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부두교 -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수호천사1 2011. 12. 2. 20:54

부두교 -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베냉 지역에서 사용되는 퐁족의 언어 중 '보둔(vodun)'은 언제라도 인간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무섭고 신비한 힘을 의미한다.

신세계로 끌려온 수백만 명의 흑인 노예들은 다양한 형태와 갖가지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의 신앙과 의식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지고 왔다. 브라질의 '캉동블레', 쿠바의 '산테리아', 자메이카의 '오베아이슨', 트리니다드의 '샹고의식', 아이티의 '보두'가 그것이다.

제1장 대서양 횡단

베냉의 고대왕국

자연과 인간사의 여러 분야를 관장하는 정령들을 숭배하는 부두교는, 아프리카의 가나에서 나이지리아와 토고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베냉만의 퐁족, 요루바족, 에베족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현 베냉 공화국인 다호메이에서 부두교가 발달했다. 이곳에서는 민족, 마을, 씨족, 혈통 등이 사회조직의 기반이 된다. 각 집단은 조상신이자 수호신인 자신들의 고유한 '보두' 혹은 '보둔'을 가지고 있다. '에군군(Egun-gun)'이라는 죽은 이에 대한 숭배의식은 씨족이나 부족 집단들을 집결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종교적인 전통을 보존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이러한 의식들은 수도원이나 사원에서 행해지는, 의식 때는 북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가운데 보둔의 호의를 얻기 위해 소, 양, 닭 같은 동물을 제물로 바친다. '보두노' 혹은 '후노'라고 불리는 제사장들은 보둔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신자들이 보둔과 접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보둔은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 신자들, 특히 '운소'라 불리는 입문자의 몸으로 들어오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신이 들렸다' '정령'의 '말'이 되었다고 말한다.

아보메이 정령들의 지배

베냉만 주위에 사는 부족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긴장과 적대관계, 빈번한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종교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리하여 18세기 초엽, 도시국가인 아보메이의 왕가는 자신들의 권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적대진영, 특히 요루바족의 몇몇 신들을 흡수하면서 부두교를 중앙집권화했다.

이런 이유로 그때까지 정치권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활동을 벌여 오던 제사장들은 궁궐의 고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정령들은 숭배대상에서 배제된 반면, 어떤 정령들은 명령에 따라 왕국 전체의 공공 보둔으로 섬겨졌다. 아보메이 왕가의 시조인 '아가수'는 공공 보둔으로 받아들여진 정령 중 하나인데, 여자와 표범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파와 레그바: 운명, 그리고 운명에서 벗어나는 법

왕가의 정책과는 별개로, 각 씨족이나 개인은 저마다 고유한 보둔을 섬겨 왔다. 이런 까닭에 18세기 이후로는 '파'가 다호메이에서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요요(현 나이지리아) 왕국의 시조인 파는 예언력을 가진 신으로서, 사람들에게 숭배해야 하는 보둔과, 보둔에게 호의를 얻거나 보둔의 화를 가라앉히는 데 필요한 의식들을 알려 주는 역할을 했다. 파는 이페 지방에서 신비한 종려나무로 상징되는데, 이는 그가 거기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나무들은 하늘과 땅의 연결을 약속하는 특별한 역할을 하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나무를 정령이 사는 곳으로 생각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파를 가지고 있어서 열 살 무렵의 소년기, 청소년기, 성년기 등 여러 단계에서 파의 비밀스런 전언을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파 옆에는 운명을 의인화한 '레그바'가 있다. 레그바의 별명은 사기꾼으로, 인간이 자기 운명을 속일 수 있도록 주선해 준다. 변화와 항거를 대변하는 레그바는 또한 다른 신에게 인간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는 역할도 맡는다. 이러한 이유로 레그바는 사원 입구나 씨족장의 집 입구에 놓이고 모든 의식 초기에 부름을 받는다. 사람들은 삶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자신만의 레그바를 갖고 있다.

또 다른 보둔인 '담발라 웨도'와 '아이다 웨도'는 부부로 둘 다 무지개뱀으로 상징된다. 이들은 천둥(하늘)과 바다를 연결하고 신봉자들이 든든한 위세와 물질적 부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다호메이의 신은 크게 세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는 하늘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철의 신 '구'는 칼을 차고 있으며, 전쟁과 노동을 상징한다. 또 '헤비오소'는 천둥을 상징하는 정령군에 속한다. 두 번째는 땅과 관계가 있는데, 전염병에 맞서 싸우는 '삭파타'가 그 예이다. 세 번째는 물과 관계 있는 것으로, 낚시의 보둔 '아그웨'가 이에 속한다. 베냉에서는 여신 '마우'를 최고 신으로 섬기는데, 마우는 떨어질 수 없는 쌍둥이 남자형제인 '리사'를 대동한다. 마우-리사쌍은 숭배의 대상은 아니나, 모든 보둔의 왕으로서 인간을 위해 그들을 땅에 내려보냈다고 전해진다.

대서양의 반대편

서인도 제도에 있는 아이티는 1492년 스페인에 점령되었다. 섬에 산이 많아서 원주민인 타이모와 아라왁이 아이티로 명명한 이곳의 원주민 수는 16세기 초에 130만 명에 달하던 것이 금광에서 행해진 강제노동과 학대, 그리고 질병이 원인이 되어 15년 만에 6만 명 미만으로 격감했다. 1503년, 원주민이 '엔코미엔다스(스페인 식민통치 노동제도: 역주)' 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정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데려온 첫 번째 노예들을 이 섬에 내려놓았다. 흑인 노예들은 광산에서 이루어지는 고된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자 1517년, 카를로스 1세는 1만 5, 000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의 수입을 허용했다.

1629년, 한 무리의 프랑스인이 아이티 북쪽 토르튀섬에 나타났다. 아메리카 대륙 연안을 휩쓸던 해적, 들소 사냥꾼, 카리브해를 지나는 스페인 선박들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던 자들이었다. 스페인과 싸움을 벌이며 마침내 아이티에 입성한 프랑스인은 카카오, 목화, 인디고 따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이티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이 증가하자 루이 14세는 1665년 베르트랑 도주롱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1년 앞선 1664년부터는 콜베르가 설립한 인도회사가 이미 아이티에 흑인 노예를 공급하고 있었다. 초창기에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인도회사는 가난한 백인들까지 데려왔으며 그들은 36개월동안 흑인과 똑같이 천대를 받았다. 이들은 '지원자'라고 불렸다. 1697년 리스위크 협정이 체결되자 스페인은 아이티섬의 3분의 1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되었고, 그후 이곳은 생도맹그라 명명되었다.

기니, 신비한 아프리카

그 당시에 이미 설탕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었다. 노예인력이 투입되면서 설탕의 생산체계에는 상당한 전환이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서자 흑인 매매는 더욱 활발해져서, 당시 표현대로 총체적인 '검둥이 기근'이 몰아 닥치기 전까지 극에 달해 있었다.

생도맹그는 잡다한 아프리카 흑인 민족들을 두루 찾아볼 수 있는 인종전시장과 같았다. 그러나 가장 큰 세 집단-수단족, 기니족, 반투족-가운데 하나인 나이지리아의 요루비족과 다호메이의 퐁족의 영향력이 특히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노예들이 섬에 이식해 놓은 온갖 문화와 풍속을 통합하는 기반을 형성했다.

17세기부터 특히 18세기 전반까지, 다호메이 왕가는 아프리카의 서해 연안에 있는 소왕국들을 통치했다. 다호메이 왕가는 소왕국들에서 많은 포로들을 잡아 흑인매매상에게 팔았는데, 이것이 그들 경제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이렇게 팔린 노예들 중에는 마법사나 죄인들도 있었고 부두교의 고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레올어로 된 다음 격언이 보여 주듯, 기니만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자기들이 형제의 손에 팔아 넘겨졌다고 생각했다. "데피 란 기넨, 네그 라이 네그(기니에서 이미 검둥이들은 검둥이들을 증오했다)". 그러나 기니는 정령들이 태어난 진정한 땅으로 여겨졌고, 부두교는 잃어버린 조상의 땅 아프리카와 연결되는 수단으로서 그 생명이 연면히 이어졌다.

세례로 얻은 새로운 신분

모든 것들이 아프리카의 문화를 잊게 만드는 데 한 몫을 했다. 우선 대서양을 횡단하는 동안 노예선안에서 노예들은 둘씩 둘씩 사슬로 묶여졌고, 정기적으로 구타를 당했으며,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해서 섬에 도착하면, 그들은 식민지 경영자들이 그리스신화(큐피드, 제우스 등등)나 로마 역사(브루투스, 폼페이우스 등등)등에서 마음대로 따 붙여 놓은 새 이름으로 불렸다.

주인들은 노예들을 농장이나 아틀리에라고 부르는 노동집단, 오두막집에 배치할 때 계획적으로 여러 민족들을 뒤섞어 놓았다. 결과적으로 노예들은 자신의 가족과 혈통, 조상들에 대한 기억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인이 지켜볼 때를 제외하고는 노예들끼리 모임이나 집회를 가질 수조차 없었다. 이렇게 인간성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한 복종상태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종교는 흑인매매와 노예제도를 정당화시켜 준 카톨릭뿐이었다. 이미 1635년에 루이 13세는, 흑인매매를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섬에 설립된 회사는 노예들을 카톨릭으로 교육시키고 세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고시했다. 1640년에서 1647년까지 생도맹그에서 근무했던 초기 선교사들 가운데 하나였던 장밥티스트 뒤테르트르 신부는, 교역의 근본 목적은 흑인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예제도를 정당화한 포교활동


프랑스에서 콜베르의 주장으로 만들어져 1685년 루이 14세가 공포한 흑인법전은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정당화할 때에 교회가 맡을 역할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흑인법전 제2조는 "우리 섬에 있는 모든 노예들은 로마 교황 카톨릭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교육받을 것이다. "라고 규정해 놓았으며, 제3조는 "카톨릭 이외의 모든 종교행위를 금지한다. "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이 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밤낮을 불문하고 노예들의 모임을 금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노예들의 모든 활동(노동, 여가, 가족)을 규제하고 노예들을 동산으로 규정하는 등 그들에게서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흑인법전에 있는 60여개의 조항 중 노예들이 받는 학대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인 조항은 단 하나도 없었다. 법전에 언급된 휴식이나 음식, 종교 등에 대한 조항은, 사실 탈출예방을 위한 통제수단을 확고히하고 노예소유주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법전에 따르면 주인이 노예를 나쁜 일에 악용했을 때에 주인은 가혹한 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민법사항이든 형법사항이든 간에, 노예가 법정
에 증인으로 출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작업장에서는 물론, 종교의식 때조차도 노예들은 항상 작업반장이나 관리자, 노예감독관의 채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작업반장이나 관리자, 노예감독관은 반드시 모두 백인이었으며, 그들 역시 농장주의 감독 아래 있었다. 그들은 자주 자리를 비우는 농장주들의 권한을 대행했다.

이처럼 강압적으로 행해진 전통과의 단절, 철저한 통제, 특히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해야 하는 참담함 속에서도 흑인 노예들은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그들의 생존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주인의 시선 밖에서, 교회의 그늘진 곳에서 비밀리에 정기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상징되는 조상의 정령들을 숭배하고, 기도를 올렸다. (카톨릭의 성인과 성체숭배의식은 아프리카 신앙을 숨길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

고대 우상숭배의식


노예소유주와 행정관, 선교사는 부두교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모든 신앙과 의식들을 유치한 짓이나 광기의 징조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미신이나 우상숭배, 악마주의 같은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17세기 말 노예들의 종교생활을 관찰한 라바 신부는, 주술행위는 '검둥이'들의 타고난 성향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흑인)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기전에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나라에서 마법사였던 자들을 밝혀 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약속을 하든 간에 대부분 그 일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부두교 의식을 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한결 엄격한 제재조치가 즉시 뒤따르곤 했다. 판결문, 법령, 그리고 여러 가지 기록물들은 노예들이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주술행위를 했을 경우, 벌금형 또는 체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부두교에 대한 최초의 사실적인 묘사는, 프랑스의 여행가인 모로 드 생메리가 1797년에 남긴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역시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그가 참석하여 목격한 부두교 의식을 '구역질나는 매춘'을 야기시키는 '소란스러운 짓거리'라고 비난하고 있다.

드 생메리는 다호메이의 도시 아라다 출신의 아라다 검둥이들은 부두교의 원칙과 규칙에 따라 산다고 전했다. 부두교 신자들은,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뱀 주위에서 춤을 추면서 밤이면 극비리에 의식을 치렀다. 처음 부두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붉은 수건을 몸에 두르고 제단 위에 놓인 철망 상자 안에 든 '쿨뢰브르 뱀'에게 봉헌물을 바쳤다. 이어서 입문자가 제사장에게 인사를 올리면, 염소가 제물로 바쳐지고 그 피는 부두교를 신봉하기로 맹세한 참석자들에게 뿌려졌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지쳐 땅에 쓰러질 때까지 다양한 형태로 신경발작을 일으키며 빙빙 돌았다.

원천을 향한 회귀와 새로운 요소들

모로 드 생메리는 부두교도들에게 나타나는 최면상태와 '홀림' 상태를 묘사했다. 그러나 드 생메리는 부두교의 특정한 한 측면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그것은 무지개뱀으로 상징되는 보둔인 담발라 웨도를 숭배하는, 다호메이 왕가의 아주 특수한 의식이다.

그러나 생도맹그에 있는 노예들은 예전처럼 왕가나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나라를 의미하는 '낭송'이라 불리는 다양한 정령군들을 섬겼다. 생도맹그에서 정령들은 더 이상 보두나 보둔으로 불리지 않고, 지역에 따라 '르와', '미스테(신비)', '장주(천사)' 또는 성자로 불리고 있었다. 새로운 신화도 탄생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여러 민족들 간의 접촉 덕분이었고, 한편으로는 카리브의 원주민 생존자들의 문화와 기독교, 그리고 프리메이슨단에서 유입된 여러 요소들이 노예들 삶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번창한 탓이었다.

결국 18세기까지 부두교에 대한 초창기 묘사들은 뱀 숭배신앙이나 악마적이며 미개한 의식이라는 고정관념에 지배되어 균형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들에게 문화적 단결을 가능케 해주는 부두교의 힘과 규칙적이며 절제된 언어, 풍부한 신화와 의식은 아직 외부 관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식민지 경영자와 행정관은 이미 부두교의 비밀스럽고 신비한 특성이 노예제도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흑인들의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노예제도에 맞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다양한 부두교 의식을 통해 점차 그들 고유의 종교를 발전시켜 나갔다. 공동체의 유대를 만들어 준 부두교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흑인들의 투쟁에 기반이 되었다.

제2장 지옥 같은 노예생활 속에 감춰진 부두교

신세계에서 실시된 노예제도는 노예들을 가사노동에만 투입시켰던 아프리카의 노예제도와 완전히 달랐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다호메이 왕국의 노예의 경우는 소유주와 혈연관계가 없는 이방인이지만, 주인 가족의 일원과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일단 국제시장에 팔리고 나면 그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최대한이윤을 얻어내기 위해 노예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가혹하게 혹사시켰다.

생도맹그로 팔려 온 노예들은 그곳에서 평균 7년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주인들은 이 소멸되기 쉬운 노동력을 흑인 매매시장을 통해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응: 아프리카 신앙을 회복하다

서인도의 네덜란드 회사에서 근무하던 기욤 보스만은 1705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불쌍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살찌우고 환대하기 위해 그들을 사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노예들은 노예상인이나 식민지 경영인을 식인종이라고 여기거나 자신들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마법사들보다 더 영력이 강한 마법사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노예들은 자살을 하면 백인 주인들에게 육체만을 남겨 준 채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노예들이 어떻게 작업장이나 농장에서 요구된 혹독한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을 금지당했지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카톨릭 신앙활동을 구실로 백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이제 노예들은 성자숭배, 각종 성사, 성령 발현, 그리고 다양한 카톨릭 대축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아프리카 종교에 보호막을 칠 수 있었다.

선교사와 행정관은 북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시작되는 '검둥이들의 춤과 집회'를 끊임없이 비난했다. 이런 집회가 반란과 항거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규칙과 법령을 마련해 흑인들의 의식과 집회를 막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부두교가 카톨릭 의식 속에 교묘히 위장되어 있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카톨릭을 향한 노예들의 종교적 역정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던 주인들도 마침내는 그것이 결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노예들이 기독교 의식에 심취하는 것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탈주: 도망 노예들

노예들이 보여 준 저항의 두 번째 형태는 그들만의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곳은 도망친 노예들의 피난처가 될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 철폐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주인들이 뒤쫓아올 수 없는 지역으로 달아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 접어들자 수많은 노예들이 농장과 작업장 밖으로 달아났다. 행정당국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예방책을 강구했지만, 수입 노예의 폭증에 따라 탈주사건 발생률은 치명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굶주림과 학대, 자유에 대한 갈망에 떠밀려 도망친 노예들은 '마룬(Maroon)'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바호루코 산맥(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의 남서쪽)으로 가 그곳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경제, 정치, 문화 공동체를 결성했다. 농장에서 도망쳐 나온 마룬들은 농기구와 그가 돌보던 말이나 노새를 가져왔다.

마룬들이 산에서 짓는 농사라는 것이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작업장이나 집에서 일하는 노예들과 연락망을 만들지 않았다면 연명하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마룬들은 가끔 약탈을 하러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다가 잡히면 잔인한 벌(귀 자르기, 목에 쇠고리 달리, 불로 지지기 등)을 받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탈주자가 생겼다.

산 속에서의 부두교

탈주지에는 동화되지 않은 노예인 '보살(bossale)'과 반대로 이제 막 섬에 도착한 노예의 수가 가장 많았다. 따라서 식민지 경영자들의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는 아프리카적인 조직원칙이 쉽게 수립될 수 있었다.

춤, 노래, 신화, 의식, 치료요법 들뿐 아니라, 크레올어, 아프리카의 친족구조에 기반한 새 가족제도의 개발 등이 새로운 사회체제 구성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부두교는 출신 민족과 출신 농장이 저마다 다른 노예들 사이에 단단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었다. 이 공동체에 합류하기에 앞서, 새로 온 탈주노예는 다시 붙잡힌다고 해도 절대로 그의 동료들을 고발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해야 했는데, 이러한 의식은 부두교의 제사장이기도 한 마을의 수장 앞에서 이루어졌다.

아프리카 전통은 공동체에서 자발적으로 복원되었는데, 여기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제도의 폐지였다. 그래서 탈주노예들은 부적을 만드는 데 능하며 독초와 독약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부두교의 사제들에게 마술과 주술을 배웠다.

흑인의 지도자이자 마법사: 프랑수아 마캉달

1750년부터 1791년까지 생도맹그의 농장주들은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부두교의 정령들은 식민지 경찰에 대항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수상한 약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행위, 아프리카의 모든 주술행위에 대해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부두교에 관한 무서운 미신들은 마침내 노예제도를 뿌리째 뒤흔드는 데 성공했다.

'주술'을 발휘하는 탁월한 능력 덕분에 유명해진 탈주노예 지도자들은 식민지 정치무대에 나타나 백인들의 멸망과 노예들의 해방을 예언했다. 탈주노예 지도자들 가운데 몇몇은 진짜 정치인이 되어 독립투쟁의 전략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수아 마캉달은 1757년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약뿐 아니라 '경호인'이란 부적을 만들어 반란노예들에게 배포하여, 식민지 경영자와 행정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 부적은 무기로 공격을 당하더라도 상처를 입지 않게 해주며, 백인들에게 가질 수 있는 모든 공포를 제거해 준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후 '마캉달'이란 말은 생도맹그에서 만들어지는 부적이나 독약을 통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생도맹그 식민지 경영자들의 특혜받은 삶

18세기 말, 식민지에는 40내지 50만 명의 노예들과 4만 명의 백인, 그리고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2만 5, 000명의 흑인과 혼혈아들이 있었다. 당시 생도맹그는 가장 부유한 프랑스 식민지로서, 프랑스 무역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매년 500척의 상선들이 본국의 항구로 설탕, 커피, 인디고, 구리, 목재 따위를 실어 날랐고, 1789년에는 이미 793개의 설탕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본국은 생도맹그를 중요한 경제적 자원으로 평가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기반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 다시 말해 '프티 블랑'(petit Blanc, 도시의 종업원과 근로자)과 '그랑 블랑'(grand Blanc, 농장주, 관리, 상인)은 오로지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 그들의 일상은 만찬석상과 무도회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으며, 혼혈인이기 일쑤인 관리자의 정부를 둘러싸고 하찮은 언쟁이 난무할 뿐이었다. 술집과 카바레와 극장은 언제나 만원사례였다.

18세기 중엽, 프리메이슨 지부들이 생도맹그에 설치되면서 관용과 분리를 부르짖는 사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해방노예들-물론 흑인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식민지 경영자들이 프리메이슨 이념의 보급을 차단하려 했음은 당연한 시도였다. 게다가 식민지와 프랑스의 관계는 '독점무역법'이라는 굴레에 고착되어 있었다. 이 법은 식민지에서 생산된 상품은 본국이 결정한 가격아래 오로지 본국에만 판매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고 있었다. 이제 생도맹그 식민지 경영자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반항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부아 카이망 의식

부두교의식과 '마캉달'을 금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선언'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서 노예들을 완전히 격리해 놓을 수는 없었다. 노예들은 이제 노예제도에 마지막 공격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룬들의 새 지도자는 부크망뒤티였다. 여러 군데 작업장의 노예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뒤티는 작업반장이자 마부였으며 부두교의 제사장이기도 했다. 뒤티가 거사를 시작한 곳은 마캉달의 거주지였던 르노르망 드메지 농장이었다. 그는 마룬 거주지와 식민지 북부에 위치한 작업장과 농장의 모든 노예들에게 폭동명령을 내렸다.

식민지 경영자들이나 교구신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봉기는 극비리에 추진되었던 것 같다. 첫 번째 회합은 마룬 거주지의 지도자들이 모여 진행했고, 두 번째 회합은 1791년 8월 14일 밤 뒤티가 좌중을 이끈 부두교 의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허구와 사실이 뒤섞인 이야기는 이렇게 전한다. 부아카이망이라 불린 이 의식에 모인 노예들은 식민지 경영자의 지배 아래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노라고 맹세한 성스러운 헌장에 조인했고, 부크망이 크레올어로 아프리카 선조들이 섬기던 신들의 이름을 걸고 복수할 것과 백인들의 신을 믿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제물로 바친 검은 돼지의 피를 나누어 마셨다. 마침내 8월 22일 봉기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스파르타쿠스

폭동을 일으킨 노예들은 두 달 동안 식민지 전역을 공포에 빠뜨렸다. 200개의 설탕농장과 1, 800개의 커피 농장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수천여 명의 백인이 죽음을 당했다. 뒤티도 매복중에 숨졌다. 흑인의 새 지도자 중에는 아라다 왕의 손자이며 섬 북쪽의 브레다 거주지에서 태어난 투생 루베르튀르가 있었다. 뒤티와 마찬가지로 마부 출신인 그는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는 흑인을 해방해 줄 새 스파르타쿠스가 생도맹그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 레이날 신부의 <두 인도의 역사>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사실, 루베르튀르는 1791년 8월 22일부터 흑인들의 반란을 이끈 지도자들인 뒤티, 비아수, 자노, 그리고 자신이 비서로서 모신적이 있는 장 프랑수아와 알고 지냈다. 점차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혼혈인뿐 아니라 백인 식민지 경영자에게도 권위를 가지기 시작했다. 용병술에 뛰어났던 루베르튀르는 500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조직하여, 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스페인인과 동맹을 맺었다가 흑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그들과 결별했다. 이어서 그는, 루이 16세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원한다고 판단하고 왕당파 백인과 동맹을 맺었다. 그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해 병사의 수가 5, 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793년 8월 29일, 파리 의회의 전 변호사이자 혁명지지 인사로 이름을 날리던 레제 펠리시테 송토낙스가, 전 세계의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민의회가 식민지의 정국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다른 두 명과 함께 그를 파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1791년 8월의 흑인 봉기는 승리를 인정받았다.

투생 루베르튀르: 독립의 기반을 다지다 그후 투생은, 프랑스가 대혁명의 격동 속에 휘말린 틈을 타 생도맹그섬을 점령하려는 영국인과 전쟁을 치렀다. 식민지 경영자들은 노예제도의 부활을 바라는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투생은 자신의 군대를 앞세워 섬에 진주한 영국인을 모두 몰아냈으며, 1794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흑인의 신임을 얻은 그는, 노예제도 폐지를 받아들인 식민지 경영자들과 협력하여 농장의 규율과 작업조직을 재구성했다. 그의 목표와 전략은 흑인의 자유 수호였다.

1801년, 투생은 생도맹그섬의 스페인령마저 정복해 그곳에서도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할 수 있었다. 이후 투생은 프랑스에 대한 생도맹그의 자치권을 명시한 헌법을 공포하고 스스로 섬의 종신 총독이 되었다. 1802년, 나폴레옹은 식민지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 생도맹그섬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비록 투생은 프랑스로 끌려와 주 요새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미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든든히 다져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흑인 장군과 혼혈인 장군들-데살린, 알렉상드르페티옹, 앙리 크리스토프-이 이끈 전쟁에서 해방노예와 연대한 노예들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1804년 1월 1일 마침내 독립이 선포되고 섬은 옛 이름 아이티를 되찾았다.

부두교와 국제적 위신

새로운 독립국가에서 부두교는 이제 어떤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인가? 유럽 전역에서 독재전제주의 주술, 식인풍습 같은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들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점차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은 그들이 권력에 도달하기까지 값진 기여를 한 아프리카의 전통 유산을 어떻게 떠맡을 것인가? 사실 부두교는 문자에 기초하고 있는 의식이 아니다. 정확한 교리도,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도, 엄격한 의식도 갖고 있지 못한 부두교는 공식 종교로서 지위를 얻기 힘들었다. 최초의 국가 수반들-투생 루베르튀르, 데살린, 페티옹, 크리스토프-은 부두교 제사장들을 철저히 박해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또한 이들 통치자들은 카톨릭을 국가의 공식 종교로 선택했을 때, 유럽 국가들과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세기 서양인은, 모든 아프리카 문화에 야만성이 깃들여 있다고 보았다. 1791년 아이티에서 봉기와 독립전쟁을 주도한 선동자들은 부두교와 야만성이 관련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용되곤 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20세기에 되살아나 미국의 아이티 점령을 정당화했으며, 아이티를 살아 있는 시체들이 떠도는 죽음의 땅으로 변화시켰다.

제3장 국제무대에서 나타나는 주술

북부 지방에서는 많은 카톨릭 신부들이 노예들을 상대로 주인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설교하고, 봉기를 이끄는 흑인 지도자와 식민지 경영자 사이에서 협상중개자로 활동하면서 아이티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중 몇몇은 프랑스 대혁명 때 시민헌법을 받아들인 성직자였다. 이 헌법은 교회가 정부의 사법적 관할 아래 놓인다고 규정하여 바티칸 당국이 거부했던 것이다. 1797년 인권선언이 있은 뒤, 그레구아르 신부는 입헌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신부들을 투생루베르튀르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이 악마적 이미지를 널리 전했다

독립 아이티의 부두교 의식은 유럽인들의 관심을 점점 더 증폭시켰다. 프랑스의 여행가인 폴 도르무아는 1791년의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이티 시골에서는 부두교가 대파괴를 일삼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그들이 잡을 수 있었던 불행한 사람들의 몸을 가지고 태양이 무색할 만큼 끔찍한 향연을 벌였다. "고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주인에 대한 복수라는 변명조차 없었다. 도르무아는 '검둥이들'은 하등할 뿐 아니라 그 사악함을 백일하에 드러냈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결국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심해진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부두교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1850년 부두교의 열성 신자였던 아이티의 수반 포스탱 술루크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철저한 독재를 행사했다. 그가 몰락하자, 1860년부터 아이티는 카톨릭을 모든 아이티인의 공식 종교로 지정하고 바티칸 교황청과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부두교는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고, 사람들은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떠들썩한 추문을 통해서나 부두교를 접할 수 있었다. 결국 1881년에는 전직 영국 영사인 스펜서 세인트 존이, 식인과 인신공양을 하는 부두교야말로 아이티 문명을 퇴보시키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단언했다.

미신이 지배하는 국가에 독립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몇 년 후 1910년에는 헤스켓 프리차드 같은 미국 작가들이 아이티를 찾아왔다. 부두교를 접하게 된 미국인들은, 아이티의 자본가와 지식인이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아이티는 '파리식 문화와 미개함이 접목되어 있는 이상한곳'이다. 미국 작가들은, 흑인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두교 의식에서는 가금류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부두교도들이 '뿔 없는 염소'라고 부르는 어린아이까지 제단에 올려놓는다고 주장했다. 이와같은 끔찍한 소문들은 벌써부터 백인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인종적 특성'을 더욱 뿌리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독립은 시기상조로 생각되었다. 백인은, 흑인이 문명국의 대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백인의 지도가 선결문제라고 믿었다. 인종, 부두교, 독재 전제정치가 갖는 확실한 연관관계는 결국 미국의 여론을 아이티 점령으로 기울게 했다.

1915년, 해방군을 가장해 상륙한 미해군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점령하게 된다. 그들은 점령기간 동안 부두교 신전을 약탈하고 아프리카 선조들의 '우상'을 파괴하면서 자신들이 아이티에 이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센세이션과 처벌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에서만 1, 000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다. 미 해군 소위 포스틴 워커스가 저술한 <라 고나브의 백인왕>은 아이티 민중을 식인풍습과 흑색마술에서 구해 내기 위해 그가 저지른 학살을 다루고 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점령에 항의하는 '카코'란 사람들은 부두교의 신자들이었다.

<식인종 사촌>같이 약간은 선정적인 제목을 단 다른 책들은 미국인에게 아이키를 '좀비'의 땅으로 소개했는데, 이는 '죽은 자를 깨우는' 부두교의 기괴한 풍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죽음의 보두인 좀비는 차츰 미국 공포영화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은 아이티 법정에서 넘쳐나는 고소와 증언 특히 1835년부터 좀비와 마법사들에게 투옥이나 벌금형을 내리겠다고 규정한 법전의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두교의 이미지가 이처럼 굳어 버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하로 숨어들게 된 제사장들이 부두교를 신비스럽게 만들어 자신들의 능력을 한층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할 전략으로 꾸며 냈던 것이다. 되풀이된 미신타파운동 기간(1864, 1896, 1912, 1925-1930, 1940-1941)동안, 국가와 교회는 부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부두교 의식에 사용되는 물건을 불태웠으며, 부두교의 제사장인 '운강'들을 투옥했다. 특히 1940년에서 1941년 동안 행해진 운동은 모든 카톨릭 신자에게 사탄의 의식으로 간주된 부두교 의식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한 '거절자의 맹세'를 강요했다.

'왕아' '바카' 그리고 '늑대인간'

부두교 신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몇 가지 아주 모호한 의미를 가진 말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먹다. "라는 말은 주술의식을 통해 상대의 영혼을 사로잡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두교의 신앙체계와 의례장치 속에는 자민족중심주의의 편견과 현실을 바라보는 데카르트적인 양식을 뒤흔들어 놓을만한 그들만의 질서가 담겨 있다. 사실 부두교는 무한한 상상의 힘을 가진 종교인 것이다.

모든 부두교도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사로잡아서 '왕가'라는 병이나 상자 속에 가둘 수 있으며, 그것을 이용해 주문을 걸 수 있다고 믿는다. 집안에서 같은 동네의 이웃과 친구 사이에 생기는 갈등이나 반목들은 이따금 왕가를 사용할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왕가는 방어용 마술일 경우 그 대상을 죽게하지는 않지만, 병이나 여러 좋지 않은 일들을 일으킨다. 또한 왕가의 효력은 한정된 것이므로 겨냥한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난쟁이나 작은 괴물, 짐승의 형태로 물화된 마력인 '바카'는 그 사용처가 왕가와 달랐다. 바카의 경우에는 그것을 가진 주인조차 안전하지 못했다. 항상 피에 굶주려있는 바카가 때로는 마력을 제공한 대가로 주인의 가족 가운데 한 명을 요구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주술에 속하는 어떤 활동들은 희생대상으로 삼은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일은 '늑대인간'들이 하였는데, 이들은 탐욕스러운 정령이 들린 마법사로, 아이들의 피를 빨아먹기 위해 짐승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늑대인간이 되는 것은 유전적으로 타고나거나, 무모하게 악령들을 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 있으나 자유의지가 없는 좀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주술행위는 좀비를 만드는 것이다. 이미 죽어서 땅에 묻힌 좀비를 농장에서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반의식상태로 깨운 뒤 데려온다고 하는데, 오직 '두 손을 사용하는(마술과 주술을 다 사용하는 제사장을 의미)' 운강만이 사람을 죽은 것처럼 만드는 독약의 정확한 양과, 그를 무덤에서 다시 깨우는 비법을 알고 있다. 좀비에 관한 소문들은 정기적으로 시장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시작되어 온 나라를 떠돌았다.

민간신앙에 따르면, 좀비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지닌 영혼들 가운데 하나를 빼앗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좀비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자각은 하지만 스스로 반응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좀비는 그에게 주술을 건 운강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뿐이다. 살아 있는 시체가 된 그는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콧소리를 내며 걸음걸이마저 뻣뻣해 진짜 '저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제정신이 돌아온 좀비들은 스스로 제 무덤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완전히 죽지 않고 좀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어떤 가족들은 죽은 자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시체에 독약을 먹이기도 한다.

부두교와 주술

식민지시대부터 아이티에는 아프리카에 여전히 존재하는 제도의 후계자이자 사촌뻘이라 할 비밀조직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지방에 따라 '조보프' '블랑방당' '샹월(털 없는)'로 불렸다. 이들은 밤이면 한데 모여서 마을을 돌며 파수꾼 역할을 했다.

조직원은 암호를 가지며, 가족 중 일원을 포기할 수 있다는 위험한 서약을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엄청난 부와, 주술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때문에 네거리에서 우연히 비밀조직 패거리와 마주친 사람들은 쉽게 주술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부두교도에게 부두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마술이나 주술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둘을 혼동하는 사람은 주로 외부 관찰자이다. 그들은 언뜻 듣기에는 '현실적인' 부두교도의 말에 현혹되고 종교체계의 위계질서 개념에 몰두해 자신들의 종교가 억압하는 것을 부두교에 투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 부두교와 마술이라는 위험한 주제를 다루는 문학과 영화가 등장했던 것이다.

부두교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두교는, 원칙과 규칙에서 시작되어 기능하는 상징체계이고, 신자에게 제공되는 복잡한 의식과 행동규범에서 정령(르와)의 역사를 들려주는 '신화'이다.


부두교도에게 정령 숭배 신앙은 개인과 개인은 물론 그들과 세계의 관계를 중재한다. 정령들을 언어에 비유한다면 각 정령은 한 단어와 같아서, 그 자체로는 단 하나의 협소한 의미밖에 없다. 정령들은 상호대립과 보완작용을 하며, 부두교의 신단을 함께 구성함으로써 전체 가족으로서 중요성을 획득한다.

제4장 '르와' 정령

운명의 논리

정령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르와는 인간의 몸에 깃들이기도 하지만, 나무나 강, 산, 공기, 물, 불 등 모든 자연물 안에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자연의 모든 사건과 요소 뒤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현대인을 놀라게 할 수도 있다.

부두교의 르와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농업, 전쟁, 사랑)과 자연세계의 여러 측면 사이에 연결망을 형성해 준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창조하며, 개인의 삶을 나서 죽을 때까지 지배한다. 이것은 마치 그들의 메시지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만이 개인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배울 수 있는 길인 것처럼 보인다. 르와는 또한 사회생활과 우주의 여러 분야를 분류하는 양식을 제공한다. 질서와 무질서, 삶과 죽음, 선과 악, 행복과 불행들은, 어떠한 것도 부조리한 상태로 두지 않는 르와의 중재 덕분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숨겨진 얼굴

보이지 않는 우월한 힘인 르와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씨족이나 부족의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거나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선조, 동물이나 자연현상(천둥, 폭풍우)이었다.

르와는 어떤 것이든 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연결하는 끈의 역할을 한다. 그들은 세상의 기원을 밝혀 주며, 세상의 숨겨진 어둡고 깊은 얼굴이라고 할 생명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모든 르와는 인간의 실제 역사와 관련된 신비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르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카톨릭 성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부두교의 존재조건뿐만 아니라 그것의 변형, 적응, 그리고 생존 능력을 보여준다.

많은 르와가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일상사에 개입하는데, 이 때문에 부두교는 다신숭배교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르와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인신교를 엄격히 지킨다. 부두교도들이 기독교의 최고 신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안에서 아프리카 최고 존재의 특성들을 발견한다. 멀고도 가까이있는 신은 인간들을 걱정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대신 인간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르와에게 세상을 조직하는 역할을 떠맡기는 것이다.

기니에서 '포토 미탕'까지: 르와의 여정

부두교도들은 르와가 아프리카에서, 좀더 명확하게는 완전히 잃어버린 전설의 땅인 기니에서 온 것이라고 믿었다. 노예들은 르와가 차례대로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로 여행을 떠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르와들은 아이티에 도착하기 전에 특정한 길과 그들이 모일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기니에서 온 르와들은 북서 지방에 있는 '빌로캉'이란 성스런 산에서 재회하였다. 르와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지하수를 통해 산에서 내려가는데, 그전에 먼저 서로의 경험을 교환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곳으로나 내려오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흩어지지 않는다. 생명체를 위한 공간의 근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은 아주 치밀하게 짜여진다. 부두교 사원인 우포의 중앙에는 르와들에게 의례를 올리는 장소인 회랑이 만들어진다. 회랑의 중앙에는 천상과 지상을 이어 주는 연결축이자 르와가 인간을 만나러 오는 르와의 왕도인 '포토 미탕'이 있다. 사람들은 포토 미탕의 받침돌 주위에 르와에게 바치는 봉헌물을 놓고 상징적인 그림이나 '베베'를 그린다. 그리고 이 기호와 북소리에 이끌려 온 르와는 신자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 춤을 춘다.

아이티의 부두교에서는 포토 미탕에 두 마리 뱀으로 상징되는 담발라 웨도와 아이다 웨도라는 르와를 그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명의 나무를 닮은 이 포토 미탕 둘레에 모여서 부두교의 춤을 춘다.

라다, 콩고, 페트로

원래 르와들은 씨족의 수호영이거나 신격화된 선조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아이티에서 르와는 아프리카의 다양한 민족집단을 반영한다. 르와들은 각기 다른 의식으로 나누어진 국가, 또는 크레올어로 낭송이라 불리는 '가족'으로 재통합된다. 각 의식은 절, 환호, 춤, 악기, 그리고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 형태에 따라 독특한 의례를 갖는다.

그 가운데 중요한 의식이 세 가지 있다. 라다(Rada)로 알려진 의식은 다호메이 출신의 정령들을 숭배한다. 이 정령들은 본질적으로 '좋은 르와'라고 간주되는데, 기니에서 온 르와라고 해서 르와 기넨으로 불린다. 라다의식은 부두의 주요 의식으로, 모든 입교의례는 항상 라다 의식으로 치러진다. 이 의식을 통해 신도는 르와의 아내나 남편을 의미하는 '운시'가 된다.

콩고(Kongo)의식은 반투 출신의 르와들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르와들은 라다의 정령보다인기가 적은 편이다. 그들은 제물로 개를 받는 것을 좋아하고 활기가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페트로(Petro) 의식은 식민지였던 생도맹그 출신의 르와들을 대상으로 한다. 크레올 르와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단히 복수심이 강해서, 온화하다고 여겨지는 라다 르와들과는 반대로, 아주 매정하고 잔혹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크레올 르와들은 마술에 사용된다. 페트로 의식에서는 일부 콩고 르와들과 라다 르와들도 출현하여, 그들의 폭력적인 면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의식에 따른 르와들의 분류가 항상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의식은 라다 의식에 도입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고 같은 것이 있다. 나고 정령은 다호메이 부두교에 일찌감치 통합된 요루바족의 정령들을 가리킨다. 때때로 콩고의 르와들이 페트로 의식에 합류하는 것도 이러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두머리 파파 레그바

르와들이 갖는 권위가 모두 같지는 않으며, 세 개의 주요 의식을 치르는 각 신전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르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모든 의식에서 르와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던 레그바가 있다. 의례에서 제일 먼저 불려 나오는 레그바는, 그에게 바치는 노래에 나타나듯이 초자연적인 세계와 사람들을 갈라 놓는 장벽을 걷어 내는 임무를 맡고 있다.

"Papa Legba ouvri baye-apou mwen, pou mwen pase, Le ma tounen, ma salyie lwa yo. (파파 레그바 장벽을 걷어 주세요, 제가 지나갈 수 있도록. 제가 돌아와서, 르와들을 받들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레그바는 신들의 비밀을 훔쳐 인간세상에 전해 주었다. 그는 사원이나 마을 입구, 교차로 등을 지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메트칼푸(교차로의 주인)'라고 부른다. 정오나 자정 즈음에, 레그바는 마술을 행사하는 정령으로 변신한다. 이때 사람들은 그의 후원을 등에 업고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마술을 시행할 수 있다. 쿠바에서는 그를 오구 혹은 엘레그바라고 부르고, 브라질에서는 에슈라고 부른다. 이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따금 악마와 동일시되지만, 브라질의 캉동블레교도들은 이와 같은 혼동이 제기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붉은 르와 오구와 바롱 삼디

서열상 레그바 다음에 오는 르와들은 다양한 자연분야와 여러 인간활동을 지배한다. 라다 의식에 속하는 나고 집단의 르와인 오구는 호전적인 용맹함이 특징인데, 그가 선호하는 색은 그의 고유한 영역인 불을 의미하는 붉은색이다. 동시에 그는 풍요의 르와이기도 하다. 오구는 수중에 사는 미와 관능의 화신인 에질리를 비롯해 다른 많은 르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그는 농업의 르와인 아자카의 사촌이기도 하다. 오구의 양자인 브라브 제데 르와의 상징물은 남근이다. 브라브 제데는 죽음을 주관하고 있기도 하다.

제데 집단은 우두머리 바롱 삼디와 같은 신전에 거주한다. 제데는 전쟁에서 아보메이 왕가에게 패한 민족을 대표하는데, 많은 수가 노예매매를 통해 생도맹그로 끌려왔다. 베냉을 떠나온 그들은 아이티에서 죽음의 르와가 되었다.

제데의 춤은 시골과 도시에서 11월 한 달 내내 벌어지는데, 특히 처음 이틀은 국경일처럼 여겨진다. 제데 르와는 죽음의 모든 상징들(검은색, 콧소리, 장의사 복장, 코를 틀어막은 솜마개 따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이지만, 춤과 노래, 외설스러운 대화를 통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까다로운 보조자

르와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연계해 주며, 가족의 안정과 영속성을 보장한다. 그들은 수태와 건강을 책임지며 물질의 획득과 정신적인 부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집안의 유산으로 르와를 물려받는다. 일정한 크기의 땅과 결부된 르와는 그 땅과 함께 죽은 부모가 자식들에게 물려준다. 어떤 경우에는 르와가 꿈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때 선택된 사람에게는 결정권이 전혀 없다. 만약 선택된 사람이 르와를 거부하면, 르와는 갖가지 불행이나 병들을 불러와 그를 괴롭히기도 한다.

부두교의 판테온에서 르와는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한 존재로 나타난다. 부두교에서는 모든 고정된 이원론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아이티에서는, 부두교도들을 삼켜 버리거나 태만한 신봉자들에게 난폭한 보복을 할 수 있는 불길한 르와와 식인 르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페트로와 콩고의 르와들은 위험한 르와로 알려져 있지만, 신봉자들이 그들을 제대로 모시기만 하면 실제로는 다른 집단의 르와만큼이나 커다란 은혜를 베푼다고 믿어진다. 특정 지역에서 르와를 '디아브(악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부두교도들이 기독교의 악마는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용어만을 차용한 것일 뿐이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페트로 르와 가운데는 루시퍼(사탄)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신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른 종교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르와에게 모든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면서 무한한 힘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르와가 개인의 삶 전체에 침투하거나 개인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의 책임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때 사람들은 르와의 메시지와 품성을 해석하는 부두교 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이런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르와의 능력은 다른 르와에 의해 상쇄되거나, 부두교 제사장이 알고 있는 특정한 의례로 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부두교도들은 마술과 주술의 시행을 배척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힘들이 부두교 체제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으며, 그것들이 언제든지 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부두교도는 늘 재난에 대비하고 유사한 무기들로 보호조치를 한다. 이러한 조처는 운강에게서 얻을 수도 있고, 집안에서 상속되는 르와보다 훨씬 효과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범주의 르와인 '돈으로 산 르와(르와 아슈테)'에게서 얻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조처의 대가로 때로는 굉장히 값비싼 계약을 맺어야 하기 때문에, 르와들을 산다는 것은 약간의 위험을 내포한 행위이다. 만일 그들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면, 르와 아슈테에게 노여움을 사 병이나 불행이 가족을 덮치게 되기 때문이다.

쌍둥이와 선조들

게다가 부두교도들은 한 르와에게만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쌍둥이 혹은 '르와 마라사'는 그들이 상징하는 원초적인 결합으로 다른 르와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르와 마라사들은 모든 의식에서 발견되며 극도로 정확한 의례를 요구하는 것이 특색이다. 친척들이 그들에게 사소한 부주의나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복수를 초래할 수 있다.

르와 마라사에게는 '망제 마라사(아기 염소나 닭을 제물로 바치는 식사)'라는 정기적인 봉헌을 해야만 하며, 이 음식들은 서로 연결된 두세 개의 호리병박으로 특별히 만든 그릇에 담아 바치거나, 부두교의 사원이나 집 마당에 판 세 개의 구멍 안에 차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마라사들이 만족하면, 그들은 그 대가로 병자들을 낫게 하는 초목과 약초로 처방을 해준다.

대부분 정령들이 된 선조들은 주기적인 의례를 받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돌아오는 효과는 확실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선조들이라서 남아 있는 후손들의 문제를 비교적 더 빨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의례는 부두교 신앙을 위한 장치의 중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통해 사람들이 르와의 호의를 얻거나, 그들의 상징고리 안에 자리를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죽음을 자연의 냉엄한 처벌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견디기 힘든 것이리라. 그러나 특정한 의식을 통해 죽음이 중재되면서 죽음은 사회를 재생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그러한 의식을 통해 산 자는 죽은 자에게 힘을 북돋워, 그들이 물을 헤치고 부두교 정령의 안식처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제5장 사자 숭배

식민지 행정관리들이 죽은 노예들을 위한 간단한 장례식만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존속되는 동안 노예들이 죽음에 관계된 카톨릭 의례들을 독점하기 위해 발휘하였던 힘에 선교사들은 크게 놀랐다. 노예제 폐지 이후 지금까지도 위령미사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부두교도들의 가장 주된 요구로 남아 있다.

위령미사는 세례, 영성체, 성인숭배의식보다도 훨씬 더 부두교와 통합된 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죽은 자를 대표해 신의 호의를 얻으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죽음을 인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의식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교회는 거의 모든 계층과 접촉하기 때문에, 위령미사를 하기 위한 특별한 집회장소로서 이상적인 기능을 한다.

죽은 이들을 보살핌으로써 살아 있는 이들이 안식을 얻는다. 죽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로 인해 산 사람들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즉, 장례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예식을 실천해 온 노예들은, 고인들과의 관계가 사회적 행동양식과 그 이상의 것을 형성해 준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부두교에서 의식을 죽은 이들을 향한 열정 같은 것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확인하려는 신도들의 의지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들-카톨릭 의례까지-을 동원하여 죽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부두교에서 죽음은 단지 한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집단,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엄습하는 사건이다. 거의 모든 의례들이 개인의 죽음을 현실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 만약 그런 의례들이 없다면 죽은 이는 살아 있는 이들의 곁을 계속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삶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더 이상 끝없는 불안의 원천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직 사회집단과 공동체의 지지 아래에서만 죽음이라는 현실과 만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시골에서 도시로, 서민계층에서 중산계층과 상류계층으로 갈수록, 즉 좀더 근대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으로 갈수록 전통적인 행동양식들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전염을 피하라

누군가가 죽으면, 그 자리에 있던 친척 중 한 사람은 이웃들에게 사망을 알리는 소리인'렐'을 지른다. 그러면 즉시 친구들과 가까운 이들이 모여들고, 이어 고인의 의복과 물건을 비롯하여 고인과 관련된 것을 따로 모으는 일이 시작된다. 즉, 죽음이라는 현 실태가 차츰 공동체 자체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죽은 이를 분리시키고, 죽은 이와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하루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죽음이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정신적인 요소들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므로, 이러한 요소들이 흩어져서 새로운 공간을 다시 찾아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사망 후 한동안은 고인의 영혼이 여전히 시신 주위를 떠돌고, 집 안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는 살아 있는 이들을 오염시킬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 수있다는 점에서 위험의 원천이 된다. 장례식을 둘러싼 모든 준비와 정성은 죽은 이가 완전히 떠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죽은 이를 '잠재적인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안에 재통합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령들이 분리되다

만일 고인이 부두교의 입문자였다면, 장례식에 앞서 고인의 삶을 돌보던 보호 정령인 르와 메테트를 고인과 분리해 내는 '데수낭'이란 박탕 의식이 치러져야 한다. 이 의식이 치러지지않으면 고인은 여전히 생존자로 간주된다. 운강은 먼저 가족과 친구들을 물러나 있게 하고 '아송(정령들에게 운강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징적인 딸랑이)'을 가지고 고인의 머리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르와 메 테트를 부른다. 운강이 몸을 살짝 움직이면 르와가 시신에서 달아난다는 표시이다. 고인에게서 나온 르와는 고인의 친척 중의 한 사람에게 깃들이는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그 르와를 물려받게 된다. 시신을 떠난 고인의 영혼은 항아리에 담을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카락 몇가닥이나 손톱 조각들을 채취하여 항아리에 담는데, 이것은 고인의 영혼이 나쁜 목적에 사용되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례와 신앙 때문에, 흔히 시신을 염할 때 염하는 자는 마치 고인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죽은이들은 여행이 끝날 무렵 기억하게 될 메시지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떠나게 된다. 이렇게 고인과 나누는 대화는 아프리카에서 일반적인 것이며, 아이티에도 보존되어 염하는 동안뿐 아니라 초상집에서 밤샘을 하는 동안에도 행해진다.

공동체의 유대를 돈독히 해주는 밤샘

부모의 친구, 이웃들은 새벽까지 초상집에 모여 밤을 세우곤 하는데, 이때 남자들은 놀이판을 벌이고 여자들은 차와 커피를 준비한다. 모인 사람들은 내내 울부짖음과 고인에 대한 비난과 요구들, 기도와 찬가로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밤샘은 본질적으로 집단 유흥을 즐기는 시간이다. 서로 모여서 고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참석자들은 흥을 돋우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나 우화, 수수께끼들을 나눈다.

이처럼 밤샘이 성공적으로 치러짐으로써 고인이 생전에 누리던 사회적 서열을 나타냄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삶을 더 중시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마주한 절망을 극복하게 된다.

죽은 이가 놓인 침대 주위에 취해진 모든 예방책들을 통해 살아 있는 이들의 세상에서 떠나는 일이 잘 조직되어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 과정이 길고 복잡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염하기, 옷 입히기, 입관, 집에서 교회와 묘지까지 옮기는 행위는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치러진다. 이것은 고인이 되돌아와 살아 있는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그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길을 잃어버리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매장은 고인을 완전히 떠나도록 하는 한 단계일 뿐이다.

초상은, 죽은 이가 그의 본분인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죽은 이의 상황에 살아 있는 이를 참석시키는 기능이 있다. 초상기간은 고인과 친족관계나 결혼관계에 따라 6개월에서 2년까지 차이가 난다. 탈상은 고인이 마침내 살아 있는 이들에게서 떠났음을 의미한다.

망제 레모: 비축

일단 분리의식이 행해지면, '망제 레모'라 불리는 식사를 죽은이에게 정기적으로 바치는데 이때 친구들과 가족들이 참석한다. 보이지 않는 물속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죽은이에게 음식과 음료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춥기 때문에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 입관 전에 그의 몸에서 떼어 낸 손톱 조각과 머리카락 몇 가닥을 통해 항아리(포 테트) 속에 상징적으로 들어있는 그의 영혼을 불에 쬐는 '불레 장' 의식을 치른다. 이것은 항아리나 냄비에 기름을 바른 다음 불을 지피는 것인데, 이로써 그가 살게 될 물을 향해 고인의 영혼이 떠남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인이 새로 겪게 되는 신문 과정이다. 이제 그는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 그가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와 대화를 나눈다. 죽은 이들을 부양함으로써 그들의 힘이 살아 있는 이들에게 역류한다고 믿는 것이다. 부두교 정령들과 가까워지고 그 자신이 정식 정령이 되었기에, 잘 부양받은 고인은 꿈을 통해 조언을 해줄 수도 있고, 약초와 초목에 관한 지식이나 재능도 전달할 수 있다. 가끔은 복권이나 '보를레트(서민들의 복권놀이)'의 당첨번호를 미리 알려 주기도 하는 등, 한마디로 모든 종류의 호의와 부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제데, 남근 숭배적이고 익살스러운 죽음의 르와

부두교의 가장 중요한 축제는 죽음의 르와들인 '르와 제데'를 찬양하는 의식으로, 대부분의 '우포(부두교 사워)'가 11월 1일과 2일에 거행한다. 이때 사람들은 모든 공공묘지와 자신의 가족묘를 방문하는데, 이날을 위해 묘지 주변의 잡초들을 하얗게 칠해 두었다가 이때 뽑아 낸다. 축제기간에 사람들은 거리나 시장에서 제데가 깃들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기간중에는 이 르와들이 그곳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경솔하게 그들의 인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죽은 이들의 날에 출현하여 폭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음담패설을 즐기는 남근 숭배의 르와들인 제데는 호색적이고 외설스러운 춤을 추고, 참석자들의 돈이나 물건을 훔치거나 그들을 놀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제데들은 럼주를 즐기고 포식하기를 좋아한다. 우포의제단 위에는 제데의 상징인 나무로 만든 거대한 남근이 놓일 때가 있는데, 이것은 영매의 순간에 신이 들린이에게 바치는 것이다. 제데들의 기이한 행동들은 결국 죽음을 웃음거리로 변화시키는 예술이다. 제데들의 목적은 아마도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시체 행세를 하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죽음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삶을 과장하는 것이 죽음과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인 알프레드 메트로는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들이 오는 것을 참석자들은 늘 기꺼이 맞아들인다. 그들은 심각한 의식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갑자기 쾌활한 분위기를 만들며, 콧소리만으로도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르와는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잘 받드는 경우에만 호의를 베푼다. 르와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매우 정확한 영접 장치가 필요하다. 신들리기, 입문, 그리고 신비한 결혼은 르와와 긴밀한 접촉을 하는 데 필수적인 형식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르와와 맺는 친교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운명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6장 망제 르와, 당세 르와: 봉헌

부두교의 의례는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이라는 이중적인 차원에서 행해진다. 먼저 개인적인 차원을 살펴보면, 부두교도들은 '르와 라신' 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르와를 소유하고 있다. 부두교도는 흔히 자신의 집 침실에 작은 기도처를 마련하는데, 그 위에는 르와를 부르기 위해 사용하는 초와 르와에 상응하는 카톨릭 성인의 착색 석판화가 놓인다. 그리고 집안에 내려오는 르와나 입문을 통해 관계 맺은 르와를 찬양하기 위하여 신봉자는 같은 우포에 다니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협회에 가입한다.

시골의 비밀스러운 활동에서 도시의 조심스러운 활동까지 부두교 사원은 아마도 노예제도가 존속하던 시절부터 세워졌겠지만, 그 당시에는 백인이 접근할 수 없는 탈주노예의 진영에만 세워졌다. '라쿠'와 함께 이러한 사원에서 최초의 역사적인 실험이 이루어졌다. 큰 마당이나 대규모의 주거지 안에서 여러 가족들이 종교 지도자이기도 한 족장의 지휘 아래 함께 살았던 것이다. 오두막집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주인인 르와를 숭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1804년 독립선언 직후부터 해방된 노예들은 온 나라의 곳곳에 서둘러 사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부두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식용 건물은, 시골이나 도시 외곽에 세워야만 했다. 지금도 당시의 사원이 남아 있다.

우포: 부두교 정령들의 영접 장치

우포는 르와의 오두막집으로, 그들의 신봉자가 경배를 올리는 사원이다. 르와는 '신비로운 이들'로 불리기도 하며, 우포를 '케 미스테(신비로운 이들의 오두막집)' 라고도 한다. 르와가 나타나는 무도회장인 회랑 중앙에는 기둥처럼 생긴 포토 미탕이 있는데, 이것의 주춧돌 위에 음료수나 음식물 등 갖가지 봉헌물이 놓인다. '페지'라 불리는 제단 위에는 르와의 상징물-각 르와의 색으로 칠해진 항아리, 병, 또는 영혼이 가두어져 있는 포 테트-이 르와의 보호 아래 그들 가까이 놓인다.

회랑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세 개의 성스러운 북이 있다. 사람들이 르와를 불러내야만 그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든 르와는 춤을 통해 개입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북과 특유의 장단을 가지고 있다. 어떤 우포는 늘 온화하다고 알려진 르와 기넨에게 특별히 헌정된 것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페트로나 콩코 르와에게 헌정된 우포도 있다. 두 개의 기둥을 가진 우포도 있다. 하나는 온화한 르와에게, 그 뒤에 위치한 다른 하나는 공격적인 르와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마술행위를 부탁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르와의 중재자로, 르와에게는 인간의 대표자로 부두교 제사장은 그의 사원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운강이나 망보, 또는 보코로 불리는 제사장은 르와의 말을 해석하며 정신요법사와 의사의 역할을 겸한다. 제사장은 그러한 능력을 가족에게 물려받거나 꿈이나 신의 뜻을 증언하는 병을 통해 얻는 것이 보통이다. 제사장의 상징물인 아송은 다양한 함유물(뱀의 척추뼈, 염주알, 씨앗 등)을 지니고 있는 호리병박 열매로 만든 딸랑이의 일종으로, 의례의 여러 과정을 지휘하는 데 사용한다.

운강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9일 동안의 칩거, 우포의 삶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일정기간을 보낸 뒤 비밀리에 특수한 입문 의례를 거쳐야 한다. 후보자는 운강의 직분을 위해 헌사된 의자를 세 번 들어올리는 '오스망' 의식을 거친 뒤 정식으로 운강이 되며, 이후 르와의 힘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한다.

의식용 손과 마술용 손

사원의 절대적인 지배자인 운강은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고 유명한 운강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과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 그 지역의 우두머리(그 지역 사람들에 대해 행정, 사법, 경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나 저명인사들,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운강이 그의 우포 안에서 하는 일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사기를 치거나 월권행위를 하는 운강들을 향해 조만간 르와들이 등을 돌리는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또 '두손으로 일하는 운강'이라 불리는 마술사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마법사들과 한통속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의 운강들은 스스로를 좋은 르와 혹은 르와 기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강들은, 르와로부터 약초와 식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특별한 선물로 받은 '독테 페(나뭇잎의사)'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로 자처한다. 운강은 자신의 우포 안에서 초자연적인 병만 다루기 때문에 이따금 그의 우포는 진짜 무료 진료소가 되기도 한다. 또한 충고를 구하거나 꿈이나 불운을 해석해 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 혹은 애인을 구해 주거나 아내를 지켜 주거나, 결혼을 성사시켜 주거나, 또는 사업이 성공하도록 도와 주는 처방책(부적, 마술 가루 등)을 부탁하러 오는 많은 사람들을 맞아들인다.

교구회

카톨릭 교구와 마찬가지로 부두교의 우포 역시 그들의 성공을 보증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교구회를 둔다. 부두교도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여러 보호장치 덕분에 다른 운강들보다 더 유명해진 운강들 사이에는 경쟁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우포는 교구회의 지배를 받는다.

흰옷을 입은 경배자들은 포토 미탕 주위를 원으로 둘러싼다. 이들은 운시라고 불리는 입문자로서 춤과 노래를 담당하며, 여자 성가단장인 '옹제니콩'의 지휘 아래 회랑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라플라스(의례 진행자)' '베트 샤르주(우포의 행정관)' '피티 페(열성 신봉자)' 같은 직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부두교의 교구회를 그럴듯한 단체로 만들어 준다.

교구회의 구성원들은 강한 결속력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병이 났을 때 상호 협조의 큰 근원이 된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인 운강은 우포 안의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입회원들을 도와 줄 의무가 있다.

방패막이로 쓰이는 기독교 축제

부두교의 의례는 풍성하고 다양하며 복잡하다. 그 가운데 서로 비슷한 의례는 하나도 없다. 제사장들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의식이 다르며, 신봉자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고유한 비결과 방법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부두교 의식은 예배라고 일컬어진다. 예배는 우포에서 거행되는 연례축제 기간 때 거행되거나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가정이나 신봉자의 긴급한 요구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부두교의 의식연례표를 살펴보면 카톨릭의 의식연례표와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부두교도들에게 카톨릭의 성탄절은 '행운의 목욕'을 하는 밤이다. 부두교의 설날에 해당하는 '왕들의 날(1월 6일)'에는 우포마다 여러 가족들이 모여들어 행사를 즐긴다. 11월 1일은 죽음의 르와인 제데들의 축제날이다. 사순절은 '박신'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나팔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거리를 돌아 다니는 날인데, 이때 우포에 연계된 집단인 '라라'의 무리들이 출현한다. 카톨릭의 수호성인 축제일은 부두교의 큰 축제일이기도 하다. 카멜산의 성모 마리아의 날인 7월 16일은 소토축제일로 불리는데, 이 날은 르와 에질리에게 바쳐진다. 플랜 뒤 노르의 성 자크의 날인 7월 25일인 오구의 날이고, '성녀 안나'의 날인 7월 26일은 에질리의 어머니의 날이다.

르와를 영접함

전형적인 부두교 의식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우포의 깃발 행렬과 성스러운 북에 대한 인사를 하는 입장 의례가 치러지고, 이어서 성역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르와에게 바치는 성물을 동서남북 4방위 기점으로 향하게 하는 방향잡기 의례가 행해진다. 그다음으로는 카톨릭의 긴 기도문과 성인들의 연도가 낭독되고 르와에게 바쳐지는 기원들이 뒤따른다. 입문자들이 북 장단에 맞춰 회랑의 포토 미타 주위에서 춤을 추면서 의식의 분위기는 점차 고조된다.

의례에 참석하는 르와들이 기력을 회복하고 신봉자들에게 충분한 호의를 베풀 수 있게 하려면 음식을 봉헌해 그들이 포만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두 번째 부분은 망제 르와의 단계가 된다. 흔히, 자신에게 특별히 도움을 베풀기 원하는 르와가 선호하는 제물(염소, 양, 소 또는 가금류)을 사기 위해 돈을 낸 부두교도들이 의례를 주문한다. 이미 요리된 음식물(구운 옥수수, 과자)과 마실 것들을 제물이 될 짐승과 함께 르와의 색으로 치장된 포토 미탕하단에 놓는다.

제물

봉헌을 바치는 사람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르와를 대신하여 제물이 된 짐승은 포토 미탕 하단에 차려진 음식물을 맛본다.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물을 짐승이 먹으면 참석자들은 르와들의 기분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어 짐승에게는 특별한 준비가 치러지는데, 사람들은 나뭇잎을 달인 물로 짐승의 얼굴, 목, 다리를 씻기고 향수를 뿌리는 '화장' 작업에 착수한다.

제물을 바치는 일은 우포를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 맡으며 그는 제물을 바치기 전에 미리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 그는 짐승의 멱을 딴 후 피를 몇 방울 마신다. 그런 다음 그가 짐승을 등에 업으면, 입문자들이 짐승에게 다가와 자신의 몸을 문지르거나 그 짐승의 피를 손에 묻혀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이어서 짐승은 르와에게 바쳐져야하기 때문에 방위 기점들을 향해 옮겨진다. 짐승을 자르고 요리하는 일은 회랑 바깥에 있는 우포의 마당에서 이루어진다.

당세 르와, 신들림의 위기

의례의 핵심은 역시 르와들의 출현이다. 운강이 의례에서 특별히 부름을 받은 르와들을 상징하는 그림인 베베를 땅에 그리고, 북의 울림과 특별한 노래가 들리기 시작하면 르와들이 서서히 나타난다.

이때 신자 한 명이 '갑작스런 신들림'을 일으키는데, 그이의 행태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을 '말'로 선택한 르와를 상기시킬 수 있도록 르와의 특징적인 태도들을 여러 가지 몸짓으로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르와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신들린 신봉자 위에 '올라탄다'고 믿는다. 신들린 사람은 르와의 형상을 취하는데, 오구 르와의 경우 사람들은 그에게 검을 쥐어 주고, 아자카의 경우에는 담뱃대와 농부의 연장 주머니를 건네 준다. 신들린 사람이 춤출 때 보여 주는 발 동작들은 바로 르와가 하는 동작과 똑같다. 무지개 뱀이 상징인 담발라 르와에 들린 이는 경련을 일으키며 땅바닥에 엎드려 뱀처럼 혀를 내밀며 기어다닌다.

참석한 사람들은 르와의 출현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르와는 신자의 머릿속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인사말을 전하고, 가끔씩 행운이나 불행을 예견한다. 신이 들렸던 이는 깨어난 뒤에 자신이 일으켰던 발작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잘 조직된 의례

단순한 구경꾼들이 영매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한 차례의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르와가 한꺼번에 여러 사람 위에 '올라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신들림은 사실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 장단이 바뀜에 따라 다른 르와들이 개입하게 된다. 르와들은 회랑에 자기들을 위해 차려 놓은 음식물과, 마당에 움푹하게 파 놓은 구멍에 담긴 제물의 고기를 맛본다.

따라서 부두교 의식에서는 그 의식이 큰 축제로 이어지는 경우에도 대충 만들어진 것은 없다. 운강이나 망보는 신자들의 몸 속에서 르와들이 왕래하는 것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한 조처를 취한다. 춤추고 있는 신봉자의 머릿속으로 르와가 즉흥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제사장에게 즉시 쫓겨날 수 있다. 부두교의 관례적인 표현에 의하면, 제사장의 임무 중에는 어떻게 르와를 '억제시키고 웃기는가'하는 것이 있다. 즉, 르와의 품행과 태도에 대해 정확하게 배워서, 르와를 나타나게 하거나 떠나게 하는 몸짓들을 르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르와의 출현은 그 의식이 성공했음을 보증해 준다. 르와들의 보호가 없으면 개인은 표류하게 되며, 적들이 그에게 보내는 알려지지 않은 모든 정신적인 힘들(죽은 이의 영혼, 통제되지 않는 나쁜 정령 같은 것)의 장난감이나 표적이 된다.

환생을 위한 죽음: 입문

이런 이유 때문에 르와의 신봉자는 르와를 그의 머리에 앉히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입문에 동의한다. 이것을 '르와 메테트'라고 부르는데, 이 르와는 신봉자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이끌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입문자인 운시는 꿈이나 병, 상속을 통해 결정된다.

입문의례는 1주일에서 보름까지도 걸리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프리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와 같은 복잡성은 사라졌다. 새로운 신봉자인 '우뇨'는 우선 우포에서 칩거생활을 해야 한다. 이때 그는 이 어려움을 견뎌 내도록 도와 주는 대부나 대모의 감시를 받는다. 그는 조금씩 자신이 헌신할 르와의 품행에 적응하는 법과 치료 효과를 가진 초목과 잎들에 대한 지식을 익히며, '신비로운 자'가 되는 법, 즉 정령과 영교를 깊게 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운다. 입문 의례는 새로운 신봉자 우뇨가 다시 바깥으로 나옴으로써 끝나게 된다. 흰옷을 차려 입고, 칩거기간 내내 약초와 르와들이 먹는 양식(구운 옥수수, 쌀 등)으로 만든 찜질약을 놓아 두었던 머리 위에도 흰 수건을 두른 채, 새로운 신봉자들은 엄숙하게 열을 지어 나타나서 회랑 안에 자리를 잡는다. 의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수호 정령 르와 메 테트에게 신들림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로서 입문자는 르와와 죽을 때까지 연결되었다는 명백한 표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입문자가 죽게 되면 르와를 떠나 보내는 데수낭이란 의식을 치르게 된다.

추가된 예방책: 신비의 결혼

신비로운 결혼은 부두교 신자나 르와 모두 결정할 수 있다. 부두교 신자의 경우, 그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르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 르와와 신비로운 결혼을 소원하게 된다. 르와는 예기치 않은 신들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결혼 의사를 표명한다.

신비로운 결혼 의식은 카톨릭에서 정식으로 거행되는 혼배성사와 비슷하지만, '페 사방'으로 불리는 제사장의 주례아래 거행된다. 이전에 교구직원이나 성당지기를 했던 페 사방은 성당을 열심히 드나들었던 사람이므로 성가, 기도문, 카톨릭 신부들이 하는 축복 양식을 잘 알고 있다. 사실상 페 사방은 가짜 신부이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신자들에게는 진지하게 받들어진다. 신비로운 결혼 의식이 거행되면 페 사방은 우포에 불려와 운강 옆에 서서 르와와 그의 남편(또는 아내)이 결합되는 것을 축복하고 찬양한다. 결혼식에 참석한 증인들은 각 배우자의 이름이 적힌 결혼 증명서 아래에 서명을 한다.

결혼을 축복하기 위하여 우포에는 특별한 방이 마련된다. 춤과 봉헌이 진행되는 동안, 결혼을 한 르와는 인간 배우자를 받아들인다는 동의의 표현을 배우자가 신들림의 과정을 겪게함으로써 나타낸다. 또한 르와는 의식에 참석한 사람이나 앞으로 구혼자와 이야기하게 될 입문자의 머릿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새 배우자는 1주일 중 하루를 정해 르와에게 바쳐야 하는데, 그날은 금욕을 해야 한다.


노예제도가 존속하던 시대부터 국가와 교회가 함께 행해 온 탄압 아래서, 그리고 19세기 전반부터 1930년까지 대다수 아이티 지식인들에게 거부를 당하면서도, 부두교는 놀라운 생명을 보여 주었다. 뒤발리에 정권은 엄청난 정치적 착취를 통해 부두교를 죄악으로 규정해 명예를 더럽혔으며, 그것을 노예소유주와 노예상인, 그리고 식민지 경영인의 탓으로 돌렸다.

제7장 놀라운 생명력

불법활동의 한계선에서 부두교의 의례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퍼졌지만, 아이티의 독립선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기 초에 세워진 부두교 사원에 뿌리깊게 남아 있다. 이 사원들은 아이티 중앙을 가로지르는 아르티보니트강에 자리잡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스스로를 카톨릭 신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부두교도의 수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부두교도가 되려면 카톨릭교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는데, 이것은 부두교가 창조된 역사를 단적으로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1835년 장 피에르 부아예의 주도로 공포된 형법에 따르면, 미신적인 의례를 행하다 현행범으로 잡힌 부두교도는 6개월에서 2년까지 징역형을 받게 되어있는데, 이 조항은 2986년까지 실질적인 수정 없이 유지되어 왔다. 오랜 기간 정부는 군 지휘관들에게 공문을 보내 교회가 부두교 연합을 상대로 투쟁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고무했다.

이처럼 끊임없는 탄압의 분위기는 오히려 부두교도들로 하여금 보호수단을 강구하게 하였다. 운강들은 행정, 사법, 군사권을 겸하고 있는 농촌 지역의 수장인 지역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곤 했다. 또 한편으로 운당들은 비밀단체에 소속되거나, 마법사의 재능을 가졌다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정부는 부두교 사원에 대한 공격을 단념하기도 하였다.

뒤발리에가 일으킨 부두교의 정치적 부흥

장기 집권을 위해 프랑스아 뒤발리에 대통령은 아이티에 남아 있는 아프리카 문화의 열성적인 옹호자처럼 행세했다. 전직 시골의사이며 인류학자인 그는 1940년대부터, '진정한' 아이티인이라면 '흑인종'과 민족의 혼과 같은 부두교를 정치적으로 부흥시킬 필요가 있으며, 부두교를 권력의 근원으로서 신봉해야 한다는 주장의 글들을 출간했다.

1957년에서 1971년까지 '파파 독'으로 군림한 뒤발리에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운강의 조직들을 '통통 마쿠트'로 대변되는 유사경찰 소속의 정보원이나 요원들로 동원하였다. 이로써 부두교는 약간의 합법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정부는 르와와 화해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열광케 할 목적으로 우포에 의례를 주문하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뒤발리에는 그가 중산층과 물라토(흑인과 백인 사이에 난 혼혈인:역주)엘리트의 동맹체로서 파악한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권력에 조직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다. 한편 빈민계층에게 뒤발리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은 '마법과 마술에 뿌리를 둔 권력'으로 특징지어진 시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부두교의 부정적인 면을 이루고 말았다.

데슈카주의 폭발

1986년 2월 7일 뒤발리에 체제가 붕괴되자, 군중들은 뒤발리에 정권의 모든 상징물들을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크레올어로 근절을 의미하는 '데슈카주'라고 부른다. 수십 명의 통통마쿠트들이 몰매를 맞거나 산 채로 거리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들 중에는 독재를 옹호하는 주술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진 운강들도 여럿 있었다. 장 클로드 뒤발리에(베이비 독)의 퇴임 이후 처음 석 달 동안,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나라 전체에 퍼져있었던 죄악의 책임자들로 운강들을 고발하고, 우포에 대한 파괴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반부두교운동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군중들은 운강, 마법사, 통통 마쿠트들을 혼동하게 되었다.

1987년 3월 29일에 아이티의 민주주의 재건을 위해 가결된 새로운 헌법은 부두교 탄압을 목적으로 취해진 전통적인 제재조치를 폐지해야만 했다. 그에 앞서 1986년 5월에는 예술가, 지식인, 그리고 교육자들이 한 무리의 운강들과 함께 한 이틀간의 토론회에서 처음으로 부두교 의례에 취해진 모든 탄압들이 공개적으로 비판되었다. 이로써 운강들과 부두교 입문자들은 더 이상 불법활동이라는 궁지에 몰리지 않게 되었으나, 그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참가하느냐 마느냐 여부를 놓고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교분파들의 도덕운동

도시빈민층을 상대로 성공적인 포교활동을 펼쳤던 각종 종교분파들(침례교도, 복음주의 신교도, 성심강림파, 여호와의 증인들, 그리스도 재림론자 등등)은 이제 시골까지 퍼져 있다. 미국에서 건너온 그들 모두는 부두교를 악마숭배라고 규정짓고 부두교에 반대하는 설교를 해댔다. 부두교 의례의 성스러운 물건들을 소각하는 것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회개한 부두교도들이 자신의 입으로 악마와 협정을 맺었었노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더 선전 효과가 컸다.

그러나 모든 르와들을 불길하고 사악한 힘으로 간주한 종교분파들의 메시지는 오히려 마술에 대한 환상을 부활시켰다. 사실 개종은 상당히 모호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인의 관점에서는 그가 예전에 르와들에게 하던 부탁들을 성경에다 하면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질병, 사고, 경제적 도산 등이 여전히 르와들이 가하는 체벌로 해석되는 한, 부두교의 신앙장치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종교분파들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입증하는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태양 아래 나온 부두교?

1791년에 표명된 민주주의 선언정신을 이어받은 아이티 역사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아리스티드 신부는 67%의 지지를 얻으며 정권을 잡았다. 이를 위해 그는 카톨릭 교인들과 프로테스탄트 교인들, 부두교 신자들을 모두 그의 진영에 집결시켜야 했다. 그들의 공식적인 진술 목적이 이와는 달랐음에도, 세 종교체제의 자유로운 공존 가능성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게 부두교는 조만간 없어져야 할 미신들의 결정체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티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두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학교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것은 수세기에 걸친 부두교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물론, 부두교에 대한 환상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치 아이티 사회 전체가 일종의 문화적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면 정치적인 면에서, 르와들은 권력을 쥐어 주기도 하지만 최고 권력자를 몰락시키기도 한다. 운강들은 비록 소외되어 있으나, 자신들이 특정 정치지도자를 위해 르와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여기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종교적 자유라는 것은 부두교의 전통문화 계승자들에게 부두교의 상상계에 대해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판하는 것까지도 허용한다는 것인가? 부두교는, 현대의 이성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좀더 융통성 있는 규범보다는, 선조들과 르와들로 상징되는 전통적 권위를 통해 신자들을 지배하면서 그들을 과거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어쨌든 부두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포용력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사실상 부두교가 다른 종교체제에 대해 개방적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세계문화 자산의 일부

부두교는 최근 베냉에서 부두교가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면에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1993년 2월 7일에서 17일에 걸쳐, 최초의 세계적인 부두교 예술 축제가 아프리카 전역은 물론,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백여 개의 협회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이다에서 개최되었다. 2주일에 걸친 축제기간 동안 가면 행렬, 옛 사원의 방문, 공연, 예술 전시회들이 부두교가 탄생한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 벌어져, 부두교의 갖가지 표현 양식들을 보여주었다.

이제 부두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선입견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부두교는 신, 인간, 그리고 자연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원초적 과거의 기억이자, 인신매매로 검은 노예들이 쏟아져 들어왔던 아이티와 신대륙 도처에서 일어났던 노예제도 철폐운동을 이끈 저항의 힘이다. 또한 매우 다양한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힘이 되어 주었던 부두교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퍼져 나간 문명의 모태로서 세계문화 자산의 일부가 되었다.

우이다에서와 마찬가지로, 뉴욕과 마이애미,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기아나, 그리고 파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아이티인들이 정착한 모든 곳에 부두교 사원들이 새로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 지역의 문화환경이 새로운 규범과 관례를 채택하는 면에서 관대하고, 따라서 르와에 대한 숭배가 장애가 되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부두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록과 증언

아프리카의 전통, 조상의 고향, 정신의 뿌리라는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한 부두교. 부두교는 노예상인들에 팔려 아메리카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이 간직하고 있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악마, 부두교, 그리고 선교사들

"새로 도착한 흑인 노예를 산 주민은 늦어도 1주일 내에 그 사실을 정부와 섬 관리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벌금을 내야 한다. 정부는 적절한 시간 내에 흑인들을 교육시키고 세례시키기 위해 필요한 지시를 내릴 것이다." 1685년 제정된 흑인법전은 세례를 통해 필수적으로 정결의식을 해야 한다고 공포했다. 선교사들과 여행객들은 이 조치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아프리카 미신의 관습이 공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 세례를 받지 못하는 마법사

17세기 말에 성 도미니크회의 선교사였던 장밥티스트 라바 신부는 노예들이 어떻게 카톨릭 의례에 아프리카 신앙(그가 보기에 이것은 순전히 주술이고 악마와 맺은 협정이었다)을 접목시켰는지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교구민 가운데 한 명인 검둥이노예 필립미냐크가 내게 찾아와, 내게 그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빼앗았던 그의 작은 가방을 돌려 달라고 하던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의 주인에게 그가 마법사가 되려고 한다는 사실을 통지 받았었다. 그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아 주고 미래를 예언했다. 그는 선박이 도착하는 것과 다가올 일들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악마가 사용하는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들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그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밀하게 조사를 한 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중 일부는 진실임을 인정했다. 나는 그가 틀림없이 악마와 맺었을 법한 모든 약속들을 포기하게 한 뒤에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대부이자 주인이기도 한 이에게 그의 행동을 잘 관찰하라고 일렀다.

석 달 동안 보인 그의 행동은 만족스러웠다. 미사와 교리교육에 누구보다 성실히 임하였고, 나에게 영성체를 해 달라고 졸라댔다. 세례를 통해 마법에 대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안심한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손에 가금류 두 마리를 들고 내 집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한 나는, 그가 그것을 팔려는 것인 줄 알고 가격을 물었다. 그가 그것을 나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고마움을 표하고, 돈을 받지 않으면 나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몇 번의 인사치레 후, 그는 돈은 전혀 원하지 않지만, 만약 내가 그의 작은 가방을 돌려 준다면 아주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예전의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는 걸 알았으나, 그의 속마음을 좀더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줄 것처럼 하면서, 그 가방 속에 든 물건의 사용처를 물
었다. 그는 내가 알고 싶어하던 모든 것에 대해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자기한테 상의하러 온 사람들이 내놓은 복채 덕에 생활이 넉넉했는데, 물건을 몰수당한 뒤로는 거지가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얼마나 그가 상심했는지를 알리려고 필요 이상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엄한 목소리로 무섭게 그를 질책한 후, 법정으로 넘겨 산채로 화형시키겠다고 겁을 주었다.

나는 그가 절대로 가방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내 노예에게 가방을 찾아와 이 자리에서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내 꼬마 노예가 허섭쓰레기들 중 몇 개를 훔쳤던 것이다. 없어진 물건 중에는 그가 점을 칠 때 답을 구하던 흙으로 구운 기괴한 인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 밥티스트 라바(아메이카의 프랑스령 섬들을 향한 새로운 여행), 1722년

* 열광적인 신도들의 광란적인 의례들

1791년 노예 폭동이 있은 뒤 생도맹그섬을 여행한 미셀 에티엔 데쿠르틸이 본 부두교는, 마술을 이용해 복수를하는 우상숭배 종파였다.

일찍이 생도맹그에 있는 부두교라는 우상숭배 종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데다, 부두교의 회합이 우리 거주지에서 열린다는 말을 듣고 나는 믿을만한 여자 검둥이 노예를 불렀다. 그녀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에 대해 상세히 말해 준 뒤, 열광적인 신도들이 벌이는 광란의 의례 현장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주었다. "부두교도들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설명할 길 없는 기묘한 공감대를 형성하여 열광 상태에 빠져든다. 그들은 발작을 표출할 수 있는 장소에 모여, 서로 웃고 거칠게 맞붙는다. 그러다 돌연 둘 다 광적인 상태에 빠져, 허공을 향해 발을 쳐들고 맹수처럼 울부짖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한다.

어느 날 나는 이런 광신자 두 명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그들이 외부 사람에게 부두교 체제를 유포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부인 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이용해 어린 나를 그들의 신비한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였는지, 그들은 나를 자신들의 회합장소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나는 지도자로 보이는 사람이 한 신도에게 불붙은 석탄을 집으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신도는 명령대로 그렇게했는데, 적어도 화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또 다른 이에게는 쇠갈고리로 살갗을 걷어 내게 했는데, 그 역시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리적 장애물이나 거리에 상관없이, 돔페트(광신도들이 따르는 전능한 지도자의 이름)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해 주었다. 돔페트가 가진 허구의 능력은,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을 복종시키고 더 잘 따르게 만들었다. 이들은 독약으로 처벌을 받기도 했는데, 독약은 돔페트에게 일상적이고 무해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부두교 집단에서는 별 볼일 없는 녀석들도 복수를 할 수 있는 마술적인 수단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애인의 냉담함이나 아내의 불륜으로 고통을 겪게 되면, 그는 복수하고자하는 대상의 소변에 가오리의 가시를 던져 그를 쇠약증에 걸리게 한다. 이것은 다른 방식을 통해 언제든지 멎게 할 수도 있다.

미셀 에티엔 데쿠르틸(한 자연주의자의 여행> 1809년

* 신성한 뱀을 숭배함

최초의 선교사들이나 행정관들의 글에는 마법이야기만 나타난다. 1797년에 쓰여진 모로 드 생메리의 글에서 우리는 최초로 부두교에 관한 기술을 발견한다. 부두교의 원칙과 계율을 지키고 있는 아라다 검둥이들은 식민지 부두교의 진정한 신봉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부두는 이 땅의 모든 일들을 관장하는 전능하고 초자연적인 존재를 뜻한다. 독이 없는 쿨뢰브르 뱀의 일종인 부두의 휘하에는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과거에 대한 지식, 현재에 대한 통찰, 미래에 대한 예지와 같은 모든 능력을 쿨뢰브르 뱀은 지니고 있다.

이 신성한 클뢰브르 뱀은 신봉자들이 선정한 대사제나, 그에 대한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대사제의 지위에 오른 흑인 여자를 통해서만 그의 능력과 의지를 전한다. 원시적 순결성이 유지되는 진정한 부두를 위한 집회는 이교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폐쇄적인 장소에서 깊은 밤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

그곳에 모인 신자들은 슬리퍼를 신고, 붉은색의 수건을 몸에 두른다. 부두는 가장 아름답고 좋은 수건을 지니는데, 그의 이마를 싸고 있는 붉은색 수건은 그의 왕관과도 같다. 그의 눈부신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푸른 밧줄도 사용된다. 외부의 구경꾼이 침범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쿨뢰브르 뱀에 대한 경배와 자신의 신앙에 충실할 것과 모든 규율에 따르겠다는 맹세를 함으로써 의례가 시작된다. 모임의 근간이 되는 비밀서약이 왕과 왕비의 수중에서 갱신되는데, 이때 이것을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기 위해 상상 가능한 무시무시한 것들이 동반된다.

특히 아르드라왕국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우이다의 주민들과 노예해안 연안의 주민들이 보이는 뱀에 대한 숭배를 부두교의 기원으로 믿는 것은 당연하다. 아프리카인들이 뱀의 미신을 얼마나 많이 신봉하는지를 읽고 나면,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에서 그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로 드 생메리<프랑스령 생도맹그섬에 대한 지형학적, 물리적, 시민적, 정치적 그리고 역사적인 기술) 1797년
미신타파운동 1860년 교회와 아이티 정부는 카톨릭교가 아이티의 유일한 공식 종교라는 협약을 맺는다. 1896년부터 교회는 부두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주교들의 문서를 통하여 이를 정당화하였다.

* 아메리카에 옮겨진 작은 기니: 불명예

1896년 8월에 개최된 민간간담회에서 카프아이티앵 주교는 마술과 주술, 미신을 거세게 비판했다. 문명인들은 부두교에게 조롱을 당했다고 느꼈으며, 종교전쟁만이 이것을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명인에게는 무가치하고 기독교인에게는 죄악인, 이 수치스러운 종교단체는 아무리 규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이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 않은 쓸모 없는 물건과 의례에 대한 무모한 믿음, 범죄를 목적으로 해서 성인과 성화, 성유물 들에 부여한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능력, 종교와 상식에 위배되는 방법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려는 의도 등 이 모든 것들은 순수한 신앙에 대한 침해이며 성인과 신에 대한 모욕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상숭배자와 벌여야 할 싸움이다. 수많은 아이티인이 유일한 창조자에게 드려야 할 최고의 예배를 상상의 신들에게 올리고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재앙의 씨가 얼마나 많이 퍼졌는지를 형제 여러분은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프리카 종교단체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에 타격을 입은 우리 국가의 명예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용기가 필요하다. 내 말을 듣기에 앞서 당신들도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1892년 도미니카의 한 신문은, 아이티는 아직도 마법사들과 아프리카의 춤이 판을 치고 있는 아메리카의 유일한 나라라고 하면서, 아이티는 아메리카에 옮겨진 작은 기니이며 아메리카 국가들의 수치라고 결론지었다. 우리에 관해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라. 우리에게 이보다 훨씬 더 나쁜 말도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아이티는 병이, 그것도 아주 깊은 병이 들었다. 이교도에게 침범 당한 것이다. 악이 국민들의 영혼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국민들의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약화시키고 있다. 마치 미열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지만, 결국 환자를 쇠약하게 하여 마침내는 무덤으로 보내게 되는 것처럼, 악의 힘은 국민들의 힘을 조금씩 파괴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들의 악은 수치스러운 것이라서, 우리를 몰락시키는 것보다는 우리의 명예를 손상시킨다. 부두교가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진정으로 개화된 국가인 체 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그러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종양을 제거해야 한다.

'보코르(bocors)'라 불리는 불한당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수치이므로 가차없는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공공의 적과 싸우는 데 여러분 모두를 동참시키기 전에는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카프 아이티앵 주교 1896년 8월

* 정화를 위한 호소

1913년 교회는 당국과 학교 그리고 대상인들에게 미신타파운동을 지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성직자들은 그들이 원하던 모든 승리를 획득했는가? 성사를 하는 이조차 이 비난받을 의례에 이끌려 간다고. 정의와 부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악마 사이에는 어떤 협약도 있을 수 없음을 잊었다고 분개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만일 성직자들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이제까지의 싸움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이 싸움을 혼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협력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1. 우리는 이미 군사당국의 협력을 보장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군사당국은 언제나 일선에 서 있다. 과거처럼 군지휘관들이 미신 활동을 눈감아 주거나 오히려 격려하고, 때로는 '춤'이나 '예배'의식을 돈을 받고 허락해 줌으로써 수입의 원천으로 삼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들은 모두 3월 25일과 10월 26일에 내려진 대통령령의 정신을 본받을 것이다.

다른 당국들, 특히 사법당국 역시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구석진 시골뿐만 아니라 큰 마을과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법상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할 사건들에 대해서 사법당국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2. 지식인 계층의 활동 역시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주 기초적인 교육만을 받은 사람들은, 인문과학을 공부했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고 따른다. 또한, 실수와 무지를 상대로 한 이 투쟁에서 학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특히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교장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받은 교육과 훗날 그들이 차지할 지위에 따르는 국가적 의무를 일깨워 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골 학교 역시 이 운동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미신 의례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것에 만족해하지 않고 그것이 이상하고 그릇된 것이란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미신을 이용해 발휘하는 능력이 무지와 엄청난 두려움에 바탕한 것임을 알려 준다면, 학교장들은 시골 주민들에게 가장 훌륭한 일이자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다.

3. 이것이 전부인가? 사회적 신분상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국가의 사업 방향을 이끌어 가는 대자본가, 기업주, 상인 들에게도 우리는 호소한다. 피고용인들의 생활수단을 맡고 있는 그들의 영향력은 크다. 미신의례 참여를 막는 것과 같은, 교육적 도덕적 목적을 위해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가.

카프 아이티앵과 카유의 주교들이 1913년 사순절에 부친 사제 서신

* 끔찍한 '혼합'을 거부하다

고나이브의 로베르 주교에게 1940년의 '미신타파운동'은 아이티 국민을 악마의 지배에서 구해 낸 성스러운 행동이었다. '미신타파운동'의 결과 우리는 그저 추측만 하고 있던 뿌리깊게 박힌 악, 심각한 탈선, 엄청난 침투력을 볼 수 있었다. 성사에 참여하기 위해 미신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독촉에 그들 가운데 80%가 영성체를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들은 모두 크레올어로 혐오스러운 종교 의례를 드렸는데, 이 끔찍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혼합'이었다. "신과 악마를 섞지 말라. "는 바오로 사도의 명령을 잊은 채,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함께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신과 악마를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악마에 대한 섬김을 우선시한다.

우리들의 호소에 답함으로써 여러분은 신의 지배를 확립하는 데 아주 큰 공헌을 했다. 여러분이 비열한 미신, 끔찍한 '혼합'과 결별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의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맹세를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은 르와를 섬기면서 감히 영성체를 행하는 등 무수한 거짓 카톨릭 신자들이 범했던 신성모독으로부터 우리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결국 우리는 진실을 회복하는 데, 그리고 악마의 위협에서 신음하면서도 거기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데 우리의 노력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여러분 모두의 덕분이다.

고나이브의 주교 로베르 경 1941년 2월 2일 사제 서신에서

* 1941년 미신타파운동의 찬가

"기억하라! 르와를 모셔야 함을. (후렴) 신부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네가 갈 곳은 지옥뿐." 신앙선언이자 부두교도들의 회개를 선전하는 데 사용된 이 찬가는 크레올오로 된 총 6절의 노래로, 1941년 미신타파운동에 사용된 설득문의 대표적 예이다.

만물을 보게 하는 신.

우리는 오직 그 만을 섬겨야 한다.
우리들을 이끄는 것은 교회이므로,
교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로 따릅시다.

운강이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입힌다고.
운강은 그들과 일치한다.
우리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운강은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데.
이 악을 끝맺도록 기도합시다.

우리는 운강을 보러 가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우리의 아이들이 아플 때면.
운강은 악마의 일을 하고.
우리를 속이기 위하여 무엇이든 다 한다.

우리는 운강을 보러 가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우리의 사업이 잘되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악마와 함께 있는데.
우리는 분명 나쁜 길을 택한 것이다.
악마와 함께 있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들이 믿지 않는 것을 알리려고 한다.
그들과 상의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
지옥으로 몰고 갈 죄악이다.


뱀이나 나무에게 봉헌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을 권하는 운강은 우리에게 큰 죄를 짓도록 한다.

* "오이와 가지는 함께 요리하지 않는다." 운동 기간에 사용된 교리문답

종교당국이 전념하고 있는 부두교 뿌리뽑기 사업에는 가상의 문답 형식을 이용한 간단한 교리문답 책자가 사용되었다. 이 문답에는 부두교를 완전히 단죄하기 위하여 부두교 의례의 모든 세부사항이 언급되었다.

당신은 아프리카의 모든 낡은 믿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리고 좋은 신을 섬기는 진정한 종교가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알기 위하여 교리문답 시간에 왔습니다.

질문: 여러분이 태어난 아프리카는 좋은 신을 믿는 종교와 맞는가?
답변: 아니다. 아프리카는 좋은 신을 믿는 종교와 맞지 않다.

질문: 왜 아프리카는 좋은 신을 믿는 종교와 맞지 않는가?
답변: 아프리카는 좋은 신을 믿는 종교와 맞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프리카에서 신은 르와들이고, 좋은 신을 믿는 종교에서 신은 좋은 신이기 때문이다. 오이와 가지는 함께 요리하지 않는다.

질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답변: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다. 그리고 구원자이다. 우리를 아프리카에서 구해 주기 위해 고통받고 죽은 분이다.

질문: 어떻게 악마를 알아볼 수 있는가?
답변: 악마는 우리의 수호천사를 유혹하기 위하여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 뚜렷이 나타난다. 그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와 춤추고 노래한다. 그들은 자신이 우리의 주인이자 우리의 아버지이며, 그들의 임무가 우리를 병에서 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많은 부를 약속하며 먹을 것과 춤을 요구한다. 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한 먹을 것', 양초, 성상, 십자가의 그리스도 상, 묵주, 3천 기도, 의자, 그릇, 옷, 수건 등을 요구한다. 그들은 속죄와 맹세를 해야 하며 순례를 가야 한다고 말한다.

질문: 아프리카-기니의 아이들이 좋은 신의 아이들보다 더 강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아프리카-기니의 아이들은 좋은 신의 아이들보다 더 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르와의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많은 죄를 범하고 있으며, 지옥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 "예, 나의 온 힘을 다하여 포기합니다. ": '거절자'의 맹세

성당에서 신부와 긴 대화를 나누고 나서 모든 신자는 부두교의 의례들을 영원히 포기한다는 소위 '거절자'의 맹세를 해야 한다. 다음은 공식적인 포기 선언 전에 쓰이는 질문서 끝부분이다.

31. 누가 악마의 우두머리 노예인가?-악마의 우두머리노예는 운강이다.

32. 운가이 악마에게 부여하는 이름은 무엇인가?-운강이 악마에게 부여하는 이름은 르와, 천사, 성인, 죽은 이, 마라사 등이다.

33. 운강이 악마에게 천사, 성인, 죽은 이라는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운강이 우리들을 쉽게 속이기 위해서이다.

34. 그들은 어떻게 악마를 모시는가?-죄악을 범하고, 주문이나 주술을 걸며, 망제 르와 '망제 레 장주' '망제 마라사'를 만들어 모신다.

37. 우리는 악마의 노예들과 어울릴 권리가 있는가?-아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노예들은 악인이고, 악마처럼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서약이 이어진다.

신부:당신은 오늘 그리고 영원히 미신 의례를 포기합니까?
새신도: 예, 나의 온 힘을 다하여 포기합니다.

신부: 아프리카의 종교를 포기합니까?
새신도: 예, 나의 온 힘을 다하여 포기합니다.

* 아송에 맞선 십자가

칼 에드워드 피터스 신부는 1960년 <아송에 맞선 십자가>라는 저서에서, 그가 선교사로서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거절자'의 미신타파운동 성과를 자체 평가했다. 그는 부두교에서 존경받고 있는 악마로부터 어떻게 나라를 구했으며, 이 운동이 소탕작전과 카톨릭 의식의 순화작업을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보여 준다.

참으로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 병이나 항아리는 깨부수어야 하고 성상은 찢고 말뚝과 십자가는 뽑아 불태워야 한다. 돌은 치워 버리고 목걸이는 걷어 내고 '케예 로아(cayes-loas)'는 박살내야 하며, 사용된 나무들은 잘라 버리고 미신에게 봉헌된 것들을 모두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힘들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신뢰를 가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신부가 직접 이 임무를 수행하러 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려올 것이다. "내가 신부를 찾아가지는 않겠지만, 만일 그가 온다면 매우 만족스러울 것이다. "...일단 운동이 시작되면 신부가 어디든지 가서 미신과 관련된 물건을 파괴하고, 그 고장과 주민들을 '청소'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 성당지기를 비롯한 신자들을 구할 수가 있었다...

1945년 12월 말, 레미오귀스탱 신부는 정화작전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해방의 기쁨은 너무나 전염성이 강해, 가끔 진짜 광적인 일이 일어나곤 했다. 지나친 열광으로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고, 성직자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과장한 일도 있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여기저기에서 '거절자'가 '거절하지 않은 자'에게 그들의 물신을 넘기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광상태에 있는 군중들을 진정시키라. 노예의 신분에서 진짜 해방되었다고 느끼고, 얻은 결과를 확실히 하기를 원하거나, 그들의 형제와 함께 기쁨을 나누길 원하는 이들을 진정시키라. 조금 지나쳤다고 해도 불가피한 일이었으리라. 주교들이 과도한 선동을 했다 해도 운동의 규율 중 어떤 것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칼 에드워드 피터스<아송에 맞선 십자가>, 1960년 르와는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모든 르와는 자연의 일정한 부분(공기, 땅, 물, 불), 나무나 초목, 인간의 행동, 색깔, 그리고 특별한 의례와 관계있다. 부두교도들은 특별한 징표를 르와와 동일시하며, 그들 마음대로 징표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표>
이름 레그바 자카 제데 바롱삼디 담발라 아이다 웨도 에질리 오구 페레 아그웨 생비의식 라다 라다 라다, 페트로 라다, 페트로 라다 라다 라다 라다 라다 페트로 좋아하는 나무 호리병박, 구연수, 야트로파 벚나무, 바나나 나무 야트로파, 호리병박 야트로파, 구연수 모든 나무, 특히 목화, 뽕나무, 호리병박, 캐비지야자, 타마린드, 모든 나무. 특히 목화, 뽕나무. 호리병박. 캐비지야자, 타마린드. 구연수, 월계수 호리병박, 소나무 포도나무 망고나무, 호리병박, 느릅나무 숲신들림의 유형 난폭함, 폭력, 격렬함 농부의 외관. 신들린 이는 큰 밀짚모자와 작업복과 푸른색 바지 차림에 붉은 수건과 짚으로 만든 연장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외설스러운 몸짓과 이야기, 시체같은 거동 무시무시하고 추잡함 뱀의 움직임을 흉내냄 쿨뢰브르 뱀의 움직임을 흉내냄 도발적인 태도의 매력적인 풍채, 향기를 탐색 독선적이고 저속한 언어 잠수하고 헤엄치기 위해 물을 찾음 못이나 강에 뛰어듦봉헌물 카사바, 쌀, 훈제된 초록색 바나나, 잡색의 수탉 옥수수, 빵, 라파두, 증류주 검은 진흙, 검은 수탉 절인 청어, 흑염소, 검은 암탉 흰 것: 암탉, 쌀, 우유, 계란 흰 것: 암탉, 쌀, 우유, 계란 화장품, 희귀한 고급 요리, 쌀, 병아리 붉은 수탉, 황소 흰양, 암탉, 희귀한 음료, 샹페인 검정이나 회색의 짐승: 돼지, 숫염소, 뿔닭, 칠면조, 암탉능력 가정의 수호자 수확 주문을 걸거나 물리침 ? 부, 재산, 행복 부, 재산, 행복 사랑 가난과 투쟁 항해와 해상무역, 어업의 보호 선견지명성격 르와의 대변자, 도시 성문, 네거리, 길의 수호자, 담발라의 경쟁자 농업과 들판을 책임지는 경작자와 농부의 르와. 의심이 많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며 돈벌이에 악착스럽다. 도시인에게 증오를 나타냄. 죽음의 르와 제데(죽음의 르와)들의 우두머리 선의 근원 담발라의 부인 혼혈 여자, 정부, 요염한 여자, 관능적, 미와 우아함, 부와 쾌락, 창녀 전사와 군인 흑백혼혈, 환한 안색, 바다 같은 초록빛 눈, 해군 장교 샘과 늪의 보호자 주거지 도시 성문과 네거리. 야트로파 나무 들판 묘지와 지하 처소 묘지 입구의 십자가 샘과 강 샘과 강 강가 호리병박, 대나무 바다 샘, 동굴, 산카톨릭 대응 성인 성 바오로(열쇠), 성 안토니오(유실물) 성 이지도르 성 에페디 ? 아일랜드의 뱀들을 쫓고 있는 성 패트릭 순결한 성모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 성자크 르 마죄르 성 울리히 동방박사 세 사람영역 땅 땅 땅 땅 땅 물 물 물 불 물 물 상징 누더기를 입은 약한 노인 마부야(작은 도마뱀) 시체, 검은 십자가, 농기구 높은 모자와 검은 의복 무지개 빛의 쿨뢰브르 뱀 무지개 빛의 쿨뢰브르 뱀 심장, 거울 땅에 꽂힌 검 작은 배와 노 연못 축성일 금/토요일 금/토요일 월/금요일 토요일 목요일 월/화요일 화/목요일 금/토/월요일 목요일 화/목/금요일

위의 분류대응표는 라다와 페트로 의식의 주요한 르와만 대상으로 한 것이다. 콩고 의식의 르와들은, 특히 고나이브시 근처에 있는 낭 수쿠리 라쿠에서 집단적으로 받들어진다. 그들은 단독으로 '호위대'라 불리는 것을 대표하는데, 이 행렬을 101명의 아이들을 가진 바주 메낭의 부인인 르와 '망 이낭(Man Inan)'이 통솔한다. 왕의 어머니로 간주되며 쪼그라든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망 이낭은 카톨릭 대응 성녀로 승천하는 마리아와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호위대와 함께 매년 8월 15일에 경배된다. 콩고 르와들은 삶의 어려운 순간에 신봉자들을 확실히 보호해 주는 '르와 가드(경호원)'로 알려져 있다.

부두교의 복권을 위하여

노예제도와 식민주의의 산물인 부두교에는 여전히 미신의 꼬리표가 붙어 있다. 부두교가 인간을 인간의 근원과 연결시켜 주면서 인간이 세상에 거하는 것을 허용하는 종교, 문화, 정신적인 원리임을 인정하자는 요구가 20세기 인류학자와 사회학자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아이티이다.

* "부두교는 종교이다."

생고르 이전에 흑인문화운동의 선구자인 장프리스 마르스는 당시 아이티 지식인 사이에 유행하던, 프랑스 문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바리즘'이라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부두교를 종교로서, 아이티 국가 문화의 일부로서, 그리고 나아가 연구 가치가 있는 종교 의식으로 복권시키자고 제안했다. 후에 뒤발리에가 부두교를 '아프리카의 지분'으로 악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스는 아이티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찾는 데 기여했다.

부두교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며 인간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주 어딘가 살고 있는 정신적 존재의 실존을 모든 신자들이 믿기 때문이다.

부두교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위계있는 성직자 집단, 신자들의 단체, 사원, 제단, 의례,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신앙의 중요한 부분들을 전달할 수 있었던 모든 구전 전통이 그들의 신을 숭배하는 데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두교는 종교이다. 여기저기 널린 무수한 전설들과 왜곡된 우화들을 통해 신학을 설명했고, 그를 통해 우리 아프리카 선조들이 원시자연 현상들을 해명하였기 때문이다. 부두교는 현대 혼합된 우리 카톨릭교의 근간이 되는 무질서한 신앙의 재현체계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견을 하나 제시해야겠다. 당신은 아마도 이러한 종교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며, 기독교 윤리에 영향을 받은 당신의 종교관을 판단 기준으로 적용할 것이다. 그러한 규율 아래, 당신은 부두교가 부도덕할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는 무도덕하다고 비난할 것이며, 당신의 머릿속에는 부두교에 대한 규탄만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무도덕한 종교란 없기 때문에, 당신은 부두교가 종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부당한 생각을 가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며,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종교가 나름의 도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도덕은 종교가 태어나고 뿌리내린 집단의 정신적 발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 프리스 마르스 <삼촌은 이렇게 말했다>, 1928년

* 유발된 틈

<이슬의 총독>의 저자인 공산주의 작가 자크루맹은 1934년 포르 토 프랭스 인류학 연구소르 창설했다. 그는 1941년 당시 미신타파운동을 강력하게 규탄한 몇 안되는 아이티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지방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로와 학교, 병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1804년에서 1860년 협약의 날까지 카톨릭의 얄팍한 덧칠이 아프리카 신앙의 오랜 토대 위로 조각조각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60년에서 오늘날까지 82년간, 더 나은 통신체제, 종교교육과 일반 교육의 보급, 각 도시와 마을의 교회, 농촌의 예배당, 그리고 도시와 시골 사이에 보다 밀접하고 일관되고 항시적인 행정적, 문화적 접촉수단이 넉넉했던 성직자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완강한 미신에 푹 빠진 암담한 미개 대중으로 표현되는 아이티 민중에게만 그 책임을 돌린 채, 카톨릭 포교의 엄청난 실패를 인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아이티 농부가 경제적 조건이 같은 브르타뉴나 티롤 지방의 농부보다 미신을 더 믿거나 퇴보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우리는 새로운 질문들에 대답하고 가능하다면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미신타파운동은 힘겨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우리의 굳고 일치된 단결력을 요구하는 시기에 아이티 민중들 사이에 균열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러한 불일치가 인위적이며 유발된 것이라 믿는다. 어떤 목적을 위해? 그건 두고 볼 일이다.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인도하는 것은 바로 최근 사태들의 정치적 중요성, 그것들이 제기하는 문제들, 그것들이 강요하는 해결책들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리 많은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다. 여론이 놀라면서 제기한 질문 "아이티에서 카톨릭 포교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해주겠다. 이런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직자

자신도 부두교의 응집현상에 대해 죄의식이 없다. 카톨릭 신부 중에 높은 영적 책임감을 지닌 진지한 선교사들이 있다. 나는 그들중 존경할 만한 이들을 알고 있다. 반면 한심한 이들도 알고 있다.

국가적 단결이 나치에 맞서기 위한 필수조건인 시기에, 사람들은 아이티 민중을 '거절자'와 '거절하지 않은 자'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으로 나눈다. 섬의 주권을 나누어 가진 두 공화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가 국가방위의 직접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을 하는데도, 사람들은 도미니카 사람들과 아이티 사람들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려 한다.

우리는 소위 미신타파라 불리는 이 운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도 더 비밀스럽고 민감하며 정치적인 동기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프랑스 카톨릭의 위계가 친비시(Vichy) 정권적이며 친부역적이고, 반영국적이며 반소련적, 반연합군적이란 사실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이 운동은 친파시스트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끔찍한 사실이다. 아이티에서 이 사실은 애국적이고 성실한 신부들의 경각심을 용케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크 루맹 <미신타파운동에 대하여> 1942년

* 르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혼란상태에서 빠져 나옴: 부두교의 치료 기능

<아이티 부두교의 신>이란 저서에서 라에네크 위르봉은 포르 토 프랭스의 두 정신과 의사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스 박사와 비주 박사는 부두교도들이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 사례들에 대해 연구했다. 정령에게 받은 박해는 부두교도에게 질문을 제기하며, 그는 이 질문에 묶여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질문이다. 이상하고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힘인 르와는 사람을 공격하는데, 이때 공격받은 이는 르와와 대화를 재개해야만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

르와를 선택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의례를 바침으로써 부두교인은 보호를 얻는다. 그는 더 이상 혼동과 무의미 속에 있지 않는다. 그는 집단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와, 우주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의 자리를 알 수 있다. 르와와 대화를 재개한다는 것은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왜야하면 부두교인에게 전통과 관습으로 얻게 된 의미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와는 사회문화 집단의 토대이며 응집력이다. 그들과 대화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공동체와 대화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개인성, 불안정, 무명,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티에서 계급, 언어, 종교간의 갈등이 부두교도들을 갈가리 찢어 놓아서, 전통을 따른다는 것은 사실 늘 힘든 일이다. 그러면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거나 서구적 가치의 압력으로 르와에 대한 의례를 소홀히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들은 르와가 분노하여 일으키는 나쁜 결과들을 접하게 된 것이다.

부두교의 임상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루이 마르스는 중산층과 프롤레타리아(즉 농경사회에서 빠져 나오지도 않았고 도시사회로 완전히 편입되지도 않은 사람들)의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신병의 3분의 1이 거의 편집증 형태를 띤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비주에 따르면, 1959년 4월에서 1960년 6월까지 정신의학연구소를 찾은 외래환자들 중 60%, 입원환자들 중 68%가 정신분열증 환자였고, 1960년 4월에서 1961년 3월까지 정신의학연구소에 감금된 환자의 69%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대부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보코르'와 '잎의사'를 찾아간다.

여기에 루이 마르스가 접한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에 걸린 한 젊은 여자의 사례를 소개하겠다. 우선 놀라운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녀는 자신이 포르 뵈데(Port-Beudet)에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행동에 관심조차 없으며, 먹을 것이나 외출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녀를 정성껏 돌보는 간호원과 담당 의사들의 이름, 병실이나 진료실, 혹은 병원 마당에서 마주치는 수용소 고용인들의 이름을 모르며, 그녀의 친척들을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특히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큰 무관심을 드러낸다. 어머니에 대해 물어 보면, 그녀는 "나는 모른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여기에 있거나 아니면 여기에 없다. "라고 답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곧 자기를 독살시킬 것이고, 자기 안에서 한 존재(성령)가 자기를 학대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때때로 영어, 불어, 때로는 크레올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우리는 여기서 임상사례를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정령의 상징적 언어가 상실되었다는 사실이 근대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세계와 사회 집단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했던 부두교도를 어떻게 운명지웠는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위의 환자는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되찾지 못하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에게 언어란 자신의 공허를 뒤쫓는 것 이외에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말로 자신이 말하는 곳에 존재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말이란 사슬에 묶여 있으며, 또한 그녀는 그녀를 괴롭히는 내면의 어떤 것처럼 그녀 자신의 몸 속을 감싸고 있다. 몇몇 부두교도 환자들의 경우, 악마들이 몸의 모든 정기를 뽑아 내고 무력하게 만들면서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가? 프로테스탄트나 카톨릭으로 개종한다든가, 근대 사회의 가치들과 만나는 것만으로 옛 부두교 신자들에게 그들의 인성을 재구성할 수 있는 코드를 제공하는 것이 결코 충분치 않다. "어떤 경우든, 정신착란을 조장하는 문화적 재료는 작은 파편들로 부숴져 있다. 각 조각은, 쉬지 않고 햇빛을 반사하는 사금파리처럼, 뒤틀리고 왜곡된 문화의 모습을 반영한다. 각 문화적 특징은 그것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환자의 주관대로 활용된다. "고 루이 마르스 박사는 지적한다.

오직 관습을 재습득하는 것만이 그가 다시 평형을 되찾는 데 필요한 기표들을 제공할 수 있다. 병이란 르와가 제기한 질문이기 때문에, 환자는 다시 르와의 상징체계를 따라야 하며,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는 의례를 올려야 한다. 이처럼 르와에게 복종함으로써 개인은 불확실함과 혼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으며, 우주 안의 물체들과 존재의 자리를 인식할 수 있다.

우리들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르와는 현실과 사회성 간의 접합 양식, 그리고 현실과 사회성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표상한다. 정확히 말하면, 르와에게 신이 들리는 부두교 초심자는 영매의 최초 경련을 일시적인 광기처럼 경험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르와가 아직 그의 머리에 고착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운강의 지휘하에 르와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르와에게 경배의례를 치른다. 그것 또한 입문의 의미 중 하나이다.

이 의례는 말과 기사의 관계처럼, 신자를 그의 르와에게 완벽하게 맞춘다. 그것을 통하여 부두교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서구 사회에서라면 그는 수용소에 보내졌겠지만, 부두교 안에서는 사회 집단의 공동 신앙 덕분에 '환자'들의 정신착란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었다. (실제로 초창기에는 이들을 서구식 정신병원에 보내기도 했다. )

부두교도에게 정령들의 세계는 인식의 극적인 표현세계가 된다. 르와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행위, 르와들이 금지한 것들을 지킨다는 행위는 다른 이의 존재를 통해 욕망을 경험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영상에 이끌려 다니거나 사로잡히는 일을 중지하는 것이고, 또한 신의 말씀에 접근하는 것이다.

라에네크 위르봉 <아이티 부두교의 신> (개정판), 1987년

*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경험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욕망

부두교인들은, 정권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부두교를 이용하고 있는 정부, 부두교에 대해 지배적 위치를 견지하고 있는 카톨릭, 하층 민중들을 더욱 잘 통제하기 위하여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서구 이데올로기 등의 지배를 받고 있다. 또한 부두교를 근대성의 영향 아래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미개적인 것으로 보거나, 외국인들의 이국적 취향에 대한 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진열장용 민속 예술로 보는 엘리트 집단과 부르주아지 계급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포위된 도시처럼 부두교도들은 투쟁을 했다. 노예제 기간 동안 그들이 보였던 저항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비록 봉쇄된 채 결국 상상의 세계로 옮겨 갔지만).

부두교에게 미래는 여전히 있는가? 이것은 곧 크레올어에 미래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사실 부두교의 미래는 착취받는 아이티 민중의 미래이다. 부두교 그 자체가 저개발의 원인은 아니다. 아이티의 저개발에 대한 해결책은 부두교 밖, 다른 곳에 있다. 다른 곳이란, 이 나라의 착취받는 계급들이 도달해야 하는 정치적 투쟁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치적 투쟁을 하는 동안, 대중들의 새로운 표현형태가 나타날 것이며, 새로운 윤곽이 그려지고, 새로운 문화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현존하는 잠재력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두교가 순전히 사회정치적 소외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라에네크 위르봉 <아이티 부두교의 신>(개정판), 1987년

예술 속의 부두교

부두교는 아이티 흑인의 정체성과 독창적인 상상계를 만들어낸 후, 자연스럽게 예술 속에서 그의 자리를 찾았다. 현실을 변모시키는 부두교의 능력은 오늘날 문학과 무용 속에서, 아이티의 미술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앙드레 말로에게 수수께끼처럼 보였던 아이티 미술은 비평가들에게 아이티의 땅이 '화가 민족'을 낳았다는 찬사를 들었다. 북아메리카의 영화에 나타난 이국적인 종교 부두교는 그들 자신의 불안을 반영한 것이었다.

* 아프리카의 뮤즈를 유혹하라

부두교가 도처에서 여전히 비난받고 있을 때, 앙투안 이노상은 1906년 처음으로 <미몰라>라는 소설 속에서 부두교를 긍정적으로 다루었다.

프레 티 도르는 헝클어진 머리와 깜부기불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과 당시 사람들이 달고 다니던 금으로 된 조그만 링을 귀에 단, 독특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온갖 색조의 돌을 박아 넣은 반지를 잔뜩 끼고 있었다. 그는 두꺼운 푸른색 삼베로 만든 괴상한 옷에 목을 파묻고 있었다. 그는 리본이 풀린 구식 모직 모자를 쓰고, 아주 짧은 바지를 입었으며, 염소 가죽으로 만든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구멍난 양말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때로는 가늘고 때로는 굵었는데, 독설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남을 잘 속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원래 타고난 것이었다. 세련되지 않은 외관을 한 그가 남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기도할 때나 신들린 신봉자와 대화할 때 진실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상한 곡조로 노래를 부르면서 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거나, 이글거리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땅이나 하늘을 의미하는 그의 몸짓과 우는 도중 가끔씩 피어나는 미소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위엄 있는 언어가 고대 민족들의 언어처럼 순진함과 우아함과 신선함으로 가득 찬 시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하곤 했다. 모든 곡조는 온몸에 기쁨의 전율이나 슬픔의 전율을 느끼게 했다. 왜냐하면 이 노래 속에 표현된 모든 감정은 제사장의 얼굴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시에서 시를 해치는 모든 변질된 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새로움을 탐색하는 예술가에게는 얼마나 부드럽고 유쾌한 호기심과 충만감을 주겠는가? 만일 아프리카의 뮤즈가 유혹에 몸을 맡긴다면 얼마나 큰 성공이겠는가? 안타깝구나! 그러나 우리는 조상들 언어의 비밀을 알지 못하며, 그 일부를 보존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은 이기적이고 인색하거나, 혹은 그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하기 일쑤였다.

다음날은 월요일이었다. 프레티 도르는 넥타이 대신 붉은 건을 목에 감은 채, 그의 신봉자 훈시의 선두에 도착했다. 훈시는 머리에 조그만 천뭉치를 이고 있었다. 금속 상자와 철대, 윗면을 가는 가죽끈과 쐐기로 고정시키고, 원뿔모양의 크기가 일정치 않은 세 개의 쇠북이 당나귀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금속 상자는 훈강이며, 가장 큰 북이 훈, 중간 것은 훈시, 가장 작은 것이 훈라이다.

모든 사람들은 울타리 앞에서 정지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의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곧장 운게니콘이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코요, 나 살뤼에 드라포 라, 누리베..."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는 천막안에서 금박으로 장식된 국기와 같은 색의 새틴으로 된 기를 끄집어내더니, 막 채비를 끝낸 두 명의 훈시에게 그 깃발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우아하게 왼쪽, 오른쪽으로 제자리 돌기를 하고, 무릎을 굽혀 땅에 세 번 입을 맞추고 난 뒤 자신들에게 건넨 기를 잡았다. 운게니콘은 그들을 빙빙 돌게 하면서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라플라스 티 조는 칼집에서 큰 칼을 뽑은 후, 깃발꽂이의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명의 여자가 들고 있는 펄럭이는 기에는 단체의 이름인 '다호메이의 꽃'이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앙투안 이노상 <미몰라>, 1906년

* '작은 수호천사'의 도둑

<공모자 태양 장군> <찰나의 공간> <별이 빛나는 시집>의 작가인 자크 스테광 알렉시스는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콜럼버스가 상륙한 몰 생니콜라에서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다음에 실린 <음악가 나무들>의 짧은 발췌문에서 그는 의례의 준비과정을 둘러싼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봉헌물이 운포르의 제단 앞에 쌓였고, 포도주, 음료수, 과자, 꽃과 과일들로 가득 찬 카누가 호수 위에 떠 있었다. 물의 신 아구에 아로요는 이 지방의 시조였다. 사람들은 그의 굶주림과 갈증을 가라앉혀야 하며, 선택된 음식을 먹고 독한 술에 취한 로아가 그의 아이들에게 신호를 보낼 배를 그에게 보내야 한다. 구름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바람은 무엇을 노래하는가? 늘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훈강은 무엇을 알리는가? 만일 식료품의 가격이 싸다면, 올해에는 필수품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호수 주변 지역에서는 이제껏 완전한 평화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출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땅 주인, 구역의 우두머리, 그의 고문, 군 장교, 맹수들이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나타났다...

'할레포르'로 허리를 두드리고 머리를 수건으로 싸고 짚으로 만든 거대한 모자를 쓴 당제 도수(올빼미의 눈을 가진 보코르)는,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먼지 위에다 지팡이 끝으로 원을 그린다. 벌써 며칠 전부터 걱정스러웠던 그는 큰 부락을 향하여 출발했다. 시장을 통과할 때, 그가 가는 곳마다 침묵이 흘렀다. 시장에 물건을 팔러 온 몇몇 도미니카 농부만이 부와 도름 레티로의 끈질긴 적이고, 위풍당당한 파파로아이며, 지방의 족장이자 보호자인 강강마쿠트를 모르는 사람들을 지목하면서 쑥덕거렸다. 어머니들은 사람들의 '작은 수호천사'를 빼앗아 갈지 모를 부정탄 남자에게 손가락질하는 경솔한 아이들의 손을 때렸다. 대지는 신비스러운 울림을 울렸고, 대기중에는 피할 수 없는 사건들의 냄새가 감돌았다. 감지할 수 없는 신호에 반응하는 동페드르는 다가오는 위협을 느끼며 그 위협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키가 큰 당제 도수는 엄청나게 넓은 가슴팍을 앞으로 불쑥 내밀고서 느리고도 비극적인 걸음걸이로 촌락을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자크 스테팡알렉시스 <음악가 나무들>, 1957년

* 역사의 사육제

<내 모든 꿈 아드리아나>로 르네 드페스트르는 1988년 르노드상을 수상하였다. 사육제에서는 마을과 인류 역사의 형상들이 서로 즐겁게 융합된다.

지금으로서는, 음악가들과 무용수들이 잠자고 있는 그들의 악기 사이에서 야숙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여러 종류의 북, 박신, 람비, 딸랑이, 색소폰, 플루트, 경적과 손풍금...나는 먼저 여장을 한 남자들 앞에 멈춰 섰다. 만삭의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초록빛 새틴 원피스 안에 베개외 방석을 집어 넣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엉덩이의 비너스'와 같은 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곤봉에 기대어 서서, 이들은 흰 천을 뒤집어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솜으로 귀와 코를 막은 채 콧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변장한 시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탕수수 시럽과 기름 검댕을 칠한 반라의 늑대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손톱에 흰 철로 만든 원뿔형 손톱을 붙이고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네 쪽으로 자른 오렌지 껍질을 입술과 이 사이에 끼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외 음악당 근처에서, 나는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연한 청색의 쇠그물로 된 가면을 쓰고 허리띠에 방울을 단 광대들의 행렬을 발견했다. 도청 주변에서는 카리브해의 인디언들이 수많은 깃털로 장식한 채, 거리 위에 쌓여 있는 활과 화살들 속에서 타피아 술을 목이 긴 병에 담아 마시고 있었다. 콘도르로 변장한 도지사의 앵무새인 텔레벡 장군이 그들을 놀리면서 "건배, 빌어먹을 인디언들아!"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은 광장에서 영웅들이 지구의 역사에 참가했던 당시의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했다. 그러나 역사적 기억은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고, 사람들을 카피톨리움 언덕에서 타르페이아 바위까지 인도한 발자취도 흐려졌다.

가면극이 진행되는 동안 3세기의 인류사가 정리되었다. 썩은 나무로 만든 작은 상처럼, 가장 순수한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들은 이 거대한 가장행렬의 한복판에서 세계의 무대가 된 우리 마을에 있는 아름 광장의 먼지를 휘날리면서 모두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럼주를 마시고 죽음을 조롱할 준비를 했다.

르네 드페스트르 <내 모든 꿈 아드리아나>, 1988년

* 증오의 검은 별

시인 르네 드페스트르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티 장 상도르의 중재로 침략자 미국을, 더 나아가 노예제를 옹호하는 식민지 경영자들을 향한 증오를 몰아내려고 시도한다.

티 장 상도르
나는 티 장 상도르이다
나는 상도르 왕자이다
나는 다리가 가는 수탉이다
나는 말라 빠진 다리를 한 티 장이다
나는 나의 심장을 건다
야자수 꼭대기에
나는 두 손을 사용한다
나는 뒷걸음질친다
뒷짐을 지고
나는 내 앞에서
화약을 터지게 한다
나는 내 뒤에
긴 사슬을 남긴다
나는 웨스트포인트의 동생을
내가 귀를 문
잘생긴 순종 개로 바꾼다
나는 대식가이다
흰 개를 먹는 나는
100개의 씨앗을 가진 황소이다
나는 예일 대학의 학생을
다리 세 개 달린 가마솥으로 바꾼다
나는 바쿨루바카이다
...
증오는 결코 내 뼈를 떠나지 않는다
내 피도 내 살도
내가 자는 밤에도
그의 검은 별은 나에게
발톱 같은 눈을 연다
만약 내가 끝까지 갈 수 있다면
나의 쓰디쓴 밤에 나는 이으리
나의 근육을 태풍의 근육과
그리고 지진이
이 쓰라린 남쪽을 삼켜 버리도록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남쪽을
나의 아프리카의 허리에 열었다
오, 증오여! 건강한 나
나는 내 불타는 시간들을
너의 파도로 얼어붙은 푸르름에 던진다
나는 내 벌거벗은 백성을
이 자랑스러운 정결수에 던진다
나는 우리의 호랑이 우리의 창
우리의 상처 우리의 고함 우리의 목마름
우리의 깃털 우리의 칼 우리의 눈물을
축복받은 폭우 속에 던진다
그리고 영원히 세례받은 우리는
세상의 흑인 노예들
마침내 우리는 원숙해진다
커다란 흰 날개를
우리의 공모자에게 줄 만큼
남쪽의 흰 심장 속에서 벌어지는
증오의 대향연들처럼!

르네 드페스트르 <서양의 기독교 국가를 위한 무지개>, 1967년

* 바롱 라 크루아와 독재자

프랑크 푸셰의 연극에서 오가는 '지도자'와 바롱 라 크루아 장군의 대화는 아이티를 무대로 벌어졌던 뒤발리에 독재 치하의 유혈사건들을 명백하게 암시한다. (조명이 집단적인 흥분과 히스테리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연출해 낸다. 상황에 맞게 변신한 지도자는 손에 아송과 검을 들고 의식을 집전하고 있다. 그는 바닥에 정령이나 르와의 상징적인 베베를 그린 후 바롱 라 크루아를 부른다. )

지도자: 장군, 말해 주시오. 2, 000년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오?
바롱 라크루아: (웃음) 2, 000년이라구! 그렇지만 위대한 지도자여, 당신이 요구하는 2,000년은 거의 영원함에 가깝다. 당신의 요구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지도자: 아니오. 나는 단지 나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있을 뿐이오. 단지 지도자인 내가 백성들을 위하여 하기로 했던 것들에 비추어 볼 때, 삶이 짧은 것뿐이오.
바롱 라 크루아: 그것은 지옥의 왕자인 위대한 벨제부트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로 말하자면, 내 능력은 대단치 않다. (웃음)

지도자: 나는 위대한 벨제부트의 어떤 요구에도 준비가 되어 있소. 만일 그 대가로 내가... 영원한 권력을 가진다면.
바롱 라 크루아: (웃음) 내가 당신에게 미리 말하겠는데, 지옥의 신들에게는 시체들이, 늘 시체들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시체에 목말라하고 허기져 하는지 모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말에는 살육이나 전쟁, 페스트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보라, 과학이 진보한 덕에,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게 되고 지구는 계란처럼 꽉 찰 것이다. 얼마나 극심한 인구과잉이 될 것인가! 사람을 위한 더 이상의 자리도 더 이상의 양식도 없을 것이다. 지방과 털과 배설물의 무게로 완전히 균형은 깨질 것이다. 지구는 이제 우주 공간에서 머리를 터뜨릴 일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킥킥거리는 웃음) 죽음이 삶을 대체해서 끝없는 지배를 해야 한다!(불길한 폭소를 터뜨린다)

지도자: 장군, 거듭 말하는데 나는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소. 신이여, 명령만 내리소서!
바롱 라 크루아: 무엇보다도 그들은 정령들을 물질과 결혼시키기 위해 산제물을 필요로 한다. (잠깐의 침묵) 지옥의 왕자들과 거래할 때 나 바롱 라 크루아는 당신의 중개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의 봉헌물을 심사의 재료로 소개하는 따위이다. 봉헌물은 그들이 영광과 불사를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속을 떠볼 수 있는 증거품이다.

프랑크 푸셰 <바롱 라 크루아 장군>, 1970년

* 무용, 음악, 그리고 노래

카트린 됭앙은 현대 감각에 맞게 부두교의 춤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종교적 몸짓의 깊고 보편적인 의미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또한 1950년대부터 마르타 장 클로드와 에메랑트 드 프라딘이 대중화한 부두교 음악의 다양한 리듬은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미국 팝음악과 접촉하면서 풍부해져 부크망 에그페리앙스와 랑 같은 세계적인 그룹들을 통해 다시 나타난다. 원조 그룹으로 불리는 그들의 수는 많으며, 부두교의 긍정적인 문화적 가치들에 대한 인식 위에 젊은이들을 불러 모은다. 부두교 의식의 노래들은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으로 대부분 아이티 창작 음악에서 폭넓게 활용된다. 르와마다 신봉자의 몸에 개입할 때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북의 리듬이 있다.

담발라 웨도, 두고 보다.
아이다 웨도, 두고 봅시다.
다음에 내가 영매에 빠질 때
눈물을 흘릴 이가 누구인지 나는 벌써 알고 있다.
다음에 내가 신들렸을 때
피의 대가를 치를 이가 누구인지 나는 벌써 알고 있다.

<부두교의 음악> 중에서 클로드 도팽의 노래, 1986년

* 부두교와 아이티의 그림

1975년 12월, 앙드레 말로는 생솔레유의 화가 공동체를 발견하고 거기서 '금세기의 가장 인상적인(유일하게 통제될 수 있는) 마술그림이 그려지고 있음'을 본다. <아이티와 그의 화가들, 1804년에서 1980년까지>의 저자인 미셸 필리프 르르부르는 부두교의 상상계가 아이티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활력을 줌을 보여 준다.

색조의 선택과 색의 조화를 맞추는 데 있어서, 기독교 채색 석판화들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두교 의식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베베가 아이티 그림에 보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단순한' 혹은 '세련된' 아이티 예술가들은 베베의 장식적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연구와 탐색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의 작품 속에 도입하려 했다... 베베의 풍부한 목록을 알게 되면, 이것들을 이미 다른 화법의 제작에 사용한 베베 제작자의 수완에 놀랄 수밖에 없다. 아이티의 많은 예술가들-엑토르 이폴리트, 앙드레 피에르, 라포르튄 펠릭스-이 화가가 되기 전에 베베 제작자였음을 잊지 말자.

아이티의 원시 그림은 아이티 현실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데에서 그 힘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현실에 대한 이해는 바로 부두교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아이티의 그림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반드시 부두교를 알아야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예를 들어 엑토르 이폴리트가 '전지전능한 신'을 세 개의 눈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거나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사실 그는 기독교의 신을 그린 것이 아니라 부두교 신학의 위대한 주인을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발가락이 아홉 개인 위대한 주인"이라고 되뇌이면서. 이폴리트가 신의 양발에 발가락을 다섯 개씩 그렸는지를 확인했다.

부두교 의식에서 색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며, 화가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그림은 그 영향을 받는다... 선도 우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수직선은 정신을 나타내며, 수평선은 물질을 나타낸다. 정신과 물질의 만남을 뜻하는 십자가는, 다른 르와에 대한 접근권을 부여하는 레그바의 상징이며 인간신인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거의 모든 베베에서 볼 수 있는 원은 뱀 르와인 담발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인간의 모습니다.

미셸 필리프 르르부르 <아이티: 순수 예술, 아이티 예술>, 1988년

* 본질의 분출

<데살린의 시대> <보르텍스 가족> <황혼의 자크멜> 등의 저자인 장 므텔뤼스는 <아이티, 비장한 나라>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증언을 싣고 있다. 아이티 화가들이 체험한 부두교는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갈릴레이가 카톨릭 사상을 결정적으로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아이티에서 부두교를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는 아이티 시골에 전기나 트랙터보다 더 중요한 사건들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티 회화는 아이티 국민들의 탄생과 역사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려고 애쓴다. 너덜너덜한 전통 천 위에 원초적인 재원, 세상을 향한 열림, 접근 가능성을 다시 그려내는 아이티 회화는, 세상에 대한 표현 속에 흐르는 본질, 성장, 은총이다. 바로 인간이 가진 풍부한 능력이 표출되는 것이다. 발생의 그림 <부두교의 의례 장면>에 나타나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유출, 뜨거운 인간의 흐름, 판독할 수 없는 신적인 확장, 사람을 홀리는 르와의 출현, 한마디로 그림 전체가 아이티가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준거를 찾을 수 없다.

장 므텔뤼 <아이티, 비장한 나라>, 1987년

* 영화 속에 나타난 부두교

부두교는영화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미국 공포영화의 소재가 된다. 윌리엄 B. 시브룩의 유명한 작품인 <마술의 섬>(1929)은 오늘날까지 서구의 상상계에 좀비(살아있는 시체), 주술, 인간 제물을 제공해 온 영화의 모태가 된다. 아프리카의 인류학자인 울리케 술리코프스키는 이 주제들을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하면서, 영화작가가 관객에게 흑인 문화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표상과 고정관념을 제공하고 인종차별적 태도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29년 시브룩의 <마술의 섬>은 아이티에 대한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 시브룩은 이상한 것들을 좋아하고 마술에 큰 관심을 가진 여행가이며 작가이다. 이러한 관심이 아이티 부두교에 대한 그의 관점을 지배한다. 그는 의례들을 묘사하고... 자신이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인신 공양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의 책은, 미 해군이 무장반란 세력이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었던 브누아 바트라빌 장군에게 얻었다고 주장하는 마술 개론서 중 일부를 길게 인용한다. 그는 강신술과 인간 제물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

1932년 최초의 신화적인 미국 공포영화 <하얀 좀비>가 상영되었는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바로 <마술의 섬>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얀 좀비>는 결혼을 하기 위해 아이티에 오는 마들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를 탐낸 농장 주인이 마술사 르장드르에게 그녀를 자신에게 오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농장 주인을 위해 설탕공장에서 노예로 일하는 좀비 군단을 이끄는 르장드르는, 자신이 그녀를 가지기 위해 그녀를 좀비로 만든다...

초창기 부두교에 관한 공포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좀비의 이중적 사용이다. 즉, 시브룩이 만든 표상과 비슷한 노동하는 노예로서의 좀비와, 남성적 폭력의 대상인 여성에게 전이된 것이다. 따라서 악마적인 것은 욕구불만 상태의 성적 욕망이 된다.

... 미국 영화산업에서, 부두교는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악마적인 의식, 주술행위, 병적이고 범죄적인 행위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영화 장르는,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표상과 기독교 근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억압되고 분리된 분야들이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준다는 점에서 사회적 필요성에 응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회는 '다른 이'와 '외부인'을 , 비합리성과 공포를 동일시하여 자신의 부정적 대응자로 만든다.

올리케 술리코프스키 <거울 속의 금, 가상과 현실 사이의 영화 보기>, 1990년

사람처럼 정령도 여행한다. 오늘날 세계에 존재하는 부두교는 크게 세 개의 종파로 구분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는 토속신앙, 노예들과 같이 아메리카로 옮겨 간 부두교, 그리고 선진 공업국가로 이민 간 부두교도들을 따라 옮겨 간 최신 형태를 보여 주는 부두교가 있는데, 이것은 아이티의 신앙인 디아스포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흑인 공동체가 자리잡은 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부두교 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브라질, 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같은 남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부두교 의식은 카리브해 연안 전 지역에서 가끔은 완화된 형태로, 가끔은 쿠바의 '산테리아(santeria)'처럼 아이티 부두교와 같은 뜻의 단어로 재발견된다. 반대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부두교를 마술이나 주술과 동일시되는 아이티 숭배의식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그곳에서도 역시 르와는 교회에 속한 독실한 협회들의 테두리 안에서 교회력에 따라 받들어진다.

* 브라질: 바이아의 모든 성인들

특히 브라질에서는 '캉동블레'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 의식이 매우 번창하고 있다. 캉동블레에 대한 사진학과 인류학 연구의 개척자인 피에르 베르제는 '아프리카의 신들' 안에서 바이아 문화 속으로 녹아든 종교적 유산을 보여준다.

바이아에서, 노예 신분을 벗어난 흑인들의 후손은 다른 어떤 곳의 후손보다 그들의 아프리카 근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반면, 바이아처럼 그들의 전통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지배계급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신분상승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도 거의 없다. 그들은 자부심을 '오리샤'와 '보둔'신앙에서 이끌어 내는데, 이들은 흑인들이 고달플 때는 근심과 모욕에 맞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지지자이며 즐거운 때는 그들 민족 정령에 대한 열광적인 감정을 주는 존재들이다....

브라질에서 나고의 영향을 받은 사원 '테레이로'는 신을 모신 제단이 있는'페지'와 흔히 조각상과 카톨릭 성상들로 장식된 공공 의례용 방인 바로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의식의 책임은 여전히 '파에(pae)', '마에 데 산토(mae de santo)' 혹은 '바발로리샤(babalorisha)', '이얄로리샤(iyalorisha)'라 불리는 '젤라도르(zelador)' '젤라도르(zelador)'가 맡는다. 이 역할은 특히 케투 민족의 '테레이로'에서 행해지고 흔히 여자가 맡는다.

'파에' 혹은 '마에 데 산토'는 필요한 경우, 그들을 대신하는 '파에'나 '마에페케노스(mae pequenos)'와 북을 맡은 '알라그베(alagbe)', 그리고 제물과 '오리샤'의 동조자 중에서 선택된 고관인 '오강(ogans)'을 책임지는 '아쇼군(ashogoun)'의 도움을 받는다. 이들은 '테레이로'를 보호하고 잘 운영하는 데에 물질적인 책임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신에게 헌정된 '필로(filgos)'와 '필라 데 산토(filhas de Santo)'(이야오리샤 또는 이야오)가 있다.

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집된다. 의식 도중, 어떤 사람은 격렬한 실신상태에 빠질 수도 있고, 춤을 추고 있는 신의 발 아래 기절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특별한 꿈을 꿀 수도 있고 뜻밖에 이상한 물건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까닭모를 병을 앓거나 오리샤가 자신을 이야워(iyawo)로 선택하는 것을 선견지명으로 볼 수도 있다.

신에게 바칠 의무는 '페지'에서 사적으로 동물 제물과 음식물을 봉헌하는 것이 따른다. 또한 그 다음에 있을 공적인 의례를 위해, '바라콩(barracon)'은 그날 경배되는 신의 색깔로 된 종이 화환으로 장식된다. 처음에는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북으로 구성된 음악단이 장단에 맞춰 여러 신을 부른다. 왜냐하면 각 신은 고유한 장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의 전달자인 에슈 엘레그바(Eshou Elegba)는 좀 나중에 부름을 받는다. 성격이 까다로운 그가 혼란을 가져오거나 의례 도중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례 앞부분에서 그를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큰소리와 찬탄으로 신을 맞이한다. 신은 이야워를 타고, 음악단, 마에 데 산토와 테레이로의 오강 앞에서 굽실거린다. 그들을 보살필 책임을 지고 있는 '에케디(ekedi)'가 그들을 페지에 모신다. 이야워는 오리샤의 특이한 옷을 입고, 그들의 무기나 상징적인 물건을 받는다... 모든 것이 다 꾸며지면 모든 신이 무리지어 바라콩으로 온다. 그들은 완전한 판테온을 형성하며, 군중 앞에서 차례로 춤을 춘다.

피에르 베르제 <아프리카의 신들>, 1954년

* 아이티 디아스포라(diaspora)의 부두교

1992년 현재 외국으로 이민 간 아이티인의 수는 대략 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도미니카 공화국, 미국, 캐나다, 칼리브의 프랑스령, 프랑스). 의식을 치르기에 알맞은 생태학적 환경을 되찾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르와는 그들의 신봉자와 고향 사이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여전히 경배를 받고 있다.

르와가 작은 주머니나 꾸러미, 목걸이 혹은 보호 목욕에 필요한 성분들로 가득 찬 병의 형태로 이민자와 함께 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떠돌이 운강과 망보가 있다. 특히 브루클린이나 파리 근교에 있는 건물 지하에 이따금 우포가 세워진다.

* 브루클린의 부두교

미국 인류학자 카렌 매카시 브라운은 <마마 롤라, 브루클린의 부두교 여사제>란 제목의 저서에서, '망보'와 그 가족의 영적인 일대기를 소개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알루르다가 꿈속에서 르와 담발라의 메시지를 받은 후, 갖가지 불행을 겪으며 부두교에 입문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 준다.

부두교의 치료 목록 중 가장 많은 항목인 불운(아이티 사람들의 표현으로는 '재수 없음')에는 자동차 사고, 실직, 병 등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는 질적인 변화들이 있다. 이 목록은 알루르드와 매기가 1981년 초에 겪은 상황을 진단한 것이다.

모든 일이 잘못되어 갔다. 크고 작은 일들이 연이어 생긴 것이다. 1월에 난방 파이프가 얼어 터졌을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2주일도 채 되지 않아 매기는 직장을 잃고 수두에 걸렸다. 그리고 흔히 그러하듯이 불행은 그들의 약한 인척을(영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번져 나갔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알루르드의 옛애인 가브리엘이 습격당했고, 알루르드의 아들 윌리엄이 가방을 훔친 죄로 체포되었다.

불운이 지속될 때는 알루르드의 말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침착해야 하고, 잘 자고 자주 꿈꾸어야 하며, 꿈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3월 초, 가정의 불안이 극도로 고조되자 다가올 불행을 예고하기 위해 정령들이 매기의 꿈속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즉시 기억해 내지 못했고, 기억해 낸 뒤에도 결정적인 부분을 잘못 해석할 정도였다.

"그들이 내게 예고하고 그것에 대해 말해. 하지만 난 생각할 게 너무도 많아. 나는 잊어버리고, 도처로 뛰어다니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애쓰지. 그러나, 나는 꿈을 꿔. ... 한번은 꿈에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이 열려있기에 들어가 보았지. 말 네 마리가 비상 계단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내 아파트 앞쪽에 있는 방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그 방으로 갔더니 안에 조가 있더라구. 너, 조 알지? 앨렌의 아들 말이야. 나는 그 애에게 '너 여기서 뭘 하고 있니? 내 아파트에서 뭘 하고 있냐구?' 라고 물었지. 그 애는 뭘 찾으러 왔다고 대답했어.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 애를 때려서 밖으로 내쫓았어." 3월 중순 이 꿈을 꾼 며칠 후, 그들이 그곳에 산 지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도둑이 들었다. 매기는 아파트 2층을 쓰고 있었고 그 위에는 앨렌과 그의 아들 조가 세들어 있었다. 도둑은 뒤쪽의 비상 계단을 지나 매기네 부엌 창을 통해 들어왔는데, 그곳은 그녀의 꿈속에서 본 말들이 서 있던 곳이었다. 매기는 마이클의 아버지 라파엘 산체스가 그녀에게 존 약혼반지와 25센트짜리 동전이 가득 든 병 하나, 외국 돈 한 세트, 그리고 그녀가 채 지불도 하지 않은 새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매기는 정령들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도난사건으로 매기는 왜 자신이 불운한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분명 정령들이 그녀를 괴롭혀서 더 이상 입문을 미루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이티로 돌아가 아송을 손에 쥐겠다고 담발라에게 맹세했던 꿈을 꾼 지 거의 2년이 흐른 때였다. 그녀는 일과 돈 때문에 약속을 즉시 이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 사실, 파파 담발라에게 약속을 했던 2년 전부터 매기는 '망보'의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했고, 그에 따르는 결과에 맞서서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카렌 매카시 브라운 <마마 롤라, 브루클린의 부두교 여사제> 1991년

* "신비로운 이들은 우리가 고향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 파리의 부두교

그들은 식당 종업원, 택시 운전수, 가정부, 요리사, 음악가, 견습 재봉공, 경리, 운이 좋으면 타이피스트로 일한다. 파리에서 아이티인들은 지혜롭고 용기 있게 '삶을 추구한다. '행운과 질투, 경쟁이 일상을 지배하는 생존경쟁에서 부두교는 절망과 외로움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무기이다. 운강과 망보는 그들의 사원을 찾는 이들로 붐비는 바르베스의 빈민가인 20구의 시영 아파트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그들은 특히 빌주이프, 몽페르메이, 오베르빌리에 같은 파리 변두리에서 의례를 집행한다.

<부두교의 뿌리>와 <로코 미루아의 길>이란 소설의 저자인 릴라 데키롱은 여사제 중 한 사람에게 본토와 다른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일하는 데 따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손님을 끌기 위해 맹렬하게 경쟁한다. 그들은 거의 만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는다. 파리에 있는 서인도 제도 사람들, 마르티니크 사람들, 그리고 과달루페 사람들은 아이티 신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이 때문에 파리의 우포에서도 카리브해 연안에서 사용되는 크레올어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밤에 성스러운 북을 울릴 수 없다는 것과, 제물의 피를 뿌리고 맨발로 조상의 힘을 전해 받을 수 있는 굳은 땅이 없다는 것이다.

스탱에서 부두교를 믿던 게델리아 부인은 최근 남편과 함께 과달루페에 왔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과달루페의 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그때까지 부두교에 입문하지 않았는데 프랑스라는 먼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1973년 르와들에게 작별의례를 치르고, 그들이 나에게 장벽을 열어 주길 바라며 식사를 대접하였다. 1980년 나는 아이티 남쪽의 카유 근처에 있는 '나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르와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서약을 하기 위해서였다 1986년에 나는 입문했고, 101르와 기넨을 섬기던 내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게델리아 부인은 프랑스 왕실의 대성당 부근에 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돌로 된 집에 신자들을 데리고 있다. "이곳 프랑스에서 나는 광고를 내고 명함을 돌렸다. 그러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르티니크 사람들, 과달루페 사람들, 기아나 사람들, 그리고 프랑스 백인들도 찾아왔다. 나는 아이티인들을 많이 받지는 않는다. 그들도 오기는 하지만 수가 많지는 않다. 나는 그들의 일을 찾아 주고 애인을 만나게 해준다. 만일 그들이 너무도 불행하다면 저주를 없애 주고, 미래를 알아봐 주기 위해 '행운의 목욕'을 시켜 주기도 한다. 또한 강한 향을 내는 향료들도 준비한다."

아이티인 친구들은 일상적인 손님과 섞여서 가정의 르와들을 경배하기 위해 '케 봉헌식'이라는 규모가 큰 연중 의례에 참석한다. 이때도 외국이라는 상황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내 사원에 있는 모든 것들, 나의 이정표, 오군의 '아셍(assein)', 나의 십자가 바롱, 포 테, 이 모든 것을 입문한 후 아이티에서 가져왔다. 아이티에서 가져온 흙 역시 내 이정표를 넣은 이 조그만 언덕을 만들기 위하여 이곳의 흙과 섞어야만 했다. 내 여행가방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나에게는 포토 미탕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오군의 불 목욕을 위해 양탄자에 불을 붙여야 했다! 이곳에서 찾을 수 없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 고국에 갈 때마다 그것을 말려서 가져왔다.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할 때 그곳에 있다."

유배지에서 부두교의 정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 "신비로운 이들은 우리가 고향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라고 게델리아 부인은 조용히 말한다.

릴라 데키롱

* 어제, 오늘, 가족 혹은 왕족: 고대 다호메이의 부두교

1962년 4월 29일 국회의장과 대법원장이 이끄는 다호메이의 의회 대표단이 알라다에서 모든 분양의 공동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바 다호메이와 무아엥 다호메이에 있는 1, 832명의 제사장들을 만났다. 무엇이 당국측의 근심과 의문 그리고 찬사로 이루어진 의견을 정당화 해 주는가? 오노라아게시는 과거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현 기니만에 있던 고대 다호메이에서, 각 가정과 가문 그리고 지역마다 있던 보둔의 존재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그는 또한 모든 사회 계층마다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의례를 치르는 장소나 사원들이 그처럼 많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각 가정처럼 왕가도 그의 보둔을 가지고 있었다. 각 가문은 '톡쉬오(Toxwio)'-시조-라 불리는 '보둔'의 고유한 발현 형태와 호칭을 가지고 있는데, '톡쉬오'에 '아이잔'이 덧붙여진다. '톡쉬오'는 어떤 의미에서 가문이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 그는 가문에서 인정되고 알아볼 수 있는 시조의 기억을 표상한다. 이것은 사회 내에서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 시조와 발기인을 신성화하는 정신상태를 반영한다.

... 여러 가문에 관련된 보둔 이외에도 그 사회의 최후 한계, 혹은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고찰할 수 있는 사회 전체의 공통 보둔이 존재한다. 따라서 하늘의 판테온, 땅의 판테온 혹은 물의 판테온으로 분류되는 수많은 보둔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임무는 사회 생활에 관계되는 모든 자연, 사회, 도덕적 영역에 걸친다...가족의 보둔과 동일시되는 공통 보둔은 종교 영역의 풍부함을 파악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사회의 공통적인 갈망과 관심을 기록할 뿐 아니라,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운명과 개인적 결함을 알고 가족의 종교적 원형을 완성시킬 수 있는지 보여 준다.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은 '파(Fa)'를 이용하여,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을 고려하여 그의 결함을 없앨 해결책을 찾아 줄 수 있는 보둔의 신봉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가족의 보둔에 공공의(지방의 혹은 국가의) 보둔이 첨가된다.

공공 보둔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점차적인 획득, 동맹, 매입, 전쟁들에서 유래한다. 왕은 그가 전쟁터에서 만나는 보둔들을 원정군에게 데려오도록 하는 데 상당한 집착을 보였다. 왕은 보둔을 제사장과 모든 집단과 함께 데리고 왔다. 다호메이의 왕이 집착하는 전리품 중 하나가 보둔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전쟁을 통해 의식이 보급되고 혼합될 수 있었다. 이웃에서 매입된 대부분의 보둔은 파의 지령이나 명령을 따랐다. 혼지와 벌인 전쟁 중 왕이 군대의 많은 목숨을 앗아간 천연두를 저지하기 위해 아그보메에 도입된 사크파타가 바로 이러한 예이다.

왕은 특히 왕가의 수도인 아보메이에서 획득한 여러 보둔에게 보충 임무를 지정해 주면서 그들을 화합시키고 위계를 잡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종교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수도가 왕가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안전과 보호를 책임지고 있는 듯, 수도의 보둔은 지방의 보둔보다 수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지방의 보둔 역시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 게조왕이 다스리던 시절(1818-1858)에는 왕이 책임자 아틴데우를 통해 가문의 보둔들을 재정비하려했었다...

왕이 정한 의전서에 따라 공식적인 행사를치르던 다른 지방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왕가의 감시하에서 이뤄진 사회화의 단면일 뿐이다.

오노레아게시 <아프리카의 종교와 역학 관계> 1985년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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