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과정

수호천사1 2012. 4. 2. 09:0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과정

역사적 배경 -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과정은 영국의 청교도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영국은 1560년 초에 교회를 정화한다 하여 Puritans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교회 개혁안을 영국 교회의 입법기관이라 할 캔트버리 교직회의에서 1표 부족으로 통과하는데 실패하였다.
험프리가 제너바에서 개혁자들의 신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옥스포드을 청교도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카트라잍은 캠브리지 교수로, 장로교를 태동시켰다.
영국 왕권으로부터 청교도들은 수난을 받았다.
 Millenary Petition, 천명의 청원서 결과로 성서 번역이 허용되고 흠정역이 1611년에 출간된다.
정치적 이유- 왕권으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싸움
왕의 왕권강화에 청교도들의 사상이 걸림돌이 되어 배척하고 핍박받게 된다
종교적인 이유
찰스1세가 영국 국교회 체재를 강요함으로 갈수록 왕과 백성들간에 골이 깊어졌다.
청교도들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서는 영국 국교회의 신조들을 개정하기를 원했고. 칼빈파를 핍박하고 알르미안파를 옹호하고, 39 개조 서두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개인의 의견을 붙일수 없다고 서언한다.
 Roger Manwaring이 왕의 과세를 옹호-신의 대표로 다스리는 왕의 과세를 반대하는 것은 천벌 받아야 한다고 하자. 국회는 1628년 그를 정죄, 벌금-감금형에 처한다 그러나 왕은 그를 보호하고 승급시켜 감독에 임명한다.
1629년 왕과 국회의 악화로 폐회하고 1640년 까지 11년간 정회한다.
이후 로드가 청교도 핍박하고 오락서를 배부 사건을 계기로 청교도들은 이민을 시작한다. 이와 관련한 사건이 신대륙 아메리카를 찾아 떠난 메이플라워 사건이다.
        
형성과정
1637년 영국의 찰스가 자신들의 교회의식을 스코틀랜드에서 강요하자, 에딘버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참 종교의 옹호를 위한 국민 맹약 (National Covenant)에 서명이 시작되었다. 찰스가 군대로 진압을 시도했느나 실패하였다.  
1640년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국회 소집했으나, 전비 문제 보다 정치, 종교에 관한 옛 불평을 나열하자 3 주일 만에  국회를 해산하여 Short Parliament라 부른다.
1642년 왕이 하원의원 5인을 반역죄로 검속하려 하자 내란이 일어나 서북은 왕을 지지하고 동남은 국회를 지지한다.  
1643년 의회가 소집하여, 감독제도를 폐지하고 교리와 교회 정치 문제를 위해 7 월 1일 소집, 처음에는 39개조를 수정하려고 시작했으나, 중단했다.
시민 전쟁
Charles 1세의 왕정파와 의회파사이에 전쟁 중에 의회파가 약화되어 스코틀랜드에게 도움을 청함으로, 엄숙동맹을(Solem League and Covenant) 제시한다,
이 시기에 새로운 고백서를 만들게되었고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연결된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이랜드의 우셔(Ussher)의 신앙고백을 토대로하였고. WCF는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아이랜드 고백서의 순서와 각 장의 머리말과 대지가 비슷하고, 문자적 일치가 있다.
James Ussher(1581, 1, 4-1656, 5, 20)는 칼빈주의자로 신조와 교부들에 박식했다.
마르마그의 대주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의 교수, 의회파가 아닌 찰스 1세를 지지.
신학적 경향
Erastians- Erastinaism Thomas Erastus (1524-83)의 이름에서 만듦,
그는 Beza와 Bullinger의 친구,  a Zwinglian. 하이델베르그에서 장로회의 권한에 대한 논재에 발생. 에라스투스는 교회 문제를 중재하기위하여 국가의 권리를 강하게 강조했다. 그는 교회가 교회회원을 출교할 수있는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 하나님이 시민장관(civil magistrate)에게 모든 가시적 통치를 맡겼을때, 기독국가에 있는 교회는 국가와 별개로 억제하는 힘을(power of repression) 갖고 있지 않다. 처벌 행위는 시민장관에 속하고, 교회는 불법자들을 성례전에서 추방할 권리를 갖지않는다고 함.
1643년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이 이름이 불러졌다. 이 회의에서 셀덴 과 화이트록크, zh 콜만, 라니트푸트(Selden, Whitelocke, Coleman, Lightfoot)등이 교회보다도 국가의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이 이름이 불러졌다.
미첼은 분석
그러나 Antinomianism, Arminians, Pelagian는 없었다고 한다.
Antinomianismanti(against)+ nomos(law). 크리스챤은 구약의 도덕법을 설교하거나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Johann Agricola(1494-1566)는 루터의 제자였으나. 반율법주의 주장함으로 루터와 멜랑톤의 종교개혁을 비판. 루터가 공격을 함. Tobias Crisp(1600-43)는 영국의 칼빈주의자이면서 반율법주의자.
루터는 도덕폐기론자들에게 반대하는 글을 씀(1539, Against the Antinomians),
1577년 루터란의 일치신조 6항는 율법의 3가지 용도를 말한다.
      1) 죄를 알려주고
      2) 사회에서 일반적 질서유지와 규율을 세워주고
      3) 중생한자들에게 생활의 법칙을 제공한다고 함.
최근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으로 말한다. 정통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순서를 바꿈.
그는 복음에서 사는 신앙생활에는 응당 율법이 그 안에 포괄되어 있다고 함.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율법과 복음의 기본적인 일치를 말한다. 즉 율법과 복음을 합성하였다.
그는 한스 큉과 동의한다. 칭의가 그리스도의 의 전가와 그의 의의 주입에 의해(both by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and by an infusion of his righteousness) 도덕적인 변형으로 된다고 주장하는 큉의 의견에 바르트는 동의한다. Barth는 종교개혁의  균형을 거절하고 도덕주의 쪽으로 기울어짐.
Arminians
화란출신으로 베자에게 배웠으나 베자의 타락적 선택론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부족에 반대하여, 예정론과 은총의 실질적인 개정을 제안하였다. 그의 주장은 선택은 은총의 결과이며, 선택은 하나님이 개인의 응답을 미리 아신것에 달려있다고 하며, 타락자들은 자유  가운데 있으며, 인간은 은총을 믿기도 하고 거절할 수 있다고 하며, 구원은총은 충분하지만 불가항력적은 아니라고 하며, 참된 신자도 전적으로 마지막에 은총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
Pelagian
영국의 수도사로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아담의 죄가 전가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인간성의 본질적인 선과 자유의지를 주장하였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과정
 
역사적 배경 -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과정은 영국의 청교도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영국은 1560년 초에 교회를 정화한다 하여 Puritans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교회 개혁안을 영국 교회의 입법기관이라 할 캔트버리 교직회의에서 1표 부족으로 통과하는데 실패하였다.
험프리가 제너바에서 개혁자들의 신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옥스포드을 청교도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카트라잍은 캠브리지 교수로, 장로교를 태동시켰다.
영국 왕권으로부터 청교도들은 수난을 받았다.
 Millenary Petition, 천명의 청원서 결과로 성서 번역이 허용되고 흠정역이 1611년에 출간된다.
 
정치적 이유- 왕권으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싸움
왕의 왕권강화에 청교도들의 사상이 걸림돌이 되어 배척하고 핍박받게 된다
 
종교적인 이유
찰스1세가 영국 국교회 체재를 강요함으로 갈수록 왕과 백성들간에 골이 깊어졌다.
청교도들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서는 영국 국교회의 신조들을 개정하기를 원했고. 칼빈파를 핍박하고 알르미안파를 옹호하고, 39 개조 서두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개인의 의견을 붙일수 없다고 서언한다.
 Roger Manwaring이 왕의 과세를 옹호-신의 대표로 다스리는 왕의 과세를 반대하는 것은 천벌 받아야 한다고 하자. 국회는 1628년 그를 정죄, 벌금-감금형에 처한다 그러나 왕은 그를 보호하고 승급시켜 감독에 임명한다.
1629년 왕과 국회의 악화로 폐회하고 1640년 까지 11년간 정회한다.
이후 로드가 청교도 핍박하고 오락서를 배부 사건을 계기로 청교도들은 이민을 시작한다. 이와 관련한 사건이 신대륙 아메리카를 찾아 떠난 메이플라워 사건이다.
        
형성과정
1637년 영국의 찰스가 자신들의 교회의식을 스코틀랜드에서 강요하자, 에딘버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참 종교의 옹호를 위한 국민 맹약 (National Covenant)에 서명이 시작되었다. 찰스가 군대로 진압을 시도했느나 실패하였다.  
1640년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국회 소집했으나, 전비 문제 보다 정치, 종교에 관한 옛 불평을 나열하자 3 주일 만에  국회를 해산하여 Short Parliament라 부른다.
1642년 왕이 하원의원 5인을 반역죄로 검속하려 하자 내란이 일어나 서북은 왕을 지지하고 동남은 국회를 지지한다.  
1643년 의회가 소집하여, 감독제도를 폐지하고 교리와 교회 정치 문제를 위해 7 월 1일 소집, 처음에는 39개조를 수정하려고 시작했으나, 중단했다.
 
시민 전쟁
Charles 1세의 왕정파와 의회파사이에 전쟁 중에 의회파가 약화되어 스코틀랜드에게 도움을 청함으로, 엄숙동맹을(Solem League and Covenant) 제시한다,
이 시기에 새로운 고백서를 만들게되었고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연결된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이랜드의 우셔(Ussher)의 신앙고백을 토대로하였고. WCF는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아이랜드 고백서의 순서와 각 장의 머리말과 대지가 비슷하고, 문자적 일치가 있다.
James Ussher(1581, 1, 4-1656, 5, 20)는 칼빈주의자로 신조와 교부들에 박식했다.
마르마그의 대주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의 교수, 의회파가 아닌 찰스 1세를 지지.
 
신학적 경향
Erastians- Erastinaism Thomas Erastus (1524-83)의 이름에서 만듦,
그는 Beza와 Bullinger의 친구,  a Zwinglian. 하이델베르그에서 장로회의 권한에 대한 논재에 발생. 에라스투스는 교회 문제를 중재하기위하여 국가의 권리를 강하게 강조했다. 그는 교회가 교회회원을 출교할 수있는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 하나님이 시민장관(civil magistrate)에게 모든 가시적 통치를 맡겼을때, 기독국가에 있는 교회는 국가와 별개로 억제하는 힘을(power of repression) 갖고 있지 않다. 처벌 행위는 시민장관에 속하고, 교회는 불법자들을 성례전에서 추방할 권리를 갖지않는다고 함.
1643년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이 이름이 불러졌다. 이 회의에서 셀덴 과 화이트록크, zh 콜만, 라니트푸트(Selden, Whitelocke, Coleman, Lightfoot)등이 교회보다도 국가의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이 이름이 불러졌다.
 
미첼은 분석
그러나 Antinomianism, Arminians, Pelagian는 없었다고 한다.
Antinomianismanti(against)+ nomos(law). 크리스챤은 구약의 도덕법을 설교하거나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Johann Agricola(1494-1566)는 루터의 제자였으나. 반율법주의 주장함으로 루터와 멜랑톤의 종교개혁을 비판. 루터가 공격을 함. Tobias Crisp(1600-43)는 영국의 칼빈주의자이면서 반율법주의자.
루터는 도덕폐기론자들에게 반대하는 글을 씀(1539, Against the Antinomians),
1577년 루터란의 일치신조 6항는 율법의 3가지 용도를 말한다.
      1) 죄를 알려주고
      2) 사회에서 일반적 질서유지와 규율을 세워주고
      3) 중생한자들에게 생활의 법칙을 제공한다고 함.
 
최근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으로 말한다. 정통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순서를 바꿈.
그는 복음에서 사는 신앙생활에는 응당 율법이 그 안에 포괄되어 있다고 함.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율법과 복음의 기본적인 일치를 말한다. 즉 율법과 복음을 합성하였다.
그는 한스 큉과 동의한다. 칭의가 그리스도의 의 전가와 그의 의의 주입에 의해(both by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and by an infusion of his righteousness) 도덕적인 변형으로 된다고 주장하는 큉의 의견에 바르트는 동의한다. Barth는 종교개혁의  균형을 거절하고 도덕주의 쪽으로 기울어짐.
 
Arminians
화란출신으로 베자에게 배웠으나 베자의 타락적 선택론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부족에 반대하여, 예정론과 은총의 실질적인 개정을 제안하였다. 그의 주장은 선택은 은총의 결과이며, 선택은 하나님이 개인의 응답을 미리 아신것에 달려있다고 하며, 타락자들은 자유  가운데 있으며, 인간은 은총을 믿기도 하고 거절할 수 있다고 하며, 구원은총은 충분하지만 불가항력적은 아니라고 하며, 참된 신자도 전적으로 마지막에 은총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
 
Pelagian
영국의 수도사로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아담의 죄가 전가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인간성의 본질적인 선과 자유의지를 주장하였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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