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학파(Stoikoi School)
B.C. 315년경 키프로스섬 출신의 제논에 의해 창립되었는데, 그가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라는 건물에서 가르쳤다 하여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학풍은 이후 아테네, 타르수스, 셀레우케이 아, 로도스 등지에 계승되고, B.C. 2세기경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에서 통속적인 도덕 철학으로서 환영을 받아, 세네카, 아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펠리우스와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배출되었다.
스토아학은 윤리학·자연학·논리학으로 되어 있는데, 그 근본 사상은 이 우주의 만물은 일정한 이법(理法 : 로고스) 에 의해 생성 유전되는 근본 물질인「불」에 지배되고, 그「블」은 또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므로 전 자연은「불」의 필연성, 즉 이성적인 신의 섭리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 기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이 자연의 이성과 법칙을 통찰하며, 굳은 의지와 체념을 가지고 감정과 쾌락을 물리치며, 그리하여 자기의 내면적 독립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덕이 생기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고 하였다.
또 이 학파는 하나의 법(자연법)에 의한 세계 국가를 내세워 이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시 민이 될 수 있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특정 국가의 속박을 배격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로마의 중심 철학이 되었다.
◑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
스토아 학파와 아울러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철학 학파로 에피쿠로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인 인생관이 강하였는데,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여 마음의 평 화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국가와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허전했던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복음처럼 퍼져 갔다.
외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점에서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스토아 학파와 같지만, 스토아 학파가 덕을 덕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한 데 비하여, 그는 마음의 평화, 즉 행복을 위하여 추구했던 것이다. 이 철학은 사후(死後)의 존재를 부정하고 현세에 있어서의 최대의 개인적 쾌락이 최고의 덕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B.C.342-270)는 쾌락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마음의 행복이었다. 로마의 루크레티우스에 의하여 더욱 보급되어 기원 후 4세기까지 존속되었으나, 이 학파가 소멸된 후에도 그 사상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금욕주의와 쾌락주의
출처 : Tong - exin님의 철학/사상통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우리는 흔히 쌍둥이는 겉모양도 비슷하고 한느 행동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쌍둥이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하는 행동도 아주 다르다면 어떻게 할까?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서,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이 둘은 모두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일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즉, 행복은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스토아 학파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행복을 얻는다고 보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는 욕망을 충족시킬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일까? 서양철학사에서 이 두 쌍둥이가 내세운 전혀 다른 해결책을 직접살펴보기로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윤리학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패권은 아테네가 차지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영광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테네의 독주는 많은 폴리스의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세력에 아테네가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스파르타 역시 곧 테베에게 패권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그리스는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상승 일로를 걷고 있던 로마는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이탈리아 전역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최후의 경쟁자인 카르타고마저 제압함으로써 지중해의 패권마저 거머쥐게 되었다. 그 후 로마는 계속 팽창하여 영국으로부터 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그리스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정치적 측면을 부각시킬 때에만 타당하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도리어 로마가 그리스에 정복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는 군사적․정치적으로는 로마에 패배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로마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사상 역시 예전 모습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의 정신적 스승이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한 일이 없다. 다만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계승되어 각기 다른 종류의 윤리학 체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의 사상을 고도로 세련된 지식의 체계 속에 담았다. 이것은 지식 자체를 위해서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그들의 사상이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난점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실천에 옮기기도 쉽지 않았고, 그 호소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화된 지식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발한 학파는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였다. 그들은 우선 지식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식이란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적인 목적에 얼마나 이바지하느냐에 따라 그 유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자연을 연구하는 것도 근거 없는 공포와 불필요한 미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간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삶의 본질과 윤리적 가치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소크라테스의 후계라 자처하였다.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이겨 내고 삶을 완성시킨 이상적 인간상으로 비쳤던 것이다. 다만 그들은 각기 소크라테스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소크라테스의 자유 분방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흠모한 데비해, 스토아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근엄하면서도 소박한 고행주의적 특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학파간의 견해 차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는 가운데 그대로 나타났다.
2.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
에피쿠로스 학파는 기원 전 306년 아테네의 네 학원 중 하나인 가든(Garden)의 우두머리였던 에피쿠로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그는 쾌락(快樂)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지극히 검소하고 절도 있는 생활을 했다. 빵과 물 정도의 단순한 식사를 하고 육체적인 욕구를 최소한으로 충족시킬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쾌락은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에 현혹되어 사치 풍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세속적 쾌락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쾌락이란 외부로부터 괴로움을 받지 않고 마음의 동요를 제거 했을때 얻는 즐거움을 가리키는 아타락시아(ataraxia)였고, 그것이 삶의 궁극적 목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순간적이고 육감적인 쾌락을 추구한 '키레네 학파 또는 키레네의 쾌락주의'와 구분해야만 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고통을 수반하는 '역동적(力動的) 쾌락'이며, 다른 하나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수동적(受動的) 쾌락'이다. 성적 욕구, 과식, 명예욕, 음주, 결혼 등은 역동적 쾌락에 속하며, 참다운 우정과 철학적 대화 등은 수동적 쾌락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선(善)은 후자, 즉 수동적 쾌락을 뜻한다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하였다. 물론 성욕이나 식욕, 명예욕이나 결혼 생활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의 충족에는 반드시 절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본능을 억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이런 까닭에 에피쿠로스는 역동적 쾌락을 삼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종류의 쾌락도 선(善)임에는 틀림없으나, 지나친 추구의 결과로 쾌락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여 악(惡)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윤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밝혀 냄과 동시에,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동적 쾌락보다는 수동적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쾌락주의는 윤리적 쾌락주의(Ethical Hedonism)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자연의 산물인 인간은 당연히 즐거움 혹은 쾌락을 추구한다. 쾌락은바람직한 삶의 필요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쾌락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 문제를 극복하느냐 하는 데에서 그 한계가 분명해진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마음의 평온과 무관한 쾌락은 윤리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 쾌락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정신적 평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삶의 충분 조건이 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해 작은 고통을 감수해야 된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에피쿠로스가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더욱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명백해진다. 쾌락과 고통을 느낄 뿐, 정신적인 위안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육체적인 쾌락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주의자인 그가 '나에게 빵과 물만 있으면 행복을 얻으려 제우스 신과 다투는 것도 불사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에피쿠로스가 구상했던 바람직한 삶은 즐거운 삶이다. 내세를 믿지 않았던 그에게 그러한 삶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진정으로 강조하는 것은 욕구의 충족보다는 오히려 극기(克己)의 삶이다. 여기에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일종의 고행주의로 볼 수 있는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3.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스토아 학파는 키프로스의 제논에 의해 기원 전 300년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스토아주의라는 이름은 아테네 시장 북쪽에 있는 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e)라는 건물에서 그가 강의하였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제논 이외에도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가운데에는 널리 이름을 떨친 사람이 많다. 우선 제논의 수제자요 후계자인 클레안테스(Cleanthes) 와 클레안테스의 후계자요 스토아 학파 제2의 창설자로 알려진 크리시 포스(Chrysippos)가 있다. 여기에서 소개할 에픽테토스(Epictetos)는 재상이었던 세네카(L,A.Seneca)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urelius Antonius)와 함께 로마의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이다. 에픽테토스는 노예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어머니 역시 노예였다는 사실만 밝혀져 있을 뿐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따뜻한 마음씨와 자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재능과 명석함을 보여 주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의 생애는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고 또 참으라.'는 생활 신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으며, 마침내 외딴 귀양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철인이었다.
한 번은 그가 주인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에픽테토스는 '주인님, 그렇게 하시면 다리가 부러집니다요'라고 말했다. 주인은 매질을 계속하였고, 결국 에픽테토스의 다리는 부러졌다. 그러자 그는 ‘그것 보십시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요?’라고 하였다 한다. 도대체 이같은 삶을 정당화하는 그 자신의 이론적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에픽테토스는 우주가 완전히 합리적인 이성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우연이나 요행도 있을 수 없으며, 인간 존재나 그 행위까지도 모두 우주의 필연적 법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극히 미세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저자가 선택한 대로 그러한 종류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하나의 배우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 두라. 짧으면 단편에 나오는 것이고, 길면 장편에 나을 뿐이다. 그대가 가난뱅이의 역할을 라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라면 그 역할을 잘해 내도록 주의하고, 불구자나지배자 혹은 일반 시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역할을 잘해 내는 것이 그대의 임무이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인격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저자(著者)'란 '자연의 섭리' 혹은 '우주의 운행 법칙'을 말하며, 결국인간의 도리란 이 법칙에 순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에픽테토스에 의하면, 우리는 욕망에 현혹되어서 이 법칙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며, 감정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이행해 낼 수가 없다. 그러면서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부동심(不動心,apatheia)의 상태, 즉 '감정이 완전히 억제된 상태'라고 말하고, 이러한 경지야말로 인간이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혹은 신의 의지와 합일된 모습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는 우리들이 감정적인 혼란에 대처하고 그것을 완화시킬 수 있는 처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만약 우리들이 격렬하게 분노하는 성격을 갖지 않으려면 그런 습관을 기르지 않아야 한다. 분노를 증가시키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내지 않는 날을 헤아리도록 해야 한다. 나도 매일같이 화를 내곤 했지만, 차츰 하루 건너 한 번씩, 사흘 건너 한 번씩, 그리고 나흘 건너 한 번씩 화를 내다가‥‥‥ 드디어는 화내는 습관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에픽테토스는 교육에 의해서 인간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교육을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해냄으로써 부동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그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할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되었고, 그러다 결국은 고뇌와 불안 속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에게 인내와 체념의 미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숙명론이나 패배주의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것을 가르치며,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해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것은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하고 좌절과 낙망에 젖어 방관만하고 있는 소극적 운명론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할 수 없는 것도 해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무엇에든 마구 덤비는 무분별한 행동주의가 아님도 분명하다.
요컨대 에픽테토스가 제시한 바람직한 삶은 자연적인 것 혹은 이성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 것은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자연적인 것은 선한 것 혹은 바람직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에픽테토스는 이 점을 강조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운명이며 동시에 신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므로, 그것을 기탄 없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4.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토스의 비교
에픽쿠로스와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상태를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윤리관은 너무나 이질적 이다.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람직한 삶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태도에서 나타난다.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에 이르기 위해 우선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에픽테토스는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의지의 힘으로 욕망의 씨앗을 마멸시켜야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마음의 평온 상태는 비슷한 것일지 모르나, 그 방법은 이처럼 상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또 다른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첫째, 에피쿠로스 학파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적인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머물렀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이성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우주 속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파악하는 경지에까지 확대되었다.
둘째, 윤리적 관점에서, 에피쿠로스의 경우 윤리란 개인적인 수양이나 사회적인 처세술을 제시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에픽테토스에게 그것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고 세계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의무의 법 칙 이었다.
셋째, 따라서 그들에게는 국가가 윤리적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형태로 이해될 때 전혀 이질적인 국가관이 형성된다. 에피쿠로스의 국가관은 일종의 사회 계약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개인의 이익이 보장되고 확장되는 기구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와는 달리 에픽테토스에게는 개인의 이익이 희생되더라도 인류의 선과 자연의 법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존재해야 된다. 이러한 여러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토스는 중세는 물론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사고 방식을 지배해 온 중요한 윤리 사상의 모태가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대립 속에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개인주의와 전체주의, 윤리적 의무론과 행복론, 그리고 국가의 계약론과 이성론 등의 원형을 추적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Stoïcisme) (ms 20/03/02)
Elisabeth CLEMENT, Chantal DEMONIQUE, Laurence HASEN-LØVE, Pierre KAHN, Pratique de la philosophie de A a Z, Hatier, 1995(1994), pp. 340-341. (P. 384).
* 어원: 그리스어 stoa는 회랑(portique)을 의미하며 제논(Zénon)은 회랑 아래에서 아테네인들을 가르쳤다.
* 넓은 의미에서: 스토아 학파는 고통과 불행을 용기있고 확고하게 견디는 사람의 태도를 말한다.
* 좁은 의미에서: 스토아 학파는 철학의 한 학파로서, 거의 5세기 동안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수정되면서 지탱해 온 것이며, 이 학파를 일반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한다.
먼저 고대 스토아학파는 BC 315년 경에 키티움(Cittium)출신의 제논(Zénon)에 의해 세워졌으며, 제논은 퀴니크(Cynique)학파의 제자였다. 아소스의 클레안테스(Cléanthe d'Assos)와 크리시포스(Chrysippe)에 의해 전승된다.
다음으로 중기 스토아학파는 BC 2세기와 1세기 경으로 안티파테르(Antipater de Tarse)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d'Apanée)등의 철학자가 있다.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 시대의 스토아 학파는 기원 후 1세기와 2세기 경에 성행하였다. 본래 로마에서 성행하였으며, 유명 철학자로는 세네카(Sénèque), 에픽투테스(Epictète),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Aurèle) 등이 있다.
스토아 학파의 학설
1. 스토아 학파는 우선 자연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산다"는 계율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몰락 순간에 정치적인 형식으로 생겨났다. 스토아의 자연주의는 문화적 삶과 정치적 삶으로부터 관심의 이탈에서 나온다. 그 현자는 정치적 삶과 연관으로부터 은퇴할 것을 권하고 인간을 진실한 조국으로 여기는 우주 가운데 재정립 할 것을 설교한다. 이 우주는 이 학파의 두 번째 특징이며 물질적이다.
2. 스토아 학파는 유물론이다. 물질만이 존재하며 물질은 그 자체 물체처럼 정의되며 작용할 수 있는 것 또는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스토아 학파의 유물론은 그 결과로서 도덕론을 갖는다. 예를 들면 정념은 비난을 받는다. 왜냐하면 정념은 헛된 노력으로 영혼을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정념은 후회하면서 과거로 향해 있고, 걱정과 희망 속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비형체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의 배열은 어떤 총체적 일치를 형성하는 우주 속에 묘사되어 있다.
3. 사실상 스토아 학파는 합리주의이다. 물질은 스토아 학파가 때로는 영혼이나, 이성 또한 원인이라 불리는 형체적 원리(principe corporel)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세계의 영혼은 미묘하게 형체적 요소의 총합(집합)에 스며들고, 이 형체적 요소로부터 우주도 구성되고, 그것으로부터 물리적 응집과 정합성도 확인된다. 세계는 하나의 체계이며, 거기서 각 부분은 전체와 연관도 있고"공감(sympathie)"도 있다. 따라서 우주는 어떤 변화에도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필연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일어나야 할 것이고, 일어나야 할 모든 것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영혼은 운명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학파는 숙명론이 아니다. 이 우주 안에는 행동과 자유를 위한 자리가 있고 도덕론은 행위와 자유에 대한 규칙과 조건을 세운다.
스토아 학파의 도덕론
"자연과 조화롭게 산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인간만이 표상의 능력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우주적 이성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 스토아 학파의 현자는 자신의 정념 즉, 상상의 환영(fantôme)에 의해 놀라서 헛되이 영혼을 압축시키는 정념을 지배해야 하며, 친구나 부모의 죽음과 같은 조화와 아름다움에 반대되는 것을 포함하여, 일어난 모든 것이 우주의 질서에 부합된다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런 우주적 질서에 동의하면서 스토아 학파의 현자는 스스로 우주의 대리자가 된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것(사건)이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판단은 우리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에게 낯선 것 즉, 사건(événement)을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성)에 의하여 사건에 우리의 동의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운명에 동의는 현자에게 자유와 평화를 제공한다. 자신에 할당된 지위를 수용하는 현자는 인간들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도, 남편도, 군인도, 노예도, 황제도 된다. 그는 공무(offices)에 관한 한, 내적 무관심[자기 이익에 무관하게]을 보존하면서 사회적 의무 즉, 공부를 실행한다. 그러나 문화적 개별성과 사회적 입장들이 비본질적이라면 이런 것들을 넘어서 인간들 사이에 자연적 공동체, 즉 평등과 자연권이 기초하는 공동체가 존재한다.
거부, 정념의 지배,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 등과 같은 스토아 학파의 몇 몇 도덕론의 주제는 그리스트교 도덕론에 공감을 일으켰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거론되었다. 칸트에 따르면 행복을 덕의 실행에 둔 준엄한 도덕론은 서구 그리스트교 문화의 토대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지혜의 모델은 수세기를 통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몽테뉴(Montaigne)와 같은 작가들과 데카르트(Descartes), 스피노자(Spinoza)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계속적인 영감을 주었다.
* 주요 문헌: 세네카『현자의 항상심에 대하여』, 『영혼의 고요함에 대하여』, 『류클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에픽테투스의 『지침서』, 『대담』; 아우렐리우스 『수상록』
* 상관언어: 퀴니코스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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