 찾으신다. 왜냐하면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자기를 쳐서 하나님과 좋은 인격적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격을 닮으며, 성령이 철저히 우리의 인격을 통제하고 인도할 때 성령충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격을 철저히 인정해야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외적인 형식으로, 기계적으로 조장하거나 창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므로 인격이 있는 자, 의식이 있는 자와 교통하신다. 그러므로 의식 상실의 입신 상태, 최면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볼 수 없다.

맺음말


세계관의 대결은 반드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세계관과 비성경적 세계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비성경적 세계관의 독버섯은 기독교 안에도 깊게 뿌리내릴 수 있다. 교회사는 이러한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다. 선교가 영적대결이고, 영적대결은 세계관의 대결이라면, 선교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교회 내부로부터 이다.

교회가 건강한 성경적 세계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온갖 잡다한 세계관과 세속주의, 물질주의의 혼합된 토양에 뿌리를 박는다면 선교도 그 토양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선교사는 쉽게 성경적 세계관보다는 자기자신의 세계관, 자기 문화의 세계관을 이식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싸움은 그리스도인 내부에서 먼저 일어나야 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바알 신앙을 계속해서 훼파하고 여호와 신앙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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