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 (이길상)

수호천사1 2011. 10. 3. 11:32

이슬람교의 성립과 이슬람 제국

 

이길상

 

 

가. 이슬람교

 

(1)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

 

오늘날까지 이른바 세계적인 종교로 군림하고 있는 3대 종교, 즉 기독교(유대교를 포함한), 불교, 이슬람교의 발상지를 보면, 북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를 제외한 두 가지 종교가 모두 서아시아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파 지역을 따라 가 보면, 페쇄적인 유일신앙의 유다교는 이민족에게 침투되지 못하여 자기 들 만의 민족신앙으로 굳어졌고, 보편성을 강조한 기독교는 출생지에서는 빛을 잃고 유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며, 불교 역시 출생지에서는 흔적도 없이 쫓겨났으나,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어 교세를 넓혔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출생지에서부터 전파지역까지 시종일관 교세를 넓혀온 저력을 지니고 있다.

 

다시 이슬람의 전파지역을 따라 가보면, 아리비아에서 출발하여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의 순(順)으로 이슬람화 시키고, 이어서 북아프리카의 사막지대를 따라 서진하여 이곳의 베르베르족(백인 유목민의 총칭)과 70여년간 투쟁 끝에 이들을 복속시키고, 다시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상륙하여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711) 그곳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다시 피레네산맥을 넘어 갈리아지방 까지 들어가 교회와 수도원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쫓겨나고, 아프리카 북부에서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 나이지리아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 지역의 자연적인 공통점은 위도상으로 적도에 가깝고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에 해당하며, 주민들의 생업은 유목(遊牧)과 대상(隊商)을 포함한 목축과 상업이고, 농경은 오아시스를 중심한 일부지역에서 제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곳이다.

 

이래서 유럽인들은 이들을 사라센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슬람의 서진은 정통칼리프시대 때부터 시작되며, 한편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유목지대를 거치면서 돌궐(투르크)과 위구르족을 이슬람화 시키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이어 지는데 이곳 역시 사막이거나 반사막화 지대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러다가 15세기 까지는 다시 동진하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까지 세력을 넓혀 갔다. 이 이슬람교의 서진(西進)은 우마이야왕조 때, 동진(東進)은 아바스왕조 때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주된 전파지역은 사막이거나 사막화 지대이고, 여기에서 생활하는 유목민 사회가 일차적으로 이슬람화 되었다. 유목민 사회란 대개는 부족단위로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의 생활을 하거나, 낙타에 짐을 싣고 대상(隊商)을 이루어 이익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도는 유랑집단 이다.

 

이런 상황에게 국가적인 치안이란 있을 수도 기대 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강자가 약자의 것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잠시라도 경계의 긴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부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부족마다의 수호신을 받들고 심리적인 불안은 수호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간에도 뺐고 빼앗기는 악순환이 진저리가 나지만, 그러나 그것을 막을 방법이란 어떤 형태든 하나의 단일 사회로 통합하지 않고는 불가능했고, 이러한 단일 사회로 통합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이슬람교이고 이 엄청난 과업을 수행한 것이 예언자라고 부르는 마호메트였다.

 

따라서 이슬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종교적인 인식이나 생각과는 달리, 단순한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개인생활에서부터 국가 문제에 이르기 까지 인간이 인간답게 평화적으로 사는 방법과,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문제에 이르기 까지 안내의 구실을 하는 규범이고 도덕이며, 법이기도 하다.

 

그들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을 모시고, 그 신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안 이상, 그 신의 말씀(법)에 복종하기로 서로가 약속하고, 그 약속은 신의 이름으로 철저히 지켜져야 서로간의 이익으로 되 돌아 오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은 종교와 세속 쌍방에 걸쳐 합일된 생활방식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이슬람교

 

이슬람의 뜻은“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歸依)”라는 것이라고 하며, 그 알라의 가르침은 모두 천사(天使) 카브리엘을 통하여 아랍어(아라비아어)로 계시되었고 마호메트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여 아랍권을 이루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슬람교도는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 씩 아랍어로 된 신앙고백을 해야 되는데 그 내용은 매우 간략하여 처음에는“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라고 하다가, 후에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우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고 그것은 나태(懶怠)하기 쉬운 인간의 속성을 신의 이름으로 묶어두자는 것이기도 하다.

 

신을 믿는데 조건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신이 시키는 데로 따라야 되는데, 그것은 최후의 심판 날과, 천사들과, 코란과,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이러한,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하며, 이러한 믿음을 실천하고 알라에 귀의하기 위해서는 알라 이외에 아무 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희사(喜捨)·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이슬람"이라고 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모슬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슬람교의 역사는 6~7세기경 아랍에 살고 있었던 마호메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슬람교인들은 주장한다.

 

"태초에 하나님이..."으로부터 창세기가 시작되고, 코란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아가 아니라 알라라고 쓰고 있다는 것이고, 알라에 대한 학문적 해석도 단일신을 의미하며 유일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랍어에서 알은 관사에 불과하고 라는 유일신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절대불변의 경전인 코란은 마호메트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유일신 알라가 마호메트에게 계시한 말을 사도로서 읽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구원의 빛을 주기 위해서 구세주로 왔다면 알라는 그의 사도인 마호메트를 통해서 인간의 법을 내렸고, 마호메트가 읽었던 코란은 알라의 말씀으로 신성시되지만, 예언자 자신은 같은 인간일 따름이고 신은 아니며, 신의 사도로서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여러 가지 의무를 부과하여 베드윈(사막의 사람들) 사회를 통합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중세로 이관되는 시대 상황이 종전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의 재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세 유럽에서 페데의 폐단을 버리고 도시전체가 나아가서는 유럽전체가 집단 페데를 택하여 외부세계로 진출한 것과 같이 이 사막의 베드윈 사회도 개인간 부족간의 폭력을 배제하고 이슬람이라는 교단조직하에 하나가 되어 외부 세계로의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이슬람교의 신앙

 

이슬람 신앙은 모두가 코란에 근거하는데, 크게 지(知), 언(言), 행(行)의 세가지로 요약된다. 지(知)는 알라의 계시(啓示)를 잘 아는 것이고, 언(言)은 마음으로 알고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며, 행(行)은 이슬람교도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 즉 행동을 말한다.

 

이 행(行)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다섯 개의 기둥 즉 오주(五柱)라 하고, 이 오주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근행(勤行 : 이바다트)이라고 하며,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만을 중요한 근행으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첫째 샤하다(증언, 고백)라고 하는 것으로“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신도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것을 입으로 외워야 한다.

 

둘 째, 살라트(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메카를 향해서 하는데 그 시각은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하며,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이슬람교 사원)에서 집단예배를 한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를 "두아"라고 부른다.

 

셋 째, 자카트(희사:喜捨)는 신자로서 교단에 바치는 종교세(?)로서,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데 필요 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넷 째, 샤움(단식)은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한 달동안(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해야 된다. 한 달 간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다섯 째, 하주(순례)는 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고,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

 

메카 다음 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도 많다.

 

(4) 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 세계가 아라비아반도를 벗어나 많은 지역으로 전파함에 따라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게 되었고, 이들 이민족은 각각의 관습과 전통이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이슬람사회가 복잡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슬람의 종교법(샤리아)으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샤리아라고 부르는 이 종교법의 근간은 코란과 하디스(Hadith)인데, 코란은 알라의 가르침을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달된 이슬람교의 경전이고, 하디스(Hadith)는 마호메트의 언행(言行:수나)이 그의 사후(死後) 여러 형태의 이야기로 전해오던 전승(傳承)을 말한다.

 

이슬람교의 유일한 경전은 코란이지만, 코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호메트의 언행(수나)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이슬람법(샤리아)도 코란을 기초로 하지만, 코란에 언급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자연적으로 수나를 기초로 했다.

 

이것이 이슬람세계의 신학과 법학의 출발이다. 그런데 전승된 이야기라는 게 일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들었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와전된 것이 많기 때문에, 각자의 유리한 입장에서 해석하다보니 그 전말(顚末)에 모순성이 들어 나게 되었고, 이래서 8세기 중엽 이후는 학자 사이에 하디스 비판이 일고, 그 진짜와 가짜(眞僞)를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이래서 이른바 하디스학(學)이라는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 진위를 가리는 방법으로, 하디스의 내용과 전승자의 계보(系譜)를 추적하는 두 방향에서 실시하여 모든 하디스는 전승자를 명기하도록 하였고, 이것이 9세기 중엽에 와서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는데, 이래서 편찬된 하디스집(集)을 육서(六書) 또는 6전승집이라 하며, 모두 사히흐집(集) 2권과 수난(Su-nan)의 서(書) 45권으로 되어 있다.

 

무릇, 무슬림이 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되고, 인간의 행위는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있는데,

① 어떤 일을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어떤 일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어떤 일을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어떤 일을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어떤 일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 등이 있는데 이를 하람(Haram:이슬람법 용어)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된다고 하며, 메카의 순례는 하람②, 코란의 독송은 하람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변칙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고 중세 이래 모스크(이슬람 교회)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세습 칼리프 - 우마이야 왕조(661 ~ 750)

 

(1) 무야위야의 세습칼리프 만들기

 

시핀의 전투에서 4대 정통칼리프 알리와 타협하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돌아온 무야위야는 스스로 칼리프에 취임했다가(660), 이듬해 알리가 암살당하고, 알리의 큰 아들 알 핫산이 칼리프로 추대되자 알 핫산을 많은 연금을 주어 메디나로 은퇴시키고 정식으로 칼리프가 되었다(661)

 

그의 세력기반은 오랫동안 시리아의 총독을 하였기 때문에 시리아 지방이고 따라서 칼리프의 취임식은 예루살렘에서 했으나, 수부(首府)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정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세습왕조를 열었다.

 

이 시대 이슬람의 주요 지역은 아라비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 이였는데 원래 이란과 이라크는 페르시아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이고,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곳으로 두 지역의 문화적인 차이는 매우 컸었다.

 

따라서 무야위야의 다마스쿠스정권은 시리아 주민들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라크의 바스라(Basra)와 쿠파(Kufa) 두 도시는 이 새로운 칼리프에 대해서 반항적이었으며, 특히 쿠파는 알리의 편이되어 무야위야와 싸운 사람들의 본거지고, 아직도 알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무야위가가 통치에 가장 고심한 것은 이라크의 지배였다.

 

더구나 바스라와 쿠파는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쿠스처럼 전통있는 도시가 아니고, 이슬람의 성전(聖戰)을 위한 군사기지로 새로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 신흥도시에는 힘과 고집이 센 아랍인들이 칼을 차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대낮에도 강도와 살인 등을 자행하여 공포와 암흑의 무법지대가 되어 있었다.

 

이 때 이 지방을 다스리던 사람은 우마위야 집안의 이븐 아미르(Ibn Amir)였는데, 그는 온건하여 이슬람의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형법에는 도둑질을 하면 그 손을 자르고, 그래도 다시 도둑질을 하면 발을 자르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미르는 매우 인정 많은 사람으로서, 그는 도둑이라 해서 사람의 손발을 자르면 그 부모들로부터 원망을 듣는다 하여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능한 관료의 표본이 되어 쫓겨 났다고 하는데, 인정과 통치를 구분하지 못하면 유능한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통해서 같은 이치었던 것이다.

 

이에 무아위야는 정통 칼리프 우마르 때부터 활약한 지야드를 이 두 곳의 지사로 임명하여 치안에 힘쓰자 바스라는 일약 이슬람의 문화도시가 되어 수많은 학자와 문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유능한 관리였던 지야드는 사생아(私生兒)였으나,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 이라크가 그런데로 정돈되자 칼리프 무아위야는 지금까지의 전통을 깨고 칼리프의 자리를 그의 맏아들 야지드 1세(Yazid 1 : 680 ~ 684)에게 세습하기 위한 공작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가 처음 단행한 것은 예언자의 무덤이 있고, 학식있는 사람들이 많은 메디나 시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종제(從弟) 마르완 1세(Marwan 1 : 후에 4대 칼리프가 됨)가 메디나의 장관으로 있는 것을 기화로 해서 자신이 직접 메디나를 방문, 그의 아들을 다음 칼리프로 앉히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그 반대가 너무나 심했으므로, 일단 다마스쿠스로 돌아와 각주의 장관들을 차례로 매수하여 메디나를 고립시킨 후 1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메디나로 들어가 반대자들을 위협하여 동의를 얻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를 잇게 되어 세습제가 성립되었다(680)

 

야지드의 모후 마이슨은 시리아지방의 팔미라를 근거지로 살고 있었던 유력한 유목민 카르부족 출신이 였는데, 황막(荒漠)한 사막에서 성장한 그녀는 사막에 대한 미련과 야성(野性)을 버리지 못하여 아들 야지드 1세를 데리고 다마스쿠스의 궁전을 떠나 모래 먼지 이는 사막을 돌아다니며 유목의 생활했다.

 

따라서 야지드1세는 전형적인 바다위(베드윈:Badawin)로 자랐고, 이런 교육의 영향은 칼리프가 되었을 때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치세기간은 4년에 불과했으나 그 행적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의 두 가지로 나타나 시리아나 비잔틴제국에서는 유능한 군주로 평가되었으나, 이슬람세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2) 알 후사인의 죽음과 성지 카라바라

 

그가 극악무도(極惡無道)한 폭군으로 기록된 것은 예언자의 외손자이며, 예언자의 신성한 혈통을 이은 알리의 둘 째 아들 알 후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이슬람의 성전(聖殿)인 메카의 카바신전을 파괴했다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자초지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자 메디나의 반대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곳의 지사에게 콩알만한 크기의 밀서를 보내어 반대자들에게 충성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지사는 알 후사인을 비롯해서 반대파를 체포하려 하자 후사인은 알 주바르의 아들 압둘라와 함께 메카로 도망했고, 이 사실이 이라크의 쿠파시민들에게 알려지자, 쿠파시민들은 알 후사인을 칼리프로 세우고 야지드에 대항할 것을 맹세하는 집단이 나타났다.

 

이에 알 후사인은 뜻있는 사람들의 충고를 물리치고, 200 여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를 떠나 쿠파로 갔는데, 당시 쿠파의 지사는 앞서 얘기한 유능한 관료였던 지야드의 아들이 맞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소굴로 스스로 찾아가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쿠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쿠파 북방의 유프라테스강변의 카라바라 들판에서 시리아군이 주축이 된 칼리프 야지드1세의 군에게 포위되었다가 양 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알 후사인 일행은 모조리 도륙(屠戮)되었고, 다행이 그의 어린 아들 알리와 두 딸은 생명을 보존하여 메디나로 돌아 갔다.

 

메디나로 무사히 돌아온 이 어린 알리의 어머니는 사산조 최후의 왕인 아즈디기르드의 딸이 였기 때문에 이란의 혈통을 잇고 있었고, 후세에 이란 사람들이 이 알리의 직계를 진짜 이맘(칼리프 혹은 교주)으로 생각하여 시아파(이슬람의 분파)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을 칼리프로 추대할 때, 페르시아의 왕통을 이었다 해서 한층 친근감을 느꼈다.

 

이 카르바라의 참극은 오랜 기간 시아파(Shiites) 이슬람교도의 통한사(痛恨史)가 되어, 지금도 매년 10월의 첫 열흘 동안 알 후사인을 추도하는 제사를 지내며, 카르바라는 시아파의 성지(聖地)가 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후계자(대행자)를 의미하는 여러 칼리프들이, 예언자의 언행(수나)을 따른다 하여 수니파라고 하는데 반하여, 이에 대항하여 분파의 의미를 갖는 것을 시아파라고 하고, 그 중심이 된 것은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후손들이 정당한 칼리프의 계승 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서, 그 숫자는 전체 이슬람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하나 그 본거지가 이란이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1980년부터 시작하여 8년 간의 지루한 이란-이라크의 전쟁의 원인도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에서 찾기도 했다.

 

(3) 카바신전의 파괴

 

알 후사인이 순난을 당하자, 메카에 있던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에게 칼리프가 될 기회가 주어졌는데, 압둘라의 아버지 알 주바이르는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을 때 반대의 선봉이 되었던 사람으로서 낙타전쟁 때 사망하였고, 그의 아내는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딸로서, 예언자의 애처(愛妻) 아이샤의 배다른 언니 이스마 였다. 예언자가 메카의 박해를 피해 아부 쿠바이스산 동굴에 숨어 지낼 때 허리끈으로 음식을 매달아 동굴 속에 넣어준 그 사람이다. 우리식으로 촌수를 따지면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는 아이샤의 생질(甥姪)이 되며, 알 주바이르와 예언자는 동서(同壻)간이 된다.

 

그러면 예언자의 종제(從弟)이자 사위인 알리와 알 주바이르와는 어떻게 되는가? 동서의 사촌동생, 아니면 동서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이며 모계와 부계를 따지지 않는 이슬람의 풍속으로 우리들과 같은 촌수(寸數) 찾기란 참으로 어렵다. 마호메트건 알리건 알 주바이르건 모두 코레이시족의 하심가 출신이기 때문에 모두가 가까운 친척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메디나에서는 이변이 일어나 다마스쿠스의 칼리프 야지드 1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야지드1세의 출신 집안인 우마이야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682) 이에 1천명에 달하는 우마이야집안 사람들은 사태가 급박해 지자 마르완을 사자로 다마스쿠스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야지드 1세에게 알렸다.

 

이에 야지드 1세는 시리아출신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메디나 정벌에 나섰다.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시리아는 로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곳으로 문화적인 인식이 메카나 메디나와는 달라서 무차별 메디나를 공격하였다. 이에 압둘라는 메디나를 벗어나 메카로 들어 갔는데 설마 성지인 메카야 공격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시리아군은 메카의 외각에 진을 치고, 노포(弩砲)를 사정없이 퍼부어 드디어 카바신전이 불타버렸다(683. 10. 31) 그리고 나서 27일 후 야지드 1세가 급사했고, 이 부고에 접한 시리아군은 서둘러 철수하였는데, 이에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는 칼리프로 추대되었고 그의 세력은 시리아를 공격할 만큼 강대해 져서, 우마이야왕조로서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우마이야왕조에서는 야지드의 아들이 칼리프가 되었으나 취임 3개월만에 병사하자 수도 다마스쿠스 조차 반란의 무리들에게 지배당하는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우마이야왕조를 재건한 것은 마르완이다.

 

(4) 칼리프 마리완과 그의 가계(家系)

 

우마이야왕조의 4대 칼리프로 취임한(684) 마르완은 수도 다마스쿠스를 회복하고 우마이야왕조를 재건하여, 무야위야에 의해서 수립된 아부 수피얀계의 칼리프는 막을 내리고 이 후 그의 자손들에 의해서 우마이야왕조가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칼리프가 된지 1년도 못되어 급사하였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압둘 말리크(Abd-al Malik 685 ~ 705)가 이 왕조의 5대 칼리프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영명의 군주로서 알 핫자이자와 이븐 유수프 같은 현신을 등용하여 우마이야왕조의 중흥(中興)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타이프의 사키프족 출신의 핫자이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그의 아버지와 함께 흙 파기 돌 나르기 등의 노예노동과 글방 선생을 했다는 것이다.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지금은 비록 격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식자로서, 혹은 자녀의 스승으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이 시기의 이곳에서는 노예나 몰락한 사람들이 하는 천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글방 선생을 골 빈 양에 비유하기도 했고, 또 세상에는 무지(無智)한 계급 세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물레 장이 한 여인의 지혜는 70명의 방적 공의 그것과 맞먹고, 한 방적 공의 지혜는 70명의 글방선생의 지혜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형편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전통의 영향인지 지금도 이들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의외로 문맹자가 많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고, 물건을 사고 고액권으로 대금을 지불하고 거스름 돈을 받아 보면, 곱셈은 고사하고 뺄셈도 하지 못하여 모든 것을 덧셈만으로 계산하는 이상한(?) 광경을 자주 불 수 있다. 이런 것은 자동계산대가 없는 유럽의 시골지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 현지의 안내자들은 열심히 설명하나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핫자이자라는 사람은 당시 이슬람세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식자(識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으나, 그는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 칼리프에게 개 같은 충성을 바쳤던 것이다. 마르완이 일찍 병사하자 그의 아들 압둘 말리크에게 발탁되어, 칼리프의 권세를 업고 이라크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이렇게 해서 이라크가 안정을 찾게 되자 메카를 근거로 하여 칼리프를 칭하고 있었던 압둘라 이븐 알 주바이르(Abdullah ibn al-Zubayr)와 결판을 내기 위하여 원정하였을 때는 그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아랍권에서 인명에 붙이는 "이븐"은 아무개 혹은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전에 밝힌 것과 같다. 즉 "이븐 알 주바이르"라고 하면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아무개가 되고, "압둘라 이븐 알 주바이르"라고 하면 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의 뜻이라고 한다.

 

시리아군이 주축을 이룬 핫자이자가 이끈 원정군은 메카를 포위하여 카바신전을 중심으로 양측이 결전을 벌여 드디어 메카가 정복되고, 이로써 아라비아가 재통일 되었다(692. 10) 그 후 핫자이자는 이라크의 총독이 되어 이 지방은 다스리게 되었는데, 당시 이라크의 총독은 이라크 뿐만 아니라 옛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중요한 자리였으며, 특히 이란은 문화적으로 아라비아에 앞서 있기 때문에 아직도 칼리프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에 핫자이자는 총독이 되어 그의 철화(鐵火)같은 모진 정치가 이라크 이동(以東)의 천지를 덮어, 연일 피의 비가 쏟아졌고 벌판은 사람의 해골과 뼈다귀로 가득 찼다.

 

이러한 그의 20년간 동방통치는 그가 죽음으로서 끝났는데(714. 6), 그의 부보(訃報)를 접한 이라크를 비롯한 방방곡곡에서는 감사의 기도소리가 진동하였다. 그가 악한 총독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마이야왕조의 골칫거리를 해결하고 왕조를 재건하는 악역을 맡았던 훌륭한 관료였다고 후세의 사가는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핫자이자가 활약한 이 시기, 즉 5대 칼리프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 6대 칼리프 왈리드 1세(705 ~ 715) 때가 우마이야왕조의 전성기로서,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복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지브로울트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로 들어가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711)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침범, 궁재 샤를 마르텔에게 패하여(732), 유럽지배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문화를 전파시켰고, 한편 메카의 카바신전을 재건하고(692), 이어서 알라도 크리스트와 같이 훌륭한 신전(神殿)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메디나,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카이로 등지에 비잔틴의 장인(匠人)들을 불러 들여 장엄하고 아름다운 모스크(이슬람의 사원)를 세웠다.

 

왈리드 1세 때부터 칼리프는 아라비아의 족장풍에서 벗어나 제왕(帝王)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우리들이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비슷한 이름을 가진 칼리프가 7명이 더 있다.

 

그러나 시리아를 거점으로 했던 흰색 깃발의 우마이야왕조는, 호라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이란계와 결탁한 아바스왕조의 검은 색 깃발에게 왕조의 자리를 일단 물려주었고, 그 후손들은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후 우마이야왕조를 건설하게 되었다.

 

다. 아바스왕조(Abbasid dynasty)의 성립과 이슬람 세계의 분열

 

(1) 아바스왕조(750 ~ 1258)의 성립

 

아바스왕조를 일으킨 아부 알아바스 앗사파흐(Abu al-Abbas as-Saffah :722~754)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숙부 아바스의 증손에 해당한다.

 

747년 호라산에서 우마이야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아부 무슬림(Abu Muslim)의 지휘를 받으며 쿠파를 점령하고, 749년 이곳의 칼리프 자리에 영입되었다가,

 

750년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인 마르완 2세의 대군을 상(上)사브 하반에서 격파하고 결정적 승리를 거둔 다음, 우마이야족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여 ‘무자비한 유혈자(流血者)’라는 악명을 얻었으나, 아바스왕조를 창건하여 이 후 이슬람세계를 지배하는 아바스왕조의 창업주가되었다.

 

우마이야(옴미아드)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750년에서 1258년 까지,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였다고는 하나, 아바스가(家)의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권력자로서 군림한 것은 945년까지이고, 그 이후는 정치상의 실권이 거의 없었다가, 몽골에게 멸망되었다.

 

아바스왕조 창업의 최대 공신인 아부 무술림은 그의 이름에서 보이듯이 출신과 성분이 뚜렷하지 않은 미천한 출신이라고 한다. 그가 이란의 동쪽 호라산(Khorasan)의 풍운아(風雲兒)로 등장하여 아바스왕조 창업의 최대 공신이 되었는데, 창업공신은 거기에서 만족해야 된다는 정치적인 논리는 이곳이라고 해서 다를 수는 없었든지 그 역시 압바스왕조의 2대 칼리프인 알 만수르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아바스왕조의 창업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마이야왕조를 창업한 무야위야는 메카의 유력한 코레이시족 출신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배경은 시리아였기 때문에, 아라비아를 비롯한 이란의 유력한 계층에서는 이 우마이야왕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시아파들은 예언자의 가계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래서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수니)를 따르고 그것을 정통의 칼리프라고 주장하는 수니파와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 시아파는 이란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란은 페르시아의 고토로서 문화적인 자부심도 대단하였고, 따라서 아라비아의 무식한 무슬렘에 대한 우월감도 가지고 있었다. 무야위야왕조 때 까지만 하여도 아랍족의 우위에서 여러 이민족을 지배하였고, 이민족이라 할지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동등한 대우를 하였다고 하나, 이들 개종자(改宗者)들을 마왈리(mayarli)라고 하여, 어떤 형태로든 차별하였다.

 

그러나 이 마왈리 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라비아의 부족으로 편입하여야 하였고, 이래서 아라비아의 부족들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띄었다. 이래서 아부 무술렘도 아라비아의 부족이 되었으나 그의 혈통에 대해서는 이란계라는 설도 있고 종교적으로 시아파 이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우마이야왕조 말기가 되면서 혼란을 거듭하자, 지금 까지 숨을 죽이고 숨어 살고 있던 아바스가계가 이슬람교단(敎團)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자는 ‘예언자(마호메트) 가족’ 출신자라야 된다는 사상이 차차 퍼져 있는 것을 이용하여, 그 가족의 일원에 속하는 아바스가는 우마이야(옴미아드)왕조 타도의 지하운동을 일으켰고, 747년 마침내 마르우에서 무장봉기하고, 749년에는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 이듬해 우마이야왕조 최후의 칼리프가 피살됨으로써 아바스조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750)

 

우마이야왕조 체제의 본질은 소수의 지배자인 아랍인이 피정복자인 이민족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었으나, 아바스왕조 밑에서는 아랍인의 특권적 지위는 상실되고 대신 비(非)아랍의 개종자가 국가의 요직에 등용되는 놀라운 변화를 초래하였고, 동시에 이들 비아라비아인들이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 층과 나란히 관리·상인·지주가 되어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이란계로서 옛 페르시아의 후손들이거나 그의 지배하에 있었던 가계의 후손들 이기에 이 아바스조의 이슬람세계는 사실상 이란인들의 주도하에 놓였었다고 볼 수 있다.

 

(2) 동서 칼리프의 등장과 이슬람의 분열

 

아바스왕조가 처음 단행한 것은 우마이야왕조의 가계(家系)를 색출(索出)하여 씨를 말리는 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슬람세계 곳곳을 이 잡듯이 우마이야가계의 사람들을 찾아 살육을 자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생명을 부지한 우마이야의 후손들이 멀리 도망하여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후우마이야왕조를 열게 되었고 이래서 이슬람 세계에는 두 개의 칼리프가 등장하여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후세에 이르러 편의상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를 동칼리프라하고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왕조를 서칼리프라고 한다. 서칼리프인 후우마이야왕조(Umayyad dynasty of Cordova : 756∼1031)는 아바스의 무차별 살육을 피해, 일족(一族)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에스파냐로 도망가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여 우마이야왕조를 다시 일으키고 베르베르인(人)과 슬라브인을 이용하여 토호(土豪)와 제후(諸侯)를 억누름으로써 우마이야가의 에스파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 후 이 왕조는 노르만의 침입을 격퇴하고 프랑크왕국의 압력을 봉쇄하면서 국세(國勢)를 확장하였으나, 무와라드(토착민의 이슬람교도)의 반란으로 시달렸고, 제8대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분열된 에스파냐를 다시 통일하고 칼리프의 존칭을 쓰며 레온, 카스티야 등의 그리스도교국(敎國)을 복종하게 하고, 코르도바대학을 설립하는 등 이 왕조의 황금시대를 실현하였다.

 

그가 죽은 후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무인재상(武人宰相) 만수르에 의해 통일이 유지되었다가, 만수르가 죽은 후 군소 군주의 난립시대로 들어가 1016년 이후 모로코의 함무드가(家)가 코르도바를 점령, 1031년 히샴 3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서칼리프라고 불리던 후우마이야왕조도 멸망하였다.

 

(3) 바그다드(Baghdad)의 번영

 

아바스왕조의 초대 칼리프였던 아불 아바스는 재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천연두(天然痘)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배다른 형제였던 아부 자파르가 2대 칼리프에 즉위하여 스스로를 알 만수르(알라의 도움을 받는 사람)라고 하였는데 그의 치세 20여년간(754 ~775) 왕조의 기초를 반석처럼 닦아 놓은 걸출의 군주였고, 이 후 아바스왕조의 35명의 칼리프가 모두 그의 직계자손이다. 아바스왕조 성립의 최대 공신 아부 무술렘을 비롯한 반대파를 제거하여 칼리프의 권위를 높였고, 하리지파를 비롯하여 라완드파 등의 이단(異端)파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소요(騷擾)를 일으켜 민심을 현혹시키자 이들을 소탕하여 안정을 찾게 될 때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만수르의 정치 요체는 스파이를 전국 요소에 파견하여, 이른바 정보정치를 함으로서 바그다드의 깊은 궁중에서도 전국을 내다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을 가졌다고 당시의 사람들은 이야기하였다.

 

한편 아바스왕조의 수도가 처음 쿠파에서 다시 쿠파의 북동쪽 하시미야로 옮겼는데, 다시 그곳이 정치적으로 시끄러워지자, 칼리프 만수르는 쿠파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 두강을 잇는 사라트운하가 있는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762)

 

4년여의 조영기간을 거쳐 완성된 것이 이른바 ‘만수르의 원형 도시’ 또는 ‘알마디나 알사리암(al-Madinah al-Saliam:평화의 도시)’이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바그다드다. 왕성(王城) 주위의 약 6.4 km, 성벽은 정원형(正圓形)의 삼중(三重) 성벽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 너비 20.27 m의 깊은 호(濠)를 둘렀고, 성벽에 4개의 문이 등거리로 배치되고, 성내에는 높이 약 36 m의 녹색 돔으로 덮인 왕궁과 예배당을 짓고 주위에 관청을 배치하였다.

 

일반시민은 왕성 바깥에 살았으나 점차 수크라고 부르는 상점가를 가진 번화한 시가지로 발전하였다. 군대의 절반을 강의 동안에 주둔시켰던 관계로 그 쪽에도 많은 인구가 모여 시가지가 발달하게 되고, 두 시가지는 3개의 주교(舟橋)와 다수의 나룻배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하며, 8세기 말~9세기경에는 당(唐)의 장안(長安),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 버금가는 세계 최대급의 대도시가 되어, 인구도 200만에 달하였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왕궁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호(濠)를 잇는 나무 다리를 지나 다섯 개의 궁성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이것은 아바스왕조가 사막풍이 짙은 우마이야왕조와는 달리 사산조 페르시아 풍(風)이 강하여, 칼리프는 신성시되고, 신으로 추앙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워 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다시 칼리프의 측근에는 하지브라는 시종(侍從)의 관료군이 있었고, 그 관료군 위에는 다시 와지르(Wazir)라는 일종의 재상(宰相)을 두었다. 이것은 메디나 시절에 좁은 예배당에서 칼리프가 일반인과 무릎이 맞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담소하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아바스왕조의 최대 전성기는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와 그의 아들 7대 칼리프 마문 시대(813 ~833)로서, 하룬 알라시드는 아라비안나이트에 그가 등장하는 것이 50 가지에 달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는 그를 명군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하룬 자신은 매우 고독한 군주로서 그의 재세기간 23년 동안, 17년간은 모후인 하이즈란과 바르마크가(家)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자신은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고 하니, 비록 시대와 지역은 달랐지만 그 처지가 중국의 남북조시대 북위의 효문제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고 보여진다.

 

모후인 하이즈란이 죽고 나서, 와지르(재상)로서 번영을 구가하여 칼리프의 세력을 능가했던 바르마크가를 타도하고, 칼리프의 권위를 다시 세운 하룬의 시대를 기억에서 새롭게 하는 것은 종이에 관한 것으로 이 때부터 정부문서가 종래의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바뀌게 되었다.

 

(4) 탈라스의 전투와 종이의 전파

 

종이는 중국에서 후한 중기 환관 채륜이 발명하여(105년경) 중국 등 주변에서는 널리 사용하고 있다가, 이 시기에 이슬람에 전해졌는데 그 전파 경위는, 당과 아바스왕조의 이슬람 사이에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탈라스(Talas)강변 싸움(751)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 당나라 장수는 고구려출신 고선지(高仙芝/?~755)였는데,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의 고창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將軍)에 올랐으며, 그 후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이슬람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다시 군사 1만을 인솔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이슬람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이슬람제국의 동진을 저지시켰으며,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이슬람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이슬람제국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 때는 이슬람제국도 우마이야왕조에서 아바스왕조로 바뀌었고, 이 탈라스 싸움에서 아랍군의 주축은 호라산군이 맡았다. 이들을 지휘한 것은 아바스왕조 건설의 일등공신인 호라산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아부 무술림의 부장(部將) 자아드 이븐 살리프였다고 한다.

 

고선지는 이를 막기 위해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나갔으나, 이 호라산군에게 크게 패하여, 7만의 군사 중 5만이 전사하고 2만이 포로가 되었으며, 고선지는 겨우 퇴로를 열고 후퇴하였다.

 

이를 탈라스 강변의 싸움(751)이라고 하는데, 이 때 붙잡힌 당군(唐軍)의 포로 가운데는 사마르칸드에 제지(製紙) 공장을 세우고 종이 만드는 법을 전했고, 794년에는 아바스조 최고가문인 바르마크家에서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종이를 생산, 정부의 공식문서도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후로부터 종이는 양피지(羊皮紙)와 파피루스의 대신으로 쓰였고,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반도로 들어 갔고, 거기서 다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5) 이슬람의 계몽(啓蒙)군주 7대 칼리프 마문

 

하룬 알라시드의 뒤를 이어 6대 칼리프로 즉위한 것은 그의 적자(嫡子) 아민(al-Amin)이 였는데 그의 모후 주바이다(Zubaydah)는 2대 칼리프 알 만수르의 손녀로서, 하룬 알라시드와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하룬에게는 이란계 노예와의 사이에서 아민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마문이 있었으나, 아민은 그 형을 제치고 6대 칼리프(809 ~ 813)가 되었다. 하룬 알라시드가 살아 있을 때, 이 두 형제간의 불화를 막기위해 이런 서약서를 작성하였다.

 

동생 아민이 칼리프가 되는 대신 그 후계자는 마문으로 할 것과, 제국 동반부의 통치를 형 마문에게 일임하라고 맹세시켰고, 형 마문에게는 동생 아민이 칼리프가 되었을 경우 충성을 다하라는 맹세를 시켰다는 것으로 그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칼리프가 된 아민은 그 후계자를 그의 아들 무사(Musa)로 바꾸자 형제간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칼리프인 동생 아민의 주력군은 아랍계였고, 형 무민의 주력군은 호라산을 근거로 한 이란계였기 때문에 싸움의 성격이 아랍과 이란의 싸움과 같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마문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아민은 살해되었으며, 마문이 7대 칼리프(813 ~ 833)가 되었으나 바그다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란계의 피를 받은 마문은, 압스스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교양이 높고,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칼리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시를 사랑했고, 그리스 철학이나 수학, 천문학, 의학에도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그리스 학술을 존중해서 그 문헌을 모으는데 힘 쓰고, 번역도 장려하여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을 세워 그리스 문헌 번역의 중심을 삼았으므로, 사방에서 이름 높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들 학자들에 의해서 경위도(經緯度)의 측정, 천체운행표 등이 만들어 졌는데, 당시에 계산한 지구상의 땅 면적의 수치는 지금의 계산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이 무렵 코란과 마호메트의 언행(순나 : Sunna)을 충실히 지키고, 이지(理智)의 자유스런 활동을 억제하는 경향이 강한 순니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전부가 알라신이 정한대로 되어갈 뿐이라고 주장했고, 또 코란은 옛부터 있어온 것으로서 알라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우마이야왕조 말경부터 무우타질라파(派)라는 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일파가 나타나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코란도 알라가 창조한 것이라 주장했는데, 학문을 좋아한 마문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지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 이 파의 사상에 동조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그가 칙령으로 코란창조설을 지지하고(827) 반대학설을 탄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6) 아바스왕조의 쇠퇴(衰頹)

 

학문적으로 우수한 업적을 남긴 마문은, 한편으로 아바스왕조의 검은 색 대신에, 알리 가문에 초록색 깃발을 세우고, 알리 가문의 정통을 이은 알리 알 리다를 후계자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바스의 집안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불평을 사게 되었고, 이것을 필두로 도처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서 타히르는 호라산을 중심으로 타히를 왕조(822~903)를 열었으며, 그 후에도 사파르왕조(867~930) 사만왕조(874~1005) 등 이란왕조가 잇달아 나타나 사실상 이란 이동은 실제적인 독립국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징후는 라시드의 두 아들을 지나 그의 손자 8대 칼리프 무타심(833~842)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정세를 바로잡기 위해서, 투르크 용병(傭兵)들을 군대의 지휘관으로까지 채용하면서부터 더욱 분란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즉, 투르크계 장군들은 칼리프를 괴뢰(傀儡)로 만들었고, 동시에 변경 제주(諸州)의 반(半)독립화를 획책하였으며, 이런 가운데 이라크에서는 흑인 농노 및 카르마트 교도의 반란이 일어나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제국의 치안은 그 후 안정을 되찾고 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시대를 맞이했는데, 궁정에 있어서의 사치와 지나치게 팽창한 관료기구, 군사비의 증대 등이 겹쳐 국가재정은 만성적인 적자(赤字)에 빠지고 10세기 전반에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936년에는 대 총독의 지위를 차지한 군사정권이 대두하여 칼리프는 정치적 실권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945년에 이르러서는 부와이왕조가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사실상 아바스왕조 국가는 붕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바스왕조는 이 시아파의 부와이왕조를 타도하기 위해서 셀주크 투르크를 바그다드에 불러 들였는데, 이로 인해서 부와이왕조는 타도하였으나 다시 셀주크 투르크에게 주도권을 내 주었고, 이후 13세기 초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칼리프는 종교상의 권위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1258년 바그다드가 몽골군에게 유린되면서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7) 투르크족의 이슬람화와 셀주크왕조(Seljuk)의 등장

 

중국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돌궐이 서진하여 이슬람세계로 들어가, 족장(族長) 셀주크가 같은 투르크계의 이슬람 국가 가즈니왕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호라산을 점유하여 지배권을 아제르바이잔·이라크·시리아·소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확대시킨 것을 셀주크왕조라고 한다.

 

물론 셀주크족의 본업도 유목이였고, 때로는 통상로를 장악하여 통행세를 징수하기도 하고, 주변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유목의 습성에 따라 여러곳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본가(本家)를 대(大)셀주크왕조(1037~1157)라고 하고, 분가(分家)는 각 소령(所領)에 따라 케르만 셀주크왕조(1041?~1187), 아나돌 셀주크왕조(1077~1307), 시리아 셀주크왕조(1094~1117), 이라크 셀주크왕조(1117?~94) 등으로 불렀다.

 

대(大)셀주크왕조의 건설자 토그릴베그(재위 1037~63)는 족장 셀주크의 손자라고 한다. 이란을 중심 지역으로 하여 테헤란 근처의 레이를 수도로 하였으며,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요청으로 바그다드에 들어가, 시아파(派)의 부와이왕조 세력을 일소하여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보호자로서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술탄이란 이슬람세계의 정치적 지배자를 가르키는 말로서,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의 우두머리라고 한다면 술탄은 단순히 정치적 지도자만을 의미했다. 제2대 알프 아르슬란과 제3대 말리크 샤의 치세가 황금시대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가장 번영하였다고 전한다.

 

융흥(隆興)이 빨랐듯이 쇠퇴와 멸망도 빨라서 수니파(派)에 반항하는 광신적인 암살교단의 공세와 왕족 사이의 격렬한 정쟁(政爭), 그리고 악역(惡疫)의 유행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결과 제8대 산자르시대에 대셀주크는 멸망하였고, 분가된 셀주크 중, 아나돌 셀주크왕조가 유럽 십자군(十字軍)과 대결하면서도 소아시아의 투르크화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이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에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있다가 14세기 초기에 멸망하였다. 우리들이 그 남아 셀주크에 대해서 기억에 남긴 것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기독교도의 성지순례를 방해했기 때문에 십자군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셀주크 문화는 이란의 옛 전통을 살리면서 그것을 이슬람적으로 꽃피운 수니 문화라 할 수 있고, 학술·예술면에서 볼 만한 것이 많으며, 학예진흥을 위한 메데레세(Mederese:學林)·종교희사재단(宗敎喜捨財團)·도서관 등이 개설되어 이슬람 세계의 저명한 학자가 초청되었으며, 또한 구빈시설(救貧施設)·병원·대상(隊商)숙박소 등은 매우 훌륭하며, 공예면에서는 아름다운 견직물, 융단, 정교한 금속세공, 모자이크용 착색 타일이 있었으며 도기류는 아름답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것들이 많았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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