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선교의 중심개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설립과 확장
-- 교회가 21세기를 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구약의 선교에 대한 연구 --
(1996년 제 3회 고신 세계선교대회를 위하여)
송제근 목사
서 론
세기가 바뀌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이제 21세기를 맞이하는 데 4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흥분과 함께 우리 속에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21세기에는 우리가 이 때까지 겪었던 경험들을 훨씬 능가하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때까지 세기의 변화들을 수많이 경험했다. 교회는 그 변화를 미리 잘 준비하고 대비하여서 교회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후대에 나타낸 적도 많았다. 그러나 정반대로 교회가 세기의 변화에 대하여 어리석고 미련한 준비를 한 때도 있었다. 18세기의 영국의 J. Wesley를 중심하여 일어난 교회의 영적 각성운동은 19세기에 일어날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을 영국교회와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데 성공하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준비된 19세기에 교회는 오히려 엄청난 사회적인 변화에 잘 적응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의 타락을 막아 건전하게 유지하였고 더 나가서 19세기가 유명한 선교의 세기가 되는데 성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반대로 999년 12월 31일에 사람들은 로마에 몰려들어서 미사를 드리며 이 세상의 종말을 낭만적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다가오는 3-4세기가 성경에 예언된 종말이 아니라 복음의 암흑기가 될 것을 대비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에 대비하는 교회가 되고 특히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하게 선포하기 위하여 오늘도 다시 성경이 말하는 복음에 돌아가야 한다. 그 중에서도 구약이 말하는 선교에 대한 멧세지를 잘 듣기를 원한다. 흔히 선교는 매우 단순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이해되었고 또 그 단순한 내용이 신약에만 포함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선교에 대하여 더 포괄적이고 원리적인 멧세지가 많이 있고 전망에 있어서 더 넓고 깊기 때문에 구약의 선교신학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본 론
1. 개념의 정리
먼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개념들은 실제 너무 다양하게 정의되고 이해된다. 특히 선교에 관련된 것들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들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정확히 정의 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선교
선교란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일반적이고 단순한 정의에서 출발해서 우리의 문제를 풀어도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선포하는 내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내가 선포할 대상으로서 세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내가 선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고 다양할 수 있다. 또 내가 선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도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포해야 할 내용과 대상에 대한 자세하고 구체적인 답을 가져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복음이 인간 존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므로 복음은 총체적이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선교도 역시 총체적인 것이다. 총체적인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선교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선교이다.
A. 선포의 내용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은 단순하게 한 사람이 믿어서 구원을 받고 천국가는 것 이상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항상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눅 8:1, 복음 = 하나님 나라).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삶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복음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만이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또 교회는 그런 목적을 단순히 도우는 기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진리를 우리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 사실 이것은 신약의 멧세지이자 동시에 구약에 뿌리박고 있는 멧세지이다.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의 멧세지는 개인적인 해방을 말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스러운 음성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그 삶에 개인적인 요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적인 믿음과 삶의 요소가 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복음의 총체성을 선포나님 나라의 삶을 통하여 선포하는 때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강조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이신칭의의 복음이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만 복음의 전부는 아니다. 성경에 더 많은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특히 신약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등에서, 특히 구약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서의 복음, 즉 공동체의 복음이 빛을 발할 때가 된 것이다. 서구의 개인중심적인 전통이 강한 사회와 이신칭의의 복음의 내용이 종교개혁 이후 20세기까지 맞아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 결과 교회는 가장 기본적인 복음의 빛을 받았고 그것을 지난 4세기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제 서양사회가 아닌 다른 사회들의 존재양식으로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공동체적인 존재양식을 위하여서도 복음의 공동체성이 강조되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B. 선포의 대상 (영역)
이와 아울러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선포의 대상 혹은 선포의 영역이다. 선포의 영역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 즉 세상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있지 않는 것이므로 아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우리가 '나라'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세가지를 고려한다 :
(1) 통치자,
(2) 통치대상,
(3) 통치영역.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통치자는 명확하게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통치의 대상은 모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피조세계이다. 그리고 통치대상은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다. 이제 선교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인간이 사는 모든 존재영역이 다 선교의 영역이며 그 속에 사는 모든 인간이 다 선교의 대상이다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선교를 생각할 때의 선교의 대상으로서의 '세상'은 문화와 인종과 언어가 다른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문화와 인종과 언어가 같지만 하나님 나라 밖에서 살고 있는 곳도 선교의 대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국외에서 하는 선교와 국내에서 하는 전도가 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둘의 사실상의 통일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선포의 내용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선포가 단순히 한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총체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에 단순히 인간의 영혼만을 구원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의 공동체성을 생각할 때, 또 우리가 같은 문화권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세우는 일에 무능하다면 여전히 다른 문화권속에서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도 무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는 삶의 영역 전체가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야 할 영역이라면 인간이 가상적으로 만들어내는 공간, 즉 컴퓨터 공간 (Cyber Space)도 역시 선교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세상보다 이 컴퓨터 공간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앞으로 더 중요한 일이 되어갈 것이다. 특히 이 공간은 이 때까지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기는 공간의 차이를 급격히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그 속에 문화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같은 컴퓨터 언어를 사용하여서 만나며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는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제도적인 교회속에서만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사는 전 영역을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정치계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정도의 말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정치계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정치원리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경제계와 그 원리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가장 물질적이고 세상적일 수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거룩하게 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가장 강하게 챙겨야 한다고 믿어지고 있는 외교계에 하나님 나라가 확실하게 서야 세상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가 궁극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가장 영적인 교회에서부터 가장 물질적인 상업과 경제와 외교계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확장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선교라고 할 수 있다.
(2) 선택
구약의 선교를 연구할 때 풀어야 할 오해가 있다. 구약(예를 들어 H.H. Rowley, Th.C. Vriezen, Johannes Blauw)에서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은 이방에 선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19:5-6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세상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제사장 나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선지자, 특히 이사야의 선포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이 선포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우선 본인의 학위논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으로 역할 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사장이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듯이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로 삼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제사장의 위치이다. 또한 거룩한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거룩한 성품성을 가져서가 아니다. 거룩(카도쉬)의 원래적인 의미인 '구별하다', '구분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되었으며 구분된 나라라는 의미로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선지서에서 나타난 선택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선택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 한 인격적인 실체가 그런 일을 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신 7장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언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위하여 선택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선택은 언약의 전제가 되는 개념일 뿐이다. 선택은 궁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경과개념이고 그 궁극적인 개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이다.
(3) 언약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아주 구체적으로 만드신다. 그 구체적인 양식의 하나가 구약에서는 이 땅 위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에서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정치적인 제도를 유지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속에서 나타났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치제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의 존립목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단순히 제사장제도를 만들고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을 주도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중심목적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선지자들과 그 운동도 이스라엘의 핵심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일무이하게 만든 것은 언약이다. 이것이 구약의 핵심이요 전부이다. 언약(covenant, "브리트")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해주겠다는 약속(promise)이 아니다. 언약은 두 인격체가 어떤 공식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상대방은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며, 그 다른 상대방 이 상대방을 향하여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언약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자신의 신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단을 언약은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표로서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그런데 이 언약은 고대의 조약을 맺을 때의 두 상대방이 맺는 조약, 계약과 유사한 점이 많으나 확실하게 틀린 점이 있다. 유사한 점들은 두 당사자의 관계정의, 과거의 역사, 계약의 조건, 축복과 저주 등이다. 그러나 언약이 조약과 가장 명확하게 틀린 점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트렸을 때에 그것을 회복할 길들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제도이다. 이 제사제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되는 관계로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회복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인 성막에서 이루어진다.
또 하나는 역시 이스라엘의 배신과 실패와 관련된 것으로 이스라엘의 언약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자비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심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서는 이 언약을 복귀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없어질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때에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부어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신명기에 나타난 모압언약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신 30).
언약과 관련하여서 하나 더 고려하여야 할 것은 이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세 제도를 마련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왕 제도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존립의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 또한 제사장 제도도 그러하다. 제사장 지배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사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일상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언약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사장 제도가 필요했다. 선지자 제도 역시 우연의 산물이거나 어떤 완전히 새로운 운동의 시발이 아니라 이미 있던 제사장 제도를 도와서 왕 제도와 함께 이스라엘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왕 제도와 제사장 제도는 세습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언약의 본래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습관화될 위험이 있었다. 동시에 종교의 본질은 빠져버리고 형식만이 남아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가 있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선지자 제도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들이 사용될 수 있었으므로 이스라엘 역사에 대단한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삼중 직무는 장차 올 그리스도의 삼중직무의 예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오심으로 섬기는 왕으로서, 자신을 내어주는 제사장으로서, 진리 자체이신 자신을 보여주는 선지자로서 언약의 본질을 회복하셨다.
(4) 결론적 정의
선교의 결론적인 정의를 이제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선교는 하나님과 (영적)이스라엘이 만드는 언약관계의 결과 생겨난 하나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은 협의의 제도적인 교회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지, 또 그 인간들이 존재하는 어떤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명확한 통치가 나타나게 하는 것을 선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선교는 총체적이고 전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역을 위하여 삼위 하나님이 다 등장하셨고 같이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의 선포와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구약에서 제사장, 왕, 선지자 제도를 사용하셨다.
2. 역사적, 주석적 고찰
(1) 창 12:1-3
창 1-11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역사진행의 방식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며 (창 6, 11) 타락한 세상에서 당신의 나라를 구분하여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전개하셨다. 그러나 창 12장부터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진행시키려고 준비하셨다. 그 첫 출발이 아브라함이다. 이 시작은 웅대한 약속(창 12:1-3)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이제까지의 하나님 나라 진행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 축복은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의 반열에 들어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셀 수없이 많게 될 것이다 ("큰 민족"). 그리고 이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을 것이다. 축복과 저주가 흔한 고대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축복할 것이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에게 저주를 갚을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마다 축복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축복의 대명사"가 될 것이다 (한글 개역의 의역 : "복의 근원").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세상이 축복을 받는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이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셨다. 족장시절 마지막에 이 하나님의 나라는 70명을 이루어서 애굽에 내려갔다. 드디어는 이들에게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후손이 생겨서 이 후손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넘어간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아브라함은 몰랐으나 단지 믿음으로 그 소망을 지니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이제 출애굽기에서야 나타난다.
(2) 출 19:5-6 : "서굴라"
출애굽기에서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출애굽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출애굽은 어떤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단계에 불과하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다름아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 이제 숫자적으로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문제이다. 이 삶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맹목적인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가 관건인 것이다. 과거의 족장들은 이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가운데 바라보았다. 이제 이 소망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통치자 하나님과 그 백성인 이스라엘이라는 근본적인 두 구성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이 나라의 두 구성원의 상호관계가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이 관계가 바로 언약과 조약의 전문용어(technical term)인 '서굴라' (SeGULLA)로 표현되었다. 이 용어는 보배로운 소유물이라는 의미로 상위에 있는 당사자가 하위에 있는 당사자를 은혜로 언약의 상대방으로 선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서굴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작정하게 된 것이다. 이 위대한 서굴라의 위치는 고대에서 제사장이 차지하던 위치와 동일한 것이고 또 뽑혀진 백성, 즉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성원이 작정되고 그 안에서 내재하는 언약 공동체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 법칙과 질서체계가 십계명과 출 21-23의 법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공적으로 성취한다 (출 24:1-11).
그러나 나머지 이스라엘의 광야여행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으로서 준비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의 40년의 여행이 무의미할 것이다. 언약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한 자들은 비록 언약을 처음 체결하는 예식에 참여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세번째 요소인 하나님 나라의 영역, 즉 땅을 유업으로 받는 일에 실패한다. 그러나 충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 나라의 완전한 모습을 즐길 것이다 : 통치자, 백성, 땅.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는 백성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신명기의 준비를 통해서 긴 역사서가 말하려는 것은 이제 그 백성이 땅을 차지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준비되어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살 영역이 마련되는 것은 전대미문의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본격적인 시작, 즉 하나님이 하시는 선교의 위대한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3) 선지자적인 선포
선지자의 선포속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나타내신 선교의 중요한 멧세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선지자는 본래 이스라엘 종교를 시작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개혁가였다. 이들의 선포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의 범위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범위속에 머물러 그 관계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 그 한계 밖을 넘어가며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깨트렸다고 책망한다. 이스라엘이 파기한 언약의 구체적인 사항과 함께 이스라엘이 종래에 약속한대로 언약의 저주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경고가 함께 뒤따랐다.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언약의 한 상대방인 백성들이 언약의 백성으로서 신실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저주의 첫단계로서 그들은 그 땅에서 여러가지 실제적인 삶의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전쟁, 병, 기근 ...). 그리고 저주의 둘째단계로서 그들은 그 땅에서 ㅉ겨날 것이다. 백성의 징벌과 그 땅의 포기, 이 두가지는 모두 하나님이 그 언약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기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심각한 위험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선지자들은 여러모로 여러 시대에 동원되었다. 이제 전통적인 언약의 기구인 왕 제도와 제사장 제도는 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하나의 죽은 전통으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비세습적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언약갱신을 위한 도구들이었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마저 타락되는 것 같은 현상을 보였으니 이들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아니한 소위 구원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관계없이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예언한 것이다.
백성의 징벌과 그 땅의 빼앗김에도 불구하고 실제 하나님의 은혜는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무능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말할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를 보이셨다. 즉 백성들이 육신의 할례를 행하지 말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선포하던 선지자들의 모든 선포의 마지막에 그런 할례를 행할 능력이 전무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갑자기 때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임한다는 것을 보인다. 즉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할례를 행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약속은 모든 선지서의 후반부가 소망으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전혀 새로운 요소, 그러나 이미 언약안에서 오래된 약속이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열방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아서 이스라엘과 구원의 반열에 같이 참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이 요소는 특이하게 이스라엘의 심판과 함께 한 이방의 심판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다. 선지서 속에 나타난 이방의 심판은 이해할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파멸을 즐거워하였던지 (에돔), 아니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도구로서 (앗수르, 바벨론)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은 이스라엘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도구로 선택된 이방이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한도내에서가 아니라 더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과 방법을 따라서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 도구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혀 새로운 전환이 일어났다. 그것은 열방이 이스라엘과 같이 구원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설명할 수 없는 은혜와 자비의 남은 분량이 이방까지 흘러 넘어간 것이었다. 과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이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의 역사가 드디어 전개되는 것을 미리 보고 즐거워한 사람들이 선지자였다. 자신의 시대에 그것이 이루어질 리가 없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그 어느날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따라서 이루어질 것을 기뻐하였던 것이다.
(4) 시편의 선포
선지서에 나타나는 이러한 엄청나게 확대된 소망의 요소는 시편에서 특별하게 잘 드러난다. 시편은 가끔 전망이 아주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망이 시간적인 면에서 과거와 현재를 거쳐 가까운 미래를 이어서 결과적으로는 먼 미래까지 이르는 긴 흐름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예 : 시편 22편). 또한 공간적인 차원에서 좁은 범위의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서 열방으로 나가는 것을 보인다. 이어서 세상의 끝에 도착하기도 한다. 더 나가서는 인간의 한계를 벋어난 우주의 피조물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찬양하는 것을 보인다 (예 : 시편 98편). 시간과 공간의 발전과 확대가 보통은 하나의 주제로 연합하여서 나타나기도 한다. 즉 과거의 구속역사로부터 출발하여서 현실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더 나아가 조만간에 주실 온 인간들이 함께 누릴 승리의 모습과 함께, 먼 미래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우주에 편만한 하나님의 구속과 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아마 시인들이 살았던 당대에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찬송들은 이들의 믿음과 확신에서 나온 것이고 이 점에서는 언젠가 우주에 편만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는 선지서 못지 않은 발전과 확대를 본다. 어떤 점에서는 시편에서 선지서를 능가하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향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이 표현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편에 나타난 선교적인 전망은 선지서의 그것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3. 21세기의 현실적 도전에 직면한 교회
성경의 기록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놀라운 전망을 계속 확대하여 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을 알고 대비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이제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나라는 앞으로 올 시대의 도전을 받아 들이면서 어떻게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확대를 위한 운동을 이러한 상황속에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1) 이슬람 특히 근본주의의 도전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전인 1970년만 해도 선교학자들은 기독교의 양대 도전 세력으로 공산주의와 이슬람을 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에라도 이슬람은 오랜 역사에서 그랬던 것 같이 여전히 도전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가장 중요한 도전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물론 이슬람이 하나의 종교로서 텔레비나 현대의 정보전달 매체를 통하여 들어오는 세속주의의 도전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슬람,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의 도전이 맹렬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것은 기독교 속에 이전의 활기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헌신과 확신이 줄어져 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Samuel Zwemmer가 이슬람 선교를 시작할 때에는 명확히 이슬람을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로 옮아오게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의 전통이 남아 있는 즈벰머 연구소(Zwemmer Iinstitute)는 이제 이전의 선교적인 지향점을 잃어버렸다.
기독교는 이슬람 역사의 시초부터 이슬람과 관계하여 왔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관계에서 실패했다. 물론 복음을 능력있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초기에는 이미 기독교는 영적인 능력의 많은 부분은 상실하였을 때이다. 마침 그레고리 1세로부터 시작한 교황체제와 함께 교회는 형식화, 제도화되어 갔고 바로 이 시기에 이슬람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칼과 코란으로 나올 때 기독교는 살아있는 종교의 본질로 도전하지 아니하고 물리적인 칼로서 제도적 교회 자체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다. 이 태도는 기독교의 타락이 더 심각해 졌을 때 자연스럽게 십자군 운동으로 발전될 소질이 있었다. 다만 십자군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교회의 타락이 어느 정도 억제되어서 칼은 칼로 대적하는 역사가 그렇게 빨리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중세기 동안에 프랑스 남부에서 레이몬드를 중심한 일부 개인적인 선교운동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이슬람을 향한 선교는 실패였다. 이것은 물론 기독교가 외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성찰과 영적 각성에만 관심을 둔 중세기의 흐름과 일치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선교도 이슬람을 향한 선교는 역사적으로 계속 어려운 상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성과는 너무나 미미할 뿐이었다. 그런 이유 중에 하나는 이 때의 선교는 제국주의와의 명확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또 그 위험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도 포함될 수 있다.
아무튼 현재 아프리카의 중앙부를 통해서 남으로 밀려 내려오려는 이슬람의 도전은 심각하다. 그리고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의 이슬람의 약진도 괄목할 만하다. 그리고 소련에 속하였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이슬람을 선호하거나 국가의 종교로 삼는 경우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으며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의 위험으로 발전할 소질을 가지고 있는 발칸 반도의 문제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위 문명국이라는 유럽과 미국에서의 이슬람의 발전은 중요한 경고를 기독교에 보내고 있다.
(2) 세속주의의 도전
이슬람과 함께 심각한 도전으로 기독교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구의 어느 곳에서나 만연한 세속주의이다. 헐리우드의 영화를 선두주자로 삼아서 세속주의는 지구의 구석구석을 자연스럽게 현대의 정보매체를 통하여 전달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이 새로운 종교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인 활동 뒤에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세속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착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인간의 오관을 비롯한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이 하나의 인생의 삶의 목적이 되어 간다. 물론 정신적인 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과 문화적인 사업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결국 세상의 쾌락을 최상의 삶의 기준으로 삼는 현상들이 당연한 현실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태도로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세속주의의 가장 적합한 성경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일 2:15-16).
이 세속주의의 종교적인 모습이 소위 '종교다원주의'라고 번역되는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다른 많은 종교의 하나로서 자신을 인정하면서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아닌 것을 믿도록 요구되는 현상들이 더욱 더 심해질 것이다. 종교적인 가치의 상대화가 세속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등장할 것이다.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모두 한 마디로 이 세속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스승을 많이 둘 것이다 (딤후 3-4).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니 자연히 인간 자신들끼리의 진정한 관계가 단절될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이런 사회에서 여러 가지 병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 1.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절대적인 가치의 상실, 2. 윤리적 의식수준의 하락, 3. 불건전한 사회현상의 확장. 모든 인간관계의 타락과 어려움의 모습이 오래 전에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미 시작하였고 신약시대에도 적나나하게 나타났다 (딤후 3).
물론 시대마다 세속주의의 도전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세에 이르면 세속주의의 도전이 극에 이를 것이다. 요즈음 국가들이 시행하는 복지 국가 정책을 통하여, 그리고 이전에 귀족문화에 속하던 것들이 대중문화화 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편해지는 것을 끝없이 추구하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인생의 생각은 오직 이 세상에서의 삶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비기독교적인 환경단체들이 환경문제를 처리할 때에도 인간은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면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가장 지름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욕심의 포기를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정보사회의 도전
A. Tofler의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의 정확도를 문제삼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사회가 제 3의 물결로 알려진 정보사회로 어느 정도로 전환될 것은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다. 이 사회의 현실적인 모습은 그 속에 기존의 문화적, 언어적 장벽을 순식간에 무너트리고 나이와 성별의 차이를 과감히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공간이 컴퓨터 공간 (Cyber Space)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인공적인 공간들이 수많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비데오 공간이다. 비데오의 세계는 엄청난 저장량을 자랑하면서 사람들을 그 공간속으로 잡아넣고 있다. 이런 공간들에서의 인간들끼리의 만남은 인격적인 얼굴을 마주 대하는 만남이 아닌 무책임한 만남이 될 수 있다. 이 만남은 이미 소외를 전제로 한 만남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정보망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들의 소외는 더 깊은 차원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공간에서의 인간들의 만남은 분업적인 목적을 위한 만남이다. 그 결과 인간의 총체적인 혹은 전인격적인 만남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정보가 될 수 있는 내용만을 절대시하게 되고, 반면에 그렇게 표현될 수 없는 영적인 내용과 진리는 소위 가치의 중립화라는 망령을 통하여 완전히 배제될 수 있었다.
이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욱 어려워지고 결국 인간 소외의 근본 원인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의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런 21세기의 도전들을 교회는 능력가운데 맞이하며 극복할 수는 없는가 ?
4. 21세기의 선교를 위하여 구약이 하는 제언들
사람들은 선교에 대하여 구약이 할 말이 구체적인 것이 없는 것으로 피상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현대선교가 일어나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상황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전망과 확신은 신약의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서는 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말세에 일어날 현상에 대한 원리적인 진단, 그리고 실제적인 진단들을 구약은 포함하고 있다.
(1) 이슬람의 특히 근본주의의 도전에 대하여
이슬람에 대한 구약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아주 초기부터 있었다. 즉 아브라함이 먼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고 이것에 대한 언약을 하나님과 세울 때에 이미 하나님은 현재 이슬람에 속한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근동지역과 관계한 민족인 롯과 두 딸 사이에 태어난 비정상적인 두 손자 혹은 두 아들, 모압과 암몬은 이미 롯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를 맡으신다는 점을 나타내셨고 이 민족들을 이스라엘의 주위에 살게 하셨다. 장차 이스라엘의 축복을 나누어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불순종과 불신앙의 결과로 태어난 비운의 주인공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아들도 맡으셔서 축복하시며 그들의 장래를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확실히 하셨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슬람의 선조인 에서에서 역시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에 있었다.
이 모든 아브라함과 관계하여서 생겨나는 여러 백성들은 장차 이슬람이 통치하는 지역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민족들의 현실적인 족보를 지금 정확하게 따질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의 현재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급격한 변화를 제외한다면 아브라함의 이런 비정상적인 후손들이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이슬람의 도전을 극복하려고 할 때에 고려하여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가장 먼저 나누어 받을 이방인들은 우리 한국민이 아닌 바로 이 아브라함의 비공식적인 후예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 확신가운데 이슬람 선교를 기초놓을 수 있다. 언젠가 그 약속을 이루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 넉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장차 이방인에게 부어질 것이고 무엇보다도 역사를 통하여 항상 이스라엘 주위에 배회하던 이들이 축복에 참여하는 선두주자가 될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긴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가 비기독교적이 되어서 칼로 칼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을 역사적으로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즉 이슬람이 칼로 나왔을 때에 칼로 나갔으며 무엇보다도 십자군 운동으로 생긴 기독교인들과 이스람교인들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감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 자체에 대해서 공식적인 반성과 오히려 이슬람에 속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비는 역사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무능과 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앞에서 겸손한 종교임을 드러내고 기독교의 참된 힘이 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에 있음을 이슬람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용서와 사랑의 개념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만약 그러하다면 인간의 본성상 필요로 하는 용서와 진정한 희생적인 사랑을 이런 자세를 통하여 알릴 수 있고 그것이 의외로 사랑없는 종교인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약점을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주위의 나라에 선물을 보내는 악함을 보인 아브라함의 또 다른 후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원래 하나님이 그들을 향하여 계획하신 아브라함이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날이 올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와 소망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참된 종교가 가지는 힘이 눈에 보이는 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우리의 전투가 하늘의 악한 권세에 대항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 나라의 차원을 명확히 의식한 것이고 그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이슬람 사회에 드러낼 수 있다면 승산이 있는 선교의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세속화 사회에 대하여
세속화 사회와 그 정신인 세속주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마다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나기에 새롭게 보일 뿐이나 그 본질은 인류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사람을 현혹하는 체제인 것이다.
세속화 사회에 대한 선교의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교회가 이 지상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성도들의 삶이 그 나라의 능력으로 주도되지 않기 때문에 세속화는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종교적인 의미의 세속화인 종교다원주의(pluralism)인데 이것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한마디로 능력있는 삶 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것을 치료하는 광선이 된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이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화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생활로 보이는 선포는 일종의 심판행위이다. 롯의 경우와 같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미워할 수 밖에 없으나 하나님 나라를 정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도 같이 몸을 담고 있는 세속 사회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로서의 거룩으로 하는 이 전쟁은 일종의 선교행위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칼로 하는 전쟁이 아니지만 이 전쟁은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를 내림으로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말세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포하던 선지자이 입장과 어느 정도 동일하다. 또 만약에 우리의 회개의 외침과 선포가 들려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이 사회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도 같이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세속화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물질적이며 세상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모든 시대를 막라한 모든 종류의 세속주의의 특징이다. 그리고 영과 물질은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성도들을 무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행전 2장에서 가장 영적이었을 때에 가장 물질적일 수 있고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경계가 철폐된 놀라운 예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총체성은 가장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가장 물질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세속화 사회의 정곡을 찔러 무너트리는 길일 것이다.
(3) 정보사회에 대하여
모든 종교적인 것은 전통적이 되어가며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 새시대의 변화에 대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는데 수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일 것이다. 이제 교회는 이런 한계를 벋어나서 자신의 영역으로 주장해야 할 것이 새로이 생겨나는 인간이 만든 공간이 컴퓨터 공간이다. 이 컴퓨터 공간(Cyber Space)에서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쉽게 철폐된다. 그리고 연령과 성별이 철폐된다. 그리고 얼굴없이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도전은 이 공간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을 또 하나의 선교의 영역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또한 엄청난 양의 비데오 공간이 있고 이 공간에서 많은 양의 정보들이 문화적인 격차와 사회적인 격차를 줄이면서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이런 곳이 바로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웨슬리와 휘트필드가 복음을 깨닫고 선포할 때에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고 비난하였고 그 결과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은 Bristol 거리에 사과 궤짝을 들고가서 그 위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교회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웨슬리는 교회 마당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무덤위에 올라가서 설교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혁명적인 생각이었고 이것으로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사과 궤짝은 무엇이며 오늘날의 무덤은 무엇인가 ?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공간개념을 과감히 벋어나서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인 정보사회의 공간, 즉 컴퓨터 공간, 비데오 공간에서 사역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 구약이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구약이 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복음이라는 신약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존재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에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속에 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 론
성경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다. 이 선포의 내용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영적 이스라엘의 영원한 언약의 수립에 대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인 21세기의 도전 앞에 선 교회는 이런 선교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출발할 때에 정당한 답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의 도전은 복음의 총체성, 즉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전면을 다 치료하시는 역사를 보임으로서 극복될 수 있다. 세속화 사회의 도전도 복음은 가장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영적인 것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것을 보임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보화 사회의 도전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와 적용이 새로 만들어진 인간들의 공간인 컴퓨터 공간도 역시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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