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종말

[스크랩] 기독교 반대자의 종말

수호천사1 2012. 5. 9. 21:17

예수가좋다오

기독교 반대자, 신앙고백과 종말


2012년 03월 20일 (화) 2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승연 목사 / 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총회 파송 독일주재선교사,
KOSTE와 올바살 운동 설립 및 국제대표, 세계선교사회(WKMF) 공동회장

 

--------------------------1.<본디오 빌라도와 보고서>--------------------

총독 빌라도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사형토록 언도한 악역 장본인입니다(마 27:11~26). 그러나 한 때 성경 비평가들은 역대 로마 총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도, 메사아도 아니었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종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스승을 신격화하고, 빌라도라는 총독을 가공 등장시켜 4복음서를 기록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고로 “그의 교훈과 기적은 조작되었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62년 지중해 연안 모래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한 도시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도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카이사레아 마리티마’, 곧 ‘가이사랴’로 이스라엘 왕 헤롯이 지중해 연안에 도시를 건설하고 난 다음,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 도시 이름을 ‘가이사랴(시이저)’라고 명명하여 헌납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당시 수리아 지역을 총괄했던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는데, 그 정문에는 문패와 같은 ‘폰티우스 필라투스’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돌이 발굴되었답니다. 원본은 예루살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장엔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습니다.

 

빌라도 보고서 ;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써놓은 ‘빌라도 보고서’라는 문헌이 발굴되었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써, 원본은 현재 터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사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원고는 총 50권으로 서기관의 손에 의해 쓰였으며, 각 권은 2x4 피트로 되어 있는 것으로 전문을 옮긴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인 ‘발레우스 파페르쿠러스’의 주(註)에 의하면, 원명은 ‘예수의 체포, 심문과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그는 19세였으며, 그의 작품은 모두 소멸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 다른 역사가 ‘프리시안’과 ‘타시투스’의 글을 미루어 보면, 그는 캄파니아 출신으로 가이사의 친한 벗으로서 16년 동안 로마 군을 지휘했고, 그 후 로마에 돌아와 ‘로마사’의 집필을 끝낸 후 집정관(執政官)의 직책에 오래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역사가 ‘발레우스’는 “유대 지방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는 그가 만난 인물 중 가장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전 군대보다도 예수를 더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모든 종류의 병자들을 치료하였으며, 죽은 자를 살렸고, 결실치 못한 과일 나무를 저주했을 때 그 나무는 즉시 뿌리까지 시들어 말라죽었다. 예수는 그의 놀라운 능력을 결코 타인을 해치기 위하여 사용치 않았으며, 항상 불쌍한 자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여론은 양분되어 빈민층은 예수를 로마 정권으로부터 구원해낼 그들의 구원자로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도급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증오하고 시기하였으며, 등 뒤에서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애굽의 마술사라고 빈정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내용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더욱 더 분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답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인 디베리우스 가이사 치하에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가 말하는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고집 센 사람이고, 굽힐 줄 모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규탄했습니다. 또 유대인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이 비극적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며, 그는 그로부터 수년 후에 유배당하여 고심하다 결국 자살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까지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축하합시다. 아멘
 

--------------------2.<프레드릭 빌헬름 니체>--------------------------

 

 1960년대 사신신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이 지난 2012년 2월 29일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조상은 실존주의와 허무주의의 독일 철학자 프레드릭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sche, 1844~1900)로 일찍이 신은 죽었다고 외친 자입니다. 니체는 독일 뢰켄(Roecken)이라는 작은 소읍에서 루터교(경건주의) 목사의 외손자와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한 때 자신도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더욱이 머리가 좋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25세의 젊은 나이에 학위 논문을 쓰거나 시험을 보지 않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그 동안의 연구 실적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독일 스위스 오지리 대학에서 실시한 교수자격과정과 시험인 하빌리타치(Habilitation)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스위스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니체는 과연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지도 아니한 신(하나님)을 어떻게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들 수 있는데, 첫째는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18세기에 일어난 불란서 시민혁명이 성공함으로 성직자들이 모두 축출되었는데도 이미 형성된 기독교 문화가 사회 전반에서 판치는 것을 니체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영향이 사라져 신본주의 신앙에서 이성주의 신앙으로 전환되었는데도 나중에 보니 이성주의가 신으로 둔갑하여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그 정도 되니까 이젠 물신(物神)이 미신(迷信)으로 등장하였고, 사람들은 거기에 맹신(盲信)하다 못해 맹종(盲從)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개인주의는 사장되고 왜소화되었으며, 개인의 자유보다 대중의 힘이 강하게 군림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 니체는 결국 허무주의자가 되었고, 기대했던 세상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합니다. 둘째는 정서적 배경인데, 목사의 외손자와 아들로 태어난 어린 니체가 보았을 때 당시 경건주의 루터교 소속 목사들은 힘들고 어렵게 목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니체의 외할아버지나 아버지(물론 아버지는 니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와 여동생은 외가로 옮겨 자랐지만) 역시 참으로 경건한 분들로 존경했는데, 그 당시 국가나 세상, 그리고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사들을 힘들게 하고 핍박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니체는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저럴 수는 없는데…”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장성한 다음 “신은 죽었다”는 어린 정서가 사상으로 성장하여 표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니체는 결국 1889년 1월 이태리 여행 중 트리노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킨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10년을 지낸 다음 퇴원하였으나 2년 동안은 수시로 발작 증세를 일으켰으며, 정신을 완전히 상실한 채 살았습니다. 결국 독일 바이마르에 사는 여동생 집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외롭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생전에 학문이 뛰어난들 뭐하겠습니까?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친들 무슨 영화이겠습니까? 자신의 인생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처절하게 죽어간다면 어찌 그 인생을 행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하겠습니까?

 

그래도 다행히 그가 죽고 난 다음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글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니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었다고 말한 후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자신이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세상에 미치는 파장을 보고 그는 정신적으로 편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내는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도 죽고, 니체도 죽고, 해밀턴도 죽었으나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요, 부활이 약속된 영광의 죽음이었습니다. 할렐루야!


----------------------------------3.<찰스 다윈 >------------------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진화론 책을 발간함으로써 기독교 창조 신앙을 진리로 신봉하는 기독교에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21세기 첨단 과학우주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필자는 오늘 찰스 다윈의 진화론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지난날 인류 역사에 기독교 진리를 반대했던 자들의 종말에 대하여 찰스 다윈을 말하고자 합니다.

 

다윈의 개종 ; 문제는 진화론을 발표하여 일약 영웅이 되고, 진화론 종교의 교주가 되었던 찰스 다윈이 과연 자신의 학설인 진화론을 끝까지 사수하고 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역시 자신이 말한 진화론이 이렇게 삽시간에 전 세계로 파급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개종은 진화론이 절대학설로 군림한 다음이라 진화론 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은 다윈의 개종 사실을 여론화시키지 않고 쉬쉬하면서 다윈의 개종은 허위 날조된 것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윈의 생시에 호프 여사(Lady Hope)가 몇 차례 방문했었는데, 그의 말년에 크리스천이 되었음을 확인했다는 그녀의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다윈에 대한 레이디 호프의 증언 ; [아름다운 어느 가을 오후, 저는 찰스 다윈 교수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여러 달째 침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평소에 그의 멋진 모습이 왕립아카데미의 장엄한 초상화 하나쯤 장식할만하다고 그려보던 나였습니다. 이 날은 더욱 그랬습니다. 소파 위에 누워있던 그는 짙은 자색 명암을 띤 부드러운 수가 놓인 드레싱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개에 의지한 채 창밖으로 보이는 숲과 밀밭을 멀리 응시했습니다. 전형적인 켄트, 써레이의 노을빛이었습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그의 고상한 이마가 빛났습니다. 손으로 풍경을 가리키는 그의 한 손엔 늘 탐독해오던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어디를 읽고 계시죠?” 나는 그의 곁에 조용히 앉으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히브리서, 아직도 히브리서랍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 ‘로열 북’이라 부르죠. 정말 웅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몇 군데를 가리키며 언급했습니다. 내가 여러 창조론자들이 창세기 앞부분을 다룬 얘기를 들려주자 손가락을 떨며 깊이 고민하는 기색으로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미숙한 사상을 가진 젊은이로, 시대의 모든 것에 대해 의문하고,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상은 산불처럼 번져갔고, 사람들은 그것으로 종교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이 책의 장엄함에 대해 몇 마디 더 언급하고는 느닷없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 밖에 30명 정도 모일 수 있는 정자가 있습니다. 부인께서 수시로 마을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하시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 하인들과 소작인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저기에 모이게 할 테니 오셔서 말씀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말할 주제는 뭔데요?” 라고 물었더니, 그는 “예수 그리스도죠.”라며 뚜렷하고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구원에 관해서죠. 최고의 주제가 아닐까요? 그리고 찬송가도 좀 불러 주십시오. 늘 사용하시는 작은 악기와 함께 말이죠.” 나는 지금도 그 순간 그의 빛나던 표정과 생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오후 3시에 모임을 가진다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어놓을 테니 저도 함께 찬송을 부르고 있는 줄 알고 계십시오.” 이 작은 노인과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그릴 수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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