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정치참여
모든 것은 하나님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유지되고,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국가와 정치가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와 정치가 동일한 것은 아니나, 모든 국가는 구체적인 임무수행은 정치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관심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함축한다.
그 동안 개인의 권리가 상당할 정도로 신장되고 보호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국가는 시민들에게 처벌이란 이름으로 물리적 폭력을 가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만이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의 삶에 경제가 미치는 힘이 막대한 오늘의 상황에서 국가는 개인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내 보낼 수 있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시민들의 생존과 복지를 위하여 불가피한 대가라 할 수 있지만 강제력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국가가 그 엄청남 권한을 어떻게 행사 하는가에 따라 수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이 거의 절대적으로 결정된다. 국가의 그 큰 권한이 올바로 사용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면 정치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 주권 밖에 있을 수 없다.
정치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다른 어떤 힘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겉으로는 온갖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가장 깊은 기저에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정치에 참여한다. 그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도 속이지만 자신들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 즉 자신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잡고 국민들에게 올바로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 한 몸을 내 던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도 실재로는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렇게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철저하고 냉정한 자기 검정과 그 순수성에 대한 신앙 공동체의 인정이 필요하다.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정치하는 과정에서 그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를 갖는 것보다 더 어렵다. 권력의 맛을 한 번 보면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할 유혹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올바르지 못한 수단을 사용할 유혹을 계속 받기 때문이다. "모든 힘은 부패하고, 절대적인 힘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역사가 액튼-"
동기나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정당이 정치에 참여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야 정치에 참여한 목적이 이루어진다. 한국의 경우 이제까지 스스로 기독교임을 밝힌 정치가가 그의 정치활동 때문에 국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경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많은 경우 기독교인이 정치활동하는 것이 교회에 이익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재앙으로 나타났다.
2) 인간의 전적부패와 정치참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국가니, 법이니, 정치니, 윤리니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이며,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치거나 빼았으며,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와 명예를 짓밟는다. 호브스(Thomas Hobbes)의 표현처럼 "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 이며,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전쟁한다." 이런 약육강식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이 항상 이기적인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항상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가끔은 선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런 성선설을 전제로 한 모든 정책은 실패하고 만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유재산 제도만 없애면 모든 인간이 천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란 원칙적으로 이기적이란 것을 전제로 한 자본주의 제도는 그런대로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
인간의 악은 힘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를 당하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 즉 약자일 수 밖에 없다. 강자가 해를 당하는 법은 없다. 약자란 아예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를 당하는 사람이 바로 약자라 할 수 있다. 강자가 해를 보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것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다.
바로 여기에 정의의 문제가 생겨난다. 하나님께서 지상의 통치자들을 임명하신 목적의 하나가 정의며, 정의란 강자의 폭력과 비행으로부터 무죄한 약자를 보호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정의란 무죄한 자를 숨겨주고, 감싸 안으며, 보호하고 옹호하고 석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란 경건치 못한 자의 만용에 대항하고 그들의 폭력행사를 제어하며, 그들의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다.- 존 칼빈- "
정당하게 해를 보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피해라 할 수 없다. 잘못이 없는데도 벌을 받거나, 잘못에 비해서 지나친 벌을 받으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다. 국가는 그런 억울함을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치안관들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은 여러분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롬13:1~4, 새번역)"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고,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도 사회정의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정도는 그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국가와 정치가가 그 권력을 오용하면 그것이 가하는 해악은 개인 시민이 가할 수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적 권력은 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도덕성이 확보 되어야 올바르게 행사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남용할 유혹은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인 정치인은 찾기가 쉽지 않다.
"정치와 윤리"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정치에서 쓰이는 언어란 거짓말을 참말인 것처럼, 살인을 존경스러운 것처럼, 허풍을 확실한 것처럼 들리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 -소설가 오웰- ",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직한 도둑을 기대할 수 없는 것 같이 민주주의에서 좋은 정치인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 미국의 논객 멘켄(Mencken)-" 정치가가 윤리적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시민의 사악함을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와 정치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보다 훨씬 더 사악할 수 있는 국가와 정치인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또 필요하다. 국가가 어떤 형태의 정부를 갖는가는 이때문에 중요하며, 칼빈은 정부의 형태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국가의 권력이 한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으면 부패할 확률이 매우 크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그것이 가진 여러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선호하는 것은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의견은 소수 전문가들의 의견에 비해 매우 어리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그것만이 정치적 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분립, 주기적인 선거, 정권교체 등을 통하여 권력이 계속 감시를 받아야 부패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제도를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인간의 전적부패란 개혁주의 인간관이라할 수 있다.
기독교가 정치에 참여 한다면 그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민주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보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올바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에서만 사회의 정의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고 신앙의 자유가 보호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치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므로 기독교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 정의 구현,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할 수있는 것과 정치에 참여해서 그 참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은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기독교 정치가가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려면, 정치적 능력과 신앙적, 도덕적 자질을 다 같이 갖추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철저한 신앙적 인격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면 기독교 정치인이라 할 수 없고, 아무리 훌륭한 신앙과 도덕적 인격을 갖추었어도 정치적 능력이 없으면 정치인이라 할 수 없다. 불행하게 한국 교회는 그런 정치인을 양성하지 못했다.
시민운동은 아주 훌륭한 민주주의적 정치 참여다. 법적인 권리를 행사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기독교 정치 참여에 가장 적합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기독교 정치는 스스로를 낮추고 희생하여 국민을 섬기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아야 한다. 권력을 향유하고 행사하는 현실정치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에 가장 적합한 정치활동이라 할 수 없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 평화의 유지와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면 이에 어긋나는 국가의 모든 제도, 정책, 법집행을 감시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는 것은 훌륭한 정치 참여가 아닐 수 없다.
개혁주의가 정치참여를 인정한다 하여 교회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지만, 종교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국가가 교회의 정치나 예배의식, 교리 같은 문제에 간섭할 수 없는 것 처럼 교회도 국가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치에는 동기만 훌륭해서는 안된다 정치적 행위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정치참여는 종교 기관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신자 개인과 정당이나 시민단체처럼 신자들의 공동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기독교"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도 극히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참고 도서 :
손봉호 교수, "칼빈과 사회 -개혁주의 교회와 정치참여-", 개혁주의 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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