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기도의 본질

수호천사1 2012. 9. 9. 10:48

기도의 본질


세상적 삶을 떠나 신앙의 빛 속에 머무르기 위한 평범한 길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주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이른 바 말씀과 기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영의 세계로 진입하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향한 열망을 마음에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대부분은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입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들의 중요성을 모르거나 또 그들에 친숙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방법상에 문제가 있어서 영혼의 오랜 숙원인 정화 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신앙의 실수는 주님의 역사 하심과 인간의 노력을 조화시키는 과정이 서툴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해성의 세계를 영의 세계로 인식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꾸 기억의 지식으로만 신앙 생활을 하려고 드는 것이다. 주님의 역사에만 모든 것을 맡기면 인간의 노력이 그만큼 쇠퇴하고 반대로 주님의 역사 하심보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비중을 두면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온 총명과 능력이 앞서 더욱 불순하거나 이기적으로 되고 때로는 더욱 허약해지기도 한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세상 육체의 삶을 위한 일반적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정화를 위한 특별한 은혜이다. 일반적인 은혜는 모든 피조물의 번영과 질서와 보존을 위하여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으로 이는 자연계의 현상 뿐 아니라 인간이 먹고 자며 생각하고 뜻하며 활동하는 모든 육체적 삶에 임하여 있다. 이 은혜는 또 인간이 악을 버리든 버리지 않든 이런 조건에 관계없이 그들 육체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골고루 베풀어진다. 영혼을 정화시키는 일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주된 관심사라면 육체의 일은 영혼의 정화를 위한 한시적인 무대일 뿐이기에 시공간의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서는 유한한 인간이 볼 때 획일적이 될 수도 없고 보편 타당성이 없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구하지 않을지라도 이 세상 안의 피조물들에게 베풀어지는 주님의 일반적 은혜인 것이며 또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영혼의 정결을 위해 베풀어지는 주님의 특별한 은혜는 일반적 은혜와는 달리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악을 버리는 자만이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온 영적인 은혜는 언제든지 영혼의 지밀한 곳 안에 한량없이 부어지고 있지만 정작 그것은 인간의 악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가 인간이 그 악을 버림으로 그에게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육체의 일은 반드시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지만 영혼의 일은 만일 그가 악 안에 있지만 않으면 응답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육체의 일을 영적인 일처럼 획일적으로 처리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영의 일만이 생명의 본질이고 육체의 일은 영의 일을 위한 수단으로 주께서 각 사람에 알맞게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에서 무엇이 하나 잘못되면 그 여파는 자연계에 광범위하게 미치게 되는데 우리의 눈에는 자연계의 현상만 들어올 뿐 영적 세계의 움직임은 잡히지 않는다. 영적 세계에서 운용되는 법은 자연계에서 운용하는 법보다 상위에 있어 후자는 전자에 종속되는 것이 신적 질서이다. 거기 주님은 영과 육 두 세계 모두를 보고 계시지만 우리는 내적 시력의 한계 때문에 보다 본질에 속하는 영적 세계를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지상에 벌어지는 일들은 선과 진리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 보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된다.

이것은 또 성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물질이나 세상적 평안 등의 육체적인 것에 대한 돌보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성경이 겉으로는 글자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육의 세계를 표현한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실제로는 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어 그 속에 생명을 담고 있다. 비록 성경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역사의 흐름 속에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물질, 자연 등 인간의 육체적 삶에 관여하는 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 그 속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지상에서의 육체적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일에 관계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글자가 아니라 영이요 생명이라는 의미는 여기서도 증거된다.

주님께서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든지 생명의 양식으로 선과 진리를 베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그것들을 구하기 위해 주님께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선과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나오지만 인간은 인간대로 그것들을 간절히 사랑하는 열망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기에 인간이 스스로 애써 수고할지라도 그는 다만 생명을 담는 그릇의 역할밖에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과 또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에 의해 인간에게 무상으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 주실지라도 인간은 인간대로 스스로의 의지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애씀은 비록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될지라도 이렇게 얻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보상이라고 공로를 내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에서 구한다는 개념은 그때까지 자신에게 전연 없던 것을 어느 한 순간에 기도로 채움을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도의 응답 역시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칙과 같아서 이미 마음 밭에 뿌려진 진리의 씨앗이 어느 정도 자라남에 따라 이제 결실을 위해 부족한 볕을 공급해주는 그런 차원일 뿐이다. 그래서 기도는 웬만큼 신앙의 맛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드려지게 되는 것이다. 중생 도상에 있는 영혼들은 참된 기도 드리기를 그 무엇보다 염원하는데 그들에게는 이미 배우거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영적 지식들이 있지만 기실 이 지식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한 목적으로 기억의 창고에 수집해졌을 뿐 사랑의 선과 결합하지 못하여 아직 영에 속한 지식이 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여기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인데 이는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만나 그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내 안에 모시려는 작업인 것이다.

영의 세계를 이해성으로 들여다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세계는 인간의 이해 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적 빛은 영으로만 감지되는 만큼 육의 눈에 들어온 지식으로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빛을 너머 영으로 하나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들이 점차 벗겨질 때나 가능하다. 현실에서는 미흡할지라도 기도하는 그 당시만큼은 수많은 인간적인 것들을 저 아래로 벗어 던지고 세상과 관련한 모든 생각들을 끊음으로 우리의 영은 사뿐히 하나님께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때로부터 우리의 영은 생명의 본질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자기 고유의 총명에서 나온 빛을 몰아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은 그 영을 인도하는 빛은 순간 순간으로 하나님만이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이성의 빛을 앞세워 신앙 생활하던 자가 이러한 훈련을 통해 전심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몰입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때까지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던 성경 말씀은 마침내 영이요 생명으로 우리 마음에 역사 할 것이다.

기도의 대부분이 인간의 정신작용에 불과한 기억 속 지식으로 이루어질 경우 그 기도에는 참 생명의 능력이 깃들지 못한다. 매사 인간 스스로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 같으나 기실 우리 속에 주님 곧 주님의 생명이 그러한 수고를 하시는 것이고 인간은 그저 주님의 운행을 자신의 것인 양 느낄 뿐이다. 내 힘 같지만 내 힘이 아니고 내 생명 같지만 내 생명이 아닌 무한하신 주님의 생명이요 명백한 주님의 역사이기에 그 힘과 생명은 거칠 것이 없으며 어떠한 불가능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고대하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에 더욱 의존하여 기도를 드리기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비롯된 능력이나 총명을 주님 뒤로 물린다면 우리 마음 속에는 주님께 구하고 또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열망이 일어날 것이고 그에 따라 주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정말 위대한 것은 주께서 열어주시는 것과 인간이 스스로 얻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해성이 아무리 깊고 지혜로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신다면 우리 마음에는 결코 사랑의 불이 붙지 않는다. 애정에 선한 열망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이해성이 아무리 깊은 세계에 진입할지라도 그것은 생명이 없는 차갑고 냉랭한 빛만을 내기 마련이다. 우리의 이해성 그 자체로는 어떠한 선한 것도 스스로 떠올릴 수 없고 오직 주께서 이해성을 열어주셔야 그것은 가능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온 마음이 주께 이끌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주의 말씀이 이슬처럼 스며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등 모든 선한 것을 얻기 위하여 먼저 주님께 간구 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설령 우리가 오랜 경험과 말씀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인해 어느 정도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는 이해성이 열린 듯 여겨질지라도 지속적으로 주께 구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 깨달은 것을 행할 힘 역시 주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도 이미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지성과 오랜 경륜에서 얻은 능력이 있기에 그의 이해성으로는 영혼이 병든 원인을 밝혀내고 또 그의 강인한 의지로는 그것에 대한 영적 치유를 감당해낼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주님으로부터 와서 인간 안에 머물러 있는 그 능력들은 인간이 그때까지 버리지 못한 악으로 인해 오염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 순간으로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구하는 기도로 응답 받는 것에 익숙하여지면 그때는 인간이 주님을 앞서나가지 않을 것이다.

구하는 기도는 인간이 자기 영혼의 부족 분을 주님께 채움 받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실상 기도를 드리는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받치려 노력하는데 더 많은 열정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물론 기도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되는 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은 정작 인간이 얼마만큼 자신에 속한 것을 떼어 주님께 드리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자신의 것으로 꼭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물러나는 만큼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역사 하실 수 있기에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는 나 자신을 주님께 받치겠다는 선한 열망이 먼저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은혜는 인간의 역할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 홀로 북 치고 장구 치시면서 다 이루어 가시지만 이러한 자비로운 역사는 반드시 인간의 역할을 수단 삼아 유입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앞에 다가와 계시고 무한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안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그분께 받칠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일컬어 거저 얻는 무상의 은혜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선한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주님은 이를 마치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결과인 양 여겨지도록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생각과 의지의 자유를 부여하심으로 인간의 역할을 최대한 인정해주시려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 때문인 것이다. 겉보기로는 생명이 마치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이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생명은 사실 임의로 우리 안과 밖에 흘러 다니기에 인간의 위치는 생명의 통로 역할만을 할 뿐이다. 인간에게는 그저 생명의 흐름에 순종의 역사만 있을 뿐 인간이 앞서 그 흐름을 인도하려들거나 생명의 역사를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결과로 삼으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총명과 이해성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무시하는 마음 상태에서는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구한다고 할지라도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서 비롯된 열심일 뿐 주님으로부터 유입된 선한 열망에 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를 드려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혹 주님과 연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자신의 힘으로만 애써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마음의 지성소에 주님을 모시지 못한 처지에서는 아무리 인간의 부르짖음이 간절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겉 사람에 속한 육의 일이요 자기 사랑에서 나온 연민의 몸부림에 속할 뿐이다. 그것은 진정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에 의해 영혼 깊은 곳이 데워진 순수한 뜨거움이라기보다 많은 불순한 것들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격정에서 일어난 열기로 데워진 것이기에 아궁이 속 냄비처럼 그 당시만 잠시 끓었다가 급히 식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구하는 기도는 그것이 주님의 인도를 간절히 열망하는 상태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드려질 때 응답을 받는다. 사실 주님의 인도를 간절히 열망하는 애정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다.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것을 뒤로 물리고 인간 고유의 총명을 버리도록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이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고 그분의 인도하심 없이는 한 걸음도 걸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참으로 깊고도 깊은 진리이다. 이제 스스로의 능력이나 총명으로 신앙을 진척시키려 하지 말자. 이것이 곧 천적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고 선악과를 먹는 아주 지독한 악이기 때문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