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아들, 예수
인류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예수의 문제이다. 예수는 완전한 신이였는가 아니면 인간에 불가하였는가? 혹은 반신반인이었는가?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속이는 또한 사람들의 사기꾼에 불과했는가? 그는 여느 아이처럼 평범하게 부모에게서 태어났는가? 태어난 때가 겨울이었나 여름이었나? 이와 같은 많은 질문들이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다같이 제기되었으며 아직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쟁과 의논은 예수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어 오고 있다. 이들 문제의 몇 가지 하찮은 측면들에 대한 해석상의 사소한 차이 때문에 기독교들 사이에 많은 교파가 생겨났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러나 이슬람의 정확한 입장은 무엇인가? 이슬람이 이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논의에 앞서 세 가지 점을 분명히 한다. 첫째,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에 관한 한 무슬림은 아주 태평하다. 무슬림의 마음은 차분하고 양심을 깨끗하며 신념은 건전하다. 둘째, 하나님, 종교, 예언자의 지위, 계시, 인간애에 대한 무슬림의 개념에 의해 무슬림은 예수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출한 사도의 한 분으로서 받아들인다. 여기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무슬림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슬람의 기본 신조이며 무슬림이라면 결코 예수를 비하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행이 무슬림에게는 예수나 하나님의 다른 예언자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는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 셋째, 여기에 언급되는 것은 모두 꾸란이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신념은 비록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인기가 없지만, 결코 예수의 역할을 얕잡거나 그의 인격을 과소평하거나 혹은 그의 위대한 개성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반대로 이슬람이蝡 이러한 신념은 예수를 매우 존경스럽게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앉혀 주신만큼 높은 위치에 그를 앉힌다. 사실, 무슬림이 많은 기독교인들보다 예수를 더 존경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태도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는 무슬림이 확신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확신할 진리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어제의 진리요, 오늘의 진리며 내일의 진리인 것이다.
예수가 태어나서 자라난 환경은 상당히 주목해 볼만하다. 예수가 보내어진 사람들은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취지와 단어의 양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경을 개필, 곡해하였다. (2) 예수를 비롯한 예언자들을 일부는 배척하고 일부는 죽였다. (3) 자기네 부에 대해 무책임하게 함부로 말하였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원치 않는 것을 가진 사도를 보낼 때마다 너희가 교만으로 부풀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어떤 사도는 사기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사도는 죽였도다!(꾸란, 2:87)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하나님은 가난하되, 우리는 부유하도다!'라고 말하는 자들의 조롱하는 소리를 들으셨느니라, 우리가 정녕 저들의 말과 부당하게 예언자들을 살해한 저들의 소행을 기록하여 이같이 말하리라 : 극렬히 타오르는 (지옥)불의 형벌 맛을 봐라!(꾸란, 3:181)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계약을 받아냈더니, 저들이 그 계약을 어겨 우리가 저들을 저주하여 그 마음을 완악게 하였느니라 : 저들은 (제)자리의 말을 바꾸고 저들에게 보낸 계시의 중요부를 잊었느니라(꾸란, 5:13-14)
이것이 예수가 보내어진 사람들이 보인 제 2의 천성이었다. 예수의 탄생 연대에 관하여 기독교인들은 그 정확한 해나 계절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베들레헴의 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예수탄생과 더불어 별이 나타난, 해와 계절은 정확히 모른다'…역사가들이 추산한 가장 빠른 해는 기원 전 11년이고 가장 늦은 해는 기원전 4년이다. …'또한'…탄생한 해는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으나 계절은 12월이 아니라 봄철이었을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미해군 기상대의 Mrs. Simone Daro Gossner, 1960년 12월 23일 자 The Edmonton Journal지 12면 인용)
아무튼 무슬림에 대해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예수가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 종류의 창조가 있었는 바, 각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첫째, 아버지나 어머니의 육체적 개입이나 존재가 없이 창조된 사람으로서 아담이 있었다. 둘째, 어머니나 여자 조상의 육체적 존재 혹은 선재(先在)없이 창조된 사람으로서 이브가 있었다. 이브는 인류의 상징적 혹은 비유적 아버지로 생각할 수 있는 아담이 기대한 사람이었다. 셋째,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상적인 관계를 통하여 창조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호기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네 번째 종류의 창조, 즉 인간 아버지의 육체적 개입이 없는 인간의 창조 가능성을 깊이 생각해 보았음직하다. 이러한 가능성이, 아마 네 번째 종류의 창조를 완성하고 가능한 모든 형태로 하나님의 능력을 예증하기 위해 예수의 창조시에 하나님에 의해 현실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경건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기적의 작용이었으며,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였다. 그 특정시기에 이런 종류의 창조를 선택한 것은 흥미로움과 동시에 이해되는 바가 없지 않다. (당시에는)의술이 그럭저럭 곳에 따라 상당히 대중화되었던 모양이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에서 크게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완고하였다. 새로운 형태의 창조로 당신의 능력을 이런 사람들에게 입증하셨고, 당신의 능력은 무한하며 오직 그 분께 복종하고 그 분을 믿음으로서만 그들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보이셨다. 그 실례가 예수 창조의 생생한 실연(實演)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또한 예수가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행하게 되는, 다소 의학적 성격을 띤 종류의 기적을 예고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수탄생에 대한 이러한 가정적 해석은 꾸란이나 무함맏의 관습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네 가지 유형의 창조와 예수의 탄생이 네 번째이자 최종적인 유형을 이룬다는 귀납적 결론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요 가정이다. 이러한 사건은 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의 권위 혹은 진실성과 하등의 관계도 없다. 네 가진 종류의 창조에 대한 이러한 가정이 타당하든, 않든 그것은 꾸란의 진리와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기적의 뜻이요 일이라는 꾸란이 언명에 대한 무슬림의 믿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아무튼 전체적인 논점은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만약 누가, 인간 아버지의 선재(先在)함이 없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삼으시거나 아버지 행세를 하셨다 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이것이 옳다 할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었던 아담에게는 같은 논리가 더욱 적절하게 들어맞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비유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 특히 지고한 주님에 대한 봉사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뛰어난 창조물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분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아담을 빼버리고, 비유적 해석에서 나머지 인류를 제외시키는 것은 실로 독단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꾸란은 예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오, 무함맏이여) 마리아가 가족의 곁을 물러나 동쪽에 있는 곳으로 가던 때의 이야기를 성서에 할지니라. 마리아가 (가족이 못 보게)장막을 치매 우리가 천사를 보냈더니 저가 마리아 앞에. 완연한 남자 모습으로 나타났느니라. 마리아가 말하되, '내가 당신에게서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피하려 하니 하나님이 두렵다면 다가오지 마오' 하니 천사가 이같이 말했느니라. '그리 말라. 나는 네가 티없이 자랄 아들을 선물로 받게 됨을 알려 주려고 온 네 주의 사자일 뿐이니라.' 마리아가 말하되, '남자가 내게 손댄 일이 없고, 내가 부정한 여자가 아니거늘 어찌 내가 아들을 가지리요?' 하니 천사가 또 이렇게 말했느니라 : '그렇게 되리라' 네 주께서 말씀하시되, 그것은 내게 쉬운 일이요. 우리가 저를 사람들에 대한 징표로, 우리가 보낸 자비로 정하고자 하노라 하였느니라. 이는 그리 정해진 일이라! 그러자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알아듣고 천사와 함께 먼 곳으로 물러갔느니라. 해산 진통이 임하매 마리아가 야자나무 줄기를 잡고 괴로움에 못 이겨 이렇게 소리쳤느니라 : '아!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차라리 죽었더라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잊혀져 버렸더라면!' 그러자 한 음성이 야자나무 아래로부터 이렇게 외쳤느니라, '슬퍼하지 말라! 네 주께서 네 아래에 개울을 마련해 주셨느니라. 그리고 야자나무 줄기를 네 쪽으로 흔들라, 그러면 싱싱하게 익은 대추야자가 네 위에 떨어지리라. 그런 즉 먹고 마시며 (네)눈을 식히라. (평안할 지어다). 그리고 네가 사람을 만나거든 이렇게 말하라.' '내가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단식을 맹세했으니 오늘은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겠나이다.' 마침내 마리아가 아이를 팔에 안고 사람들에게로 데려오매 저들이 말하되, '오, 마리아! 정녕 네가 이런 끔찍한 것을 가져오다니! 오 아론의 자매여! 네 아버지가 악인이 아니었고 네 어머니가 부정한 여인이 아니었거늘!'이라 하였느니라. 마리아가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매 저들이 또 말하되, '요람에 있는 아이에게 어떻게 말을 하란 말이냐?' 하니 아이가 이렇게 말했느니라.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종이니라. 그 분이 나에게 계시를 주셨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복되게 하셨고 내가 어머니에게 친절케 하셨으며 나로 오만해지거나 가련해지지 않게 하셨느니라. 그런 즉 내가 태어났던 날과 죽는 날과 생명으로 (다시)일으켜지게 되는 날에 나에게 평화가 있도다!' 이 사람이 바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였느니라. 이는 진리의 말씀이거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헛되이)다투는 도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는다 함은 그 분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라. 그 분께 영광이 있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결정하실 때, 다만 '되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느니라. 진실로 하나님은 나의 주요, 너희의 주이시니 너희는 그 분을 섬길지니라. 이것이 정로(正路)이니라. (꾸란, 19:16-36, 비교 3:42-64, 4:171-172, 5:17, 72-75, 25:2, 43:57-65)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맡기신 사명은 피의 희생에 의하여 모두를 속죄함으로서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도와 자기 수양에 의해, 침체한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고 굳은 영혼을 부드럽게 함에 의해 구원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참종교를 정립시키고 곡해·오용된 당신의 계시를 바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이들 침체한 정신과 굳어진 영혼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징표를 가져오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자기 사명을 뒷받침하였다. 이 완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보여 주기 위해 '초자연적'이고 비범할 뿐 아니라 논리적이고 영적인 증거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제시되었다. 예수의 사명과 그의 증거의 기적적인 성격에 관하여 꾸란은 이와 같이 말한다 :
보라! 천사들의 말이니라. '오 마리아여! 하나님께서 네게, 당신이 보낸 말씀의 기쁜 소식을 주셨나니 그의 이름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이니라. 그는 현세와 내세에서 존귀함을 누리고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그는 아이로 있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사람들에게 말하며 의로운 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서와 지혜와 율법(토라)과 복음을 가르치시며 그를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도로 정하사 (이 같은 계시를 주시니라) ; '나는 너희 주의 징표를 가지고 너희에게 왔노라. 징표는 이것이니 곧 내가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매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그것이 새가 되며, 날 때부터 눈 먼 자들과 문둥병자들을 고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사 죽은 자를 소생시키며, 너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집에 저장해 두었는지 너희에게 밝혀 말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믿는다면 진실로 그 가운데 너희에 대한 증거(징표)가 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나 이전에 있었던 율법(토라)을 입증하고 너희에게 (전에)금지되었던 것의 일부를 너희에게 허락하기 위함이라. 나는 너희 주의 징표를 가지고 너희에게 왔느니라. 그런 즉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고 나에게 순종할지니라. 하나님은 나의 주요, 너희의 주이시니 그 분을 숭배하라. 이것이 정로(正路)이니라.(꾸란, 3:45-51)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내가 너와 네 어머니에게 내린 은총을 자세히 말해 보라. 보라! 내가 너를 성령으로 강하게 하매 네가 아이로 있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사람들에게 말하였느니라. 보라! 내가 너에게 성서와 지혜와 율법과 복음을 가르쳤느니라. 보라! 네가 나의 허락에 의해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매 그것이 내가 허락하여, 새가 되며, 네가 나의 허락으로 날 때부터 눈 먼 자들과 문둥병자들을 고치느니라, 보라! 네가 나의 허락으로 죽은 자를 되살리느니라. 보라!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분명한 징표를 보일 때 내가 저들이 너에게 폭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였더니 저들 가운데 불신자들이 이렇게 말했느니라.' '이는 분명 마술에 불과하니라' 보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네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비하시켜 너와 너의 어머님을 신으로 숭배하라 말하였느냐?' 저가 이같이 말하리라. '당신에게 영광이 있을 지어다! 저는 저에게 (말할)권리가 없는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나이다. …저는 당신이 말하라고 명하신 것 곧 나의 주요 너희 주이신 하나님을 숭배하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저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저는 저들 가운데 거하는 동안 저들에게 증거하였나이다. 당신이 저를 보호하셨을 때 저들을 지켜보았사오니 당신이 모든 일의 증인이니이다.(꾸란 5:110-117)
여기의 성귀들은 꾸란 전체를 통하여 많이 산재되는 유사한 성귀들을 대표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들 성귀는 모두, 예수가 결코 신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지 않았으며, 그 역시 그보다 앞서 왔던 사람들의 본대로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꾸란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예언자들의 발자취를 좇아 우리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보내어 저보다 앞서 왔던 율법을 확인하였노라. 우리가 저에게 복음을 주어 보내매, 그 가운데 인도와 빛과 저보다 앞서 왔던 율법의 확인이 있었나니, 이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인도하고 훈계하려는 것이라.(꾸란, 5:46)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인 그리스도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신성 모독을 범하는 자들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오 이스라엘 자손들아! 나의 주요 너희 주이신 하나님을 숭배하라. 하나님에게 다른 신을 붙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저에게 낙원을 금하실 것이요 (지옥)불이 저의 거처가 되리라. 행악자들에게는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삼위(三位)의 한 분이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신성 모독을 범하는 것이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신은 없음이라. 저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그치지 않는다면, 신성을 모독하는 저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리라. 저들을 어찌하여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 분의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는가? 하나님은 지극히 관대하시고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시오. 마리아의 아들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사도에 불과하였음이라. 저보다 앞서 간 사도들이 많이 있었느니라. 저의 어머니는 진실한 한 사람의 여인이었으며 이들은 둘 다 매일 음식을 먹어야 했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징표를 저들에게 분명히 하시는가를 보라! 또 저들이 어떻게 미혹되어 진리를 떠났는가를 보라! …이렇게 말하라. '오 성서의 백성들이여' 너희 종교의 (적당한)한계를 넘지 말며 진리를 범치 말라. 지나간 시대에 타락하여 많은 사람을 그릇 인도하고 스스로 평탄한 길에서 벗어난 자들의 헛된 욕심을 좇지 말라.(꾸란, 5:72-75, 비교 4:171-172)
예수의 시작을 놓고 이론이 분분하였다. 그의 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시작에서 최후까지의 사이에 불굴의 의지로 자기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하나님의 성서와 지혜와 분명한 징표와 성령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극히 적었다. 예수는 관대하고 온화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의 위선과 이들이 율법의 정신은 저버리고 문자에만 집착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를 배척, 반대하였고 그를 잔혹하게 죽이려는 음모를 실제 꾸몄다. 예언자들 중 일부는 배척하고 일부는 죽이는 것이 그들 사이의 관례였다. 예수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을 뻔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믿었다. 얘기가 극적인 전개를 보여 그 절정에 달한 것은 바로 이 단계에서였으며, 곡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신성하였던 것처럼 종교적인 애도가 기독교인들에게 신성하게 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음모가 꾸며졌고 실제 십자가형이 집행되었다. 누군가 형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예수는 아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 대신에 다른 누구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적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하나님은 잔혹한 죽음으로부터 예수를 구해내시어 하늘 높이 올리심으로써 지상에서의 그의 사명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예수가 뛰어나서 지위가 높여진 것인지 혹은 영혼과 육체가 살아서 올려졌는지 아니면 자연사한 후에 영혼만 살아서 올려 졌는지의 여부는 이슬람의 신념과 별로 관계가 없다. 그것은 신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슬림에게 있어 중요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바,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고 당시께로 올리워 졌다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꾸란은 예수의 최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성서의 백성들이 하늘에서 자기들에게 책이 내려오게 해보라고 네(무함맏)게 요구하니 진실로 저들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라' 고 하여 더 큰 기적으로 모세에게 요구하였느니라. 저들은 주제넘었는지라., 천둥과 번개로 혼났느니라. 그러나 분명한 징표(증거)가 온 후에도 저들은 송아지를 숭배 하였나니, 그래도 우리는 저들을 용서하고 모세에게 명백하고 권위 있는 증거를 주었느니라. 그리고 (시나이)산 꼭대기를 저들 위로 우뚝 높혀 저들과 계약을 맺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겸손하게 성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하였으며 (다시 한 번)저들에게 명하되, '안식일을 범치 말라'하였느니라. 우리가 저들과 엄숙한 계약을 맺었으나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느니라) 이는 저들이 계약을 어겼고 하나님의 징표를 외면했으며 사도들을 부당하게 살해하였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보자기가 더 이상 필요 없다.'-반대로 하나님께서 저들이 신성 모독을 범하는지라 그 마음을 봉하시매 거의 이해하지 못하니라-고 말하였으며 신앙을 배척하였고 마리아에게 심한 누명을 씌웠으며 조롱하며 자랑하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사도인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노라'하였음이라. 그러나 저들은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아니 하였나니 다만 저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니라. 이와 생각이 다른 자들은, 추측만 할 뿐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잔뜩 의심하나니, 이는 저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음이 분명한 연고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저를 당신께로 올리셨으니 하나님은 능력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분이시라.(꾸란, 4:153-158, 비교 3:52-59)
이슬람은 하나님의 적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교리와 그런 교리를 배척한다. 이러한 배척은 꾸란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위 그리고 피의 희생과 대속에 대한 보다 심한 배척에 근거한다. 이슬람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아담의 원죄는 그가 속죄한 후에 용서받았고, 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속죄할 수 없다. 이것은 피의 희생과 대속의 교리를 용납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교파 중 일부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바칠리드파는 예수는 결코 육체를 갖지 아니하였고 다만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르치온파 복음서(기원 138년 경)는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그는 단지 인간 형체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성 바나바 복음서-비엔나 주립 도서관에 영역판이 있고, 아랍세계에 아랍어 번역판이 있다-는 십자가 위에서의 대체설을 지지한다.
무슬림은 예수의 최후에 관해서는 예수의 시작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전연 거리낄 것이 없다. 무슬림은 예수가 살해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명예와 은총 속에 그를 당신께로 올리셨다고 믿는다. 이 문제 전반에 관한 한 무슬림의 마음은 깨끗하다. 꾸란이 예수에 대한 논쟁을 단번에 매듭지었던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믿음은 많은 불가피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 중 일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독교 교회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와 능력과 지혜에 부합하는가?
2. 죄를 진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의 죄와 악행을 회개케 한다는 것이 하나님-혹은 누구라도 좋다-께서 그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인가?
3. 예수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굴욕적으로 살해당했다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에 조화되는가?
4. 예수가 하나님의 적들에게 쉽게 희생당하도록 방치해 두는 것이 자신의 동맹자들을 수호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인가? 이것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는가? 또한 솔선하여 자신의 말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5. 지극히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원죄 때문에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용서하실 수 없었으며 예수가 자신의 피로 속죄하러 오실 때까지 이들을 불안과 당혹 속에 방치하셨다고 믿는 것이 공정·타당한가?
6. 초기의 그리스·로마·인도·페르시아 등의 이교 교의는 별문제로 하고 십자가형과 피의 희생에 대한 믿음이 (또)어느 종교에 나타나는가?
7. 바커스, 아폴로, 아도니스, 호루스, 기타 처녀가 수태하여 낳은 신들과 같은 허구적인 인물 외에 인류 역사상 필적할 만한 자가 (또)있는가?
8. 예수가 한 것으로 되어 있는 말과, 자신이 세상의 알파요 오메가며 자기의 피로 인류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왔다고 한 바커스의 말을 비교해 보면 새로운 안목이 생기지 않는가? 이러한 말과 그 후에 예수가 했다고 하는 말의 유사성이 문제의 진상을 전체적으로 파헤쳐 보겠다는 새로운 열의를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9. 예수는 로마 당국에 무엇을 거슬렸는가? 그는 설교자로서 로마 당국이 그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이처럼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시민 지지자를 잃어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10. 로마 총독 빌라도의 성품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그는 자기에게 불복하여 로마에 항소한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았는가? 유대에서의 그 통치로 보아 그는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경멸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는 뇌물에 약하지 않았나? 그가 아리마다의 요셉 같이 예수에게 감복한 부자의 뇌물을 받지 않을 이유라도 있는가? 누가의 말에 의하면, 이 요셉이라는 사람은 부자로서 예수에게 대단한 관심이 많았으며 법률 고문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는 평결에 찬성하지 않았다. 회의실에서의 구출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부패한 총독에게 뇌물을 주어서라도 예수를 십자가형으로부터 구해내려고 할 수 없었을까?
11. 실제 몇 명의 사도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제자들이 모두 그 분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마태의 말(마태 복음 26:56)이 사실일 수가 있는가? 이것이 위대한 교사의 이처럼 위대한 제자들이 가지는 성실성과 인격의 기준이란 말인가? 오직 사랑하는 요한만이 현장에 있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얼마동안이나 현장에 있었나? 믿을 만한 사료(The chamber's Encyclopaedia, 1950. 십자가에 관한 논문 참조)에 의하면 사형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데는 보통 며칠씩 걸렸다. 그런데 보통 며칠씩 걸리는 일이 어째서 예수의 경우에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는가? 같이 십자가형을 당하던 다른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는 "죽었는가?" 형 집행의 세 시간 동안 온 땅을 뒤덮은 어두움은 어찌된 일인가?(마태, 27:45, 마가, 15:33, 누가, 23:44) 어둡고 혼란한 그 시간에 십자가 위, 자주색 옷 속에서 바꿔치기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까?
12.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고 온 당시의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얼마나 잘 알고 있었나? 그들은 자기네가 현장에 데려간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는 것을 어느 정도로 확신하였나? 체포하러간 그들이 정말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축제가 벌어져 민중 폭동이 터지지 않을까 두려운 그 때에 그들이 예수를 확인하는데 신경을 쓸 경황이 있었을까?
13. 믿는다는 사람이 (다섯 분의 가장 단호하고 굽힐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도들 중의 한 분이셨던)예수가 사람들의 말처럼, 비난하는 투로 혹은 고작 한다는 게 근심하는 투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말하셨다고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예수처럼 특출한 예언자가 고통스러운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고 그 분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그것을 하나님께 말하거나 고통에 반응하는 자의 모범 혹은 선례로 간주할 수 있는가?
14.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관대하시며 가장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무죄할 뿐 아니라 당신에 대한 봉사와 당신의 대의 명분에 매우 비상하게 헌신한 분에게 이처럼 잔인하고 극히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가하지 않고서는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었을까?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적용인가? 그 분의 정의와 사랑의 반영인가?
당시의 주변 상황, 세속 당국의 행동, 민중의 반응, 하나님의 개념, 인간의 지위, 종교와 생명의 목적-이러한 것들을 연구해 보면 저자가 언급한 것과 유사한 흥미 있는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이 만족스럽게 설명되어야 비로소 믿는 사람은 태평해지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보다 깊이 조사해 보라고 권하는 바이다.
그러나 무슬림에게는 이런 의문들이 결코 생기지 않으며 이 때문에 당혹해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살해된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도 하나님께로 올리어졌다는 주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헌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이후 몇몇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이슬람의 신념과 어긋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는 자기를 구하고 적의 악랄한 음모에 반격을 가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그 분의 명에 따라 은신하였던 것이다. 그 분은 적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욕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책대로 지위가 더욱 높여지고 더욱 영예롭게 되었다.
예수의 위대성과 그 분의 역할을 탁월성은 무슬림에 의하면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하여 냉혹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기독교의 신념으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대중적 믿음이 타당한 것이라면, 죄가 제거되지 않았음으로 예수의 속죄 희생은 무효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훌륭하니 어쩌니 하는 자기네 대의 명분을 세우려다 죽어간 예수처럼 위대한 영웅들은 수없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들은 독일군들, 연합국, 공산주의자들, 국제연합기구의 관리들, 종교적 전사들, 자유의 투사들…가운데서 즉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잔혹한 죽음이 사자를 신격화할 수 있다면 인류에게는 무수한 신들이 있어야 한다. 누구든 이러한 신성을 예수에만 국한시키고 비슷한 상황에서 죽은 다른 영웅들을 제외한다면 독단적인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무슬림은 이런 역설에 직면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예수의 위대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광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맡겨졌고 그 분의 메시지를 가르치라는 사명을 받았으며 개성과 인격을 갖춘 예언자였고 속과 겉이 다 진실하였으며 위선과 신성 모독에 맞서 싸웠고 태어날 때의 시작과 승천할 때의 최후가 특별하였으며, 백성에 대한 징표(증거)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비였다는 사실에서 생긴다고 믿는다. 그 분과 그 분의 동료 예언자들에게 평화가 깃들 지어다.
본 조사의 성격상 그의 사명에 대한 꾸란의 진술을 철저하게 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에 제시한 내용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다. 더 연구 조사하고 싶은 독자는 꾸란 자체를 조사하기 바란다. 참조의 편의를 위해 꾸란의 관련 장절이 실린 표를 다음에 제시한다.
장 절
2 87, 136, 253
3 42-59, 84
4 156-159, 171-172
5 17, 46, 72, 75, 78, 110-118
6 85
9 30-31
19 1-40
23 50
33 7
42 13
43 57-65
57 27
6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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