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아더 핑크)

수호천사1 2012. 7. 23. 21:46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 아더 핑크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완성하실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원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 바 사도신경은 비교적 깊고 자세하게 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제기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죤 피어슨(John Pearson) 주교가 <사도신경 강해> (Exposition of the Creed)라는 제목으로1867년에 출판한 책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그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2.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으며, 단지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뿐이었다.
3. 우리는 잉태의 과정, 즉 처녀가 성령에 의해 잉태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4.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누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실제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을 안다.
5. 그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셨다.
6.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죄성을 믿기 위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 피어슨 주교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법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자의 몸에 잉태되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나 육체적 결합으로나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방법으로 잉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령의 독자적이며 능력있고 불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처녀가 잉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잉태되신 분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지니시고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교리가 논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 있음을 왜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을 임신케 하시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처녀를 잉태케 하실 수 있는 실로 전능 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이며, 둘째로는 그의 무죄성이다. 원죄를 지닌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흠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 사실 이외의 어떤 다른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우리와는 달리 처녀에게서 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기사는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이 기적적이었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또한 그 기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잉태만이 초자연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의 성경 인물도-이삭의 어머니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만이 갖는 고유한 의미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은 항상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상대되는 구절과 결합해서 생각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신적이거나 맹신적인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지 못하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탄생으로보다는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은 부활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했던 것이다(롬 1: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나시지 않고 성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한 인격에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학자들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의 연합을 "위격의 연합"(the hypostatic union)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 중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탄생에서 바로 고난으로 건너 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귀감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 26).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삼분의 일을 할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술하는데에 거의 반을 할애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이나 고난 주간 이전에 겪은 어떤 고통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생애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다. 그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단에게 고난받았으며 그를 죽이려 하던 악한 자들에게서도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중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인간의 경험일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의 거룩하심을 더 강화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박해 당하시던 당시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자. 왜 빌라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가? 피어슨 주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확실한 사망의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한 사람의 증인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죽음을 인정했다. 셋째,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빌라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된 사도신경의 기사에 대한 피어슨 주교의 보충 설명을 살펴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게 하시니, 이 때는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때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라,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무죄하나고 선언한 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성경의 예언에 따라 그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벌에 내어 주었더라.


피어슨은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갖는 세 가지 요점을 잘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날짜를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세속 세계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세푸스(Josephus)나 타키투스(Tacitus)와 같은 역사가들은 빌라도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에게 고난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정한다.


빌라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빌라도는 거듭 말했다(요 19:4, 6). 예수님이 법률적으로 무죄하였다면 왜 사형을 선고 받았는가? 특히 죄인들을 위하여 메시야가 고난 받으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에 비추어서 그것을 생각해 보라.


둘째,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도록 하였고(요 19:1-3), 그를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었다(요 19:16). 그리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인 힘이었던 로마 정부의 대행자가 영광의 주를 박해했던 것이다.


시편 2편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같은 시편이 말하고 있다(시 2:4).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 속에서 빌라도[와 그를 비롯한 세상의 수 많은 통치자]가 저버린 메시야에 대한 그를 보내신 목적을 선언하신다고 시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빌라도는 이 경고와 권유를 무시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노예나 흉악범을 죽이던 로마의 처형법이다. 그것이 너무 수치스런 형벌이기에 예수님을 일개 선지자로 간구하는 모슬렘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기를 거절한다. 그 대신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인물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탈무드는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또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이 제도가 너무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선언가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상상만하여도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경대로"(고전 15:3) 죽으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죽음 사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도 구약 성경에 의해서, 또 주님 자신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하고 채찍에 맞게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 전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 역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분명히 예언한 것이다(마 16:21, 24).


시 22:16도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이 구절들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시편 기록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기사 이외에도 구약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모형(type) 혹은 예표라고 불리운다.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보다. 그들이 제사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죽는데 사용될 나뭇짐을 지고 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못박히실 십자가를 지고 가심을 예시해 준다(창 22:6).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 기사에서도 암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고 제사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라. 나중에 요한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사실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요 19:36).

또 다른 모형은 놋뱀 사건에서도 보여진다. 불뱀이 나타나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자,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고 낫게 되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이 언급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요 3:14 참고, 민 21:49).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굴한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의 형벌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로마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최고의 고통과 최대의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시려 선택했던 죽음의 방법-십자가의 죽음-이었다(빌 2:8).


신 21:23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생각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 저주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신 27:26;갈 3:10, 13). 둘째,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이다. 셋째,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 가지의 핵심적인 신학적 교훈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소한 다른 두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첫째,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즉 "내가 목마르다"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잘 감당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평가해 주는 영구불변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는 높이 들리워야 했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5).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단순한 말 속에 내포된 영생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했다.


그리스도 죽음의 영향력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언어 생활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토론할 때에 우리는 결정적인(crucial)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crux(십자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중심이듯이, 토론의 중심되는 문제를 "결정적"(crucial)인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Cross)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의 중심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는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어린 예수가 달려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그 달려가는 모습에 의해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긴다. 흘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 준다. 그가 팔을 뻗을 때에 그 몸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앞으로 자기가 죽을 줄을 완전히 알고서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을 연구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온전한 순종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의 행위로 간주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에게 검을 빼어들고 대항하자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요 18:11 참고;마 26:39;요 12:27, 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셨으므로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신 분이시다. 땅의 기초도 놓이기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바울은 장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참고, 요 10:17,18; 요 17:1;요 19:30;눅 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종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노예의 순종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죽기 위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분의 자발적 순종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시간(time)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적어도 세 구절에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 1:20)라고 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 9:26) 시간 속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시간 가운데 최고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그의 죽음은 영원까지, 즉 시간이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때까지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끝이 나고 밤과 낮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며(계 22:3) 어린 양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주(universe)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미한 지구라는 조그마한 항성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로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 20)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 11)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는 그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진리는 여러 서신에서와 요한계시록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만한 때에 그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은 장차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천국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으시고 또 그 죽음으로 미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계 20:11-15;계 21:1-8계 19:30;계 22:3).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성부와 사단의 역할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재판관의 오판이나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처럼 그것을 엄청난 실수로 여기시지 않으시는가?


원칙적으로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 중의 일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으로 엄청난 실수이며 재판관의 오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 3:17)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설교 중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던 계획의 성취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미래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셨던 것이다. 사건들이 아무리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후에 인간을 꼭두각시로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하나님은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거나 못된 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시거나 그것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선한 마음을 불어 넣으셨다(출 12:31-3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을 향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은 바로에게 왕권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잔인한 마음을 허락하셨다(출 14:1-9). 이처럼 각 사람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같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사각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의 양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


분명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나 오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9-21). 이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 및 그의 대속적 죽음을 밝히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그가 계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아버지와 동등하시나 그와 구분되신 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없었고, 그 입에는 거짓된 말이 없었으며, 언제 한번 그릇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우리처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와 완전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실 충만한 근거를 만들어 드렸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또는 우리 죄를 간과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을 요구하시는데 그리스도는 그 형 벌을 완전히 치르셨다.


우리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는 위의 설명과 같은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시행자인 동시에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던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왜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는가?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로 말미 암아 우리를 살피려 하심"(요일 4:9)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기 위함"(요일 4:10)과 또한 "세상의 구주가 되기 위해"(요일 4:14)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다.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 아들이 죽지 않고는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 보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아 죽으실 때, 하나님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획했으며, 그 계획의 목표는 우리의 구원이었다. 요한이 말한 대로 아버지는 세상의 구주가 되시도록 아들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에서 사단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사단이 어떤 책임을 지니고 있는가? 그는 그 죽음을 기뻐했는가?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주어실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성공하셨는가? 성공하셨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마귀를 멸하셨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 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4, 15).


우리를 거스리는 권세는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망으로 말미 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히 2:14)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의 패배이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패배당하였으며, 그의 능력은 파괴되고 있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묶어 불못으로 던져 넣으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패배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아셨으며, 사단도 또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사실은 사단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그에게 극심한 적대 행위를 한 것과 예수님의 죽으실 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증오로 광분 하는 모습이 더 분명해지는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사단은 십자가를 지러가는 예수님의 길을 바꿀 수 없게 됨을 알자, 그 길을 대단히 고통스럽게 하고, 죽음의 고난을 더욱 쓰라리게 하려 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사단이 배신자 가룟 유다를 충동질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노심을 선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다음과 같이 사단과 죄에 대한 승리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흑암의 왕자, 우린 그를 두려워 않네. 그의 진노도 능히 견디네. 자, 그에게는 진노만 있나니, 이 한 마디 그에게 있을 뿐이네. "전능하신 방패는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성경은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적어도 여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화목(propitiation)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요일 2:2) 라고 했다.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바울도 그 단어를 사용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3-25).


이러한 화목이라는 단어는 화해(reconciliation), 속죄(expiation), 변상(satisfaction) 및 보상(atonement) 등과 같은 부류의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는 사전적인 뜻이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된 바로 그 용법이다. 신학자들은 때때로 이 단어를 하나님 편에서 본 주님의 죽음의 양상이라 설명했다. 화목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및 공의로우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일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하나님은 아무런 장애없이 그의 원하시는 바를-죄인을 구원 함-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조금도 타협치 않으신다.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도록 하는 의로운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못본 척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충분한 형벌을 요구하셨고, 또 그것은 십자가에서 충분히 지불되었다. 화목을 이루어 오신 하나님은 지금 이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죄인들을 용서 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많은 인간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죽음이란 방법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화목케 하시며 인간은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데에는 또 다른 다섯 개의 단어가 사용된다. 그것은 희생(sacrifice), 제물(offering). 대속물(ransom), 구속(redemption), 화해(reconciliation) 등이다. 마지막 단어 화해는 "관계의 변화", '서먹서먹함의 마무리" 및 "우정의 회복"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의어로는 "재연합"(reunion), 또는 "조화"(harmony) 등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 죽음과 관계된 설명들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개념을 가져다 줄 뿐이지 거기에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누가 누구에게 화해되는가? 화해(화목과 마찬가지로)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이러한 표현은 화목되어지는 대상이 하나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 19).


그렇다면 사전적인 이해는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화목되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화목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올 성경 말씀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라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19-22).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교제의 장애물을 제거하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화목케 하셨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화목을 받아들이시려고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실 계획을 세울 뿐 아니라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 역사상의 한 사건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그 이상의 영원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거룩하신 적대감을 타협하지 않고도 죄많은 백성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타협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의롭게 여기다(justify), 또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였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6).


칭의란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칭의 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또는 인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받을 만한 가치"라는 구절을 제외하고는 잘못된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구원받을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된 그리스도의 가치와 밀접히 연관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 하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칭의가 가치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전적 설명의 마지막 부분, 즉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이란 말은 아주 훌륭한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여기에서는 "되어지는"(made)이라는 단어를 강조 하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다(makes).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지은 일이 없었던 사람으로 간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로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나로서(what I am) 아심을 뜻하며,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미래에 무엇을 할 것 인가를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양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신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의 공식적인 자격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죄를 범했으며 다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롬 3:26)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어떻게 의롭게 하시는가? 이 문제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 욥의 한 친구도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 25:4). 욥의 친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했다(롬 3:26). 첫째,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칭 의의 의로운 기초를 이루어 놓으셨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게 하시는 모든 자들에게서 분명한 반응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만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은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있어서 그것은 실로 값비싼 것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성육신과 뒤 이은 그의 독생자의 죽음을 요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단히 방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누구도 그 깊이를 측량치 못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 보면 몇 가지 분명한 사상이 드러난다. 첫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증거해 준다. 둘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정성을 입증해 준다. 개인적으로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죽으셨던 것이다. 셋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용납해 준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빛을 면제시켜 준다면 그는 그 빛의 액수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때에 모욕이나 허풍 떠는 것을 용납한다면 다른 경우에도 그 무례함을 용납해주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용서는 자신의 희생을 치르고 잘못된 행동을 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무죄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 원리가 구속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용서의 행위는 진정 속죄의 행위임이 강하게 역설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속죄의 필요성을 없이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밝혀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해주며 그것을 꼭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용서는 정의의 원리를 가장 먼저 충족시키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용서 하심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용서의 근거가 된다는 이러한 주장은 신약 성경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분명한 것 이다. 회개가 과거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는 없으며 다만 미래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또한 구원으로 시작되지 않는 종교는 교육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성숙에 관해서 뿐 아니라 죄로 인한 부패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또 그것을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값싸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엔 적어도 두 가지가 요구된다. 죄인은 심판대에 서야 하며, 그 죄인의 자리에 적합한 대리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보리 산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리자로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졌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과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기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근거가 된다. 적어도 두 개의 성경 구절이 이 주제와 연관되어 진다.

첫째,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 거하도록 받아주셨다고 했다(KJV 참조), 필립(J.B.Phillips)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환대하셨다" 라고 번역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환대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이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말씀을 생각하고 이 서신을 썼음이 분명하다.


또한 받아들이심은 관계를 기초로 한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자 안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의 연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관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용서받지 못할 자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멀리 떠나"-하나님께로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골 1:21). 이사야도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떼어놓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모든 특권도 얻게 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그 안에"라는 말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보라.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특전을 헤아려 보라.


두번째 구절은 롬 8:33, 34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의 완전성을 이 구절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편이시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고소하겠는가? 하나님은 아니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보다 더 큰 자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지금 "사랑하시는 자"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는가?

 

첫째 자세는 믿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자들조차도 그의 죽음 사실을 믿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장사지내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간 믿음이란 그가 죽으신 목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누구든지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자세는 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아무리 어두운 길이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경험, 아무리 깊은 고뇌, 혹은 아무리 강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번째 자세는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바울은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반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보잘 것 없으며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체하며 그를 섬기는 일에 무관심한 경우 많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특권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나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는 우리도 모든 특권을 필요하다면 희생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자진해서 인간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순종하고 있는가?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다소의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필요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이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시선을 돌리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남을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인 우리는 기꺼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빌 2:3, 4)


장사되신 그리스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반드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도신경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채 바로 부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주님의 장사되심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이것을 언급하는데, 복음서 기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 빠뜨린 사항을 추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만이 무덤을 제공한 요셉이 부자였다고 말한다. 또 마가 혼자만이 그가 존귀한 공회원 이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에 대해서는 서신서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항목에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포함시켰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다.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죽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줌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들이 죽을 때, 자기 몸이 땅에 묻히든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든 상관없다고 경솔히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체를 중시하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당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 도르가의 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씻어져 장사되기 위해 다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은 몸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시체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내에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화장 제도가 없어지고 매장 제도가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 세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장사되었던 방식대로 장사되기를 바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나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장사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몸이든지 분해된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사람도 납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 넣어져 흙에 묻힌 사람과 똑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부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몸소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기 몸에 짊어진 일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치워졌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죄는 심판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이라고 했다. 여기서 죄를 "지고가는"이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 예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었다. 레 16:22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 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분명히 그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극적인 형태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만드셨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는 묵묵히 죄를 "지고가는"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며 그의 장사되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죄에 대한 마지막 처분은 그의 장사되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에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 무덤에까지 들어가셨다. 그리고 죄의 짐과 전혀 상관없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이다.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의 생명과 존재를 규명하지 않듯이 무덤에서 성취된 죄에 대한 처분도 규명할 수 없다.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양상이었던 장사되심 속에는 자신에 게 주어진 죄의 심판에 대한 처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죤 번연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번연은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결국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 짐은 그의 죄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위해 거기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눈에 고이게 된다. "복되도다, 십자가여"라고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이여 다 복되시도다"라고 소리친다. 그 후에 그는 자기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그 짐은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 빈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다시는 그가 그 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나타내 주는 다음과 같은 합창을 하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 장사되셔서 내 죄를 씻으신 주님. -월버 챔프맨의 "어느날"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셨을까?


사도신경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실제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믿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옥(hell)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이 처음 영어로 번역될 때 의미했던 그 의미가 아니다.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또는 "덮여진" 장소 라는 뜻의 앵글펄 색슨어인 "Hella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는 악인들이 형벌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그 뜻이 죄인이 사후에 가서 영원히 거하는 비탄의 장소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 (hell)은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셨는가? 분명한 것은 명확한 사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 2:24-31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한 첫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내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것임이로다.


여기서 베드로는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가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시편에서 인용된 이 말씀의 의미는 시편 본문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두 세 개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과연 음부에 내려 가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장소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못 박히시던 근처에 있는 동산 안의 새로 만든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면 그의 영은 어디로 가셨는가?


주님께서는 친히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다.


그 낙원이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그것을 하늘로 믿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다시 두번 사용되는데, 각기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고 한다(계 2:7;계 22:2). 이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은 죽으실 때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용된 본문이 원래 뜻하는 바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 대로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는 신약의 "낙원"(Paradise)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산"(garden)이나 "숲"(grove)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에덴 동산이 하나의 낙원이었다(창 2:8 참고;느 2:8:전 2:5;아 4:13).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복되게 죽은 자들의 장소를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간 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3일 동안을 어디에서 보내셨는가 하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가 머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음부에 갔었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육체적, 영적 모든 면에서 죽음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그대로 지닌 채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인성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셨으며 또한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셨으며 몸이 장사되어졌으며 그의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셨다.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신 사실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른 인간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웨스트코트(B.F.Westc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그 사실은(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교리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게 해준다.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의 몸은 무덤에 놓였고 그의 영혼은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리라 생각되는 그 나라로 들어가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다 겪으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가 계셨던 곳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 의 상태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거처에 계시게 되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맛보셨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러나 인격적으로나 경험하신 바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으며, 죽음이 그를 매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활, 승천하셨다.


여러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부활하신 구주께서 복되게 죽은 자를 음부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셨다(엡 4:8;히 11:40;히 12:18, 23을 보라). 만약 그렇다면 음부는 복되게 죽은 자들의 거처는 아닌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악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음부가 지옥이 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죽을 때에 즉시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결코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올라간다"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천국에서의 재연합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빌 1:23).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런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사도신경의 위대한 기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사도신경 기사는 구세주가 고난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도신경보다 훨씬 후에 생겨난 여러 신조들과 신앙 고백문들은 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더 길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39개 조항의 신앙 고백 중 제2조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과 뼈와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구비한 신체를 다시 취하셨다."


이 조항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진정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둘째는 몸이 다시 부활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는 부활한 몸의 변화이다.


여기에 피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소생이 아니라 진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나 다른 어떤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브룬너 (E.Brunner)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은 부활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 "또 프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은 "신약 성경 전체가 부활 사건을 감안하여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지만 어떤 학자도 이것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살펴볼 때 매우 정확하다. 고전 15:3, 4절고전 15:3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쓴 후에 이어서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라고 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도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재확인한다. 분명한 증거가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활을 믿는 확실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가보라. 기독교 변증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을 꽃아 놓은 서가에서 부활 신앙에 대해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들 중에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이 그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참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의 진실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빈무덤과 시체가 사라진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시체를 도둑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시체를 도둑맞았다면 누구의 짓인가? 그의 대적자들인가? 그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사도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왜 그 시체를 내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그것을 가져갔는가? 그럴 수 없다. 시체가 있던 무덤은 육중한 돌로 박혀 있었으며, 인봉되었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가 분명한 비진리의 메시지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실상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여인들도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싫어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부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음은 불신자들까지도 인정했다. 분명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훔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불신앙적인 비판자조차 빈무덤과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이러한 침묵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부활 증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회개가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초대 교회의 그 오만한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철저히 대적했었다. 그러나 그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그는 자기의 회심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부활 사건의 요점을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들은 바를 아그립바 왕에게 증거하면서,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다(행 26:25, 2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부활의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서의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의 나타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설명해 준다. 제임스 데니(Jamas Denny) 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복음서 기자가 쓴 부활 기사는 우리가 취급해야 할 많은 중요한 증거들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범위(복음서-역자주) 밖에 놓여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서 자체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다 확고한 역사적 증거는 이렇다. 부활은 믿어졌고, 전파되었고, 퍼져나갔으며, 또한 그 열매를 맺어 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를 무시하려는 것이거나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복음서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약의 어느 성경도 기록되기 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며 대단히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이다. 이것 또한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th Thomas)는 <기독교와 그리스도>(Christianity is Christ)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여러 가지 증거들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확고한 내용이며, 함께 모아보면 그 주장은 중복적이고 충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비판의 망치가 두들겨도 하나의 파편도 내지 못했던 반석인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부활을 지지해 주는 이런 압도적인 증거를 논박하는 일에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주로 기적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불신앙을 변호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같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옹호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를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인 유월절(Passover)과 승천하신 때인 오순절(Pentecost) 사이에는 50일의 간격이 있다(현대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오순절 대신에 부활절<Easter>과 성령 강림절<Whitsun. Whitsunday>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행 1:3행 1:3)라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후, 즉 오순절 며칠 전에 승천하셨다고 결론내린다.


주님께서 왜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는가? 적어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40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주로 "시련"이나 "시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한 예로는 출 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생활 40년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 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40일과 그 기간이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수 많은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이 그의 존재 양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십자가 지실 것을 예상하시면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슬픔 등과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가하셨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하몬드(Canon T.C.Hammon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새로운 실존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비하의 상황하에 있었던 자신을 완전히 탈피하지 아니하시고, 오류없이 실재적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필연적 관계를 재개하셨다. 이와 같은 부활이후 그리스도의 "현현"하심은 "많은 증거"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를 응하시는 사락과 고귀한 겸손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셨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서 감람산이라는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베다니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담소하신 후에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들리우셨다. 누가는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고 기록했다. 그들이 자세히 구름을 쳐다볼 때, 횐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행 1:10, 11).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기록은 놀랄만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수식도 덧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을 확신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바만을 말하고 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오직 부활의 결과, 즉 부활 하여 살아계신 주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천에 있어 서는 그 결과가 아니라 승천 그 자체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승천하셨다"(히 4:14). 둘째, 그는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 (히 9:24). 첫째 구절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 밖에"나 "저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궤변하는 자들의 반대는 헛된 것이다. 성경은 불가피하게 천국을 "위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땅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 즉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이 존재함을 보증해 준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곳"(왕상 8:43)으로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늘은 관념이나 꿈, 혹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이며, 지금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승천하셨으며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다(히 9:14). 바울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임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말한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다른 사실, 즉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 처럼 승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도 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승천의 중요성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역시 그리스도 승천의 중요성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중요한 한 부분인 히브리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ith Thomas)는 그것을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 주님께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승천하심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제사장 직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입장이 승천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승천에 대하여 적어도 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확실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참고 ; 요 1:51;요 3:13;요 13:3;요 17:11;요 20:17).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그 말씀을 이해 했으며 그래서 승천이 진정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며 글을 쓴 것이다.


승천은 몇 가지의 뚜렷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 첫째,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의 원인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 14:28)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였다. 누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던 때(승천시)에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눅 24:52)고 했다.


승천은 또한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 제자들로 하여금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널리 부르던 찬송가는 아마도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딤후 2:12) 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와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의 회복인 승천과의 관계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촉구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히 4:14) 때문이라고 했다.


승천을 떼어놓고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설교를 부활로 시작하여 승천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 33).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 두 사건은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승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주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디에 계실 것인가? 또한 무엇을하고 계실 것인가?


만약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그의 처소는 어느 한 지방에 제한받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예루살렘,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하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마 18:20).


만일 승천하지 않았다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과 성명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신 이는 승천하신 주님이셨다(행 2:32, 33;엡 4:5-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땅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는 했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히 8:4). 그가 참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다(히 9:24).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땅 위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하늘의 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시작되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역할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가끔 이 말을 그리스도의 "개정"(session)이라 일컫는다. 재판관이 재판관석에 앉으므로 재판이 진행됨을 뜻하는 개정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세속적 용도와 밀접히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앉아 있는 일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개정이다.


흔히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셨고, 또 지금도 여전히 하고 계시는 일들을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성령을 보내셨고(행 2:4),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으며(행 2:47), 앉은뱅이를 고치셨으며(행 3:16), 다소 사람 바울에게 나타나셨고(행 9:5),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며(히 2:18),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며(히 7:26), 우리의 대언자(advocate)이시며 (요일 2:1),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신다(히 10:13).


이 기록들이 완전치는 못하나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개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될 두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들어가심으로 주로 인정되셨다. 둘째,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교회에는 은사를 주셨고 또 주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는 그의 사역으로서 지금 행하시며, 교회가 없어질 때까지도 계속하실 사역이다(엡 4:8; 살전 4:17; 히 2:9; 벧전 1:21;벧전 3:22).


이상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내용인가? 그렇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온유적 표현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골 3:1)고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죄씻음이 이루어졌음과 그 사역이 완성되었음(히 7:3;히 8:1)을 우리에게 보증해 준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초대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해 팔을 넓게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다시 오시리라"라는 말은 중요한 성경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나타내기에 부족한 신조는 불완전한 것이며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약 300번 가량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30절마다 한번씩 언급하는 비율이다. 성경 학자들은 다른 교리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제가 중요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주제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수치로 나타낸 바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7개 서신서에서 19회 언급되며, 14개 서신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성만찬은 3, 4회 정도만 분명하게 언급될 뿐이며, 20개의 서신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신약의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되며 그 수효에 있어서도 300여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 진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너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일개 조항일 뿐이다. 성경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어야 한다고 단조롭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의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그와 그의 말씀에 대한 참 신앙을-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막는 일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5).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신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이 복된 소망에 대한 신앙이 사도신경과 그 후의 여러 신조에 분명히 기록된 것이다.


재림의 시기 등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재림에 관한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불일치한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에 관한 사도신경의 고백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도신경은 세부 사항을 밝혀내려 하지 않고, 단순하게 "다시 오시리라"고 말할 뿐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에서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심과 같은 영적 "오심"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고 하셨으며, 승천하실 때 두 천사가 나타나 제자들에게 떠나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문자적 재림을 바라며 기다렸었다(살전 1:8-10을 보라).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다. 우리가 죽게 되지만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며, 영적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것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바울의 설명대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딛 2:13)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하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학자들간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자신의 협소한 체계에 흠뻑 빠져 있거나, 또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너무 변호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망각할 위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며 고양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에서 벗어난 사소한 문제에 대해 논쟁에 빠져들어 진리의 본질이 주는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두 가지의 축복을 의도하고 있다. 첫째, 복된 소망은 참된 위로를 가져다 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번째 축복은 거룩한 삶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희망은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자극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또한 우리가 그를 보게 되고,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 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고 말한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악한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함을 지닌 남자와 여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4세기에 그 기원을 두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모든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최후 재림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사도신경은 그냥 단순하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만 고백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표현, 그 자체만 보면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인 듯이 보여진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함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다른 목적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맞아들이시기 위해 재림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영혼이 이미 천국에 있는 자들의 몸을 소생시키실 것이며,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변화시키실 것이다. 죄가 인간의 육체와 본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그리스도께서 파괴시킨다는 의미에서 재림은 "심판"일 것이다(고전 15:51-58).


둘째,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맺으신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께서는 성취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롬 11:1과 같은 중요한 성경 구절은 그 옛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사 60:1 참조). 그 약속들은 심판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메시야를 거절한 사실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마 19:28).


재림의 세번째 목적은 세상 질서 그 자체를 종결짓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그 때나 되면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은 파멸될 것이다(벧후 3:10-13 참고 ;히 1:10-12). 하나님은 만물을 다시 만드시지 않으시나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드실 것이다. 새 창조의 분자구조는 지금의 일반적인 체계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사단과 그의 통치권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죽은 영들에 대한 심판이 있기 전에 이미 사단은 불못에 던져져서 땅 위의 사람들을 다시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환상 중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던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참고 :고전 15:26,고전 15:51-57:계 20:10;계 21:3).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 다시 오신다는 사도신경의 표현은 심판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요약해 놓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구주 이상의 어떤 분, 즉 심판자이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요 5:27). 후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했다(롬 2:16 참고;행 17:31).


그 심판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심판의 공정함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양심 그 자체가 심판을 요구한다. 바울은 십계명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조차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고 했다. 바울이 로마 관리(벨릭스)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 했다. 그의 양심이 심판의 합당함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행 24:25).


사도신경이 의미하는 심판의 두번째 진리는 성경이 심판의 등급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여 심판하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 심판의 대상과 관련하여 사용된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성경적 가르침을 따라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시점을 기준으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이 영적으로 산 자들과 또한 육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분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옳은 것이며 성경적인 것이다. 전자의 견해는 살아있는 자와 죽어 어딘가에 묻혀 있는 자가 있음을 보아 분명한 것이다. 후자의 견해는 회개치 않은 자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묘사한 엡 2:1과 같은 구절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신자의 삶을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영생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에 이미 획득하여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 대한 심판은 실로 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다.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행 17:31), 천하를 심판하실 이가 누구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재하시는 원리(principles)가 하나님의 공의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하나님을 "공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했다(살후 1:5, 6; 딤후 4:1; 계 16:5-7).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계 19:2).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의심할여지 없는 진리라고 생각되는 바를 질문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 심판받는 자가 지녔던 여러 가지 특권, 기회 및 책임의 정도를 참작하신다. 심판자 스스로가 말씀하시기를 심판날에 타락한 두로와 시온의 도성이 하나님의 수 많은 이적을 보았던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다(마 11:22, 23).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 9)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성경 구절들은 가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복음을 듣고도 신앙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해야 할 불신자들이다. 심판날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도 거기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장중에 있다는 것이며, 그 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한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 모두를 위해 죽게 하셨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광경은 엄숙하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심판의 무서움을 환기시켰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이 구절이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앞으로 직면하여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하게 될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을 연상해 보게 된다.


|출처/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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