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자기 비움과 희생
형제, 자매들이 살아 온 선교적인 삶
김 선교사는 한국에서 많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를 지내다가 유명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엘리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선교지로 떠났다. 선교지에서 그는 가족부양과 생활을 위해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아파트의 관리인도 했다. 이렇게 자비량을 하면서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수년 후에는 현지 대학생 결신자들과 제자들이 세워졌다. 후에는 변호사로 일을 하면서 자립선교를 했다.
80년대 초 한국 인력개발원은 캐나다에 일할 미싱공 모집 광고를 냈다. 우리 선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제자훈련을 받은 많은 자매들이 지원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이었고, 그 중에는 S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자매도 있었다. 이들은 물론 평소에 미싱을 만져본 적도 없는 자매들이었다. 이들이 미싱공이 되어 캐나다에 가고자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캐나다에서 대학생 선교를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그 중 20명을 선발했다. 미싱 20대를 사서 선교회 지하실에 설치했다. 3개월 동안 새벽 큐티와 합심기도 시간 이외에는 종일 미싱 연습을 했다. 오직 선교에 대한 소명감을 갖고 믿음으로 연습을 하니 3년 정도 미싱업에 종사한 사람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위니펙이라는 북쪽 도시에 있는 현지 봉제공장과 계약을 맺고 미싱공 선교사들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매일 새벽기도와 큐티 시간을 가졌고, 낮에는 종일 봉제공장에서 미싱 일을 했다. 미싱공의 일은 소위 3D업종에 해당하는 매우 힘든 단순노동이었고, 또 이들은 단기간에 미싱 실력을 쌓았으니 그 일이 쉽지 않았다. 어떤 자매는 미싱 바늘로 자기 손가락을 박기도 했다. 이렇게 일을 하면서 밤에는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고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암송하며 현지 언어정복에 집중했다. 그리고 쉬는 날이나 주말에는 캠퍼스에 올라가 그 대학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들을 통해 현지 대학생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제자로 훈련받는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이들 중에서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싱공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계약 기간 동안 봉제 일을 하면서 그 사회에 적응을 했고, 이후에는 다양한 직종으로 바뀌었다. 그들 중에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해서 공인 회계사의 전문직을 얻어 주류 사회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봉제 일을 하면서 선교할 때나 지금이나 사역의 형태는 변치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자비량으로 현지 대학생 전도 및 제자양성 사역을 하고 있다.
Y 선교사는 대기업 중공업 직원으로서 인도에 파견을 받았다. 그는 우리 선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 제자훈련을 받고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던 리더였다. 그는 이 파견근무를 하나님께서 인도 대학생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호텔에 머물면서 다른 직원과 함께 인도 지사를 만들었다. 그는 도착한 첫 주부터 호텔 방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인도 캠퍼스 선교를 위해 기도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주말에는 대학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 후 가족이 합류하게 되었다.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주일 예배를 드리며 학생들을 초청해서 성경을 가르쳤다. 오랜 힌두의 전통에 살았기에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학생들 가운데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학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또한 그는 언제나 간절히 기도하면서 진실되고 충성되이 회사일을 하였다. 현지 공사를 수주하는 그는 업무 실적이 좋아서 세 번이나 주재원 기한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기한 연장을 할 수 없었지만, 본국에 돌아가면 임원이 될 수 있었다. 인도와 같이 열악한 곳에서 선교의 사명과 회사 일을 충성스럽게 섬겼으니 이제 본국에 돌아가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며 기도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의 사역으로 맺힌 열매들을 두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인도 학생들을 돌보는 길을 선택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본다면 그의 행동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현지 학생들 가운데 더욱 그와 복음을 신뢰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은 이 사역을 통해 선교사들도 일어나고 여러 현지인 지도자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난 8월에 남미 선교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의 목적은 파라과이를 방문해서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L 선교사 부부를 만나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L 선교사는 80년대에 한국에서 은행 직원으로 일하는 엘리트였다. 그는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88년도에 아내인 김 선교사와 함께 파라과이 개척 선교사로 나갔다. 우리 모임의 선교사들은 모두가 자비량으로 현지 대학생 선교 사역을 한다. 이들 부부는 파라과이에 도착해서 보따리 장사를 해서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현지 대학생을 전도하고 제자훈련을 시켰다. 후에는 현지에 젖소 농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젖소 농장 일부에 들어간 땅을 판 현지인으로부터 거듭 부당한 요구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갈등이 깊어져 그 사람으로부터 총을 맞았다. 정말 기적 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생명이 보존되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혈액암이 발견되었다. L 선교사 부부는 현지 사역을 다른 사역자들에게 맡기고 급히 귀국했다. 한국에서 2년 동안 치료를 받으며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혈액암이 낫게 되었다. L 선교사 부부는 이제 50대 후반이다. 이들은 병이 낫자 파라과이 선교를 계속해야 한다며 지난 봄 다시 파라과이로 떠났다. 나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을 생각하면서 이들 부부가 사역하는 현장을 보고 함께 기도하고 돌아왔다.
또 다른 선교사는 X국에서 사역하다가 감옥에 갇혀 매도 맞고 추방을 당했다. 그는 이름과 성까지 바꾸어 다시 들어가 사역하고 있다.
걸어온 길
나는 지난 40년 간 내가 몸담고 섬기고 있는 공동체에서 파송을 받아 세계 각 처에서 선교하고 있는 이와 비슷한 많은 선교사들의 사연을 알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직업을 가지고 선교하는 전문인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생활비를 지원 받지 않는다. 다양한 직업을 통해서 자립하며 선교한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혹은 자립하는 일터에서 보내야 한다. 한국에 있었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다 버리고 이름도, 빛도 없이 현지인 대학생 전도 및 제자화를 통한 현지인 지도자 양성에 일생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 때로는 생활비를 지원 받으며 선교하는 한국인 목회자 선교사들로부터 평신도라고 무시도 받고 따돌림도 받는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들도 있다. 또 지원 받는 목회자 선교사들 가운데 훌륭한 선교사들이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밤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서 현지인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한다. 자녀양육과 현지언어 습득, 예배 공동체를 섬기는 등 여러 역할을 감당하며 사역을 한다. 사역에 드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이들을 통해 많은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는 이해되지 않는 결과이다.
1964년 1월, 내가 대학 1학년이었던 겨울, 나는 학교 게시판에 붙은 한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영어성경 및 영어회화 공부, 강사는 미국인 사라 배리 선교사”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그곳을 찾아갔다. 스무 명쯤 모였다. 시내에 있는 한 예배당을 빌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영어성경과 회화공부를 했다. 나는 처음 성경을 접했다. 한달 반쯤 지나 종강할 때가 되자 7,8명 정도가 남았다. 사라 선교사님은 종강파티를 자기 집에서 하겠다고 했다. 나는 난생 처음 미국사람 집에 가본다는 기대를 가졌다. 당시에는 미국선교사들이 어느 도시든 시 외곽 숲속에 미국식 집을 짓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살고 있는 곳은 연탄불을 때우는 단칸방이었다. 모포 한 장과 몇 권의 책이 살림의 전부였다. 당시 사라 배리 선교사는 31세로서 미인이었다. 밝고 재미있고 구김살이 없었다. 우리를 진심으로 대하며 성심을 다해 영어와 성경을 가르쳐주었다. 현재 그녀는 81세 이신데 시카고 UBF에서 이전과 비슷하게 살고 계시며, 대학생들과 지금까지도 일대일 성경공부를 섬기고 있다. 나는 졸업 후 군대생활과 은행원 등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1972년 내 나이 29세에 하나님은 나를 UBF 전임사역자로 부르셔서 지금까지 38년간 대학생 제자양성과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양성 및 파송의 한 길을 달려오게 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선교적 삶
나는 지금까지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그리고 나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마음에 와 닿는 선교일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선교는 곧 선교의 주체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역사'라는 것이다. 선교란 곧 자기 비움이요, 자기 희생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선교의 모델은 역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자기 비움과 자기희생의 모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본받고자 스스로 자비량 선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며, 그는 오늘날의 수많은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들의 본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곧 창조주시요, 영원 속에 스스로 살아 계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타락하고 병들어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겸손과 순종을 실천하는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길 소망한다.
이현정 목사|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한국대표
출처 | 중국어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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